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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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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SCO World Heritage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바빌론
아랍어 بابل
영어 Babylon
프랑스어 Babylone
국가·위치
[[이라크|]][[틀:국기|]][[틀:국기|]] 바빌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278
등재연도 2019년
등재기준 (ⅲ)[1], (ⅵ)[2] }}}
파일:babylon_aerial_view.png
파일:na_668d4ce618420.jpg
파일:이라크 바빌론.jpg
현재 바빌론의 전경. 두 번째 사진은 네부카드네자르 궁전, 세 번째 사진은 성벽 거리다.
<colbgcolor=#445C91> 언어별 명칭
아카드어 𒆍𒀭𒊏𒆠(Bābilim, Bābili)
수메르어 𒆍𒀭𒊏𒆠(ká.dig̃ir.raki)
아람어 ܒܒܠ(Bāḇel)
히브리어 בָּבֶל(Bável)
고대 페르시아어 𐎲𐎠𐎲𐎡𐎽𐎢𐏁(Bābiruš)
고전 그리스어 Βαβυλών(Babylṓn)
라틴어 Babylon/Babylonia
아랍어 بَابِلُ(bābilu)
영어 Babylon

1. 개요2. 역사
2.1. 고대의 전성기2.2. 쇠퇴기2.3. 잊혀지다2.4. 재발견과 발굴
3. 특징4. 건축물5. 성경의 묘사6. 여담7. 매체에서8. 사진

[clearfix]

1. 개요

유프라테스강 하부에 자리한 이라크의 고대 유적. 이라크의 수도바그다드 85km 남쪽의 엘힐라 부근에 위치한다.

고바빌로니아, 중바빌로니아, 신바빌로니아의 수도로서 기원전 18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무려 1,500년 간 세계 최대 도시들 중 하나로 번영하였으며[3] 당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한 패권국 바빌로니아의 명실상부한 중심지였다. 바빌론의 통치자는 곧 세계의 통치자라고 불릴 정도로 위상이 높은 도시였고 한때는 압도적인 문화력과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도시였던 것이다. 신바빌로니아 멸망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때에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행정 수도이자 근동의 핵심 대도시로 기능했다. 다만 이런 성세는 헬레니즘 제국 시대 이래로 점차 셀레우키아, 크테시폰 등 다른 도시들에게 넘겨주고 쇠락한다.[4]

인류 문명 초창기에 관개 농업을 시행한 도시들 중의 하나이고, 현대의 시계에도 사용되는 60분 체계를 확립했으며, 잉여 자원을 통해서 교역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여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도시였다. 제국의 수도일 때는 물론, 수도가 아닐 때에도 메소포타미아 최대의 도시였고, 로마에 앞선 최초의 국제 도시였다. 인구 20만 명을 넘긴 최초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현재는 이라크의 주요 관광지로,[5] 현지 아랍어로는 '바빌'이라 불린다.[6]

2. 역사

2.1. 고대의 전성기

2.1.1. 고바빌로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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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in-qimg-f24e7fb8876cd0b6c75909f1f9c5b4f4-lq.jpg
파일:2019-02-08-13.27.07-735x551.jpg.webp
바빌론 유적의 모습
바빌론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논란이 있다. 워낙 오래전이라 정확하게 계산하는게 불가능하기 때문. 페르시아 제국의 학자 크테시아스는 바빌로니아의 고대 기록을 조사한 결과 초대 국왕 벨루스가 기원전 2286년에 세웠다고 주장했다. 헬레니즘 학자 베로수스는 바빌론이 포로네우스[7]보다 490년 일찍 천문 관측을 시작했다고 기록, 즉 기원전 2243년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했다. 동로마 학자 스테파누스는 바빌론이 트로이 침공보다 1,002년 일찍 지어졌다고 언급, 즉 기원전 2231년이라고 주장했다. 정확한 연도는 학자들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대략 기원전 2200년대 언저리에 세워졌다는 것이 정설.

바빌론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건 아카드 제국의 국왕 샤르칼리샤리 통치기인 기원전 2100년대다. 아카드의 국왕 샤르칼리샤리가 바빌론에 전쟁의 여신 안누니툼과 왕권의 여신 일라바에게 봉헌할 새 사원의 기초를 놓는 석판이 발굴됐기 때문.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바빌론은 작은 마을에 불과했고, 딱히 두각을 드러내는 도시도 아니었다. 아카드가 몰락하고 이후 들어선 우르 제3왕조의 행정기록에도 세금을 징수하고 바빌론에 지방 총독을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게 별 것 아닌 조그마한 마을이었던 바빌론에, 기원전 19세기 즈음 셈족 일파인 아모리인이 정착했다. 수무아붐이라는 족장이 기원전 1894년 경 인근 도시 카잘루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면서 '바빌론 제1왕조', 즉 바빌로니아가 시작된 것이다. 바빌로니아는 건국 초창기만 해도 영향력이 거의 없는 국가에 불과해 첫 4명의 군주들은 인근 엘람, 이신, 라르사 같은 패권국들의 눈치를 보느라 '왕'이라는 직함조차 사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최고의 정복군주 함무라비의 등장으로 인해 고바빌로니아가 세워졌고, 이와 함께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최고 중심 도시로 급부상하게 된다. 기원전 1792년 즉위한 함무라비는 이신, 라르사, 우르, 우루크, 라가쉬, 키쉬 같은 주요 도시들을 죄다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했고, 함무라비 법전을 편찬하는 한편 동쪽의 엘람, 서쪽의 마리, 에블라, 아시리아까지도 공격해 조공을 받았다.[8]

