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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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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3764> 국립서울현충원
國立서울顯忠院 | Seoul National Cemetery
파일:국가보훈부 국립서울현충원 로고.svg
기능 국립묘지
원장 권대일
주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상급 기관 국가보훈부
안장자수 108,233명 (2024년)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연혁3. 안장자
3.1. 대통령대통령 영부인3.2. 독립유공자3.3. 국가유공자3.4. 군인
3.4.1. 장군
3.4.1.1. 장군묘역 안장자3.4.1.2. 타 묘역 / 위패 안장자
3.4.2. 장교3.4.3. 부사관3.4.4.
3.5. 경찰3.6. 소방3.7. 기타
4. 사건 사고5. 교통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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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1614608721751.jpg
국립서울현충원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동작동)에 소재한 국립묘지.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인해 늘어나는 국군 전사자를 안치하기 위한 육군 국립묘지로 1952년 5월부터 계획되어 1953년 서울 동작동 부지 선정, 1954년 착공, 1956년에 개장, 안장이 시작되었다.

개장 당시의 명칭은 '국군묘지'였다. 1965년 국립시설로 승격되어 '국립묘지'로 불리었다. 1996년 '현충원'()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고 이후 2006년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었다.

2. 연혁

파일:국립서울현충원 로고.svg
국방부 산하 시절 로고
대한민국 국방부 산하 기관이었으나 2024년 7월 24일, 국립묘지법 개정으로 소관 부처가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국가보훈부로 이관되었다.

개장 당시에는 6.25 전쟁 때 전사(戰死)했던 군인, 대한민국 군무원들의 안장 위주로 갔었으나,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일제강점기일제(日帝)에 맞서 싸우다 순국(殉國)한 애국자 및 독립유공자 등의 호국영령을 비롯해 경찰관,[1] 예비군 등의 영현까지 안장함에 따라 호국 보훈 및 추모 시설로 범위를 넓혀나가게 되었다.

묘역으로는 일반 묘역과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 묘역, 군인 묘역, 경찰 묘역,[2] 무명용사 묘역 등이 있으며, 현충탑, 현충문, 현충선양관, 충렬대, 전쟁기념관, 무명용사의 탑[3]이 있다.

매년 현충일이 되면 이곳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참석하는 현충일 추념식이 열린다. 이 추념식에는 대통령, 주요 정치인들과 호국 영령 및 독립유공자의 가족, 6.25 전쟁 참전용사들이 참석하여 현충탑 앞에서 분향 및 헌화 의식을 가진다.[4] 또한, 대한민국 주요 정치인들이 꼭 가야 하는 곳[5]이기도 하다.

현충원에 안장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에게 대한민국 정치인으로서 그들에게 참배하여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소위 신고식 비슷한 시간으로, 새해가 밝거나[6] 현충일이면 대한민국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요인과 국무위원이 반드시 가는 곳이며, 특히 새로 취임한 대통령[7]이나 여야 당 대표, 선거 출마 예정자와 당선자, 장관들의 첫 일정도 현충원 참배로 시작한다. 소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는 대권주자들도 출마 선언 후 참배하러 온다.[8]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 즉 구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연수과정을 시작하는 예비 사무관들의 첫 일정도 국립서울현충원 참배이다. 5급 공채 외교관후보자 관료사회의 중추를 이룰 신임관리자들인 만큼, 국민과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마음가짐을 되새긴다는 취지에서 진행되는 행사이다.

한국 정치인은 현충탑에서 참배만 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치 진영에 따라 전직 대통령 기일에 각 묘소를 찾을 때도 있다.[9] 참배를 마치고 나가면 현충문에 놓여있는 방명록을 적고 간다. 이럴 때는 순수한 추모 메시지보다는 정치적 메시지 또는 국정 운영에 대한 포부, 당면한 시국에 대한 각오 등을 쓰고 나가는데, 그 글귀 등이 화제가 된 적도 많다.

