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에게 할 말이 있는 사람이에요. 지난 1세기 동안 일어난 주요한 변화치고 칼 마르크스 동지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이지요. 경제, 문학, 우주여행, 예술, 역사, 인간관계, 바티칸 교황청, 노동조합, 혁명, 사회변화, 교육, 의학, 산업, 농업, 언론 이 모든 영역 어디에서나 털보 칼의 머리카락 한, 두 개 정도는 찾아볼 수 있을 거야.
리우스, 이동민 옮김, 《만화 마르크스》, 오월, 1987, 14쪽.
리우스, 이동민 옮김, 《만화 마르크스》, 오월, 1987, 14쪽.
카를 마르크스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긍정적 평가
우리에게 카를 마르크스는 도덕적, 정신적 생활의 거장이지 지팡이를 휘두르는 목자는 아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게으른 자들을 때려 깨우는 이이며, 반쯤 잠들어 있기에 선의의 전투를 위해 자각돼야 할 훌륭한 에너지들을 깨워 일으키는 자이다. 그는, 관념들의 저 선명함과 통합성을 달성하기 위해, 그리고 만일 우리가 추상들에 대해 헛되이 이야기를 늘어놓길 원치 않을 경우 필요한 저 건실한 문화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강렬하고 끈질긴 성격의 작업에 대한 한 사례이다. 그는 의식적이며 사색적인 인간의 한 벽돌 조각이다. 말하면서 자신의 혀를 살피거나 심장의 떨림을 느끼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거나 하지 않으며 현실을 그 본질에서부터 포괄함으로써 이를 지배하는, 즉 민중의 심성에 침투하여 편견의 생장을 분쇄하고 관념들을 일정하게 명징화하며 도덕적 성격을 강화하는, 견고한 논법(syllogism)을 건설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 <우리의 마르크스>[1]
안토니오 그람시, <우리의 마르크스>[1]
저는 니체를 독해할때 동시에 마르크스를 독해합니다. 그것은 좋은 편성이며, 그런 것에서 저는 여전히 유효한 타당성을 찾아냅니다. 마르크스의 모든 주장에는 급진적인 비판이 있습니다. 오늘날, 저는 완전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통제사회에 대해 기고한 글은, 마르크스가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적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르크스가 이제는 죽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시급한 과제가 너무 많고, 따라서 우리는 세계 시장이 무엇인지, 어떻게 자본주의가 움직이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에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질 들뢰즈, <나는 기억한다>
질 들뢰즈, <나는 기억한다>
마르크스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세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술한 것처럼, 그가 창시한 학문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오늘날 인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그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마르크스를 빼놓고는 오늘날의 학문을 서술하기란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베버 역시 앞에서 언급되었듯 마르크스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기꾼이라고 주장한 바 있을 정도로 그의 학문적 업적은 견고하다. 그가 제시한 여러 학문적 개념과 이론들은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 및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이론은 철학,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사회복지학, 미술사학 등 많은 학문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 논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이기도 하다. 2005년 영국의 방송사 BBC가 대중들에게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꼽혔으며, 공산주의를 정립한 인물이다.[2] 또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점을 잘 간파하고 현대의 발전된 자본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도 하다. 또 현대 독일 정치와 경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3] 독일 내에서도 가장 위대한 독일인 중 한 명으로 언급되어 위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주로 독일 사회민주당[4] 또는 좌파당 지지자들, 그리고 구 동독 지역의 좌파 사이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존경심이 깊다. 때문에 동독인들이 정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할 때마다 켐니츠에 있는 마르크스 동상에 모여서 집회를 연다.[5] 옛 사회주의권이었던 동독 지역의 좌파가 카를 마르크스를 앞세워 국가의 재정과 복지를 확대하려는 강경한 시위를 많이 하기 때문에 독일 내 우파와의 충돌이 잦다.[6]
근대 사회과학의 분과학문들을 새롭게 창시하였고[7]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 등을 저술하였으며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말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류 전체의 사상과 철학, 사회, 문화, 외교, 정치, 경제 등의 방향성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매우 중요한 사상가로 지목된다.
2.1. 영향력
전 세계적으로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마르크스를 역사상 굉장히 영향력이 있었던 철학자이자 사회과학자 중의 한 명으로 손꼽는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순수철학 및 역사학 그리고 스스로 전문적이라 했던 사회과학에 있어서 그의 이론 자체만으로의 중요성도 있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논란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정치계와 경제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만으로도 엄청난 발자취를 남겼다고 봐야 한다.마르크스의 행적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근대 인문학 전반과 그 기본 개념을 전부 재정립하려 시도했으며, 나아가 새로이 도래한 자본주의 시대라는 게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애초에 '자본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마르크스가 만든 것이며,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대척점에 있는 자유시장경제라는 사회과학적 현상을 철학 사상적으로 정립하려다 보니 무리하게 '주의'라는 용어를 넣게 되었다. 때문에 현대에도 자본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비문(非文)이다라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고 주장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란 말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마르크스는 그를 재정의한 것에 가깝다. 안 그래도 정치적 목적으로 그의 학문적 기여를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생긴 폄훼 또는 오해 중 하나.