번성하던 고바빌로니아는 함무라비 사후 급격히 무너졌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고바빌로니아의 왕들은 내란에 무력했다. 메소포타미아 최남단은 분리되어 시랜드 왕조로 독립해나갔고 동쪽에서는 엘람이 쳐들어왔다. 아모리인들은 여전히 바빌론에 살았지만 바빌론은 다시 지역 도시로 축소되어버렸다. 기원전 1595년 히타이트무르실리 1세의 침공으로 아모리인들의 패권이 끝나자 동쪽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원한 카시트인들이 유입되어 '바빌론 제3왕조'라고도 불리는 카시트 왕조를 건국했다.[9]

2.1.2. 중바빌로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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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란 이라크 카시트.png
파일:320px-Kudurru_Louvre_Sb31.jpg
중바빌로니아 경계석 유물[10]
고바빌로니아가 기원전 1595년 히타이트에게 멸망당한 이후, 바빌론은 잠시간 혼란기를 겪다가 카시트인들이 주도하는 카시트 왕조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카시트 왕조는 인지도는 고바빌로니아나 훗날의 신바빌로니아에 비하면 약간 떨어지지만, 무려 435년 간 바빌론을 다스리면서 가장 오랫동안 바빌론을 통치한 왕조였다. 이 카시트 왕조를 포함해, 고바빌로니아가 멸망한 직후부터 신바빌로니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바빌론을 지배했던 왕조들을 중바빌로니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카시트 왕조를 포함한 중바빌로니아 시대는 쇠락과 쇠퇴의 시대였다. 그나마 기원전 1370년대에 재위한 쿠리갈주 1세 때 고대 이집트, 아시리아와 외교관계를 맺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급격히 발전한 중아시리아에 경쟁하며 열세로 전락해 얻어맞으면서 살았다. 서쪽으로는 중아시리아가, 동쪽으로는 또다시 발흥한 엘람에게 조공을 바치는 이중 속국 신세로 전락했고 두 중아시리아와 엘람이 바빌론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 결국 기원전 1160년 경 엘람이 바빌론을 침략해 함락하면서 카시트 왕조는 43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카시트 왕조가 몰락한 뒤 바빌론에는 무려 6개의 왕조들이 연달아 들어섰지만 제대로 된 왕조는 하나도 없었고 죄다 아시리아와 엘람에게 조공을 바치며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는 수준에 불과했다. 중아시리아와 엘람은 서로 경쟁을 벌이며 바빌론의 왕들을 마음대로 갈아치웠고 바빌론은 인근 국가들에게 시달리는 샌드백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무능한 왕들은 이민족들의 유입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기원전 11세기 경 아람인들과 수테인, 마지막으로 칼데아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바빌론으로 유입됐다.

기원전 911년 신아시리아가 세워진 이후부터는 아예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합병되어버리고 말았다. 아시리아는 바빌론에 속왕들을 임명하고 마음대로 갈아치웠는데, 이때문에 바빌론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고 바빌로니아인들의 반감은 엄청났다. 반란이 끊이지 않자 기원전 729년에는 아예 자체 왕조가 사라지고 아시리아 국왕의 직할령으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반란에 지친 센나케립 왕은 20만 명을 바빌론에서 추방하고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11] 센나케립 이후의 아시리아 왕들은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통치법을 썼지만[12] 아시리아에 대한 바빌론인들의 혐오는 여전했고, 결국 아시리아 최후의 명군 아슈르바니팔이 기원전 631년 사망하자 바로 독립해 신바빌로니아로 떨어져 나간다.

2.1.3. 신바빌로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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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kingofwallpapers.com/babylon-008.jpg
3D 복원도. 한가운데에는 푸른 빛의 이슈타르의 문이, 옆에는 바벨탑으로 알려진 마르두크의 대신전이 보인다.
기존의 패권국 신아시리아가 아슈르바니팔 사후 쇠퇴하자 칼데아인 출신 장군 나보폴라사르가 기원전 626년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다. 나보폴라사르는 인근의 메디아와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를 공격했고, 기원전 614년에는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켰으며 10년 후에는 아시리아의 잔존 세력마저도 끝장냈다. 이렇게 나보폴라사르가 바빌론에 새로 세운 왕조를 '바빌론 제10왕조', 즉 신바빌로니아라고 부른다.

