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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및 성장
1951년 9월 27일(음력 8월 27일),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황강동(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서 아버지 김승헌(金升憲, 1916. 7. 26 ~ 1977. 6. 23)과 어머니 창녕 조씨 조순조(曺順祚, 1919. 3. 22 ~ 1973. 12. 11)[1] 사이의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영천국민학교, 경북중학교(現 경운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전공을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에 당시 영남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사촌형 김장수(金章洙, 1949. 8. 14 ~ )가 전공으로 경영학을 추천해서 경영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2. 노동운동가로서 김문수
△ 노동운동가 시절 김문수[2] |
본디 매우 유명한 운동권 지도자 출신이었다.[3] 사실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무려 20년 이상을 노동운동에 투신하며 활동한, 그야말로 1980년대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전설이다.
그 시절 노동운동가들 대다수가 김문수를 따르거나, 혹은 김문수가 이끌던 조직과 깊게 연계되어 활동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당시 김문수는 노동운동계의 김근태[4]라고 볼 만큼 절대적인 인물이었고, 수많은 노동운동 후배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1학년 때 훗날 민주당의 국회의원이 되는 5년 선배 심재권의 권유로 서울대 학생운동 서클 중 하나였던 "후진국 사회연구회[5]"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2학년 때 김근태[6]에 의해 공활을 경험하고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김문수는 70년대 초중반까지는 학생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병행했는데 스스로 회고하기를 당시 진로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공장에 위장취업 후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80년대에 전설적인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여사 역시 생전에 자신이 평소 아들로 대우하던 장기표와 함께 김문수 역시 "내 아들"이라 불렀다. 심지어 김문수가 자신의 적과 같은 한나라당의 소속 정치인이 된 지 한참 지난 시절에도 언론 인터뷰에서 "차라리 잘했다 생각했다. 그 나쁜 놈들한테 고개 한 번 숙여서라도 문수도 이제 국회의원 한번이라도 해야지 싶다. 우리 기표도 그렇게라도 했으면 좋겠다.[7]"라고 말했을 정도로 김문수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훗날 한나라당 소속임에도 이소선 여사의 장례식을 지킨 사람 중 한 명도 김문수였다.
그의 얼굴 한번 못 본 신인급 노동운동가 청년들도 입소문으로 퍼진 '노동투쟁 신화 김문수'의 파란만장한 전설들을 들으며 존경했다고 하니 그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대학 제적[8] 후 스스로 공장에 위장취업하여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지내면서 밑바닥부터 노동운동을 한 인물이다.
본격적으로 대학생들의 위장취업이 시작되는 시기가 1980년대다. 1980년대의 대학생들, 특히 노동운동계에 뛰어든 20대 젊은이들에게 김문수는 절대적인 전설이었다. 당시 김문수의 연설 내용을 그대로 적은 필본이 돌아다니곤 했다고 하는데, 그 연설을 못 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필본을 돌려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경우들도 흔히 있었다고 할 정도니... 상술된 김문수의 청년기에 대한 진보 정치인들의 발언이 과장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김문수는 198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다.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의 설립에 기여했는데, 1986년 김문수가 인천 5.3 운동으로 체포되자[9], 그 뒤를 이은 인물이 심상정이었을 정도다! 심상정의 결혼을 주선해 준 사람도 김문수[10]였고 김문수가 고문을 받으면서도 심상정의 위치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유시민 작가와 티비 토론을 하러 나와서 과거 서로를 동지로서 보호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덕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이 시절 안기부에서 고초를 겪은 이야기는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최민희 의원의 연설 중에 짤막하게 언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6월 항쟁 이후로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본격적인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면서 이재오, 장기표, 이우재 등과 손을 잡고 재야민주화운동 세력, 노동운동 세력 일부를 모아서 1990년에 민중당을 창당[11]하고 본인은 공장 밀집지역인 서울 구로(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는다.[12] 하지만 민중당은 1992년 14대 총선 때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득표율 미달로 해산되면서 말 그대로 물을 먹었다. 그리고 같은 해 14대 대선에서 재야를 비롯한 비 김대중-김영삼 계열의 민주화운동 추진 진영에서 민중후보로 추대했던 무소속 백기완도 1%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보이며 낙선했다.
백기완의 낙선과 함석헌의 죽음이 김문수의 민주화운동 포기 및 전향 선언과도 어느정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고 이 시점부터 진보진영의 인사들과도 척을 지며 본격적으로 김문수에게 가장 흔히 쓰이는 별명 중 하나인 변절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또한 이 때 백기완과의 악연이 김문수가 민자당에 들어가는 계기로 지목되기도 한다.[13]
이후로 1년간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1994년 김영삼에게 영입되어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우익으로 전향한다. 이 때 김영삼은 민주자유당이 과거 군사정권 잔당[14]이라는 색채를 지우기 위해서 재야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그 중에 가장 네임드가 김문수와 이재오였다. 그리고 이 둘을 따라서 엄청난 숫자의 노동운동가, 재야인사들이 민주자유당에 합류한다.[15] 이후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도 지내면서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대표적인 대권 잠룡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사실 김문수 입장에서는 1970년대까지 자신이 해왔던 학생운동의 경력이 끝나고, 1980년대에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방향이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었으니 전향을 하는 것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20년 이상 김문수는 현장중심의 사상을 가진 노동운동가였다.
