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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20:08:45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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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帝國主義 | Imper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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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hodes Colossus[1]
로도스의 거상

1. 개요2. 특징3. 역사
3.1. 식민주의에서 제국주의까지3.2. 현대의 제국주의
3.2.1. 신식민주의3.2.2. 인권 제국주의
4. 끝나지 않는 논쟁
4.1. 일각의 '제국주의 옹호론'과 재평가 시도4.2. '제국주의 옹호론'에 대한 반박4.3. 피지배 국가에 대한 사죄와 보상
5. 제국주의 국가 목록6. 관련 인용구7. 창작물에서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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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perialism

제국주의열강들이 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다른 나라에 대해 정치, 경제문화적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사상과 그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의미한다. 따라서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의 제국과는 의미가 다르다.

제국주의가 야기한 막대한 폐해를 의식하여 현대에 제정되는 국제법과 국제협약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와 자유로운 주권 행사가 전제된 자결권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2. 특징

제국주의의 태동을 언제로 잡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좁게 잡으면 산업 혁명 이후 열강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넓게는 신항로 개척 시대를 전후한 식민주의의 유행까지 포함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에 제국주의가 시작됐다고 보는 학자들은 15-18세기에 유럽이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한 것을 '중상주의적 제국주의'라 부르면서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와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전형적인 형태의 제국주의는 다음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유럽과 미국이 아시아·아프리카권을 대상으로 실행한 제국주의는 사회진화론, 인종차별, 우생학, 근대만능주의 등의 정당화 수단을 사용했으며 심지어 유럽에서도 식민지-제국과 유사한 구조가 형성됐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에 의해 분할된 동유럽이 그 예시다. 물론 동유럽은 일단은 같은 유럽으로 인식했기 태문에 아예 비문명의 세계로 간주한 비유럽권보다는 훨씬 나았다.[2]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중국 등에서 원주민이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것도 넓은 의미의 제국주의로 볼 수 있지만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형태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 사례들은 원주민 집단을 파괴한 뒤 지배민족(나라)의 지배체제를 제외한 하부구조를 거의 남겨 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국과 식민지를 분명히 구분하고 크기만으로는 식민지가 본국 이상인 경우도 있던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구조와 다르다.

3. 역사

3.1. 식민주의에서 제국주의까지

식민주의 초기에 스페인포르투갈은 원주민의 정치 체제를 전복시킨 뒤 귀금속을 약탈하거나 노예무역을 했다. 이러한 착취 구조는 얼마 안 가 생명력을 잃었는데 국내에 생산동력을 갖추지 않고 원료만을 파는 방식에 의존하다가 오히려 국내 산업이 고사했기 때문이다. 19세기부터는 프랑스식 모델과 영국식 모델이 위세를 떨쳤다. 프랑스는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면서 농업 이민을 주로 실시한 반면 영국은 간접통치를 하면서 원료 수탈과 자국시장에서의 소비 쪽으로 나아갔다.

제국주의를 주도한 나라들에서 실질적인 혜택은 고위층에게 돌아갔고 서민들은 궁핍하게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은 학술적으로도 조명됐다. 카를 마르크스가 대표적이었는데 그는 자본주의가 극단화되면 제국주의로 비화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강대국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을 착취하다가 한계에 부딪히는데 피지배계급의 저항의식이 고양되는 데다 자본가들 사이에서도 원가절감/가격경쟁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자본가계급은 제국주의를 실행함으로써 생산된 물자를 식민지에 안정적으로 수출하고, 자원을 저렴하게 강탈하며 인종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로 국내 피지배계급의 공격성을 타국(식민지)인들에게로 돌리고, 식민지의 저임금 노동력을 근거로 국내의 임금인상 요구를 억누른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설명이다. 레닌은 아예 한발짝 더 나아가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위의 설명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경제적 목적으로 식민지배를 한 사례가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식민지배가 더 많았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콩고나 인도네시아처럼 자원을 위해 식민지배를 했거나 인도처럼 아예 국가의 주요 무역 축을 담당한 경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식민지는 경제적으로 새로운 시장이 되어주지 못했으며 위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식민지의 저임금 노동력의 덕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제적 목적으로 식민지배를 했는데 지배하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 나가 오히려 국가 대 국가로 무역해 얻는 것보다 손해를 보는 경우도 허다했다. 실제로 식민지화의 목적은 국민들의 정치적, 사회적 불만을 해외로 투사하거나 '문명화'를 명분으로 기독교 전파를 원하는 보수세력과 문명화의 전파를 원하는 자유주의자들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행한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프랑스의 경우 알제리 식민지화는 해적 문제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기는 했으나 그건 해안가 한정이고 알제리 내륙과 나머지 식민지화는 경제적 이유와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된 것이 대다수이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역시 경제적으로는 파국이었으며 정치적 이유로 인한 것이었다.