신바빌로니아의 바빌론의 최고 전성기였다. 특히 나보폴라사르의 후계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 그 번영의 정점을 달렸다. 기원전 604년부터 기원전 561년까지 바빌론을 다스린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옛 고바빌로니아의 영토를 완전히 수복해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움켜쥐는가 하면, 제국 전역에서 유입된 부를 이용해 바빌론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로 만들었다. 바벨탑의 원형이 된 에테멘앙키, 바빌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이슈타르의 문도 다 이때 만들어진 건축물. 뿐만 아니라 아미티스 왕비를 위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로도 유명한 바빌론의 공중정원도 건설하면서 바빌론을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이 시기의 바빌론은 세계 1위의 대도시였으며 문명의 중심지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빌론의 모습도 다 이 시기의 것들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끌고왔을 당시 유대인들이 남긴 기록이 바로 구약성경이다. 한낱 촌동네에 불과하던 예루살렘에 살다가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이던 바빌론을 본 유대인들은 당연히 바빌론의 화려한 문물에 눈이 돌아갈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바벨탑 전설이라고 할 정도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에테멘앙키 신전의 모습을 보고 신에 대한 교만을 상징하는 바벨탑 전설을 떠올렸다는 것. 그 외에도 '음탕한 탕녀' 등 바빌론의 화려함과 번성을 저주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신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쇠퇴했다. 특히 동쪽에서 아케메네스 왕조키루스 2세라는 희대의 괴물이 자라나고 있었기에 신바빌로니아라 할지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기원전 539년에 오피스 전투에서 신바빌로니아 군대가 대패하자 바빌론인들은 도시 안에 틀어박혀 농성했다. 도시를 함락하려면 철옹성 같은 관문을 뚫거나 창살로 가로막힌 수문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는데 둘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키루스 2세는 유프라테스강의 물길을 돌려 수위가 낮아진 곳으로 도강한다는 묘수를 떠올렸고, 결국 바빌론은 기원전 549년 10월에 함락되고야 만다. 당시 왕이었던 벨사자르는 페르시아 군대가 도시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2.2. 쇠퇴기

파일:The_fall_of_Babylon;_Cyrus_the_Great_defeating_the_Chaldean_Wellcome_V0034440.jpg
파일:alexander-the-great-riding-in-triumph-into-babylon-roger-payne.jpg
페르시아의 정복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바빌론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정복되고 나서도 중요성을 인정받아 수사, 페르세폴리스, 엑바타나와 함께 4대 대도시 중 하나이자 행정수도로 번영하였다. 바빌론을 정복한 키루스 2세는 자신을 바빌론의 왕이라 칭하며 기존 엘리트층과 종교를 모두 인정해줬고, 바빌론은 여전히 거대한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로 남았다. 다리우스 1세는 바빌론에 메소포타미아 사트라프를 임명하고 학문과 과학의 중심지로 삼았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천문학과 수학이 되살아났고, 바빌론 학자들은 천문 지도를 완성하는 업적을 남겼다. 바빌론은 페르시아 아래에서 200년 넘게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13]

그러다가 다리우스 3세 황제 시절부터 과도한 세금, 연이은 전쟁으로 인한 피로로 인해 페르시아의 지배도 흔들리고야 만다. 그리고 서쪽에서 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 3세가 다리우스 3세를 쳐부수고 기원전 331년 바빌론에 입성하면서, 200년에 걸친 페르시아의 지배가 종식되고 헬레니즘 제국의 시대로 접어든다. 바빌론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바빌론을 수도로 삼았고 기원전 323년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궁전에서 죽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의 결과 바빌론을 차지한 셀레우코스 왕조가 바빌론 옆에 셀레우키아라는 새로운 대도시를 조영하면서 바빌론의 영향력은 축소되기 시작한다.[14] 바빌론은 여전히 거점 대도시였으나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의 전쟁에 휘말리는 등 서서히 쇠락해갔다.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가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한 후에는 셀레우키아 옆에 새로운 도시 크테시폰을 만들었고, 이 크테시폰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대에도 수도가 되면서 바빌론은 완전히 쇠락했으며 바빌로니아인들은 파르티아/페르시아인에게 동화되었다. 이후에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로마 제국트라야누스 대제가 파르티아에 대대적인 공세를 취할 때 수도인 크테시폰을 털어버린 후 이곳에 성지순례를 했다고 전해진다.

