울산광역시 행정구역 변천사 | |||||||||||||||||||
경상남도 울산군 (慶尙南道 蔚山郡, 1895) 경상남도 언양군 (慶尙南道 彦陽郡, 1895) | → | 경상남도 울산군 (1914) | → | 경상남도 울산시 (蔚山市, 1962) 경상남도 울주군 (蔚州郡, 1962) | → | 경상남도 울산시 (1995) | → | 울산광역시 (蔚山廣域市, 1997) |
1. 선사시대
울주군의 반구대 암각화 및 인근의 천전리 각석[1]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 선사시대에는 고래를 사냥하며 살던 부족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 무렵에는 현재의 울주군 구영리 지역까지 기수역이 생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암각화박물관에 당시의 지형도를 재현해 둔 것이 있는데, 오늘날 삼산동 및 그 위의 중앙동(성남동) 일대는 전부 바다였고, 돋질산은 섬이었으며, 신복로터리 부근은 그 인근 북쪽까지 기수역 강변이 바짝 들어와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울산의 도심 지역 전체, 그리고 그 서쪽의 무거동, 다운동, 그리고 범서읍 저지대의 상당 영역까지 전부 바다였다는 소리이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울산 중구와 남구의 도시 지역은 죄다 바다였다고 보면 된다.그러나 태화강의 활발한 퇴적 작용으로 점차 구영리 부근의 굴화만이 소멸하고 차츰 오늘날의 무거동, 삼호동 강변 민가 일대까지 퇴적물이 쌓였다.[2] 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며 삼산동 지역이 야트막한 바다가 되고 이것이 이후 태화강의 희석 작용으로 습지가 되면서 미나리 생산지가 되었다. 구한말 이후에는 오늘날의 울산항 주변을 중심으로 염전이 발달했다. 그러나 이후 울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습지가 모두 묻히고 하류의 염전 역시 모두 울산항 부지로 변화하였다.
2.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울산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울주군 웅촌면과 양산시 웅상[3] 일대에 걸쳐 존재했던 소국 우시산국(于尸山國)에서 유래되었다. 다만 훈민정음은 물론이요 이두도 정립이 안되던 고대의 향찰식 표기에서는 'ㄹ' 받침을 尸로 나타낸 사례가 여럿 있으므로 고대에도 울뫼(현대 ㄹ 받침이 고대에 r계열ㅇ인지 현재와 비슷한 l계열인지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해 /*ulmoj/, '울모ㅣ' 또는 /*urmor/, 우ㄹ모ㄹ)])로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우시산국은 곧 경주시 일대를 지배하던 신라의 탈해 이사금 때 장군 거도에게 정복당했다. 한편 북구 염포동 일대에는 염해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염해(冉奚)의 해(奚)가 당시 음가로는 '개'에 가깝게 발음이 나 염개[鹽浦]와 비슷하기 때문이다.임관군(臨關郡)은 본래 모화군(毛火郡)이니 성덕왕(聖德王)이 성을 쌓아 일본의 침입을 막았다. 경덕왕(景德王)이 임관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은 경주에 합하였고 영현(領縣)이 둘이다. 동진현(東津縣)은 본래 율포현(栗捕縣)으로 경덕왕이 동진으로 개명하였는데 지금은 울주(蔚州)에 합하였다. 하곡현(河曲縣)은 파사왕(婆娑王) 때에 굴아화촌(屈阿火村)을 취하여 현을 설치하였는데 경덕왕이 하곡으로 개명하였고, 지금(고려 중기)의 울주(蔚州)이다.[4]
울산은 바로 위에 신라의 수도 경주가 있는 덕분에 신라시대부터 수도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반도를 대표하는 국제 무역항으로서 위상을 뽐재던 시기는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이다. 신라의 도읍인 경주는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 있으면서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盆地)로, 교통로의 주요 진출 방향인 서쪽 방면을 단석산맥(斷石山脈)이 가로막고 있어 하천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내륙 하천을 이용하기가 어려웠던 서라벌의 신라왕조는 가까이 위치하면서 천혜의 조건을 가진 울산항을 통해 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 경상도읍지나 대동여지도를 통해 추측하자면 울산만을 통해 배가 들어올 경우, 태화강을 통해 울산 내로 향하고 동천을 통해 경주로 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 때 사포(絲浦, 현 울산항)은 수도 서라벌의 외항 기능을 수행했다. 2006년 반구동 유적지에서 당시 무역항구 유적이 조사되었는데 반구동부터 서라벌까지 마차를 이용해 활발히 물자가 오갔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경주 동남부~울산 북구 지역 단층평지를 따라가는 울산가도는 불국사를 비롯해 통일신라기에 사찰이 집중되고 크게 개발되었는데 이는 울산만으로 상징되는 중국, 서역, 일본과의 무역 성행과 연결된다. 즉 유교, 불교문화와 서역 문물이 들어오는 창구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신라 관련 유적·설화가 은근히 많다. 예를 들면 동구 일산동의 대왕암이 있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각각 생서량군(生西良郡, 울주군 서생면 일대)[5], 우화현(울주군 웅촌면과 양산 웅상), 굴아화현(屈阿火縣, 중심은 현 울주군 범서읍 일대)[6], 율포현(栗浦縣, 현 북구 강동동 일대), 거지화현(居知火縣, 중심은 현 울주군 상북면 일대)이 되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각각 동안군(東安郡), 우풍현(虞風縣), 하곡현(河曲縣), 동진현(東津縣), 헌양현(獻陽縣)으로 개편되었다. 언양권(언양읍, 상북면, 삼남읍, 삼동면)은 임진왜란 직후 몇 년을 제외하고 1914년 부군현 통폐합까지 울산 중심부와 별개 고을로 존속했다.
