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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16:33:48

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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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4513> 우르 제3왕조 2대 왕
슐기
𒀭𒂄𒄀
파일:1280px-Cylinder_seal_of_Shulgi.jpg
파일:Shulgi_seal_(drawing).jpg
슐기 왕의 원통형 인장[1]
왕조 우르 제3왕조
전임자 우르남무
후임자 아마르신
재위 기간 우르 제3왕조 국왕
BC 2094년 ~ BC 2046년 (48년)

1. 개요2. 상세3. 왕릉

[clearfix]

1. 개요

우르 제3왕조의 2대 국왕. 우르 제3왕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명군이었다.

2. 상세

슐기는 우르 제3왕조의 개창자이자 초대 국왕인 우르남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목민족 구티 왕조를 몰아내고 수메르 패권을 회복한 영웅 우투헤갈의 딸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슐기는 우르남무의 아들로 태어나 제왕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기원전 2094년 우르남무가 세상을 떠나자 바로 왕위를 물려받았고, 이후 장장 48여년에 걸쳐 우르 제3왕조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파일:Portrait_of_Shulgi_as_a_builder,_on_a_foundation_nail.jpg
슐기 왕을 흙나르는 건설 인부로 묘사한 건축용 청동못.

슐기 왕의 정확한 연대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적인 업적들만큼은 꽤 유명하다. 슐기는 즉위하자마자 인근 도시 데르를 공격해 무너뜨렸고, 재위 18년차에는 딸을 저멀리 엘람의 왕 리바눅샤바쉬에게 시집보내 결혼동맹을 맺기도 했다. 이후 그는 수많은 정복전쟁들을 펼치며 우르 제3왕조의 강역을 넓게 확장했다. 대표적으로 자그로스 산맥의 높은 고원에 살던 룰루비인들을 공격해 복속했고 산악 왕국 시무룸을 병탄했으며 룰루붐 부족은 아예 9번이나 공격해서 끝끝내 멸망시켰다. 재위 30년차에는 안샨의 총독에게 딸을 시집보냈고 재위 45년차에는 엘람의 도시 키마쉬와 후무르투를 공격했으며 엘람의 수도인 수사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거의 쉬지도 않고 수많은 부족들과 전쟁을 벌였던 셈. 하지만 슐기 왕은 적들을 정복하는데만 그쳤고 대부분의 경우 복속시키거나 동화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적들은 끊임없이 쳐들어왔고 결국 재위 말년에는 공격에 지쳐서 주위에 성벽을 두르고 방어태세로 전환했을 정도.

슐기 왕은 외치 뿐만 아니라 내정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일단 재위 23년차에 군사적으로 원정을 몇 차례 성공시킨 이후에는 스스로를 신으로 자칭하며 권위를 높이려 시도했다. 특히 스스로의 신체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재위 7년차에는 수도인 우르와 종교중심지 니푸르 사이의 160km나 되는 길을 뛰어 횡단했다고도 한다. 관료체제를 집중시켜 중앙집권화를 꾀했고 행정, 기록 절차, 세율 시스템, 국가 달력 등을 표준화했다. 특히 그는 발라(bala)[2]라는 조세 또는 조공제도를 정비해 국고를 확충했다. 제국 곳곳의 서기관들은 모든 거래를 꼼꼼히 기록해야 했고, 때문에 우르 제3왕조의 행정문서는 무척 많이 남았다. 현재까지 출판된 문서만 무려 4만 점이고, 앞으로 연구를 기다리는 미출간 문헌만 수십 만 점이다.[3] 슐기 왕은 수메르어 뿐만 아니라 엘람어 역시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서기들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 대부분을 직접 재수정하고 여러 문학작품들과 시를 추가하기도 했다. 슐기가 실제로 직접 작품과 시들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슐기 왕이 문화와 문학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는 의미다. 또한 아버지가 시작했던 우르의 지구라트 공사를 마무리지어 완공시켰으며 왕자 시절에도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우르남무 법전의 내용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4]

3. 왕릉

출처

메소포타미아 군주 중에서 왕릉이 잘 보존된 것으로 유명하다.
[1] 창조주 엔릴로부터 권위를 하사받는 슐기 왕의 모습. 중간의 인물이 슐기다.[2] '교환'이라는 뜻[3] 고대근동, 고대 그리스와 로마 역사를 통틀어도 이렇게 문서 자료가 풍부한 시기는 찾아보기 힘들다.[4] 아예 우르남무 시기가 아니라 슐기 시대에 반포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