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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uk Period
1. 개요
기원전 4000년부터 기원전 3100년까지 지속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대구분이다. 우루크기(期)라고도 한다.우바이드 문화권과 젬데트 나스르 시대 사이에 위치한 기간이다. 이 시기에 사람들이 대규모로 정주하는 '도시'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으며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본적인 문화적 틀이 잡혔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쐐기 문자의 등장이었다. 이 우루크 시대 이전까지는 기록을 남길 문자가 없어서 아예 '선사시대'라고 부르지만 우루크 시대에 쐐기 문자의 발명이 이루어지면서 드디어 '역사시대'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 주요 도시는 우루크였다.
2. 역사
당시 우루크의 재현도.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예로부터 광대한 면적의 대평야 덕분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지대였다. 덕분에 당시 메소포타미아, 특히 메소포타미아 하부 일대를 중심으로 작은 마을 → 소도시 → 대도시 순서로 인구 집약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기껏해야 4~50여 명의 부족원 중심의 수렵채집-농경생활이 계속되었다면 우루크 시대에 들어서자 본격적인 기초 형태의 도시와 마을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기원전 4000년경에 개발된 관개농업의 결과로 수로가 곳곳에 깔리면서 대추야자, 보리, 밀과 같은 기본적인 작물들을 기를 역량이 생겨났고, 광대한 경작지를 통해 인구 부양력은 급상승했다.
인구 부양력이 늘어나자 인구는 당연히 폭증했고, 이에 따라 대규모 인원이 모여 사는 도시들이 곳곳에 우후죽순 생겨났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대도시가 하나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우루크였다. 우루크는 수많은 도시들 중에서도 인구가 25,000~50,000여 명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며, 우루크 시대 후기에 가면 그 면적이 230~500헥타르에 달했다. 계급 분화는 이전보다 훨씬 철저하게 이루어졌고, 엘리트층과 지도 계급, 노예 계급이 확연히 드러났다. 노예와 농부들은 혹사해 지은 소작물의 대다수를 세금으로 바쳤고, 우루크의 엘리트층들은 이 세입으로 아누 신에게 바치는 지구라트, 하얀색으로 칠한 백색 사원, 궁궐과 도시들을 건설했다.
당시 키쉬, 기르수, 우르, 니푸르 등 다양한 도시들이 있었지만 우루크 만큼 거대하거나 두각을 나타내는 데는 실패했다. 사실 우루크를 빼면 메소포타미아 하부 일대 전체에서 볼 만한 도시가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우루크 시대에 우루크의 지위는 압도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든 문명과 문화는 우루크를 중심으로 퍼졌고, 북쪽의 메소포타미아 상부, 저멀리 동쪽의 페르시아와 서쪽의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뻗어나갔다. 하지만 우루크가 식민 팽창을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당수의 도시들은 우루크로부터 여전히 독립을 유지하는 상태였고, 우루크에서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장악력은 확연하게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 일대에서는 이미 원주민들이 우루크와는 별 상관없이 독자적인 문명을 개시하고 있었다. 아예 상관이 없다는 것은 아니고, 유프라테스 강 상부와 아나톨리아 반도, 이집트 일대에서 우루크 특유의 도자기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서로 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이들은 우루크에 정치적으로 종속되거나 우루크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관계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독립적인 세력이었다. 다만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만큼은 우루크가 압도적인 문화강국이었다.
