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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제9대 국왕 벌휴 이사금 | 伐休 尼師今 | |||
출생 (음력) | 연대 미상 | ||
사로국 서라벌 | |||
사망 (음력) | 196년 4월 | ||
사로국 서라벌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음력) | 신라 제9대 국왕 | ||
184년 3월 ~ 196년 4월 (12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 경주 석씨 | |
휘 | 벌휴(伐休) | ||
부모 | 부친 석구추 모친 지진내례부인 | ||
왕후 | 석골정의 모후 | ||
자녀 | 태자 석골정(昔骨正) 왕자 석이매(昔伊買) | ||
태손 | 석조분[1] | ||
왕호 | 벌휴 이사금(伐休 尼師今) | ||
발휘 이사금(發暉 尼師今) | |||
별호 | 성인(聖人) | }}}}}}}}} |
1. 개요
신라의 제9대이자, 석탈해 이후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석씨 왕조의 2번째 군주. 칭호는 이사금.《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탈해 이사금의 손자다. 아버지는 탈해 이사금(제4대)의 아들 각간 구추(仇鄒)고 어머니는 김씨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박씨 마지막 임금인 아달라 이사금(제8대)에게 아들이 없어 그가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신덕왕(제53대)을 보고 교차검증하면 아달라 이사금은 신덕왕 박경휘의 조상이 되는 후손이 있던 걸로 보이기 때문에 적자가 없었다는 뜻이고 서자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벌휴 이사금은 모친이 김씨 족단 소속인 걸로 보아 즉위 과정에서 김씨 족단의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이 벌휴 이사금의 왕비가 누구였는지 또한 신라사 초기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지만, 그에게 아들이 둘 있었던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 장남 골정의 아들들이 조분 이사금(제11대)과 첨해 이사금(제12대)이며, 차남 이매의 아들이 내해 이사금(제10대)이었다.[2]
2. 생애
벌휴 이사금(伐休尼師今)[또는 발휘(發暉)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석(昔)씨로 탈해왕(脫解王)의 아들인 각간 구추(仇鄒)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로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죽고 아들이 없었기에[3]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웠다. 임금은 바람과 구름을 보고 점을 쳐서 홍수와 가뭄, 그리고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았으며, 또한 사람됨이 사악한지 정직한지를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 일컬었다.2년(서기 185) 봄 정월, 몸소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군주(軍主)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3년(서기 186) 봄 정월, 주와 군을 두루 돌며 풍속을 살펴보았다. 여름 5월, 그믐 임진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남신현(南新縣)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4년(서기 187) 봄 3월, 주와 군에 명령을 내려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농사지을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하였다. 겨울 10월, 북쪽 지방에 눈이 많이 내려 한 길이나 쌓였다.
5년(서기 188) 봄 2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해왔다. 파진찬 구도를 시켜 병사를 내어 막게 하였다.
6년(서기 189) 가을 7월, 구도가 백제와 구양(狗壤)에서 싸웠다. 승리하여 5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7년(서기 190) 가을 8월,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또 진군하여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굳센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니 백제의 병사가 거짓으로 달아났다. 구도가 뒤쫓아 갔다가 와산(蛙山)에 이르러 백제에게 패하였다. 임금은 구도가 실수하였다 하여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시키고 설지(薛支)를 좌군주(左軍主)로 삼았다.
8년(서기 191) 가을 9월, 치우기(蚩尤旗, 혜성의 이름)가 각(角), 항(亢)에 나타났다.
9년(서기 192) 봄 정월, 국량(國良)을 아찬으로 삼고 술명(述明)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3월, 서울에 눈이 내려 석 자나 쌓였다. 여름 5월, 홍수가 나서 10여 곳의 산이 무너졌다.
10년(서기 193) 봄 정월, 초하루 갑인에 일식이 있었다. 3월, 한기부(韓祇部)의 여자가 한 번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다. 6월, 왜인이 크게 굶주려, 식량을 구하러 온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11년(서기 194) 여름 6월, 그믐 을사에 일식이 있었다.
13년(서기 196) 봄 2월, 궁실을 다시 수리하였다. 3월,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궁궐 남쪽의 커다란 나무에 벼락이 쳤다. 또 금성의 동문에 벼락이 쳤다. 임금이 돌아가셨다.
