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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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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커리어
2.1. 에인트호번 1기 (1987~1990)2.2. 페네르바흐체와 발렌시아 (1990~1994)2.3. 네덜란드 대표팀 1기 (1995~1998)2.4.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베티스 (1998~2000)2.5. 대한민국 대표팀 (2001~2002)2.6. 에인트호번 2기 (2002~2006)2.7. 호주 대표팀 (2005~2006)2.8. 러시아 대표팀 (2006~2010)2.9. 첼시 1기 (2009)2.10. 튀르키예 대표팀 (2010~2011)2.11. 안지 (2012~2013)2.12. 네덜란드 대표팀 2기 (2014~2015)2.13. 첼시 2기 (2015~2016)2.14. 중국 올림픽 대표팀 (2018~2019)2.15. 퀴라소 대표팀 (2020~2021)
3. 은퇴 후4. 4강전과 3·4위전 징크스5. 통산 성적

1. 개요

거스 히딩크의 감독 경력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커리어

2.1. 에인트호번 1기 (1987~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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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1982년 더 흐라프스합에서 수석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히딩크는 1984년 PSV 에인트호번 수석코치로 부임했고,[1] 1986/87 시즌 도중, 감독이 선수들과의 불화로 해임되자 감독 대행을 맡아 당 시즌에 바로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그 후,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여 맞이한 1987/88시즌에 에레디비시, KNVB컵, 유러피언컵[2]을 모두 우승함으로써 유러피언 트레블을 달성하였다.[3] 그 후로도 리그 우승을 두 번 더 달성하며 에인트호번 역사에 있어 전설적인 감독이 되었다. 100년이 훨씬 넘는 축구 역사에서 유러피언 트레블을 이룬 9명의 감독 중 한 명이다.[4]

2.2. 페네르바흐체와 발렌시아 (1990~1994)

그 뒤 1990년 터키페네르바흐체 SK로 부임하였으나 리그 5위에 그쳤고, 이듬해 스페인 발렌시아 CF로 자리를 옮긴다. 발렌시아에서는 2시즌 연속 리그 4위를 기록하고 마지막 시즌인 93-94시즌은 7위로 마무리한다.[5] 그뒤 1994년 12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부임한다. 당시 연봉 문제로 네덜란드 축구협회와 갈등이 있어서 무산될 뻔하였지만, 어찌 저찌 잘 해결돼서 결국 취임하였다.[6]

2.3. 네덜란드 대표팀 1기 (1995~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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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대표팀을 맡은 그는 선수들을 휘어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가했고, 그 예로 항명을 했던 에드가 다비즈는 유로 1996 대회 도중에 쫓겨났다.[7] 물론 다시 돌아왔다.[8] 그러나 이 때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탈락(8위)했다. 특히 당시 16강 본선 조별리그에서 웸블리에서 76,0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홈팀 잉글랜드에 4:1로 굴욕적인 대패를 당하였기 때문에[9]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기도 했었다.[10]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11]에서 우리나라 국대5:0으로 대파한 경력이 있다.[12][13] 사실 네덜란드는 같은 조 벨기에멕시코에는 비겼을 정도로 고전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아르헨티나를 격파해 4강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며 오렌지 군단의 우승이 보이는 듯 했으나 브라질과의 승부차기에서 패배한 뒤 크로아티아와의 3, 4위 전에서도 패배하며 4위로 마감하였다.[14] 이후 감독직 사임.

당시 네덜란드의 전력으로 유로 8강(8위), 월드컵 4위는 사실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이후 유로 2000을 지휘했던 프랑크 레이카르트도 4강(3위)에서 그치자 바로 사임했을 정도. 하지만 그 뒤에 2002월드컵 충격의 진출 실패로 히딩크가 재평가를 받았고 그 후에도 네덜란드의 메이저대회 결승진출은 2010년 월드컵이 유일하다.[15]

2.4.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베티스 (1998~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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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히딩크가 이끈 네덜란드 대표팀은 아쉽게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대단히 인상깊은 경기력을 보이며 4위를 기록했고, 월드컵 직후 히딩크는 레알 마드리드 감독에 취임하게 되었다. 97-98시즌이 끝난 직후 유프 하인케스가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에서 사임했고, 6월 17일에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가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지만, 코칭 스태프와의 갈등으로 22일만인 7월 9일 사퇴하였다. 이에 레알 마드리드 수뇌부는 마침 네덜란드 대표팀을 그만둔 히딩크를 7월 15일 정식 감독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성적 부진 때문에 한 시즌을 넘기지 못하고 시즌 후반에 중도 경질되고 말았다. 팀 역사상 두번째로[16] 도요타 인터컨티넨탈 컵[17]을 들어올렸지만 그게 전부였다.[18] 히딩크 감독 자서전 마이 웨이에는 수뇌부와의 갈등 때문에 본인 스스로 사임한 걸로 나와있다. 물론 수뇌부와의 마찰이 심하기는 했다.[19] 그러나 부임 기간 동안의 성적도 19승 4무 11패로 팀에 걸맞지 않은 성적이었고[20] 무엇보다 엘 클라시코에서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에게 3-0으로 완패를 당해 일곱 달 만에 경질당한 것이다. 당시 바로셀로나가 피구, 호나우두 등과 함께 드림팀 2기를 구축하며 제2의 전성기에 올랐던 시기인 반면 레알은 직전 하인케스 때도 챔스에서 우승하기는 했으나 리그에서 4위에 머무는 등 라리가에서 매우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때의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당시 바르셀로나 감독이었던 루이 판할에게는 라이벌 의식을 강하게 느껴서 2002 월드컵 지역예선 때 네덜란드가 충격적으로 탈락하자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그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을 가하기도 했으며 이후로는 판할과의 대결에서 진 일이 없다. 유일한 업적이라곤 라울-모리엔테스라는 영혼의 투톱구축이다.[21]

그 뒤 무직으로 지내다가 2000년 2월 5일 강등 위기에 빠져있던 레알 베티스의 감독으로 갑작스럽게 부임한다. 그러나 이 시절은 정말 흑역사 오브 흑역사로, 2월 5일 발렌시아전 3-1 패배를 시작으로 4월 30일 마요르카전 4-0 패배 때까지 무려 1승 6무 6패[22]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고 짤리고 히딩크가 떠난 뒤 팀은 남은 세 경기에서 2승 1패[23]를 기록하며 선전하긴 했지만 결국 18위를 기록하며 17위와는 승점 단 3점 차이로 강등되었다. 물론 골득실에서 심하게 밀리긴 했는데 히딩크가 승점만 잘 쌓았으면 강등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때 함께 강등당한 팀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19위)와 세비야 FC(20위)였는데 특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경우 유명한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구단주 헤수스 힐의 방만한 운영으로 인해 선수단 주급이 체납당하는 일로 인해 선수단의 분위기가 난장판이 되어 강등당해 충격이 더 컸다. 당시 베티스의 리그 상황이었다.

자서전 마이 웨이에서는 팀이 이미 엉망이라서 자신이 할 수 있는게 없다고 말했지만 당시 레알 베티스는 두꺼운 스쿼드는 아니어도 스페인 대표팀의 스트라이커 알폰소와 역시 스페인 대표팀의 미드필더 오테로, 브라질 국가대표였던 데니우손, 루마니아 국가대표 수비수 율리안 필리페스쿠, 아약스에서 챔스 우승 경력이 있고 나이지리아 대표팀의 전성시대의 일원이었던 피니디 조지 같은 어느 정도 충분히 해볼 만한 성적을 낼 수 있는 선수들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시즌이 끝나고 강등팀 소속인 알폰소가 UEFA 유로 2000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두 골을 넣어 극적인 4-3 승리로 스페인을 8강(5위)에 진출시키는데 공헌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선수들이 한물 간 경우도 아니었고 오히려 한창 때라면 한창 때인 선수들이었다. 물론 아무리 이름값 높은 선수들이 있어도 이미 분위기가 나빠 자신감이 무너진 팀을 이끄는게 쉽지는 않고, 그리고 얼마 뒤에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아 스스로 증명했듯이 이름값 높은 선수들만으로 하는게 축구는 아니지만 애초에 자서전이라는 책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흑역사나 실수는 변명이나 간단히 넘어가거나 아예 언급 자체를 안하는 경우가 많다.

그 뒤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표팀, 나이지리아 대표팀셀틱 FC에서도 감독직 제안이 왔지만, 뜻밖에도 한국 대표팀의 감독직을 수락한다. 가삼현 축구협회 국제국장[24]"이미 알려진 강팀을 이끌고 성적내는 것과, 한국을 이끌고 성적 내는 것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며, 설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2.5. 대한민국 대표팀 (2001~2002)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But, I'm still hungry."
2002 월드컵 32강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전 승리로 16강을 확정짓고 난 후 인터뷰에서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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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에인트호번 2기 (2002~2006)

파일:히딩크psv.jpg
[25]

히딩크가 원했던 행선지는 고향 PSV. 2002년 8월 1일 그는 에인트호번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02/03, 04/05, 05/06시즌 에레디비시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2003년 요한 크루이프 실드, 2005년 KNVB 베이커에서 우승하였다.

04/05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팀을 4강에 올려놓았다. 홈구장인 필립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AC 밀란과의 4강 2차전에서 90분까지 통합 2:2로 팽팽하게 버티고 있었는데[26] 연장전에서 승리만 한다면 이스탄불에서 리버풀 FC과 격돌할 기회가 주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저리 타임에 마시모 암브로시니에게 골을 허용하면서 꿈은 산산조각나버렸고, 뒤늦은 필립 코쿠의 골과 박지성의 선제골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성적은 2000년대 들어와서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2002년 UEFA컵 우승과 더불어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최고의 성적이다.[27] 그리고 더불어 그가 에인트호번에서 기록한 리그 6회 우승 - KNVB 베이커 4회 우승 - 요한 크루이프 실드[28] 1회 우승 - UEFA 유러피언컵 1회 우승은 60-70년대 아약스의 황금기를 이끈 리누스 미헬스의 리그 4회 - 컵 대회 3회 - 유러피언컵 1회 우승을 뛰어넘는 독보적인 기록이다.