단 이 반론은 결과론적인 것에 가깝다. 제국주의의 첫 단계는 타국에 수교를 요청하면서 시작되는데(흑선내항이나 운요호 사건 등) 이 단계에서는 분명 새로운 시장, 자원 채굴권 및 값싼 노동력을 목적으로 한 행위가 맞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일제의 철도 건설 등 효율적으로 뽑아먹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다만 식민지배가 결과적으로 비용 대비 수익을 따졌을 때 그리 경제적이지 못했던 것일 뿐이었다.

문인들도 산업화와 제국주의가 병행되던 시대상을 다루었다. <올리버 트위스트>, <레 미제라블>, <목로주점> 등만 읽어도, 하층민들의 처참한 삶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제국주의는 서민들의 불만을 다른 화두로 돌릴 떡밥으로 기능한 측면도 있다. 쇼비니즘과 징고이즘으로 대표되는 맹목적 애국주의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내세워진 것이다. 나폴레옹 3세벤저민 디즈레일리 등의 정치가들도 팽창주의적 정책을 펼쳐 자국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려 했다. 당대에 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계층의 열망이 고조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그런 열정이 제국주의적 광기로 이끌려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영국 보수당 정권이건 프랑스 제3공화국이건 그야말로 제국주의 정책의 온상이었다. 서구 열강들의 이러한 모습은 우습게도 스펜서사회진화론에서 정의한 야만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확장하려 경쟁하다 보니, 이들끼리의 충돌도 불가피했다. 이러한 이유로 제국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럽의 영토는 황폐화됐고 군사력의 상당 부분이 소실됐다. 이렇게 유럽이 식민지를 유지할 역량을 잃어버린 가운데 새롭게 세계의 주도권을 쥔 미국은 민주주의 전도사를 자칭하고 소련은 공산주의를 내세우며 제국주의로부터의 탈출을 부르짖었다. 유럽 안에서도 확장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1900년대 초반부터 식민지들의 독립이 시작되어[3] 1950~60년대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 중 대부분이 독립했고 제3세계 담론이 활발하게 들끓었다. 그러나 유럽이 식민지에 강제로 구축했던 억압적 체제와 그 잔재들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적잖은 독립국가들이 정치적 공백으로 인해 내전 등 내홍을 겪거나 독재체제[4]로 이행하는 등의 비극을 겪었다.

3.2. 현대의 제국주의

3.2.1. 신식민주의

과거의 제국주의처럼 직접적인 지배를 하지 않지만 해당 국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종 정치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형태이다. 과거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가 병행되던 시절부터 그래왔듯이 신식민주의에서도 경제적 혜택은 해당 국가들의 서민층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병행되는 특성상, 공장 해외이전으로 인한 높은 실업률과 복지 축소 등 역효과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도 많아 자국민에게도 긍정적이지만은 많다.

현대의 대표적인 신식민주의 국가로는 현시대의 강대국들인 미국, 러시아, 중국, 및 서유럽, 일본이 있다.

미국이나 일본은 다른 나라의 땅을 사서 식량 자원을 개발하거나 채굴권을 얻어 자원 개발을 한다. 대가만 지불했지 사실상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5]

소련냉전 시절에 동유럽 국가들에 강하게 개입했다. 아예 브레즈네프가 제한주권론이 내포된 브레즈네프 독트린까지 천명한 바 있다. 이는 프라하의 봄에 대한 개입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훗날 고르바초프에 의해서야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부인됐고, 그 영향으로 1989년에 동유럽 혁명이 발발했다. 이후 출범한 러시아 연방은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떨어저나간 영토들에 대하여 다시금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뻗히려고 하고 있으며 이에 반발하는 나라들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있는 중이다. 이를 두고 러시아 제국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프랑스는 예전 식민지였던 서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개입을 계속해오고 있으며, 이들이 독립한 뒤에도 이런저런 정책으로 간섭하는 중이다.[6] 특히 프랑스는 프랑스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고 기준금리/환율까지 결정하는 CFA 프랑 체제를 통해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종속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해당 국가들의 부가 프랑스로 유출되어 경제성장이 억제되고 있다. CFA 프랑 체제를 탈퇴하고 싶어도 프랑스가 경제, 외교, 군사 분야 등 다방면으로 이들 국가들을 압박하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는데, 결국에는 쿠데타 벨트가 형성되면서 프랑스 손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중국은 지리적인 거리가 먼 국가들에 한정해서는 내정 개입이 적어, 반서방 독재 국가가 많은 아프리카의 지도층, 즉 독재자들은 중국의 자원외교 및 지원을 반기는 편이다. 그렇지만 중국은 아프리카의 독재자들 다음으로 아프리카를 쥐락펴락 했었던 아프리카의 자본가들한테 환영받지는 못한다. 아프리카 자본가들에 있어서 중국은 그들의 생존 영역을 침범하는 적대세력이나 다름없다. 한편으로 중국은 아프리카의 다수 국가들에 산업 인프라를 지원해주는 대신 자원과 중요 사회 자본을 얻어오는 식의 대외 영향력 행사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게 다른 나라들에게 '자원 제국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반대로 스리랑카, 파키스탄, 몽골과 같은 거리가 가깝고 자국에 비해 국력도 한참 약한 국가들에 대해서는 눈치보지 않고 거리낌없이 패권주의적인 외교 및 토지, 항구 임대를 하고 있다.