3. 고려
나말여초시기에 호족인 박윤웅이 지배하다가 930년 10월 1일에 고려에 복속되면서 태조 때 하곡현·동진현·우풍현이 합쳐져[7] 흥려부(興麗府)로 승격, 이후 흥례부(興禮府)가 되었다.[8]그러다가 성종 때 공화현(恭化縣)으로 강등되었다.[9] 이때 주어진 별호가 바로 학성(鶴城)이다.[10]
현종 때 울주가 되었다.[11] 울주 속현으로 헌양현, 동래현(東萊縣, 지금 부산광역시 동래권 지역), 기장현(지금 부산광역시 기장군)이 있었는데 헌양현은 인종 때에 치소를 현 언양읍으로 옮기고 언양현이 되면서 주현으로 승격되고, 동래현 역시 인종 때 이미 주현으로 승격되어 있었고, 기장현은 1304년에 양주(梁州, 현 양산시)에 환속(換續)되었다.
당시 울주에 특수행정구역인 부곡도 있었는데 범서부곡(凡西部曲)과 갑화부곡(甲火部曲)이 있었다. 범서부곡은 옛 하곡현 지역인 현재 울주군 범서읍 일대이며, 갑화부곡은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일부에서는 부산광역시에 속한 기장군의 옛 지명인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과 비슷해 기장군으로 추정하곤 한다.
신라 멸망 후 울산의 중요성은 감소했다. 신라시대까지는 수도권이었고, 수도 경주의 외항으로서 신라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였지만, 고려가 개성을 수도로 하면서 수도의 외항 기능은 벽란도로 옮겨갔다. 일본과의 무역로 또한 초기에는 어느 정도 유지했지만 항해 기술의 발전으로 일본에서 가까운 부산(당시 지명은 동래)으로 점차 옮겨갔다. 이렇게 신라 멸망 후부터 대한민국 제3공화국 때인 1962년까지 천년간 울산은 쇠퇴를 거듭해왔다.
그 이유로는 보안이 취약함을 들 수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신진 성리학자인 관리이던 이첨[12]이 유배 온 울산에서 읍성(邑城)을 축조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작성한 '읍성기(邑城記)'[13]에 따르면 "울주는 1349년(충정왕 2) 이래 왜구가 침입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 마침내 1379년(우왕 5)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지자 백성이 모두 떠나버려 고을이 텅 비고 말았다. 당시 지울주사(현대식으로 울주지사)는 읍성에 좌정(坐定)하지 못하고 인신(印信)을 소지한 채 향리들을 대동하고 이웃 경주에서 집무하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4. 조선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울산 |
이후 태종 때인 1406년에 수령 직함이 지울주군사(知蔚州郡事, 현대식으로 울주군지사)로, 1413년에 울산군으로 개편되었다. 세종 19년(1437년) 1월에 도호부로 승격했다가 동년 8월에 도로 군으로 격하됐다.
태종 17년(1417년) 이래 조선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영성(營城) 소재지였으며, 구한말(1907년) 진위대(육군보병 제3연대 3대대)가 해산할 때까지 경상좌도 지역의 군사기지이자 군사중심지 역할을 수행해왔다[14][15].
세조 5년(1459년)에 경상좌수영을 보안상의 이유로 개운포에 옮겼다. 그리고 성종, 중종때에 다시 옮길것을 논하고 중종때 어느샌가 도로 해운포로 옮겼다.
