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5:53:05

조개옥

조윤식에서 넘어옴
파일:조개옥.pn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894년 9월 9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하패계 체부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
사망 1950년 7월 15일 (향년 55세)
경기도 김포군 (現 경기도 김포시)[4]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260호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47판-1면-71호
본관 순창 조씨[5]
송평(頌平)
축숭(祝嵩 또는 祝崇)
부모 아버지 조태영, 어머니 고령 박씨
형제자매 1남 1녀 중 외아들
배우자 김창기
학력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 / 학사)
서훈 1980년 대통령표창 추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군사 경력
임관 보정군관학교 (8기)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4기)
복무 국민혁명군
1924년 ~ 1940년
대한민국 육군
1947년 5월 16일 ~ 1950년 7월 15일
최종 계급 중교 (국민혁명군)
중령 (대한민국 육군)
참전 6.25 전쟁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3.1. 야인시대
4. 출처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자 경찰, 군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4년 9월 9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하패계 체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6]에서 아버지 조태영(趙泰永, 1874. 7. 13 ~ 1910. 7. 14)[7]과 어머니 고령 박씨(1870. 10. 27 ~ 1930. 10. 26)[8]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태영은 충청북도 음성군 일대에서 천 석이 넘게 농사를 짓는 대지주였다고 하는데, 조개옥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이후 양친이 논밭을 팔아 그의 활동자금을 돕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느라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고 한다.#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6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는데, 일본 유학시절 쑨원삼민주의 및 투철한 애국심에 감화되어 졸업 후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국민혁명군에 입대하였으며, 1917년에는 후난성에 있던 군사교육기관인 강무당(講武堂) 보병과를 수료하고 후난 제1사 제1단부(第一團部) 부관(副官)에 임명되어 복무하였다. 1920년경에는 보정군관학교 제8기 포병과에 입학하였고 1922년 보정군관학교 졸업 후 1924년부터 우페이푸·김동식 등이 거느린 화북성 독군(督軍)에 배속되어 상위(上尉)에까지 승진했다.

한편, 1923년 10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독립군 양성을 위해 김구를 회장으로 하는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고 중국 각지에 있는 조선인 장교들에게 조선인 청년들의 훈련알선을 시달하기 시작했는데, 1924년 6월경에는 조개옥이 있던 화북군에 채원개·조석구(趙錫九) 등 50여 명의 조선인 청년을 뤄양 강무당에 유학시키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이때부터 그 또한 국민혁명군 장교로서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면서 본격적으로 광복군 창설을 위해 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이후 1929년 펑위샹 휘하 서북군의 작전참모로 활약하다가, 1931년 만주사변으로 관동군에 밀려 국민혁명군이 중국 변방으로 쫓겨가자 그 또한 한때 외몽골 지방에서 중국군 조직의 일종인 도통서(都統署)의 장교로 관동군과 싸웠다. 1933년에는 항일독립 제3로(第三路) 사령(司令)으로 복무하였다.#

1934년부터는 황푸군관학교난징 중앙군 육군대학에서 교관으로 근무하였고, 1935년경 국민혁명군 중교(中校)로 진급했으며, 1940년경 러허성에서 항일민병대를 조직해 사령관에 취임했다가 곧 군대를 퇴직하였다.

1940년 국민혁명군에서 은퇴한 후에는 부인 김해 김씨 김창기(金昌基, 1907. 11. 21 ~ 1991. 6. 19)[9]와 함께 상업에 종사했으며, 1945년까지 상하이에서 장사를 하며 지내다가 8.15 광복 직후 귀국하였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성북지구 치안대장을 역임했다가 같은 해 이승만의 추천으로 경찰공무원에 입직하여 11월 6일 초대 경기도 경찰부장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경무국장 조병옥과 이름이 비슷한 탓에 족벌주의에 의한 낙하산 인사라는 오명을 받기도 하고[10], 쑨원이라는 명사와의 인연을 강조한 것이 도리어 중국군 중장이라는 가짜 장군의 오명을 쓰는 단초를 마련, 결국 여러 의혹을 낳은 채 11일 만인 11월 17일 사퇴했다.

경찰계를 은퇴한 후에는 군문(軍門)으로 옮겨갔는데,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가 개교하자 중국군 출신 장교들에 대한 추천권한을 위임받아 이성가, 유해준(兪海濬) 등을 1기 입교생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1947년 5월 16일 육군사관학교 4기 특별반으로 입교하여 4개월 훈련을 수료한 뒤 같은 해 9월 10일 졸업하고 임관했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1949년 대한민국 호국군 참모장에 오르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중령[11]으로 참전했다가 7월 15일 경기도 김포군(현 김포시)에서 조선인민군과 교전 중에 전사했다.

사후 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1994년 10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도 그를 기리는 위패가 봉안되었다.