2.3. 잊혀지다

7세기 바빌론은 아랍인들에게 정복되었고, 사산 왕조 시절 유지되던 바빌로니아 속주가 해체되었다. 이후 바빌론은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등 무슬림 왕조 시대를 거치며 완전한 유적지로 버려지고야 만다. 10세기의 학자 이븐 하우칼과 13세기의 학자 알 카즈위니는 바빌(Babil / بابل)이라는 이름의 작은 시골 마을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를 보아 바빌론은 그 이전에 이미 알프레드 대왕이 재건하기 전의 론디니움(런던)처럼 옛 명성을 잃고 완전히 깡촌으로 전락해버린 듯하다.

또한 중세 시대에 깡촌이 되어버린 바빌론은 바그다드와 같은 신도시 건설에 필요한 석재 조달지(...)로 인기가 많았다. 유럽에서 로마-그리스인들이 세운 유구한 유적들이 게르만족의 석재 셔틀로 쓰인 것과 비슷한 부분.

여하간 시간이 흘러 바빌론이 남긴 깡촌 마을들도 점차 이름이 바뀌고 분열되면서 바빌론이란 이름은 잊혀지고 그 위치마저도 실전되어 전설 속의 존재가 되었다. 현지 아랍인들조차 바빌론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까먹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인근 대도시 팔루자를 바빌론이라 오인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아랍인이 세운 신도시인 바그다드가 새로운 바빌론 또는 그냥 바빌론 그 자체로 착각되기도 했고, 바그다드의 건축물들이 바벨탑으로 여겨지는 일도 있었다.

2.4. 재발견과 발굴

파일:AnyConv.com__CSu_EC9UcAAzyBC.jpg
1932년 바빌론의 사진들
그러다가 18세기 말부터 바빌론을 찾아 떠나는 유럽인 여행자들이 늘어났고, 끝내 19세기 초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고고학자 클라우디우스 제임스 리치(Claudius James Rich)가 바빌론 터를 발굴하는 데 성공해 위치를 추측할 수 있게 되었고, 같은 영국인인 로버트 미그난(Robert Mignan)은 1827년에 일대를 탐험한 뒤 1829년 일대의 시골 마을들이 포함된 바빌론 지도를 완성했다.

그리고 마침내 1899년부터 근 18년에 걸쳐 독일인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Robert Koldewey)에 의하여 발굴되어, 바빌론의 실존이 확인되었다.

여담으로 바빌론이 있던 땅 자체가 완전히 텅 비어 유적만 있는 허허발판인 건 아니었다. 이름이 사라졌을 뿐 바빌론은 여러 작은 마을들로 남아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1905년 당시 독일 학회의 노동력 수요 덕분에 성장하여 200여 가구가 살던 '콰레시'라는 마을도 있었다.

1921년 이라크 왕국오스만 제국에게서 독립하고 난 이후, 바빌론은 이라크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이자 국가적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라크인들의 국가적 자존심이었던지라 이라크 왕국, 아랍 연방, 이라크 공화국, 바트주의 이라크 등등 정권이 계속 바뀌는 와중에도 계속 문화유산으로 보호받았다. 바빌론 유적의 모습은 지속적으로 이라크의 엽서나 우표 따위에 등장했고, 1960년대에는 이슈타르의 문과 닌마크 신전을 조잡한 솜씨로나마 복원했다.
파일:1fa64cbf-cafb-419e-a91f-30360c9133da707ca8bf155af66df3_GettyImages-57258344.jpg
파일:090729-babylon-hlarge-230a.webp
사담 후세인의 우상화 바빌론의 미군 병사들
특히 이 바빌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사담 후세인이다. 사담 후세인은 1978년 2월 '바빌론 복원 프로젝트'를 시작해 바빌론의 폐허 위에 일부 건축물들을 복원했다. 250개의 방, 5개의 안뜰, 30m 높이의 아치 입구를 가진 거대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전도 이때 복원됐다.[15] 또한 이슈타르의 문과 이어지는 행진의 거리 일부, 바빌론의 사자상, 헬레니즘 시대에 건설된 원형극장도 이때 개보수했다. 후세인은 유적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이주시켜 마을을 철거한 다음, 그 곳에 지구라트 모양의 현대식 궁전 '사담 힐'을 짓기도 했다.[16] 바빌론을 이라크의 역사적 뿌리라고 여겼던 사담 후세인은[17] 1987년 9월 바빌론에서 국제 축제를 개최했고,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거의 매년 축제를 열었다.