식량자원 수탈형 제국주의의 경우 한국의 민간기업도 관련되어 있는 문제다. 2008년 대우 로지스틱스의 마다가스카르 농지 구매 사태 역시 민간 차원의 제국주의로 분류될 수 있다. 마다가스카르는 이 사건의 여파로 혁명이 일어났다. 아예 정권이 뒤엎어질만큼 큰 사건을 일으켜서인지 마다가스카르 민간인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게 되었다. 그외에 정부 차원에서도 이명박 정부 당시의 자원외교 역시 신식민주의적이라는 지적이 일부에서 있었으며[7] 일부에서는 한국 정부가 주장하는 남방 해상 영해 범위가 너무 넓다는 점과 해군이 좁은 영토에 비해 매우 비효율적인 대양해군을 외친다는 점 역시 한국도 신식민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신제국주의 국가들과 달리 한국 정부는 신제국주의에는 거의 관심이 없으며, 설령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 대놓고 신식민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진 않고 있다.[8][9]

3.2.2. 인권 제국주의

일부 문화상대주의자들은 전 세계 곳곳에 일어나는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서방의 개입이나 서구식 민주주의 주입 시도 자체를 '인권 제국주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인권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보일 수 있는 사례로 리비아 공습, 북한 문제의 유엔 인권위 회부 문제 등이 있다.

문화상대주의자들은 문화는 어떠한 잣대로 가치판단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모든 문화는 그 고유의 특수성과 맥락을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권의 보편성'이라는 것 자체는 서구식 자유주의의 가치를 타 문화권에 강제하는 제국주의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인권 제국주의이라는 담론이 등장한 이후로 인권의 보편성 vs 상대성 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들은 서구, 특히 미국의 위선을 가장 먼저 공격한다. 과거 냉전기에는 민주주의 정부라도 소련에 줄을 서면 가차없이 개입했고[10], 인권을 침해하는 독재정부라도 친미라면 거리낌없이 지원했기에[11] 완전히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12]

인권에 보편성이 있느냐에 대한 논쟁은 개인적 가치판단의 문제이므로 명확한 결론은 없지만 서구에서 발원된 인권 담론은 현재 어느 정도는 전세계적 보편성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논거로 인권의 보편성 전부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와 별개로 제국주의에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를 핑계로 서구에서 기원한 인권과 자유 개념까지 제국주의적 요소로 불순히 보고 탄압하는 사례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냉전 당시의 대한민국, 중화민국, 남베트남이 이러한 사례에 속했고 오늘날에는 북한중국, 동남아와 아프리카 국가들, 상당수의 이슬람 국가들이 있다.[13]

4. 끝나지 않는 논쟁

4.1. 일각의 '제국주의 옹호론'과 재평가 시도

제국주의를 대상으로 한 수정주의는 통계학 기반의 경제학사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목표는 포스트모더니즘마르크스주의에서 연원한 제국주의 이론이 실제와는 맞지 않음을 증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의 연구들은 수치자료를 제시하면서 오히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의 경제성장률이 더 높았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로부터 별 경제적 이익을 얻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니얼 퍼거슨은 제국주의가 전세계적인 공용어(영어나 프랑스어) 보급, 철도 보급, 교육기회 확대 등을 가능케 만들어 주었다고 본다. 따라서 제국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면 제3세계는 지금보다도 더 열악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 여긴다. 또한, 탈식민지화 이후에 제3세계 국가가 겪는 빈곤문제는 그들 국가의 지도자들이 행한 사회주의 정책이나 부정부패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일례로, 프랑스 지배 하에서 세네갈은 기존 토후국 시절보다 위생이나 교육 면에서 발전을 누렸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비록 정복을 위해서였지만 어쨌든 프랑스가 의학 및 교육을 보급시켰다는 것이다.

4.2. '제국주의 옹호론'에 대한 반박

수정주의자들의 관점은 다음 논지로서 반박된다.

