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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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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13대 파라오
투트 앙크 아문 | 𓏏𓅱𓏏𓋹𓇋𓏠𓈖
Tutankhamun[1], King Tut
파일:050510_tutankhamun_vmed3p.jpg
미라를 바탕으로 복원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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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age/081/2014/10/20/SSI_20141020112110_V_99_20141020112616.jpg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투트 앙크 아문(Tutankhamun, 𓏏𓅱𓏏𓋹𓇋𓏠𓈖)
출생 기원전 1341년
사망 기원전 1323년 (향년 18-19세)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1332년 ~ 기원전 1323년
(약 8년)
전임자 네페르티티
후임자 아이
부모 아버지 : 아케나톤
어머니 : 영거 레이디[2]
배우자 안케세나멘
자녀 2명[3]
신장 167cm[4]
무덤 투탕카멘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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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1605852300380.png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12대 파라오로, 재위기간은 기원전 1332년부터 1323년으로 추정된다.[5]

2. 이름

<colbgcolor=#decd87> 한글 투탕카멘
로마자 Tutankhamen
이집트 상형문자 𓏏𓅱𓏏𓋹𓇋𓏠𓈖
보통 연음하여 "투탕카멘"이라고 발음하지만, 정식으로는 투트-앙크-아멘(아멘의 살아 있는 형상)이다.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를 온라인상에 나타내기 위해 약속된 음역 표기법이 있는데, 이를 따라 표기할 경우 투트–앙크–아멘은 twt–anx–imn이 된다. twt는 "형상(Image), 현현(顯現/Manifestation), 나타남"이라는 뜻이고, anx는 '생명'의 뜻으로서 이곳에서는 "살아있는"이라는 수식어로 쓰인다. 이집트어에서는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위치하기 때문에 twt–anx는 즉 "살아있는 형상"이라는 뜻이 된다.[6]

한편 imn은 신 아문이다. 여기서는 twt와 쓰여 "아멘[7]의 현현" 정도의 의미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이집트어의 속격 표현법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고대 이집트어에서 속격의 실현은 형용사가 담당하는데[8] 이 때의 형용사를 구분을 위해 속격형용사라고 한다. 이 속격형용사는 이집트 상형문자 n[9] 으로 표기된다. 고대 이집트어의 형용사는 인도-유럽어족 언어의 형용사와 유사하게도 피수식어의 문법적 성(性)과 인칭에 따라 형태가 변하기 때문에 이 속격형용사 역시 그러한 특징을 가진다.[10]

그러나 문법적 성이 남성이면 기본형 n에서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멘의 이미지"라는 말은 곧 "twt n imn"으로 표현된다.[11] n을 영어의 of라고 생각하면 쉽다(Manifestation of Amun). 그러나 이 속격 형용사 n은 표기할 때 생략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처럼 속격 형용사가 생락된 형태를 "직접 속격"이라고 하며 이 때의 표기는 "twt imn"이 된다. 이 직접 속격은 두 단어의 뜻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거나 매우 정형화된 표현인 경우에만 나타난다. 왕명은 제사용 구문과 함께 정형화된 표현의 끝판왕이므로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twt anx imn은 이 twt imn이라는 문형에 twt를 수식해주는 수식어 anx가 추가된 형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뜻이 "아멘의 살아있는 형상"이 되는 것이다. n을 생략하지 않은 형태는 twt anx n imn"이다.[12]

3. 생전

3.1. 존재감 없는 파라오

기원전 1323년에 무덤이 밀폐되었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먼 과거에 재위했던 파라오다. 이는 삼국지로부터도 1500년 전, 그 유명한 고대의 제왕 알렉산드로스 3세진시황이 태어나기 1000년도 더 전, 일리아스오디세이아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기 200년 전이다. 지중해 건너편에서는 한창 그리스 신화를 찍고 있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상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던 시절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상나라의 제15대 왕인 조정의 치세와 남경의 치세와 겹친다.

이집트의 전통 종교를 거부하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추앙했던 아케나톤[13]아들이자 사위[14] 본명은 아톤에서 따온 투탕카톤이었으나, 왕위에 오른 뒤 아문 신앙이 복귀되면서 투탕카멘으로 개명했다.

그의 무덤에서는 아멘호테프 3세의 아내 티이의 이름이 적힌 상자가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서는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이 머리카락과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된 미확인 중년 여성 미이라를 대조한 결과 티이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투탕카멘은 원래 근본 자체가 불확실했으나, 여러 비석이나 기록에서 '투탕카멘은 파라오의 아들이다.' 또는 '아멘호테프 3세는 나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었다. 사실 나이로 보아 아케나톤의 아들이 확실했으며, DNA 검사결과 아케나톤의 아들로 정식 확인된 것이다. 즉 상술한 티이는 투탕카멘의 할머니가 된다.

안타깝게도 그는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다. 미소년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파라오의 황금 마스크는 고인의 형상을 그대로 본떠 만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황금 마스크의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조화가 잘된 애잔한 얼굴이다. 실제로 미라를 기반으로 두상을 만들었더니 미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밀 측정을 한 결과 본모습은 미남형이 맞지만 뻐드렁니가 있는 애매한 형상이었다. 이에 관해서 자세한 것은 하술한다.