2.7. 호주 대표팀 (2005~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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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사커루도 히딩크 전과 후로 나뉜다.

2005년 7월 22일 히딩크는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이 된다. 그 당시 호주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마크 슈워처, 팀 케이힐, 해리 큐얼, 마크 비두카 등 최고의 황금라인을 자랑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팀이었지만 플레이오프의 벽에 막혀 번번히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히딩크에게 감독 제안을 하게 된다. 하지만 PSV와의 계약 기간이 남아있어 협상이 쉽지 않았는데 결국 PSV와 공동 감독 형식으로 2006 독일 월드컵까지 1년 계약을 하는 것으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호주 감독직을 수락하고 플레이오프에서 우루과이를 승부차기 끝에 물리쳐 1974년 서독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29] 이후 32년만에 2006년 독일 월드컵 32강 본선 진출을 성공시켰다.[30] 그리고 PSV에서도 05/06 에레디비시에서 우승했다. 우승 직후 그는 PSV를 떠나 호주 국대에 집중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 본선 1차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1골을 빼앗기지만, 그 뒤 3골을 연이어 넣으면서 승리한다. 이후 브라질과의 2차전에서는 상당히 선전하고도 아쉽게 0-2로 패했다. 크로아티아와의 3차전[31]에서는 해리 큐얼의 동점골로 2-2로 비기며 16강 진출에 성공한다.
16강전에서 이탈리아에 0:1로 패배했을 때 당한 실점이 바로 루카스 닐파비오 그로소를 넘어뜨렸다는 이유로 받은 PK였는데 이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로소는 호주가 반칙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슬로우 카메라로 볼 경우 논란의 여지가 있다.[32] 이는 마르코 마테라치의 퇴장에 대한 보상판정이라는 평도 있다.

너무도 짧은 기간에 겸임감독 형식이라 상대적으로 집중도가 떨어졌는데도 국제대회 경험이 없던 호주를 16강(최종 16위)에 이끈 것만 해도 상당히 우수한 기록이었다.

2022년 이전 까지 호주가 이런 성적을 못 내고 있었다는 것만 봐도 그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호주 역시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나고 계약 연장을 제시했지만, 이미 러시아와 계약을 먼저 체결하는 바람에 불발되고 아쉽게 호주 감독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1974년 서독 월드컵 14위 이후 32년만의 2006년 독일 월드컵 32강 본선 진출과 호주의 첫 16강[33]이라는 성적 덕분에 호주에서도 그의 평가가 아주 호의적이라고 한다. 우루과이를 꺾고 월드컵에 진출했을때 한국의 2002년급으로 히딩크 수상 임명 등의 인기를 얻었을 정도였다.

이 업적을 인정받아 16년 후 호주 축구협회로부터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출정식에 초청을 받았다.# 그리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그레이엄 아놀드가 지휘봉을 잡은 호주가 호주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2승을 거두며 히딩크호 이후로 16년만에 16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뤄냈다.[34] 비록 16강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11위로 대회를 마쳐 종전 최고 성적인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의 14위 이후로 48년 만에 최고성적 기록을 경신했다.

2.8. 러시아 대표팀 (2006~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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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히딩크는 러시아 대표팀 감독을 맡는다. 유로 2008 지역예선에서 크로아티아, 잉글랜드와 한 조가 되어 힘겨운 조편성이었다. 크로아티아와 이스라엘을 상대로 잇따라 무승부로 불안하게 출발한 러시아는 차츰 승점을 쌓으면서 조 2위로 올라선다. 2007년 9월 잉글랜드 원정에서 3 : 0 대패로 첫 패배를 기록하며 조 3위로 내려갔지만, 한 달 뒤 홈에서 2 : 1의 역전승을 거두면서 자력으로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위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최종전 전 경기에서 이스라엘에 져 탈락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최종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되는 잉글랜드가 홈에서 크로아티아에 2 : 3으로 패하고 러시아는 안도라 원정에서 1 : 0으로 이기면서 가까스로 16개국 본선행에 성공하였다.[35] 예선과 유로 2008 전 친선경기들을 거치며 알렉세이 스메르틴, 예고르 티토프, 에브게니 알도닌 등 1990년대 암흑기 골짜기 세대 선수들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20대의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세대교체했다. 그래서 유로 2008 당시 러시아의 평균연령은 참가국 중 가장 낮은 26.13세였다.

유로 2008에서는 러시아를 4강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룩한다. 한국의 4강 진출만큼이나 대단한 업적. 에이스인 안드레이 아르샤빈이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레드카드를 받는 바람에 처음 두 경기에서 결장해야 했고 16개국 본선 조별리그에서 다비드 비야에게 해트트릭을 헌납, 스페인에게 1:4로 개관광당할 때까지만 해도 진출이 어려워 보였다. 맞춤형 전략을 세웠고 점유율도 약간 앞섰지만 스페인의 속공과 역습에 수비진이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두 번째 경기 그리스전에서 상대 골키퍼 니코폴리디스의 실수를 틈타 콘스탄틴 지랴노프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3차전은 같은 승점 3점이었던 스웨덴과의 단두대 매치였는데 골득실에서 뒤쳐져있어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다. 다만 출장정지가 풀리는 에이스 아르샤빈이 출격할 수 있는 플러스 요소가 있었다. 그리고 스웨덴전에서 로만 파블류첸코와 아르샤빈의 골로 2:0 완승을 거두면서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다. 이는 구소련 시절인 UEFA 유로 1988 준우승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가 메이저 대회에서 토너먼트에 진출한 기록이었다. 아르샤빈에게 프리롤 임무를 맡기며 스웨덴의 포백과 중원을 유린했다.

그리고 8강에서 아르샤빈의 맹활약으로 조국 네덜란드를 연장전 끝에 3 : 1로 관광보내며[36] 4강까지 진출시켰다. 네덜란드는 죽음의 조 C조를 9득점 3전 전승으로 뚫으면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던 나라였다.

그러나 4강에서 다시 만난 스페인에게 또 0:3으로 떡실신. 다만 이때에 스페인은 2008~2010년까지의 무적함대의 효시였고, 또한 자국개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전까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유일하게 2라운드로 진출한 대회였다.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디에고 마라도나를 감독으로 부임시키자마자 볼리비아에 1-6으로 패배를 당한 것을 기점으로 유례없는 부진의 늪에 빠졌다. 이에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는 히딩크에게 마라도나와의 공동감독을 제의했다. 히딩크는 이에 대해 마음에 들어하는 발언을 했으나 러시아와의 계약기간을 지켜야 해서 거절했다. 관련 기사 (스포츠서울) 후일담으로 히딩크 영입에 실패한 아르헨티나는 곤살로 이과인을 엔트리에 포함시키고서야 간신히 본선에 진출했다.

2010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 독일, 핀란드, 웨일스, 아제르바이잔, 리히텐슈타인과 한 조가 되었다. 러시아는 독일에 2전 전패를 기록한 탓에 아쉽게 2위로 플레이오프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슬로베니아와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 홈경기는 승리하기는 했지만 경기 종료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1실점하면서 2 :1이 된 것이 불안요소가 되었다. 결국 2차전 원정경기에서 1 : 0 패배, 원정 다득점으로 패하며 러시아는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결국 히딩크는 러시아 감독에서 자진 사퇴했다. 그의 거취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사 중 하나였고, 여기저기서 루머가 흘러나왔다. 그 중 가장 압권인 루머는 바로 북한 대표팀의 감독을 맡는다는 것. 2002년에 같은 문화권인 대한민국 대표팀도 맡았기에 북한 대표팀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지 않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한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남한 감독 시절: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북한 감독 시절: 나는 정말로 배가 고프다.
한번만 져도 탄광행.

결국 히딩크 감독의 북한 대표팀 부임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 외 여러 국가로부터 부임설이 솔솔 나왔다. 아프리카 지역 예선에서 튀니지를 간신히 제치고 올라온 나이지리아의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설도 돌았다. 나이지리아는 한국과 같은 조가 됐으니 만약 성사됐으면 적장으로 재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딩크는 다 된 밥(이미 본선에 오른 나라)에 숟갈 하나 얹기 민망했던지 고사했다.

2.9. 첼시 1기 (2009)

러시아 대표팀 부임 중 첼시 FC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와의 친분으로 2009년에 경질된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에 이어 임시로 감독대행을 하게 된다.

그 전에 스콜라리는 '디디에 드록바니콜라 아넬카는 물과 기름이라 서로 공존 할 수 없다'면서 드록바의 부상 이후 아넬카만을 고집해왔는데 히딩크는 훈련에서 과감히 드록바-아넬카 조합을 시도하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결국 아넬카가 수비진을 흔들고 드록바가 마무리 함으로써 공존시키는데 성공한다.

플로랑 말루다는 자신을 영입한 주제 무리뉴가 경질되는 통에 이리 굴려지고 저리 굴려지다 폼을 잃어버려 시즌 초반 내내 부진했으나 히딩크의 지도 하에 리옹시절 폼을 다시 되살려 후반기 최정상급의 윙어로 거듭나 말루다-아넬카-드록바 라인의 폭발적인 공격력을 만들어내었다. 또한 프랭크 램파드가 월드클래스급의 미드필더로써 재능을 만개하여 중요한 경기마다 결정적인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팀에 기여했고, 무언가 램파드와 호흡이 2% 부족하던 미하엘 발락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작업 끝에 드디어 마이클 에시엔-램파드-발락 3미들이 조화를 이루어 에시엔-클로드 마켈렐레-램파드의 뒤를 잇는 첼시 특유의 단단한 중원을 가동시키는데 성공한다.