하지만 당연히 전향에 따른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고 아직까지도 김문수는 진보 쪽 인사들에게 "노동운동을 배신한 변절자"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다.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김문수를 보호하기 위해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도 많았다.[16] 그러나 당시 국민의힘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을 완전히 장악한 김영삼에 의해 독재정권 인물들이 죄다 쫓겨나가고[17] 상도동계, PK 출신들과 개혁 공천으로 영입된 인사로 한 번 물갈이된 당이나 다름 없었다는 점은 김문수의 행보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신한국당 자체는 독재정당의 역사를 공유하지만, 노태우와 민정계가 3당합당으로 끌어들인 김영삼에게 잡아먹혀 물갈이가 된 상태라는 점이다. 하지만 탄핵 정국 이후 뉴라이트 세력이 기득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속칭 상도동계, 소장파들은 대부분 전 군부세력과 손을 잡기 시작했으며, 김부겸을 비롯한 일부 소장파들은 탈당해서 열린우리당으로 들어갔다.[18]
어찌되었든, 김문수 이외에도 운동권 중에는 1990년대에 우익 전향자가 속출한 건 흔한 일이었다. 다만 그 운동권 출신 중에서도 김문수가 가장 거물급이니 유명세를 탄 거다. 이런 온건파 출신 중엔 "87년 이전이면 모를까 민주화가 된 이후엔 이런 호전적인 운동권 마인드가 오히려 도움이 안될 수 있다"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므로[19], 김문수와 연관된 여러 행보가 비판 사유가 될 순 있어도, 그가 운동권 성향을 떨쳐냈다는 이유가 비난 사유가 되기는 힘들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상술된 이소선 여사(전태일의 모친)는 이미 김문수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진보언론과 인터뷰할때 한나라당 쪽을 "나쁜 놈들일지라도"라고 부르면서도 "김문수는 내 아들이다. 나는 문수가 어디 가든 원망한 적이 없다. 김문수도 국회의원은 했으니 다행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이소선은 장기표도 그렇게라도 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했었다.
김문수가 비록 지금은 보수 성향의 새누리당 소속이라고 하지만 과거를 잘 살펴보면 민주화운동이자 야당 인사였던 김영삼이 운동권 출신 김문수를 끌어들여 자신의 당인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으로 영입시킨 것으로, 그 당이 현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으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니, 정치 입문 당시부터 우익적인 색채를 띠었다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며, 당의 방향에 따라 운동권 색을 버리게 된 모습이 강하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김영삼이 당시 당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대다수가 야당 인사(상도동계)이거나 민주화에 협력하던 사람(손학규, 이재오, 노무현[20], 김문수 등)이었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에 대해 보수정당으로 간 뒤에도 개혁파로 남아 보수정당의 각성을 추구하던 사람들[21]과 달리, 극우적 발언도 서슴지 않으면서 우익층의 환심을 사려는 것을 볼 때 결국은 잿밥에 더 관심 있는 것 아니냐고 김문수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
3. 정치 입문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민주연합 박규식 후보, 김대중의 측근인 새정치국민회의 박지원 후보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이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7대 총선 앞두고는 최병렬 당시 당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가결을 책임지고 사퇴해 치러진 전당대회에 당대표 경선에 출사표를 냈지만, 당선자인 박근혜, 2위를 기록한 홍사덕에게 밀린 3위를 기록하였고[22], 제17대 국회 개원 앞두고 원내대표[23]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상도동계 서울 서초구 을 5선 중진인 김덕룡 의원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하여 17대 국회의원직은 사퇴하였다.[24]
3.1. 경기도지사 시절
△ 김문수 당시 경기도지사 |
민선 최초로 경기도지사를 연임할 만큼[25] 상당히 좋은 능력과 정치 감각을 발휘하였다. 그가 창시한 개념인 GTX를 2018년 들어 오히려 더불어민주당이 밀어주는 것만 봐도 증명된다.
김문수의 도지사 도정 중 가장 큰 성과로 거론되는 것은 경기도 최초의 대중교통 환승할인이 적용된 수도권 통합 요금제 도입이다. 2004년 서울시 대중교통 체계 개편 이후 2년 넘게 지지부진하던 것을 2006년 7월 취임 후 곧바로 재협상에 나서서 수도권 통합 요금제가 마침내 1년 만인 2007년 7월 1일부터 시행되게 하였다.[26]
김문수는 애초 대중교통 분야에 관심을 많이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일각에선 예전부터 그가 철덕이라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또한 택시 면허를 보유하여 젊은 시절 택시 기사로 일했던 경력을 살려[27] 정치인이 된 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택시 기사 체험을 하고 다니며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속칭 택시법을 찬성하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28] 과거 PD파, 즉 노동운동권에 있으며 이런 대중교통에 관심을 가졌고 연장선상으로 택시 기사 체험이란 파격을 선보인 것이란 추측이 많다. 후술되어 있듯 대중교통만큼은 주민과 매우 가까운 행보를 보인 것. 정치인이 택시기사로 민심을 청취하는 것도 김문수가 최초다.
경기남부와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경기순환버스도 김문수 도지사의 업적이다. 경기순환버스 운영의 활성화를 위해 2013년 4월 1일 수원시와 의정부시를 최단거리로 빠르게 통행하는 경기순환버스 8401, 8409번 노선을 시행하게 되었다.
2018년 범 수도권 부동산 시장을 뜨겁게 달궈온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역시 최초 기획자가 김문수였다. 아이러니한 건, 최초 제안자는 김문수인데 2018년 들어서 GTX를 적극 추진하는 쪽은 이재명 경기도지사, 심상정 정의당 의원[29] 등 진보 성향 정치인들이라는 것이다.
2012년 18대 대선 경선에서 8.7%를 득표하여 승자인 박근혜와 큰 차이나는 2위를 기록했다. 나머지 하위권 3~5위 후보의 득표를 합한 것보다 많은 득표였으나 박근혜의 득표는 거의 10배에 해당하는 84%(...) 반영비율 20%인 여론조사에서 75:16으로 조금 더 따라 붙은 것이 위안거리였다.
임기 말인 2013년에는 일본 기후현과 관광, 도자기 분야, 저출산 고령화 대책 등에 대해 교류 협력했다. 김 지사는 “일본은 한국보다 먼저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고착화했다. 한국도 과거 일본처럼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부동산 침체와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며 “일본의 앞선 경험이 한국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해 교류 협력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후루타 하지메 지사는 공감을 표하며 “기후현에서는 5년 전부터 인구감소 저출산·고령화 대책이라는 10개년 장기구상을 세웠다”며 공감을 표했다. #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면 새로운 화두가 되었을 것이나 다소 만시지탄.
