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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호랑이/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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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경에 촬영된 수컷 호랑이 사진으로 한반도에서 최초로 촬영된 호랑이의 사진
파일:external/www.bucheontimes.com/19322_55295_2132.jpg
한반도 호랑이와 같은 혈통의 극동러시아의 호랑이

1. 개요
1.1. '한국 호랑이'와 '시베리아 호랑이'는 같다
2. 대한민국 문화에서의 위치
2.1. 설화 속에서의 모습
3. 영광과 수난4. 남한에서의 생존?5. 복원 사업6. 산림청의 '자칭' 호랑이 복원

1. 개요

백두산호랑이는 한반도의 거의 전 지역[1]에 살았던 시베리아호랑이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베리아호랑이 자체가 호랑이라는 종의 한 아종으로, 한국호랑이는 별도의 유전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한반도에 서식하는 시베리아호랑이일 뿐이라고 보고 있다. 아종이 되려면 오랫동안 집단간 유전적 교류가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 사막, 히말라야 같은 산맥, 섬처럼 지리적으로 고립되어야 가능하다. 한반도의 두만강, 압록강 상류는 얕은 도랑 수준으로 만주, 연해주 호랑이와 유전적 교류가 가능하고 바닷가 근처 하류조차도 겨울철에는 결빙으로 자유로운 자연 생태 이동로가 되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시베리아호랑이와 한국호랑이는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일부에서 말하는 종으로서 한국호랑이 전체가 멸종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폐기된 학설이다.

아직까지 한반도에 산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나마 백두산에서 야생 개체들이 여전히 서식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참고로 백두산호랑이라는 별칭은 오직 백두산에만 살아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가장 크고 험한 산이 백두산이니만큼 그 산에 사는 호랑이를 한반도에 사는 호랑이들 중 대표격으로 치다 보니 나온 이름인데, 현대에는 백두산에서 가까운 일부 지역으로 서식지가 축소되어 정말로 백두산호랑이에 가까워지긴 했다. 그 외에 설화 속에서는 "금강산호랑이"나 "지리산호랑이"도 제법 명성을 누리고 있다. 또 인왕산이 서울에 있다는 이유로 "인왕산호랑이"도 대단히 유명하다. 과거에는 한국에 사는 호랑이를 조선범이라고도 했고, 북한에선 아직도 조선범이라고 부른다.

에 사는 동물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호랑이들은 산보다는 습지 등 물이 많은 곳 주변을 서식지로 더 선호했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물이 많은 가나 호수 등지에는 식생이 빨리 자라나기 때문에 노루고라니 등 발굽동물의 밀도가 높아 호랑이들이 강가 등지에서 많이 살았던 것이다. 다만 인구가 증가한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지역들이 대부분 농경지나 거주지로 개간되어 사라졌고, 남은 호랑이들이 산속으로 몰리면서 오늘날 잘 알려진 "산에 사는 호랑이"의 모습이 정착된 것이다.[2]

현재 한반도에서 순혈 시베리아호랑이를 보려면 야생에선 불가능하고 서울동물원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가야만 한다. 나머지 동물원에서 시베리아호랑이라고 주장되는 개체들은 뱅골호랑이의 피가 섞인 잡종들이다.

1.1. '한국 호랑이'와 '시베리아 호랑이'는 같다

1950년 이전에는 동북아시아호랑이의 아종을 시베리아호랑이, 만주호랑이, 한국호랑이로 구분했으며, 시베리아호랑이는 연해주와 북만주에, 만주호랑이는 헤이룽장성지린성에, 한국호랑이는 한반도와 랴오닝성에 서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시베리아-만주-한반도에서 서식한 호랑이들 사이에 유전적인 차이가 없다고 밝혀졌으며, 그에 따라 시베리아호랑이에 속하는 단일 아종으로 구분하고 있다. 요컨대 그냥 아무르 호랑이, 시베리아 호랑이, 동북 호랑이, 만주 호랑이, 조선범, 백두산 호랑이, 한국 호랑이 등등 수많은 별칭이 있었을 뿐, 전부 같은 종의 호랑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기록을 보면 많은 수의 호랑이가 북쪽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만주에서 한반도로 많은 수가 남하하는 경우도 있는 등 두 범들의 서식지가 구분되지 않는 양상을 보였다.

다만 같은 아종이라도 환경(지형, 기후, 동물상)에 따라 형태나 생태가 일부 다르게 변했을 수 있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는 만주범과 조선범 사이에 일정한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우선 당시 기록에 따르면 조선범이 만주에 사는 호랑이보다 비교적 몸집이 작았다고 한다. 동시에 조선범은 중국의 만주호랑이(동북호랑이)나 우수리 호랑이에 비해 다소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의 동북아시아 일대의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한국호랑이가 가장 용맹하고 제일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었다. 또 성질 자체도 조선범이 더 사나운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나라산 호랑이의 모피는 그 모질이나 빛깔이 세계 제일이다. 우리나라산 호랑이의 두부(頭部)가 『우수리범』보다 조금 작고, 털가죽의 빛깔 즉 검정줄의 무늬와 불그스름한 바탕이 아주 선명하며 복부는 백설과 같이 희다. 우수리범의 모피는 털이 길고 소강(疎剛)하며 붉은 빛이 연하여 누른색에 가까우며 복부도 백설같지 않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하여 고찰하면 우리나라 호랑이는 백수의 왕으로서 관록이 충분하며 그 모피는 아주 고귀한 것으로 지금은 극히 드물다.
한국야생동물기(수렵비화) 이상오 (1959)[호랑이(虎)_1._습성_및_생태][4]