부임 후 챔피언십 팀인 왓포드와의 FA컵 16강 원정경기에서는 레이 윌킨스가 대행을 맡은 가운데 관중석에서 관전했고 아넬카의 해트트릭으로 3:1 역전승을 거뒀다. 그리고 벤치에서 지휘한 첫 경기인 아스톤 빌라 원정에서는 아넬카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면서 빌라를 제치고 4위에서 3위로 뛰어올랐다. 첼시 입장에서는 1999년 이후 빌라 파크에서 10년 만에 거둔 리그 승리였다.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 드록바의 결승골로 1:0 승, 위건전 2:1 극적인 승리, 포츠머스전 1:0 승리, FA컵 8강 프레스턴전 2:0 승리까지 부임하자마자 거침없이 5연승을 내달리며 리그 순위는 2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유벤투스 원정에서 2:2로 비기며 8강에 진출했고 리그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1:0으로 잡아내며 리그 4연승을 거뒀다. 하지만 리그 30라운드 토트넘 원정에서 모드리치의 결승골과 고메즈 골키퍼의 수차례 세이브에 막혀 1:0으로 패배해 2위를 리버풀에 내줬다.

A매치 브레이크 이후 앨런 시어러가 임시감독으로 부임한 강등권의 뉴캐슬에 원정에서 2:0 승리를 거뒀다.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에서 이바노비치의 멀티골로 안필드 원정에서 리버풀에 3:1 역전승을 거둔다. 그러나 리그 32라운드 볼튼과의 홈경기에서 후반 중반에 4:0으로 앞선 경기에서 방심하다 3골을 먹혀 가까스로 4:3 승리로 한숨 돌렸다. 홈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는 전반에 먼저 2골을 실점해 위기에 몰렸다가 후반 골폭풍을 몰아치며 3:2로 앞서다 다시 2골을 실점해 마지막까지 모르는 흐름에서 램파드의 천금같은 종료직전 득점으로 4:4 무승부, 합계 7:5로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했다.

아스날과의 FA컵 준결승에서 아스날 킬러 드록바의 역전골로 2:1 승리를 거둬 결승에 안착했다. 결승 상대는 맨유를 승부차기로 꺾은 에버튼이 되었다. 그러나 에버튼과의 리그 홈경기에서 0:0 무승부로 사실상 리그 우승 레이스에서 아웃되었다. 그래도 챔피언스리그 본선 직행이 주어지는 3위는 거의 확보된 상황이었다.

FC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 캄프누 원정에서 메시 봉쇄에 성공하며 0:0 무승부를 거뒀다. 그러나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에시엔의 선제골이 나왔으나 수차례 오심으로 얼룩졌고에서 후반 인저리타임에 이니에스타에게 동점골을 얻어맞고 원정 다득점 원칙에서 밀려 결승 진출이 좌절된다.

리그에서는 아스날 원정 4:1 대승 등 막판 5연승으로 승점 83점의 3위로 마쳐 유종의 미를 거둔다. 히딩크 부임 후에는 11승1무1패로 어마어마한 성적을 냈지만 맨유가 이미 벌어놓은 승점차를 잘 관리해내고 동기간 리버풀도 똑같은 11승1무1패를 기록해 순위 변동은 없었다.

히딩크의 잉글랜드 고별전인 FA컵 결승에서 에버튼을 상대로 25초 만의 선제 실점을 극복하고 2:1의 멋진 역전 드라마를 쓰며 결국 징크스[37]를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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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팬들이나 선수들 모두 히딩크의 첼시 잔류를 바랐다. 하지만 히딩크는 이번 시즌이 끝나면 러시아 대표팀으로 돌아간다고 확고하게 말해왔었고 결국 잔류하지 않았다.[38]

사실 히딩크 감독은 특별한 전술적인 변화나 선수층의 변화를 주지 않았으나 특유의 카리스마와 심리술로 첼시 선수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실제로 히딩크 시절 첼시의 전술은 무리뉴 시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드록바가 말하길, 히딩크가 선수들과의 미팅에서 가장 처음으로 한 말이 '너희들은 감독이 없어도 이길 수 있는 선수들이다. 나는 신경 안 쓸 테고 너희들도 신경 쓸 필요 없으니 그냥 니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라'였다고 한다. 결국 심리적인 변화가 경기력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 된다.

그 외 자세한 것은 첼시 히딩크 문서로.

2.10. 튀르키예 대표팀 (2010~2011)

2010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터키와 4년 계약을 맺었다.

2010년 6월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경기 중 한국이 아르헨티나에 4대1로 깨지자 인터넷에 '히딩크의 쓴소리'로 알려진 글이 올라와 큰 관심을 모으고 정식 기사화까지 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글은 나중에 낚시글로 판명났다. 낚시와 오보의 합작 (시사인)

2010년 12월 무승 행진으로 위기에 빠진 첼시 FC의 소방수로 또 거론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현재 UEFA 유로 예선 경기가 내년 중반까지 딱 1경기 뿐이라, 터키의 양해를 얻고 2중 감독도 가능하다는 분석. 그런데 터키축구협회장이 첼시와 히딩크에게 "터키가 자기 마음대로 왔다가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라는 경고를 했다. 터키 축구협회장 경고 (스포탈코리아) 히딩크 본인도 첼시와 협상한 적이 없다고 말했고, 히딩크 첼시 협상 부인 (뉴시스) 2011년 6월 22일 첼시는 안드레 빌라스보아스를 새로운 감독으로 계약했다. 결국 별 일이 없는 한 터키 감독으로 있을 듯하다.

2011년 6월 11일,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은 히딩크에게 유럽무대에서 감독을 은퇴한 후에 한국 축구의 명예감독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히딩크는 곧바로 수락했다. 히딩크 명예감독 수락 (이데일리)

UEFA 유로 2012 독일 원정에서 3-0으로 대팍 깨지긴 했지만 벨기에오스트리아 정도는 어렵지 않을 듯 싶었는데 뜻밖에도 약체인 아제르바이잔 원정에서 1-0으로 패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 아제르바이잔은 조 꼴찌인 카자흐스탄과 1승 1패를 주고 받았으며 조 4위로 꼴지에서 겨우 벗어난 팀이다. 그나마 아제르바이잔이 벨기에와도 안방 경기에서 1-1로 비겨 벨기에의 탈락에 기여하긴 했지만. 조 1위로 본선에 올라간 독일에 2패를 당한데다 아제르바이잔 경기 패배로 터키가 조 3위로 추락했는데 마지막 10차전 경기에서 독일이 벨기에를 이기고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을 1-0으로 겨우 잡으면서 조 2위로 역전,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내 크로아티아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11월 11일에 벌어진 플레이오프 1차전, 터키 안방 경기임에도 크로아티아에 압도적으로 밀리면서 슛팅수에서도 크게 뒤진 터키는 3:0 대패를 당해 비난을 듣었고 원정에선 0:0으로 비기면서 허무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부로 터키 감독을 사임했다.

그가 튀르키예를 맡아 UEFA 유로에 임한 것은 부담감이 큰 일이었는데, 유로 2008 대회에서 터키는 자국감독 파티흐 테림의 지휘 아래 대회 첫 4강(4위)에 올랐었기 때문이다. 사실 터키의 유로 성적은 들쑥날쑥인데 워낙에 축구강호나 안방경기에서 위력을 펼치는 상대들이 판치는 유럽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터키는 96년 대회에서야 처음으로 유로 본선에 진출하여 16등 꼴찌로 탈락하더니만 UEFA 유로 2000에는 첫 8강(6위), UEFA 유로 2004에서는 플레이오프에서 라트비아에 탈락, UEFA 유로 2008에는 4강(4위)에 올랐다. 과연 히딩크가 터키를 유로 본선에 2회 연속 진출시킬 것인지 그리고 진출시킨다면 전 대회에서 거둔 4강 성적을 넘어설 수 있을지 관심을 모았는데 유로 본선[39] 진출 실패와 같이 사임하면서 아쉽게 끝을 맺고 말았다.

2011년 11월에 난데없이 한국 국대 감독으로 히딩크가 재계약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누군가의 엉터리 트위터 글이었다. 히딩크 한국 복귀 헛소문 판명 (골닷컴)

2011년 11월 15일에 벌어진 월드컵 3차예선 5차전 경기 레바논 원정 완패로 조광래가 비난당하는 와중에 히딩크를 다시 불러오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12월 7일 조광래가 해임되면서 감독으로 돌아오나 했지만 축구협회에서는 고트비, 최강희, 홍명보를 알아보다가 무산되자 김호곤을 올리고 있다는 정보가 나오는 등 히딩크에 대해선 별 말이 없는 상태다.

결국 최강희가 감독이 되면서 한국에 다시 올 일은 없어졌다. 더불어 첼시 FC가 리그 4강 진입이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보야스 감독의 후임으로 또 그가 거론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2013년 10월 호주에서 7년만에 다시 대표팀 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홀거 오지크를 감독으로 영입한 호주 대표팀은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냈지만 이후 가진 브라질, 프랑스와 친선경기에서 0:6으로 나란히 참패하자 홀거 오지크 감독을 해임하면서 감독직이 비었기 때문이다. 일부 외신에서 히딩크와 알렉스 퍼거슨을 호주 국대 후보로 올렸다고 하는데 퍼거슨은 가능성이 낮은 상황. 만약 맡았다면 다시 한번 조국 네덜란드와 격돌하게 되었겠지만 10월 23일, 예상을 깨고 호주 축구협회는 엔지 포스테코글루를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했다.