한편 일본과 가깝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 대마도주가 요청해 개항한 삼포 중 하나인 염포가 울산에 있었지만 다른 두 포구인 제포 또는 내이포(진해)와 부산에 비해서 일본과 거리가 적당히 멀어서 이용률이 가장 낮았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에 의해 일찍이 요새화되어 서생포왜성이 지어졌고, 울산성 전투의 처절했던 전장이기도 하다. 울산성에서 농성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에서 포로들을 엄청나게 끌고 갔는데, 당시 가토의 영지였던 일본 구마모토시에 울산정(蔚山町、ウルサンまち; 우루산마치 / 울산마치, 한국으로 치면 울산동)이라는 행정구역이 1960년대까지 있었고, 현재는 울산마치역[16]이라는 역 이름으로만 남아있는 상태다. 구마모토 측에서 한국의 울산에서 유래한 게 맞다고 밝혔다. 임진왜란 이후 지역민들이 적극적으로 의병 활동을 했다는 게 인정되면서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도호부 승격 때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크게 입어 고을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언양현과 기장현의 북부 지역[17]을 편입했다. 이후 언양현은 1612년에 다시 독립했고 하미면은 기장현 복현 이후에도 울산에 남아있다가 1653년에 복귀되었다. 그러나 울산에서 항의가 들어와 1660년에 다시 울산으로 편입되었다가 1681년에 최종적으로 기장현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1895년 23부제를 실시하면서 동래부 울산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년 후 23부제가 폐지되면서 경상남도 울산군이 되었다.
1906년 경주군 외남면을 편입하여 두북면으로 개칭하였고, 웅상면과 외남면(현 서생면)이 양산군으로 편입되었다.
5. 일제강점기
1910년 두북면을 두동면과 두서면으로 분할하였다. 양산군 외동면이 울산군 외남면으로 환원되었다.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후 울산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울산군과 언양군이 울산군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 울산면이 울산읍으로 승격되고 동면이 방어진면으로 개칭되었다. 1933년 중남면과 삼동면이 합쳐져 삼남면이 되었다. 1937년 방어진면이 방어진읍으로 승격되었다.
6. 6.25 전쟁
울산은 가지산∙신불산∙간월산∙천황산 등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서부 경남의 지리산지역과 더불어 빨치산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울산지역에서의 빨치산 활동은 이미 전쟁 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948년 2∙7구국투쟁을 계기로 남조선로동당이 무장투쟁노선으로 전환했고, 그 결과로 각 지역에 야산대가 생겨났다. 이것이 빨치산 활동의 시초이다. 이들은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국군 내 좌익 군인들이 입산하면서 정규군 못지 않은 화력을 보유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1949년 이승만 정권의 동계 대토벌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울산지역의 경우 서부지구인 상북, 두서, 두동면과 남부지구의 온양면, 그리고 동부지구는 농소면과 강동면 등이 빨치산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울산지역 좌익 무장유격대 중 가장 세력이 크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것이 '남도부(南都富) 부대'였다. 속칭 동부지구 제4지구당으로 불렸던 남도부 부대는 6.25 전부터 경남 동부 빨치산의 최대 거점이었던 신불산에 근거지를 두고 240여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 그들은 신불산을 중심으로 양산군 일부지방과 울주군 서부 5개 면을 주요 활동지구로 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인근의 경주, 청도, 밀양지방으로도 진출해 군경초소를 습격하고, 철도를 파괴하는 등 후방을 교란시켰다.
울산지역에서 활동한 또 다른 무장유격대로는 '김용구(金容九) 부대'가 있었다. 제4지구당 3지대로 불렸고, 온양면 대운산(大雲山)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김용구는 인민군 중장 칭호를 받았다고 하며 인원은 약 80명 정도로 대운산을 중심으로 동래군 일부 지역과 온산, 청량면을 활동지역으로 삼았다. 그 외에도 두서면 전읍리(錢邑里) 아미산에 거점을 둔 '홍길동(洪吉童) 부대'가 있었다. 울산지방에서 활동한 좌익 무장유격대의 총 수는 약 400명에 달했다.
울산에서 빨치산에 대한 적극적인 소탕작전이 전개된 것은 1951년 초부터였다. 작전에 참여한 것은 군과 경찰, 그리고 의용경찰대였다. 울산 각 지역의 경찰지서는 평균 50~120명 정도의 의용경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군과 경찰, 의용경찰대에 의한 빨치산 토벌은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1954년에 가서야 토벌이 완료되었다.
7. 대한민국
1946년에 대현면(일제강점기 말인 1945년 7월에 울산읍에 편입)이 재설치되었다.
