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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화이트홀 퍼트넘 Hilary Whitehall Putnam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26년 7월 31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사망 | 2016년 3월 13일 (향년 89세) 미국 매사추세츠주 알링턴 |
모교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수학, 철학 / B.A.) UCLA 대학원 (철학 / Ph.D.) (1951년) |
경력 | 前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과 / 교수) 前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철학과 / 교수) 現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 / 명예교수)[1] |
직업 | 철학자 |
지도교수 | 한스 라이헨바흐 |
지도학생 | 제리 포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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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0년대 이후 현대 분석철학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심리철학, 언어철학, 수리철학, 과학철학에 기여한 바가 크다.그의 철학은 칸트, 비트겐슈타인, 퍼스, 제임스, 듀이, 콰인, 크립키 등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철학적 입장이 자주 바뀐 철학자로 악명이 높다. 심리철학에서는 기능주의의 창시자였지만 곧 비판자로 돌아섰다. 과학철학에서는 논리실증주의자로 출발했지만 역시 비판자로 돌아섰고, 과학적 실재론을 옹호하는 표준적 논증을 내놓았지만 후에 내재적 실재론이라는 독특한 입장을 발전시켰다. 이런 식으로 입장이 자주 바뀌었다는 점이 퍼트넘의 철학을 다소 난해하고 애매하게 보이게 만든 이유 중 하나다.
2. 생애
1926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새뮤얼 퍼트넘은 미국의 유명 번역가이며, 어머니는 유대인이다. 퍼트넘 일가는 1934년까지 프랑스에 살고 이후 미국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정착했다. 퍼트남은 센트럴 고등학교(Central High School)에 다녔는데 이곳에서 한 학년 후배인 놈 촘스키를 만났다. 이후 그들은 친구로 지내며 종종 만나서 서로 지적인 논쟁을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Penn)[2]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한 퍼트넘은 이후 하버드 대학원에서 철학을 잠시 공부하고 1951년 UCLA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논리실증주의자 한스 라이헨바흐[3]로, 초기 퍼트넘 역시 논리실증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아래 '과학철학' 항목의 '과학의 통일' 하위항목 참고) 이후 퍼트넘의 철학적 행보는 논리 실증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4]노스웨스턴 대학교 (1951-52), 프린스턴 대학교 (1953-61), MIT (1961-65)를 거쳐 1965년 하버드 대학교로 교수직을 옮겼다. 1962년에 결혼한 아내 루스 애나 제이컵스 (Ruth Anna Jacobs) 역시 웰즐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에서 철학을 가르친 바가 있다.
하버드에서 그의 강의는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그의 제자로는 제리 포더(Jerry Fodor), 네드 블록(Ned Block), 조지 불로스(George Boolos), 리처드 보이드(Richard Boyd), 하트리 필드(Hartry Field)가 있다.