이복누나이자 왕비 안케세나멘과의 사이에서 딸 둘을 가졌으나,[15] 공교롭게도 모두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산됐다.[16] 후사가 없어 당시 재상이자 실력자였던 아이가 파라오의 자리를 이었다. 그 뒤를 이어 투탕카멘의 장군이었던 호렘헤브가 즉위했고, 그 뒤에는 호렘헤브의 친구 람세스 1세가 19왕조를 개창하고 즉위한다.[17]

그의 치세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탓에 앞서 서술한 대재상인 아이와 장군 호렘헤브가 거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던 걸로 전해진다. 10살 때 즉위해서 배다른 누나 안케세나멘과 결혼했다.[18]

그의 개명과 아톤 신앙을 버리게 된 것도 아이가 종용한 탓이라는 설이 있다. 이토록 그의 치세가 알려지지 않은 것은 19왕조를 개창한 람세스 1세가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아문-라 신앙의 파괴자인 아케나톤의 역사를 없애기 위한 일환으로, 그의 소생인 투탕카멘과 그의 뒤를 이은 아이의 기록을 지워버리고 호렘헤브의 통치 기록만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단순한 기록 소실일 수도 있다.[19] 하지만 기록 소실이라고 보기엔 또 무리가 있는 것이, 아비도스 왕명록을 기록하도록 만든 장본인인 세티 1세는 기원전 1358년에 태어나서 1279년에 사망한 인물로, 투탕카멘이 제위한 1333년에는 이미 25살 정도의 건장한 청년이었고, 아버지인 람세스 1세는 고위 사제이자 군사령관 호렘헤브의 친구였다. 따라서 그런 그가 투탕카멘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리가 없다.

그래도 투탕카멘은 KV55(아크나톤)과 WV23(아이)와 달리 기록에서는 삭제되었어도 의도적인 무덤 훼손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이는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호렘헤브가 투탕카멘의 치세에 여러 고위 관직을 지냈고 호렘헤브를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었기 때문에 호렘헤브 입장에서 굳이 치세도 짧았고 자신을 출세시켜준 투탕카멘을 적대할 필요가 없어서 공식 파라오 명단에서 삭제하는 정도로 끝낸 걸로 보인다. 실제로 투탕카멘의 무덤에는 파라오의 관을 운구하는 관리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중 투탕카멘의 미라에 가장 가까이 있는 걸로 그려진 자가 호렘헤브로 추정되며, 다른 벽화에서는 두 재상들 사이에서 장례식을 지켜보는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이 자도 호렘헤브로 보인다. 그가 투탕카멘 생전에 '차기 계승자'와 '전 이집트 왕의 대리인'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장례를 집전하는 총책임자도 호렘헤브였을 것이다.

어쨌든 투탕카멘은 유적이 발굴되기 이전에는 별 존재감 없는 군주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렇게 존재감이 없었던 군주였기에 그의 무덤이 온전한 채로 유지될 수 있었다. 유명한 군주의 무덤은 이미 다 털렸지만 투탕카멘은 도굴꾼들에게 유명하지 않은 왕이었기 때문이다.

3.2. 복잡한 후계 문제

한편 투탕카멘의 요절 후, 아이는 고령의 나이에 투탕카멘의 미망인안케세나멘과 결혼해서 제위를 이었으며[20] 고령의 아이가 2년여만에 사망하여 호렘헤브가 그 뒤를 잇고, 아문-라의 사제였던 람세스 1세가 뒤를 이어 19왕조를 열었다. 이렇게 추정되는 것은 1920년대 아이와 안케세나멘의 이름이 같이 새겨진 반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보통 결혼의 의미다. 물론 안케센나멘이 아이의 외손녀이므로, 외할아버지와 외손녀의 혈연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정작 투탕카멘이 생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이는 호렘헤브였다. 이건 호렘헤브가 파라오 즉위전에 관리 시절에 지었던 멤피스 인근 사카라의 무덤이 1970년대에 재발견되어[21] 정식으로 발굴작업을 거쳤는데 이곳에 투탕카멘의 카르투슈와 함께 새겨진 호렘헤브의 여러 직함 중에서 'iry-pat'가 단독으로 많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인데, 이 직함은 고왕국 시절부터 존재한 매우 역사 깊은 것으로 투탕카멘의 신왕국 시기에는 '왕위 계승자'의 의미로 하사되어서 호렘헤브가 투탕카멘이 정한 공식 후계자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다. 또한 이 무덤에는 호렘헤브가 투탕카멘에게서 영예로운 황금'[22]을 하사받는 장면, 봉신 외국인 지배자들과 투탕카멘 부부 사이에서 중재하는 호렘헤브의 모습을 부조로 새겨서 호렘헤브가 거짓이 아닌, 실제로 소년 파라오의 치세 기간 중 중요한 고위 직책을 역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투탕카멘의 장례식을 그린 투탕카멘의 무덤 벽화인데 관을 운구하는 관리들 중 미라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사람은 호렘헤브로 보이며 다른 벽화에서는 두 재상들 사이에서 장례식을 지켜보는 모습이 있는데 이것도 호렘헤브로 추정한다. 하지만 아이가 선수를 쳐서 파라오에 즉위한 뒤 나크흐민을 후계자로 정해서 호렘헤브를 밀어내려 했지만 둘 다 오래 살지 못하고 병사해서 호렘헤브가 파라오에 올랐고 후에 아이는 철저하게 기록말살을 당했지만 투탕카멘은 그냥 기록삭제선에서 끝낸 것도 설명이 된다. [23]

