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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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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3. 백제멸망전고구려 멸망4. 나당전쟁과 삼국통일5. 내정6. 최후와 호국대룡 전설7. 무덤(문무대왕릉)

1. 개요

신라 문무왕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출생

諱法敏 太宗王之元子 母金氏文明王后 蘇判舒玄之季女 庾信之妹也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인데, 소판 서현의 막내 딸이고 유신의 누이이다.
삼국사기
김춘추와 문명왕후의 일화를 토대로 속도 위반으로 태어났다는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이 추측은 무리가 있는 것이 문무왕이 문명왕후의 첫째 아이라는 기록은 《삼국사기》 기록이고 속도 위반 이야기는 《삼국유사》 기록이다. 다시 말하면 2개의 기록을 합쳐서 만든 스토리다. 부모의 혈통을 따지고 보면 신라 왕실가야 왕실의 피를 한몸에 담고 태어난 셈이다.[1] 《삼국사기》에서 왕의 본기 도입부에는 항상 왕에 대한 찬평이 간략하게 나오고는 하는데[2] 문무왕은 영특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3. 백제멸망전고구려 멸망

진덕여왕 4년인 650년 아버지 김춘추의 뒤를 이어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654년 아버지 김춘추가 임금으로 즉위하자 파진찬 벼슬에 올랐고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에 임명되었으며 뒤이어 태자가 되었다. 이후 그의 나이 35세 때인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정벌에 직접 참전했다. 660년 5월 26일 서라벌에서 신라군이 출병한 이후, 태자 김법민은 6월 21일 덕물도[3]에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맞이했다.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百艘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蓐食而至" 定方喜 還遣法敏 徵新羅兵馬 法敏至 言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태종 무열왕 7년 기사
이후 태자 김법민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본군에 합류하여 백제의 수도 사비성 공격에도 직접 참전했다. 사비성 함락 직후 태자 김법민이 직접 의자왕의 아들이자 백제의 마지막 태자 부여융에게 화를 터뜨리며 일갈을 날렸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참고로 《삼국사기》를 완독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삼국사기》의 한문은 매우 정제되어 있고 우아하다. 그럼에도 때때로 시대적 상황이 손에 잡힐 듯이 실감나게 쓰여진 부분이 있는데, 부여융을 꾸짖던 문무왕의 발언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걸러지지 않은 피냄새와 더불어 수백년간 지속되어 온 백제와 신라의 서로를 향한 증오가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빠나의 여동생 내 사위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날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삼국사기태종 무열왕 7년 기사
선덕여왕 재위기인 642년 윤충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함락된 대야성에서 죽은 대야성주 김품석의 아내인 김고타소가 여기서 말하는 문무왕 김법민의 여동생이다. 아버지 김춘추는 김 고타소와 김품석의 죽음을 듣고 하루 종일 정신나간 사람처럼 기둥에 선 채로 있었으며 앞에 뭔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김춘추는 정계를 두고 비담김알천으로 대표되는 반대계파와 경쟁하고 있었는데, 사위 김품석을 믿고 대야성에 보냈더니 일을 말아먹고 딸을 죽인 뒤에 자살해서 자신이 정치적으로 덤터기를 뒤집어써야 했다. 그렇기에 김춘추가 고구려, 당나라, 까지 드나들면서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김춘추의 외교전이 딸과 사위에 대한 복수심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어찌됐건 정치적 판단이 선행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반면 문무왕의 발언은 오빠로서 죽은 여동생에 대한 순수한 원한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고타소는 사망 당시 많아도 15세 아래의 나이였고, 당시 문무왕 또한 나이 17세로 청소년 또는 청년기에 있었다.[4] 막 성인이 된 나이에 어린 여동생이 살해당하고 시체감옥 바닥에 파묻히는 고인모독까지 당하면[5]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는 것이 비정상일 정도이다. 따라서 문무왕이 부여융에게 한 말은 '그런 어린 여자애가 성왕을 죽인 것도 아니고 너희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고인드립까지 쳤냐?'라는 항변이라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복수로서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의 아들에게 갚아준 것과 여동생의 일이 20년 동안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트라우마가 된 걸 보면, 남매 간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던 듯 싶다. 진정한 복수귀는 문무왕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661년 6월 부왕인 태종 무열왕이 승하하자 김법민은 왕위에 올라 문무왕이 되었으며, 즉위 후 꾸준히 백제와 고구려 정벌에 힘을 기울였다. 662년에는 태종 무열왕을 도와 백제 정복에 큰 공을 세웠던 장군 김진주와 그의 동생인 남천주 총관 김진흠을 직무 태만으로 처형하고 그들의 일족까지 잡아 죽였는데, 왕권을 공고히 하고 군기를 잡기 위한 시범 사례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일로 인해 훗날 나당전쟁 때 당에 숙위하고 있던 김진주의 아들 김풍훈이 원한을 품고 향도를 자청해 당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대당 총관 진주(眞珠)와 남천주 총관 진흠(眞欽)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삼아 한가로이 지내며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그들을 목베고 아울러 그 일족을 멸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년 기사
662년에는 귀족 세력의 본산 중 하나였던[6] 본피궁(本彼宮)을 해체해 문무왕의 측근인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본피궁의 재산을 나누어주는 등 나당전쟁 중에도 왕권 강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이 시기에는 백제 수뇌부가 660년 의자왕의 항복으로 일단 멸망하기는 했으나, 귀실복신과 승려 도침을 중심으로 한 백제부흥군이 남아있는 백제 땅 대부분을 장악하고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는 당초 약조와 달리 백제 영토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직접 영토로 삼으려 하였으며, 백제 영토에 주둔한 당나라 군사들은 잔혹한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것이 백제부흥군을 더욱 결집시켰다.