3. 문화 발전
신석기에 해당하는 우바이드 문화에서 우루크 시대로 넘어오면서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폭발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대표적으로 농업만 봐도 제2의 농업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할 정도이다.[1] 이전까지는 하나하나 손으로 고랑을 파고 밭을 갈았지만 우루크 시대에 들어서서 쟁기라는 혁신적인 발명품이 등장했다. 낫의 보급과 함께 이전의 우바이드 시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확량이 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관개기술도 진전을 보여 메소포타미아 하부 일대의 거대한 대평원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자연적인 강 바로 근처에서만 겨우겨우 농사를 지었다면 우루크 시대에는 아예 물길을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밭에 물을 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농업의 발달과 곡물 수확량의 증가는 곧 인구 증가와 도시화, 도시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목축이 제대로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야생 나귀가 처음으로 당나귀로 길들여졌는데, 당나귀는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길들여진 말짐승이었고, 얼마 가지 않아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동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인간의 약 2배나 되는 물건을 수월하게 옮길 수 있었을뿐더러 먹는 양도 훨씬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길들여진 상태였던 양과 말, 소의 개량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냥 가두어두고 필요할 때 하나씩 도축하면서 고기만 얻으려 했다면, 우루크 시대에는 양털이나 가죽, 우유, 모피나 탈 것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우루크 시대에 들어서야 동물들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깨달으며, 진정한 의미의 목축업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대거 모여 살게 되면서 대량으로 물건들을 공급해야 할 필요성이 증가했다. 그릇 역시 생활에 필수적인 물건이었는데, 물레의 등장으로 그릇과 항아리, 도자기 따위를 빠른 속도로 생산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더 이상 손만으로 느리게 그릇을 성형할 필요가 사라졌고, 만드는 과정은 압도적으로 빨라졌다. 도자기 겉에 화려한 장식을 넣는 단계까지는 못갔지만 마름모꼴이나 격자 무늬를 넣어 기초적인 장식을 시도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 역시 개선되었고, 대규모로 도자기를 제작하던 도기장 유적이 발견된 적도 있다. 우루크 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도자기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기원전 3000년대에 제작된 키쉬 태블릿.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물이다.
수많은 발명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말할 것도 없이 글쓰기의 발명이었다. 우루크 시대 중기에 처음 등장했고, 후기와 젬데트 나스르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했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쐐기 문자가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가장 초기적인 형태의 쐐기 문자는 문자라기보다는 기호와 상징을 애매하게 섞어놓은 것에 더 가까웠다. 엄밀히 따지면 쐐기 모습이라기보다는 물건의 모습이나 기호와 비슷해서 '쐐기 문자'라고 부르기조차 약간 모호하다. 극초기의 글쓰기는 문학이나 시 따위가 아니라 물건 계산이나 영수증, 거래 대금 지급, 회계 관리 따위에 사용하는 용도였다. 당연히 구어체를 그대로 옮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우루크 시대에 만들어진 극초기 단계의 문자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중에는 세계 최초의 문자로 발전하니 그 중요도만큼은 결코 뒤떨어진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바이드 문화의 끝자락에 금속 중 그나마 가장 다루기 쉬운 구리를 이용하기 시작했으나 제대로 쓰게 된 것은 청동기에 해당하는 우루크 시대였다. 야금술의 발전으로 수많은 금속제 물건들이 만들어졌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남은 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초기적인 형태의 합금도 등장했다. 비소를 섞은 비소 청동,[2] 납과 구리의 합금 등이 등장했지만 기원전 2000년기까지 주석 청동은 발견되지 못했다. 구리를 포함한 금속들이 중요해지면서 장거리 무역이 떠오르기도 했다. 질 좋은 금속은 대부분 저 멀리 아나톨리아나 페르시아 지방에서 산출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수입해와야 했기 때문이다. 먼 길을 통해 수입하다 보니 금속 값은 당연히 비쌌고, 금속 용품은 아무나 쓸 수 있는 제품이 결코 아니었다.
건축면에서 보자면 일반적인 움집이나 오두막 따위를 짓다가 제대로 된 반듯한 직육면체 건물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말린 진흙 벽돌을 쌓아서 지었고, 후기에 들어서는 색색의 테라코타 벽돌로 장식하는 기법이 유행했다. 역청으로 벽돌을 방수 처리하거나 석고를 접착제로 사용해 벽돌을 붙이기도 했다. 학자들은 이 시대의 벽돌을 크게 테라스나 기단을 쌓을 때 쓰는 큼직큼직한 벽돌 '파트젠'과, 상대적으로 작고 세세한 장식을 쌓을 때 쓰던 조그마한 벽돌 '리엠첸'으로 나눈다. 벽돌들을 표준화해서 크기를 각각 달리했기에 이전보다 훨씬 장식을 풍성하게 붙이는 것이 가능해졌다. 우루크의 건축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서 작은 채색 테라코타 조각들을 하나하나 붙여서 화려한 모자이크를 구상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점토와 흙벽돌뿐만 아니라 돌을 잘라 쓰기도 했다. 우루크 서쪽 50km 떨어진 지점에 거대한 석회암 광산이 있었기 때문에 원하면 바로 캐다 쓸 수 있었던 덕이었다.