물론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사는 호랑이들은 유전자가 동일하므로 조선범의 비교적 작은 체격은 조선 후기 산림 파괴로 인한 먹잇감 부족 같은 환경적인 이유로 인한 발육 정도의 차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5] 근대 사냥꾼이 사냥을 하면서 조선범이 만주범에 비해 훨씬 사나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사나움, 용맹함의 차이는 아마도 조선범이 상대적으로 인간과의 충돌이 잦았던 것으로 인한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호랑이가 제일 아름답다는 기술은 미신적인 부분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털가죽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수는 있다. 시베리아 호랑이는 여름과 겨울에 따라 털의 길이나 굵기 등이 달라지는데, 만주와 한반도의 기후에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의 기록에서 우수리범의 털이 더 길고 소강하며 색이 연하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겨울털의 특징이다.[6] 어쨌든 시베리아 호랑이와 백두산 호랑이는 그냥 같은 종이며, 단순히 성장 환경의 차이로 인해 생긴 약간의 덩치나 성격의 차이 등은 다른 종으로 분리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2. 대한민국 문화에서의 위치

호랑이가 서식하는 지역이 으레 그러하듯 대한민국에서도 무기가 발달하기 전까진 호랑이를 공포의 존재로 경외함과 동시에 신적인 존재로도 숭배하였다. 과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던 시절에는 호랑이와 사람들간 접촉이 빈번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한 인명피해도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를 담아 산신령 내지는 산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호랑이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은 각종 소설이나 시, 민화, 전승 등에서 다수 확인할 수 있다. 호랑이를 '난리를 막아주는 장군(금난장군)'이라고 비유하며 호랑이를 그린 부적으로 가내안녕과 대길을 기원하는 등 여러가지 종교적인 풍습도 있었다. 도둑부터 귀신까지 모두 쫓아내는 부적 - 호랑이 부적에 깃든 주술적 힘

한편으로는 맹혹한 거대 포식자라는 점 때문에 주로 지배계층으로 비유하기도 했으며 그에 따라 풍자적이거나 해학적인 모습으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맹수라는 이미지가 많이 희석되어 친숙한 동물 이미지도 많이 박힌 편이다.

구체적인 사례는 호랑이/문화, 호랑이/한국설화 쪽을 참고하자.

2.1. 설화 속에서의 모습

인간을 해치는 짐승이었던 것의 반작용인지 옛날 이야기 속에서는 지나치게 우습게 표현을 당하는 굴욕의 아이콘이다. 천적은 돌 가지고 떡이라고 사기치는 토끼, 곶감, 썩은 동앗줄, 꼬마, 형제라고 사기치는 가짜 인간동생 등이 있으며, 을 좋아한다. 가장 찌질한(…) 이미지는 함정에서 빠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배은망덕한 짓을 하다 토끼가 나그네를 구해준 덕에 다시 함정에 빠진 설화도 있다는 것. 단군 신화에 따르면 과 함께 인간이 되기 위해 100일 동안 동굴 안에서 마늘만 먹기를 자청했지만 호랑이는 포기하고 뛰쳐나갔다고 한다.[7]

수위가 높은 설화로는 여자 음부 보고 도망간 호랑이(Tiger Runs Away at the Sight of a Female Genitalia, 영어책 언급)가 있다. 당시 월경 중이던 막내동서가 발가벗고 호랑이에게 다가가는데, 호랑이가 를 흘리는 막내 동서의 그곳을 보고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다가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8]

수위가 더 높은 설화로는 김현감호가 있는데, 그 설화에 나오는 호랑이는 처녀로 변신 하여 흥륜사에서 김현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그리고 둘은 첫눈에 반해 성관계를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김현감호 참고.

물론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은 사람에게 매일같이 사냥감을 주고 대신 제사를 지내거나 자신이 잡아먹은 청년[9]의 어머니를 대신 봉양하는 등의 훈훈한 에피소드도 있다. 전래동화에서는 '효성스런 호랑이' 라는 제목으로 묘사되었다.

호랑이의 눈썹은 인간으로 변장한 동물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신기한 도구 내지 약으로 이용되었다. 그 예로 어떤 이야기에서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죽으려던 가난한 총각은 호랑이가 준 눈썹 덕에[10] 요리집을 차려서[11] 대박을 내거나[12][13] 어머니의 약재인 호랑이 눈썹을 구하러 온 효자에게 탄복하여 자신의 눈썹을 떼어준 호랑이 얘기 등이 있다. 그 외에도 호랑이 설화는 생각보다 많다. 관심이 있다면 찾아보자. 사실 우리나라엔 유독 호랑이 얘기가 많은데, 호랑이가 애증의 대상이어서 그랬던 듯. 시인 최남선은 '조선은 호담국(虎談國)'이라 한 바 있고, 중국의 대문호 루쉰도 조선사람을 만나면 꼭 '알고 있는 호랑이 이야기를 해 달라'며 졸랐다고.

