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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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야샤 하이페츠 Jascha Heifetz Я́ша Хе́йфец | |
출생 | 1901년(?)[1] 2월 2일 |
러시아 제국 빌뉴스 | |
사망 | 1987년 12월 10일 (향년 86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1901~1922) [[소련| ]][[틀:국기| ]][[틀:국기| ]] (1922~1925) [[미국| ]][[틀:국기| ]][[틀:국기| ]] (1925~1987) |
직업 | 바이올리니스트 |
학력 |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
배우자 | 플로렌스 비더 (1928년 ~ 1946년, 이혼) 프란시스 스피겔버그 (1947년 ~ 1963년, 이혼) |
자녀 | 2명 |
링크 | 공식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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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습을 하루 빼먹으면 내가 알고, 이틀 빼먹으면 스승(비평가)도 알고, 사흘 빼먹으면 청중도 안다.
- 본인
- 본인
역사적으로 절대 완벽한 연주자는 아직 없었다. 그래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하이페츠가 유일한 예다.
― 칼 플레슈
― 칼 플레슈
누군가가 하이페츠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의 정교한 손놀림 때문일 것이고, 또 누군가가 하이페츠를 가리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이페츠가 언제나 음악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본능과 같은 분석력이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그래도 또 누군가가 그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렇다, 그는 차가운 사람이다" 라고 말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처럼 자신의 감정을 탁월하게 조절하는 음악가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 RCA 찰스 오코널
― RCA 찰스 오코널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생애
1901년 2월 2일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태어났다. 다만 출생년도에는 논란이 있어 1899년이나 1900년생이란 주장도 있다. 어머니가 비범함을 부각시키려 나이를 줄였다는 추측도 있다. 아버지는 빌뉴스 극장 오케스트라 악장을 역임할 정도로 리투아니아에서는 최고로 실력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야샤가 아기일 때부터 바이올린의 잠재력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3년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5살 때부터 'Vilna's Imperial School of Music'에서 일리야 말킨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는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7살 때 코브노(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펠릭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를 연주하였다. 1910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가 레오폴트 아우어 밑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4월, 하이페츠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야외 음악회에서 25,0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주를 하여 선풍적인 반응을 얻었다. 1912년 10월 28일 하이페츠는 아르투르 니키슈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으며 오스트리아와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했다.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터져 나라가 공산화되자, 하이페츠의 가족들은 러시아를 탈출했다. 그들은 러시아 적군을 피해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극동까지 간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해 10월 27일 처음으로 일 미국 카네기 홀에서 첫 공연을 하였고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반주자 앙드레 베노이와 함께 11월 9일 첫 음반을 냈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순회공연을 시작하였고 미국 전역에서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1919년, Samuel Chotzinoff가 반주자가 되었다. 이후 세계 방방곳곳에서 공연활동을 했다. 런던과 파리 (1920), 오스트레일리아는 1921년에, 아시아(일본&조선)는 1923년에 첫 공연을 하였다.
1925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같은해 Isidor Achron 로 반주자가 바뀌었다. 유대인의 후손이었던 그는 1926년 팔레스타인(현 이스라엘)으로 가서 공연하기도 했다. 1929년 남미에서 데뷔하였고, 1930년, 디니쿠의 Hora Staccato 녹음을 발표했다.[2] 1934년, Emanuel Bay 가 반주자가 되었으며[3] 러시아에서 17일 동안 13개의 공연을 하였는데, 이는 모국으로의 유일한 귀환이었다. 1936년, Lawrence Tibbett와 함께, 미국 음악가 협회(American Guild of Musical Artists) 설립을 도왔다. 1939년, They Shall Have Music에서 영화 데뷔 하였으며, 1942-44 - 미군을 위한 USO 투어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선에서 8주동안 45개의 공연을 했다.
1947부터 20달의 휴가를 가졌다.
1954년, Brooks Smith가 반주자가 되었다. 1956년 이후 공연 활동을 대폭 축소하였다. 1958-59 - UCLA 의 "Regents' Professor" [4] 가 되었다. 1961년,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가 되고, 같은해 LA에서 하이페츠&피아티고르스키 공연 시리즈를 시작해, 나중에는 샌프란시스코와 뉴욕까지 확대되었다. 1972년, LA 음악센터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졌고, 이는 동시에 마지막 녹음이 되었다. 은퇴 후 어깨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했으며 그 후에 다시는 바이올린을 우리가 아는 하이페츠 특유의 그 자세로 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사망하기까지 노년에는 지역이나 방문하는 음악가들과 실내 음악을 즐겼으며,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이 계약을 끝냈으나, 사적으로는 교육을 계속했다. 낙상과 그 후유증으로 인해 1987년 12월 10일, LA Cedars-Sinai Medical Center에서 사망하였다.