그 시대에서 핍박받던 '노동자'라는 계급이 존재한다고 한 뒤 그 계급 전체의 중대한 각성을 일으켰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또 그들과는 다른 입장에 있는 인텔리/지식인 및 중간적 위치의 계급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그들이 어떠한 사회적 의무가 있는지를 일깨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 이전에는 도시노동자 상퀼로트, 시골 농민, 의사와 변호사 등 고급 사무직들은 서로를 다른 계급으로 간주했는데(프랑스 혁명기의 상퀼로트들은 의사-변호사 등을 부르주아로 간주했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개념은 이러한 인텔리겐치아까지 포괄했기에 보다 강력한 혁명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 외에도 유명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가 중 상당수는 프롤레타리아와는 거리가 먼 쁘띠부르주아-중산층 지식인 출신이 많았다.[8] 이러한 혁명가들과 운동가들에게 마르크스의 이론은 귀감이 되었고 투쟁전선에 뛰어들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즉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에릭 홉스봄이 정의한 "혁명의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다.
마르크스의 이상향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세계의 많은 국가들에서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20세기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실험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비록 그 이상향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변질되어 버린 경우가 태반이고 수 많은 이념분쟁의 씨앗이 되어 버렸다 해도 말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발전과정은 봉건주의-자본주의-공산주의로 이어진다고 생각했고 각 사회가 한계점과 모순이 발생하여 갈등이 극의에 이르었을때 갈등-혁명-진화의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봉건제가 무너지고 왕을 사형시키며 부르주아의 자본주의가 형성이 되었고 마르크스가 생존하던 19세기는 그러한 자본주의의 안 좋은 이면이 사회에 팽배해져 있을 때였다. 하나 20세기에 이념대립을 펼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이 되었는데 미국과 서유럽의 자본주의는 공산주의 진영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세력이 파괴되어 버리는 것을 보고서 재현되는 걸 막기 위해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식으로 변화하였고 소련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시장논리가 최악에 이르렀을 때 등장한다는 마르크스의 논리와는 달리 러시아라는 봉건주의 체제의 정점인 나라에서 등장해버리는 등 태생부터 괴리가 생겨버리는 상황이 생겼다.
이러한 편린은 끝내 공산주의가 독재와 부패, 국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버려진 사회가 되어버리는 태생적인 결말을 맞이하였으며[9] 노동자의 투쟁 그리고 세계대공황을 거치며 형성된 현대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권리를 어느 정도 보장받는 당시 카를 마르크스가 생각하던 사회에 좀 더 가까우나 자본주의의 형태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상이 되어있다.
2.2. 인문학에서의 위치
인류역사상 손꼽히는 영향력이 큰 학자인지라 수능 사회탐구 영역, 그리고 그를 넘어 대학교의 사회과학, 인문계열 학과의 거의 모든 과목에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단적으로 현대 역사에서 시대 구분론은 마르크스의 시대구분론과 완전히 같다. 시대구분론이 기본적으로 경제사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다. 마르크스와 현대 역사학의 차이는 공산주의를 현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뿐으로, 애초에 큰 틀에서 역사분류할 때는 고대-중세-근대로 현대나 근세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하다. 그나마 현대를 구별하는 경우도 2차대전 종료가 기점이지만, 이 역시 근대자본주의의 틀에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기록하는 경우는 드물다. 2차 대전 이후의 시기에 대한 가장 흔한 표현은 에릭 홉스봄이 주창한 장기 19세기를 포함한 세기별 분류. 같은 이유로 최초의 시대구분론이 등장해서 스스로를 근대라고 선언했던 르네상스 시대를 현대 역사학에서 근세로 만들어버린 것 역시 근대의 상징인 자본주의 발달의 부족 때문.[10]
인문학계에서는 근대 철학의 방법론 및 그 내용으로 인해 마르크스를 간과할 수 없고 역사학계에도 유물론적 사관을 남겼다. 또한 마르크스는 막스 베버(Max Weber)[11]와 함께 근대 사회학의 토대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가 좌파적 관점에서 거시적인 인문사회의 제반을 해석한다면, 베버는 대체로 우파적 관점을 가진 인문사회 연구자들의 미시적인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다. 물론 둘을 단순한 좌우 대립관계로 간주하는 것은 극도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오히려 베버가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더욱 정교한 형태로 발전시켜 연구하였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사실, 베버 본인이 '마르크스와 니체의 이론적 기여를 인정하지 않는 학자는 사기꾼'이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마르크스나 베버나 한결 같이 글쓰기 스타일이 독일인 학자다운 악랄한 만연체라 학문적 토대를 만들어야 하는 대학원생들이 둘 중 하나의 저서를 읽다가 수없이 학을 떼면서 사상적 기반을 만들기 때문에 둘의 이념을 다 포섭하여 자신의 사상적 토대를 만드는 인문사회계열 연구자는 보기가 힘들다. 우파적인 학문으로 알려진 경제학을 봐도 사정은 사실 비슷하다. 경제학의 대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만 해도 제대로 완독한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피상적 사건이 아닌 그 이면과 동력에 대한 개념을 처음으로 사회과학 및 인문학에서 제시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개념은 인간 개인에도 그러한 보이지 않는 동력이 있음을 보여준 점에서 중요하다고 한다. 이 책도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말만 유명한데, 마르크스의 영향을 꽤나 받았다.