3.2. 20대 총선 출마와 실패
△ 김문수 전 경기지사 |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하며 경기도지사 임기는 재선에서 마감하게 됐고, 8년간의 도정 활동을 마쳤다. 대신 같은 당의 남경필 후보를 지지하며 당 차원에서 활동을 벌여갔다.[30] 한편 7월 30일로 예정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경기도 지역 의석 수가 2자리나 있다 보니[31] 김문수가 도지사 3선 대신 해당 지역구 재보궐선거에 출마해서 국회 복귀를 노릴 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었지만, 선거법 상 경기도 지역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출마를 위해서는 선거 120일 전에 지사직을 사퇴해야 했는데[32] 최종적으로 사퇴하지 않아 무산됐다. 이후 정몽준의 서울특별시장 출마로 인해 치러지게 될 동작구 을 재보궐선거 후보로도 거론됐지만, 본인이 직접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33]
도지사 임기 종료 후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을 맡게 되었으며, 박근혜 정부의 국무총리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2015년 6월, 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며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는 더민주의 다크호스 김부겸 전 의원과 빅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이후 2015년 8월 새누리당의 수성구 갑 당협위원장으로 내정됐고, 동시에 기존 경기도 자택을 처분하고 수성구 시지동에 아파트를 마련해 입주했다고 한다. 다만 대권잠룡으로까지 거론되는 양반이 험지가 아닌 텃밭에 출마한다는 것에 비판을 가하는 당 내 기류도 있었으나, 김문수 본인은 수성갑이 험지라며 절대 쉬운 지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김문수는 영천시 태생 - 경북중학교[34] - 경북고등학교, 김부겸은 상주시 태생 - 대구중학교 - 경북고등학교 출신으로, 둘 다 경북 출생 - 대구에서 성장 - 타지에서 정치 생활을 거쳐 대구에서 재도약 코스를 노리고 있으며, 김문수가 김부겸의 고등학교 5년 선배이다.
△ "수성갑은 험지" |
그리고 예정대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한구 현직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한 대구 수성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해당 지역구에서 오랫동안 지역주의에 맞서 도전해 온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고 만다.
그나마 2위로 낙선하였긴 하지만, 이것도 무소속이나 기타 정당 후보도 없는 1:1 대결에서 37.69% : 62.30% 로 무려 득표율 24.61%p, 득표 수 33,536표 차 대패로 낙선[35]하며 김부겸에게는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최초의 민주당계 대경권 소속 국회의원이라는 영예를 안겨주면서 김문수의 입장에서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김문수 본인이 험지 출마론을 거부하고 선택한 보수 초강세 지역인 대구에서 참작이 불가능한 대패를 당해 대권 잠룡으로서의 위상은 회복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아예 정계 복귀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 걱정해야 할 상황이자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도 있다. 상대방인 김부겸 후보는 이후 당 내 대경권 맹주이자 전국구 정치인, 원내대표 후보군, 당 대표 후보군, 대권주자로 위상이 압도적으로 상승했다.
특히 대구가 옛부터 보수정당의 텃밭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처참하게 박살난 후보는 김문수 후보가 유일한데, 다른 새누리당 낙선자들은 무소속 후보자들에게 패한 것이지만, 그래도 이들 무소속 후보들은 거의 전부가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보들임을 감안해야 한다. 결국 김문수만 유일하게 텃밭인 TK에서 야당에게 처참하게 개박살난 새누리당 후보인 셈이다.[36]
물론 김부겸에게 패배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대구에서의 지역 기반이 없다시피한 점을 꼽을 수 있다. 김문수 본인은 대구의 바로 옆 동네인 경상북도 영천 출생에 경북고등학교 출신으로써 대구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연속으로 출마하면서 꾸준히 오랫동안 지역 표심을 다지고 도전을 해 온 김부겸에 비해 김문수는 국회의원 지역구도 3연속으로 경기도 부천시였고, 경기도지사를 2번 연임하는 등 경기도에서만 주로 활동하는 등 사실상 경기도민이었고, 인맥과 개인 조직도, 정치적 기반까지 모두 경기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다시 경기도 내 지역구에 나오겠거니 예상했는데, 느닷없이 대구에 나온 통에 경기도 사람이 뭔데 대구에 오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경기도민들이나 대구시민들이나 하나같이 너무도 뜬금없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거기에다 당시 수성구 갑 현역 의원이던 이한구가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지역구를 방치한 데 이어 이미 원내대표 임기가 끝나자마자 2년 전에 짐싸고 경기도로 거처를 옮겨버린지라 지역에선 비판 여론이 팽배해 있어서 오히려 새누리당 후보로 나선 것이 페널티가 되어버린 셈이다.
결정적으로 김문수는 도지사 시절 대표적인 수도권 규제 완화론자였다. 경기도의 산업 발전 명목으로 비수도권에 있던 대기업 공장이나 연구소 등을 죄다 경기도로 이전하게끔 하는 등 수도권으로 몰리게 해서 최대 피해자 중 한 곳인 경북 구미나 대구 등 영남권에서 곱게 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대경권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뿐더러 뭘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수도권으로 뺏어가려한 양반이 그저 학연, 지연, 당이란 뒷배경만 믿고 텃밭 대구에 출마했으니 이러한 모습은 대구시민들에게 모욕감을 줄 수 밖에 없었고, 구미로 출퇴근하는 인원이 많은 대구에서는 곱게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범새누리당 계열 이외의 인물로 찍을 만한 후보를 낸 두 지역구들인 북구 을과 수성 갑, 그 중에서도 김부겸이라는 인물이 19대 총선부터 일찌감치 기반을 다져온 수성 갑에 출마하겠다는 것은 수성 갑 주민들에게 "날 좀 떨어뜨려주십쇼."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선거 기간 내내 김부겸 후보의 압도적인 여론조사 우위가 나타났고, 물론 여론조사와 달리 막상 선거 당일에는 우파결집으로 새누리당을 찍을 것이란 추측도 있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20대 총선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인데, 차라리 오랫동안 활동해 온 경기도에서 출마했더라면 공약 면에서도 재선 도지사라는 충분한 경력을 내세워 지역 주민들에게 친화적이고 선도적인 공약을 내세우면서 수도권의 전문가로써 본인의 이미지를 부각할 수 있었다.