동화에서의 이미지를 보면 꽤나 골초였던 모양으로,[14] 트라우마에서는 단군신화에서 호랑이처럼 참지 못한 것은 담배의 금단증상 때문이었다는 해석을 선보였다. 물론 한국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로 그리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호랑이 담배 필 적'은 아무리 길어도 400년이 넘지 않는다.

3. 영광과 수난

3.1. 고대

파일:external/www.dailies.kr/1046_671_2036.jpg
신석기 시대~청동기 시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반구대 암각화에 호랑이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 시절에도 공포의 대상이자 사냥감이었다는 이야기다.
君子國在其北,衣冠帶劍,食獸,使二大虎在旁,其人好讓不爭。有薰華草,朝生夕死。一曰在肝榆之尸北。
군자국이 그 북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고, 두 마리의 무늬 호랑이를 부려 곁에 두고 있으며, 그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라는 식물이 있는데, 아침에 나서 저녁에 죽는다. 혹은 간유시의 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 출처
춘추전국시대 중국에서 기록한 고조선에 대한 글에서 무궁화와 함께 호랑이가 등장한다. 당시 수 많은 종류의 동식물이 있었을텐데도 굳이 이 둘을 언급한 걸 보면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듯 하다.

단군신화에서 등장한다. 웅녀가 될 에게 근성에서 밀려 한민족의 시조가 되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호랑이토템으로 숭배하던 부족이 곰을 숭배하는 부족에게 밀려났음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주류는 아니지만 환웅백호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단군설화도 있다.[15]
파일:무용총 수렵도.jpg
파일:d0017203_583c35659818e.png
파일:99E29A3A5C39E56C16.jpg
고구려 무용총에 있는 수렵도 벽화에서 말을 탄 무사들이 활을 겨누며 호랑이를 추격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인들이 호랑이를 용맹한 사냥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각저총 씨름도에서는 단군신화의 영향으로 추정되는 호랑이와 곰 그림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문무왕, 혜공왕, 문성왕, 헌강왕 때 등 여러 차례 호랑이가 경주에서 출몰한 기록이 있다. 왕궁인 경주 월성으로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진덕여왕 때는 남산에 있는 우지암 바위에서 화백회의를 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회의장으로 난입해 알천이 그 호랑이를 잡은 일화가 있다.

신라 직관지를 보면 호랑이나 표범 꼬리 등이 복식으로 쓰인다.

3.2. 고려 시대

고려시대에도 아직 미개간된 수풀과 습지가 많아서 산림이 많고 호랑이가 서식하기에 우호적인 조건이었다. 강감찬이 남경(지금의 서울)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을 때 호환이 심하자 인왕산에서 서식하는 호랑이들을 모두 위협해서 쫓아냈다는 설화가 있다. 고려사에서는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를 잡아 복수한 최루백 설화[16]가 실려있다. 그만큼 호랑이가 번성하고 호환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3.3. 조선 시대

"조선사람들은 1년 중 반은 호상(虎喪) 문상을 다니고, 반은 호랑이 사냥을 다닌다".

"조선의 1년 중 반은 사람이 호랑이를 사냥하러 다니고,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사냥하러 다닌다".

중국 속담 중에서 #

신라 때와 마찬가지로 호랑이가 기록에서 많이 나타난다. 심지어 세조 때는 창덕궁 후원까지 들어온 기록이 있다. 인왕산,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을 타고 들어온 것이다. 1893년 12월 12일 승정원일기에는 경복궁 인근에서 5일에 한 번꼴로 호랑이가 출몰했으며, 1871년 11월 27일에는 창덕궁 인근에서 호랑이가 사살됐다. 게다가 궁궐 후원은 사람이 쉽게 드나들 수 없으면서 나무까지 우거져 있어서 그 안에서 새끼까지 낳아 길렀다고 한다. 또 호랑이 뿐 아니라 표범도 상습적으로 한양 도심에 출몰했고, 이 맹수들의 서식지는 다름아닌 임진왜란 이후 270년 동안 버려졌던 경복궁의 폐허를 중심으로 경희궁, 창덕궁이 재건되기 전까지의 시기까지, 이들 경희궁과 창덕궁의 폐허와 버려진 후원들이었다. 맹수들은 주간에는 궁궐의 폐허나 서울 인근의 산자락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면 한양 시내로 기어들어와 사냥에 나섰다. # # # 17세기 초까지 매년 잡히는 호랑이와 표범의 수가 1,000마리 내외일 정도였다. 그 덕에 "조선은 1년에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잡고 나머지 반은 사람이 호랑이를 잡으러 다닌다."는 말이 중국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호랑이가 사는 서식환경이 점점 달라진다. 인구증가 및 면포 수요의 증가 등으로 인해서 농경지 개간이 늘어난다. 15~16세기에는 강변의 습지가 농토가 되고, 17~19세기에는 고원 평지나 완경사지가 화전의 대상이 되었다. 좁은 한반도에 대량의 호랑이가 서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먹이가 되는 대형 초식동물 밀도가 높아서인데 대표적인 대형 우제류인 백두산 사슴과 대륙 사슴은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행해진 수렵과 개간으로 조선 중기에 이르면 삼수갑산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종이 되었다. 때문에 상술했듯이 살던 곳이 사라지고 먹잇감들이 산 위주에 있으니 호랑이들의 서식지도 자연스럽게 산이 된 것이다. 또한 과거 호랑이가 거처로 삼던 경복궁 폐허나 창덕궁 폐허는 흥선군 집권 후 중건을 통해 복원되면서 자연스레 북악산으로 밀려났다.

