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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7 21:49:58

한국어/맞춤법/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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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받침 표기 발달3. 역사
3.1. 맞춤법 제정 이전3.2. 신정국문(1905)3.3. 국문연구의정안(1909)3.4.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1912)3.5.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대요(1921)3.6. 언문 철자법(1930)3.7.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3.8. 대한민국
3.8.1. 한글 간소화안(1953)3.8.2. 한글 맞춤법(1988)3.8.3. 문장부호 맞춤법(2014)
3.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9.1. 조선어 신철자법(1948)3.9.2. 조선어 철자법(1954)3.9.3. 조선말 규범집(1966)
4. 여담: 한글 전산화 역사

[clearfix]

1. 개요

한국어 맞춤법의 역사를 논하는 문서이다.

한국어 한글 표기는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음주의와 어원을 살리는 형태주의가 대립하며 표기 심도가 커졌다. 근대에 표기법이 만들어진 이래 주된 경향은 형태주의를 강화하(표기 심도가 커지)는 방향이었다.

오늘날 맞춤법은 표음주의와 형태주의를 절충하여 '얽히고설키다'와 같은 표기가 생기게 되었다. 앞의 '얽히고'는 [얼키고]로 발음 되지만 동사 '얽다'와 그 피동형 '얽히다'에서 온 것이 분명하므로 원형을 살려 '얽히고'로 표기하지만, 뒤의 '설키다'는 앞의 '얽히고'와 운을 맞추기 위함일 뿐, '섥다'라는 단어도 없고 피동형인 '섥히다'도 없어 '섥히다'라고 표기할 근거가 없으므로 소리 나는 대로 '설키다'로 적는 것이 원칙이며 띄어 쓰지도 않는다.

2. 받침 표기 발달

처음에는 실제로 해당 소리가 나는 받침만 표기하였다. 즉 후기 중세 국어 시기엔 대체로 8종성인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만을 표기하였으며[1], [ㄷ](=[t̚]) 발음과 [ㅅ](=[s]) 발음이 전자로 합류한 근대 국어 시기엔 대체로 7종성인 'ㄱ, ㄴ, ㄹ, ㅁ, ㅂ, ㅅ[ㄷ][2], ㅇ[3]'만으로 표기하였다. 이후 원형을 밝히는 표기법이 자리잡히며, 7종성 이외의 홑받침(ㅈ, ㅊ, ㅋ, ㅌ, ㅍ, ㅎ 등) 및 겹받침(ㄳ, ㄵ 등)의 표기가 자리잡았다.

겹받침을 표기해 주기 이전에는 형태소 기저형의 말음이 자음군인 경우, 대체로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 형태소가 이어지는 경우엔 두 자음을 갈라서 연철했으나(없- + -으니라 → 업스니라), 자음이 이어질 때는 자음군 단순화를 적용해 한 자음만 쓰는 경우가 많았다(없- + -디 → 업디). 사실 표면적 발음과는 다른, 원형을 밝히는 표기법이 자리잡으려면 기저형에 대한 교육이 별도로 이루어져야 하고 원형을 밝힌 표기로 쓰인 문헌 역시 많았어야 하기에, 보편 교육이 이루어지기 전에 널리 퍼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겹받침을 쓰는 것이 완전한 현대의 창작인 것은 아니다. 즉 자음이 이어질 때도 겹받침을 써 주는 경우가 있었다. 훈민정음의 창제자인 세종대왕 자신이 훈민정음 해례본 합자해(合字解)에서 겹받침 표기의 예시를 밝힌 바가 있다.
終聲二字三字合用,如諺語ᄒᆞᆰ為𡈽,낛〮為釣,ᄃᆞᇌᄣᅢ〮為酉時之類。
(종성 두 자나 석 자를 어우름은 우리말에서 흙(土)을 이르는 ᄒᆞᆰ, 낚시(釣)를 이르는 낛〮, 유시(酉時)를 이르는 ᄃᆞᇌᄣᅢ〮 따위와 같다.)