한편 문무왕은 당나라가 백제 땅에 설치한 5개 도독부에 대해 항의하기보다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는 데 5개 도독부의 당나라 군사를 이용했고, 나당연합군이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당나라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효율적으로 신라군을 운용함으로써 점차 신라의 직접 지배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당나라는 5개 도독부를 웅진도독부로 단일화시켰으며, 한때 기세를 올리던 백제부흥운동은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온 왕자 부여풍이 새로 합류하면서 백제부흥군 지도층 사이에 틈이 벌어져,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등 자중지란을 벌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의자왕의 장남이자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이 당나라에 끌려간 뒤 귀순해 당군을 이끌고 다시 돌아와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면서 백제부흥군의 동력이 꺾이게 되었다. 부여융이 부여풍보다 형으로 원래라면 왕위에 더 가까운 인물인데다 백제부흥군 입장에서는 얼마 전까지 주군이었던 부여융이 자신들을 토벌하러 오니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663년 8월 17일 왜국에서 보낸 구원병인 10,000명의 군사와 170척의 전함 등이 백제에 도착했으나 백강 하구에서 나당연합군과 전투를 벌여 대패했다. 결국 663년 9월 8일, 그들의 본거지인 주류성이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당했다. 마지막 남은 백제 부흥군의 거점인 임존성은 지수신의 지휘하에 끝까지 버텼지만, 흑치상지의 항복으로 주류성 함락 2개월 만에 임존성 또한 무너졌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문무왕은 백제가 없어지고 남은 고구려에 대해서도 공격을 명했다. 662년에 평양성을 공격하다 역관광을 당하고 오도가도 못하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군량을 수송해주기도 했으며,[7] 668년에도 남쪽에서 수 만명의 군세를 북진시켜 사천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어 평양성을 포위하여 함락함으로써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문무왕의 대(對)고구려 전쟁은 백제 때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비록 신라에서도 대군을 투입하기는 했지만, 668년의 북진은 당시 고구려가 연남생 등의 배신으로 망하기 직전인 상황에서 막타만 친 것에 가깝다.