3. 연대 문제
사서에 따르면 벌휴 이사금은 탈해 이사금의 손자인데 《삼국사기》 기록을 적힌 대로 믿는다면 탈해 이사금이 서기 80년에 사망했고, 벌휴 이사금은 184년에 즉위했으니 104년 차이가 나는데 당연히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일단 이 부분은 신라사같은 경우, 고고학적 연대와 《삼국사기》 연대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건 김씨 왕실이 확립되는 내물 마립간(제17대)때부터로 여겨지며, 이 부분을 근거로 《삼국사기》 서술 전체를 불신했던 일본 학자들의 식민사관적 분석은 현재 와선 적어도 가계도와 기사 자체는 교차검증되는 것으로 판단되어 논파된 지 오래이다. 고고학계에서는 신라는 2세기 후반 건국되었고 혁거세 거서간의 손자인 유리 이사금이 3세기 초반에 즉위한 것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벌휴 이사금은 적어도 기년은 의문시되지만 실제로 탈해 이사금의 손자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탈해가 신화적 인물이라는 성격이 있으니 석씨 집단의 실질적 시조가 벌휴 아니냐는 설은 지금 와선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져 있다. 탈해 이사금과 유리 이사금(제3대)과의 일화 및 3세기 중후반부터 융성해져서 아예 사로국과의 문화적, 경제적 차이가 두드러지는 수로왕 금관국과의 대립은 고고학적 증거로도 강력하게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상 신라의 초기 기년이 신뢰할 수 없음을 국내 학계에서 고고학적 성과로 다시 확인하기 전에는, 한때 벌휴의 왕위 계승성을 높이기 위해 실제로는 누군가의 몇 대 손인 자가 누구의 아들이네 손자네 하는 식으로 계보 자체를 몇 단계 올렸다는 추측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그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불가하다.[4] 게다가 신라는 그 말기까지도 혈통에 대한 신성성이 컸는데 함부로 《족보》를 조작하거나 사칭한다면, 아예 재위 자체를 할 수 없었다. 그 왕건과 견훤마저도 함부로 대놓고 고구려 고씨 왕실 및 백제 부여씨 왕실과의 연관성을 주장하진 못했다.[5]
벌휴 이사금이 즉위한 해가 혁거세 거서간과 똑같이 갑자(甲子)년인 것도 이 부분에서 놓칠 수 없는 단서다. 하필 육십갑자 중 첫 번째로 연대를 끼워 맞추었다는 의혹을 받기 딱 좋은데 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라 측의 기년 수정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신라는 기년 인상하는 와중에도 계보는 삼국 중에서 제일 정확하게 기록해놓은 덕분에 기록에 공백이 많은 백제보다 세대를 통해 실제 기년을 추적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6][7]
이런 문제가 생긴 이유는 근본적으로 신라에서 중앙집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성씨 도입, 사서 편찬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게 진흥왕~진평왕 대에 가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연대 차이가 수백 년이나 나는 이상 구전만으로 의지하던 전승이 왜곡되거나 일부 실전(失傳)되는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이 악명 높지만 백제와 신라도 기년 조작을 했기 때문에 때때로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 연대가 백제, 신라보다 더 정확한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석우로는 일본서기의 우류조부리지간과 동일인물로 추정되는데, 이주갑인상을 사용하면 4세기 초반(200 → 320년)에 사망했고 우로의 아들 흘해 이사금은 310~356년에 즉위한 것으로 나온다. 신라의 기년 조작이 정상화되기 시작하는 건 흘해 바로 다음 대인 내물 마립간대부터고[8] 흘해가 우로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사실로 보기 때문에 우로는 실제로 4세기 초반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족보에 따르면 흘해는 탈해-구추-벌휴-골정-골정의 딸-아이혜부인-명원부인-흘해로 벌휴의 5대손인데, 흘해를 320년생이라 가정할 경우 5대조인 벌휴는 약 210~220년대생이 된다.