해례본의 예시들을 보면 알겠지만 15세기 겹받침은 ㄹ계 겹받침이 많다. 다른 경우에는 겹받침을 잘 쓰지 않았다. 대체로 소리 나는 받침만을 표기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ㄹ계 겹받침의 발음이 당시에는 가능했으리라는 견해도 있다. /ㄹ/는 유음이라 그 공명도(소리가 울리는 정도)가 높아 사실상 자음보다는 모음에 가까운 특성을 보이기에 음절말 자음 개수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4]

또한 사잇소리 현상을 유발하는 관형격 조사 'ㅅ'[5]의 경우 그 특수성 때문인지 앞말이 자음으로 끝났더라도 그 자음 곁에 무조건 써서 겹받침을 만들어 주었다. 즉 '/나모/ + /가지/'만 '나못가지'로 쓴 게 아니라, '/발/ + /드ᇰ/'도 '밠드ᇰ'과 같이 썼다.

ㄹ계 겹자음과 사이시옷을 모두 쓴 표기로, 위에서도 언급된 'ᄃᆞᇌᄣᅢ〮' 같은 예시가 있다. 모음 'ㆍ'와 모음 'ㅐ' 사이에 자음자가 여섯 개(ㅩㅵ = ㄹㄱㅅㅂㅅㄷ)나 있는 표기. 의미는 '닭의 때'로 '유시(酉時)'의 고유어 표현이다.[6]
파일:external/pbs.twimg.com/Cgy6av3U0AE9xo4.jpg

3. 역사

3.1. 맞춤법 제정 이전

국가적인 차원에서 훈민정음 서적을 발행했으나 구한말까지 국가적인 차원에서 명문화된 한국어 맞춤법이 제정되지 않았고 민간에서 쓰이던 관용 표기를 따랐다. 애초에 갑오개혁(1894)까지 한글이 공문서에 쓰이지 않았다. 다만 조선 초기에 연철 표기법이 주류를 이뤘고, 조선 중기부터 구한말 시기까지 중철 표기법과 '갓흔'과 같은 ㅎ 재음소화 표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칼럼에 따르면 일단 훈민정음 해례본 자체가 국가 공인인 이상, 해례본에서 언급된 8종성법[7]이 받침 표기에서의 실질적인 규범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편찬에 직접 참여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에는 8종성법에 구애받지 않은 다양한 받침 표기가 등장하며, 나아가 체언과 조사, 용언 어간과 어미의 경계를 표기하고 원형을 밝힌 표기법, 즉 현대의 끊어적기(!)와 유사한 표기가 꽤 보인다고 한다. 특히 "월인천강지곡"의 경우 섣불리 8종성법과 연철을 적용해 인쇄했다가, 후에 도장을 덧찍듯 획을 추가하거나, 받침을 물로 지우고 새 글자를 찍는 등 꽤나 심혈을 기울여 수정했다고. 종합해 보면 현대 정서법의 원류는 세종대왕이 이미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 재조명된 것에 가깝다.

사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부터 이미 현대의 형태음소적 표기(표의주의+표음주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如ᄇᆡᆺ곶為梨花,여ᇫ의갗為狐皮,而ㅅ字可以通用。"[8]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ᄇᆡ +ㅅ+곶/, /여ᅀᆞ+의+갗/이라는 원형을 드러내는 방식인 'ᄇᆡᆺ곶', '여ᇫ의갗'으로 표기할 수도 있으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음절의 끝소리 규칙을 적용하여(즉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여) 예시의 'ㅅ, ㅈ, ㅿ, ㅊ'과 같은 치음(齒音)자 표기를 모두 'ㅅ'으로 통일한 'ᄇᆡᆺ곳', '엿의갓'과 같이 쓴다는 이야기이다.[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종성부용초성, 팔종성법, 종성해 참고.

각설하고, 명문화된 규칙은 없었으나 각 시대의 양상을 살피고 싶다면 중세 한국어, 근대 한국어 참조. 고대 한국어의 경우 이두구결 참조.

이후로 구한말 들어 한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대한제국 시기에 맞춤법을 만들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신정국문(新訂國文)이나 국문연구의정안 등이 그 사례다.