또한 신라는 백제 멸망 이후부터 언젠가는 당나라와도 대결해야 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665년에는 당나라 측에서 백제의 왕자 부여융과 문무왕을 같은 자리에 모아놓고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화해하도록 맹세하는 취리산 회맹을 강요하였는데, 이는 당나라가 부여융을 바지사장으로 앉혀 놓고 통제하고 있는 백제 지역으로 신라가 침투하지 말 것과 신라도 백제처럼 붕괴시킬 거다는 협박과도 같았다. 이 사건을 통해 당나라가 신라도 고구려ㆍ백제처럼 똑같은 꼴을 낼 거라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아직 신라는 당나라와 당장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전쟁을 대비해 힘을 아껴둘 필요가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고구려를 공략하면 신라의 전력도 소모되고 고구려인들의 원한을 지나치게 살 것이므로 문무왕은 이를 경계했다. 덕분에 나당전쟁이 시작된 뒤 신라는 고연무, 안승 등 고구려 유민들의 협력으로 수월하게 당나라를 몰아낼 수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 역시 진짜 적은 당이고 스스로는 당을 격퇴할 수 없어서 고구려 부흥운동 과정에서 신라의 협조를 환영하고 신라의 울타리가 될 것을 자처했다.

4. 나당전쟁과 삼국통일

사실 당나라는 처음부터 신라에 고분고분 영토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다음 신라까지 수중에 넣어 한반도를 통째로 집어 삼키려고 했던 것이다. 신라도 당나라의 야욕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백제 부흥군, 왜국, 고구려라는 공동의 적들이 아직 건재했기에 두 나라의 충돌이 상당히 미뤄졌을 뿐이다. 사비성을 점령하고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는 백제 영토를 5등분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도독부로 나누어 통치했다. 백제 유민들은 백제 멸망 직후 당나라가 무단으로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며 무자비한 통치를 실시하자 이에 반발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는데 백제부흥운동의 1차적인 타겟은 신라가 아닌 당나라였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신라는 백제부흥운동 토벌에 동참하라는 당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 출병했지만 독자적인 군사 작전을 통해 진압한 영토를 신라 본토에 귀속시켰다.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백제 유민들의 적대감을 이용하여 비교적 손쉽게 이들 영토를 귀속시킬 수 있었으며 신라는 백제부흥운동 진압을 통해 직접 귀속한 영토에 살고 있던 백제 유민들에게 유화책을 펼침으로써 백제계 주민들의 민심을 포섭해 나갔다. 당나라는 백제부흥운동 토벌과 고구려 정벌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에 일단 신라가 백제 땅을 직접 영토로 귀속하는 것을 묵인했다. 결국 663년 당나라는 5개 도독부 중 웅진도독부를 제외한 나머지 4개 도독부를 폐지시켰다.

그러나 663년 백강 전투 이후 백제부흥운동이 완전히 진압되자 당나라는 신라까지 먹으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663년 당나라는 일방적으로 신라에 계림대도독부 설치를 통보하고[8]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665년 이미 멸망한 나라인 백제의 왕자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취리산에서 문무왕과 회맹을 맺게 했는데 이를 보면 당나라가 신라를 나라가 아니라 자기네 행정 구역으로 취급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9] 이러한 당나라의 행보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문무왕은[10] 백제부흥운동 토벌이 진행되던 660년대 초반 이미 나당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구진천 등에게 명하여 군사 훈련무기 개발에 집중했다. 이 때 문무왕은 전국에 174개의 목장을 관청 혹은 김유신 등 주요 귀족 소유로 재분배하였는데 이는 신라의 기병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70~680년대 신라의 급진적 기병 증설은 669년 목장 재분배와 이를 받은 진골 귀족들의 참여를 상정해 볼 수 있다.[11]
六月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 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至西海史冶島 見高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 迎致漢城中奉以爲君
遣小兄多式等 哀告曰 "興滅國 繼絶世天下之公義也. 惟大國是望, 我國先王以失道見滅今臣等得國貴族安勝 奉以爲君 願作藩屛
(670년) 6월,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향하던 중에 서해의 사야도(史冶島)[12]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슬피 아뢰었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대국(大國)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니, 지금 저희들은 우리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王處之國西金馬渚.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머물게 하였다.
《삼국사기》 6권, 문무왕 10년 여름 6월, 모잠이 옹립한 안승이 귀순하자 금마저에 머물게 하다
한편으로 문무왕은 기존 고구려계 주민들에 대한 포섭에도 나섰다. 마침 고구려계 입장에서도 신라는 그래도 당나라보다는 덜 원수진 사이였고, 당나라를 몰아낸다는 목적이 일치했기 때문에 검모잠안승은 신라에 먼저 접근해 왔다. 문무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신라에 형식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관계를 맺는 대가로 군량미 등 전쟁 물자와 군사 지원군을 지원하고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의 합동 작전도 이루어졌다.
遣沙飡須彌山, 封安勝爲高句麗王.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였다.