이곳에 안장된 전직 대통령들의 기일마다 열리는 추모식도 이곳에서 열린다. 그래서 관련된 유족들과 정치인도 방문한다. 일례로 박근혜 전 대통령도 대통령 당선되기 전에는 아버지어머니의 추모식이 열릴 때마다 참석한 바 있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후에는 거의 발걸음하지 않았다.[10]

국립대전현충원 신설 이후로 일반적인 묘 안장이 중단되었지만, 국립대전현충원의 포화에 대비하여 실내 봉안시설인 충혼당이 2006년 3월에 개원함에 따라 유족의 의사에 따라 서울 현충원 충혼당에 유해를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윤승주 일병김지훈 일병 등의 유해도 유족의 뜻에 따라 대전현충원 안장 대신 서울현충원에 봉안되어 있다.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또한 몇 년 내로 만장이 예상되어 충혼당을 건설하였고, 서울현충원 또한 충혼당 만장으로 인하여 제2충혼당을 건설했으며 2022년 4월 29일에 개관했다.[11]

대한민국 국방부 소속인 시절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대한민국 육군 제52보병사단 예하 부대인 52경비대에서 현충원을 경비했으나, 경비 업무가 민간으로 넘어가면서 2008년 11월 21일 해체되었다. 현충원 안에 국방부 근무지원단 군악대대와 국군교향악단,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본부, 그리고 국방부 의장대대의 일부 중대가 근무하고 있다. 보훈부로 이관된 이후에도 앞서 언급한 부대들은 계속 현충원 부지에 남을 예정이다.

3. 안장자

3.1. 대통령대통령 영부인

총 4명의 대한민국 대통령과 그 배우자가 안장되었다. 최규하 전 대통령 부부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그 외에 사망한 전직 대통령의 경우 국립묘지 안장을 원치 않거나 형 확정으로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박탈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지 않았다.[12]

3.2. 독립유공자

3.3. 국가유공자

3.4. 군인

3.4.1. 장군

3.4.1.1. 장군묘역 안장자
3.4.1.2. 타 묘역 / 위패 안장자

3.4.2. 장교

3.4.3. 부사관

3.4.4.

3.5. 경찰

3.6. 소방

소방묘역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여기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충혼당에 안장되어 있다.

3.7. 기타

4. 사건 사고

1970년에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들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리는 한국전쟁 20주년 기념식에 참여할 예정이었던 대통령 및 정부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정문인 현충문에 폭탄을 설치하던 중 폭탄이 그대로 폭발하여 폭탄을 설치하던 간첩 1명이 사망하였고 현충문이 일부 파손된 사건이 있었다.

폭발 원인은 불명이나, 폭탄 자체가 불량이었거나 간첩들의 조작 실수로 폭탄이 기폭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도주한 간첩들을 군경이 추적에 나섰으나 검거에는 실패했다. 같은 해 7월 7일 김포에서 북한 간첩 2명이 사살되었는데 이들이 이 현충원 폭발 사건의 당사자로 추정한다.

5. 교통

4호선9호선이 만나는[65] 동작역, 그리고 동작대교가 국립서울현충원과 인접해 있다. 4호선 역사(驛舍)와는 좀 멀지만[66] 9호선과는 매우 가깝다.

9호선 동작역 8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정문이다. 특히나 현충일 때에는 도로도 막히니 지하철을 타고 오는 것을 추천한다. 정기공연 음악회 감상을 하려면 7번 출구로 나가면 빠르다. 4호선 출구로 나가면 한참 걸어야 한다. 지하를 걷는 거리나 지상으로 걷는 거리나 비슷하긴 하지만, 4호선 출구 쪽의 경우 계단과 언덕이 있다.

6. 기타

평상시에도 개방되어 있으며, 인근 주민들이 산책하기도 한다. 또한, 벚꽃철이나 단풍철에는 꽃구경하러 많이 찾아온다. 도시락이나 컵라면은 놀랄 일도 아니고, 아예 텐트를 치는 사람들도 있어 눈살이 찌푸려질 때도 있다. 외국인이나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온 사람도 심심찮게 보인다. 그래서 묘지에서 떨어진 호숫가[67]나 벚꽃길, 잔디밭만 보면 평범한 시민공원같이 보일 수도 있다. 묘지 뒷쪽으로 완만한 언덕길이 조성되어 있어 노인들이 걷기 운동하러 오기도 하며, 심지어는 작은 체육시설도 만들어져 있다. 현충원 부지를 관통하는 현충천이라는 작은 하천이 흐르기도 한다.

중, 고등학교의 단체 봉사활동으로 종종 와서 잡초를 뽑거나 비석을 닦는다. 잡초 뽑으랬더니 잔디 이삭만 주구장창 뽑는 건 덤. 이는 학생들을 탓하기도 뭣한 게 이들 눈에는 잔디와 잡초가 상당히 비슷하게 보이기도 하고 전문가도 아닌 학생들이 이걸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생각해야 된다.