1962년 울산시 승격 당시부터 1994년까지 사용한 경상남도 울산시기, 1995년 1월 1일에 울산군(현 울주군)과 통합할 때에 현재 CI로 교체하여 사용하고 있다. |
1962년 울산시 승격 당시 행정구역 상황.
1962년 1월 27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울산 지역 일대를 '울산특정공업지구'로 지정하면서 6월 1일에 울산군 울산읍, 방어진읍, 하상면, 대현면, 범서면 무거리와 다운리, 청량면 두왕리, 농소면 송정리와 화봉리가 울산시로 승격되었으며, 울산군 잔여지역은 울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1월 1일에 울주군 서생면이 동래군에 편입되었다. 울산시는 특정공업지구 지정이라는 특혜로 대한석유공사 울산 정유공장 등의 석유화학단지와 현대자동차공장, 현대울산조선소 등 대단위 공업단지(산업단지)가 들어서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와 함께 현대에 전국에서 네 번째로 항만공사가 설립된 지역으로 항내수면적이 1,100만㎡에 달하는 울산항(울산본항과 울산신항으으로 나뉘며 온산항, 미포항, 장생포항이 항계에 포함된다.) 또한 이 시기에 개항하면서 국내 최대의 공업단지가 조성됨에 따라 항만시설 확충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탄생하게 된 항만법상 1종항, 공업항으로서 그 위상에 걸맞게 1992년부터 국내에서 가장 많은 화물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연안항으로서 가진 기능은 미미한 수준이다.[18]
또한 울산시 승격으로 폐지된 울산읍, 방어진읍, 하상면, 대현면 지역을 관할하는 중앙출장소(옛 울산읍 및 범서면 무거리·다운리, 청량면 두왕리#), 방어진출장소(옛 방어진읍), 병영출장소(옛 하상면 및 농소면 송정리·화봉리), 장생포출장소(옛 대현면)가 설치되었다.
1983년에, 동래군 전역(당시 영역은 현재 기장군에 해당)을 편입한 양산군에서 서생면이 1983년에 울주군으로 환원되었다.
1988년에 동구를 분구할 당시 울산시 행정구역 상황.
1985년 태화강을 경계로 중구(태화강 이북)와 남구(태화강 이남)를 설치하였다. 1988년 방어진출장소가 동구로 승격하였다. 1989년 울주군 삼남면 동부 지역이 삼동면으로 분리, 부활되었다.
1991년 울주군이 울산군으로 명칭을 환원하고, 1995년 울산시와 울산군이 통합되었다. 이 때 울산군 지역은 울주구로 개편되었고, 농소면이 농소읍으로 승격되었다. 1996년 언양면이 언양읍으로, 온산면이 온산읍으로 승격되었다. 보면서도 이상한 점이 있겠지만 당시 울주구는 하위 행정단위에 동이 아닌 읍·면만 두었고[19] 그 읍·면 아래에 리를 두었다. 실제로 당시 주소가 '경상남도 울산시 울주구 농소읍 중산리' 이런 식으로 되어 있었다. 사실 당시 울주구 자체가 추후 울산시의 광역시 승격을 염두에 두고 임시로 편성한 행정구역에 가까웠다.
1997년 7월 15일에 울산광역시로 승격되었다.[20][21] 지방 중심도시 역할을 하지 않는 도시 가운데 광역시로 승격된 것은
1998년 3월에 동구 염포동을 북구에 편입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큰 동네 여러 개를 묶어 광역시로 만들었다고, 수원시나 창원시 등 인구 규모가 비슷한 곳에서 사는 사람 몇몇이 광역시 승격을 주장하기 위해 까고 있다.[25] 실제로 태화강 이남, 태화강 이북, 방어진, 장생포, 범서읍, 온산읍 등 시가지가 분산되어 있는데다, 이를 묶어줄 대중교통수단이 버스 밖에 없다. 2021년에 동해선 광역전철이 개통되었으나 일부만 이어주고 있는 실정이다.
1998년에 동구 염포동을 북구에 편입하였다. 또한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이 각각 울산지방법원, 울산지방검찰청으로 승격되었고 1999년에는 울산지방경찰청이 개청되었다.
2001년에 온양면이 온양읍으로, 범서면이 범서읍으로 승격되었다.
2018년 청량면이 청량읍으로 승격되었다.
2020년 11월 1일에 삼남면이 삼남읍으로 승격되었다.