其冊曰: "維咸享元年歲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子孫相繼 本支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至於建産兄弟 禍起蕭墻釁成骨肉 家國破亡 宗社湮滅 生人波蕩 無所託心 公避危難於山野 投單身於隣國 流離辛苦 迹同晉文 更興亡國 事等衛侯"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 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태조 중모왕(太祖 中牟王)[13]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14]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15]를 덮었다.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고, 본류와 지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1,000리요, 역사가 800년이나 되었다.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가 일어나고 골육간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사직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그대는 산과 들에서 위기와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나라에 투신하였으니, 떠돌아다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고 하겠다.

夫百姓不可以無主皇天必有以眷命 先王正嗣 唯公而已 主於祭祀非公而誰 謹遣使一吉飡金須彌山等 就披策命公爲高句麗王 公宜撫集遺民 紹興舊緖 永爲隣國 事同昆弟, 敬哉敬哉. 兼送粳米二千石, 甲具馬一匹, 綾五匹, 絹細布各十匹, 綿十五稱. 王其領之."
무릇 백성에게는 주인이 없으면 안 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한 후계자로는 오직 그대가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할 사람이 공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전하여 그대를 고구려 왕으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아들이고 옛 왕업을 이어 일으켜, 영원토록 이웃나라로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000섬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비단 5필과 명주와 가는 실로 짠 베 각 10필, 목화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삼국사기》 6권, 문무왕 10년 가을 7월,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고 책문을 전하다
670년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했으며 나당전쟁의 시작인 요동 선제 공격도 신라 장수 설오유와 고구려 유민 장수 고연무가 힘을 합쳤다. 순순히 물러갈 생각이 없는 당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옛 백제인들과 옛 고구려인들을 이 때부터 삼한일통의 기치로 끌어모으기 시작한 듯하다.[16] 비록 고구려부흥운동석문 전투, 호로하 전투 등 나당전쟁 전반부의 몇 차례 패배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문무왕은 귀순한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17]에 정착시켰다. 670년 문무왕은 요동을 선제 공격함으로써 당나라와의 국운을 건 정면 대결에 들어갔다. 676년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당나라가 요동 이서로 철군했으나 언제 다시 당나라가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일단은 정세가 안정되었다. 677년 사록관을 설치해 전쟁 공신들의 논공 행상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11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데 이 때 보덕국[18] 사신을 같이 데리고 가서 보덕국이 신라의 속국임을 명확히 했다. 678년 선박 운용 전담 부서인 선부를 설치하고 지금의 원주시에 북원소경을 설치해 신라의 소경은 557년 설치한 국원소경(충주시)과 더불어 2곳이 되었다. 678년에는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보내 백제 지역의 직할 통치를 본격화했다.

679년은 문무왕 치세 말기에서 눈에 띄는 해인데 의봉 4년 개토(儀鳳四年皆土)라고 쓰인 기와가 경주 전역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의봉 4년은 679년인데 개토는 '모두 다 (신라의) 땅'이라는 의미로[19] 당시 신라 조정은 실질적으로 당나라와의 전쟁이 끝났다고 판단해 679년을 삼한일통의 원년으로 간주했다는 것이고 이는 학계에서 어느 정도 다뤄지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679년에는 탐라국을 경략하기도 했고[20]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기 시작했다. 월지(안압지) 부근에 동궁을 건설했으며 이 해에 왕경 남쪽의 남산성을 증축하는 대대적인 토목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재위 말년인 681년에는 도성 주위를 빙 둘러싼 성벽을 지으려고 했는데 이건 의상 대사의 간언[21]을 듣고 그만두었다. 문무왕 입장에서는 중국의 도성을 본떠서 서라벌을 규격화된 수도리모델링하려는 의도였거나 아니면 나당전쟁까지 내내 마음 졸이며 살았던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듯하다. 하지만 전란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지 얼마 되지 않아[22]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벌인 것은 조선광해군이나 흥선대원군의 사례처럼 분명 백성에게 무리가 가는 조치였기에 충언을 듣고 그만뒀다는 점에서는 더 낫지만 명군으로 인식되는 문무왕의 실책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남산 무장사(鍪藏寺) 자리에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이후 쓸모가 없어진 병기와 투구를 묻었다고 한다.