투탕카멘이 죽었을 때 안케세나멘은 히타이트로 편지를 보내 자신과 결혼할 왕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하는데, 히타이트 측에서는 좋다! 내친 김에 이집트 먹자.[24] 식으로 제난자라는 왕자를 보냈지만, 이집트 국경에서 사망하고[25] 안케세나멘도 아이 사후 호렘헤브에 의해 숙청당했다는 설이 있지만, 아이와 결혼한 이후에 모든 기록이 사라지기 때문에 단순한 가설일 뿐이다.[26] 결국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관계는 극도로 나빠졌고, 훗날 19왕조의 3대 파라오인 람세스 2세카데시 전투도 이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27]

사실 제난자가 죽은 직후에도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히타이트의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집트에 이를 비난하는 편지[28]를 보내고 이집트령 아시아를 공격했지만, 해당 지역은 때마침 전염병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수필룰리우마 1세는 병으로 사망하고 원정은 흐지부지되었다. 우르슬라 문서 참고.

3.3. 암살 의혹

발굴 당시 미라를 X-선 촬영한 결과 머리에 큰 상처로 보이는 자국이 발견되어, 그의 사인은 둔기에 의한 두개골 골절, 즉 암살당했다는 설이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실제로 투탕카멘이 죽은 뒤에 왕위 계승이 영 이상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정밀한 CT 촬영에 의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두개골 골절 같은 것은 아예 발견되지 않았고, 두개골에 나있는 갈라진 금은 죽었을 당시에 아직 미성년자여서 두개골이 채 다물어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게 밝혀졌다. 즉 X-선 촬영 당시에 나타난 자국 자체가 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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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CT 촬영에서 밝혀진 또 다른 사실은 다리에 심각한 골절이 있음이 확인되었고, 이걸 사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항생제가 없었던 당시에는 이런 상처가 덧나 죽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한편으로는 워낙 부친인 아케나톤이 유전적 기형 의혹을 받고 있다 보니, 그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 유전병으로 인해 원래 몸이 허약했고, 그래서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병사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위의 다리 골절도 그 증거로 보기도 한다.

CT 촬영에서 밝혀진 사실은 이러하다.
1. 무릎 바로 위쪽에서 심각한 골절이 발견되었다.
2. 왼쪽 갈비뼈 여러 개가 부러져 없어졌다.[29]
3. 심장이 없다.

고대 이집트의 사제들은 시신을 엠버밍할 때 내장을 제거했지만, 심장만은 남겨두었다. 사후 세계에서 죽음의 신 아누비스가 심장의 무게를 재서 생전의 죄를 심판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장이 제거됐을 정도라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개져 손상되어 사제들이 알아보지 못했거나, 도저히 보존이 불가능한 수준이라 포기하고 꺼냈을 정도로 죽을 당시의 부상이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그 외에 말라리아를 사인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미이라를 연구한 연구팀이 유전자 검사로 투탕카멘이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원인 기생충인 열대 열원충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 실제로 말라리아로 인해 사망할 경우, 독특한 증상 때문에 독살당한 것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

2005년에 이집트고고학자자히 하와스의 연구팀이 CT 촬영으로 투탕카멘의 미라를 찍어본 결과, 투탕카멘은 생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구순구개열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른발이 평발이 왼발은 약간 만곡된 상태였으며 왼발 세번째와 두번째 중족골[30]에 무혈성 괴사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아마 다리 골절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때 중족골에도 괴사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팀은 이를 근거로 근친혼의 결과로 태어난 투탕카멘이 생전 발이 굽어있었으며 많은 유전병을 앓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130여 개에 달하는 지팡이들도 투탕카멘의 보행 장애를 입증하는 증거물이라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히 하와스의 연구 결과에도 논란은 있다. 학자들은 투탕카멘이 생전 여성형 유방증, 마르판 증후군, X 염색체 연관 지적장애, 지방 생식기 영양 장애, 안드로겐 무감응 증후군, 클라인펠터 증후군 등 온갖 종류의 유전병을 앓지 않았을까하고 짐작했지만, 실제 DNA 검사를 실시한 결과 그런 건 없었다. 왼발이 밖으로 휜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1960년대에 찍은 CT에는 왼발 만곡이 아니라 미라 제작 과정 도중 발이 굽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실제로 투탕카멘이 유전병 때문에 보행장애가 있었고 생전 지팡이를 썼다면 닳은 자국이 있어야 할 텐데 무덤에서 출토된 지팡이들에서는 닳은 자국을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지팡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상류층들이 즐겨쓰던 악세사리였고, 고왕국 시대 이래 무덤에 가장 많이 들어있던 부장품들 중 하나였다. 단순히 지팡이의 존재만으로 투탕카멘이 보행장애라는 점을 증거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 투탕카멘이 유전병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직접적인 사망 원인으로 보기에는 어렵다.