국가주도의 체계적인 포효가 불가능했던 고려와 달리 강한 행정망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다진 조선은 백성과 가축을 해치는 호랑이를 외적만큼이나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꾸준히 뿌리 뽑고자 했다. 초기엔 왕이 사냥 형식으로 진행하는 강무에서 주된 사냥감 중 하나였고 공납에 호표피를 포함시키고, 호랑이를 사냥하여 얻은 부산물을 사냥꾼이 가질 수 있게 해주거나 나중에는 수령 인사고과에 호랑이 사냥 실적을 반영해 주는 등 다양한 논의와 노력이 이어졌다. 농업 발전으로 의한 인구 증가와 개간, 200년에 걸친 사냥으로 호랑이 수가 감소하면서 1724년에는 호표피를 진상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

이 때 당시 사냥 풍속을 보면 재미있는데,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아오면 일단 관아로 끌려가서 형식적으로 곤장 3대를 맞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호랑이도 엄연히 산군(山君)인데 괘씸하게 왕을 잡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풀파워로 때리는게 아니라 장난식으로 툭 건드리는 정도이다. 그러고 나서 포상금을 받았다.

조선 초기에는 포효 전문 특수부대 착호갑사가 존재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고을에서는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고을 수령이 장정들을 소집[17]해서 군대를 편성하고 호랑이를 추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호랑이 사냥을 위해서라면 고을 간 경계를 넘어서 군사를 움직여도 처벌받지 않을 정도였고, 인조반정에서 실제로 반정군이 '호랑이 사냥'을 핑계로 군사력을 움직이기도 했다.

사람을 잡아먹은 악호를 사냥할 때는 창, 활, 조총, 벼락틀, 함정 등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가끔 백호라 해서 흰 호랑이가 아니라 100관(=375kg)짜리 왕대범들이 간혹 잡혔다는 기록도 몇 있다.

1900년대 초 영국인 사냥꾼 포드 바클레이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고 뒤이어 화기를 몰수하기 이전에는 호랑이의 사냥이 잦았는데, 인접한 마을들의 활동적인 남성들이 대략 대여섯 명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더 많은 숫자는 창으로 무장해 하루에서 이틀 정도 인접한 야산들로 몰이를 나갔다."고 한다. 구한말 러시아인 사냥꾼들도 조선 일대에서 호랑이를 사냥했는데, "조선의 포수들은 16세기식 구형 화승총으로 호랑이를 잡는다."라는 글을 남겼다. 적어도 구형 조총으로 호랑이를 잡는 것이 심각하게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난이도는 절대로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8]

2018년에는 조선시대 백두산 지역의 민가에서 기르던 호랑이들을 찍은 사진이 경매에 오르기도 했다. #

3.4. 구한말

500년 내내 열심히 잡고,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민간으로 풀리면서 슬슬 씨가 말라가던 호랑이는 1800년대 말에 개항이 이루어지고 외국 문물이 들어오면서 후장식 라이플총이 함께 들어와 마지막 목숨줄이 끊어졌다. 일제가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면서 이국의 맹수인 호랑이에 욕심을 내고, 일본인들이 스포츠로 호랑이를 사냥하는 경우도 늘어난다.[19]

3.5. 일제강점기

파일:external/www.iusm.co.kr/237733_75183_2810.jpg
해수구제사업으로 한반도 호랑이 멸종에 쐐기가 박혔다. 이때 호랑이들을 잡은 기록을 보면 141마리 정도가 공식 집계되었는데 공식 집계에 안 적힌 호랑이까지 생각하면 2배까지도 늘어날 순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남한 지역에서는 1924년 강원도 횡성에서 잡혔다는 기록이 마지막 공식 기록이며[20] 이후에는 북한 지역에서만 잡혔다. 이 시기에 유명했던 호랑이 사냥꾼으로 야마모토 타다사부로가 있다. 야마모토 정호군 참고.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23년 1월 1일 방송분 중 '아주 사(史)적인 리플레이'에서, 한반도 호랑이의 수난사를 다루었다.