5. 내정

내치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앞서 썼던 김진주, 진흠 형제와 그 일족 몰살을 비롯해 668년 한성 도독 박도유를 숙청,[23] 670년에는 한성주 총관 수세가, 673년 아찬 대토 처형 등 당나라와 내통한 귀족들을 모조리 주살하는 등 강력하게 내부 결속을 다졌다. 이렇게 진골 귀족에 대해서는 견제와 탄압을 강행했던 반면 하급 관료나 지방 호족, 백성들에 대해서는 우대 정책을 펼쳐 육성, 보호했다.

행정으로는 9주 5소경의 근간을 마련했으며, 통일신라의 군사 체제 또한 문무왕의 재위 기간때 정비되었다. 나당전쟁을 마지막으로 수백년간 계속되었던 삼국시대의 전란이 끝나자 병기를 녹여 농기구로 바꾸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농업을 다시 회복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673년에 처음으로 에 각각 2명씩, 총 133명(9주 18명 + 115개 군)의 외사정, 즉 감찰관을 파견했다. 이는 중대 전제왕권이 추구하는 관료제의 올바른 시행을 위해 관리의 청탁을 살피는 목적이 있었다. 한편 당시는 나당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기였는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지방관과 그를 보좌하는 행정직을 중앙에서 통제한 것이다.
율령법흥왕 때 처음 반포되었으나 문무왕은 이를 꾸준히 개량하였다. 입법기관인 이방부를 확대하고 소속 관원을 증설했으며, 문무왕의 유조에서도 율령격식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곧 개정하라고 명령해 신문왕대에도 지속해나갔다. 이러한 조치들은 신라의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에 도움이 되었으며 신라에서 가장 왕권이 강대했던 시기라 평가되는 중대 왕권의 기본적 골격과 체제를 다졌다.

이런 왕권 강화 정책으로 관료제가 성장하고 귀족 수장직인 상대등의 성격 변화, 그리고 국왕의 행정 대변직인 중시의 상대적 강화 현상이 나타났다.

오랜 전쟁으로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한반도를 복구하기 위해 대사면을 시행했다. 사채를 탕감해 이자를 갚지 못해 사노비로 전락할 사람들을 구제했고, 가장 극악한 범법자인 5역죄를 범해 사형이 확정된 자를 제외한 모든 범죄자를 풀어주었다. 한편 화폐 역할을 하던 견, 의 길이 기준을 줄여서 주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였다.

종교적으로는 이전 중고기와 달리 화엄종을 밀어주었다. 중국에서 화엄학을 유학하고 돌아온 의상의 화엄사상을 잘 나타내주는 《화엄일승법계도》에 따르면 우주의 다양한 현상이 결국 하나라고 하며, 이는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뒷받침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5악을 위시한 전국 각지 명산에 화엄 계통의 사찰을 세웠는데, 유명한 것이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화엄사 등 열 곳이라 이들을 '화엄 10찰'이라고 한다.

멸망한 백제 출신 승려인 경흥 법사를 나라 전체의 불교 수장직인 국사로 추천해 종교의 통일을 추구했으며, 백제 시대의 미륵사왕궁리 유적의 사찰 등은 본래 왕실 사찰 용도였기 때문에 일개 지방의 사찰이라기엔 규모가 너무 컸지만 백제 멸망 후에도 보수해 계속 유지했다.[24]