2.11. 안지 (2012~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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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FC 안지 마하치칼라 감독으로 2년 계약을 맺었다. 첫 해 리그 성적은 5위로 안지가 펑펑 들인 돈에 견주면 좀 아쉬운 결과였지만 시즌 중반에 감독을 맡았기 때문인지 구단주는 UEFA 유로파 리그 진출이라도 해낸 것에 만족한다며 두둑한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리고 한국시간으로 2012년 11월 28일, 네덜란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2/13 리그를 마지막으로 사령탑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은퇴 후 무엇을 할지 정하지 못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지는 않을 것"이라며 "유소년이나 코치들을 지도하거나 축구 선수들의 인생 설계를 도와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안지가 그의 감독직 마지막 커리어가 되었다.

올림픽 감독을 성공적으로 끝낸 홍명보의 코치 연수를 도와주기 위해 그를 안지로 초청하였다. 홍명보가 안지에서 받던 코치 연수는 시즌 종료와 함께 일정이 모두 끝났다. 사실상 히딩크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고 이전부터 홍명보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루머도 이를 계기로 사라졌다.[40]

2012/13 시즌에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에서 3위에 머물러 2위까지 받는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얻지 못했고, 컵대회 결승에서는 CSKA 모스크바에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유로파 리그에서는 8강에서 탈락했다. 이 때문에 일부 안지 팬들은 감독을 교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헌데 은퇴를 번복하고 안지에서 1년을 더 한단다. 인터뷰에서 서툰 러시아말로 "пока ещё я голоден"(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를 말하면서 배고파서 1년 더 감독을 한다고 밝혔다. 히딩크 배고픔의 유통기한 (스포탈코리아)

파리 생제르맹 FC에서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떠날 게 확실시된 안첼로티에 이은 새로운 감독으로 바로 히딩크를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안지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히딩크 안지 잔류 선언 (풋볼리스트)

아마 안지에서의 미묘한 성적이 아쉬웠던 모양이다.(리그 3위로 챔스 진출권 놓침, 컵대회 결승 승부차기 패)

그런데 7월 22일 갑자기 안지 감독을 사임했다.

2.12. 네덜란드 대표팀 2기 (2014~2015)

2014년 3월 1일, 16년 만에 네덜란드 감독으로 복귀할 것을 밝혔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이 끝나면 사임하는 루이 판 할 감독에 이어 감독을 맡아 UEFA 유로 2016 대회까지 맡을 예정. 전임 감독인 판 할이 월드컵 3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냈기에 부담이 꽤 클듯하다. 첫 경기 대진이 묘한데, 상대가 이탈리아다. 비록 2006년 월드컵에서 호주를 무너뜨리며 복수를 했지만 2002년의 그 충격과 공포를 이탈리아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데, 결국 이탈리아에 0:2로 지고 말았다.

유로 2016 지역예선에선 체코와 원정경기에서 1:2로 패했다. 2010년대 들어서 유럽에서 약체나 중위권팀이 고춧가루를 날리거나 발목을 잡는 상황이 꽤나 많이 벌어지고 있기에 일방적으로 까기도 뭣하다. 웨일스도 안도라에 2:1로 신승하고, 에딘 제코의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는 키프로스에 역전패를 당했다, 심지어 포르투갈은 알바니아에게 0:1로 충격패를 당하는 이변이 벌어졌다.

그렇게 한두 번 있는 이변이라고 다들 생각했는데 10월 14일 아이슬란드전에서 0:2 패배를 당하면서 부임 이후 1승 3패로 매우 안 좋은 시작을 보이고 있다. 벌써부터 경질설이 나오고 있는 중. 약체팀들에게 잇달아 발목을 잡혔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악화된 자국의 여론과는 반대로 한국의 축구팬들은 한일 월드컵의 영웅인 그가 2002년의 6월 처럼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해 이 위기를 극복하기를 염원하며 응원하고 있는 중. 네덜란드의 한 매체에서는 이를 두고 '히딩크 퇴물 다 됐는데 아직도 한국에서는 신이네요'라고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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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일전에도 불구하고 2014년 11월 13일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치러진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2:3으로 패배했다. 히딩크는 11월 16일에 있을 라트비아와의 유로 2016 지역예선에서 패배하면 감독직에서 사퇴하겠다고 선언하며 배수의 진을 쳤다. 결과는 부임 후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6:0의 대승을 거두면서 한숨 돌리게 되었다. 다만 경기 후 인터뷰에서 언론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2015년 3월 28일 UEFA 유로 2016 지역예선 터키와의 홈경기에서 0:1로 밀리고 있다가 추가시간 극적인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만들어 겨우 비겼다. 물론 에이스인 아르옌 로벤의 부재가 컸다고는 하지만 지역예선 일정의 절반인 5경기를 치른 가운데 네덜란드의 순위는 현재 조 3위로 2위인 아이슬란드에는 승점 5점차로 뒤져 있고 조 4위인 터키에는 2점차로 앞서고 있다. 본선이 24강으로 확대된 유로 2016의 경우에는 지역예선 조 1, 2위가 24강 본선에 가고 조 3위가 플레이오프에 가는 방식이긴 하지만 그 네덜란드가 3위 자리도 간당간당한 상황으로 24강 본선 유로에도 진출 못하는 상황이니 네덜란드 팬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기력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전술적으로도 미드필더 싸움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는 등 현대축구의 흐름을 완전히 따라가지 못했다.

결국 2015년 6월 30일, 네덜란드 축구협회는 히딩크의 사임을 발표하였다.

사퇴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제안을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고, 레스터 시티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하지만 레스터 시티는 전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라니에리 감독을 선임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재택 근무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맡고 싶다고 했던 베르트 판마르베이크를 선임하였다.

한편 히딩크를 내치고 다니 블린트를 들인 네덜란드는 홈 경기에서 아이슬란드에 0:1로 패하고, 터키 원정에서 0:3으로 패했고, 마지막 홈 경기에서 1명이 퇴장 당한 체코에 2:3로 패하면서 32년 만에 유로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맞이하였다. 네덜란드 언론에서는 이번에도 이게 다 히딩크 때문이다라며 히딩크를 까고 있다. 애초에 여론과 팬들 모두가 반대하였었던 히딩크의 재선임을 밀어붙인 네덜란드 축구협회가 무리수[41]를 둔 건데, 네덜란드 축구의 이번 참사의 책임을 히딩크 한 사람이 짊어진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42]

그 이후 몇 개월 쉬다가 2015-16 시즌 성적 부진과 팀 내 불화로 경질된 주제 무리뉴의 뒤를 이어 다시 한 번 첼시 FC의 임시 소방수로 돌아올 가능성이 유력해졌다. 한국 날짜 12월 18일에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 도착한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2.13. 첼시 2기 (201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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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 12월 19일, 첼시 FC의 소방수로 낙점되었다. 약 6년 만에 또 임시 감독으로 첼시에 돌아오게 되었다.

첼시와 히딩크간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단기계약이다. 무리뉴의 경질은 시즌 도중에 이루어졌는데, 첼시가 원할 만한 거물급 감독이 시즌 중반에 움직일 리가 없다. 따라서 첼시는 2015-16 시즌이 끝날 때까지만 팀을 맡아줄 단기 소방수가 필요했고, 히딩크는 네덜란드 국대에서의 부진을 뒤로 하고 명예 회복을 하기에는 단기 소방수라도 첼시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임한 후 첫 경기인 왓포드 FC와의 리그 홈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물론 왓포드가 현재 리그 순위 7위일 정도로 만만치 않은 팀이기는 하나 홈에서 열린 경기였고 실제로 스코어 2:2에서 후반 80분경 페널티킥 찬스를 잡았음에도 그 찬스를 살리지 못하여 무승부로 만족해야만 했기에 아쉬운 결과였다.

다음 경기는 역시 분위기가 안 좋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리그 OT 원정 경기였는데 디에고 코스타의 경고 누적으로 인한 결장으로 제로톱 전략을 들고 나왔고, 0:0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그리고 크리스탈 팰리스 FC 리그 원정에서 초반 에당 아자르가 교체되는 악재가 있었으나 좋은 역습으로 3:0으로 승리하며 첼시 복귀 후 첫 승을 신고했다.

그 뒤 FA컵 3라운드를 통과했으나 리그 홈경기에서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와 2:2, 에버튼 FC와 3:3으로 무를 캤다. 부임 후 리그에서 1승 4무의 성적을 기록 중.

강등권과는 슬금슬금 멀어지고 있지만, 어차피 유로파까지 승점 10점차라는 것은 여전하다. 리그는 강등 안 당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유로파나 챔스에 나가고 싶으면 FA컵이나 챔스 우승에 목숨을 거는 것이 현명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히딩크 감독도 리그보다 이쪽에 더 집중하는 상황이다.

다음 리그 경기는 리그 1위였던 아스날 FC 원정이었는데 전반 디에고 코스타의 결승골을 잘 지켜내며 1:0 승리를 거뒀다. FA컵 4라운드에서 MK 돈스를 5:1로 시원하게 격파하면서 5라운드에 진출했다. 2016년 2월 1일 기준 부임후 모든 경기에서 4승 4무로 무패를 이어나가고 있긴 하지만 그가 기자회견에서 목표로 공언했던 챔피언스 리그와 FA컵 우승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가 중요할 듯하다.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파리 생제르맹 FC을, FA컵 16강에서 맨체스터 시티 FC라는 강호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근데 다음 리그 경기인 왓포드 원정에서 또 0:0 무를 캤다. 그리고 맨유와 펼친 리그 홈 경기에서 커트 주마가 부상으로 실려나가는 악재에 선제골을 먹히고, 상대편 수문장 다비드 데 헤아의 미칠듯한 선방에 막히며 무패 행진이 깨질 위기였으나 귀신같이 추가시간에 터진 디에고 코스타의 동점골로 다시 한 번 1:1 무를 캤다. 다음 리그 경기에선 뉴캐슬을 5:1로 대파했다. 망해가던 팀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중이다.