3.2. 신정국문(1905)

1905년 7월 22일 지석영고종에게 건의하여 의정부 관보에 공표된 표기법. 고종의 재가를 받아 국가에서 공식으로 선포되긴 하였으나 지석영 본인의 독자적인 의견이어서 약간 받아들이기 힘든 면도 있었다. 갑자기 논의도 없이 새로운 글자 를 창제하자거나, ㅅ계 합용병서한자 반복 부호(漢文疊字) 〻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틀린 가설을 내세우는 등. 그래서 이에 대하여 좀 더 논의하고자 대한제국의 학부(學部)에서 국문연구소를 설치하여 논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의정부 관보에 실린 원문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신정국문 항목에서 시청각 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조정에 건의한 문건이므로 고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7월 29일 2번째 기사: 지석영이 아뢴 대로 국문을 새로 고치다
新訂國文五音象形辨(새로 고친 국문 5음의 상형변):
ㄱ 【牙音, 象牙形。】 ,ㅋ 【牙音, 重聲。】 , ㆁ 【牙喉間音, 象喉扇形。 ○音失其眞, 今姑闕之。】 , ㄴ 【舌音, 象舌形。】 , ㄷ 【舌音, 象掉舌形。】 , ㅌ 【舌音, 重聲。】 , ㄹ 【半舌音, 象捲舌形。】 , ㅁ 【唇音, 象口形。】 , ㅂ 【唇音, 象半開口形。】 , ㅍ 【唇音, 象開口形。】 , ㅅ 【齒音, 象齒形。】 , ㅈ 【齒舌間音, 象齒齦形。】 , ㅊ 【齒音, 重聲。】 , ㅿ 【半齒音, 象半啓齒形。 ○音失其眞, 今姑闕之。】 , ㅇ 【淺喉音, 象喉形。】 , ㆆ 【喉齒間音, 象喉齶形。 ○音失其眞, 今姑闕之。】 , ㅎ 【深喉音。】
新訂國文初中終三聲辨(새로 고친 국문의 초, 중, 종 3성에 대한 풀이):
初聲終聲通用八字, ㄱ 【기윽】 , ㄴ 【니은】 , ㄷ 【디귿】 , ㄹ 【리을】 , ㅁ 【미음】 , ㅂ 【비읍】 , ㅅ 【시옷】 , ㅇ 【이응。 ㄱㄴㄷㄹㅁㅂㅅㅇ八字난 用於初聲 윽은귿을음읍옷응八字난 用於終聲。】
初聲獨用六字(첫소리로만 쓰이는 6자):
ㅈ 【지】 , ㅊ 【치】 , ㅋ 【키】 , ㅌ 【티】 , ㅍ 【피】 , ㅎ 【히】
中聲獨用十一字(가운뎃소리로만 쓰는 11자):
ㅏ 【아】 , ㅑ 【야】 , ㅓ 【어】 , ㅕ 【여】 , ㅗ 【오】 , ㅛ 【요】 , ㅜ 【우】 , ㅠ 【유】 , ㅡ 【으】 , ᅟᆖ 【이으의 合音】[10] ㅣ 【이】 [11]
新訂國文合字辨(새로 고친 국문의 합자 풀이):
初聲 ㄱ字를 中聲 ㅏ字에 倂하면 가 字를 成하고 終聲 ㅇ字를 가 字에 合하면 강 字가 되나니 餘倣此하니라。
新訂國文高低辨(새로 고친 국문의 높낮이 풀이):
上聲去聲은 右加一點 【我東俗音에 上去聲이 別노 差等이 無함이라。】 하고 平入兩聲은 無點이오 凡做語之曳聲에 亦加一點하니라。
字音高低標(자음 높낮이표):
動 【움즉일동】 , 同 【한가지동】 , 禦 【막을어】 , 魚 【고기어】 之類餘倣此하니라。
做語曳聲標(말을 만드는 끝소리표):
簾 【발렴】 , 足 【발족】 , 列 【벌릴[12]렬】 , 捐 【버릴연】 之類餘倣此하니라。
新訂國文疊音刪正辨(새로 고친 국문에서 중첩음의 삭제 정정 풀이):
ᄀᆞᄂᆞᄃᆞᄅᆞᄆᆞᄇᆞᄉᆞᄋᆞᄌᆞᄎᆞᄏᆞᄐᆞᄑᆞᄒᆞ 十四字가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字의 疊音으로 用하기에 刪正함이라。
新訂國文重聲釐正辨(새로 고친 국문 겹소리 정정 풀이):
ㄲㄸㅃㅆㅉ난 ㄱㄷㅂㅅㅈ의 重聲이라 古昔에 까따빠싸짜로 行하더니 挽近에 漢文疊字의 〻를 倣하야, ᄭᅡ[13]ᄯᅡᄲᅡ싸짜로 用함이 還屬便易로대, '以'字를 'ᄡᅧ'[14]로 釋함은 無由하기 ㅅ傍에 ㅂ을 倂用함을 廢止함이라。