특이하게 조선 중기의 인물인 창빈 안씨가 안장되어 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창빈 안씨가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된 것이 아니라 국립서울현충원이 창빈 안씨의 묘소 일대에 조성된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 그리고 창빈 안씨 바로 옆에 안장된 이들이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다. 참고로 창빈 안씨는 조선 선조의 친할머니이며 그 묫자리가 국왕을 냈다 하여 최고의 명당으로 각광받아 국립서울현충원이 그 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그렇게 낸 임금인 선조 임금은 온갖 모진 풍파를 맞은 왕이었는데 정여립의 난, 이몽학의 난 등등 여러 반란과 임진왜란 등 외세의 침입을 받았으며 이는 선조가 죽고 나서도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

현충원 내를 흐르는 작은 하천인 현충천에는 3개의 다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의 이름이 정국교(靖國橋)다. 1956년 당시 함태영 부통령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부식의 공신호 '수충정난정국공신'에서 따서 세 다리의 이름을 수충교, 정난교, 정국교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정국(靖國)은 '나라를 평온케 한다'라는 뜻으로 중국의 역사서인 춘추좌씨전에서 유래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 원문에서도 280여회 사용되는 등 한자문화권에서 공히 사용되어온 말이다.[68]
파일:어맹뿌글씨.jpg
이명박 전 대통령의 어맹뿌 글씨도 현충원 방명록에서 나왔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은 TV나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와중에 직접 방명록을 적기 때문에 정치인의 말 한 마디를 캐치해 내는 것이 중요한 언론에서는 글귀를 통해 대외적으로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남기는지 그 의미를 유추해 보기도 한다.

2005년 북한 선전선동비서 김기남,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림동옥, 조평통 서기국장 안경호 등이 현충원을 참배하였다. 그 외에 참배객들과 보훈 유족들이 방문하여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한다.