첫번째로 식민지 경영이 식민 모국에게 별다른 경제적 이익을 주지 못했다는데, 그렇다면 왜 계속 식민지를 유지하고 있었을까? 아무도 식민 모국의 지배를 환영하지 않는데 말이다. 선악의 문제를 떠나, '제국주의가 과연 효율적인 정책이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저런 수정주의적 견해로 인해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많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를 경영해 온 제국주의 국가 전체를 보면, 이러한 식민지 경영이 국민의 삶의 질이나, 세수 확보등을 통한 시장에서의 입지 강화에 큰 실효는 적은 반면, 이를 꾸려나가기 위한 비용은 더 큰, 배보다 배꼽이 큰 방식임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국주의 국가 내부에서 이를 통해 이득을 얻은 이들이 없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대게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제국주의가 낳은 최악의 인물 중 하나인 레오폴드 2세만 해도, 그의 식민지 수탈이 벨기에를 딱히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콩고 공화국 수탈의 정점에 선 그와 그에 협조한 이들은 이를 통해 상당한 치부와 개인적인 이득을 얻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진실이다.

물론 레오폴드 2세는 극단적인 예이긴 하나 이런 식민지 수탈에 들어가는 비용은 국가가 지원하는 행정체계, 국민, 군인들에게 대신 지불하게끔 하며, 이를 통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한 예는 매우 흔하다. 대표적인 제국주의자였던 세실 로즈로디지아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회사를 설립하고, 남아공의 자원을 무자비하게 수탈했으며, 그가 남긴 유산이 600만 파운드 가량 될 정도였다. 참고로 세실 로즈는 제국주의 시절에 움직인 자본가 중에서 뒤가 좋지 않았던 예인데도 불구하고, 수탈 과정에 개입하여 벌어들인 수익은 엄청 났다는 것이다.

이런 이익은 결코 국가와 국민들에게 공평하게 배분되는 '국익'이 아니라, 일부 자본가 등의 소수만이 얻을 수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범한 국민들과 심지어는 정치인들까지 국익에 대한 환상과 백인우월주의에 단꿈을 꾸는 동안, 이런 소수의 인사들은 이 미쳐 돌아가는 판을 이용하고, 선동하는데 열중했으며, 스스로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러한 제국주의 이론들을 신봉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본다면, 제국주의는 국가라는 개념에서는 실효성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드러낼 때까지 작동했던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즉, 모두가 이득을 보지는 못했어도,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확실하게 이득을 봤으며, 이를 통해 획득한 부와 영향력이 제국주의 국가 내의 사회에 적극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부와 영향력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수탈을 통해 얻어지는 부를 획득하고 독점하기 위한 치열한 내부적인 경쟁과 시장 개척에 대한 열망이 국가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대신 빚을 지고, 대신 재화와 인력을 소모하고 있던 국가, 그리고 이러한 제국주의 정책에서 딱히 득은 보지 못했으면서, 식민지인들 보다는 그나마 낫다는 사실을 자위하며 비슷한 방식으로 수탈당하던 대다수의 하층민들이 반발하기 시작하자 제국주의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계급과 노동자의 권리를 요하는 사회주의가 급속도로 성장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이러한 갈등이 어마어마하게 불거져 국가 권력과 체제를 뒤흔들기 시작했다는 것만 봐도, 제국주의를 통해 어느 누구도 그 과정에서 이득을 얻지 못했다는 주장은 논파된다.

제국주의가 정말로 모두를 말아먹었다면, 이러한 형태의 계급 갈등이 발생하기도 전에 제국주의 국가들은 국가 멸망 테크를 탔던가, 망했을 것이기 때문. 그러나 현실은 강력한 내부적인 갈등을 통한 혼란상이 유발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국가 전반의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요약을 하면 유럽이 식민지에서 얻게 된 이득은 분명 컸으나 이것의 분배 및 대가는 결코 공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 나오는 그 이득에 현혹된 대다수 국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제국주의 팽창을 합리화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즉 '유럽이 고비용을 감수하고 식민지의 근대화에 애썼다'는 말이 아니라(실제로 그러지도 않았고), '백인의 의무' 등의 사이비 이론에 휩싸여 제국주의 이론을 정당화했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제국주의 체제가 무너진 뒤의 현대의 유럽 국가들은 영국 등 자국 이주자 위주로 커넥션을 구축한 국가 등 극히 일부를 빼면 옛 식민지를 통해 그다지 이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떤 제국주의도 상당수의 현지 협력자 및 동조자들의 암묵적 묵인 없이는 장기간 성공한 사례가 없다. 또한 현지 협력자 및 동조자들은 대부분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내부적 갈등 요소로 인해 생겨나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도국민회의를 예로 드는데, 현지 협력자들로 구성된 기관마저 결국 식민지 현지인 민족주의가 강화되고, 1905년 벵골분할령에 반발하는 것을 기점으로 반영 활동으로 전환하는 것으로도 반박할 수 있다.