파리 생제르맹 FC과의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원정 경기에서 1:2로 패배하며 12경기 무패 행진이 종료되었다. 홈 앤 어웨이 토너먼트의 특성과 파리와 첼시의 전력차를 생각해봤을 때 첼시에 불리해도 마냥 나쁜 결과는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매우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바로 저번 2014-15 시즌에서는 파리가 원정에서 경기 초반 퇴장당해 10명으로 싸웠는데도 오히려 첼시를 상대로 주도권을 잡아 결국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원정 다득점으로 올라간 적이 있었기에 2차전이 홈이라도 승리를 장담하긴 어렵다. 다만 그 전 시즌인 2013-14 시즌 때 첼시가 원정에서 1:3으로 패배하고 홈에서 2:0으로 이겨 올라간 적도 있기에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

그나마 홈에서 열린 FA컵 16강 맨체스터 시티 FC전은 맨시티가 빡빡한 일정 때문에 유스 + 1.5군 위주로 편성한 라인업을 냈고 그 라인업을 상대로 5:1 대승을 거두며 8강으로 진출했다.

맨시티전 이후 리그 사우스햄튼 원정, 노리치 시티 원정을 전부 2:1 승리로 장식했지만 스토크 시티에게 홈에서 아쉬운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나마 스토크 시티와의 홈 경기는 다가올 중요한 경기에 대한 체력 안배로 디에고 코스타를 명단 제외시키고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교체 출전 시켰지만. 어쨌든 스토크 시티전을 마치고 이제 첼시의 2015-16 시즌 농사가 걸린 매우 중요한 한 주가 기다리고 있다.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파리 생제르맹과의 홈 경기와 FA컵 8강 에버튼과의 원정경기가 있는데 어떤 결과를 낼지가 관심사다.

파리 생제르맹과의 챔스 16강 2차전 홈 경기에서 1:2로 패배하며 탈락, 그나마 아주 실낱같이 남아있던 다음 시즌 챔스 진출 가능성도 사실상 사라졌다. 그나마 FA컵이 남아있긴 한데 문제는 디에고 코스타에덴 아자르가 2차전 경기 중 부상으로 교체되었다는 것. 특히 코스타의 부상은 매우 뼈아프다.

그나마 코스타는 출전했지만 결국 로멜루 루카쿠에게 멀티골을 허용하며 에버튼에게 0:2로 패배, FA컵 우승의 꿈마저 날아가고 말았다. 코스타는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 무대 첫 번째 퇴장을 당했다.

4월 10일 스완지 시티 AFC 원정에서 0:1로 부임 후 첫 번째 리그 패배를 당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끈 첼시 FC/2015-16 시즌에 대해서는 팬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으나, 적어도 무리뉴 감독의 경질 당시 팀의 상황과 분위기로 볼 때 강등이라는 단어가 결코 비현실적인 상황이 아니었던 만큼, 팀을 어떻게든 중위권에라도 안착시키고 안토니오 콘테에게 안정적으로 바톤을 넘긴 것 만으로도 임무는 달성했다고 보는 평가가 많다. 그의 개인적인 커리어에 있어서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겪은 아픔을 씻어내고 그의 기나긴 감독 커리어에 마무리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팀과 감독 모두에게 있어서 서로 나쁘지 않은 결말을 맺게 되었다.

성적과는 별개로 한국에서의 첼시에 대한 이미지가 조롱거리에서 히딩크 부임 이후로 열심히 하는 중위권으로 변했는데, 이 역시 히딩크의 덕이 크다. '첼시는 강등이 딱이다', '그냥 망해라' 이런 분위기가 팽배했으나 이제는 '히딩크 감독님을 믿는다', '역시 히딩크'라는 반응이 많다. 한국 축구팬들이 히딩크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와 애정의 크기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015-16 시즌 이후부터는 첼시에서 유망주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영국 스포츠전문 매체 스카이스포츠는 23일(한국시간) 히딩크 감독이 고문 직함으로 다음 시즌에도 첼시에서 일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첼시가 유럽 각 팀으로 임대보낸 유망주의 관리를 담당할 예정이다.

이후 2017-18 시즌에 안토니오 콘테 감독과 심각한 불화를 겪고 있는 첼시 FC에 다시 긴급 소방수로 부임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안토니오 콘테 감독을 경질하고 잔여 시즌을 히딩크를 감독으로 선임하고 여름에 루이스 엔리케를 감독으로 선임한다는 소식이다.# 만일 현실이 되면 히딩크는 긴급 소방수로만 3번째 첼시 FC 감독으로 선임되는 것이었지만, 또다시 중도경질을 하면 감독직이 죽음의 성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선 건지 콘테의 남은 임기를 보장해 줬다. 시즌을 마친 뒤에는 바꾸었지만 히딩크가 아닌 사리가 취임.

2.14. 중국 올림픽 대표팀 (2018~2019)

파일:dthumb-phinf.pstatic히딩크.jpg

2018년 8월 4일, 중국축구협회에서 히딩크에게 중국 U-23 대표팀 감독직(3년 계약)을 제안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중국 시나 스포츠를 통해 보도되었다. 기사[43] 히딩크와의 협상이 상당부분 진행이 되었으며, 히딩크는 자신 휘하의 코칭스태프들을 데려올 예정이라고 한다. 만약 히딩크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면 2020 도쿄 올림픽에서의 본선행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2018년 8월 20일, 중국 U-23 대표팀 감독 부임이 정식 확정되었다. 기사 연봉은 147억원이며, 3년 계약이다. 마르첼로 리피 중국 대표팀 감독에 비해서는 연봉이 절반 수준.

그런데 다른 뉴스에 의하면 연봉이 51억 수준이라고 한다. 또한 3년 계약이지만 올림픽 본선에 오르지 못하면 자동 해지되는 조항이 있다고 한다. #

중국에서는 리피가 AFC 아시안컵이나 기타 A매치에서 삽질하면 후임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리피가 중국 국대를 업그레이드한 것은 사실이지만, 리피 사단이 받는 돈(매년 약 300억)에 비해서는 아직 기대에 못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제대로 된 강팀들과 붙었다 하면 줄줄이 깨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다 못해 한국에서 울리 슈틸리케해임된 뒤 신태용이 수습한 상태의 한국과 제대로 붙자 성과를 거의 내지 못했다.

9월에 중국 U-21 대표팀의 경기를 직관했다.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라 실망이 큰 듯 하다. # 선수들의 기술과 피지컬이 4-5명만 빼고 너무 부족하다고 언급했다. 또한 중국축구협회의 형편없는 시스템에 대한 불만도 표했다.

마침 9월 3일에 중국 갑급 리그스자좡 융창에서 해고된 압신 고트비 감독을 다시 비디오 분석관으로의 초빙을 시도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란의 풀라드 쿠제스탄 FC 감독으로 취임하며 무산되었다.

중국은 유소년 선수의 실력 향상이 미진함에 따라서 2017년부터 중국 슈퍼 리그에서 아시아 쿼터제를 없애고 U-23 선수의 의무 출전규정을 생길 정도로 공들이고 있었는데도 임팩트 있고 마음에 드는 선수가 통 없었는지 19세 이하 선수들로까지 확장해서 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문제를 중국축협도 인식하고 있는지 23세 이하 연령의 선수 50여명을 차출해 장기 합숙 훈련에 들어갈 예정이다[44]. 여기에 히딩크의 인맥으로 벨기에 출신 기술이사도 영입할 계획이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기엔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이 문제다. 더군다나 2020년 AFC U-23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은 2019년 3월부터 시작한다.

리피가 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를 마지막으로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떠난다고 시사함에 따라서 히딩크가 차기 중국 국대 감독 물망에 오르고 있다.

10월, 네덜란드로 전지훈련을 떠나 현지 클럽팀과 평가전을 가졌다. 이후 이런 경기력으로는 올림픽도 못 간다고 일침했다. 기사.

전지훈련이 끝난 뒤, 19세 이하 선수들을 관찰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AFC U 19 대회 경기를 관찰했다. 하지만 중국 팀은 타지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에 연패하며 일찌감치 탈락했다.[45]

11월 2일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2030 월드컵에 나가려면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디스했다. #

일단 2018년 11월 7일 있었던 AFC U-23 챔피언쉽 예선에서 한국과 같은 조가 되지 않았다는 점은 고무적이지만, 한국에게 반둥 쇼크를 안겨준 말레이시아와 같은 조가 되었기 때문에 본선 진출은 여전히 쉽지 않은 여정일 것으로 예상된다. #

중국 언론에서는 아시안컵 이후 히딩크가 중국 대표팀 감독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최진철이운재가 중국 대표팀 코치로 합류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새 감독으로는 파비오 칸나바로가 선임되었다.

2019년 3월 22일, 말레이시아 샤알람 스타디움에서 열린 라오스 대표팀과의 AFC U-23 챔피언십 예선 1차전을 5대0으로 승리하였다.