파일:누자기호.png 파일:실록누자.png 원문으로는 이와 같이 표기되어 있는데(오른쪽은 실록), 지석영이 ㅅ과 닮았다고 한 반복 부호는 〻가 아닌 로 추정된다. 실록 입력본에서는 그냥 ㅅ으로 입력되어있으나, 글 맥락상으로도 다른 글자를 써야 할 것이고 실제 지면에서도 ㅅ과는 분명 다른 글자를 쓰고 있다.]

3.3. 국문연구의정안(1909)

1907년 7월에 대한제국 학부 소속으로 설치된 국문연구소에서는 이능화, 어윤적, 주시경을 비롯한 의원들이 모여 열 가지 문제를 논의하였다. 각 의원의 논의는 약 200쪽가량으로 이기문(1970),《개화기의 국문연구》의 부록에서 영인본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확정된 의결안은 약 5쪽가량. # 그 안건들과 논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一. 國文의 淵源과 字體及 發音의 沿革 (可)
二. 初聲中 ㆁㆆ ㅿ ◇ ㅱㅸㆄㅹ 八字의 復用當否 (否)
三. 初聲의 ㄲ ㄸ ㅃ ㅆ ㅉ ㆅ 六字 並書의 書法一定 (可, ㆅ은 폐기)
四. 中聲字 ‘ㆍ’자 폐지 및 ᆖ자 창제의 당부 (否)
五. 終聲의 ㄷㅅ 二字用法及 ㅈㅊㅋㅌㅍㅎ 六字도 終聲에 通用當否 (可)
六. 字母의 七音과 淸濁의 區別如何 (五音과 淸音, 激音, 濁音으로 구분)
七. 四聲票의 用否及 國語音의 高低法 (四聲票는 不用, 長音 左肩一點)
八. 字母의 音讀一定 (ᅌ 이응 ㄱ 기윽 ㄴ 니은 ㄷ 디읃 ㄹ 리을 ㅁ 미음 ㅂ 비읍 ㅅ 시읏 ㅈ 지읒 ㅎ 히읗 ㅋ 키읔 ㅌ 티읕 ㅊ 치읓 ㅏ 아 ㅑ 야 ㅓ 어 ㅕ 여 ㅗ 오 ㅛ 요 ㅜ 우 ㅠ 유 ㅡ 으 ㅣ이ㆍᄋᆞ)
九. 字順行順의 一定 (初聲 牙舌脣齒喉와 淸激, 中聲 「訓蒙字會」순)
十. 綴字法 (訓民正音例義대로 仍舊綴字-모아쓰기)
1. 국문의 연원과 국문 자체 및 발음의 연혁
2. 초성 가운데 ‘, , , , , , ㅹ’ 8자를 다시 사용할지 여부 - 쓰지 말자.
3. 초성의 된소리 표기를 ‘, , , , , ’ 6자로 정할지 여부 - (ᄭ 와 같은 ㅅ계 합용병서 말고) 각자병서(ㄲㄸㅃㅆㅉ)를 쓰자, 단 ㆅ은 폐기.
4. 중성 가운데 ‘ㆍ’자를 폐지할 것인지, 그리고 ‘ᆖ’자를 창제할 것인지 여부 - ㆍ를 폐지하지도 말고, ᆖ를 창제하지도 말자.(현상유지)
5. 종성 ‘ㄷ, ㅅ’ 2자의 용법 및 ‘ㅈ, ㅊ, ㅋ, ㅌ, ㅍ, ㅎ’ 6자도 종성에 통용할지 여부 - '가결 다만 ㄷ 말음은 용언의 어간에서만 사용하기로 하였다. '씻다-씻어[씨서\]'와 '믿다-믿어[미더\]'의 경우에만 ㅅ과 ㄷ을 구분한 것. 체언에서는 모두 ㅅ으로 적는 것으로 통일하였다.]
6. 자모의 7음-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아설순치후)과 반설음, 반치음-과 청탁 구별 문제 - -반치음 은 사라졌고 반설음 은 설음에 포함시켜-5음(아설순치후)과 淸音(청음, 예삿소리)/激音(격음, 거센소리)/濁音(탁음, 된소리)로 하자.[15]
7. 사성표를 사용할지 여부 및 국어음의 고저를 표기할지 여부 - 성조는 표기하지 않기로 하자. 장음은 왼쪽 점 1개로 표기.
8. 한글 자모의 명칭을 정하는 문제 - (ᅌ 이응 ㄱ 기윽 ㄴ 니은 ㄷ 디읃 ㄹ 리을 ㅁ 미음 ㅂ 비읍 ㅅ 시읏 ㅈ 지읒히읗키읔티읕피읖[16]치읓 ㅏ 아 ㅑ 야 ㅓ 어 ㅕ 여 ㅗ 오 ㅛ 요 ㅜ 우 ㅠ 유 ㅡ 으 ㅣ이ㆍᄋᆞ)로 읽자.
9. 자순(字順), 행순(行順)을 정하는 문제 - 자음은 아설순치후 + 예사/거센소리 순으로, 모음은 훈몽자회 순으로 하자. (8항에서 적힌 대로)
10. 철자법(綴字法)-자모를 '배열(철)'하는 방법-, 풀어쓸지 모아쓸지 문제 - 훈민정음에 나온 예전 방식대로 모아쓰기로 하자.