만약 경기도에 출마했다면 그런대로 본인의 기반을 갖고 있으며, 지역 기반의 지지가 있는 만큼 최소한 대구만큼 큰 차이로 낙선하는 수모는 모면했을 것이며, 분투한 것만으로 인정을 받았을 거다. 도청 소재지이자 후임 지사의 지역구였던 수원시 병도 있었고, 하다못해 과거 자신이 있었던 부천시 소사구(現 부천시 병) 지역구로 갔었어도 나름 승산이 있었던 상황이었다.[37]
결과적으로 새누리당의 아성이나 다름없는 대구에서 이렇게 크게 참패하면서, 사실상 이 시점에서 거물 정치인으로서의 김문수의 정치 생명은 여기서 끝났다고 보는 관점이 많다.[38]
3.3. 20대 총선 낙선 이후
이후 2016년 8월부터는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서 개인방송을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우병우 민정수석의 거취를 명확히 해달라든가, 사드 배치에 찬성을 하는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본인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9월 7일, SBS 뉴스브리핑에 출연하여, 경기도에서 오랫동안 정치를 해왔던 그가 대구로 내려와 총선을 도전했던 이유, 당 대표 출마 시사 후 불출마 선언 등에 대하여 본인의 심경을 밝혔다.
2016년 10월, 외교안보 전문가 초청 안보특강에서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 회고록 논란으로 불거진 문재인 전 대표의 북한 인권 결의안 기권 논란을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비서실장, 김만복 국정원장을 반역자라고 거친 언어로 비판하기도 했다. #
11월 15일 비박계의 임시 지도부인 비상시국위 12인 공동대표 중에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오죽하면 비상시국위 출범에 분노한 친박계 이정현 대표로부터 지지율 합쳐서 10%도 안 되는 대선주자들이 당을 먹칠한다면서 남경필, 원희룡, 오세훈과 같이 대선주자에서 사퇴하라는 맹비난을 듣기도 했을 정도다.#
3.4. 19대 대선 불출마와 이후
△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한 김문수 전 도지사 |
어거지에 가깝게 친박에 들붙는 행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19대 대선에는 불출마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유한국당 경선에 참여할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39] 친박 행보로 지지를 얻었다면 지지자들의 후원금으로 금전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처럼 친박 행보를 펼치며 결국 대중들한테 밉상으로 찍히고[40] 정작 소소한 친박 돌격대장 지분은 김진태가 모두 가져가버려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이득도 하나 얻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는 사실상 근황도 잘 안 잡힌다. 정부 출범하자마자 친박 집회 참석해서 "문재인 정부 타도"를 외쳤다는 것만 근근히 보도되곤 한다. 2018년 1월 8일, 조갑제 TV와의 인터뷰에선 문재인에게 정신이상자라는 막말까지 곁들여 여전한 디스를 했다. #
3.4.1.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8년 3월에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후보군이 무주공산에 가까운 자유한국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물망이 잡혔다는 기사가 올라왔다.#[41] 나름 이름값 있는 인물이라지만 옆동네 광역단체장인 경기도지사를 2번이나 역임했고, 현재 대구로 내려가 있는 인물인지라 뜬금없다는 반응이 상당하다.현실적으로 당선 가능성은 높지 않은데, 20대 총선때도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했다가 김부겸에게 완패했고, 현재 옆동네인 대구 북구 을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내려와 있는 상황이라 자신은 대구에서 설 자리를 잃었기에 서울시장 출마를 바탕으로 이 기회에 정치 기반을 서울로 옮기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새누리당에서 같이 있었던 정태근 전 의원이 제기하기도 했다. # 원래 지역구인 부천 소사는 자신의 보좌관 출신인 차명진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어 돌아가기 좀 그렇고.
게다가 더욱 현실적인 문제로는 선거를 치를 돈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19대 대선 불출마 이유에서 보듯 선거를 치를 돈 자체가 없는 그에게 서울시 전체를 유세하며 다닐 돈이 있는지는 과연 미지수다. 자유한국당 중앙당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상대는 3선을 노리는 박원순에다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중도+중도보수 진영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안철수인지라 상당한 고전이 예상되었다. 거기에 당시 문재인 정부의 높은 지지율로 인해 당선 가능성은 더 낮았다.
4월 11일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공식 출마 선언을 하였다. 동시에 수성구 갑 당협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사실상 더 이상 대구에서 정치를 할 마음이 없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5월 30일, 6월 7일 두 차례의 토론회에서는 기대보다는 선전했다는 평이 많다. 판넬을 많이 사용해서 "판넬왕"이라는 별명이 새로 생겼다. 수치화된 자료를 앞세운 논리를 무기로 삼은 안철수에 비해 김문수는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시각자료에 집중을 한 모양이다. 7일 토론에서는 안철수에게는 큰 공격을 안하고 김종민과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이날 안철수와 함께 박원순이 또 다시 털리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박원순의 "빚이 많은 건 청백리" 드립을 탄생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 논의가 상당히 오갔다고 알려졌지만 안철수 측의 일방적 사퇴 요구가 이어지자 6월 6일, 선거를 완주할 의사를 분명하게 내비쳤다.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 종료후 발표된 출구조사에서 박원순 후보의 55.9% 득표 예측에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뒤지는 21.2%의 지지율의 2위 낙선이 예측되었으며 52.79% : 23.34%로 29.45%p차로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애시당초 목표가 안철수를 이기고 2등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꽤나 선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서울에서도 민주당세가 특히 강한 관악구, 안철수의 전 지역구인 노원구 2곳에서 근소하게 밀린 것을 제외하면 서울 전 지역에서 안철수를 누르는 데에 성공했다.
수성구 갑에서의 패배로 정치인생을 마무리했다면 텃밭에서조차 참패한 몰락한 거물정치인의 이미지로 기억되었겠지만, 당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의 요청에 따라[42]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들어 명확한 보수색을 어필하며 실버크로스로 탈환해내면서 오명을 제법 씻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정치인으로서의 마지막 선거였다.[43]
3.5. 이후 행보
2018년 11월, 기존에 거주하던 대구 수성구 시지동 아파트를 팔고 서울로 이사를 간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기사에 따르면 수성구 자택은 지난 4월 서울특별시장 출마 및 수성구 갑 당협위원장을 사퇴할 때부터 이미 매물로 내놓았다고 하는데, 김문수 본인은 이에 대해 "대구에 뼈를 묻겠다고 약속했는데 뼈를 못 묻어서 미안하다" 라는 답을 남겼다.2020년 1월 27일,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당 명칭으로는 국민혁명당을 선택하고 비례한국당의 이름을 개칭하여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태극기 세력 중심으로 정치권을 통합해야 한다고 밝혔고, 창당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머 현역 국회의원이나 시민단체 쪽에서도 참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광훈 목사가 신당에 합류하냐는 질문에는 "신분이 목사"라며 "응원하고 후원, 지원해줄 것"이라고 답했는데, 이를 보아 신당에 입당하지는 않지만 지지 세력으로 약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신당 창당이 가시화될 경우 기존 존재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 우리공화당에 이어 이언주 신당, 이정현 신당에 이은 6번째 보수정당이 되어 버린다.