일단 자히 하와스의 연구팀을 포함한 학계의 정설은 투탕카멘이 다리 골절과 말라리아를 포함한 복합적 요인 때문에 사망했을 것이라고 본다. 왼쪽 다리의 골절 부위에는 수지가 들어있었는데 이는 투탕카멘이 죽을 당시 이미 골절 부위가 절개된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투탕카멘은 겸형 적혈구 빈혈증에다가 유전적으로도 말라리아에 취약한 형질이었는데 이게 왕의 병증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라고. 다리 골절로 인한 감염과 말라리아 합병증 등이 겹치면서 급속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 외에 발의 장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닌 전투 중에 입은 상처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은 투탕카멘이 많은 전투에 참가했으며 무릎의 골절상 주위에 파상풍과 염증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최전방에서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파라오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라는 저주의 문구가 쓰여있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순전한 날조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아예 저런 저주성 문구 자체가 발견된 적이 없다. 마리 코렐리라는 소설가가 고대 아랍어 텍스트에서 그럴듯한 문장을 따와서 편지에 적은 뒤 언론에 투고했는데, 이 문장이 마치 실제 무덤에서 발굴된 양 와전되며 알려진 것이다. 투탕카멘의 저주가 언론을 통해 부풀려지는 과정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아무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투탕카멘의 미이라에서 발견된 외상을 통해 전차 경주 중 사고가 사인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거기다 최근 황금 마스크의 턱수염이 실수로 떨어지자 접착제로 붙인 사실이 밝혀졌다.

4. 사후

이집트의 파라오들 중 생전 가장 존경받지 못한 파라오가 죽어서는 가장 유명해졌다.
존 맨칩 화이트 (영국 저술가)#

투탕카멘은 자손도 없었고 너무 어려서 딱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은 탓에 그야말로 존재감이 없는 파라오였다. 20세기에 들어서 일어난 그 대발견이 없었다면, 투탕카멘을 기억하는 것은 이집트의 역사학자들 정도밖에 없었을거고, 그들도 18왕조의 후반기의 재위 기간이 꽤 되었지만 별 비중이 없는 파라오로 간단히 짚어넘기는 수준에 머물렀을 거다.

4.1. 고고학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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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6일: 길이가 9m에 달하는 복도에 가득 쌓인 자갈들을 오후가 늦어서야 간신히 모두 치웠다. 자갈들을 치우자 두 번째 봉인된 문이 보였다. 모습은 첫 번째 문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 첫 번째 문과 마찬가지로 석회 표면 위에 온갖 종류의 도장들이 가득 찍혀있고, 역시 이전에 열렸다가 다시 봉인한 흔적이 역력하다. 찍힌 도장들은 투탕카멘의 이름과 왕실 묘지의 인장들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첫 번째 문에 찍혀있던 것만큼 뚜렷하지 않아 알아보기가 어렵다. 무덤의 구조와 복도의 모습을 살펴보니 얼마전 데이비스가 발견한 아케나텐의 무덤 양식과 굉장히 비슷해 보인다. 내가 발견한 무덤도 혹시 왕실의 무덤이지 않을까.....?[31]

우리는 문이 완벽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복도에 쌓인 흙과 모래들을 깔끔히 정리했다. 첫 번째 문처럼 두 번째 문의 모습도 노트에 옮겨 그리고 문 왼쪽 위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또 문 뒤에 자갈들이 가득할까봐 철사를 넣어보자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빈 공간이라는 것이다. 당시 고대 이집트의 일반적인 무덤 구조처럼 다시 내려가는 계단 복도일까? 아니면 부장품이 있는 방인가? 우리는 불안한 기대감에 가득 찬채로 문 앞에 서있었다. 고대 무덤에는 악취가 나는 가스가 가득 차서 문을 열면 가스 중독으로 사망한다는 속설 때문에 우리는 촛불을 가지고 온 상태였다. 나는 구멍을 넓힌 다음 촛불을 집어넣고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 옆에서 캘린더와 카나본 경은 잔뜩 흥분한 상태로 나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내가 무언가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뜨거운 바람이 무덤 속에서 휙하고 새어나오며 촛불빛을 흔들리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지나고 내 눈이 희미한 촛불에 적응할 즈음, 어렴풋한 방 내부의 광경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온갖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의 보물들이 서로 겹쳐 쌓인 채로 엄청난 장관을 자아냈다. 내 글 실력이 짧아 이 종이에 다적지 못하지만, 그때 그 감동은 직접 본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할말을 잃고 그저 바라만보고 있자 옆에서 조바심치던 카나본 경이 '뭔가 보이나?'하고 물었다. 나는 '네.... 아주 아름다운 것들이 보입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나머지 사람들도 볼 수있게 구멍을 허물어 크게 넓혔다. 카나본 경도 볼 수 있도록 전등과 촛불들을 켜 방 내부를 더욱 환하게 비추었다. 더 밝은 빛을 통해 제대로 방 내부를 직관한 우리의 놀라움과 감탄은 남에게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황금 샌들을 신고 지팡이와 메이스를 든 장엄한 모습의 파라오 석상 2개가 어둠 속에서 우리를 굽어보았고, 사자 머리, 동물 머리 등 희한한 장식들로 꾸며진 의자, 아름답게 채색된 수많은 상자들, 석고 꽃병들, 뱀들로 장식된 큼직한 검은빛 보물함, 생각 외로 평범하게 생긴 백색 상자, 최고급 재질의 의자, 금빛으로 번쩍이는 상감된 왕좌, 사랑스럽게 생긴 컵과 보물들 - 모든 종류의 가재도구들과 귀한 보석들, 황금빛이 도는 전차 부속품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방의 모습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잃어버린 문명의 오페라하우스' 같았다. 우리의 감정은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기쁨과 궁금증으로 가득 차 넘실거렸다. 우리는 이 많은 보물들을 보고, 과연 우리가 찾아낸 것이 무덤인지 아니면 보물창고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지팡이를 든 두 조각상들 사이로 또다른 문의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 문에 투탕카멘의 이름이 찍혀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저 뒤에 투탕카멘이 잠들어있음을 직감했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자 우리는 다시 구멍을 닫고, 첫 번째 문에 목재 잠금장치를 단 다음 당나귀를 타고 우리가 본 것에 대해 떠들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엥겔바흐 차관에게 파발을 넣어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고 요청했다. 그가 일찍 도착해 무덤 내부에 전등을 놓을 수 있게 전기 설비를 깔아주었으면 좋겠다.