24일 필리핀과의 2차전에서는 현지의 더운 날씨를 고려해 선발 라인업을 대거 교체하였다. 그러고도 8대0으로 대승. 이리하여 말레이시아와의 최종전에서는 비기기만 해도 본선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26일 개최국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는 전반전을 1대1로 마친 뒤 무승부로 끝낼 생각으로 후반전을 수비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다 말레이시아에 추가 실점을 허용해 탈락 위기에 빠졌으나 종료 직전 극장 동점골로 조 1위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2019년 6월 툴롱컵에 출전했지만, 중국 U-22보다 1살 어린 아일랜드 U-21 대표팀에 4:1로 대패했다. 히딩크 본인은 중국 올대의 도쿄 올림픽 출전을 매우 어렵다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 이후 바레인에 4:1로 대승하면서 만회하였고, 멕시코에게는 0:1 석패, 칠레에도 1:2로 석패하며 꽤 선전하였다.

9월 8일, 대한민국 히딩크호 당시 감독과 수석코치로 인연을 맺은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U-22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0:2로 패배했다. # 상대적으로 우위인 신체 조건을 활용한 세트 피스 플레이를 통해 득점을 노렸지만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고, 오히려 베트남에게 역습을 허용해 고스란히 두 골을 내주고 말았다. 이 경기 직전에 있었던 북한과의 평가전에서도 졸전 끝에 1:1 무승부를 기록했던지라 중국의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다고 한다. # 결국 계약 해지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 사실 단순 평가전에 불과한데다 이 연령대의 에이스급 선수들이 A대표팀으로 모두 불려간 상황이라 아무리 히딩크라도 어쩔 수 없었다는 시각도 많았다.

9월 19일 즈음하여 경질 후 순지하이 선임설이 돌더니 다음날인 9월 20일, 진짜로 전격 경질되었다. 후임은 전 중국여자대표팀 감독 하오웨이로 결정되었다. # 한국인들과 중국인들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히딩크 같은 거장을 이런 식으로 제대로 기회도 주지 않고 경질하면 중국 축구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 중론이다. 김학범 감독도 이와 관련해 인터뷰에서 지적을 한 바 있다.

이후 2019년 12월, PSV 에인트호번의 기술고문으로 계약하자 중국은 뻔뻔스럽게도 자기들이 도중 해임한 건 생각도 안 하고 히딩크가 '먹튀' 행위를 했다며 비난하는 적반하장스런 모습을 보였다. # 그 와중에 중국 올림픽팀 기술고문직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건 덤이다. #

한편 중국 올림픽 대표팀은 감독 교체의 효과도 전혀 보지 못한 채 도쿄행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로써 중국은 히딩크건 누구건 그 어느 명장이 와도 노답이라는 게 증명되었다. 한편 같은 해에는 PSV 에인트호번마르크 판보멀 감독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짤렸다. 2019-20 시즌 하반기 PSV 유스팀 총감독인 에르네스트 파베르감독 대행을 맡았고, 히딩크가 차기 PSV 감독 후보 6인 중에 첫 번째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로저 슈미트가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15. 퀴라소 대표팀 (2020~2021)

2020년 8월 22일, 사실상 일선에서 물러나있어, 감독직에서 은퇴할 것이라는 주변의 예상을 깨고 74세의 나이에 네덜란드의 자치령이자 FIFA 회원국 지위인 퀴라소의 대표팀 감독과 퀴라소 협회 기술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계약기간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이며 중국 올림픽 대표팀 사령탑 경질 이후 근 1년만의 현장 복귀다.

2020년 8월 현재 퀴라소 대표팀은 FIFA 랭킹 80위의 무시못할 랭킹에 위치되어있고, 네덜란드계 선수들이 다수 합류할 가능성이 높아 다크호스로 분류되는 팀이다. 카리브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CONCACAF에 속해있다. 과거 파트릭 판안홀트사례처럼 퀴라소 대표팀으로 경기를 뛰었다가 본국인 네덜란드 대표에 소집되는 사례도 있고, 네덜란드계 퀴라소 선수들의 수준이 높다. 히딩크 감독도 취임사에서 대표팀에 선발 가능한 모든 자원에 대해 면면을 파악했으며 가능한 이들 중 능력있는 선수들 위주로 조만간 미팅을 가질 예정이라고 말해 전면적인 개혁을 예고한 상태라 네덜란드계 선수들의 다수 합류가 점쳐지고 있다.

2021년 3월에 열리는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북중미 카리브 지역 1차 예선 C조 2연전을 앞두고 레안드로 바쿠나, 버논 아니타, 주니뉴 바쿠나, 찰리손 벤스숍과 같은 유럽 빅리그 출신 선수들을 중심으로 에레디비시, 에이르스터 디비시알스벤스칸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을 다수 포함한 22인을 소집했다.

데뷔전인 1차 지역예선 1라운드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과의 경기에서 3-4-3 포메이션을 가동했으며 경기 내내 강한 전방 압박과 좌우 측면을 활용한 공격적인 전술로 5:0 대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데뷔전을 장식했다.

이어진 1차 지역예선 2라운드 쿠바전에서는 4-3-3 포메이션을 가동했으며 강한 전방 압박은 고수하되 점유율은 내주면서 역습 한 방을 노리는 전술을 선보였다. 전반을 2:1로 마치고 후반전에 들어서는 전방의 공격수 세 명을 제외한 전원을 퍼스트 써드에 내려 앉히는 수비적인 전술 운영으로 쿠바의 파상공세에 맞섰고 끝끝내 리드를 지켜내면서 2연승을 거뒀다.

2021년 5월 14일에 네덜란드 일간지 더 텔레흐라프는 히딩크 감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회복중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잠시 파트릭 클라위버르트가 감독직을 대행한다.

히딩크의 공백 속에서도 퀴라소 대표팀은 2021년 6월 6일에 치러진 1차 지역예선 3라운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전에서 무려 8:0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6월 9일 과테말라전에서도 0:0 무승부를 기록, 다득점으로 과테말라를 제치고 2차 예선에 진출하였다.

2차 예선에서는 여전히 임시감독 클루이베르트가 지휘하는 가운데, 파나마에게 1,2차전 합계 2-1로 패하며 본선 진출이 좌절되었다.

2021 골드컵에서는 선수단과 코치진에서 코로나 확진이 발생해 참가가 취소되는 불운을 당했다.

이후 2021년 9월 10일, 74세의 나이로 공식적으로 지도자 은퇴를 선언했다. $ 코로나19로 인해 제대로 감독직을 수행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했지만 누구와는 달리 은퇴를 번복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3. 은퇴 후

2022년 9월,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이 뉴질랜드와 경기를 할 때 찾아가서 조언을 해주며 그레이엄 아놀드 감독을 도와주었다.# 히딩크 감독은 “호주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밝히며 유럽에 머물며 호주 대표팀 전력 분석관 르네 뮬렌스틴을 대신해 프랑스와 덴마크를 관전하기로 했다.

호주 축구 연맹은 "히딩크 감독이 우리의 초청을 받아들여 매우 기쁘다”고 밝히며, 그의 존재가 선수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실제 이 도움이 빛을 발했는지, 호주는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 극적으로 16강에 오르며 역대 최고 순위 16강 최종 11위에 올랐다![46]

4. 4강전과 3·4위전 징크스

히딩크의 징크스는 4강전을 통과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맨날 못 넘는건 아니지만 PSV 에인트호번 트레블 시절을 빼면 사실이다. 그래서 축구계의 락라인에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47]
위의 사례처럼 그가 이끈 팀들은 요상하게도 이전과 비교하자면 엄청난 성적을 내기는 하는데, 결국 4강전과 3·4위전에서 4위를 넘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었다. 그가 팀을 맡을 때마다 과연 징크스는 깨질지 아니면 계속될 것인지에 대해 호사가들이 주목하고는 했다. 물론 4강도 누구나 쉽게 거두는 성적이 아니라면서 징크스 운운하기 전에 그 성과부터 알아주자는 의견도 많다.

일단 징크스를 논하기에 앞서 그가 맡은 팀들은 네덜란드를 제외하고는 4강에 들 거라고는 예상도 못할 약체팀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약체팀을 단숨에 4강팀까지 업그레이드 시키는 걸 보면 오히려 대단한 일이다. 월드컵에서 1승도 못 거두던 대한민국으로 우승후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격파하고 월드컵 4강 진출, 소련 시절 유로 1988 준우승 이후로 메이저대회 조별리그 이상을 못 가던 유럽 중위권 팀 러시아의 유로 4강 진출,[54] 그리고 2000년대 에레디비시 리그로서 유일무이한 PSV 에인트호번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진출은 오히려 칭송해야 한다. 유일하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1998년 당시 우승후보로 꼽히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도 4위에 머무른 것 정도다.[55] 그리고 08-09 시즌의 첼시도 그 전의 감독이었던 스콜라리 감독 시기에 팀 내 분위기 장악 실패, 특색없는 전술, 의아한 용병술 등으로 리그 성적이 서서히 내려가던 시기에 히딩크가 갑작스럽게 부임하면서 챔피언스리그 4강,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도 당시 유럽 최강의 팀이었던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가 이끄는 팀은 독일을 상대로 연전연패한다는 점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지휘했을 때는 4강 징크스와 독일 징크스가 동시에 적용이 된 사례로, 준결승에서 패했는데 그 상대가 독일이었다. 2010년 월드컵 때는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했었는데 그때도 독일에 패해 플레이오프로 밀려났고 슬로베니아에 2차전에서 패해 탈락하게 된다. 그리고 튀르키예에서도 독일을 상대로 유로 예선에서 2연패(0-3, 1-3)를 당했다.[56]

히딩크에겐 튀르키예에 대한 징크스도 있는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유럽예선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예선에서 조 1위(6승 1무 1패)이긴 했지만 같은 조의 튀르키예에 1무 1패(0:0, 0:1)를 당했었다. 그나마 튀르키예는 역시 같은 조에 있던 벨기에한테 덜미를 잡혀 아쉽게 탈락했는데, 이 때 튀르키예가 벨기에를 이겼더라면 튀르키예와 한국이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네덜란드와 같은 조에서 만날 뻔 했다. 그리고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3·4위전에서도 튀르키예에게 지는 등 국대 감독으로서 튀르키예를 이겨본 적이 없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번 유로 2016 지역예선에서도 튀르키예와의 홈 경기에서 1:1로 겨우 비겼다. 정작 본인이 튀르키예 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는 성적이 좋지 못했다.