결국 2020년 1월 30일 자유한국당을 탈당했고, 얼마 안 되어 자유통일당을 창당하였다. 이정현의 신당이 아직 창당되지 않음에 따라 5번째 보수정당이 되었다.
이후 자유통일당과 우리공화당의 합당 문제로 전광훈과 결별한 줄 알았으나 2020년 3월 21일 자유공화당을 탈당했다. 결국 다시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 성도들의 품으로 돌아왔다.[44] 기독자유통일당[45]에서 활동할 것을 밝힌 후 # 현재는 기독자유통일당 자문위원장이 되었다.
2020년 8월 사랑제일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이 터지면서 전광훈과 친밀하게 지내 온 김문수의 정치 생명은 완전히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6]
2020년 8월에는 광화문 집회에서만 발견되었다. 이로인해 전광훈 지지자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
2020년 9월 24일에 10월 3일 광화문 집회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집회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증가를 막기 위해 대면집회보다는 차량 집회로 하는것이 안전하다고 이야기를 하였는데, 전광훈 지지자쪽에서 비난을 받고있는걸로 봐서 전광훈과의 관계는 끝인것 같다.
2020년 10월 3일 차량시위를 했다. 서경석 목사가 대표로 있는 새한국에서 주최하는 강동구 굽은다리역에서 차량 시위에 참여하였다.
2020년 11월 2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수감 전 자택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매주 화요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탈북자 인권법 촉구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탈북자 인권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건 지금도 유효하는걸로 보인다. 태영호 의원, 나경원 전 의원도 매주 참여중이다.
미국 부정선거 논란에 대해서는 바이든이 승리를 했는데 왜 계속 그거를 물고 넘어지냐고 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미국은 3일만에 재검표가 이루어졌는데, 한국은 6개월이 지나도록 재검표가 안되고 있다며 불만을 표했다.
2020년 12월 10일,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의 '문재인 정권 폭정 종식을 위한 보수 통합 회의'라는 명분으로 여러 보수인사들을 불러들였는데 여기에 참석해서 김문수 전 도지사는 "지금까지는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만날 자리가 없었다. 국민의힘은 광화문에 태극기를 들고나오는 사람을 극우라고 하지 말고 태극기를 왜 들고 싸우는지 알아야 한다" "폭정에 맞서기 위해서는 양처럼 좋은 사람도 필요하지만, 사납고 무섭고 예측 불가능한, 성난 민심이 모이는 자리도 필요하다"며 "이 모임이 확대돼 일주일에 한 번씩만 모인다면 문재인이 깜짝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
△ 2021년 3월 18일.[47] |
2021년 3월 18일, 국민의힘 소속의 김무성, 이재오와 만나 오후 3시까지 오세훈 - 안철수 단일화 문제를 최대한 빨리 합의해야 한다고 촉구함과 동시에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의 사퇴를 요구했다. #
2021년 6월, 일부 강경보수 및 친박 측에서는 이준석 신임 당대표가 좌파라고 주장했지만, 김문수는 이준석의 저서 <공정한 경쟁>을 읽고 나서 이준석의 경제관, 안보관, 교육관을 보면 좌파가 아니라고 옹호했다.[48]
한때 친이계 중진으로 거론됐고,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던 만큼, 2022년 1월 24일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전직 국회의원들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
이후 20대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을 지지하면서 안철수와의 단일화를 촉구했으며 #, 8회 지선에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김은혜 경기도지사 후보의 유세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였다. #
3.6. 제13대 경제사회노동위원장
2022년에는 윤석열 정부에서 장관급 대통령자문위원장인 경제사회노동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 # 같은 해 9월 29일 위원장에 임명되었다.#대통령실에서는 임명 사유로 청년 시절 노동현장 경력이 많고 정치 경력도 길어 사회적 대타협 및 노동개혁 추진의 적임자라고 하였으나, 그가 우익으로 전향한 이후 보인 행보들이 재계와 노동계 사이에서 노사정 대타협을 이끌어내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와버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2022년 취임 후 첫 국정감사에서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라는 발언을 하고 발언 정정을 거부하여 국감에서 퇴장당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논란에 대해 대통령실에서는 "7080 노동계의 대부이므로 적절한 인사." "좌우를 모두 경험해 중재 능력이 탁월할 것." "자신의 생각을 국민 앞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 남겼다.