'仍舊'(잉구, 고치지 않고 예전대로 씀)이라는 표현에서부터 '풀어쓰기로 바꿔보고는 싶지만 갑작스러울 것 같으니 그대로 두자'라는 어조가 느껴진다. 실제로 국문연구소 의원 가운데 풀어쓰기를 지지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주시경이 대표적이다.]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대에 (발음은 이미 ㅏ나 ㅡ로 합쳐진) ㆍ(아래아)가 창제 당시의 발음이 ᆖ였으리라 여겨졌기 때문에 ㆍ를 폐지하고 ᆖ를 창제하자고 논의했다.

의결안이 발표되고서 1년 후 대한제국멸망하여 공포되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이후 조선총독부의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에도 국문연구소의 의원이었던 어윤적 의원이 참여하는 등으로 내용이 계승된다.

오늘날 각자병서의 사용, 7종성 이외의 종성 표기(+'티읕', '치읓' 등의 호칭[17]) 등은 모두 국문연구의정안에서 처음 명문화된 것이다.

한편 차이점도 있는데, 의정안에서는 자모의 순서를 ㄱ(아)ㄴㄷㄹ(설)ㅁㅂ(순)ㅅㅈ(치)(후)ㅋㅌㅍ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ㆍ라고 하여 자음의 순서가 조금 다르다. 또한 여기에서의 순서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음인 ᅌ은 옛이응으로 폐지하기로 논의한 것이었는데 자음 순서에서는 옛이응을 아음으로 실어두고 있는 등(초성에서 등장하는 ㅇ은 위의 분류로는 후음에 속한다) ㅇ과 ᅌ을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의정안 곳곳에서 확인된다. 'ㄱ, ㄷ, ㅅ'에 대하여 훈몽자회에서 적당한 한자가 없어서 비슷한 글자를 끌어와 조금 달라진 '기역, 디귿, 시옷'이라는 발음은 쓰지 않고 '기윽, 디읃, 시읏'이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다시 훈몽자회 식으로 돌아갔다. 이북(북한)에서 이걸 이어온 건지 아니면 또 다른 계기가 있었는지 '기윽, 디읃, 시읏'을 사용중. '장음을 점 하나로 찍어서 표시하자'는 내용도 이후 표기법에서 약간 더 길게 이어졌지만 오늘날엔 반영되지 않았다.