이라크 전쟁미군은 바빌론 유적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이라크에 파병된 제1해병사단이 유적 위에다가 캠프 알파를 차리고 헬리패드를 설치하는 등 온갖 파괴행위를 일삼았기 때문. 미군은 유적지 일부를 롤러로 밀어버리고 평평하게 만들어 그 자리에 헬리패드와 중장비 주차장을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육중한 미군 차량은 2,600년 된 포장도로를 싸그리 부숴버렸고, 벽돌로 된 벽들을 무너뜨렸으며 12개가 넘는 깊은 참호를 파서 바빌론 유적을 크게 손상시키는 참사를 일으켰다. 벽돌에 세겨진 수많은 낙서는 덤.[18] 미군은 이 작업이 바빌론 박물관과 미리 논의를 거쳤다고 해명했고, 2006년 4월에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표명하며 만일 이러지 않았다면 다른 약탈자들에 의해 더 큰 훼손이 일어났을거라 강변했다.[19]

이라크 정부는 2009년 6월에 다시 바빌론 유적을 관광객들에게 개방했다. 2017년에는 35,000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바빌론을 다녀갔으며 2019년 7월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다만 유적에 대한 보호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라서, 바빌론 외성벽 내에 수 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즈와이르, 신자르, 카레쉬, 알-짐즈마 등 4개나 되는 마을이 있다. 법적으로는 마을의 확장이 금지됐지만 계속된 난개발로 유적 내에 끊임없이 마을이 뻗어나가는 중. 게다가 마을 주민들은 대추야자, 무화과, 가축 정도의 1차 산업을 제외하면 수입원도 딱히 없어서 빈곤을 면치 못하는 상태다. 그나마 내성벽 안쪽은 국가유물유산위원회(SBAH)에서 따로 관리하고 있어서 훼손이 덜한 편이다.

3.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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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빌로니아 시대의 바빌론
당시 바빌론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은 여러 문헌에서 많이 거론되며, 특히 가장 거대한 바벨탑의 원형 에테멘앙키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유명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성경 속에서나 나오는 전설 중 하나로 치부되었으나 독일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Robert Koldewey, 1855~1925)[20]가 찾아내면서 실존했던 도시임이 드러났다. 전설적인 고대 이슈타르의 문도 이 도시에서 발굴되었다.[21]

도시의 규모는 당대 최고의 크기였다. 각종 기록에 따르면 도시 건축에 사용된 기술들은 현대에 와서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기원전의 도시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대도시이자 당대 최신 기술의 산물인 곳이었다.

4.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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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복원도 위에서 바라본 모습
바빌론은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의 도시로, 유프라테스강이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 에테멘앙키, 이슈타르의 문, 왕의 궁전 등 주요 건물들은 대부분 유프라테스강 동안에 몰려있었다. 바빌론은 거대한 해자로 둘러싸인 막강한 요새였으며 특히 유프라테스 동안 일대는 이중 해자와 외성, 내성 이렇게 이중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바빌론의 상징인 에테멘앙키 신전은 바빌론 한가운데, 유프라테스 동안에 바로 접해있다. 그 남쪽에는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에게 바쳐진 마르두크 신전 '에사길리아'가 세워져 있었다. 에테멘앙키 북쪽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왕궁이 자리했으며, 그 바로 오른편에 이슈타르의 문행진의 거리가 도열한 모습이었다.

사담 후세인이 복원한 부분이 바로 바빌론 북쪽에 있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왕궁과 이슈타르의 문, 행진의 거리다. 현재 우리가 바빌론 유적지에 가면 볼 수 있는 구역들도 바로 이 부분. 에테멘앙키와 마르두크 신전도 복원하려는 장대한 청사진을 계획하기는 했지만, 예산 부족과 부실한 복원 논란에 휩싸여 포기했다. 때문에 왕궁과 행진의 거리, 이슈타르의 문은 현재 조잡하게나마 복원되어있으나 에테멘앙키는 터만 남아있고 에사길리아는 아예 위치를 찾아보기조차 힘든 수준이다.

헤로도토스의 다소 과장된 기록[22]에서도 알 수 있지만 바빌론의 성벽은 그 엄청난 두께와 높이, 규모로 고대부터 유명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릴 정도였다. 바빌론 내성에는 8개의 성문들이 있었고, 북쪽의 이슈타르의 문부터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각각 마르두크 문, 자바바 문, 우라쉬 문, 사마쉬 문, 아다드 문, 왕의 문, 엔릴 문 순서였다.[23] 실제로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바빌론의 이중 성벽은 외성벽이 두께 3.5m, 내성벽이 두께 6.5m, 높이가 20~25m에 달했으며 특히 내성은 길이가 19.3km에 달했다. 바빌론의 성벽은 햇볕에 말린 벽돌로 쌓아올렸고, 벽돌을 30층씩 쌓을 때마다 갈대를 넣어 견고하게 보강했다. 또한 일부 구간에는 귀중한 푸른 벽돌을 쌓아서 아름답게 꾸몄다.