그의 사상은 현대 공산주의의 원동력이 되었다.[12] 그러나 정작 그는 사회주의가 성립한 이후의 사회에 대해서 말한 것이 많지 않다. 프랑스 내전 같은 저술에서 과도기적 사회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그나마 구체적으로 묘사해 둔 정도다.
마르크스주의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13] 사이에서 토론과 논쟁으로 분파가 세분화[14]된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
그가 미친 영향을 인문학 영역 요소요소 별로 뜯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문학에서는 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형성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문학 사조가 형성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비단 문학사조만이 아니더라도 그의 토대와 상부구조론은 문학 해석에 있어서의 반영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학 너머로 눈을 돌려보더라도 모든 예술 분야에 걸쳐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며, 당장 모더니즘에서도 마르크스의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유명한 바우하우스의 창립자들이나 파블로 피카소 등이 마르크스의 사상적 영향 속에서 새로운 예술사조를 열어젖힌 것에서 알 수 있듯, 모더니즘 예술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지대했다.
역사학은 어떠한가? 그의 사적 유물론(즉, 유물사관)은 역사를 보는 중요한 관점이자 연구방법론을 제시했다. 즉, 사회의 이념이나 관념, 가치관이 역사를 추동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적 생산양식의 변화나 과학적 발견에 따른 기술 혁신 등이 우리 삶을 뒤바꿔 놓았으며 사상이나 이론은 그 뒤를 쫓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역사구분(원시, 고대, 중세, 근대)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2.2.1. 철학
마르크스주의는 어떠한 종교적인 교리가 닫힌 체계가 아니라 세상을 분석하고 변화시키는 방법론 철학이다. 그것은 독단적인 원칙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발전하는 사유 체계이다.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1965)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1965)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실용 철학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를 분석하는 도구이자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행동에 대한 지침서이다.
알랭 바디우
알랭 바디우
철학에서는 그의 저작이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독일 이데올로기』나 다양한 저서에서 엿보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은 오늘날 철학자들의 주요한 테마가 되었다. 그리하여 칸트를 통해 집약된 근대사상은 헤겔을 통해 한층 발전되고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철학의 열매가 자라는 사상적 토양을 완벽하게 일궈놓게 되는 것이다.
대륙철학계에서는 정치철학, 미학, 정신분석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마르크스의 영향력이 지대하다. 마르크스 사후, 마르크스주의는 게오르크 루카치와 루이 알튀세르를 거쳐 철학적으로 정제되어 소련 붕괴 이후에도 현재까지 멀쩡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표적인 현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는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에티엔 발리바르, 장-뤽 낭시, 자크 비데, 피에르 마슈레, 안토니오 네그리, 마리오 트론티 등이 꼽힌다.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마르크스주의의 계보를 부분적으로 이어가고 있다고 평가받으며, 발터 벤야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으로 대표된다.
심리학에서는 프로이트의 작업과 마르크스의 연구를 엮으려는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Freudism-marxism)이 20세기 꽤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슬라보예 지젝과 같이 공공연하게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인물 뿐 아니라, 빌헬름 라이히,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같은 내로라하는 심리학자들이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 학파에 한발짝씩 걸치고 있다. 이와 별개로, 소련에서도 레프 비고츠키등의 마르크스주의적 심리학 조류가 있었다.
또한 비교적 최근에는 사이토 고헤이, 제임스 오코너, 존 벨라미 포스터 등을 위시로 한 생태마르크스주의가 상당히 주목을 받고 있다.
2.2.2. 사회학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과 함께 사회학의 3대 거장이라 불리는 그는 사회학에서 갈등론 패러다임을 열어놓은 장본인이며, 경제학에서는 고전경제학의 비판인 『자본』을 집필했다.[15] 또한 경제환원론(경제결정론)을 정립하여 후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특히 신좌파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고도산업사회 변증법적 비판이론도 마르크스의 노동소외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2.2.3. 정치학
정치학에서도 그의 관점은 중요하게 다뤄지며 특히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섬세한 통찰이 드러나 있어 정당이론과 국가론의 중요한 분석서로 여겨진다. 당장 그의 정치사상이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2.2.4. 경제학
또한 마르크스는 다양한 학문뿐 아니라 자본주의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 마르크스 등장 이전까지 고전경제학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당시 자본주의는 완전한 시장방임주의다 보니 비판받을 점이 많았다.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영국만 봐도 뒷골목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의 숫자가 수천 명이었고[16] 죽음을 면한 아이들도 제대로 된 교육이나 기본적 수준의 의식주 보장도 없이 공장 노동자로 내몰렸으며, 가난한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인권은 물론이요, 제대로 된 노동권의 행사나 복지은 물론, 참정권마저도 안정적으로 보장받지 못한 채 자본가들에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근근히 살아가던 형편이었다.