3.4.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1912)

한국어판 위키문헌#

3.5.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대요(1921)

한국어판 위키문헌#
1921년에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수정, 보충함이다.
ㅅ계탁점
요음 しゃ・しゅ・しょ・ちゃ・ちゅ・ちょ를 샤·슈·쇼·쟈·쥬·죠로 표기

3.6. 언문 철자법(1930)

한국어판 위키문헌#
* 자모 발음(이름) 및 순서

3.7.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

위키문헌 한국어판
一、 한글 마춤법(綴字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語法에 맞도록 함으로써 原則을 삼는다。
二、 표준말은 大體로 現在 中流 社會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
三、 文章의 各 單語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웃 말에 붙여 쓴다。
1. 한글 마춤법(綴字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으로써 원칙을 삼는다.
2.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
3.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쓰되, 조사는 그 위의 말에 붙여 쓴다.

조선어학회에서 발표한 통일안이다. 당시에 '마춤법'이라고 하였으나 1940년부터 '맞춤법'으로 바뀌었다.

1936년에 《사정한 표준어 모음》을 내며 표준어휘를 지정하고 1937년에 반영하였으며, 1940년에 수정안을 냈다. 이전에 잠시 'ㄹ꼬', 'ㄹ까'를 현재 북측 맞춤법과 같이 'ㄹ고', 'ㄹ가'로 적은 적이 있다. 글자 사이에 ㄴ삽입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 담ㅅ요처럼 죄다 사이시옷을 넣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나온 시를 보면 산새를 산ㅅ새라고 쓴 것도 있다. 이런 조항은 1940년에 개정하면서 폐지되었다. 1940년 제2차 수정 때에 제19항의 ‘갖후다·낮후다·늦후다·맞후다’의 사동사 파생 접미사 ‘-후-’를 ‘-추-’로 고치면서 ‘마춤법(=맞훔법)’도 ‘맞춤법’이라 쓰기로 했다.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남북 각각에서 맞춤법 파동이 생겼다. 북에서 형태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남에서 표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파동이 생겼지만, 둘 다 파동으로 끝나고 완화되어 아직도 남북 맞춤법은 1940년에 수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기본으로 거의 유사하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위 인용문의 구절은 현대 한국어 관련 규정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통일안 1항은 현대 한글 맞춤법 1장 1항,(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과 2항은 표준어 규정 1부 및 한글 맞춤법 1장 1항(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과, 3항은 맞춤법 1장 2항(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과 5장 41항(조사는 그 앞말에 붙여 쓴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3.8. 대한민국

3.8.1. 한글 간소화안(1953)

한국어 위키백과 문헌

이승만은 1949년에 당시의 철자법을 폐지하고 구한말 시대의 철자법으로 돌아가자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동안에 형태주의적 요소를 많이 받아들인 한글 맞춤법이 구한말 시대의 한글 맞춤법보다 배우기 어렵다는 것. 1953년에 국무총리령이 발표되어 이 건을 밀어붙이게 됐다. 하지만 국어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고, 문교부 장관이 연달아 사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승만은 1954년에 “3개월 이내에 현행 맞춤법을 버리고, 구한국 말엽의 성경 맞춤법에 돌아가라.”라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새로 임명된 문교부 장관이 일단 간소화 안을 발표하고 무작정 국무 회의를 통과시켰다. 그러자 더욱더 각지의 반발과 비난이 빗발쳤으며, 이승만은 결국 1955년에 이 방안을 취소했다.