6. 최후와 호국대룡 전설

문무왕은 나당전쟁으로 삼국시대를 종결시킨 이후 5년 뒤인 681년 음력 7월 1일에 승하했다. 공교롭게도 김유신과 기일이 같다.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 마지막을 보면 문무왕의 유조 전문이 실려있는데 이를 보면 문무왕은 자신의 치적에 대해 무척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일통도 완수하고 민생도 안정시켜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았고[25] 당시 세계적인 초강대국 당나라에 맞서 나라를 지켜냈으니 자부심을 가질 자격은 충분했을 것이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살펴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온갖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 더욱 심한 병이 되었다. 목숨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홀연히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중략)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26] 조조의 서릉에는 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27]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돼,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해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 문무왕 21년에 수록된 문무왕의 유조 중에서
라는 유언을 남겼고 서기 681년에 승하하자 역대 신라 왕들이 대규모 고분에 묻혔던 것과 달리 불교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었다. 화장을 했다는 기록은 신라 당대 기록인 문무왕릉비에서도 확인할수 있다.
命凝眞, 貴道賤身, 欽味釋典, 葬以積薪, 滅粉骨鯨津, 嗣王允恭, 因心孝友▨, 鴻名與天長兮, 地久...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도(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크나큰 이름,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28]
문무왕릉비
문무왕의 유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용이 되어 신라를 수호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바람과 더불어 본인이 승하할 경우 화장하라는 유언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낭산 기슭 능지에서 화장한 뒤 동해 바다에 능을 조성했는데 오늘날의 대왕암문무대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29]
왕이 평소에 항상 지의법사에게 이르기를 "짐은 죽은 뒤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기를, "용이란 축생의 업보인데 어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랜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제2, 문무왕 법민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세속에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용이 되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이 되어 신라를 수호하겠다는 유언을 남긴 기록이 나온다.[30][31] 사실 위 《삼국유사》의 내용을 봐도 알 수 있듯 용이라고 해도 결국은 사람이 아닌 짐승이니 불교식 윤회관으로는 그리 추천할 것까지는 못 되는 일[32]로 승려가 만류하기도 했지만 문무왕의 의지가 꽤 확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어서까지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했으니, 나라와 백성들을 생각하는 문무왕의 진심을 알 수 있다. 아들 신문왕 시대에는 문무왕을 따라 기리기 위해 감은사를 세웠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문무왕이 왜구를 막기 위해 동해의 용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틀렸다고 할 수 있다. 문무왕은 불법을 수호하고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된다고 말했을 뿐, 딱히 왜구 하나만을 막기 위해 용이 되겠다고 말한 건 아니다. 사실 문무왕 치세 당대에는 오히려 당나라의 재침이 훨씬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삼국 통일 이후 일본과는 관계가 좋다고 말하긴 어려워도 나름 교류를 했던 것에 반해, 당나라와는 발해가 들어서기 전까지 거의 관계가 끊어지다시피 했었다. 애초에 일본과 빠르게 다시 교류를 시작한 것 자체가 당나라를 견제한 측면이 있기도 했다. 물론 감은사의 내력[33][34]이나 원래부터 자주 대립했던 신라와 일본의 관계[35]를 고려하면, 나라를 위협하는 외적 안에는 일본 역시 존재했겠지만 말이다.

한편, 사서의 내용이 아닌 민간의 구전 설화에서는 문무왕이 용으로 승천하면서 왜적들의 침입 경로가 되는 울릉도 근처의 열두 개의 섬을 쳐서 없앴고, 마지막에 울릉도를 치려 했을 때 옥황이 말려[36] 울릉도는 남겨두었다는 이야기도 있다.[37] 다만 이런 종류의 설화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부대왕, 경순왕의 설화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신라에선 문무왕이 죽은 이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된 것으로 여겨졌다. 전술하였듯이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왕이 용이 되었다는 세속의 이야기를 기록하였고, 당시 신라인들은 감은사에 용이 된 문무왕이 지나갈 수 있게끔 동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기도 했다. 또 만파식적 설화에서는 문무왕이 삼한을 지키는 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일관[38]이 얘기하는 부분이 있으며, 만파식적 자체도 바닷 속의 큰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신문왕에게 보내준 것이라 한다. 지금도 무속에서는 용왕으로 섬겨지고 있기도 하다.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군주 56명 중 유일하게 두 권 분량을 차지한 위엄 있는 왕이다. 《삼국사기》의 권6, 권7이 모두 〈문무왕 본기〉이다.[39] 어쨌든 여러 이야기거리를 남긴 것도 그렇고 호국대룡 전설이나 신문왕만파식적을 주는 것도 그렇고, 문무왕은 아버지 태종 무열왕 이상으로 신라인들에게 굉장히 특별한 의미로 기억된 임금이었던 모양이다.
文武大王之理國也 早應天成家邦▨晏 恩開大造功莫能宣
문무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일찍이 하늘의 부름에 의해 천하를 편안히 하시고, 은혜를 여시어 크게 이루어졌으니 그 공을 능히 선양하기 어렵다.
애장왕 때 건립된 고선사 서당화상탑비 중에서

