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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9 03:55:13

전읍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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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면
전읍리
錢邑里 | Jeoneup-ri
<colbgcolor=#009a44><colcolor=#ffffff> 광역자치단체 울산광역시
기초자치단체 울주군
읍면 두서면
하위 행정구역 2행정리 7반
면적 8.05㎢
인구 484명[1]
인구밀도 60.12명/㎢

錢邑里

1. 개요2. 역사3. 유적지
3.1. 전읍리 고분군3.2. 292-3번지 유적3.3. 315-1번지 유적3.4. 신전마을 유적
4. 자연지명
4.1. 고개/골짜기4.2. 들
5. 주요 시설6. 교통
6.1. 버스

[clearfix]

1. 개요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의 법정리이다. '전읍'은 직역 시 '돈마을'이란 뜻인데, 실제로는 금전이 아닌 '돌다'(回)의 의미를 내포한 지명으로 조선 초기에 이미 물이 굽이져 돌아간다는 의미의 회은촌(回隱村)이라 불렸다.

서쪽은 산지이고 대부분의 주민이 가운데에 거주한다. 이는 다시 북쪽으로부터 양지마을, 대리마을, 신전마을 3개 마을로 나누어진다. 서편 산지에 월부마을과 수정내마을이 따로 있다. 다소 동편으로 반구대로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선이 지나간다. 유촌마을삼거리에서 동편 샛길로 빠지면 미호천변에 유촌마을이 따로 있다.

관내에 두서농공단지와 전읍일반산업단지가 있다. 행정리는 전읍(두서면 16통)과 신전(두서면 17통) 2개소이다.

2. 역사

역사적 인구
<rowcolor=#ffffff> 연도 인구 연 증감
2018년 528명
2021년 508명 -1.3%
2023년 498명 -1.0%
2024년 484명 -2.8%
'전읍' 지명에 대한 일설로 신라 때 돈을 만드는 주전소(鑄錢所)가 있었다는 설이 존재하나 근거가 빈약하다. 존재를 알 수 있는 사료 중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역원조에 회은촌원(回隱村院)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조선시대에는 따로 행정 구역으로 관리되지 않았고 전국 41개 역로(驛路), 즉 주요 교통로 중 하나였던 황산도(黃山道)를 지나다 잠깐 쉬는 길목으로 번성했다. 이를 체계화한 것이 기관차와 철로만 없을 뿐인 (驛) 제도인데, 이 인근 지역에 설치된 것은 잉포역(仍甫驛)이라고 불렀다. 단, 잉포(仍甫)는 차자표기된 것이므로 훈독하여 '너부'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견해가 있다. 또 너부는 인보리와 서하리 지역까지 걸쳐 있는 지명으로, 두서면의 소재지 마을이 인보리에 있는 것을 감안하면 전읍리 지역이 중심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 후기 산업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인 구충당(求忠堂) 이의립(李義立)이 1621년 전읍에서 출생했다. 당시 조선은 유황 생산의 만성적인 부족 문제에 시달렸는데 이는 조세가 어렵고 반란에 쓰일 수 있다는 이유로 국토에 있는 철광과 유황의 채광을 민간에게 허락하지 않은 연유가 컸다. 철강 및 화약에 관련한 기술이 지역 단위에서 실전돼 갔기 때문에 임진왜란병자호란에서 군사적 열세를 겪었으며, 18세기에 들어와서도 여러 실학자들이 "바늘 하나도 못 만드는 조선" 같은 발언을 숱하게 했다. 이의립은 조선에 철과 유황이 풍족한데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현실을 직시해 울산 달천 지역에 철광을 개설하고 무쇠와 유황의 제조법을 다시 발견한 인물이다.

전읍 지역은 정조 시기에 처음으로 별도의 행정구역 지위를 얻어 '전읍리'라고 했다. 1911년에는 전읍동(錢邑洞)으로 나타나고 1914년 법정리로 등록되었다.

6.25 전쟁 전후 활동한 빨치산 부대 중 전읍리 아미산을 거점으로 활동한 '홍길동부대'(혹은 울산부대)가 존재했다. 남도부 및 윤종구 등과 함께 활동한 부대장은 '홍길동'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홍길동부대라고 불렸고 울산의 머슴 출신이란 설이 있다. 군경은 1952년 6월 홍길동부대에 대한 토벌 작전인 아미산작전을 전개했고, 동년 혹은 이듬해 10월 결국 부대장 홍길동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린다.

2018년 기준 인구는 528명이나 2024년 484명으로 총 8.3% 감소했다. 2020년 3월에 17ha를 불태운 산불이 발생하기도 했다.

3. 유적지

3.1. 전읍리 고분군

2003년 울산광역시에서 발간한 《문화유적 분포지도》에 의하면 두서농공단지 건설 도중 다량의 유물이 출토됐다고 전해지나 상세는 불명이다.

3.2. 292-3번지 유적

전읍일반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존재가 확인된 유적지이다. 산업단지 조성 이전에는 수목원이 소재하고 있었다. 분포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 유물포함층과 삼국시대 주거지가 확인되어 발굴조사를 시행했으며,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광범위한 시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울산연구원에서 2008년에 발행한 문화재발굴보고서를 내려받아 조회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주거지의 경우 벽구시설(바닥에 길게 판 도랑 구조) 없이 주혈(기둥을 세우기 위해 바닥에 판 구멍)만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유사한 형태가 인근의 봉계리 유적, 이전리 272번지 유적 등에서도 나타난다. 발굴 보고서에서는 내부 매몰토에서 목탄과 소토층이 확인되는 점으로 미루어 화재가 발생해 주거지가 폐기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주거지의 시기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전반부로 비정된다.

한편 삼국시대 주거지 1기와 굴립주건물지 1기에서는 토기편 수 점과 수키와 1점이 출토됐다. 주거지의 주혈은 13개가 확인되었는데, 가장 깊이가 깊은 것은 75cm에 달했다고 한다. 부엌이 주거공간과 분리되지 않던 삼국시대 이전 주거지답게 부뚜막 시설이 발견되었다. 보고서에서는 이 주거지의 연도를 6세기 중엽~7세기 초로 추정했다.

또 조선시대의 묘 3기가 확인됐는데, 같이 출토된 백자 대접의 특징으로 짐작해 볼 때 17~18세기 사람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3.3. 315-1번지 유적

두서농공단지 인근에 소재한 유적지이다. 본래 경작지로 쓰이던 곳이기에 출토된 유구의 잔존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동기 시대 주거지 5동과 조선시대 묘 7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292-3번지 유적과 마찬가지로 울산연구원이 2008년 발간한 보고서를 내려받아 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주거지의 경우 모두 장방형의 평면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혈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바닥면에 구멍을 파지 않고 기둥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었다. 특히 2호 주거지는 장축이 12m를 넘어가는 대형 주거지로 벽체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유물은 토기류 4점과 석기류 11점이 출토되었고 2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석촉 등 여러 정보로 미루어 볼 때 전기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로 분석된다.

조선시대 묘의 경우 1호 묘와 3호 묘에서 백자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조선 중기, 즉 임진왜란 이전의 백자와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한다.

3.4. 신전마을 유적

청동기시대 주거지 2동, 수혈 1기와 삼국시대 석곽 1기 등이 발견됐다.

4. 자연지명

6개의 마을이 있다.

4.1. 고개/골짜기

4.2.

5. 주요 시설

6. 교통

6.1. 버스



[1] 202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