다만 1924년 이후로도 남한 지역에서 호환 피해가 꾸준히 보고되었는데 이는 표범이 입힌 피해가 호환으로 보고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호랑이와 표범을 혼동하는 인식이 있었으며[21] 아무르표범은 남한 지역에서도 1970년대까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3.6. 현대

1945년 8.15 해방 시점에서는 이미 잔존한 호랑이가 거의 없었다. 남한 지역에서는 1924년 횡성에서의 마지막 포획 이후 이미 20년 이상 공식적인 호랑이 목격 보고가 없었고 북한 지역에서도 만주와 인접한 평안북도함경도에서만 일부 잔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으로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남아있는 호랑이가 있다고 해도 살기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22] 그런데 야생 호랑이의 활동 반경이 상당히 넓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들은 압록강두만강 너머 만주, 연해주 지역까지 드나들 것이 확실하므로 그 점은 감안해야 한다. 한반도 내에서 서식하던 호랑이는 죽고 그 뒤에 만주에서 유입된 호랑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 일제강점기 당시 사냥꾼들은 "조선범"과 "만주범"을 구분했는데, 만주범이 강을 건너 조선땅으로 들어와서 돌아다니다가 만주로 돌아가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현대에 유전자를 재조사한 결과 조선범, 만주범은 시베리아호랑이와 같은 아종이다.
파일:a1223423432323.jpg
북한에서는 1990년대까지 북부 지역에서 호랑이가 발견되었고 외국 귀빈들이 사냥하게 하거나[23] 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생포해서 선물로 주는 등 외교적인 목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한동안 북한에서도 확실한 생존 증거가 보고되지 않았으나 2023년 12월, 정말 오랜만에 백두산 자연보호구에서 시베리아호랑이가 다시 촬영되었기에 북한에도 소수의 야생 개체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

4. 남한에서의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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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균류 화경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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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더 이상 서식하지 않는 종

남한 지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1918년 강원도 춘천군 가리산에서 수컷 1마리, 1922년 경상북도 경주군 대덕산에서 수컷 1마리, 1924년에 강원도 횡성군에서 1마리가 잡혀 사진이 찍힌 것이 남한 지역에서 잡힌 마지막 호랑이다. 물론 자료와 사진이 남아있는 공식자료에 한해서 이며 신문기사나 증언을 감안하면 강원도 횡성 호랑이가 남한에 살던 마지막 개체는 아니었을 것이고, 이후로도 사냥된 개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료의 미비로 확인할 길이 없을 뿐이다. 마지막 빨치산으로 유명한 정순덕은 빨치산 생활 중이던 1954년에 지리산에서 "누런 몸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를 목격했다고 주장했으나 30년 뒤에 한 증언인데다 실제적인 증거가 전혀 없고, 북한 지역에서는 1946년 평안북도 초산군에서 1마리가 잡혔고, 그 이후에도 가끔 포획되거나 백두산, 개마고원 일대에서 영상이 찍히기는 한다.

1969년 충청북도영동군에서 호랑이가 출몰해 주민들이 공포에 떤다는 신문기사가 나는 등 불과 [age(1969-01-01)]년 전까지도 주변에 호랑이가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으며[24], 일부 나이 드신 분들은 최근까지 가야산이나 봉화군[25] 등에 호랑이가 생존해 있다고 증언했지만 확증이 없는 풍설에 불과하다. 강원특별자치도 주변의 심마니들 사이에서도 목격담 등이 종종 나오고는 있으나 역시 공식적으로 증명할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호랑이가 아직 있다고 생각하고 찾으러 다니는 동물학자들이 있기는 한데, 간혹 산속에서 호랑이 배설물이나 발자국 같은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나 아무르표범의 발자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 이상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호랑이 생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증거로 제시하는 사례로 1989년에 비무장지대에서 활동 중이던 주한미군이 레이더 촬영을 통해 야생 호랑이를 포착하여 지역 근무자들에게 "호랑이를 조심할 것"이라고 당부한 사실과 2000년, 러시아 전문가가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과 구룡령 계곡에서 호랑이의 생존 가능성을 확인한 뒤[26] 그 해 5월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에 이에 대한 내용을 소개했다는 일화 등이 제시한다. 여기에 강원특별자치도의 깊은 산골은 인적도 드물고 대형 고양잇과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현재까지 꾸준히 나오는 곳이므로 생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순 없다는 것이다.

다만 호랑이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쪽은 호랑이가 야생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영역과 먹이의 양을 생각하면 이제까지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목격 사례나 호환 사례, 사진이 없을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크게 양보해서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까지 생존한 호랑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번식을 통한 개체군 유지가 불가능한 단독 개체였을 공산이 크고 2020년대가 된 현재는 그나마도 늙었을 것이다.

환경부가 호랑이를 '멸종'이 아닌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으로 분류하고 있는 상황을 호랑이 잔존이나 잔존설을 증거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한국호랑이와 유전자가 일치하는 시베리아호랑이를 국내 동물원에서 사육, 증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표범, 늑대, 스라소니 등의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지정 사유 또한 동일하다.(기사1, 기사2)

일단 현재까지도 백두산호랑이에 대한 영상이 올라오면 댓글에서 생존설을 지지하는 쪽과 부정하는 쪽의 키보드 배틀이 일어나고 있다.