또한 자본가들은 이와 같은 노동 착취에 관해, 그것이 일할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하는 것이자, 자본가들이 그들을 필요한 만큼 부려 먹을 자유 역시 보장하는 것이라 여겼으며, 당시는 사회적으로 그런 생각이 팽배한 시대였다. 자본론 1권에는 이런 자본가들이 미성년자들의 노동시간을 제한하자는 법을 어떤 식으로 반대하는지에 관해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보고 매력을 느낀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요즘엔 한계혁명 이후 경제학의 사조가 완전 바뀌었기에 마르크스 경제학은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서울대처럼 강좌를 따로 개설하거나.
마르크스가 1867년에 자본론을 집필한 이후 불과 4년 뒤에 한계효용혁명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윌리엄 제본스의 정치경제학 이론이 출간되며, 이후 경제학의 패러다임은 급격하게 한계 혁명을 수용한 신고전파 경제학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경제학사에서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다.
3. 부정적 평가
만약에 인간이 아무런 개인적 감정과 욕심이 없는 존재라면, 사회주의 이론은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한 이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이를 무시했다. 인간사회에서 모두의 경제적 평등함을 목표로 했던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인간의 개개인의 능력차이와 개개인의 욕구를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였고, 인간의 행복이 아닌 인간의 불행을 초래하는 모순된 이론으로 몰락하였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는 실패한 이론이다.
권오중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모순
권오중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모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르크스의 이론들은 한 마디로 '유명무실'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근현대사에서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욕구나 현실적인 사항들을 간과하는 주장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 개인적인 논란들도 속속히 탄로되며 마르크스 자체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3.1.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의문과 '과학성' 담론
칼 포퍼 등의 과학철학자는 이론의 모호함에 대해 비평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의 몰락이 도래할 것임을 반증할 수 있는가, 즉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포퍼가 마르크스에게 제기하는 비판이다.[17] 덧붙이면 포퍼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라는 체계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어떤 점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며 그것을 실제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비판가의 자질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과학이 아니며 형이상학적이며, 이상론이기 때문에 위험한 이론이거나 좋지 않은 이론이라 주장했다. 애초에 마르크스가 스스로가 기존의 여러 다양한 사회주의/공산주의와 자신의 이론과의 차이점으로 내세운 것이 '과학적 사회이론'이었으며, 마르크스 스스로의 정의한 바 "공산주의"는 곧 '과학적 사회주의'이기에 포퍼의 비판은 바로 그 지점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포퍼는 마르크스 이론의 또 다른 독특성을 마르크스 자신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 도덕적 경향이 이론 가득 묻어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자본론을 읽으면서 앞 부분의 선험적 명제들을 검증하는 내용을 지나 현실을 비판하고 사실의 목록을 구성하는 측면에 도달하면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분노하고 참여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폭로를 전술적으로 기술하는데, 바로 이러한 점을 이끌어내는 것이 마르크스 이론이 영향력을 갖게 된 이유라는 것이다. 분명 이 점에서 포퍼의 비판은 일견 중요한 지점을 가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 자신은 이론의 도덕성을 배격했고 철저하게 현실을 바꾸고자 독일 이데올로기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바처럼, 해석이 아닌 실천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의도까지 그의 죄과로 씌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알튀세리언을 비롯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포퍼를 비롯한 과학철학자의 비판에 대한 몇 가지 반박을 제시해 왔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말한 과학은 생시몽과 푸리에의 공상론과의 차이점에 기반한 것이기에 포퍼 등이 사용하는 '과학'과는 쓰임이 다르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마르크스 시대의 '철학'이 재현된 현상을 분석한 것인데 반해, 마르크스주의는 현상의 허위와 표면을 파헤쳐 그 내부를 관찰하는 이론이기 때문에 과학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기존의 사회과학은 (지배) 이데올로기이며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정리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 특히 알튀세리언이 말하는 과학은 기존 과학철학에서 논의하는 과학이 아니기에 비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포퍼가 비판하는 과학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과학이 아니고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이며, 따라서 포퍼가 내세운 기준들은 통용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다만 자연과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이 다르다는 주장은, 어찌됐든 자본을 공저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엥겔스부터 포물선 운동 등의 자연법칙을 그대로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데 인용하였고, 그 후의 소련에서 과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보면 설득력이 부족한 편이다. 그리고 현상이 아닌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주장 역시, 많은 과학철학자들이 동의하는 테제임은 인정하나, 포퍼 등의 비판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새로운 기준을 내세워 회피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러한 논쟁은 모두 마르크스가 과학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식화하지 못했으며, 과학을 정의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본격적인 논의에는 접근하지 못했기에 발생한 것이다.
3.2. 비판적 계승
마르크스는 자신을 예언가가 아닌 과학자로 여겼기에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사회주의가 어떻게 실현되고 운영될 지 예견하는 걸 꺼렸다. 그렇기에 그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문제점을 밝히고 사회주의가 도래할 개연성과 그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학문적 영역을 제한했는데, 이 때문에 혁명가가 제멋대로 마르크스 이론을 해석하고 변형하면서 정치적 야욕을 정당화하기도 했다.[18]20세기 후반, 소련 및 동유럽을 위시로 한 스탈린주의는 국제적 정세, 냉전적 패권 경쟁, 현실 정치에 매몰되어 본래의 사회주의적 이상, 마르크시즘 이론 등과 관계없는 압제적인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아직 헤겔과의 접점 등이 보이곤 하던 초기의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이 인간 본질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이를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고 하고, 이들의 사상을 비판이론이라고 부르는 데 20세기 사회학 및 현대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루카치 죄르지, 막스 호르크하이머 등 어마어마한 라인업의 학파다. 최근에는 악셀 호네트 등이 이를 계승하고 있다.