3.8.2. 한글 맞춤법(1988)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한글 맞춤법
1985년에 개정 작업을 시작해 1988년 1월 19일에 한글 맞춤법을 고시하여 1년의 유예 기간을 거쳐 1989년 3월에 시행했다(#). 현재 우리가 쓰는 맞춤법은 1988년에 확립된 것이다. 사이시옷띄어쓰기 규정도 이때 크게 바뀌었는데, 어려움과 비일관성으로 비판점이 상당한 편이다.

3.8.3. 문장부호 맞춤법(2014)

문화체육관광부2014년 10월 27일에 현행 한글 맞춤법 중 문장 부호의 용법만을 일부 수정하는 개정안을 고시했다. 글쓰기 환경이 원고지에서 컴퓨터, 스마트폰전자기기로 변하는 것에 맞춰 키보드에서 쓰기 쉬운 부호·기호·특수 문자를 기존 부호와 함께 쓸 수 있도록 '문장부호' 맞춤법이 개정되었다.

개정안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으면 조금 더 쉽게 풀어쓴 글을 읽어 보자.

현재의 한글 맞춤법(국립국어원)

3.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9.1. 조선어 신철자법(1948)

위키문헌

꽤 특이한 맞춤법으로 이 맞춤법에서는 각종 불규칙 용언의 어간 말음을 나타내거나, 반모음을 나타내는 새로운 자모 6개를 추가되어 있다. 그러나 상당히 이질적이기도 했거니와, 조선어 신철자법을 주도한 인물이었던 김두봉이 실각하면서 다음에 만들어진 조선어 철자법에서는 폐지되었다.

3.9.2. 조선어 철자법(1954)

1948년에 제시된 조선어 신철자법이 지금도 유지되는 조항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고, 때마침 김두봉이 실각하자 북측에서 1954년에 개정한 철자법이다.

3.9.3. 조선말 규범집(1966)

#

1987년과 2010년에 각각 개정되었다.