이것 때문에 감독의 역량 평가에서 "잘하는 감독"이라기 보다 "못하는 팀 살리는 감독"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57] 물론 적어도 프로팀 기준으로는 약팀만 잘 이끄는 건 아니다. PSV 에인트호번 시절에는 트레블 달성을 포함해 수많은 트로피를 들었고, 첼시 1기 시절에는 잉글랜드 FA컵도 우승했다.

5. 통산 성적

<rowcolor=black>구단기간경기득실차승률[58]
파일:PSV 에인트호번 로고.svg PSV 에인트호번1987-19901531042821+26468%
파일:페네르바흐체 SK 로고.svg 페네르바흐체 SK1990-1991291378+345%
파일:발렌시아 CF 로고.svg 발렌시아 CF1991-1993112562630+6850%
파일:발렌시아 CF 로고.svg 발렌시아 CF19948332+838%
파일:Netherlands KNVB 1998.png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1995-1998392289+5156%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svg 레알 마드리드 CF1998-19993420410+2759%
파일: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로고.svg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200016367-919%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대한민국 대표팀2001-200238141311+237%
파일:PSV 에인트호번 로고.svg PSV 에인트호번2002-20061921283529+27067%
파일: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2005-200613823+1762%
파일: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2006-20103922710+3256%
파일:첼시 FC 로고.svg 첼시 FC2009221651+2273%
파일: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2010-201116745+344%
파일:FC 안지 마하치칼라 로고.svg FC 안지 마하치칼라2012-201362331514+3753%
파일: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2014-20151041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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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중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2018-20196330+145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ura%C3%A7ao_Federation.png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2020-20216321+1250%
<rowcolor=black>통산1987-2021822469180173+84557.0%