제 3국의 빈곤 문제는 제국주의와 무관하고, 식민지 국가 사람들이 못나서 그런 것이라는 주장도 웃기는 건 마찬가지. 대표적인 예로 그들은 말리의 모티보 케이타와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예레레를 들고 있는데, 사회주의와 영 상관없는 콩고민주공화국 같은 나라들도 처절하게 망했다는 점에서 틀린 말이다. 애초에 우민화 정책중우정치, 독재 등은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가리지 않고 그 나라의 상황에 따라 작용하는 독인 점에서 사회주의를 집어 비판하는 것도 곤란하다. 줄리어스 니예레레의 경우 자신의 경제계획이 잘못되자 그걸 순순히 인정하고 깨끗히 정계에서 물러나 아프리카 대륙으로 제한하자면 개념있는 지도자 소릴 들으며, 탄자니아는 여러 국가가 제 기능을 못하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래도 안정된 편에 속하는 국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실컷 민주주의를 심고 다녔다고 해도 제대로 꽃 핀 나라가 몇이나 되던가? 또한 남미와 중동의 각국의 역사를 보면 그 국가 사람들이 정정당당한 민주주의 선거로 뽑은 지도자를 단지 미국의 국익에 반대된다는 이유로 개입해서 없애버린 경우가 많은데, 그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참고로 첨언하자면 앞서 예로 든 세네갈의 영아사망률은 세계 48위로 높은 편이고 평균수명은 에이즈 문제가 심각하지도 않음에도 56세에 불과하여 미개발국과 다를 것이 없다. 문맹률 또한 60.7%에 달하며 그나마 독립 이후 개선된 게 이 수준이다. 또한 식민 통치 때문에 경제구조가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농업국가[14]라는 기이한 형태로 변해 버렸다.

4.3. 피지배 국가에 대한 사죄와 보상

제국주의 시대가 끝난 지 최소 반백년이 넘은 현 시점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같이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정치/경제적 착취와 피해를 받은 구 식민지 출신 국가들은 아직까지도 대체적으로 사죄와 보상을 받지 못한 편이다.

일단 한국이나 인도, 인도네시아 등과 같이 독립 후 경제발전을 통해 강대국 ~ 지역강국급으로 체급이 커진 나라들에 대해서는 일본, 영국, 네덜란드 같은 구 제국주의 출신 국가들은 직/간접적으로 여러 차례 자신들의 과거사를 반성하는 발언을 해 주고 경제적 차관 역시 제공해 주었던 예들이 있다.[15]

이렇게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제국주의 출신 국가들은 자신들의 구 식민지에서 발생한 국지적인 사건 등에 한해서는 부분적으로 과오를 인정하고 있으며 경제적 차관을 지원해 준 사례는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식민지배를 하면서 발생한 국지성 사건에 대해서만 부분적이고 선택적으로 사죄 및 보상을 하는 것이지, 식민지배 자체에 대한 사죄와 그에 따른 충분한 배상을 한 사례는 아직까지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유럽 내에서 일부 인사들이 과거 조상들이 자행했던 제국주의의 끔찍함과 그에 따르는 식민지배 자체를 반성 및 사죄하는 발언을 하는 양심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적인 의견 표현이지, 국가가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한 것은 아니며 심지어 해당 국가 스스로가 개인적인 의사 표출이라고 명백하게 선을 그었다.

물론 피해를 받았던 나라들도 당연히 가만히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독립 이후 사죄나 배상을 요청한 사례는 많다. 그러나 아프리카 국가들만 하더라도 국내의 어지러운 사정과 식민모국에 의한 정치/경제/문화적 종속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이들과 척을 지기가 힘든지라 사죄나 배상을 받아내는 것은 고사하고 과거사를 자신감있게 꺼내는것 자체부터가 상당히 지지부진한 상황이며,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인 아시아 중진국 국가[16] 역시도 독립 이후 정치/경제가 엮인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상황인지라 구체적인 사후책임(보상액 산정 등)을 논하는 것에 대해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민주화로 인한 정치적 안정성 확보 및 선진국 반등 등 일본에 대충 맞닥뜨릴 수 있는 국력을 갖춘 이후가 되어서야(1990년대), 과거사에 대해서 자신감있게 맞다이를 뜰 수가 있었다. 물론 대한민국도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해야할 일들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구 식민지 국가가 식민모국에 대해 과거사 청산을 힘있고 줄기차게 요구할 수 있는 드문 사례이다.

나라별로 자세한 사항은 일본/과거사 청산 문제독일/과거사 청산 문제 문서 참고.

5. 제국주의 국가 목록

식민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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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된 제국주의 국가들은 강대국으로 개편하여[17] 21세기 현재에도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전반적인 질서를 주도하고 있다. 해당 목록들은 넓은 의미로써 제국주의가 아닌 좁은 의미의 식민제국주의에만 국한한다.