3. 사상
3.1. 심리철학
3.1.1. 다수실현 가능성
심리철학에서는 다수 실현가능성(Multiple Realizability) 논변을 제시한 걸로 매우 유명하다. 다수 실현가능성은 1960년 후반에 고전적 환원적 물리주의 심신이론인 유형동일론(type-identity theory)를 비판하기 위해 고안된 심신이론이다. 유형동일론에 따르면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 또는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과 동일하다. 예를 들어 "고통은 신경섬유 C의 작용과 동일하다"가 그것이다. 그러나 퍼트넘에 따르면 고통은 서로 다른 신경적 시스템을 가진 개체들의 물리적 속성들과 대응할 수 있다. 단편적인 예를 들자면, 인간의 고통은 신경섬유 C의 작용과 동일하지만 외계인은 인간과 동일한 고통을 느끼지만 그 고통의 작용은 신경섬유 C가 아닌 다른 종류의 물리적 속성일 수 있다. [5]물리적 속성이 달라도 만약 두 개의 개체가 동일한 기능적 속성을 가졌다면 두 개체의 심적 속성은 동일하다는 기능주의 입장은 이런 다수실현 가능성 논변을 함축하고 있다.[6] 퍼트넘과 그의 제자 제리 포더 역시 기능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런데 1980년대에 퍼트넘은 자신이 고안한 쌍둥이 지구 사고실험[7]에 의해 자신이 고수했던 기능주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트넘의 기능주의 입장은 퍼트남의 영향을 받은 데닛, 포더, 루이스 등에 의해 다양한 버전으로 발전해왔고 이는 곧 현대 인지과학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3.2. 언어철학
3.2.1. 의미 외재론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의미라는 개념(notion)이 외연과 내포로 구분되며 내포는 흔히 심적 존재(mental entities)인 것으로 받아 들였다. 분석철학의 창시자인 프레게는 이러한 "심리주의"에 반대하였다. 그는 의미가 객관적인 공적 속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의미를 심적 존재라기보다는 추상적 존재(abstract entities)로 규정(identify)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러한 추상적 존재를 "획득(grasping)"하는 일은 여전히 개인의 심리적 행위이며 말을 이해하는 일(그 내포를 아는 일)이 단지 특정한 심리적 상태에 있는 문제라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한편, 동일한 외연을 가지지만 내포는 다른 용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은 불가능한 것 같다. 즉 두 용어가 외연은 다르면서 내포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의미의 검증주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는 카르납을 비롯한 철학자들은 용어의 내포가 그 외연에 속하기 위한 기준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즉 내포가 같으면 외연이 다를 수 없다.
퍼트넘에 따르면 전통적인 의미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1) 용어의 의미(내포)를 아는 일은 단지 특정한 심리적 상태에 있는 문제이다.
(2) 용어의 의미(내포)는 그것의 외연을 결정한다.
이 두 가정은 의미 관념을 포함해서 어떤 관념에 의해서도 함께 만족될 수 없다. 전통적인 의미 개념은 잘못된 이론에 의지하고 있다.
퍼트넘은 (2)는 받아들이지만 (1)을 반박하는데 의미가 머릿속에 있지 않다는 주장의 근거로써 그의 논문 "Meaning and Reference"에서 쌍둥이 지구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사례 1) 지구 vs. 쌍둥이 지구: '물'이라는 단어가 분자식이 XYZ인 투명한 액체를 지시한다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이 지구와 동일한 쌍둥이 지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쌍둥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이 XYZ를 마시거나 씻는데 사용하고 XYZ로 가득찬 강이나 바다에서 헤엄도 친다. 처음 다른 지구에 방문한 사람이 '물'이라는 단어를 듣거나 그곳의 물을 직접 본다면 본인의 지구에 있는 물을 떠올릴 때 가지는 심리적 상태에 있을 것이며, 두 지구에서 '물'이라는 단어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의 구성원소를 알게 된다면 지구인은 “쌍둥이 지구에서 ‘물’이란 단어는 XYZ를 의미한다.”라고 생각하고 쌍둥이 지구인은 “지구에서 ‘물’이란 단어는 H2O를 의미한다.”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결국 쌍둥이 지구에서 '물'이라 불리는 것은 명백히 지구의 물이 아니다.