5. 복원 사업

국내의 호랑이 보호 단체로서 호랑이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진행해 온 사단법인 한국호랑이 보전기금의 한반도 호랑이 복원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은 "현재 남한에서 야생 호랑이를 복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이다. 범보전기금이 추구하는 한반도 야생 호랑이 복원은 사육 개체의 방생 등을 통한 인위적인 복원이 아닌 현재 러시아 연해주에 서식하는 야생 호랑이의 개체수를 안정적으로 늘려 자연스럽게 호랑이들의 서식지가 러시아와 중국에 접경한 한반도 북부까지 확장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러시아-중국-한반도의 생태계를 잇는 동북아 생태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호랑이는 1,000km(서울 - 부산간 거리 425km)까지 이동하며 러시아 야생동물 보호협회에 따르자면 수컷 호랑이는 약 1,385km²의 영역을 필요로 하고 암컷은 성공적으로 새끼들을 길러내기 위해서 약 250-450km²의 영역을 필요로 한다. 한국의 평균적인 1개 시군 면적을 500km²로 보면, 암컷 1마리 영역이 1개군 전체 면적과 맞먹으며, 수컷의 경우는 서울시 면적의 2배가 필요하다. 다만 호랑이의 영역 넓이는 먹이인 초식동물의 서식 밀도에 따라 형성되므로, 꼭 시베리아 기준[27]을 그대로 한반도에 적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너그럽게 계산해도 현재 한반도에 서식하는 초식동물의 밀도가 야생에서 존속 가능한 규모의 호랑이 개체군을 유지할 정도가 아님은 분명하다[28].

정부나 단체에서 말하는 소위 복원이라는 게 서울동물원에서 성공한 동물원에서의 번식이 아닌 생태 복원이라면 사회 통념상 절대 불가능하다. 지리산 일대에 이미 복원되어 서식중인 아시아흑곰조차 사람을 가볍게 찢어죽일 정도로 위험한 맹수인데 그보다 더 강력하고 위험한 시베리아호랑이가 풀려나서 복원된다면 그 후엔 말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진행하든 호랑이 복원 비슷한 이름의 프로젝트들은 높은 확률로 애국 마케팅을 빙자한 세금 낭비다.

6. 산림청의 '자칭' 호랑이 복원

호랑이의 연이은 죽음, 산림청 20년 졸속행정의 역사

산림청에서는 호랑이 복원을 명분으로 국립시설인 백두대간수목원을 건립했다. 해당 시설에서 호랑이들을 사육·전시 중에 있으나, 산림청의 이러한 행동은 그저 동물원 그 이상, 이하도 아닐 뿐으로, 호랑이 복원에 있어서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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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우)와 천지(좌)

산림청은 한반도 호랑이 복원을 명분으로 하여 중국으로부터 1994년 6월 9일 국교수립기념으로 수컷 '백두'와 암컷 '천지'를 들여왔다. 산림청은 자신들이 들여온 호랑이들이 당시 국내 동물원에서 전시하던 시베리아호랑이와는 다르게 중국에서 들여온 백두산호랑이라며 생물학적으로 엄연히 같은 종인 백두산호랑이와 시베리아호랑이를 다른 종으로 오해할 혼란의 여지가 있는 표기를 사용했으며, 산림청의 이러한 백두산호랑이라는 표기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중이다.

산림청은 호랑이들을 수용할 시설을 채 건설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백두와 천지를 기증받아 그 사육을 서울동물원에 맡겼다가 12월 광릉 수목원으로 옮겨 수용했지만 짧은 기간에 급격하게 사육환경이 두 차례 바뀌면서 환경변화에 예민한 동물인 호랑이였던 백두와 천지에게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이 발생했는데, 특히 백두는 다발성 위궤양을 앓아 반입 당시 160kg이었던 체중이 90kg으로 떨어지기까지 했지만 광릉 수목원에는 제대로 된 수의인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서울동물원, 에버랜드 등 외부 동물원 수의사들의 왕진 진료를 받다 백두의 상태에 개탄해 개인동물병원을 운영하다 자진하여 광릉수목원의 사육사로 입사한 수의사의 2년에 걸친 지속적인 치료로 1997년에 비로소 건강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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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좌)과 압록(우)

백두가 건강을 회복한 뒤에는 번식을 위해 천지와 지속적으로 합사되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번식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백두와 천지가 15살이 되어 번식을 기대하기 어려운 나이가 된 2005년, 산림청은 새로운 호랑이 반입 계획을 세워 2005년 11월 16일 한·중 산림협력회의를 통해 다시 중국에서 수컷 '두만[29]'과 암컷 '압록'을 들여와 광릉수목원에 수용했지만 2006년 3월 29일에 압록은 돌연 폐사했다. 압록의 사인은 세균성 신장염으로,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부검팀의 부검 소견에 따르면 이송과 환경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 및 연이은 합사와 교미로 인한 세균 감염이 원인으로 추정되었다. 이처럼 산림청에서는 호랑이들의 번식을 독촉했으면서도 국내에는 알맞은 혈통이 없다는 등 중국 혈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자신들의 호랑이를 국내의 타 호랑이들과는 합사하지 않았지만, 산림청이 중국에서 들여온 호랑이들부터가 국제적으로 순혈 시베리아호랑이임을 인정받지 못한 개체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산림청의 행동은 무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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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좌)과 금송(우)