바빌론이 내성과 외성 이렇게 2개의 이중 성벽을 쌓은 이유가 있다. 전쟁 도중 기근으로 시달린 경험 때문에 바빌론 시가지 동쪽과 북쪽의 농경지를 감싸는 새로운 성벽을 지었는데, 이게 바로 바빌론 외성이다. 'NIMIT-TI-BEL'이라고도 불렀다. 내성과 달리 외성의 규모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대략 80km 정도에 이르렀다고 추정할 뿐이다. 내성이 번잡한 시가지만을 딱 감싸고 있었던 반면, 외성은 거대한 농경지와 목초지 전체를 둘러싸 바빌론의 밭들을 보호했다. 헤로도토스는 바빌론 외성에 100개의 문이 있었으며 문짝과 문설주, 기둥을 놋쇠로 만들어 번쩍번쩍 빛났다고 했다. 내성은 'IMGUR-BEL'이라 불렀고 외성에 비하면 약간 높이가 낮았으나 방어력은 전혀 뒤지지 않았다. 2개의 왕궁과 시가지, 신전 등 핵심 시설들은 내성 내에 있었다.

4.1. 이슈타르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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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행진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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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에테멘앙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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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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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위에서 바라본 모습

궁전의 3D 복원도 [펼치기ㆍ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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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왕궁. 5개의 중정과 알현실로 구성된 신바빌로니아정궁이었다. 한때는 푸른 아쿠아마린 빛깔의 타일로 치장되어 있어 매우 아름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볼 수 있는 궁전은 1980년대 사담 후세인이 아예 유적 위에 새로 건설한 것이다. 복원 당시에도 유적 훼손에 대한 우려가 많았지만 이라크 당국은 깔끔하게 씹고 진행했다. 이 궁전 역시 기껏 복원해놨지만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이에 대한 사과로 미국이 자금 지원을 해 복원되었지만 현재까지도 그렇게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 않는 형편. 천장은 처음부터 복원되지 않았고 벽체 정도만 어찌어찌 복원해놓은 상태이다.

4.5. 닌마크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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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마크 신전 내부 모습
행진의 거리에 위치한 신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모신(母神) 닌마크에게 바쳐진 사원으로 본디 바빌론 도심에 있는 여러 사원들 중 하나였다. 원래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절에 세워진 신전으로 추정. 유구가 그나마 잘 보존되어 있었고 그나마 벽체도 잔존하던 몇 안되는 바빌론 유적이었기에 1980년대 사담 후세인이 새로 복원해놨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신전은 거의 대부분이 사담 후세인이 복원한 것이다.

닌마크 신전은 중앙 안뜰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들이 늘어선 단순한 구조다. 원래는 지성소와 여신의 동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부실한 복원으로 찾아볼 수 없는 상태. 중앙 안뜰에는 신성한 우물이 있다. 닌마크 신전은 오직 여성들만이 출입할 수 있어서, 여성들은 이 곳에 모여서 좋은 신랑감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거나 자녀를 기원하는 등 기도를 올리곤 했다. 우물은 이렇게 모인 여성들이 몸을 정화하고 목욕하기 위해 물을 긷던 장소였다.

의외로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꽤나 중요했던 사원으로 나부 신전, 이슈타르 신전, 마르두크 신전과 함께 바빌론의 4대 신전들 중 하나였다. 그 때문인지 신바빌로니아 멸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버려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쓰였던 모양. 신전 바닥을 파르티아 시대에 재포장하는 등 최소한 파르티아 제국 시대까지는 기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기껏 복원해놓은 신전의 상태는 매우 나쁜 상태다. 미군이 이 곳을 군사기지로 사용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고,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전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지원으로 다시 복원되었지만 세워놓은 벽이 갈라지고 무너지는 등 상태가 썩 좋지않다.

4.6. 사담 후세인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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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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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사담 후세인은 바빌론 유적을 복원한 이후, 한눈에 바빌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궁전을 짓고싶어했다. 후세인은 유적 위에 지어져있던 카와리시 마을을 폭파하고 그 잔해 위에 언덕을 쌓은 뒤 그 언덕에 자신만의 새 여름 궁전을 지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바빌론의 공중정원을 본떠 지은 지금의 궁전은 카와리시 마을의 학교가 있던 장소 바로 위에 지어진 것이다. 카와리시 마을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약간의 보상금과 함께 밖으로 강제로 쫒겨났다.

사담 후세인의 여름 궁전은 후세인의 오만함과 우상화 정책을 그대로 드러내는 프로젝트였다. 겉의 장식들을 얼핏 보면 단순한 아랍어 도상학 같아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담 후세인의 이니셜이다. 건물에 새겨진 부조에는 군대를 이끄는 후세인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으며 천장에는 바빌로니아 이래 현대 이라크까지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사담 후세인을 어떻게든 역지로 연결지으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사담 후세인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군주들의 예를 본받아 자신이 복원한 바빌론 유적의 벽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이 여름궁전은 비참하게 버려져 방치된 상태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이 이 궁전에 기지를 차렸고 이때 미군 병사들이 궁전에 스프레이로 낙서한 것을 아직도 찾아볼 수 있다. 사담 후세인이 권좌에서 끌려내려온 뒤에는 아예 완전히 방치되어 값나가는 것들은 모조리 빼내진채 덩그러니 남아있는 폐허에 불과하다. 현재는 바빌론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잠깐 흘끗 둘러보고 가는 황량한 장소로 전락했다.