미국 대통령, 일본 수상과 같은 외국의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이 대한민국을 방문할 경우 자주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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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순직한 소방관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지만 서울 안장을 희망할 경우 충혼당에 안치된다.[2] 국립대전현충원은 경찰•소방묘역으로, 순직 경찰관과 소방관이 한 묘역에 안장된다.[3] 1967년 현충탑이 건설되기 전에는 무명용사탑이 현충탑으로 쓰였다.[4] 대통령 부재 시에는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하여 추념사를 낭독하며, 대통령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리는 추념식에 참석하면 서울특별시 주관으로 개최한다.[5] 단, 대전광역시장이나 충남도지사 그리고 각 지에 호국원이 구성된 지자체 주변은 대전현충원과 해당 호국원으로 가기도 하는 듯 하다.[6] 정확히는 새해 첫 공식 업무일이다. 보통은 1월 1일 당일과 1월 2일 아침에 참배하지만 1월 1일이 금요일이거나 토요일일 경우 1월 3일 또는 1월 4일에 새해 첫 참배에 나선다.[7] 새로 취임한 대통령의 첫 번째 외부 일정이 바로 사저에서 나와 현충원에 들렀다가 대통령 취임식장인 국회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제는 취임식을 할 때마다 생중계되어 국민들이 정치인들은 중요한 시기에 현충원을 찾아 참배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8] 참고로 중앙 정치인들 대부분 서울특별시에 거점을 두고 있기에 총선에서 당선된 지역구 당선인과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지역별 당선인은 해당 지역의 국립묘지나 충혼 시설을 찾는다.[9] 가령 보수정당 계열 정치인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민주당계 정당 정치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 참배한다. 가끔씩 진영이 다름에도 국민 통합의 이유로 성향이 다른 대통령 묘소를 참배할 때도 있어 각 진영마다 크고 작은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10] 박근혜는 그 외 개인적으로도 많이 방문하였다고 한다.[11] 2020년 7월에 예상보다 빠른 만장으로 인하여 제2충혼당을 건립 전 임시안치실에 봉안한다는 홈페이지 공고가 올라와 있었다. 2022년 3월부터 완공전이었던 제2충혼당 1층을 임시사용 승인을 받아서 임시안치실에 안장되어 있던 영현들을 제2충혼당으로 이장했다.[12] 해당 기사에 따르면 실형을 선고받은 후 사면이 되었을 경우에 관해서는 법적 규정이 없고 '국민 정서'로 결정이 된다고 한다. 제 4대 대통령 윤보선은 충남 아산 선산에 안장되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이 있음에도 본인 의사에 따라 역대 대통령 사상 최초로 화장되어서 봉하마을에 안장되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화장되어서 국립묘지가 아닌 파주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되었다.[독립유공자] [위패안장자] 위패안장자의 경우 현충탑 경내 위패봉안당, 현충탑 후면에 위치한 부부위패봉안당, 독립유공자중 후손이 없는 경우 무후선열재단에 위패를 봉안한다.[위패안장자] [16]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최초 안장자 1964년 국군묘지 시절에 안장되었다.[위패안장자] [위패안장자] [위패안장자] [20] 원래는 1970년에 애국지사 묘역 108번에 가묘가 만들어 졌으나 가짜 후손 문제로 인하여 2009년에 가묘가 철거되었다. 이후 2015년에 부부위패봉안당에 위패를 봉안했으나, 최재형기념사업회는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대한 법률 개정안이 의결됨에 따라 시신이 없더라도 위패 및 영정의 형태로 봉안이 가능하도록 개정되었는 것을 예로 들어 키르기스스탄에 묻혀있는 최재형 선생의 부인 최 옐레나 여사의 유해을 국내로 봉안하여 현충원에 다시 부부합장묘로 해서 묘소를 복원할 것을 요청했었다. 2023년 8월 14일에 키르기스스탄 공동묘지에 묻혀 있던 부인 최 옐레나 페드로브나 여사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철거한 묘소자리에 다시 최재형 선생의 묘소를 복원하여 순국 103년만에 부부가 함께 합장되었다. 아쉽게도 최재형 선생의 유해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라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기념관(최재형 지사 고택) 인근 흙 3kg을 국내로 봉환해서 최 옐레나 여사의 유해와 합장했다.[위패안장자] [위패안장자] [위패안장자] [독립유공자] [독립유공자] [26]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독립유공자] [독립유공자] [29] 시신은 북한군에 의해 행방불명되었고, 현재 묘소에는 그의 머리카락과 손톱이 안장되어 있다.[30] 김홍한 대장은 종합9기 출신으로 1984년 제2군사령관(현 제2작전사령관)으로 제2군사령부 예하부대를 순시하고 사령부로 돌아가던 도중에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했다. 당시 재임중 순직한 장성 중 최고위 인사였다.[A] 베트남 전쟁 주월한국군 최고위 전사자. 1969년 사이공에서 수송기를 타고 퀴논으로 가던 도중 기상악화로 인해 수송기가 추락하여 함께 타고 있던 8명 모두 사망했다. 안타깝게도 3명 모두 사고 며칠전에 준장으로 진급했다고 한다. 전투 중에 전사가 아닌 비전투 손실이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주월한국군에서는 전투 손실과 비전투 손실 인원을 모두 전사로 분류했다.[A] [A] [34] 국립서울현충원 최초 장군 안장자.[35] 광복군 출신의 독립유공자 이자, 역사학자 전해종의 부친이다. 광복 후 육군사관학교 1기로 특별임관하였고, 6.25 전쟁 개전 당시에는 1사단 12연대 연대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장사 상륙 작전에서 연대장겸 전술고문으로 참여했다가 상륙도중 전사했다. 이후 준장으로 추서되었으며, 1969년에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36] 추서 계급[위패안장자] [38] 사후 중위로 추서되었다.[39]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6.25 전쟁 당시 생도대대 제1중대장으로 교전 중 전사.[40]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는 체포조에 맞서 상관을 호위하다 전사했다. 사후 중령으로 추서되었다.[41] 한강 인도교 폭파당시 공병감이였던 최창식 대령이 맞다. 부부위패봉안당에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위패안장자] [43] 6.25 전쟁 당시 베티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2개의 대대를 소대 하나로 고지를 사수한 전쟁영웅이다. 