김문수는 중립을 요구하는 공직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이후도 종교적으로 편향된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2023년 4월 11일에도 김문수는 극우 성향 종교인인 전광훈의 망언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공직자로서의 종교적 중립성 요구 원칙을 위반 행위를 하여 비판을 받고 있다.# 이튿날인 4월 12일에는 기독교입국론을 주장하며 한기총 두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3.7. 제10대 고용노동부장관
2024년 7월 31일 윤석열 정부의 두 번째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되며 경사노위 위원장직을 내려놓았고 후임 경사노위 위원장은 권기섭 전 고용노동부차관이 임명되었다.지금의 노동현장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 (특수형태근로자, 플랫폼 종사자, 비정규직 근로자 관련 내용을 담고있는) ‘노동 약자 보호법’을 올해 국회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신속히 준비하겠다 (...) 5인 미만 영세 사업장 근로자들은 아직도 온전히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고 있다. 영세사업장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지만 대한민국 국격에 맞게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통해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 (...) 근로복지공단의 (체불임금) 대지급금 제도와 체불청산지원 융자를 확대해 일하고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
2024년 8월 30일, 장관 취임식 #
2024년 8월 30일, 장관 취임식 #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지 70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법을 거의 적용 못 받는 분들을 생각하면 드릴 말씀이 없다
2024년 8월 26일,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
2024년 8월 26일,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
소외된 노동 약자를 위한 강한 신념을 갖고 있으며 노동현장의 경험과 도지사로서 행정을 맡은 경험은 장관 임명 시 강점으로 작용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부족한 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 우리 사회 노동 약자인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적용 확대를 본격적으로 검토할 때가 됐다 (...) 외국인 근로자라는 이유만으로 최저임금을 차등적용하는 것은 헌법(평등권), 국제기준(ILO 제111호 협약), 국내법(근로기준법‧외국인 고용법) 등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2024년 8월 25일,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 서면질의답변서 #1 #2
2024년 8월 25일,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 서면질의답변서 #1 #2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기보다는 (지위를) 격상해 저출생에 대응해야 한다
2024년 6월 27일, 장관 후보 지명 이전 경사노위 위원장 시절‘저출생 위기극복, 이제 실천이 답이다’ 세미나 도중 #
8월 29일, 윤석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 장관 임명안을 재가하면서 장관에 취임했다. 청문회 과정에서 탄핵 부정, 뉴라이트 역사관 논란, 세월호 관련 망언 사과 거부 등 많은 논란을 일으켜 적지 않은 국민적 우려를 발생시켰으나, 장관 취임식에선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기준법 적용을 주장하고, 노동약자보호법 추진을 공언하는 등 과거 노동운동가 시절의 김문수가 돌아온 듯한 모습을 연신 보이고 있다.[49] 다만 이 주장의 내면에는 규제를 완화하자는 내용이나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기 때문에[50], 정말 본인이 과거의 노동운동가로 돌아간 것인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2024년 6월 27일, 장관 후보 지명 이전 경사노위 위원장 시절‘저출생 위기극복, 이제 실천이 답이다’ 세미나 도중 #
고용노동부장관 취임 직후 첫 번째 업무지시로 “임금체불 전액 청산과 체불사업주 엄벌”을 지시하였다. #
[1] 조희명(曺喜明)의 딸이다.[2] 이 사진으로 굴욕을 겪기도 했다. 단순 네티즌 반응이 아니라 주간 경향의 기사라 첨부함.[3] 그런데 이런 사항은 비단 김문수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은 뉴라이트 대표 인사인 이영훈 前 서울대 교수도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했을 때, 시체를 지키려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이었고, 대학생 시절에 위장취업을 한 노동운동가였다.#[4] 실제로 김문수를 노동운동에 처음으로 관심갖게 한 이가 김근태이다. 김문수에게 처음으로 공활에 가자고 한 선배가 서울대 5년 선배였던 김근태였던 것. 김문수가 1학년 때 선배 심재권의 권유로 학생운동 동아리에 가입한 후, 2학년 때 김근태의 권유로 공활(대학생들의 공장체험)을 하면서부터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후 전태일 열사의 일대기를 탐독하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게다가 김근태가 고문을 당한 걸로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문수도 고문당한 적이 있다. 1980년 당시 김문수는 구로공단 한일공업 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한창 활동하다가 잡혀서 남영동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김문수의 당시 재판기록 중 김문수의 변호사가 한 말에 따르면, 체포한 뒤 봉고차에 실어서 남영동 건물 앞에서 차문을 열고, 묶여 있던 김문수를 걷어차 떨어지게 하자, 밖에서 기다리던 남성 2명이 각목을 들고 다가와 "죽여, 이 새끼는 빨갱이보다 더 나쁜 새끼야"라고 욕설을 한 뒤 각목으로 무차별 폭행을 했다고 한다. 맞다가 기절하고 깨어나니 고문실 안이었다고. 고문은 이와는 비교도 안되게 끔찍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죽고도 남을 뻔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잡힐 때마다 고문을 당했는데, 후술될 인천 5.3 운동 때도 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가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도 감옥에 있었다.[5] 민족경제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박현채가 결성한 서클이다.[6] 김근태와 심재권은 대학 동기이자 친구다.[7] 다만 장기표는 정치적 식견이 좋지 못 했고 출마하는 선거마저 다 낙선했다. 심지어 당적도 보수 진보 가리지 않아서 철새 수준에 가까울 정도. 