[1] 보통 둘을 묶어 《울산 반구천 일대 암각화》라고 부른다.[2] 지금도 태풍 등의 이유로 태화강이 크게 범람하면 저지대 도심인 삼산동 일대는 물에 잠기고, 태화강 국가정원은 쓸려온 토사로 흙밭이 되어 버린다. 1년 중 한 번만 쓸려도 퇴적이 엄청난데 수천 년 이상 이게 반복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오늘날의 울산광역시는 바다였던 땅에 쌓인 퇴적물 위에 조성된 도시인 셈이다.[3] 웅상은 1906년까지 웅촌면과 역사를 같이 했다.[4] ⌜삼국사기⌟ 권 34, 지리지 1, 양주 임관군.[5] 여기서 서생(西生)이라는 지명이 나왔다. 사실 한자를 잘 보면 순서만 뒤집었다.[6] 파사 이사금 때 굴아화촌을 취했다는 기록이 있다.[7] 동안군은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어느 순간 울산 소속이 되었다.[8] 이때 현재의 울산광역시 행정구역과 유사해졌다는 이유로 울산광역시민의 날은 10월 1일이 되었다.[9] 성종 16년인 997년에 흥례부라는 명칭이 사용된 기록이 있으므로 그 이후로 추측된다.[10] 나중에 북한 치하에서 김책으로 개명당한 성진시의 도농분리 시절 군명과 똑같다. 이북 5도 체계에서는 아직 남아 있지만.[11] 당시 중심지는 하곡현(범서읍) 지역이었는데 막상 지명은 외곽인 우풍현(웅촌면, 양산 웅상) 지역에서 따왔다. 한자는 관문성(장성) 남쪽이라 만리장성 인근인 하북성 울현(蔚县/蔚縣)의 당시 이름인 울주에서 따온 듯하다.[12]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고려 말에 춘주(春州)(현재의 춘천)에 좌천되었다가 울산에 이배(移配)되었다.[13] 이 기문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울산군 고적조에 「고읍성기(古邑城記)」에 기록되어 있다.[14] 지금도 울산 병영성 유적과 병영동(병영1동, 병영2동)이라는 행정동 이름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15] 당시에 울산 지역의 경제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울산지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병영교회와 울산읍교회(현 울산제일교회) 교회역사기록에도 군 해체와 병영 철수로 인해 빈궁해진 지역주민들을 구휼하며 전도와 자선사업을 펼쳤다는 대목이 나온다.[16] 원래 우루산마치역이라는 이름으로 한글 표기도 '우루산마치'로 되어 있었으나 어원을 고려해 한글 표기를 바꾸었다.[17] 남부는 동래현으로 편입되었고 북부 지역은 울산 편입 이후에 하미면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의 기장군 장안읍, 일광읍, 정관읍.[18] 2002년 동구에 일본 기타큐슈(고쿠라)로 가는 노선을 만들어 국제여객선터미널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2004년에 사업을 철수했다. 이후 2009년 여객선터미널은 전면 해체되었다.[19] 1995년 1월 1일 신설 당시에는 아예 읍도 없이 면만으로 이루어진 구였다. 이후 두 달 후인 1995년 3월 2일 농소면이 읍으로 승격돼 읍을 두게 됐다. 참고로 읍 승격 당시 인구가 3만 8천여명이였다.[20] 보통 광역시 승격 조건이 인구수 100만 이상인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인구 조건에 대한 법적 근거는 없다. 실제로 대전, 광주가 직할시가 될 때와 울산이 광역시가 될 때의 인구는 90만을 넘기기는 했지만 100만을 채운 상태는 아니었다.[21] 참고로 현존하는 오래된 일반구인 부천시 소사구, 오정구 (1988년 1월에 설치된 부천시 남구, 중구 역사를 포함할 경우) 또는 수원시 장안구와 권선구(1988년 7월에 설치)는 울산광역시의 자치구보다 3년 늦은 1988년에 설치되었다.[22] 현재 광역시 승격 가능성이 있는 도시들은 모두 각 지역의 중심도시이다.[23] 울산의 광역시 승격을 위한 정계 인맥 총동원령급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초자치단체 시절인 경상남도 울산시 당시에 서울출장소를 설치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는 최초의 PK 출신 대통령(김영삼)이 집권했을 시기인 데다가 울산이 고향인 최형우가 행정구역 개편 주무부처인 내무부의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24] 울주구를 울주군으로 변경한 이유는 광역시의 구(자치구)에는 읍, 면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25] 도 폐지론자나 거점육성을 주장하는 이가 전국 여론을 주도해야 경우 경기도가 수원을, 경남이 창원을 독립시킬 수 있다. 특히 수원시는 울산 방식으로 화성시(2001년 3월까지 화성군)와 오산시까지 통합하고 광역시가 되면 인구가 220만으로 불어난다. 게다가 울산은 통합 당시 도농복합시였던 반면 수원, 화성, 오산은 이미 거물급이 되어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