5. 성경의 묘사

주로 성경에서 자국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을 노예로 끌고 갔던 신바빌로니아를 원수로 여긴 유대인들에 의해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찬 악의 도시, 복마전 등과 같은 이미지로 서구 세계에 많이 알려졌다. 성서에서 이 정도로 싫어하는 국가는 마카베오 전쟁으로 원수가 된 셀레우코스 왕조뿐이다.

대표적으로 시편 137편에 따르면 화자가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가서 예루살렘시온을 그리며 한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중 8절과 9절은 바빌론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노골적인 저주로 구성되었다.[24]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요한계시록 18장 2절. 개역개정판
요한 묵시록 17장과 18장에서도 바빌론을 '큰 음녀',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칭하며 바빌론의 온갖 영화와 권세와 악행을 나열하고 심판의 날에 죄 많은 바빌론이 신의 진노를 받아 비참하고 철저하게 멸망당할 것이라는 온갖 끔찍한 저주를 퍼붓고 있다.

기독교외경 제2경전에녹서(에녹 1서)도 심판의 날의 정경을 적고 있는데 '탕녀' 바빌론의 심판을 다루고 있다.

한국에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오만한 인간들이 하늘에 닿기 위해서 높은 탑인 바벨탑을 쌓다가 천벌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는데, 바벨탑의 실제 모델이 신바빌로니아 시기 세워진 바빌론의 '에테멘앙키 신전'이라는 설이 있다.

현대에 이르러 세속적이고 탈기독교적 분위기가 형성된 뒤에는 재평가되어, 초창기 인류 문명의 요람과도 같은 도시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아시아 문명의 중심지로서 장기간 큰 영화를 누린 덕에, 화려한 대도시와 위대한 제국의 수도 같은 이미지로 많이 등장한다.

6. 여담

7. 매체에서

7.1. 게임

7.1.1. 도미네이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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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 원정 목적지 중 하나로 등장한다.

7.1.2. 문명 시리즈

문명 1부터 문명 6에 이르기까지 개근한 문명 가운데 하나다.

7.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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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디스코 그룹 Boney M.의 히트곡 중 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가 있다. 바빌론 유수를 주제로 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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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여가수인 나카모리 아키나의 바빌론이라는 노래가 있다. 허나 여기서 바빌론은 도쿄를 바빌론에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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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프로그레시브 메탈/멜로딕 스피드 메탈/가스펠 메탈 밴드 예레미의 노래다. 러닝 타임이 8분을 넘어가는,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대곡으로, 바벨탑이 무너지고 신바빌로니아 왕국이 멸망한 허무함을 묘사한 노래다.