고고학적으로 금관국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 세력의 수로왕계 중심으로 편성되고 석씨 족단이 사로국에서 비중을 드러내는 시기가 3세기 중후반에 가서인데, 묘역과 유물의 특성상 실제로는 3세기 초중반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흘해의 족보를 통한 역산이 벌휴의 세대와 겹치는 데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가문에서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을 정도인 김해 시절 석씨 족단과 대성동 고분군 세력간의 싸움이 하루아침에 일어났을 리 없다는 점을 들어 탈해가 동해 타고 김해로 내려간 건 맞지만 실제로 김해에서 쫓겨나 사로국에 이주한 것은 벌휴의 대가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이 경우 아효부인과 실제 혼인한 것은 아내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벌휴가 된다. 흘해의 나이를 통해 생년을 역산하면 당시 벌휴가 꽤 젊기 때문에 혼인만 벌휴가 했고 이때까지 조부인 탈해가 노령으로 살아있어서 석씨 족단의 대표 노릇을 했을 수도 있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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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 ||一年春三月 벌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다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사면하다
二年春二月 소문국을 정벌하다
三年春一月 주·군을 순행하다
三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三年秋七月 상서로운 벼 이삭을 바치다
四年春三月 토목 공사로 하여 농사의 시기를 뺏는 일이 없도록 하다
四年冬十月 북쪽 지방에 큰 눈이 오다
五年春二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해 오자 구도에게 막도록 하다
六年秋七月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이기다
七年秋八月 구도를 부곡성주로 좌천시키다
八年秋九月 치우기가 각성과 항성에 나타나다
九年春一月 국량을 아찬으로 삼고 술명을 일길찬으로 삼다
九年春三月 서울에 큰 눈이 오다
九年夏五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十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年春三月 한기부의 여자가 한 번에 4남 1녀를 낳다
十年夏六月 왜인이 먹을 것을 구하러 오다
十一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三年春二月 궁실을 중수하다
十三年春三月 가물다
十三年夏四月 왕이 죽다
특이하게 일식 기록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온다. 아마 박씨 왕실에서 석씨 왕실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혼란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천문 관련 학문이나 부서 혹은 사관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기 이전 신라의 일식 기록에서, 낙랑군이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에게 접수되는 시점인 4세기 초반 이전 기록들은 주로 낙랑군의 기록을 복붙한 것으로 해석되는 추세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기년의 정확도가 대단히 의심되는 초기사 부분과는 달리, 하필이면 고구려가 낙랑군을 접수하는 4세기 초반까지는 어느 정도 교차검증되는 편이다. 가장 개연성있는 추측은 낙랑군 유민이 해당 기록을 갖고 신라로 들어왔거나 신라가 낙랑군과의 활발한 교류 과정에서 접수했다는 것인데, 현재로선 어디까지나 추측이 될 수밖엔 없다. 자세한 내용은 김용운 교수의 《한국수학사》 참조. 아마 일식 자체의 기록은 실제 있었던 기년과 일치할 가능성이 높지만 박-석 교체가 그렇게 무난하지만은 않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 원사료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연대를 배치할 때 해당 연대에 끼워넣었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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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성모 | 은열왕 | 문열왕 | 감문왕 | 문의왕 | 장무왕 | 장렬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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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1 시조 혁거세왕 | 알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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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2 남해왕 | 운제 | 청평군 | 박민 | 세조 알지왕 | 사요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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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3 유리왕 | 아효 | 昔4 시조 탈해왕 | 지소례왕 | 일지왕 | 태조 성한왕 | 사요왕의 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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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7 일성왕 | 朴5 파사왕 | 석구추 | 김아도 | 허루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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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8 아달라왕 | 朴6 지마왕 | 昔9 벌휴왕 | 김수류 | 마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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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왕 | 세신왕 | 이칠왕 | 김욱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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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11 조분왕 | 昔12 첨해왕 | 昔10 내해왕 | 술례부인 | 구도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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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14 유례왕 | 석걸숙 | 내음왕 | 석우로 | 광명부인 | 金13 미추왕 | 김말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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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15 기림왕 | 昔16 흘해왕 | 金17 내물왕 | 김대서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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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19 눌지왕 | 파호왕 | | 김미사흔 | 金18 실성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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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20 자비왕 | 습보왕 | | 김내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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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21 소지왕 | 金22 지증왕 | | 선혜부인 | 김물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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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23 법흥왕 | 입종왕 | | 김거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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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24 진흥왕 | 김숙흘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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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승왕 | 동륜왕 | 만천왕 | 聖25 진지왕 | | 김만명 | |||||||||||||||||||||