그나마 인도, 대한민국, 브라질 등의 극히 일부 국가들이[18] 당시 제국주의 국가에 비견되는 힘을 갖추면서 국제무대에서 어느 정도는 목소리를 내는 편이지만, 이들 국가들도 리더 정도의 위치에서 세계 질서를 주도할 정도는 못 된다. 또 중국이 기존 제국주의 국가들의 아성에 도전할만할 국력을 바탕으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여러 시도는 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 역시 양대 초강대국이라 하기에는 미진한 편이라 다른 제국주의 국가 출신 러시아와 연합하여 겨우 대응하고 있다. 다만 제국주의를 식민제국주의 뿐만이 아닌 팽창주의, 강대국의 국제사회에서 강압적인 영향력 등을 포함시킨 넓은 의미의 제국주의라면 21세기 중국도 제국주의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상기 언급된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의 국가들은 지금 현재에도 과거 자신들을 지배했던 식민지배국들이 구축해놓은 질서와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 관련 인용구

백인종황인종이나 흑인종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유럽 백인이 다른 지역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보다 뛰어난 문명을 자랑하는 우리 백인이 식민지인을 지배하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며, 그들을 문명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41]
- 알프레드 테니슨
한 나라를 정복해 예속시키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으로 하는 것이다.
- 존 퀸시 애덤스
강대국깡패처럼, 약소국창녀처럼 행동하는 법이다.
- 스탠리 큐브릭
강대국의 압박에 맞설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강한 것이다.
- 장제스
"정치, 식민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전쟁인간두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나는 어제 런던 이스트 엔드[42]의 실업자 집회에 가서 '빵을 달라'는 절절한 연설만 듣고 오다가 문득 제국주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우리는 영국의 4천만 인구를 피비린내 나는 내란으로부터 지키고, 과잉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만 한다.[43][44][45] (중략) 당신이 내란을 피하려 한다면 당신은 제국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인종이며 따라서 우리가 세계에 많이 거주할수록 인류에 좋다고 주장한다.
세실 로즈, 『유언집』 中