하워드 카터의 발굴 일지[32]

4.2. 투탕카멘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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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집트의 돈줄

만약에 19세기에 이 유물들이 발굴되었더라면, 투탕카멘 유물 상당수는 이집트가 아닌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 측은 투탕카멘 유물을 1점도 해외 반출을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정확히는 이집트 당시 카이로 박물관장 이븐 하지 라우드가 결사반대했고, 그는 별별 이유를 대가면서 영국이 가져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아주 꼼꼼하게 감시했는데 지금까지 남은 투탕카멘 왕 발굴 현장 사진이나 미이라를 조사하는 사진을 보면, 반드시 이집트인이 하나씩은 사진에 찍혀있는데, 바로 라우드가 믿고 보낸 감시원들 혹은 조수들이다. 그는 한점 한점마다 죄다 번호를 매기고, 어느 연구현장에서건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이게 모두 남아있는지 세세하게 조사를 한 다음에야, 연구를 끝내고 외국 학자들이 이집트를 나가게 조치를 취했을 정도였다. 그의 활약으로 투탕카멘 유물은 고스란히 이집트에 남아 이집트의 돈줄이 된다.

유적을 발굴해내고도 남 좋은 일만 시켜준 카나본 경은 그래도 그 덕분에 인류와 고고학에 큰 족적을 남겼으니 나름 명예라고 할 수 있다.[33] 사실 카나본 경은 투탕카멘만 이집트에 내줬을뿐, 생전에 여러 파라오 유물을 개인 소유로 수집해뒀으며 그의 후손은 가문 소유의 대저택에서 이를 유료로 전시[34]하고 있다. 전시 소개 영상

1922년 당시 세계적인 화제를 몰고온 투탕카멘 보도로, 영어로 애칭인 투티라는 이름이 유행해, 당시 미국이나 영국에선 갓 태어난 남자아이에게 투티란 이름을 많이 지어줄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이걸 구경하러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왔다.

현존하는 몇 안되는[35] 고대 이집트 파라오 마스크인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위 사진에 나온)는 해외 전시 대여비용만 해도 400~50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며, 저거 말고도 황금관에서 파라오 마차와 의자에서 온갖 유물들도 각자 대여 비용이 세다. 미국에서 열린 투탕카멘 특별 전시회만 해도 대여 비용으로 3,000만 달러나 썼다고 한다. 물론 대여한 박물관도 이걸 보고자 찾아온 관람객들과 스폰서들 덕에 그만큼 이득은 건졌다. 그러다 보니 이집트 측의 감시도 엄청났는데, 1996년 하마터면 박물관에서 도난당할 뻔하다가 적발된 일도 있다.

2011 이집트 혁명 때 카이로에 위치한 이집트 박물관에 폭도들이 난입해 투탕카멘의 목상 2점을 비롯한 고대 유물 수십 점을 훔쳐 달아났다. 두 달 뒤 도난당했던 투탕카멘의 목상 중 '작살을 든 투탕카멘 입상'이 가방에 담긴 채 발견되어 회수되었지만, 나머지 한 점의 목상과 함께 같이 사라진 기타 유물들은 아직도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여담으로, 투탕카멘 무덤의 유물들 중에는 한 다발의 꽃송이도 있는데 왕비인 안케세나멘이 올려 놓았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고 아마 미스터리일 것이다. 하지만 생전에 그들은 이복남매에 정략결혼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금슬이 좋았다고 하며, 실제로 무덤 속의 부장품들도 이들 커플이 항상 함께 등장한다.[36]

투탕카멘의 미라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 않고 그의 무덤 속, 뚜껑이 유리로 대체된 외부 석관 속에 자신의 모습을 본뜬 황금 관 속에 담긴 채로 여전히 안장되어 있다. 지금까지 무덤을 나온 적은 딱 두어 번 정도였다고. 그것도 무덤 밖 몇 미터 정도에서 검사를 진행한 것이 전부다.