3.3. 이론의 추상성
마르크스의 저작이 전기와 후기가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르크스 후기 이론들보다 오히려 전기 이론들이 더 중요하다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해석/비판에 따르면, 보통 마르크스를 논할 때 등장하는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비판 등은 마르크스 후기 저작들의 이론들이며, 마르크스가 '과학적 이론', 현실 정치에서의 변혁 등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단순한 정치투쟁이론이 되어 버렸다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역사적으로 많은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실패한 경우가 부지기수한데 그것은 과거와 달리 질서가 잡히지 않고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 선동이 곳곳에 일어나거나 노동자들이나 하층민들 가운데 좋은 사람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서로 물어뜯기에 바빠 결국에는 더 가난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19][20]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가 그럭저럭 굴러가는 사회들 중, 혁명, 내전, 패전(총력전에서의) 등 국가가 거의 무너졌다 재건될 정도의 사건을 겪지 않은 곳이 드문 이유 또한 생각해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만 해도 한국전쟁, 개발독재 등을 통해 전통적 공동체들이 거의 산산조각 난 뒤에야 전근대적 불평등이 철폐될 수 있었고, 수 차례의 혁명을 겪은 프랑스와 달리 안정된 사회를 유지한 영국에서는 아직도 사회 곳곳에 신분제가 미약하게나마 잔존해있다. 이를 고려하면, 마르크스가 굳이 혁명을 주장한 이유는 그것이 부정의한 구체제를 완전히 와해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인 것도 있다. 같은 논리로 공론장에서의 합리적 발화 산출을 통해 자본주의를 '교정',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 하버마스가 비판받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의 비판적 계승자[21] 중 하나인 막스 베버는 마르크스의 계급이론 등 이론은 물론이거니와, 방법론에 대해서도 전방위적인 비판과 수정을 시도했다. 베버는 마르크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기민하게 파악하여 계급의 유형과 그 사이에서 매개되는 힘에 대해 정교한 분석을 시행했고, 사회과학에서 가치와 사실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방법론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학술적 논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 뒤로 베버는 맑스주의자 루카치한테 비판받고, 루카치도 다시 비판받았으며 그 비판자들 또한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급진적 혁명 자체가 가지는 파괴성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진보성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단순히 폭력적 과정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철학과 사상을 배제할 수는 없다.
3.4. 젊은 시절의 백인 인종주의자의 면모
라인신문 시절의 젊은 날의 마르크스는,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를 역사발전 단계론에 근거해서 자연스럽다고 옹호하기까지 하는등 당시의 식민지들에 대한 인식에서는 계몽주의적, 유럽중심주의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3.4.1. 인종주의자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하지만 이후의 저작에서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식민지배에 대해서 일관적으로 비판적인 논조를 보였으며, 후에 1차 인터내셔널에서는 공산주의 사회를 이행하기 위해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전 민족을 초월하여 노동자들의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아직 사상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젊은 시절에는 유럽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 강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론의 체계가 잡힌 후에는 그렇지 않았다.마르크스는 중농국가, 예컨대 아시아의 중국, 유럽의 러시아 등에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적이 있었고 마르크스에게 혁명 발생 유력지는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하지만 이는 인종주의라고 볼 수 없는 것이, 민족적인 문제를 떠나서 아시아 국가들은 당시 산업화가 진행되지 못한 국가들이 많았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혁명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에 따라 해석한 것일 뿐 이를 백인인종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추후에 마르크스는 농경국가에서도 노동시위가 발생하는 것을 지겨보고, 농경국가에서도 급격한 산업화와 생산성 증대, 노동자 계급의 계급의식 구축 등이 선제된다면 혁명이 가능하다고 입장을 변경하였다.
마오주의자가 많았던 공산주의 계열 흑인 무장단체 흑표당에서는 그가 인종주의자임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인종차별적 사고방식과 그의 통찰은 무관하다고 말했다.
3.5. 인성・위선자 논란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예로 들면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선동하여 폭력적 투쟁을 주장하였으면서, 정작 자기는 친구 엥겔스의 후원으로 살았으며, 따라서 이 자의 공산주의 철학은 마르크스 자신의 일생 행적에 비추어보면 모순덩어리인, 인간의 탐욕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라는 주장이다.또한 자본가와 악질지주들을 그렇게 비난했으나, 자신의 인생의 모습은 마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 까라마조프와 비슷한, 전형적인 구체제 귀족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어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한 예로 마르크스는 자기가 부리는 가정부한테 제대로 된 월급을 거의 안 주고 사실상 무보수로 부려먹었다.