(사례 2) 1750년에 각 지구의 오스카1과 오스카2는 본인들이 살고 있는 지구의 ‘물’의 구성원소를 알지 못했다. 그 둘은 물에 대해 동일한 감정, 느낌, 생각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1750년 지구에서 '물'이란 단어의 외연은 1950년대에도 H2O이고 1750년 쌍둥이 지구에서 '물'의 외연은 1950년대에도 XYZ였다. 오스카1과 오스카2는 물에 대한 동일한 심리적 상태에 있었지만, 그들은 ‘물’이란 단어를 다르게 이해했다. 즉 ‘물’이란 단어의 외연(의미)은 화자의 심리적 상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지구에서 1750년과 1950년의 '물'의 외연이 어떻게 같은가? 내가 한 잔의 물을 가리키며, “이 액체는 '물'이라 불린다”라고 말할 때, 물에 대한 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는 다음을 전제한다. 즉, 내가 지금 가리키는 액체는 나와 동일한 언어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이 '물'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어떤 것과 특정한 동일성(sameless) 관계(x is the same liquid as y; or x is the same as y)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동일성 관계는 이론적 관계이다. 즉 그 관계의 성립 여부는 과학적 탐구에 의해 결정된다. 이에 따르면, 1750년에 살고 있는 사람이 XYZ를 “물”이라 부르고, 50년이나 100년이 지나 그것을 '물'이라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이 ‘물’의 의미가 바뀐 것은 아니다. 오히려 1750년의 사람이 XYZ와 현재의 물에 동일성 관계를 잘못 부여했을 뿐이다. 1750년이나, 1850년이나, 1950년이나, 우리는 강의 물을 가리키며 '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물'이라 불리는 것들은 동일성 관계를 만족하기 때문이다.
(사례 3) 쌍둥이 지구에서는 단어 '알루미늄'과 단어 '몰리브덴'을 바꿔 부른다고 가정해보자. 전문가들은 그 둘을 구분할 수 있지만, 일반인들은 구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구의 금속학자는 쌍둥이 지구의 알루미늄을 지구의 몰리브덴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쌍둥이 지구에 방문한 일반 지구인은 쌍둥이 지구의 알루미늄 냄비가 지구의 알루미늄 냄비와 다르다는 의심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구인 오스카1과 쌍둥이 지구인 오스카2는 자신들이 사는 지구에서 '알루미늄'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동일한 심리적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스카1의 개인 방언에서 '알루미늄'의 외연은 알루미늄이지만, 오스카2의 개인 방언에서 '알루미늄'의 외연은 몰리브덴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즉, 화자의 심리적 상태는 그 말의 외연(의미)을 결정하지 않는다.
(사례 4) 식물에 대한 별다른 지식이 없는 나는 느릅나무(elm)와 너도밤나무(beech)를 구분할 능력이 없음에도, 내가 사용한 '느릅나무'라는 표현의 외연은 다른 사람들이 사용한 '느릅나무'의 외연(즉 느릅나무 집합)과 같다. '너도밤나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내가 사용한 '느릅나무'와 '너도밤나무'는 외연은 다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외연의 차이는 우리들의 어떠한 심적 상태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내가 느릅나무에 대해 가지는 심적 상태와 너도밤나무에 대해 가지는 심적 상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두 나무의 차이점을 아직까지 구별하지 못하니까.) 어떤 이는 그 외연의 차이가 분명히 나의 심리적 상태의 차이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아마도 단어의 스펠링이 서로 다르므로 같은 심리적 상태에 있을 수 없다고).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쌍둥이 지구에서는 '느릅나무'와 '너도밤나무'를 바꿔 부른다는 가정으로 재반박될 수 있다. 지구의 나와 쌍둥이 지구의 내 도플갱어가 똑같이 '느릅나무'를 말할 때 내 도플갱어의 심리적 상태는 나와 완전히 똑같겠지만, 전자의 외연(의미)은 느릅나무인 반면 후자의 외연(의미)은 너도밤나무이다.
따라서 “의미”는 단지 머릿속에 있지 않다.