7. 무덤(문무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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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moonmoo.jpg
문무대왕릉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 제158호.


[1] 그래서인지 문무왕도 가야 멸망 후 제대로 제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수로왕의 제사와 능역 관리에 신경을 썼다.[2] 용모가 웅장했다거나 백성을 사랑했다거나 앞일을 미리 예측할 줄 알았다는 등.[3]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4] 현대 문학 작품에서는 이상하게 문무왕과 고타소의 관계가 남동생과 누나로 설정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앞에서 인용했듯이 《삼국사기》 원문에는 분명히 김고타소를 여동생(妹)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관계가 역전된 것은 무열왕과 문명왕후가 이어졌던 이야기를 선덕여왕 즉위 이후인 632년 이후의 일로 인식하면서 벌어진 듯하다. 무열왕과 문명왕후가 야합했던 시기는 진평왕 대로, 선덕여왕은 공주 신분이었다.[5] 《삼국사기》에는 백제 성왕복수로 그랬다는 데 반해,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의 목이 도당에 파묻혀 몸통만 회수했다고 한다. 다만 성왕 항목에도 나와있듯 사실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김품석 부부의 유골도 나중에 김유신이 협상으로 돌려 받았다.[6] 석탈해의 석씨 가문의 본궁으로 추정한다.[7] 이걸 근거로 김유신을 까는 자들은 김유신을 쌀 배달꾼이라고 비하하기도 하지만, 군사학에서 보급은 직접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8] 백제 영토와 달리 신라 영토는 당나라가 직접 지배하고 있지 못했으므로 계림도독부는 이름 뿐인 상징적 기관이었다.[9] 당연하지만 계림도독부는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이후 폐지되었다.[10] 본인들이 당과 연합해 백제를 무너뜨린 것이었음에도 당이 혼자서 먹으려고 한 것이니 당연히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백제 왕실의 항복 당시 자신이 직접 얼굴에 침을 뱉었던 부여융과 같은 취급을 받은 것에서도 크나큰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11] 서영교, 〈신라 통일기 기병증설의 기반〉, 《역사와 현실》[12] 현재 인천의 소야도[13] 주몽을 의미[14] 고구려, 신라, 백제의 별칭.[15] 한군현의 현도군에서 유래한 별칭으로 역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의미.[16] 신라의 9서당 중 신라인이 아닌 백제인, 고구려인, 말갈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무려 6개다.[17]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 백제 무왕미륵사왕궁을 세웠을 정도로 사비, 웅진 다음 가는 백제의 중심 지역으로 고구려인을 이용해 백제인을 견제한 것이다.[18] 당시에는 보덕국이라고 하지 않고 '고려'라고 했다.[19] 광개토(廣開土)와도 뜻이 통한다.[20] 사실 탐라국은 476년 백제의 속국 → 662년 군주였던 좌평 도동음률이 신라에 항복한 상태였다. 679년의 탐라 경략 기록은 나당전쟁으로 신라가 바쁘다가 나당전쟁이 끝난 이 때 실질적으로 복속했다는 기록이거나 그 사이에 탐라가 마음을 바꿔 독립을 시도해서 다시 공략했다고 보기도 한다.[21] "비록 들판의 띠로 엮은 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그것이 곧 복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 아무리 사람을 힘들게 하여 성을 쌓아도 이익되는 바가 없습니다".[22] 특히 나당전쟁 때 당나라의 대군과 전쟁을 치르느라 당시 신라는 경제적으로 많은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23] 박도유가 백제부흥군과 공모했기에 처형했다 하는데, 668년의 백제부흥군이란 웅진도독부, 즉 부여융 등 당나라 휘하의 세력을 말한다.