바퀴가 우루크 시대에 최초로 발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바퀴 자체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만큼은 확실하지만 우루크 시대에 나왔는지는 확실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바퀴보다는 썰매를 끌거나 통나무를 굴려서 짐을 옮겼다. 어쨌든 바퀴의 등장으로 예전보다 훨씬 거대한 양의 짐을 쉽게 옮길 수 있게 되었고, 기원전 3000년대 초에는 전차가 등장했다. 하지만 바퀴살은 기원전 2000년대까지도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냥 통나무를 잘라 큰 원판 모양의 바퀴에 불과했다고 한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바퀴를 이용한 수레보다는 당나귀에 짐을 실어 옮기는 게 더 대중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 외에 갈대로 만든 나룻배로 수로를 따라 물류를 운반하기도 했다.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사회가 분화되면서 정치에서도 대격변이 일어났다. 우루크 시대의 대표적인 에안나 신전은 그 면적이 4,600제곱미터에 달한다. 바로 직전 우바이드 문화권에서 지은 1,000제곱미터의 에리두 4번 사원에 비하면 그 크기가 매우 커졌다. 더 거대한 건물을 지을 만큼 중앙집권적인 사회 시스템이 구축되었다는 증거로, 왕과 사제, 귀족과 같은 사회 엘리트층이 출현해 사회가 확고히 피라미드형으로 나뉘었다. 우루크 유적만 봐도 도시 중앙에는 거대한 저택들이 모여 있지만 외곽으로 나갈수록 좁아터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인다. 다만 아직까지 사제와 왕, 귀족 등 엘리트층 사이의 구분이 확실하지는 않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력한 군주나 왕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신전과 왕궁이 지어졌다. 신전은 수메르어로 '큰'(GAL) '집'(É), 곧 에갈(É.GAL)이라 불렸으며, 처음에는 왕궁을 겸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기원전 4000년대와 기원전 3000년대를 거치면서 왕궁이 점차 신전에서 분리되었고, 신전과 왕궁이 분리된 이후, 두 세력 사이에 경쟁이나 갈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의 도시들은 서로 영토를 확장하며 경쟁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경쟁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터지면 도시인들은 총회에서 임금이 아닌 '큰'(GAL) '사람'(LU), 곧 루갈(LUGAL)을 뽑아 전쟁 지도자로 앉혀 전쟁을 치렀다.
우루크 시대 예술의 특징은 인본주의 성향이 조금씩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르네상스나 고대 그리스의 그것에 비하면 비교조차 불가능하지만 직전에 비하면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놓는 경향이 훨씬 강해졌다. 이전에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에 의존하여 사물과 자연 현상에 의탁했다면, 우루크 시대에 들어서서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묘사하거나,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등 인간에 더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유물들이 '원통형 인장'이다. 독특하게도 고대인들은 이 원통형 인장을 젖은 점토판 위에 굴려서 도장을 찍었는데, 이 인장들에는 사회 엘리트층들의 모습이 매우 구체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1] 제1의 농업혁명은 곡식을 처음 재배해 키우기 시작한 '신석기 혁명'을 의미한다.[2] 느낌이 오겠지만 작업자가 청동을 제조하는 도중 비소 중독으로 사망하기도 하는 등 매우 위험한 물질이었다. 비소 청동은 주석 청동에 비해 내구성이 떨어지고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석 합금 기술이 개발된 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