8.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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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주요부인 네부카드네자르 궁전과 왼쪽 상단의 이슈타르 문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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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타르의 문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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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의 여름 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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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에 발굴된 바빌론의 사자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3] 기원전 1770년 ~ 기원전 1670년, 그리고 기원전 612년 ~ 기원전 320년경까지는 아예 세계 최대의 대도시였다. 무려 400년 동안 세계 최대 도시라는 명예를 유지했던 셈이다.[4]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도시 계보는 바빌론에서 시작해 셀레우코스 왕조셀레우키아로 넘어갔다가 사산 왕조 때는 크테시폰에게, 이후 아바스 왕조 시기에 바그다드에 넘어간 이래로 현재까지도 바그다드가 차지하고 있다.[5] 다만 어디까지나 이라크 기준에서 주요 관광지라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지는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이라크의 정치적 불안정 때문. 제대로 관광 개발만 한다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장소이나 워낙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 현실화되지 못하는 중이다. 매년 수 천명의 관광객들이 바빌론 유적을 찾는데 거의 절대다수가 이라크인들이고 해외 관광객들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6] 바빌론은 사라졌어도 풍요로운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계속 오리엔트 세계 중심지의 지위를 누렸다. 바빌론의 위상을 대체한 크테시폰이 이슬람교 발흥 이후 사산 왕조에 쳐들어온 아랍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근처에 또다시 아바스 왕조의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가 세워져 수백 년 동안 번영하고 현재까지도 이라크의 수도로 기능하고 있다. 즉, 바빌론-셀레우키아-크테시폰-바그다드 순으로 대도시의 위상은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7] 고대 그리스의 영웅. 아르고호 원정에 참여했으며 아르고스의 전설적인 건국자로 잘 알려져 있다.[8] 고바빌로니아의 임팩트가 얼마나 컸는지 고바빌로니아 이후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바빌로니아'라 불리게 된다. 이때부터 바빌론이 기존의 주요 종교 중심지였던 니푸르에리두를 대체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절대적인 패권 도시로 자리잡는다.[9] '바빌론 제1왕조'는 함무라비 대왕의 고바빌로니아, '바빌론 제2왕조'는 고바빌로니아 멸망 직후 잠시간 바빌론을 점령했던 최남단의 시랜드 왕조를 일컫는다.[10] 마르두크 아플라 이디나 1세의 재위기에 만들어진 카시트 바빌로니아 양식의 경계석으로, 기원전 12세기 경 엘람이 바빌론을 침략했을 때 전리품으로 강탈당했다.[11] 이때 센나케립은 아예 바빌론을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어버리려 시도했다. 어찌나 철저히 파괴되었으면 예전처럼 재건하는 데에 무려 88년이 걸렸다고 한다. 센나케립은 훗날 자기 아들들에게 살해당했는데, 그를 뼛속까지 증오하던 바빌로니아인들은 신의 징벌이라고 여겼다.[12] 어디까지나 센나케립에 비해서 평화로운 통치법이었을 뿐 딱히 유화적이거나 부드럽지는 않았다. 에사르하돈 왕이 죽자 아슈르바니팔이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이에 반발한 샤마쉬슘우킨 왕자가 바빌론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또 한번 바빌론이 약탈당했다.[13] 물론 워낙 토착 문화가 강력한 탓에 자주 반란이 일어나는 지방이었고 기원전 522년, 기원전 521년, 기원전 482년에 몇 번씩 반란이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당했다. 바빌론은 200년의 세월 거의 대부분 동안 페르시아의 통치 하에 머물렀다.[14] 그러나 바빌론인들의 영향력은 커졌다. 헬레니즘 건축 양식에는 바빌론 건축 양식이 도입되고 소수의 그리스인, 마케도니아인들은 바빌론의 신을 믿기 시작했다.[15] 바빌론의 공중정원에테멘앙키도 복원하자는 말이 나왔으나 예산 문제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다.[16] 이 사담 힐 궁전에서는 새로 복원된 궁전과 행진의 거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사담 후세인의 만족욕을 채우기 위해서 지어진 궁전. 사담 후세인은 2003년 유적을 가로지르는 케이블카를 만드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이라크 전쟁으로 취소됐다.[17] 사실 그보다 더 주된 이유는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서였다. 사담 후세인은 자신을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후계자라는 프로파간다를 선전했고 유적지 입구에 자신과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동격으로 그린 초상화를 걸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 왕처럼 바빌론의 벽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는가하면 니네베, 님루드, 아수르 등 다른 대도시들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진행했다.[18] 참고로 미군에 점령당했던 바빌론 유적은 2004년 폴란드군 감독 아래 들어갔다가 2005년 이라크 정부 관할로 되돌아갔다.[19] 정작 일부 미군들도 유물을 약탈하거나 이를 방조했다는 의혹이 있다.[20] 1899년부터 1917년까지 18년간 바빌론 유적을 발굴, 바빌론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밝힌 인물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와중에도 발굴을 계속 했지만 결국 마무리짓지 못하고 독일로 떠나야 했다.[21] 이때 바빌론에서 발굴된 이슈타르의 문 파편 유물을 독일로 반출해 가서 모사 복원하여 현재 페르가몬 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다.[22] 헤로도토스는 바빌론의 성벽이 높이 90m, 두께 26.5m, 길이 95k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라고 썼다. 게다가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성벽 위에서 달리다가 방향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 성벽에는 2개의 방어탑들이 성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 구조로 250쌍이나 세워져 있었다. 내성에는 25개의 문이 있었으며 이로 50개의 도로들이 지나갔고 이 도로들은 최소 100에이커에 달하는 625개의 시내 구역들을 구획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은 곤란하다. 헤로도토스는 바빌론 내성에 50개의 문이 있다고 기록했지만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건 고작 8개에 불과했다. 그는 도시의 너비가 각각 16.8~22.5km에 에 이르렀다고 썼지만 실제 발굴된 유적은 3.5km X 5.0km에 불과했다. 헤로도토스가 말한 바빌론의 크기는 실제보다 5~10배나 컸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23] 현재 이 8개의 성문들 중 총 4개의 문이 발굴됐다.[24] 8절 앞부분은 좀 오래된 번역(불가타, 개역개정, KJV, NIV 등)에선 '멸망할 딸 바벨론아',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에 나온 가톨릭 성경 한국어역과 공동번역 성경은 '파괴자 바빌론'으로 번역했다. 바빌론의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이에게 복이 있으리라는 9절은 번역본마다 큰 차이가 없다. 출처 1, 출처 2, 출처 3(불가타).[25] 참고로 일부 미군들은 이라크 박물관에 있는 유물들도 약탈했는데 이 역시 국제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그나마 최근에는 미국 정부에서 이라크로 상당수의 약탈된 유물을 반환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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