백두와 천지는 끝내 번식하지 못한채 각각 2011년과 2010년에 폐사했다. 산림청은 다시 호랑이 반입을 계획해 2011년 10월 26일 중국 동북호림원 출신의 수컷 '금강'과 암컷 '금송'을 들여왔으나, 앞서 서울동물원 측에서 두만을 2009년부터 1년 간 임대 사육하면서도 두만의 혈통 등재 여부에 '등재 불가'라고 기재하는 등 중국 혈통의 호랑이들은 순혈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것이 국내에 확실히 공인되었음에도 금강과 금송의 반입에 대해 백두산호랑이의 귀환이라며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국내 호랑이들과의 차별성을 꾀했지만 오히려 산림청의 금강, 금송 반입보다 앞선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으로 2011년 6월 24일 한국에 기증된 야생 시베리아호랑이를 조부모로 두고 있는 실제 순혈 시베리아호랑이인 수컷 '로스토프'와 암컷 '펜자'가 서울동물원에서 사육되고 있었기 때문에 산림청의 이러한 홍보 또한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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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과 금송의 딸 미호

산림청의 실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 1994년 백두와 천지의 반입 때부터 사육시설을 여러 차례 옮겨 호랑이들의 건강을 악화시켰던 전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강과 금송을 당시 2014년 완공 예정이었던 백두대간수목원에 사육할 것을 표명하며 둘의 사육을 대전오월드에 위탁했다. 대전오월드의 임시 우리에 금강과 금송을 수용하면서도 둘의 번식을 추구해 금강과 금송을 합사하여 번식을 유도했고, 2012년 6월 27일 금강과 금송 사이에서 딸 '미호'가 태어났지만 미호를 낳은 금송은 출산자궁 패혈증위궤양을 앓다가 2015년 7월에 폐사했다. 산림청은 어미 금송의 사망으로 산림청 소유의 유일한 암컷 개체가 된 딸 미호의 번식을 추구하여 2015년에 미호의 첫 교미가 이루어졌지만 미호가 아비인 금강과 자주 합사되어 있었던 정황상 아비인 금강과의 근친 교배가 의심되었고, 질병으로 폐사한 어미 금송처럼 미호도 질병으로 가슴 종양을 앓아 9차례에 걸쳐 수술을 진행했지만 2016년 9월경 미호도 폐사했다.

금송, 미호의 폐사 이후에야 금강과 금송의 사육 시설로 예정되어 있던 백두대간수목원이 완공되어 2017년 1월 25일 광릉수목원에 수용되어 있던 두만과 대전오월드에 수용되어 있던 금강이 이송되었으나 이송된지 얼마되지 않은 2017년 2월 3일에 먹이를 거부하던 금강은 돌연 입에서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었는데, 부검 결과 사인은 만성 신부전증으로서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이었으나 이송과 환경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가 가중되어 사망한 것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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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좌)와 한청(우)

금강의 사망 이후 산림청 보유 호랑이는 2005년에 들여온 나이 든 수컷 두만밖에 남지 않자 산림청은 서울동물원의 시베리아호랑이를 들여오는 것을 추진해 서울동물원에서 수컷 '우리'와 암컷 '한청'을 들여와 백두대간수목원에 전시하는 것으로 백두대간수목원 전시 호랑이를 확보했으나 우리와 한청 등을 비롯한 서울동물원의 시베리아호랑이들 대다수는 근친교배로 태어난 개체들인 동시에 조상 개체인 STB 2538 '호돌'이 북미권 시베리아호랑이 혈통대장에서 교잡된 개체로 명시된 교잡 개체들이었고, 특히 수컷인 우리는 앞선 혈통 문제로 중성화 수술을 받은 개체이며 한청은 13세인 고령의 개체이다.

2020년 12월 20일 두만이 만 19세로 폐사했다.

이처럼 산림청의 호랑이 복원은 호랑이 종보전에조차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한 단순 호랑이 전시에 그치고 있을 뿐이며, 범보전기금 측도 제한된 우리에서의 방사가 아닌 야생 호랑이 복원의 필요성을 말하며 백두대간수목원을 언급하고, 범보전기금의 대표인 서울대학교 이항 교수도 산림청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자연에서 호랑이가 살기 위해 필요한 면적의 24,000분의 1에 불과한 곳에 가둬놓고 백두산 호랑이를 복원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중국 동북호림원의 혈통 기록은 학계의 공개적 검증을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기고하는 등 산림청이 주장하는 호랑이 복원은 언론보도와는 다르게 사실상 자칭에 그친 수준이다.