비슷한 내로남불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장 자크 루소는, 평생을 거쳐 반복된 궁핍한 삶 속에서 현실과 싸우며 자수성가한 인생사와 스스로의 추태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반성적 면을 숙고해 동정의 면이 많이 있다. 인간으로서 완벽한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며, 어떤 인간이든 일생동안 무수히 많은 추태를 저지르며 살아간다. 문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수많은 대중을 계몽시켜야 할 입장에 서 있는 사상가라는 직종의 인간들에게 정말 목숨과도 같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자아성찰이며, 이것이야말로 자아 발전의 원동력이며, 철학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 중요한 것이 마르크스의 경우엔 없었다.
즉,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노동계급의 고통을 일생동안 단 한 번도 공유해본 적 없으며, 인격적으로 타락한 전근대 귀족에 가까운 마르크스가, 자기반성이 결여된 편협되고 자기중심적인 인성의 소유자인 그가, 대체 무슨 공감능력이 생겨나 사회 약자 노동자들의 고통을 통감할 것이며, 또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한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할 수 있겠느냐,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노동자 계급을 선동해 이용해먹은것 아니냐" 라는 비판이다.[22]
물론 개인의 인성과 사상가로서의 수준은 구분되어야 한다. 굳이 따진다면 어느 시대든 간에 기본적으로 놀고 먹고 하는 유희와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거나 공부하는 등 사색을 하기 위해서는 하루 24시간 먹고 사는 것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이 삶의 여유가 필요한 것이라서, 굳이 마르크스뿐 아니라 세계사에서 중대한 변혁을 주도하거나 불의에 항거하거나 한 이론가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대개는 중산층 이상의 신분이었다.
객관적으로 남겨진 사료를 봐선 아무리 잘 쳐줘도 인간성이 좋다고 하긴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가지고서 그의 사상도 옳네 그르네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피카소는 어디 인성이 훌륭해서 미술사에서 그리 대접받던가? 물론 예술가인 피카소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화가로서 피카소는 개인 인성에 조금 문제가 있어도(여성편력 등) 적어도 위선자라고 욕먹을 만한 잘못을 한 건 아니었고, 직업에 대한 비판점으로는 기껏해야 라이벌 관계였던 마티스의 작풍을 베끼기도 했다는 점 정도뿐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평생 동안 노동자들의 부조리한 삶과 사회구조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공산주의를 내세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타고난 계층이나 부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굳이 내던질 필요는 없어서 그랬다고 쳐도, 그 부로 자기 앞가림도 못할 정도로 사치를 부리고 온갖 인성 논란을 자초한 것은 명백히 정치경제학 사상가로선 결점이다. 아닌말로 처음에는 영웅으로 출세한 사람도 권력을 잡으며 악랄한 독재자로 변질되기 쉬운데 처음부터 이 모양인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뤄지고 자신이 그 독재의 중심에 선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지만)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를 지구상에 최초로 실현한 레닌도 자기 이념을 배신하지는 않았고 실제로도 당시 기준으로는 선진적인 면도 보였지만, 사적으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고 노동자를 같은 계급으로 안 보는 등 출신성분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었고 권력을 잡은 후에는 독재자로 변해갔으며 숱한 정적숙청을 벌였다. 심지어 김일성이나 폴 포트 같은 막장 공산주의자도 일단 젊었을 적에는 순수한 면도 있었던 이상가이긴 했으니까. 결국 총평을 내리면 만약 사상가에게 그 사상을 실현할 권력이 주어진다면 그 사상가가 타락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기준으로는 인성을 보지 않을수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는 단지 권력을 잡은 적이 없어서 타락한 인성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대거 등장한 좌파 사상가들의 삶은 마르크스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엥겔스도, 유대계 중상층 출신이었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후대 아나키즘과 민주 사회주의 그리고 러시아 대중적 사회주의의 도덕적 지향성을 놓은 알렉산드르 게르첸도, 국제 아나키즘의 선각자이자 1차 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대차게 싸운 후 공산주의와 결별한 미하일 바쿠닌도 해당된다. 소련의 탄생을 이끌어낸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또한 중산층의 삶을 사는 집안이었으며 그 아버지는 공로로 하급 귀족위를 받을 정도의 집안이었다. 심지어 주변에서 무식하다고 비웃었던 스탈린도 신학교 다니면서 지식인으로 필요한 교양과 독서는 그래도 다 기본적으로 하고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가 중에는 중상류층 출신자가 다수였으며, 설령 가난했어도 그 명석함을 눈여겨본 주변인들이 지원을 해주는 등 집안 형편과는 별도로 공부하면서 자랄 수 있었던 경우들이 대다수다. 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생활양식에 익숙했고, 태도도 관용적이었다. 룩셈부르크 시절 숱한 이론가들과 혁명가들이 모여있던 독일 사민당은 왈츠 파티를 열고 와인을 마시는 등의 세련된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독서량과 사고력은 물론이고, 당원들 앞에서 상대방의 논리를 논파하며 설득할 웅변력, 게다가 외국의 활동가들을 만나 사상적 교류를 하고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는 외국어 능력까지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론가들은 어렸을 때부터 공장에서 노가다하는 대신 부모님이 사준 책 보고 공부하며 자란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 게 당연하다는 해석도 있다.[23] 프루동처럼 진짜 인쇄소에서 "노가다" 하면서 글을 배워 결국 사회적 아나키즘이라는 사조의 창시자가 된 케이스도 존재한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스탈린이나 호치민과 달리 교육도 못 받아서 무려 독학으로 공산주의를 배운데다가 가난한데 키도 작고 못생겨서 고생을 많이 했다.