출처: Heifetz Bach concertos, Mozart, Paganini, Vitali - 1994, BMG classics / 하이페츠 관련 문헌들
3. 하이페츠에 대한 평가, 말말
나는 비버리 힐즈에서 하이페츠와 긴 대화를 나눈 후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그 협주곡의 어려운 패시지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저를 비롯한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러자 하이페츠는 태연히 바이올린을 집어들고 나를 위해 지독하게 어려운 패시지를 매우 빠르고도 쉽게 연주해보였다. 나는 그가 어떻게 연주했는지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기에 한 번 더 연주해달라고 했다. 그는 한 번 더 연주해주었지만, 그래도 나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내 멍청한 표정을 보더니 슬픈 듯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그가 어떻게 그 패시지를 처리했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
― 요제프 베흐스부르크
― 요제프 베흐스부르크
자네나 나나 이제는 바이올린을 내던져 박살내는 편이 나을 것 같네.
― 프리츠 크라이슬러. 12살의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짐발리스트에게
― 프리츠 크라이슬러. 12살의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짐발리스트에게
"(미샤) 여기 좀 덥지 않나?" "(레오폴드) 피아니스트들은 안 그런 것 같은데?"
―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 하이페츠의 카네기 홀 데뷔 연주를 듣고 피아니스트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와 나눈 대담.[5]
―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 하이페츠의 카네기 홀 데뷔 연주를 듣고 피아니스트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와 나눈 대담.[5]
4. 성향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를 꼽을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연주자 중 한 명이다.[6] 음악의 정점에 선 연주자들은 객관적 실력이 아닌 스타일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맞지만, 그래도 20세기 최고의 연주자를 뽑으라면 바이올린은 하이페츠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동시대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후대까지 비슷한 유명세를 떨친 것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정도이다. 초절적인 기교로 유명하였으며, 연주 테크닉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등 전문 연주자들도 기교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레퍼토리에서도 초인적인 기교로 물 흐르듯 매끄럽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인다.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레코딩. 12분경 시작되는 코다에서 압도적인 기교로 휘몰아치는 연주를 들을 수 있다. 기교 외에 완벽주의적 성향 및 서정성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브루흐나 시벨리우스 바이얼린 협주곡이 유명하다.기본기 중에서도 스케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작 펄만은 14세에 하이페츠를 만났는데, 이 때도 하이페츠는 펄만에게 스케일을 연주해보라고 주문했다.#[7]
연주시에는 템포를 빠르게 잡은 경우가 많다. 기교의 우월함을 강조하려기보다 그저 하이페츠의 템포에 대한 감각이 일반인보다 빨랐던 것 같다. 일례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의 경우 1악장에서 넉넉히 13분 정도의 연주 시간이 나오는데, 하이페츠의 레코딩은 11분을 끊었다.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에서도 빠른 템포 설정[8]으로 극적인 효과를 증폭시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이유로 기교적인 니콜로 파가니니의 작품들은 연주를 꺼렸다. 파가니니 작품을 연주하게 되면 하이페츠가 자신의 기교를 더 이상 과시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래도 24개의 카프리스 중 13, 20, 24번을 녹음했고, 무궁동 역시 녹음했다.
▲ 카프리스 24번 연주 |
그의 연주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연주 중 하나는 하이페츠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그레고르 퍄티고르스키가 결성한 "백만불짜리 트리오"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그 명칭을 싫어했다고 한다.[9]
▲ 멘델스존 피아노 삼중주 op.49[10] |
전성기에는 현대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여러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위촉하고 초연했다. 그런 작곡가 중 하나가 윌리엄 월튼인데, 완성된 바이올린 파트를 보고 하이페츠가 이건 좀 어렵지 않냐고 툴툴대자 월튼이 '당신 하이페츠잖아'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1] 그가 태어난 연도를 놓고 논란이 있는데, 혹자는 1,2년 더 일찍 잡아 1899년이나 1900년에 하이페츠가 태어났다고 하기도 한다. 어머니가 그를 더욱 비범하게 보이게끔 아들의 나이를 2년 더 어리다고 말했을 공산은 있다.[2] 이 곡은 하이페츠의 녹음으로 상당히 유명해졌다.[3] 전성기 음반의 반주자이다.[4] 특정 집중된 분야에서 교수중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의 인물에게 부여되는 지위이다.[5] 후에 고도프스키 자신이 이 일화가 사실임을 밝혔다. 미샤 엘만은 하이페츠가 새파란 애송이일 때 이미 이름을 날린 명연주자였으나, 그의 충격적인 데뷔 무대를 관람한 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6] 국내 클래식 전문잡지 '객석'에서 20세기 바이올린 역사를 정리할 때 뽑은 제목이 '하이페츠의 태양 아래'였다 ('98년 6월호)[7] 단 영상 중간에 나오는 바이올리니스트는 펄만이 아닌 Erick Friedman이다. 혼동주의.[8] 초반 서주의 느린 부분조차 빠르게 진행한다.[9] 이 명칭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후반부에 지겹도록 나오며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도 했다. 여기서의 주요 소재는 베토벤 Op.97.[10] 같은 곡의 비교로 본 현재 스타일은 이작 펄만, 엠마누엘 엑스, 요요마의 앨범을 추천한다. 두 연주를 비교해 봤을때 연주시간이 3분 차이나는데, 연주시간 3분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