7. 창작물에서

8. 관련 문서



[1] 세실 로즈가 주장하던 케이프-카이로 전신을 연결하는 종단 정책로도스의 거상에 빗대어 풍자한 그림이다. 로도스 섬을 뜻하는 단어와 로즈의 성의 철자가 같아서 생긴 언어유희. 그는 영국령 남아프리카 연방에 있던 회사의 사장이자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다이아몬드 채굴 사업을 했다. 영국령 식민지이자 독립국인 로디지아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2] 그래도 이런 사실 때문에 폴란드아일랜드의 역사는 설움의 역사로 알려져 있는 편이다.[3] 대체로 비백인 식민지들을 일컫는다. 백인들이 주도한 미국이나 라틴아메리카 등의 독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4] 특히 독립영웅이 독재자로 타락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5] 일본의 경우 한국 대상 한정으로 자국 내의 정권의 시류에(주로 보수방류같은 국수주의 극우 성향이 집권할수록.) 따라 19세기~20세기 초의 일본 제국이 조선에게 가한 모습으로 접근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집요해지고 있는데 일본의 고도발전이 끝나고 후발국인 한국이 한류나 한강의 기적으로 자국의 산업 파이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견제심리로 정치, 경제, 외교적 전방위로 한국의 영향력을 억제시키고 한미일 관계에서 소외시켜 예전 60~80년대의 단순 하청형 위성국가화 시키려고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의 경우는 체급의 차이로 인해서 속으로는 욕하고 더럽다고 구역질할망정 겉으로나마 중국의 시장과 소비력때문에 신년사에서 총리가 중국어로 인사를 건내거나 자국 문화컨텐츠가 중국을 비하하는 장면이 나오면 칼같이 사과하고 수정하는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중국와 일본의 관계는 일방적인 서로에 대한 적대적인 관계보다는 최근 80년간의 추세를 보면 시류와 외교적 순이득에 따라 반목과 화합이 반복되는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일 정도의 변덕이 강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6]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인데 영연방이라 불리는 이전 식민지들은 오히려 자국에 도움이 많이 되기 때문에 영국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한다. 브렉시트 때도 쌍수들고 환영한게 이 영연방 국가들이었다.[7] 특히 친박계와 야권.[8]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볼 때 한국이 신제국주의를 주창하는 나라가 되기 힘들다. 일단 아무리 한국의 국력이 세계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한들 앞서 언급한 국가들과는 체급 차이가 있다. 개개별로 보아도 미국말이 필요없는 패권국이고 중국은 그런 미국의 아성에 도전하는 명실상부 지구상의 2인자이며, 러시아한때 그 미국과 패권을 다툰 국가의 후신으로 세계에서 2번째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강대국이다. 즉 그 정도로 세계 정세에 미치는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또한 서유럽은 유럽 상임이사국인 나라와 경제 규모에서는 그들을 능가하는 국가가 속해 유럽에서 패권을 행사하기 용이하다. 일본도 아시아 유일 G7 국가로 그 영향력이 강한 편이다. 한국은 다방면에서 이들에게 아직 밀리는 국가이고, 결정적으로 하필 앞서 언급한 중국, 일본, 러시아 사이에 끼어있어 지역 패권을 행사하기도 힘들다. 이외에도 제국주의를 주도하기는 커녕 제국주의에 피해를 본 역사 등등 한국이 신식민주의에 뛰어 들기 힘든 요인은 너무나도 많다.[9] 단, 일부 사람들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고 밖에 나가서도 국내에서 노동자들을 쥐어짜던 버릇 그대로 하면서 진짜 경제적 착취를 매우 심하게 한다. 대표적으로 북예멘의 호데이다 공사장은 여름이면 온도가 50도까지 올라가는데, 거기서 수십 명의 일꾼을 고용해 생수 한 병도 안 주고 부려먹었다. 노동자들이 비닐에 담긴 더러운 물을 사먹다가 결국 하루에 물 한 병만 달라면서 파업을 했으나, 사측은 한 가지 요구를 들어주면 또 다른 요구를 해올지 모른다며 절대 들어주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일자리를 찾아 현장 사무실로 몰려드는 판이니 노동법이니 인권이니 따질 게 없다며 현장소장도 무시해버리라는 단호한 태도를 취해 사태는 몇 시간 만에 수습했다고 한다. 그리고 설명회 등에서 그런 경험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10] 칠레, 과테말라 등이 그 예시이다.[11] 대한민국, 싱가포르 등이 그 예시이다.[12] 다만 보편인권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것이 전형적인 그쪽이야말로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미국의 반인권적 외교 행태가 반미국가의 인권 침해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보가 '위선'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위선'이 없었다면 세계의 상황은 더 좋지 않았을 것이다.[13] 오히려 식민지배를 겪지 않았으며 최소 지역강국 이상의 국력을 지닌 중국이슬람국가들은 성향 측면에서 서구 제국주의국가들과 별반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중국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은 여전히 제국주의성향을 보이는 국가들이다.[14] 예전에는 쌀과 같은 주식을 충분히 생산했는데, 프랑스의 식민 통치 덕분에 온 나라가 땅콩만 심게 되면서 땅콩을 수출하고 식량을 사오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15] 사우디아라비아도 영국의 보호령이긴 했으나 기간도 10년 가량으로 짧고 큰 피해도 입지 않았으니 논외.[16] 동남아시아의 경우 1940년대 일본 제국의 잔혹한 지배와 수탈, 학살을 겪은 명백한 피해국인데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나 국민 정서상으로나 일본에 대한 호감이 매우 높은 친일 국가이다. 그 이유로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가 있는데, 하나는 일본 이전 자신들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반감이 워낙 심해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고, 또 하나는 개방 이후 신제국주의적/팽창주의적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중국에 대한 위기감이 반작용하여 그나마 중국에 비빌 수 있는 일본에 대해 친화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17] 현재 세계 무대의 주요 강대국들이 중국, 인도를 제외하면 제국주의 국가 출신이다.[18] 멕시코라틴아메리카에서 목소리를 내려 해도 미국에 완전히 가려지며 민주주의 국가 치고는 부정부패, 암살, 마약 카르텔과 인신매매 조직들의 군웅할거 등 정치, 치안 불안이 굉장히 극심하기 때문에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19] 스페인이랑 별 차이가 안 나는 시기지만 엄밀히는 포르투갈이 먼저다.[20] 심지어는 뒷날 스페인한테 지배당하고 그 다음에는 영국에게 식민지 무역에서의 소득마저 삥뜯기는 신세로 전락했다.[21] 그나마 스페인은 신대륙에서의 착취로 얻은 거라도 많지만 포르투갈은 그것조차 스페인에게 수시로 빼앗겼고, 나중엔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식민지가 브라질 제국을 선포하고 본국에서 도망가는데도 잡지 못하는 굴욕을 겪는다.