마르크스가 한 말부터가 '이론은 곧 무기다'인데, 실로 '이론'은 불의에 항거하는 대중활동, 체제를 전복시키는 혁명투쟁의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지만 정작 그 불의와 부조리의 피해자인 노동계급에서 '왜 내가 핍박을 받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그 부조리에 항거할 방법들을 발견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 시대의 계몽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은 당대 근대사상은 어쩔 수 없이 계몽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성향을 띌 수 밖에 없다. 당대 수 많은 사상가, 활동가, 혁명가들은 심한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충분히 공부할 수 있었던 여유, 그런 여유를 통해 획득한 지식, 그러한 지식을 개인의 영달에 쓰기 보다는 스스로는 일어나 싸울 수 없는 대중들 앞에 서는 '전위(vanguard)'가 되어 부조리를 혁파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뭉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24]
이러한 중상층 출신 운동가들의 사상에 대한 충성심도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가는 현상이다. 이에 대해 사학자들이 분석한 바가 있는데 중상층 출신 운동가들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상태에서 정말로 해당 사상에 경도되어 혁명에 참여하지만, 하층은 자신들이 지금 놓여있는 환경에서 탈출하기 위해 혁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그럴 기회만 온다면 지금까지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인해 변절해서 기존의 혁명 대상이었던 상층 라인에 서려 든다는 내용이다.
당장 사람이 이상을 품고 그에 투신한다는 거 자체가 어렸을 때부터 눈 앞의 물리적 이익을 넘어 뭔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생각해내고 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당장 배가 고프고 추우면 이상이고 철학적 지향성이고 뭐고 눈에나 들어 오겠는가? 단순히 자기 처지에 기반하여 자연스러운 계급적 증오심으로 좌익에 투신한 사람들이야 "먹고 살기 위해서 했는데 알고 보니 걍 체제에 충성하는 게 더 밥벌이가 된다"라고 철면피만 깔면 쉽게 전향할 수 있지만, 중상층 출신의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구상하고, 서술하고, 선동해 온 일생의 가치관 자체를 버리는 일이니 더 우직하게 자기 사상을 관철할 수 있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생활수준에 있어서 여유를 갖고 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론적 고찰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나중에 상황이 변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공부하고 배운 것에 비추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 보다 확고한 중심이 자리잡았기에 쉽게 변절하지 않는 반면, 탄탄한 이론적 기초 없이 정의감과 정열 또는 순간의 열렬한 증오심으로 투쟁을 시작한 사람들은 소련 붕괴, 고난의 행군과 같은 상황이 닥치면 기존의 입장을 180도 바꾸어 정반대의 뉴라이트 정치적 세력에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다. 아니면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와 같은 더 극단적인 노선으로 나가며 기존 사회 계층들을 다 절멸시켰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인종차별(로 보일 수 있는 언행)을 했던 것은 인정하지만, 그의 통찰력은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흑표당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인 휴이 뉴턴이 평한 적이 있다.
[1] 그람시 본인이 당시 경영을 맡았던 이탈리아 논설지 '일 그리도 델 포폴로'에 1918년 기고한 글로, 이른바 '주의주의적 공산주의자'로서 노동 계급의 견실한 의식 각성을 중시했던 그 특유의 관념론적 특징이 강하게 드러난다.[2] 사회주의라는 말은 1803년 기울리아니(G. Giuliani)가 루소의 개인주의적 원리에 대하여 사회적 생활원리라는 뜻으로 사용한 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창시했다고 볼 수 없다. 공산주의 역시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사상이기에 그가 공산주의를 창시했다는 것도 엄연한 착각이다. 그러나 그 때의 공산주의는 다 실현 불가능한 내용이었고, 이를 현실에서 적용 가능하도록 발전시킨 것은 마르크스가 맞다.[3] 독일 사회민주당이 마르크스의 동료이자 친구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직접 사회민주당을 후원하면서 많은 영향을 끼친 데다가 사회민주당 초기 당원들도 마르크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의 역사와 이념을 얘기할 때 마르크스는 절대 빼놓을 수 없으며, 좌파당도 계보로 따지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사민당의 우경화에 반발해서 떨어져 나간 독일 공산당에서 이어지고 독일 공산당과 그 후신인 사회주의 통일당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삼은 만큼 마르크스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4] 이념의 토대인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사회민주주의를 창시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기념하고 있다.[5] 반면 아돌프 히틀러는 언급되는 것만으로 질타를 받는다.[6] 반대로 우익쪽에서는 비스마르크랑 아데나워를 내세운다.[7] 한국에서 반백 년 가까이 독일 사회과학과 막스 베버 사회학을 연구한 전성우는 "마르크스는 생존의 사회과학을, 베버는 자존의 사회과학을, 뒤르케임은 공존의 사회과학을 펼쳤다."고 요약한 바 있다.[8] 예를 들어 엥겔스는 공장주의 아들, 레닌은 교육자 집안 출신 법대생, 마오쩌둥은 사범학교 졸업생 출신이였다. 스탈린 정도가 산골짜기 구두장이의 아들이자 학비가 무료인 신학생이었다.[9] 공산주의 사상은 자본주의의 경쟁체제를 완전히 갖추고 생산력이 모든 국민을 풍족하게 할 수준의 능력이 바탕이 된 뒤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다. 