대한민국 국군 장병 중 유일하게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미국 십자훈장을 동시에 수훈했고, 후에 대한상이군경회 이사를 역임 하였다. 현충원에 위관급 군인 이름으로 안장되어 있는 인물 중 유일하게 봉분묘에 안장되어 있다.[위패안장자] [45]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6.25 전쟁 중 중공군과 교전에서 전사. 독립유공자이나 장교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이유는 현충원에 1968년에 군인신분으로 안장되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46] 1951년 전사 처리 되어서 이후 위패가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1994년 귀환이후 현충원을 방문하여 자신의 손으로 위패를 지웠다. 이후 2006년에 별세하였고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되었다.[위패안장자] [48]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되어 있고 국립서울현충원에는 군인신분으로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49] 베트남 전쟁 주월한국군 최초 장교 전사자. 안정태 중위(사후 대위 추서)가 전사 당시 입었던 군복이 현재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B] 현충원 개장후 최초로 부자가 함께 안장되었다. 박명렬 소령은 공사 26기로 1984년 F-4D 조종사로 팀 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했다가 불의의 사고로 순직했다. 아들 박인철 소령은 공사 52기로 2007년 KF-16 전투기 조종사로 서해 해상에서 야간요격훈련을 하다가 해상으로 추락해 후방석 탑승자 이규진 중령(추서 계급)과 함께 순직 했다. 박인철 소령은 당시 대위로 추서 되었지만 사망전 대위진급이 예정 되어 있었다. 이후 법률 제16358호 '전사ㆍ순직한 진급예정자의 진급에 관한 특별법' 제 3조에 따라, 순직 당시 대위(진)으로서 순직 전날에 대위로 진급한 것으로 간주하여, 소령으로 1계급 추서진급되었다.[B] [52] 안타깝게도 전투기가 해상으로 추락해서 함께 순직한 이규진 중령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서 생전에 남긴 머리카락을 묘소에 안장했다. 이규진 중령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고 박인철 소령 또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 였지만 유가족의 합장 요청으로 아버지 박명렬 소령 묘소옆에 합장되었다. #[철거] 당사자 생존 확인으로 묘소 철거[54] 6.25전쟁 당시 평창전투에서 포로로 잡혀있다가 생환했지만, 전사처리 되어서, 1959년 6.25전쟁 장교 전사자 354위 합동 안장 때 가묘가 설치되었다. 이때문에 현충원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인물의 무덤으로 기록되었고 박경석 준장은 가묘를 파묘하지 않고 불의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자신의 가묘를 찾아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생애가 다해 현충원에 안장되는 날 파묘하겠다고 했지만, 2020년 8월 박경석 장군의 생존을 확인한 현충원 측에서 가묘를 철거했다.[위패안장자] [위패안장자] [57] 대한민국 해군 창설 이후 첫 전사자. 석기찬 해군 소위는 여순사건 당시 통영정(JMS-302)의 기관장 겸 갑판장으로서 국군 제5연대 1대대 병력을 LST천안 으로 여수까지 이동하여 남항부두에 무사히 상륙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호위 통제하던 중, 반란군의 총탄이 날아오자 대응 사격을 하다가 전사하였다. 전사 이후 병조장(현재 상사)에서 2계급 특진하여 해군 소위로 추서되었다.[58] 국립서울현충원 최초 안장자. 1957년 4월 2일 안장.[위패안장자] [60] 베트남 전쟁 주월한국군 최초 사병 전사자.[C] 국립서울현충원 경찰관 최초 안장자, 1965년 경기도 양주에 침투한 무장간첩과 교전중 전사.[C] [63] 그 외에도 일부 무자격자가 안치되어 있는데, 사실 이는 대전도 마찬가지. 아마 대대적인 조사를 하지 않는 이상 무자격자들을 가려내긴 어려울 것이다. 일부 무자격자라지만 거의 만장인 서울현충원을 감안했을때 일부가 백 명이 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계엄군 외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나 베트남 전쟁 때 현지 여성을 강간한 강간범들도 묻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모두가 발포하거나 범죄를 지른 자들이란 뜻은 아니다. 경찰관들의 경우 안병하 경무관 명령 아래 절대 과잉진압을 하지 않았지만 순직한 경찰관들도 있었고 계엄군도 말그대로 억지로 끌려왔다가 전교사와 11공수여단의 오인총격전과 같이 교전 도중 순직한 군인들도 있다. 일일이 그들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어서 안장 자격의 유무를 밝혀내기는 어렵다.[위패안장자] [65] 4호선과 9호선이 만나는 유일한 역이다.[66] 4호선 3,4번 출구에서 내린다면 정문까지는 약 500m, 동문까지는 250m이다.[67] 입구 쪽에 있는 연못은 현충지, 박정희 대통령 묘소 뒷편 연못은 공작지라고 부른다.[68]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전쟁범죄자가 합사되어 논란이 많은 야스쿠니 신사의 한자명이 이와 동일하다.[69] 자국 우선주의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나 대표적인 일본 내 우파로 알려진 인물인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도 2006년 1차 내각 당시 현충원에 참배한 바 있다. 참고로 일본 총리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참배한 것은 1983년에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최초였다. 1983년 1월에 당시 일본 총리로서는 최초로 공식 방한했는데 방한 첫날에 국립서울현충원에 방문하여 참배했다. 그 외에 현직은 아니지만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방문한 적이 있으며 현직의 다케시타 노보루, 가이후 도시키, 무라야마 도미이치, 오부치 게이조,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소 다로, 노다 요시히코,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이명박 정부, 윤석열 정부 시기에 각각 방문하여 참배한 바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대표적인 추축국 전범 도조 히데키의 딸 도조 유코도 참배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