2011년 국립과천과학관에서 투탕카멘 전시회를 했었는데 위에 언급된 보물 등등 투탕카멘 하면 떠오르는 유물들이 거의 대부분 전시되어 있고, 전실, 현실, 보물의 방 등등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 놓았었다. 전 세계 순회 전시회로 아시아에선 한국이 처음이었다고. 하지만 이건 모두 철저한 고증을 거쳐서 제작한 레플리카이다. 즉, 투탕카멘의 유물 진품을 보려면 이집트 가라는 소리. 이집트 관광청은 애초에 목적이 "관광객들의 관심이 실제 여행으로 이어지게 하려고"라고 확실히 밝혔다.

2015년 11월 28일, 투탕카멘의 묘실 뒤쪽에 비밀의 무덤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이집트 고대유물부 장관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네페르티티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2015년 12월 17일, 9주간의 과정을 거쳐 가면에서 떨어져 나갔던 턱수염의 복원에 성공했다. 이 턱수염은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죽은 뒤에는 오시리스와 함께한다는 정체성 및 신성성을 부여하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관련 뉴스(영문)

2016년 5월 13일, 투탕카멘의 묘실 뒤쪽 비밀의 방은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뉴스가 기재되었다. 관련 뉴스

2018년 5월 8일, 지하 투하 레이저로 묘실을 탐색한 결과 비밀의 방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BBC 코리아 뉴스 링크 기사)

2019년 프랑스에서 열린 투탕카멘 전시회가 13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끌어모아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많은 방문객을 모은 전시회가 되었다고 한다.#

2021년 6월22일부터 2022년 4월 24일까지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서 발굴 100주년 기념 특별전, 투탕카멘 - 파라오의 비밀 전시회를 개최한다. 2011년에 국립과천기념관의 전시회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서 제작한 레플리카다. 유물 외에도 발굴 당시를 기록한 동영상과 사진을 공개하고 있으며, 조명을 이용한 연출로 관람객들의 흥미를 더하고 있다.#

4.4. 투탕카멘의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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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하면 처음 떠오르는 것으로 사실상 모든 부장품의 상징이다. 세기의 발견으로 이집트의 아이콘이 되었다.

투탕카멘의 가면에는 황금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재료가 사용되었다. 실제로 가까이서 보면 파란색 부분도 여러 색상을 갖는다. 가장 진한 색은 눈 주변과 눈썹 부분으로, 이곳은 청금석으로 되어 있다. 다른 파란 무늬는 파이앙스(faience)[37], 터키석[38], 아마조나이트 등을 활용하여 제작되어 있다. 이외에도 석영, 흑요석, 칼세도니 등이 사용되어 있다.

이후 마스크에서 네페르티티의 이름이 수정된 흔적이 발견되어 무덤이나 관과 마찬가지로 마스크까지도 본래 투탕카멘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투탕카멘의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했거나, 생전에 무덤을 조성하거나 파라오를 위한 부장품을 처음부터 만들만한 여유가 없이 누구도 예상 못한 시점에 급사했음을 시사한다.[39]

5. 매체에서

5.1. 만화 및 애니메이션

5.1.1. 왕가의 문장

남주인공 멤피스 왕의 모델은 투탕카멘으로 추정된다. 여주인공의 타임 슬립이 점토판의 저주 때문이며, 여기에 나오는 멤피스 왕도 상당한 미소년이다. 다만 만화의 대사 가운데 투탕카멘과 동일인이 아니라는 선을 긋는 부분은 존재한다.

5.1.2. 유희왕

어둠의 유우기의 모티브라고 한다. 정확히는 캐릭터는 투탕카멘이 모티브지만,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졌다는 부분은 아버지인 아케나톤이 모티브라고 한다. 더불어 어둠의 유우기의 본명 '아템'은 아케나톤이 창시하고 투탕카멘이 지워버린 태양신 아텐에서 따온 이름인데 작가 타카하시 카즈키에 따르면 투탕카멘의 부장품 중 아텐을 닮은 것이 있는 것을 보고 사실 투탕카멘은 아버지의 아텐 신앙을 잇고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5.1.3. J9 시리즈

카멘카멘이 이 파라오를 모티브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5.1.4.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투탕카멘부"라는 뭔지 알 수 없는 해괴한 부활동이 존재한다.

5.1.5. 근육맨

미스터 카멘이 이름과 파라오 복장을 투탕카멘에게서 가져왔다.

5.1.6. 미이라왕 투탕

5.2. 게임

5.2.1. 도미네이션즈

투탕카멘 왕의 무덤! 할인 이벤트가 있다.

5.2.2.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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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C 파라오의 저주에서 최종 보스로 등장.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를 토대로 모델링 된 육중한 황금 갑옷을 걸쳤는데,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바예크를 내려다볼 정도의 거구다. 사후세계에서 등장하며, 거대한 창을 휘두르며 주인공인 바예크를 압박하는데 워낙 공격이 강력하면서도 빠르기 때문에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실제 역사에선 이룬 것 하나 없이 요절한 비운의 인물이지만 어쌔신 크리드 세계관에선 에덴의 조각이 가진 힘에 매료되어 아텐 신앙을 만들고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아케나톤과 달리 그 힘을 경계하고 현혹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비밀리에 조치를 취한 고결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된다. 전투 이후에는 선악과의 영향이 테베에서 사라지고 다시 영면에 들었다.