[24] 당간지주나 사리함 등 통일신라 유물도 발견되고 있어 백제 멸망 이후에도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25] 삼국시대 수백년간 전쟁은 사람들에게 일상이었으나 문무왕 시대에 그것이 끝나, 단발적 반란이 아닌 전면 전쟁은 200여 년간 사라지게 되었다. 백성 입장에서는 안정된 삶이 제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업적은 확실히 크다.[26]월절서》에서 "오왕(吳王) 합려가 죽어 호구산(虎丘山)에 장사지냈는데, 혈지(血池)를 만들고 황금주옥(黃金珠玉)으로 물오리와 매를 만들어 띄웠다"고 한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46~247쪽.[27] 한마디로 합려조조처럼 화려한 업적을 쌓고 불꽃 같은 삶을 산 인물들도, 결국 죽고나면 이름만이 남아 전해진다는 소리.[28] 이후 글자 훼손이 심해 알아볼 수가 없다.[29] 다만 대왕암에 문무대왕릉이라고 써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전해져오는 이야기일 뿐이라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감은사이견대의 위치를 보아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다. 울산 앞바다에 있는 고래바위가 문무대왕릉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지만, 위치를 고려할때 극소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30] 문무왕이 용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편찬된 《삼국유사》 뿐 아니라 당시 신라인들이 직접 남긴 울주 천전리 각석에도 남아있는데, 각석의 우측 하단에 보면 신문왕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세운 감은사의 3층 석탑을 연상시키는 3층 석탑과 그것을 감싼 용, 그리고 석탑에 문왕랑(文王郞, 문무왕의 동생 김문왕)이라고 써 있는 것이 그것이다. 다만, 문무왕의 동생 김문왕은 문무왕이 죽기 한참 전에 이미 죽었다.(문무왕 5년 이찬 김문왕이 죽었다.)[31] 다만 만일 해당 내용을 울산지역신문 기사에서 참조해왔다면, 그 기사는 김문왕이 죽은 문무왕을 기리며 각석에 용을 그렸다며 시간순서를 뒤집어 놓았으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암각화를 오래 연구해 온 울산대 전호태 교수는 '용 그림의 위쪽에 있는 명문은 '687년(신문왕 7년)에 승려의 무리가 오다'고 해석 가능한 부분으로, 680년 세상을 떠나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됐다는 대왕암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라고 밝혔다.[32] 축생도는 인간도 보다는 한 단계 아래로 취급되며 때론 생전의 죄악으로 고통받아야 하는 이들이 받는 벌의 일종이기도 한데 지옥도에 떨어질 정도의 죄인 중에선 지옥에서의 벌로도 모자라 아귀도, 축생도까지 돌아가며 벌을 받는 이들도 있다.[33] 기록에 따르면 왜군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진압하기 위해 지은 호국 목적의 사찰이라고 한다. 다만 완공 자체는 문무왕 생전 하지 못했고, 신문왕이 아버지를 기리며 완공한 것이다.[34] 참고로 비슷하게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군를 막기 위해 사천왕사를 짓기도 했다.[35] 일본은 당장 직전까지 백제와 동맹을 맺은 적국이었으며, 애초에 가까운 만큼 왜적으로부터의 침입 자체도 자주 있었다. 통일 이후에도 신라와 일본이 빠르게 교류를 회복한 것과 별개로 서로 감정이 좋진 않아서, 결국 무산 혹은 격퇴 당하긴 하나 일본 쪽에서 신라 침공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문무왕 대의 국제 관계와 연관이 있다고 보긴 어렵지만 통일 신라 말 혼란기에는 신라구가 준동하여 일본 규슈를 노략질하기도 했다.[36] 울릉도가 한반도의 수구멕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37] 실제로 울릉도 근처에는 여러 해산이 자리 잡아 있기에, 실제 있었던 지진 등의 자연 현상과 관련된 설화일 수도 있다.[38] 천문관측과 점성을 하는 삼국시대의 관직[39] 참고로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는 〈보장왕 본기〉가 2권(권21, 22)이고, 백제는 〈의자왕 본기〉가 1권(권2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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