3.2.2. 의미 이론
솔 크립키와 마찬가지로 퍼트넘은 의미에 관해서 인과적 지시이론을 주장한다. 거칠게 말해서 언어철학에서 인과적 지시이론이란 '모든 언어적 표현들은 아닐지라도 일부 언어적 표현들의 지시체는 단지 인과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이다.[8]3.3. 수리철학
퍼트넘은 수학적 실재론자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추상적 대상과의 대응을 통해서 수학의 실재를 주장하는 수학적 플라톤주의와 다르게 퍼트넘은 이런 추상적 대상과의 대응을 부정한다. 이런 그의 수리철학적 입장은 그의 철학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대상 없는 객관성 (Objectivity without objects)을 함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수학뿐 아니라 논리학과 윤리학도 객관적이라고 믿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객관성이란 플라톤 전통에 따른 대상과의 대응을 통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철학적 입장은 내재적 실재론으로 요약되며, 이런 애매한 포지션으로 실재론과 반실재론 두 진영 모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3.4. 과학철학
3.4.1. 과학의 통일
지도교수가 라이헨바흐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의 퍼트넘은 논리실증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자연과학부터 사회과학까지 모든 과학 분야가 용어, 방법론 등 여러 측면에서 통합된 "통일과학"을 과학의 이상으로 보았다. 초기 퍼트넘도 이러한 논리실증주의의 기조에 동감했고, 폴 오펜하임(Paul Oppenheim)과 함께 발표한 논문 "Unity of Science as a Working Hypothesis"에서 그러한 통일과학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퍼트넘과 오펜하임은 과학이 다루는 대상을 여섯 층위(소립자, 원자, 분자, 세포, 다세포생물, 사회)로 나누고, 이 층위들 사이를 통합하는 연구 성과가 과학계에서 나오고 있음을 들어 통일과학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퍼트넘이 이런 입장을 계속 견지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9]3.4.2. 과학적 실재론 및 반실재론
퍼트넘은 과학적 실재론 논쟁과 관련해서도 여러 중요한 논점들을 제시했다. 과학적 실재론 논쟁은 우리가 과학을 글자 그대로 참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참은 아니고 현상을 잘 설명하는 도구로 여겨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퍼트넘이 과학적 실재론과 관련해 내놓은 여러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1) 기적 불가 논증(No Miracle Argument): 과학적 실재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논증으로 뽑힌다. 이 논증은 간단히 말해, 과학의 성공이 바로 과학이 참이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 논증과 관련하여 과학의 성공이 과연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예측에서의 성공인지 설명에서의 성공인지 등), 그리고 과학의 성공이 과학이 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는지(명백히 거짓인 이론이 여러 측면에서 성공적이었던 사례가 있는데, 그런 사례가 반례가 되는지 등)의 문제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 지시의 관용 원리(Principle of Charity): 역시 실재론을 지지하는 이론으로, 언어철학의 인과적 지시론과 관련되어 있다(위의 '의미 이론' 단락 참고). 관용적 지시론에 따르면 과학 이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보존되는 용어는 계속 같은 대상을 지시한다. 예를 들어 돌턴의 원자론에서 말하는 원자는 현대 과학의 원자와 많은 점이 다르다. 돌턴은 원자가 물질의 최소 단위라고 보았는데, 현대 과학에 따르면 원자는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돌턴이 말하던 '원자'라는 용어와 현대 과학의 '원자'라는 용어는 다른 대상을 지시하는가? 퍼트넘은 이와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원자'라는 용어의 지시 대상이 같다고 본다. '원자'라는 용어의 지시 대상은 인과-역사적으로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3) 비관적 귀납(pessimistic induction): 이것은 오히려 반실재론을 지지하는 주장인데, 본인이 실재론을 반박하려는 의도로 제시했다기보다는 실재론자라면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제안한 것이다. 과거에 성공적이었으나 참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이론들이 많이 있으므로 현재 성공적인 이론도 언젠가는 거짓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증은 흔히 래리 라우든(Larry Laudan)이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퍼트넘이 먼저 제시했고, 게다가 라우든 본인의 논증은 비관적 귀납과 미묘하게 다르다. 사실 더 엄밀히 따지면 퍼트넘 이전에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논증이었고 퍼트넘도 '오래된 회의적 논증'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10]