그렇지 못한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부를 나누자라는 개념은 모두가 똑같이 잘 살자가 아니라 똑같이 죽자가 되어버리고 일부의 소수층이 부를 독점하는 형태로 변질되어 버린 경우가 많다. 당장 북한을 보자.[10] 애초에 대부분의 역사학에서는 근세를 인정 안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르네상스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중세의 전성기다.[11] 이 사람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관료제를 완성했다.[25] 그리고 현대의 모든 조직은 관료제를 사용(혹은 변용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은)하지만 관료제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12]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 마르크스 사상에서 공산주의 혁명은 자본주의의 발달이 극한에 다다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터져버린 것에 대하여 후대 공산주의 이론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 가장 중세적 요소가 강했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르크스는 말년에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며, 실제 러시아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요상한 이론이 많이 등장했다. 참고로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로 꼽은 것은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영국이나 프랑스였고 프랑스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야 자신의 조국인 독일의 혁명이 일어난다고 했다.[13] 레닌,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로자 룩셈부르크, 레온 트로츠키, 스탈린, 마오쩌둥, 그 외 멘셰비키 및 사회주의자들[14] 사회민주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좌익공산주의 등[15] 고전경제학은 애덤 스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로 이어지는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이어 받았으며 그 이후 케인즈주의 혁명 이후 신경제학에 반발한 오스트리안 학파가 이어받는다. 맑시즘 경제학은 고전경제학에게도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대의 따른 학파의 경제학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16] 거기에다 영국의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아일랜드 대기근과 그 대처 방법을 생각해보면...[17]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인가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심도 있는 철학적 논쟁을 요한다. 이에 대해서는 마르크스 경제학/비판 항목 참고.[18] 이는 에드먼드 버크와 러셀 커크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상당히 견제되는 사상이기도 한데 우리가 아는 보수주의와는 달리 보수주의는 선동으로 무장한 이념을 상당히 경계한다. 에드먼드 버크와 같은 인물은 점진적 보수주의를 추구했지 선동을 일으키면 오히려 민중이 폭동과 무질서함 및 도적이 되어 혼돈으로 가득차기에 인간이 더 무지해진다고 생각하여 폭동을 웬만하면 자제하는 방향의 철학자다. 물론 이러한 보수주의에는 결국 모순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데 소극적이고, 프랑스 대혁명이나 미국 독립 혁명 등의 역사적 변화의 순간들을 부정하며, 구체제를 옹호하는 경향성이 깊게 베어 있다는 비판이 상존한다. 그들이 경계하는 '선동' 또한 민주주의적 정치를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요소다.[19] 로마도 이런 혁명 운동을 잘하지 않았고 계속 시민들이 국가의 주체였어도 데모만 하는 정도에서 스스로 선을 그쳤다. 혁명은 그야말로 나라를 뒤집어 엎어버리기에 외세의 침략의 위험도 있어서 정치인들이나 시민들도 잘 알기에 서로 타협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었다.[20] 이는 로마가 귀족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우자마자 수도 로마가 갈리아인들에게 빼앗긴 것이 클 수도 있다. 공화정이 세워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행정체계가 혼란스러웠기에 갈리아인을 나중에 겨우 몰아내긴 했으나 그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21] 냉전 시기, 마르크스와 베버를 대립적 위치에 놓고 '베버가 마르크스를 극복했다'라는 식의 프로파간다적 담론이 유포되었으나,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시각으로, 베버는 마르크스의 연구성과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근대화라는 주제를 더욱 깊이 파고들어간 사회학자라 할 수 있다.[22] 실제 마르크스는 몇 주간 노동 조합원들과 같이 숙식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제 가축소굴에서 사람 사는 동네로 돌아온 기분이네'라는 식의 편지를 지인에게 보낸 적이 있다.[23] 한국식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유럽은 기독교-인도유럽어족이라는 하나의 큰 틀 안에서도 수많은 다양한 문화와 국가들이 국경 하나 두고 갈라져 있어서, 스페인에서 옳은 소리하다 찍히면 프랑스로 튀었다 프랑스에 찍히면 영국으로 다시 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발상 대신 자기의 사상적 신념에 따라 국적을 바꾸는 일이 흔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이 사람은 인쇄소 일을 하며 독학으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였다) 같은 인물도, "폴란드 사람이 공산주의에 물들어서 소련군 선봉장으로 모국에 밀고 들어왔다"고 하면 우리나라에서야 '조국을 러시아에게 팔아먹은 매국노' 같은 소리를 듣지만 서양에서는 (그가 신봉한 이념에 대한 호오를 떠나서) 행적 자체는 그리 욕 먹지 않는다.[24] 단 북한에서는 여기에 쓰여진 이른바 '리론가'들은 경멸의 대상이다.
[25] 단, 베버 이전에도 유럽의 국가기관은 관료제에 기반한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베버는 그러한 관료제적인 조직의 형태를 우리가 아는 '관료제'로 개념화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