4. 여담: 한글 전산화 역사



[1] 사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은 훗날의 "훈몽자회"식 배열이고,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의 순서로 제시되어 있다. '아음(ㄱ, ㆁ), 설음(ㄷ, ㄴ), 순음(ㅂ, ㅁ), 치음(ㅅ), 반설음(ㄹ)'의 순이며, 같은 범주 내에서는 '전청자(무성무기음), 불청불탁자(공명음)'의 순으로 제시하였다.[2] 표기는 'ㅅ', 발음은 [ㄷ\](=[t̚\]).[3] 발음은 [ŋ\]으로 같되 표기가 'ㆁ'에서 'ㅇ'으로 바뀌었다.[4] 자음으로 끝나는 어간에는 매개 모음을 수반하는 어미가 결합하지만, 'ㄹ'로 끝나는 어간에는 받침이 본래부터 없다는 양 매개 모음 없는 형태가 붙는다. e.g. -(으)면: 먹으면, 안으면, 얻으면... vs. 가면, 살면[5] 오늘날에는 합성어 내부의 사이시옷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6] 받침과는 무관한 이야기지만, 두 번째 음절의 초성 'ㅵ'가 자음군인 것은 확실하되, 그 발음이 /pt’/인지 /pst/인지는 견해가 심하게 갈린다.[7] 종성 표기는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내용.[8] "'배의 꽃[梨花\]'을 이르는 'ᄇᆡᆺ곶', '여우의 가죽[狐皮\]'을 이르는 '여ᇫ의갗'과 같이, 'ㅅ'자로 통용이 가능하다."[9] 한편 /여ᅀᆞ+의/가 표의주의를 따랐을 때는 '여ᇫ의'로, 표음주의를 따랐을 때는 '엿의'로 표기되는 과정은 다소 독특하다. 즉 '여ᅀᆞ'에 '의'가 결합할 때, 체언의 제2음절 끝 'ㆍ'만 탈락한 후(오늘날의 체언과 조사 결합에서는 체언 끝 모음 탈락이 일어나지 않는다.), 남은 자음 'ㅿ'은 종성에 씀으로써 'ㆍ'의 탈락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까지만 드러내면 '여ᇫ의'가 된다. 그리고 이때 이어지는 '의'의 초성자 'ㅇ'은 무음가가 아니라 유성 반찰음 [ɦ\]이므로, 자음 앞에서의 'ㅿ'은 'ㅅ'으로의 음절의 끝소리 규칙을 적용받게 되는데, 이 과정까지 반영한 표기가 '엿의'이다. 우리말샘 '여우'중세 한국어 참고.[10] 실록 한문 입력판에 '으이의 합음'으로 잘못되어 있다. 국문 번역 자료에 맞게 되어있다.[11] 신정국문 본문에서 '아래아를 폐지한다'라는 구절은 없으나 중성 단락에서 아래아를 포함하지 않음으로써 지석영이 아래아를 폐지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래에 '중첩음의 삭제' 부분에서 아래아를 'ㅏ'로 바꾸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12] 실록에서는 '벌랄렬'로 되어있으나, 의정부 관보의 원문은 '벌릴렬'이 맞다. 실록에서의 오기.[13] 실록 입력본에는 'ᄭᅡ'가 누락되어 있다. 실록 원본과 관보 원본엔 모두 'ᄭᅡ'가 존재한다.[14] 실록 입력본에는 '써'로 입력되어 있으나, ㅂ계 합용병서에 대한 언급이므로 원 표기를 살려서 표기하여야 한다.[15] 훈민정음에서는 현재의 ㄱ/ㅋ/ㄲ의 예삿소리/거센소리/된소리를 全淸(전청), 次淸(차청), 全濁(전탁)으로 구분하였는데 '激'이라는 표현을 새로 도입한 것이다.[16] 링크된 디지털한글박물관 입력본에는 ㅍ이 빠져있다.[17] 대체로 훈몽자회를 따랐으나, 훈몽자회에서는 ㅋㅌㅍㅎ 등을 종성으로는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티읕'이라고 부르지 않고 '티'라고만 하였다. 당장 바로 위의 신정국문까지만 해도 'ㅌ, ㅊ' 등은 '티, 치'로 부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8] 사실 완전히 규칙 용언화하려면 '먹습니다'와 마찬가지로 '놀(노+𠀀)습니다'로 하는 게 옳긴 하다. 실제 발음인 [놈ː니다\]를 완전히 도외시하기도 애매했던 모양.[19] 사실 완전히 규칙 용언화하려면 '좋은'과 마찬가지로 '하얗은'으로 하는 게 옳긴 하다. 실제 발음인 [하ː얀\]을 완전히 도외시하기도 애매했던 모양.[20] 그런데 여기에 [j\] 첨가까지 일어난 형태를 인정했는지 위 링크의 문헌에는 '버ㄹ1어'가 아니라 '버ㄹ1여'라고 되어 있다. [pʌ̹.ɾjʌ̹\]가 아니라 [pʌ̹.ɾjjʌ̹\]를 쓴 셈.[21] 어간이 'ㅣ'로 끝나는 용언 중, 그 'ㅣ'가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반모음 [j\]로 바뀌는 것(지-[負\], 치-[打\], 버리-[棄\]...)은 'ㅣ'를 '1'로 쓰게 하고, 그 'ㅣ'가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반모음 [j\]로 바뀌지 않는 것(기-[匐\], 아니-[否\], 미-[破裂窓紙, 팽팽한 가죽이나 종이 따위를 잘못 건드려 구멍을 내-\])은 그냥 'ㅣ'를 쓰게 했는데, 이 구분이 어째 자의적이다.[22] 초창기 풀어쓰기 타자기나 전신용 타자기에서는 (비표준) 두벌식을 사용하였으나, 기계식에서는 핀이 엉키는 문제가 있어 그 이후 세벌식, 네벌식을 주로 쓰고 있었다.[23] 김대중대통령이 그 당시 잘 나가던 사업가 손정의(와 그와 함께 온 친구 빌 게이츠)의 조언을 얻어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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