5.2.3. 워해머 판타지

툼 킹 캐릭터인 투탄카누트의 모티브가 되었다.

5.2.4. Fate 시리즈

투탕카멘 문서 참고.

5.3. 드라마

5.3.1. 가면라이더 고스트

6. 기타


[1] 또는 Tutankhamon, Tutankhamun이라고도 한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모음 없이 자음만 표기하는 형태인지라 현재는 정확한 발음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어떻게 읽는지에 대해 조금씩 다른 학설이 존재한다. Amen Amon Amun 모두 이집트의 주신 아문=라를 가리킨다.[2] 모후의 시신이 미라로 보존되었는데 이름이 실전되어 영거 레이디(The Younger Lady)라는 임시 명칭으로 불린다. 양모는 그 유명한 네페르티티다.[3] 둘 모두 사산되어 미라로 만들어졌다.[4] 투탕카멘의 미라를 조사해서 나온 키이다.[5] 26왕조 이전 이집트 역대 파라오의 재위 기간은 현존하는 여러 왕력 등을 참고로 역산한 것이라 이설이 있을 수 있다.[6] "맛있는 사과"라는 말이 고대 이집트식으로는 "사과 맛있는"의 형태로 표현되는 셈이다.[7] 위의 아멘 신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당연히 기독교의 아멘과는 어떠한 연관도 없다.[8] 고대 이집트어에도 현대 언어학에서 말하는 형용사나 전치사 등이 당연히 있다.[9] 𓈖. 음가가 n이라 n으로 서술한다.[10] 다만 원래는 이 속격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n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이 때의 n을 형용사로 파악한 것이므로 정확히 말하면 속격형용사라 문법적 성에 따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 성에 따라 활용하기 때문에 속격"형용사"인 것이다.[11] 아멘은 남성 신이다. 대상의 성 자체가 원래부터 남성인 것은 그 문법적 성도 거의 남성이다.[12] 여기서의 n처럼 문장 내에서 단일 음운만으로 나타나는 기능어들은 최소 두 개 이상의 자음이 연결된 형태가 아닌 관계로 자음 사이에 현대영어의 모음 e를 삽입해 발음하는 표준발음법을 적용할 수 없지만, 마찬가지로 e를 붙여 발음한다. 이를테면, n은 <엔(en)>이라고 발음하고 m은 <엠(em)>, r은 <에르(er)>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이 방법에 따라 읽으먼 twt-anx-n-imn은 <투트 앙크 엔 아멘>으로 발음된다. 그러나 문법적 성이 여성인 대상을 수식할 경우 n에 여성형 접미사(Feminine Suffix) '-t(𓏏)'가 붙어 nt의 형태로 활용하게 되는데 이 때는 단일 음운이 아니므로 n과 t 사이에 e를 삽입하여 <네트(net)>로 발음한다.[13] 아케나톤이라는 이름도 태양신 '아톤'을 모신다는 의미로 개명한 것이다. 본명은 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와 같은 아멘호테프였으므로 아멘호테프 4세로 즉위하였다.[14] 아케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딸 안케센나멘과 결혼했기 때문에 사위다. 기존에는 아케나톤의 동생으로 보는 설도 있었으나, 2010년 DNA 검사와 여러 검사를 통해 아케나톤의 아들로 그의 어머니는 아케나톤의 여동생(네베타흐 또는 베케타텐으로 추정)으로 밝혀졌다.(그녀의 미라는 KV35 무덤에서 발견된 The Younger Lady이다. 왼쪽 뺨에 심한 상처가 있는데, 20대의 젊은 나이에 살해 또는 사고사로 죽은 듯하다.) 네페르티티의 소생인 안케센나멘과는 이복 남매로 아케나톤의 여동생 미라는 다시 아케나톤의 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와 어머니 티이 왕비와의 DNA 대조 결과 결국 둘은 친남매로 확인되었다. 즉, 아케나톤은 투탕카멘의 아버지이자 고모부가 되며 어머니는 어머니와 동시에 고모가 된다.[15] 투탕카멘과 안케세나멘의 나이 차이는 대략 9~10세 정도로 추정된다. 거기다 투탕카멘과 결혼할 당시 안케세나멘은 출산 경험이 있었다.[16] 한 명은 6개월, 한 명은 4개월로 추정된다. 근친상간 때문인지 선천적으로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이 장애가 사산의 원인이 됐다고 추정된다. 사산된 태아임에도 불구하고, 왕녀이기에 모두 미라로 만들어지고 마스크를 씌우고 작은 관에 넣어져 아버지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이 딸 중에 하나라도 태어나 살아남았다면 18왕조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살아남았다고 해도 유전병으로 오래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후 투탕카멘이 죽고 안케센나멘의 죽음으로 18왕조는 대가 끊기고 만다.[17] 아이와 호렘헤브의 즉위로 18왕조가 끝났다고 봐야 되지만, 아이는 왕족이었던 안케센나멘과 결혼했고, 호렘헤브는 아케나톤의 처제이자 아이의 딸로 추정되는 무트노지메트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는 모계 사회였는데, 아이와 호렘헤브가 후사가 없이 죽고(호렘헤브는 다른 부인 소생의 아들이 있었지만 람세스에게 양위했다.) 람세스 1세가 즉위하면서, 19왕조가 개창한 것이다.[18] 미인으로 유명한 네페르티티 왕비의 소생이다. 풀이하면 안케즈-엔-아멘. 본래는 안케즈-엔-파-아톤으로 '아톤을 위한 삶'이라는 의미였으나, 이후 아문-라(아몬라)의 사제들이 권력을 잡으며 아톤 신앙이 밀려났고, 결국 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에서는 왕이 친누이든 의붓누이든 남매인 왕녀와 결혼하여 계승권을 인정받는 관행이 있었다. 