장기표가 80대에 접어든 고령을 감안하면 살아서 국회의원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8] 처음에는 1971년 위수령 때 제적당하고 후에 1974년 민청학련에 잠시 관여했다가 관련자로 걸려서 또 제적당했다. 이처럼 사실 대학생 시절에는 학생 민주화 운동 쪽에서 계속 활동하자는 권유가 있어서 그 쪽 활동도 조금 했지만, 김문수는 결국 노동운동 한 우물만 파기로 결심해서 1970년대말부터 그 쪽으로만 투쟁하는데 집중했었다.[9] 이때, 그를 변호해주던 사람 중 하나가 박원순이었다. 훗날 김문수와 박원순이 서울시장 후보로서 맞대결을 하고, 김문수가 코로나 사태 때 사랑제일교회에 연루됐을 때 박원순이 서울시장으로서 이들에게 행정 조치를 한 것을 생각하면 기묘한 인연이었다.[10] 노동운동 동지였던 심상정의 남편 이승배를 소개한 것처럼, 김문수 본인의 아내도 같은 노동운동가 동지로, 당시 구로공단에서 함께 노동운동을 하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하였다고 한다. 아내는 바로 구로공단의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었던 설난영 여사.[11] 1991년이 되면 독자정당 창당을 준비하던 노회찬그룹도 가담한다. 민중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참여자들의 면면이 정말 화려하다. 이들이 거물로 성장한 요즘 기준으로 보면 그야말로 올스타팀. 하지만 당시 일반 대중들한테는 웬 운동권 듣보잡들일 뿐이었다.[12] 이때 김문수 밑에서 지구당 사무국장을 하던 사람이 바로 차명진이다.[13] 출처[14] 틀린 말도 아닌 것이 민자당은 민주계 일부(상도동계 + @)와 민정계 일부, 공화계 일부로 구성되었고 이 중에서 군사정권 잔당 소리 듣던 세력이 민정계, 공화계였다.[15] 현재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당 계보에 속한 운동권 출신들은 대부분 이때 김문수, 이재오를 따라서 넘어간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직 김문수 선배 믿고 간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당시까지 운동권에서 김문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만큼 노동운동, 진보진영에 남은 사람들에게 김문수의 전향은 어마어마한 충격이였다.[16] 물론 그들만 고문을 당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김문수야말로 당시 안기부에 찍혀서 허구헌날 쫓기며, 잡힐 때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많은 고문을 당했으며 옥살이도 경험한 인물이다.[17] 다만 민정계 중에서도 1992년 14대 대선 민자당 경선에서 김영삼을 지지한 이른바 신민주계 인사들은 노태우의 동서인 금진호 정도를 빼면 신한국당 출범 후 15대 총선에서 그대로 공천받고 당선된 사람도 많다. 강재섭, 김용태, 이상득, 김윤환, 박희태 등이 대표적이다.[18] 이 당시 이적한 현역의원 5인을 독수리 오형제라 불렀으며, 이들 중 2010년대 이후까지도 활동한 현역들이 바로 김영춘과 김부겸. 이들은 19대 총선을 기점으로 영남에서 민주당 지역위원장을 맡아 민주당의 전국정당화를 추진했고, 20대 총선에서 당선된 이후부터 각각 해양수산부 장관과 국무총리(행정안전부 장관도 역임)까지 올랐다. 그러나 김영춘과 김부겸은 21대 총선에서 낙선하더니 윤석열 정부 성립 무렵에는 모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19] 민주당계 정당을 상징하는 거물인 김대중 전 대통령도 생전에 운동권의 호전성을 비판적으로 보는 발언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20] 다만 여긴 케이스가 좀 다른데, 1990년 3당 합당 때 이미 민정당이랑 손잡기 싫다고 반대해서 나갔다.[21] 장기표와 이재오가 그런 경우였다. 장기표는 보수정당 내에서도 특권 폐지 같은 파격적인 개혁을 서슴없이 주창했고, 이재오 역시 이명박의 최측근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중도 보수 성향이라서 개혁적인 주장을 많이 펼쳐서 박근혜와 윤석열이 당내 장악을 시도할 때에도 쓴소리를 많이 해왔다. 그러나 김문수는 이들과 달리 개혁과는 거리가 먼 극우파로 완전히 우경화되어버렸다.[22] 본인 다음 순위를 기록한 후보는 박진, 권오을 이었다.[23] 당시 원내총무에서 원내대표로 명칭이 바뀌자 마자 치러졌다.[24] 사퇴한 그의 빈자리는 최측근이자 같은 친이인 차명진이 재보궐선거로 당선되며 물려받았다.[25]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의 오세훈과 함께 연임이 성공했다. 한나라당이 자신들의 텃밭인 강원, 경남지사와 인천시장을 범민주당 진영에게 내어준 그 2010년 지방선거였고, 강력한 경쟁자 유시민이 심상정과 선거 당일 단일화를 한 상태였다. 실제로 경기도지사는 현재까지도 김문수를 제외하면 연임이 없다. 경기북도가 신설될 예정이므로 정말 깨지지 않을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다.[26] 당초 서울시가 제안한 서울버스/경기버스 협의에서는 각각 서울시와 경기도가 100% 부담하기로 했고, 수도권 전철에 대해서는 경기도가 60%를 부담하기로 했다.[27] 강기정과 함께 여야택시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28] 이 택시법은 버스 회사 조합과 노조가 대동단결해서 운행 중단을 선언할 정도로 버스업계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켜 결국 이명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29] 아무래도 지역구가 고양이니만큼 추진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30] 도지삽니다 사건이 2011년 겨울에 있긴 했으나 이 때까지만 해도 경기도지사로서 도정 자체의 평가는 꽤 좋아서 만약 불출마하지 않고 3선 도전을 선언했다면 초유의 3연임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즉 밀려난 것은 아니라는 것. 이미 2012년 대권 도전을 천명한 만큼 일종의 대권을 준비하는 잠룡행보였다.[31] 수원시 을(신장용 의원직 상실), 평택시 을(이재영 의원직 상실). 이후 수원시 병의 남경필과 수원시 정의 김진표 의원이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해, 김포시 유정복 의원이 인천광역시장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하며 경기도 내 재보궐 지역구는 5곳으로 늘어났다.[32] 실제로 박맹우 울산광역시장은 울산 내 지역구 재보궐선거 출마를 위해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3월 31일부로 시장직을 사퇴했다. 이후 김기현이 울산시장 선거에 출마하며 사퇴해 공석이 된 남구 을에 공천되며 국회 입성에 성공, 자리 맞바꾸기에 성공했다.[33] 결국 동작구 을 지역구는 변호사 생활을 하며 야인으로 있던 나경원 전 의원이 새누리당 후보로 공천되며 노회찬을 꺾고 당선, 3년만에 국회로 복귀하게 된다.[34] 현 경운중학교[35] 이는 더민주 후보에게 패배한 새누리 후보 중 가장 큰 표차로 진 것이다. 비슷한 득표율 차와 득표 수 차로 새누리 후보를 이긴 더민주 후보는 경남 김해 을 김경수 후보인데, 김경수에게 맞선 새누리 후보는 이만기로, 유명 씨름선수, 연예인이지만 정치적 신인[51]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국회의원 3선, 도지사 재선을 역임했고 차기 대권주자로 불리던 김문수의 굴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도 이만기는 새누리당이 친노의 영향력으로 인해 약세를 보이는 김해라는 점도 참작되지만, 김문수는 새누리당의 텃밭 중 텃밭인 대구에서 처참하게 패배해 정치 생명에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36] 범위를 야당이 아닌 야권 인사까지 넓힌다면 더불어민주당에서 공천 컷오프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한 대구광역시 북구 을의 홍의락 후보에게 득표율 13.3%p, 표차 14,050표 차이로 패배한 양명모 후보가 있다. 