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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8B4513> 우르 제3왕조 2대 왕 슐기 𒀭𒂄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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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슐기 왕의 원통형 인장[1] | |
| 왕조 | 우르 제3왕조 |
| 전임자 | 우르남무 |
| 후임자 | 아마르신 |
| 재위 기간 | 우르 제3왕조 국왕 |
| BC 2094년 ~ BC 2046년 (48년) | |
1. 개요
우르 제3왕조의 제2대 국왕. 우르 제3왕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정복군주이자 명군이었다.2. 상세
슐기는 우르 제3왕조의 개창자였던 우르남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목민족인 구티 왕조를 몰아내고 수메르의 패권을 회복한 우루크 제5왕조의 영웅 우투헨갈의 딸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슐기는 우르남무의 아들로 태어나 제왕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기원전 2094년 우르남무가 세상을 떠나자 바로 왕위를 물려받았고, 이후 장장 48여년에 걸쳐 우르 제3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슐기 왕을 흙을 나르는 건설 인부로 묘사한 건축용 청동못 |
슐기 왕의 정확한 연대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적인 업적들 만큼은 꽤 유명하다. 슐기는 즉위하자마자 인근 도시인 데르를 공격해 무너뜨렸고, 재위 18년에는 왕녀를 저멀리 동쪽에 위치한 엘람의 왕 리바눅샤바쉬에게 시집보내 결혼동맹을 맺었다. 이후 슐기는 수많은 정복전쟁들을 펼치며 신흥국인 우르 제3왕조의 강역을 넓게 확장했다. 대표적으로 자그로스 산맥의 높은 고원에 살고 있었던 룰루비족을 공격해 복속시켰고, 산악 왕국인 시무룸을 병탄했으며, 룰루붐족은 아예 9번이나 공격해 끝내는 멸망시켰다. 재위 30년에는 동쪽 안샨의 총독에게 왕녀를 시집보냈고, 재위 45년에는 엘람의 도시들인 키마쉬와 후무르투를 공격했으며, 엘람의 수도인 수사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거의 쉬지도 않고 수많은 부족 및 국가들과 전쟁을 벌였던 셈이었다. 하지만 슐기 왕은 적들을 정복하는데만 그쳤고, 대부분의 경우 복속시키거나 수메르 문화에 동화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 때문에 적들은 끊임없이 우르 제3왕조의 강역을 쳐들어왔고, 결국 치세 말년에는 공격에 지쳐서, 주위에 성벽을 두르고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슐기 왕은 외치 뿐만 아니라 내정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일단 재위 23년에 원정을 몇 차례 성공시킨 이후 스스로를 신으로 자칭하며 왕권을 높이려고 시도했다. 특히 스스로의 신체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재위 7년에는 수도인 우르와 종교 중심지인 니푸르 사이의 160km나 되는 길을 뛰어서 횡단했다고 한다.
또한 관료체제를 집중시켜 중앙집권화를 꾀했고 행정, 기록 절차, 세율 시스템, 국가 달력 등을 표준화시켰으며, 발라(bala)[2]라는 조세 또는 조공제도를 정비해 국고를 확충했다. 그리고 제국 곳곳의 서기관들은 모든 거래를 꼼꼼히 기록해야 했고, 때문에 우르 제3왕조의 행정문서는 오늘날 무척 많이 남아있다. 현재까지 출판된 문서만 무려 40,000점인데, 앞으로 연구를 기다리는 미출간 문헌만 수십 만 점이다.[3] 슐기 왕은 수메르어 뿐만 아니라 엘람어 역시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서기들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 대부분을 직접 재수정하고 여러 문학 작품들과 시를 추가하기도 했다. 슐기가 실제로 직접 작품과 시들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슐기가 문화 및 문학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는 것이다.
또한 부왕 우르남무가 시작했던 우르의 지구라트 공사를 완공시켰으며, 왕자 시절에는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우르남무 법전》의 편찬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4]
3. 왕릉
출처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 왕릉이 잘 보존된 것으로 유명하다.
[1] 창조주인 엔릴로부터 권위를 하사받는 슐기 왕의 모습. 중간의 인물이 슐기다.[2] '교환'이라는 뜻이다.[3] 고대 근동,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렇게 문서 자료가 풍부한 시기는 찾아보기 힘들다.[4] 아예 우르남무 시기가 아니라 슐기 시대에 법전이 반포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