| 장인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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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부인 김행의 | 聖26 진평왕 | 진정왕 | 진안왕 | 문흥왕 | 김마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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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27 선덕왕 | 김천명 | 비담 | 聖28 진덕왕 | 김알천 | 眞29 태종 무열왕 | 현성왕 | 흥무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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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0 문무왕 | 김인문 | 무열왕의 딸 | 신영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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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1 신문왕 | | 흥평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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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2 효소왕 | 眞33 성덕왕 | | 명덕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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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왕 | 김사소 | 효상태자 | 眞34 효성왕 | 眞35 경덕왕 | 김주원 | 眞38 열조 원성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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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7 선덕왕 | 眞36 혜공왕 | 김헌창 | 혜충왕 | 헌평태자 | 혜강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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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9 소성왕 | 眞41 헌덕왕 | 眞42 흥덕왕 | 선강왕 | 익성왕 | 성덕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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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40 애장왕 | 헌덕왕태자 | ? | 眞44 민애왕 | 眞43 희강왕 | 眞45 신무왕 | 眞47 헌안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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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공왕 | 眞46 문성왕 | 궁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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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왕 | ─ | ? | 眞48 경문왕 | 혜성왕 | 문성왕태자 | 문성왕의 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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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성왕 | 흥렴왕 | 박정화 | 眞49 헌강왕 | 眞50 정강왕 | 眞51 진성왕 | 의흥왕 | ||||||||||||||||||||
| 양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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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53 신덕왕 | 김의성 | 김계아 | 眞52 효공왕 | 김억렴 | 신흥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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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54 경명왕 | 朴55 경애왕 | 眞56 경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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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창 | 박언침 | 마의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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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분 이사금을 태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2] 파자-지마 부자와 달리 벌휴의 어머니는 세대를 역산하면 신라 김씨 족단이 사로국은커녕 서북한에서 충주 금릉동으로 막 내려올 시기라서 이 계보 불명의 '김씨'가 신라 김씨 족단이 맞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신라에서 성씨를 사용한 것은 진흥왕의 대에 가서의 일이고 후대 사서 편찬 과정에서 소급해서 적용한 것임을 고려하면 지진내례부인 김씨는 가야계일 가능성도 있다. 금관국 수로왕계와 반파국 이진아시계는 신라에서 김씨 성을 사용했고 석씨 족단은 신라에 오기 전에 한동안 김해에 거주하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일족(수로왕계)에게 밀려 사로국으로 재이주한 세력이기 때문이다.[3] 후에 신덕왕이 아달라 이사금의 먼 후손(遠孫)으로 나오기 때문에 실제로는 있었던 듯하다. 원래 박씨 족단의 소유였던 탁부 매금왕위가 아달라의 사망 시기(4세기 중후반)와 맞물려서 내물 마립간에게 넘어가고 박씨 족단이 잠탁부로 이주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달라 사후 내물이 모종의 이유로 탁부 매금왕이 되고 아달라의 후손들이 잠탁부로 이주한 듯하다.[4] 강종훈 교수의 《신라 상고사 연구》,《삼국사기 사료비판론》, 《한국고대사 사료비판론》 등 저서 참조.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총서 16권《삼국사기 초기기록, 이디까지 믿을 수 있나》등 참조[5] 한편 왕건의 선대로도 추정되는 고구려계 귀족 왕씨 가문의 정확한 출자는 현재로서는 불명이다. 고구려 편입 이전 낙랑군의 왕씨 가문은 두 종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건너온 가문, 왕조처럼 토착 낙랑인 출신임이 확실시되는 가문 이렇게 있었는데, 출자가 어쨌든 두 가문 모두 고구려에서 무려 삼백 여 년 이상 있었기에 고구려인이 맞지만 동북공정론자들은 왕건의 출신 가문이 전자라고 믿고 싶을 개연성이 강한 건 사실이다. 견훤의 이씨 가문은 사벌국 지배층 후예이자 5세기부터 400년에 걸쳐 대대로 신라 왕실 친위대로 복무한 가문으로 도중에 진흥왕과 소비 부여씨의 후손과 한 번 통혼한 걸로 추정된다. 왕건 가문은 6두품으로 대우받을 정도의 고구려 고위 귀족 출신이고 견훤 가문은 5두품이라도 400년간 신라 왕실 친위대를 대대로 해온 가문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왕건과 견훤의 가문이 후삼국시대 다른 호족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할 정도 가문이었으면 사실을 그대로 밝히면 되지 각종 거짓부렁을 칠 필요가 없었다. 후삼국시대 다른 호족 가문들과 비교하면 격이 떨어지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딱히 높은 것도 아니었다.[6] 기년 인상은 2세기 후반 건국을 기원전 1세기로 인상한 백제도 했는데 백제는 기록의 부실함과 잦은 수도 이전 탓에 신라보다 기년 추적이 어렵다. 심지어 가계라도 양심적인 신라와 달리 백제는 근초고왕 이전 초고왕계와 고이왕계 가계를 심하게 왜곡했고, 기년이 정상화된 이후에도 가계 왜곡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구이신왕-비유왕, 개로왕-문주왕, 동성왕-무령왕, 위덕왕-혜왕) 무왕은 말기 임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계가 오리무중이다.[7] 반대로 고구려는 고고학적으로도 사서 건국 연대와 거의 같은 게 확인되지만 주몽~신대왕까지의 가족관계가 백제처럼 왜곡된 것이 확실시되며, 53~165년 사이 재위한 왕들(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나이, 가족관계, 세대, 항렬 모두 엉망진창이다.[8] 다만 이후에도 한동안 몇 년 정도 기년 인상이 일어났다는 가설도 있다. 그래도 이때부터 거의 정상화된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