이후 2017년, 홍의락은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했고,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해당지역 연임을 노렸으나, 영남지역의 다시 보수세가 강해졌고 대구광역시 행정부시장 출신인 미래통합당 김승수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그 후 권영진 대구시장에 의해 연정내각으로 대구광역시 경제부시장을 역임하였다. 반면 양명모는 2017년에 건강상 이유로 북구 을 당협위원장직을 내려놓았고, 사실상 정계은퇴해, 근황이 알려지지 않다가, 2022년 7월에 지병으로 사망하였다.[37] 그러나 두 곳 모두 20대 총선에서는 더민주 소속 후보들이 당선되었다. 특히 원래 김문수의 지역구였던 부천 소사는 부천시 자체가 2010년대 이후 국회의원 4석을 계속해서 민주당 계열이 석권하는 등 야권 성향이 거의 6대4로 우세한 지역으로 변했고, 더군다나 부천 소사 지역은 금속가공을 하는 중소기업이 많은데, 김문수가 국회의원에 나설 때는 그의 든든한 정치적 기반이던 금속노조가 오히려 가장 큰 반대 세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다시 돌아간다 한들 도저히 승산이 없었던 것이었다.[38] 이후 정치행보를 보면 태극기 집회, 원외 당협위원장, 서울시장 낙선, 극우종교정당 합류 등으로 대권 주자로 분류되던 그 거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6년간 처절하게 몰락한다. 그나마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후로 노동운동가로서 경력을 인정 받고 장관급 인사가 되어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39] 사실 후보로 출마해도, 전당 대회 등에 참가해서 당원들에게 단 15분 발언을 할 기회 밖에 없는데, 1억원을 내야 한다. 이는 당 운영 경비가 모자라서 이러한 이벤트 경비의 대부분을 출마자에게 떠넘기는 한국 정당들의 고질적인 문제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 때문에 정치인들이 부패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이 돈을 내기 위해, 대통령(또는 대선 낙선자)은 이 돈을 쓴 것만큼 뽑기 위해 비자금이 조성되는 것이다. 집권여당의 대선잠룡으로 이름을 떨치던 인물이 총합 1억원 정도를 후원해줄 지지자들을 찾지 못한 것이니, 정말 궁색하기 이를데 없다.[40] 사실 김문수에게 최선의 방책은 다름아닌 바른정당 창당 당시 합류하는 것이었다. 비록 비슷한 처지의 오세훈이 공기 상태이긴 하지만, 김문수의 경우 노동운동을 했던 인물인데다가 김영삼으로부터 스카웃된 인물이며, 심지어 비박의 거두 중 한 명인 김무성과 동갑인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바른정당 당 대표도 가능했을 수도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저 모양이 되었으니 하다못해 나경원도 보수 정당 내에서도 다소 줏대가 없어보이는 행보 때문에 기회주의적이라고 비판받는 편임에도, 그녀는 김문수처럼 아예 철새 짓거리를 대놓고 하진 않았다.[41] 당초 재선 시장 출신이자 야인으로 있던 오세훈 전 서울특별시장도 자유한국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군으로 거론됐지만, 2018년 3월 시점으로 자유한국당 소속이 아닌 무소속이었고 본인이 직접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42] 서울시장 후보는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가장 강력한 독이 든 성배다. 박찬종, 정원식, 최병렬, 김민석, 강금실, 한명숙, 노회찬, 나경원, 정몽준 등 김문수에 앞서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그걸 끝으로 아예 정치 쪽에서 발을 떼 버리거나, 아니면 정치 인생은 연명하되 상승세가 확 꺾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보였다. 폼을 추슬러서 나름 재기한 경우로서는 각각 최병렬은 제1야당(한나라당) 대표, 한명숙도 제1야당(민주통합당) 대표, 나경원은 제1야당(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노회찬은 정의당 원내대표, 박주선은 국회부의장을 맡는 등 없지 않지만, 선거에서 패하고 나서 공백기가 꽤 있었다. 무엇보다 대권주자로서의 입지가 사라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저 저주에서 그나마 빗겨난 건 오세훈-한명숙 양강 구도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지상욱 정도다. 그나마도 오세훈이 재선에 성공해서 묻어간 경우.)[43] 유사 사례로 7회 지선의 리버스 버전이라고 종종 언급되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민주당에서는 한화갑 대표가 "쇠락해 가는 민주당을 재건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민주당을 가장 대표할 수 있고 3번 무죄 판결로 청렴성과 강직성이 입증된 박주선이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되어야겠다"면서 서울시장 출마를 요청해 전략 공천되어 나간 적이 있다. # 물론 7.71% 득표로 3위 낙선했지만, 당시 정당 지지율에 비해 선전했다는 평. 한나라당 오세훈 당선인이 열린우리당 강금실 후보와 민주당 박주선 후보를 둘 다 더블스코어로 이겼다는 것도 7회 지선과 비슷하다. 다만 박주선은 이 기회를 살려 수도권에서 재성공하기보다는 2년 뒤인 18대 총선에서 광주 지역구에 출마, 전국 최고득표율로 생환하며 이후로 20대 총선까지 추가 3선을 쌓았으니 본인의 전국정치인으로서의 위력엔 득이 없었던 셈. 후술하듯 김문수도 이 2위가 본인에게 득이 되기보다는 정치 인생의 마무리 국면에 체면은 지킨 선거가 되었다.[44] 사실 교회는 합당여부와 상관없이 매주 나오고 있었다. 합당 당시 광화문세력 여론은 당연하겠지만 어수선했고, 당황스럽고 분노하는 반응과 다시 돌아오도록 기도해주고 기다려주자는 반응으로 갈라져있었다. 결국 탈당하고 나오니 대부분의 성도들과 광화문 시민들은 다시 돌아와줘서 고맙고 잘 돌아왔다는 반응이다.[45] 참고로 자유통일당 명칭은 합당 이후 이 당이 약칭으로 등록하였다.[46] 빈말이 아니다. 코로나19 시국에 매일 사랑제일교회에서 집회를 강행하다가 결국 교회가 집단 감염의 도화선이 되었고 기어이 본인이 확진되었는데도 국민 앞에 넙죽 엎드려 백배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실실 웃으며 방역에 전혀 협조하지 않을 뿐더러 음모론과 가짜뉴스만 유포하고 있으니 퇴원하면 큰집에 들어갈 걱정이나 해야 하는 전광훈이다.[47] 왼쪽에서부터 세 번째 인물. 다른 2인은 각각 김무성과 이재오이다.[48] 다만 박근혜 탄핵과 부정선거 음모론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정반대이다.[49] 이 탓에 본인이 과거 주장했던 담배보다 끊기 어려운 공산주의를 본인도 못 끊었다는 드립이 나오기도 했다. #[50] 물론 22대 국회 구성상 정부여당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근로기준법 개정은 불가능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