3. 대중매체

3.1. 야인시대

파일:야인시대_조개옥.png
배우 김용수
등장 에피소드 57~75화
소속 수도경찰청(경기도 경찰부장)

대중매체에서 조개옥이 등장한 작품으로 2002년 ~ 2003년 방영된 야인시대가 있다. 원작에서는 많이 왜곡되어서 나온다. 실제 조개옥은 독립운동가지만 야인시대에서는 노덕술같이 악질은 아니여도 일제 밑에서 경찰을 한 인물로 묘사된다. 기본적으로 호인이나 특별히 유능하지도 않고 경찰이 못하는 것을 김두한 별동대가 한다는 기름칠을 위한 감초 역할이다. 배우는 김용수.

경기도 경찰부장으로 김두한의 백색테러 행위를 묵인하며 워태커의 추궁에도 모른 척한다. 부하인 이정재를 신뢰하는 모습으로 나오나 이정재와의 대화를 보면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인 듯한 묘사가 있다.[12][13]

보면 이정재의 반협박스러운 겁박에 쫄아서 김두한의 부하들을 풀어주고 조병옥에게 털리는 장면은 거의 만담 수준으로 고문관스러운 모습도 보여준다.
조병옥: 야 임마, 너 경기도 경찰부장 맞아? 니가 뭔데 멋대로 죄인들을 풀어주고 있어?
조개옥: 죄송합니다, 각하. 사실 물건은 찾았고, 죄는 일단 김두한에게만 있는 거 같아서… 그 부하들은 관련 없는 거 같아서…
조병옥: 너 옷 벗고 싶어?
조개옥: 아, 아닙니다, 각하.
조병옥: 야 임마. 너 아편이 얼마나 되는줄 알아?
조개옥: 네, 한 트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조병옥: 그 한 트럭을 혼자서 훔쳐간다는 게 말이 돼? 말이 돼, 안 돼? 임마!
조개옥: 말이… 안 됩니다. 각하.
조병옥: 안 되지?
조개옥: 네,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조병옥: 그러니까 다 공범이잖아! 즉시 연락해서 검찰로 넘겨.
조개옥: 네. 알겠습니다, 각하.

무능한 듯하지만 김두한 때문에 다들 잘려나가는 와중에 의외로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나름 능력을 입증한다. 사람자체가 원체 좋아 비리로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니고 조병옥 밑에서 치안 전문가로서 필요에 의해 계속 경찰에 남아있었을 수 있던 것이라 추측된다. 성격이 기본적으로 온화하며 깐깐하지 않고 둥글둥글한 편이라 처세가 좋았을 수도 있다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어쨌거나 당시 좌우익의 치열한 대립 속에 경찰이 못하는 일을[14] 김두한이 한다는 기름칠을 위한 감초역할을 톡톡히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이 캐릭터의 의의. 후에 조개옥의 분량을 노덕술이 대체하게되며 같은 일제 경찰이라도 그 질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실존인물 조개옥은 낙하산 논란 등으로 11일만에 자리에서 물러났고, 훗날 군으로 옮겼다가 6.25 전쟁 때 전사하였다.

합성물에서도 조금씩 얼굴을 비추다 2020년 자제의 단편에서 주연으로 부각되었다. 자제의 작품인 하극상에서 경무부장 조병옥(야인시대)에게 대드는 인물로 나온다.# 입원을 한 조병옥에서는 자신을 조 비서라고 부르는 조병옥에게 불만을 표했다가 옷벗기 싫어서 깨갱하는 역할로 나온다. #

4. 출처



[1] 본명은 조윤식(趙潤植)이며 이 이름으로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2] 장제스의 이름인 장개석(蔣介石)에서 따온 이름으로, 다만 돌(石)보다는 옥(玉)이 낫다고 생각해서 조개옥으로 지었다고 한다.[3] 이명으로는 조중악(趙仲岳)을 썼다.[4]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같은 날 충청남도 대전부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안토당공파 28세 식(植) 항렬.[6] 원적지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임곡리이다.[7] 초명 조영태(趙永泰).[8] 박희식(朴熙植)의 딸이다.[9] 김제헌(金濟獻)의 딸이다.[10] 실제 조병옥은 한양 조씨, 조개옥은 순창 조씨여서 잘못된 소문이었다.[11] 군번 10762[12] 정확하게는 악질 친일경찰은 아니고 그냥 일제강점기에 경찰했던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이정재도 마찬가지이므로 악질 친일경찰까지는 아니라는 설정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는 심각한 역사왜곡인데, 조개옥은 중국에서 장교로 복무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당당한 독립유공자 출신이기 때문.[13] 그래서 이정재가 경찰 생활에 회의를 느끼며(일제강점기 때에 순사로 복무했던 친일 경찰들이 그대로 재등용되는 것을 보고) 한탄할 때도 "그렇잖아도 경무부장 각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 반민족특별법이란 것이 곧 제정된다고 말이야. 자네가 거기에서 활약할 때가 있을 거야." 라고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14] 이정재의 말로는 경찰 병력보다 김두한 밑에 있는 이들이 더 많다고 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