3.5. 인식론
인식론에서는 통 속의 뇌 사고실험으로 유명하다.[11] 통 속의 뇌 사고실험은 데카르트의 악마 논증의 현대판으로 보면 된다.3.6. 윤리학
전통적으로 철학에서는 사실과 가치는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졌다. 가령 사실은 물리적 대상 혹은 물리적 세계와의 대응으로 객관적인 진리인 반면 가치는 그런 대상 또는 세계와의 대응이 없기 때문에 주관적 영역으로 여겨져왔다. 이는 지식이 경험을 통해 습득된다는 데이비드 흄의 전통을 따른 것인데 가치를 무작정 무의미한 것으로 보지 않은 흄과 달리 흄의 전통을 따른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가치는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런 논리실증주의의 입장은 분석명제와 종합명제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의 비판으로 무너졌는데 (콰인에 따르면 분석명제 역시 종합명제에 의존한다) 퍼트넘은 이런 콰인의 논리실증주의 비판의 맥락에서 사실과 가치 역시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으며, 이 둘은 서로 얽혀있다고 주장한다.그의 윤리적 입장은 그의 저서 Ethics without Ontology와 그의 에세이 모음집인 The Collapse of the Fact/Value dichotomy and Other Essays에서 찾아볼 수 있다. Ethics without Ontology에서는 그의 수리철학적 및 형이상학적 입장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3.7. 신실용주의
1980년대에는 자신이 초창기에 고수하던 과학주의 (혹은 과학적 실재론)과 내재적 실재론 입장을 철회하고 실용주의를 주장하였다. 신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와 실용주의 문제에 관해서도 오랫동안 논쟁한 바 있다.후기엔 위르겐 하버마스와 같은 대륙철학자들이 제기한 민주주의, 사회정의, 종교 등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그의 논문 및 저서에서 다루었다.
이에 관한 논의들은 그의 윤리학 논의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역시 그의 윤리적 저서인 Ethics without Ontology와 The Collapse of the Fact/Value dichotomy and Other Essays에서 다루고 있다.
4. 관련 영상
5. 여담
[1] 코건 대학교 명예교수[2] 고등학교 동문인 촘스키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를 졸업했다[3] 비엔나 학파와 함께 논리실증주의의 양대 축이었던 베를린 학파의 과학철학자. 한국어로 여러 권의 저서가 번역되어 있다.[4] 사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사상은 그들의 후대 철학자들에게 철저한 비판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콰인.[5] 실제로 어류에게는 포유류에서 고통을 담당하는 신경이 없는데 이 때문에 어류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논란이 있다.[6] Putnam, H. (1975) Mind, Language and Reality. Philosophical Papers, vol. 2.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7] 예컨대 우리가 비(rain)에 대해 하늘에서 내리는 H2O 방울이라고 믿는다면, 우리 세계와 모든 것이 같지만 비의 분자식은 XYZ... 의 전혀 다른 긴 형태로 나타나는 가상의 쌍둥이 지구 세계에서 지칭하는 "비" 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8] Casati R., "Hillary Putnam" in Enciclopedia Garzanti della Filosofia, ed. Gianni Vattimo. 2004. Garzanti Editori. Milan.[9] 그리고 퍼트넘의 제자인 제리 포더가 통일과학 논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개별 분과과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포더의 유명한 논문 제목이 "Special Sciences(or: Disunity of Science as a Working Hypothesis)"인데, 부제에 드러나듯이 퍼트넘과 오펜하임의 논문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10] 참고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도 이 논증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푸앵카레는 이 논증에 대한 대응으로 과학 이론이 계속 대체되더라도 수학적 구조는 유지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나중에 과학철학자인 존 워럴(John Worrall)이 푸앵카레의 통찰을 발전시켜 과학적 실재론의 한 갈래인 "구조적 실재론"을 내놓는다.[11] Putnam, H. (1981): "Brains in a vat" in Reason, Truth, and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reprinted in DeRose and Warfield, editors (1999): Skepticism: A Contemporary Reader, Oxford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