왕위 계승이 모계 위주인 것은 아니지만, 이집트에서 여성의 지위는 대단히 높았고 공주들에게도 상당한 계승권이 있는 만큼 결혼을 통해 그 권한까지 가져오고 새로운 경쟁자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나중에 람세스 2세는 자기 큰딸이 자라자 큰딸도 후비로 맞아들여 그 사이에서 외손자 겸 아들인 자식도 얻었다.[19] 19왕조 세티 1세(람세스 2세의 아버지, 람세스 1세의 아들)의 신전에 있는 "아비도스 왕명록"에서는 아멘호테프 3세 다음에 바로 호렘헤브로 넘어간다.[20] 다른 해석도 있는데, 아이가 안케세나멘의 외할아버지이며 혈연에 의해 제위를 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아이와 안케세나멘의 족보가 애매하게 표현되어 이런 견해차가 생겼다.[21] 이 무덤은 19세기에 재발견되었으나, 이 때 발견한 자들이 미술품을 노리는 도굴꾼들이라 무덤의 부조만 떼어내어 유럽과 미국 각지의 박물관에 팔았고 다시 잊혀졌다.[22] 고대 이집트에서 관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로, 파라오가 황금 목걸이를 하사하는 것이다.[23] 호렘헤브의 입장에서 자신을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고 관료로 승승장구할 수 있게 해준 이가 투탕카멘이었으니 적대할 이유도 없었고, 재위기도 짧아 굳이 기록말살까지는 할 필요가 없어서 파라오 명단에서 삭제하는 선에서 끝냈다.[24] 고대 이집트는 모계 사회의 전통이 많이 남은 여권이 강력한 사회라서 아들이 없으면 딸의 배우자, 즉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도 했다. 그래서 히타이트에서는 이 참에 이집트를 먹을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와 별개로 여왕들도 몇 명이 있긴 했다.[25] 만화 하늘은 붉은 강가에서는 이 설을 채택했다.[26] 아이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는 설, 파라오를 계승한 아이의 손에 의해 용도폐기 당하고 죽었다는 설, 재혼 이후 이름을 바꿔서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설, 심지어 호렘헤브와 결혼했다는 설까지 다양하지만, 고고학 상의 다른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영구미제일 듯싶다.[27] 다만 실질적인 화근은 18왕조 투트모세 3세 시절에 얻은 아시아 영토까지 히타이트 세력이 뻗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어난 충돌이다.[28] 이 편지의 내용을 보면 제난자는 이집트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는 히타이트인들의 추측이라서,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집트에 도착한 후에 사망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29] 발굴 도중 손상됐다면 조각이 미라 내에 남아있어야 하지만 왼쪽 갈비뼈들의 경우 조각이 발견되지 않았다.[30] 발바닥과 발등을 이루는 5개의 뼈를 의미한다.[31] 이때 이미 하워드 카터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왕실의 무덤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었다.[32] 더 자세한 내용은 투탕카멘의 무덤 문서 참조.[33] 참고로 카나본 가문은 대대로 상당한 부와 명예를 축적한 명문가다.[34]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의 촬영지로 쓰였던 유명한 저택으로, 수익금은 모두 저택의 유지 및 수리에 쓰인다. 1차 세계대전 때는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해 병원으로 내줬을 만큼 유서 깊은 곳이지만 건물 자체가 17세기에 지어졌다보니 유지비용이 상당하다고.[35] 사실 의외로 꽤나 많은 파라오들의 마스크가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 황금 마스크는 프수센네스 1세, 아메네모페, 세숑크 2세 등의 마스크도 남아 있으니 투탕카멘의 마스크가 유일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 파라오들은 모두 말기 왕조의 파라오들이라 존재감이 희박하고, 한창 몰락하던 시대라서 마스크 수준이 과거에 비해 못하다.[36] 후술되는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퀘스트에서는 이 설을 따랐다. 안케세나멘이 수레국화를 올려놓으며 그를 기렸다는 내용.[37] 유리와 구리를 섞어만든 세계 최초의 인조 보석이다.[38] 터키석 특유의 하늘색이 특징.[39] 고대 이집트에서는 선대 파라오나 왕족들의 기념물이나 부장품의 이름을 긁어내고 새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자신의 기념물로 만들거나 자신의 부장품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 경우는 부장품을 재활용했다기보다는 네페르티티를 위해 제작되던 마스크를 투탕카멘이 급사하자 대상을 변경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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