[1] 이때 1년만 일찍 부임했더라면 선수시절의 허정무와 만났을 뻔 했다. 허정무는 PSV에서 1980~1983년 이렇게 3년 동안 뛰었다.[2] 현재 UEFA 챔피언스 리그이며, 각 리그 우승팀들이 토너먼트로 겨루는 방식이었다. 현재 챔피언스 리그의 각종 기록들은 유러피언컵 시절을 포함하고 있다.[3] 에인트호번은 이후로 다시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4] 나머지 여덟 명은 셀틱 FC 시절의 조크 스타인, AFC 아약스 시절의 슈테판 코바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시절의 알렉스 퍼거슨, FC 바르셀로나, 맨체스터 시티 FC 시절의 펩 과르디올라, FC 바르셀로나 시절의 루이스 엔리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시절의 주제 무리뉴, FC 바이에른 뮌헨 시절의 유프 하인케스, 한지 플릭[5] 이 당시 히딩크가 이끌던 발렌시아UEFA컵 16강에서 올리버 칸, 슬라벤 빌리치등이 있던 독일의 카를스루어 SC에게 1차전 3:1로 이겼으나, 2차전에는 무려 0:7으로 지는 수모를 당했다.[6] 협회 측에서는 명예로운 자리라며 연봉을 많이 줄수 없다고 고수했다고 한다. 결국 히딩크의 에이전트가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 쪽과 접촉하자 축구협회 측에서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기존 연봉보다 100% 인상한다는 절충안을 내놓아 합의를 봤다.[7] "Hiddink should stop putting his head in some players' asses."(히딩크는 몇몇 선수들한테 병신같은 짓을 하는 걸 그만둬야 한다.)라는 말을 라디오에서 했기 때문이다.[8] 다시 돌아오기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이 당시의 일화로는 다비즈를 쫓아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히딩크는 다비즈를 발탁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기 위해 다비즈와 따로 카페에서 만났는데, 다비즈는 전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히딩크는 "에드가. 커피값은 내가 내겠네."라며 주저 없이 다비즈를 남겨두고 그냥 일어나 나갔다고 한다. 그 이후 오랫동안 다비즈를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고서야 다시 발탁하였다.[9] 그 당시 잉글랜드는 이 대회에서 4강에 올라 최종 3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잉글랜드가 월드컵까지 합쳐서 메이저대회 4강은 현재까지 4회이다.[10] 분노한 네덜란드 국민들은 전임 감독이었던 딕 아드보카트를 다시 데려오라며 아우성을 쳤었다고 한다. 훗날에 다시 네덜란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아드보카트는 유로 2004 예선에서 체코에 밀려 플레이오프로 떨어진 후 스코틀랜드를 만나 원정서 1:0으로 패배하는 졸전을 펼치다 간신히 진출한 본선에서 결국엔 4강에 올랐으나 본선에서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끔찍한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요한 크루이프, 마르코 반 바스텐 등 레전드들에게 이것은 네덜란드 축구가 아니라고 미친듯이 까인 끝에 결국 판바스턴에게 지휘봉을 넘겨야 했다. 물론 스코틀랜드에 졌을 때 네덜란드 국민들은 히딩크를 다시 데려오라며 난리를 쳤다고 한다.[11] 32강 본선 조별리그[12] 훗날 인터뷰에서 경기 전 아무것도 모르고 뭘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는 무지하고 나약한 우리나라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다만 그렇게 대승을 할 지는 본인도 예상 못했다고. 2002년 이전 월드컵에 외국만 나가면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쩔쩔매다 자멸했다던 많은 국대선수들의 인터뷰와 일맥상통한 이야기다.[13] 일부러 쫄게 만들기도 했는데. 당시 한국과 네덜란드는 같은 연습장을 썼는데, 한국대표팀이 도착한 후에도 히딩크는 일부러 훈련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것도 슈팅훈련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30분이 넘도록 한국쪽에서 아무런 항의도 없어서 '얘네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승리를 확신했다고. 당시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건지 외국만 나가면 뭘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서 쩔쩔매는 매우 무지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줘서인지, 만약 이천수김남일 같이 한 성질하는 선수들이나 기성용, 박지성 같은 외국에 대한 경험도 꽤 있는 해외파 선수들이 있었다면 점수차가 적게 났을 것이다.[14] 사실 경기내용을 보면 네덜란드가 브라질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클루이베르트가 당시 경기에서 저질스러운 결정력을 보여주는 바람에 대부분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그나마 경기 막판 동점골을 넣었다.[15] 이 무렵 유럽 축구 최강은 엄연히 프랑스였고,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보다 살짝 아래로 평가받았다. 이 점을 감안하면 아주 납득못할 성적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우승 경쟁이 될만한 성적이었던거도 사실이라 한국이 아시안 컵에서 4강에 그치면 감독 생명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생각하자. 냉정히 생각해서 한국이 아시아에서 강팀이지만 우승을 장담할 전력은 못된다.[16] 1960년 이후 38년만.[17] 현재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18] 이 대회를 치르기 전에 우승하면 콧수염을 자르겠다고 공약하였고, 우승 하였기 때문에 잘랐다고 한다.[19] 수뇌부의 아들을 기용하라는 압박에 빡친 나머지 "이 팀은 좀 더 프로다운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듣고 노한 회장 로렌조 산즈는 바로 짤랐다.[20] 자서전 마이 웨이에는 거의 1년동안 지휘하면서 성적도 매우 좋았다고 언급을 했는데 실제로 리그 성적은 아래에서 나올 베티스에서의 흑역사와 마찬가지로 도요타컵 우승을 제외한 흑역사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듯 하다.[21] 재밌는건 2002 한일월드컵 때 부메랑으로 돌아올 뻔 했다. 스페인 대표팀의 주축이 라울-모리엔테스였기 때문이다.[22] 리그 성적만 포함한 수치. 놀랍게도 저 유일한 리그 1승은 판 할의 바르셀로나에게 거둔 거다. 저 패배가 발목을 잡았는지 바르셀로나는 승점 5점 차이로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 밀리며 우승을 하지 못한다. 히딩크의 작은 복수라고 볼 수 있다.[23] 바야돌리드와 누만시아와의 원정 두 경기에서 이기고 홈경기에서 1패를 했는데 그 1패의 상대가 레알 마드리드였다.[24] 현대중공업에서 국제수주업무를 맡다가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이 축구협회장으로 취임하자 같이 따라 들어온 인물. 17년간 대한축구협회의 국제협력업무를 담당하다가 정몽준의 퇴임이후 현대중공업으로 돌아갔다. 히딩크 감독 이후에도 움베르투 코엘류, 딕 아드보카트, 그리고 코치 압신 고트비까지, 3명의 외국인 지도자 영입을 성사시켰다.[25] 왼쪽은 박지성, 오른쪽은 이영표다. 히딩크가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둘의 재능을 확인하고는 PSV 감독으로 취임할 때 데려갔다.[26] AC 밀란의 홈구장 산 시로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는 2:0으로 패했다.[27] 당시 에레디비시에서 주목할만한 팀은 3강(아약스, PSV, 페예노르트), 3중(헤렌벤, AZ 알크마르, 트벤테) 정도. 00/01부터 07/08 시즌까지 PSV가 리그 우승을 못했던 건 2번 뿐이며, 그나마 그 2번은 AFC 아약스가 거둔 것이다. 게다가 챔피언스 리그에선 에인트호번 말고는 다들 고전했으며 아약스는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동네북이 되고[59] 심지어 유로파리그에서도 고전하고, 새롭게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강호로 떠오른 트벤테와 알크마르조차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동네북이 됐던 걸 생각하면 이 때 거둔 에인트호번의 4강은 엄청난 성적임을 알 수 있다.참고로 2000년대 와서 에레디비시 구단으로서 챔피언스리그 8강 이상을 가본 건 이때 에인트호번 뿐이다. 2010년대 와서도 에레디비시 구단으로 챔피언스리그 16강만 가도 영광인 상황이니 말 다했다. 2013-14 시즌만 해도 아약스가 유로파 리그에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게 1:6으로 참패하며 털린 걸 봐도 2018-19 시즌이 돼서야 아약스가 마테이스 더리흐트, 프렝키 더용, 도니 판더베이크 등의 슈퍼 유망주들을 데리고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진출했는데 이는 PSV의 4강 이후 무려 15년만에 이루어진 것이다.[28] EPL의 커뮤니티 쉴드와 마찬가지로 에레디비시 우승팀과 KNVB 베이커 우승팀이 격돌하는 단판제 대회[29] 서독 월드컵에서 호주는 남미 칠레를 상대로 첫 0:0 클린시트로 승점 1점을 기록하며 대회 14위를 기록했다. 이것이 역대 월드컵 최고 순위.[30] 이것이 1954년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 이후 1986년 월드컵 24강 본선 진출까지 본선에 못 올라왔던 우리와 공통점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연속 진출했다.[31] 이 경기에서 3경고 퇴장이라는 전설적인 오심이 나왔다.[32] 이탈리아 현지에서조차 이것을 "토티의 존재하지 않는 페널티킥"이라 부르며 찜찜한 판정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 안드레아 피를로의 자서전에서 이 내용이 그대로 등장한다.[33] 다만 1974년 월드컵에서 14위를 기록한 것이 호주의 역대 월드컵 최고 순위이다. 이 때는 아시아+오세아니아에 주어진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 자리가 딱 1장 뿐이어서 생존게임을 벌여 단 한팀만 살아서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했기 때문에 월드컵 예선의 권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16강 조별리그에서 비록 홈팀이자 우승팀 독일과 사실상 홈팀인 동독에 패해 8강 진출은 실패했으나, 남미 칠레를 상대로 0:0 첫 클린시트와 승점 1점 획득하여 1974년 대회 14위를 기록하였다.[34] 호주는 독일 월드컵 이후 아시아 축구 연맹에 가입했는데, AFC 가입 이후 첫 16강 진출이다.[35] 당시 잉글랜드를 이끌던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은 지역예선 탈락의 책임을 지고 경질당했다. 나중에 뉴캐슬 감독이 된 후에도 히딩크가 임시 감독을 맡은 첼시에 1-5로 대패를 당한다.[36] 이 때 히딩크는 경기전 언론에서 "조국의 역적이 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37] 에인트호번 외 다른 클럽팀에선 우승을 거두지 못했다.[38] 그 후 감독은 카를로 안첼로티.[39] 16개국 본선[40] 히딩크가 한국 대표팀 감독시절 밀당을 통한 길들이기를 가장 많이 한 선수가 홍명보였기 때문에 대표팀 터줏대감이었던 홍명보가 이를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다는 루머가 많이 돌았다.[41] 로날트 쿠만은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를 강력히 원했었고, 네덜란드의 축구팬들과 여론에서도 쿠만의 감독 취임을 바랬었다. 하지만 KNVB의 선택은 페예노르트서 좋은 성과를 거두면서 다수의 대표팀 선수를 배출한 쿠만을 제쳐두고 커리어의 말년을 보내고 있는 히딩크를 감독으로 선임하였고, 안 그래도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쿠만에게 감독이 아닌 수석코치 자리를 제의하며 또 다시 굴욕을 주었다. 이로 인해 유력한 후보였던 쿠만은 KNVB와 완전히 척을 지고 말았고 이후 사우스햄튼 FC로 떠났다.[42] 유로 16개국 본선 진출 시절에도 네덜란드 정도 되는 팀이 16개국 본선에 못 올라간다는 건 크나큰 망신이자 굴욕인데 하물며 유로 2016부터는 24강 본선으로 확대 되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50여 개 정도 되는 유럽국가들 중에서 24강 24위에도 못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수능으로 치면 인서울 충분히 가고도 남을 애가 5등급 이하를 찍고 광탈한 셈이다.[43] 지금은 각종 포탈들의 지침 변경으로 인하여 연예 기사와 스포츠 기사에는 댓글을 달 수 없게 되었지만, 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과거 반응은 '축협을 주깁시다 축협은 우리의 원수'라는 반응들이 압도적이었고, 표정 반응 역시 '화나요'가 대다수다.[44] 그런데 이렇게 차출한 선수들을 축구 훈련이 아니라 느닷없이 군대에 집어넣어 군사 훈련을 시키고 있다. 쌍팔년도 한국에서 한 짓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게 참 어처구니 없을 따름이다. 함께 고생을 했다는 점에서 동질감은 강해질지 모르나 조금만 쉬어도 감이 떨어지는 선수들에게 축구 훈련이 아닌 축구와는 하등 관련도 없고 쌩뚱맞은 군사 훈련을 시키고 있다는 게 문제다. 더구나 완전군장까지 메고 행군 훈련까지 시키고 있다.[45] 사실 이 연령대 중국 선수들은 지역 예선에서 한국에게 져서 AFC U-16 본선에도 못 나갔다.[46] 호주의 월드컵 최고 성적들은 74월드컵 14위(16강 조별리그), 2006월드컵 16위(16강 토너먼트), 2022월드컵 11위(16강 토너먼트)[47] 애초에 락라인의 어원 탄생자인 프로게이머 박경락GhemTV 스타리그에서 준우승을 한 경험이 있지만 이 대회 자체가 비공식이 되어버리고 온게임넷 스타리그 3연속 4강 패배라는 임팩트가 강해서 락라인의 수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져서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48]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1-1 무승부를 거두고 승부차기에서 2-4로 패. 3·4위전에서 크로아티아에 1-2 패. 당시 네덜란드의 전력을 고려해봤을 때 4위는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으나, 그 후 네덜란드가 2002 월드컵 충격의 유럽예선 탈락을 하면서 재평가를 받았다.[49] 독일과의 4강전에서 0-1로 패. 3·4위전에서 튀르키예에 2-3으로 패.[50] 위의 네덜란드와는 달리 한국은 1승과 2라운드(16강) 진출만이 목표였으므로 이미 4강 진출이라는 분에 넘치는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3위 결정전에서 패배했다 해도 한국인들 중 문제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경기 직후 한국 선수단과 튀르키예 선수단이 어깨동무하는 모습을 보며 호평 일색이었다.[51] AC 밀란과의 4강 1차전 원정 경기에서 0-2로 패, 2차전 홈 경기에서 3-1 승으로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4강전 탈락(3·4위전 없음)[52] 스페인과의 4강전에서 0-3 패하며 4강전 탈락(3위, 유로1984부터 3·4위전이 폐지되어서 최종결과는 4강전)[53] FC 바르셀로나와의 1차전 원정 경기에서 0-0 무승부, 2차전 홈 경기에서 1-1 무승부로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4강전 탈락.(3·4위전 없음)[54] 강성하던 소련시절조차도 월드컵에서는 1966년 월드컵 4위가 최고 성적이다. 그 이전에는 8강(당시 16팀 출전)만 밥먹듯이 갔다. 이후로도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8강을 넘지 못했고 조별리그 탈락도 있었다.[55]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에 소속된 선수들을 보면, 프랑크 더부르, 데니스 베르캄프.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이도르프, 에드빈 판데르사르 등으로 네임벨류만 봐도 매우 유명한 선수들이 즐비했다. 이들 중 대다수가 아약스 멤버로써 유럽을 제패하고 월드컵에 임했다. 적인한 마디로 역대급 토탈 스쿼드를 구축했던 시기였다.[56] 참고로 튀르키예는 UEFA 유로 2000 지역예선에서는 독일을 상대로 1-0으로 안방에서 이겼고 원정에선 비겼다. 물론 당시 독일은 녹슨 전차라고 하여 한물 간 것으로 평가받던 때였지만. 결국 유로 본선에서 포르투갈루마니아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독일은 1무 2패 유로 15위로 허무하게 탈락하고 반대로 튀르키예는 다른 조(이탈리아, 벨기에, 스웨덴)에서 1승 1무 1패로 유로 8강(6위)에 첫 진출하는 대조를 보였다.[57] 재밌는 건 해외에 이름을 날린 한국인 축구 감독들이 이런 쪽으로 유명세를 탔다는 것. 기술력과 경험은 충분하지만 축구 강국들에 어필할 요소는 없으니 약체 국가들이 싼 맛에 감독으로 데려오는데 그렇게 부임한 한국인 감독들이 다들 해당국에서 한가락 했다. 대표적으로, 히딩크의 수석코치였던 박항서를 감독으로 데려오자 베트남은 일시적으로 탈동남아급 포스를 내뿜었다. 그러나 박항서가 계약만료로 물러나자 베트남의 전력은 급강하하며 신태용을 감독으로 선임한 인도네시아에게 월드컵 2차예선에서 패배하며 최종예선 진출이 가능한 조 2위를 인도네시아에 넘겨야 했다. 인도네시아는 베트남전의 선전으로 사상 최초로 월드컵 최종예선에 진출했다.[58] 반올림에 따른 소수점 이하 숫자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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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그것도 체코나 더 하위 랭킹으로 평가받던 팀에게 연이어 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