[1] 그 수가 매우 줄어든 20세기에도 한반도 동남부의 경주와 서남부의 목포에서 호랑이가 잡힌 사례가 있다. 하지만 제주도에는 호랑이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애초에 제주도에는 멧돼지를 제외하면 맹수들이 살지 않았다.[2] 물론 현대의 호랑이들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 분포하는 수마트라호랑이처럼 산림지대에서 서식하는 종들도 있다.[호랑이(虎)_1._습성_및_생태] https://blog.naver.com/gaia1989/220810468440[4] 참고로 이상오가 이 책을 집필할 때 한국호랑이는 이미 멸종된 상태였다.[5] 거기다 당시 만주청나라의 만주 공동화 정책으로 상대적으로 더욱 동물이 살기 좋은 환경이기도 했다.[6] 물론 한반도 남부에 사는 호랑이 역시 추운 겨울에는 겨울털이 났을 것이며, 만주범도 더운 여름에는 여름털이 났을 것이다. 다만 여름털이나 겨울털이 유지되는 기간이나 정도가 지역에 따라 평균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수는 있다.[7]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숭배 부족이 호랑이 숭배 부족과 싸워 이겼다고 해석한다. 다만 오늘날에는 그렇게 설득력이 높진 않고, 이런 해석도 할 수 있다 정도다.[8] 이 부분은 워낙 충격적이라 유머화(만화 버전)되었다.[9] 물론 이것도 여러 바리에이션이 있는데, 청년이 얼떨결에 자기 형이 어릴 적에 집을 뛰쳐나갔는데 호랑이가 되었다고 둘러대는 버전이나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뻔한 청년이 호랑이를 형님으로 모시며 팔자에도 없던 형 노릇을 하는 등(호랑이 형님)이 있다.[10] 깊은 산에 집채만한 호랑이가 사는데, 그냥 지나가다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일이 부지기수라 지나기 위해서는 100명의 사람이 모여 함께 지나가야 하는 산이다. 총각이 다짜고짜 산 위에 올라갔는데 잡아먹지 않은 이유는, 총각이 진정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호랑이는 가짜 인간(인간의 탈을 쓴 동물)만 잡아먹는데, 100명의 사람이 함께 산을 횡단하면 그 중 한두 명은 진짜 인간이었기에 호랑이가 잡아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명의 사람이 같이 지나야만 하는 산 이야기는 육십령고개 설화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11] 호랑이 눈썹 덕에 인간으로 변장한 동물의 본 모습을 알고 그 동물의 입맛에 맞게 요리를 내는 것.[12] 또는 가난하거나 혼사를 여러 번 망친 사내가 호랑이에게 죽으려다가, 호랑이가 준 눈썹 덕분에 바가지를 긁는 아내가 돼지가 변신한 것이거나 혼사가 파토난 전 신부들이 동물임을 알아보고, 호랑이가 주선해주어 또다른 진정한 인간인 과부와 살림을 차려서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류의 이야기 중에는 본래 이었던 가족을 호랑이가 싸그리 죽여버린 뒤 진짜 인간과 삶을 다시 시작하도록 주선하기도 한다.[13] 일본에서는 동일한 설화에 호랑이 대신 늑대가 등장하기도 한다.[14] 일단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필 적에'부터…[15] 숙종(조선) 때 승려인 설암(雪巖) 묘향산지(妙香山誌)에서 나오는 기록이다.[16] 자신의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잡은 다음에 그 호랑이를 해부하여 냇가에 묻었고 장례를 치르고 나서 호랑이 고기를 먹으면서 복수했다. 이 설화는 삼강행실도에 실려있으며 현대에서도 전설의 고향을 통해 드라마화 되기도 했다.[17] 조선시대 지방 수령은 자기 관할구역 내에서 행정권, 징세권, 재판권, 군사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18] 구식 화승총도 탄의 운동에너지는 상당히 크다. 실제로 머스켓탄도 운동에너지만큼은 현대의 돌격소총 탄과 맞먹는다. 호랑이 같은 맹수도 몇 발 맞추면 충분히 죽일 수 있다.[19] 당시는 물론이고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일본에서는 야생 호랑이가 살지 않았다.[20] 이전에는 1921년에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가 마지막 호랑이 인걸로 알려졌으나 1924년 2월 1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횡성 호랑이 사진이 공개되며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 타이틀은 횡성 호랑이에게 넘어갔다.[21] 조선시대부터 20세기 후반까지도 민간에서는 표범=암호랑이 라는 인식이 많았으며 지금도 까치와 호랑이 그림에서 표범이 그려진 그림도 호랑이라 설명하는 것에서 그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22] 한국범보전기금에 따르면 현재 백두산에는 호랑이가 서식하지 않으며 백두산에서는 자취를 감춘지 30년이 지났다. 이는 표범도 마찬가지.[23] 다만 때맞춰 호랑이가 나타나주는 게 아니다 보니, 손님이 호랑이 사냥이 하고 싶다고 하면 평양동물원의 호랑이를 마취시켜서 갖다 놓고 쏘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24] 단 이것은 표범과 착각했을 수 있다. 한국 표범은 해방 후에도 남한에서 발견된 사례가 있기 때문. 조선시대에도 표범과 범은 구분하지 못하거나 한통속 취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25]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들어서기도 전 한참 옛날부터 나오던 이야기다.[26] 해당 생존 가능성은 1998년에 화천에서 발견된 호랑이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에서 나온 것에서 시작했고 그 후 외국의 동물학자들이 다녀갔고 CNN외신에서도 이에 대해 다루기도 했다.[27] 초식동물 서식밀도가 낮아서 호랑이가 그만큼 멀리까지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28] 다만 한반도의 경우 인위적으로 조절해서 나온 결과로 고라니나 멧돼지 수렵을 제한하고 사슴을 방사한다면 반전될 수 있다.[29] 2001년 5월 16일 생. 2017년 백두대간수목원으로 이주하여 지내다가 2020년 12월 20일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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