[22] 당시 인도군에게 밀리던 포르투갈은 유럽 안보 기구인 NATO에 포르투갈을 도와 인도와 싸워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했다가 철저히 무시당했다. 반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월맹군에 큰 손실을 입고 괜히 또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았던 프랑스는 별 마찰 없이 프랑스령 인도에서 발을 뺐다. 한편 이는 영국에도 교훈이 되어서, 결국 영국은 홍콩 반환으로 홍콩에서 순순히 물러났다. 다만 홍콩 체제 보장 기간인 2047년까지는 이해관계가 아직 남아 있어서 2014년의 홍콩 우산 시위,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등 홍콩의 인권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중국을 압박하고 탄압받는 홍콩 정객들의 망명을 도왔다.[23] 현재도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프랑스를 거치지 않고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고, 이 지역의 국민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와 프랑스가 밀어주는 지배층에 대한 증오가 높다. 동시에 워낙 언어와 문화 면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터라 가난한 자국을 벗어나 프랑스로 이민이나 취업을 가는 경우가 상당하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한 점이다.[24] 프랑스령 기아나를 제외하면 전부 자그마한 섬 지역에 불과하다.[25] 실제로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독립 인정은 냉전 시기 아시아 신생 국가들을 친미 진영으로 끌어들이고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려던 미국의 압박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국은 나치 독일로부터 네덜란드를 해방시킨데다 마셜 플랜을 통해 네덜란드에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미국 정부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었다. 한편 전후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식민지 관련 시대착오적인 정책은 나치에 의해 피해를 본 후에도 오히려 식민지에 강압적인 행보를 보인 비겁한 사례이기 때문에 비판받는 편이다. 특히 네덜란드는 안네의 일기 등을 출판하고 일제 위안부 피해에 대해서 역설하는 등 나치 독일일본 제국의 전쟁범죄에 적극적으로 설파하는 편인데 정작 그런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가 1940년대 말 인도네시아에서 가해자로 돌변하며 보인 탄압과 학살은 네덜란드의 도덕 외교를 위선으로 보이게 하는 측면이 있다.[26] 물론, 미국은 영국과의 마찰로 중간에 미국 독립 전쟁이후 떨어져 나갔다.[27] 스코틀랜드웨일스의 경우, 잉글랜드와 한 섬 안에 있고 교류가 잦았으므로 강제 병합보다는 자연스러운 합병에 가까웠다.[28] 당시 영국령 인도 제국은 현대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스리랑카 등을 아우르는 거대 권역이었고 이 지역의 인구 자원은 영국의 다른 식민지 총합은 물론 중국보다도 더욱 컸다.[29] 심지어 그레이트 게임은 방사능 홍차 사건이나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방위 대여법안 등을 통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30] 이 때문에 케냐가 영국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뒤 영국에서 프랑스가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 프랑스를 비판하자 케냐에서는 "프랑스군이 알제리를 지배하면서 죽인 알제리 사람 수보다 적을 뿐이지 영국 너희들도 우리 나라를 식민통치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학살한 국가일 뿐이다"라고 영국을 비난하기까지 했다.[31] 이 당시 모스크바 강 일대를 지배하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다른 루스 계열 공국들로부터 몽골에게 공납할 세금을 걷는 역할을 얻었는데, 이 공납금을 야금야금 훔치는, 일종의 공금횡령을 통해서 루스 계열 공국 가운데 최대 세력이 되었다.[32] 청나라와 몽골계 세계를 나눠 차지하는 구도가 되었다. 그리고 타타르의 굴레라 불리는 200년 동안의 치욕을 철저한 탄압으로 갚아줬다. 이는 청나라, 카자흐족들과 태그를 짜서 실행된 준가르 학살에서 정점을 찍는다. 물론 준가르는 몽골제국의 주류 민족은 아니었지만 말이다.[33]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 시기 레닌에게 지원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이로 인해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34]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원주민들이 이 때문에 연방 정부에 반감을 가졌고, 훗날 남북전쟁 때 남부에 대거 합류하였다.[35] 이때 체서피크 만까지 진출한 영국함대가 미국의 본진이라고 불리는 볼티모어의 매켄리 요새를 맹폭할 때 영국의 포격에도 꿋꿋이 휘날리는 성조기를 보고 미국 국가가 작사되었다.[36] 북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사례도 있으나, 이것은 미국이 먼저 공격당하여 반격을 할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논외. 물론 이라크 전쟁은 그 어떠한 명분도 없었다.[37] 물론 대부분 효율성과 비용 문제로 취소되었다.[38] 단, 홋카이도는 이미 15세기에 일본인의 진출을 시작으로 17~18세기 무렵이 되면 사실상 전역이 일본 영토인 상태였으며 19세기 초엽부터는 국제적으로도 일본령으로 완전히 공인되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와 1:1로 비교하기 어렵다. 다만 19세기 중후반 이후 일본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아이누의 자치를 완전히 철폐하고 강압적인 중앙정부의 직할 통치를 시작했던 것은 맞다.[39] 단, 홋카이도의 사례와 비슷한데 류큐는 형식적으로 17세기 초부터 사쓰마 번에 복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 대만 등과 달리 일본도 나름 역사적 연고가 있었던 지역이다.[40] 벨기에의 건축 문화와 초콜릿 산업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긴 하였으나 이것 역시 레오폴드 본인의 사리사욕에서 출발한 부수적인 영향에 가깝다.[41] 역사에 만약이란 말이 없지만 유럽권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리적 환경과 사회적 배경을 통해 파생된 여러가지의 결과물 중 하나다. 선진국은 말 그대로 선발주자이기 때문에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42] 런던 동쪽에 위치한 지역. 19세기 런던의 대표적인 빈민가였다.[43] 사실 이런 식으로 국내의 넘쳐나는 실업자나 빈민들을 해외로 내보내서 본국의 치안을 안정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자는 식의 발상 자체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이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포함하여 그리스 전역에 넘쳐나는 빈민들과 실업자들을 소아시아(현재의 터키)로 내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대규모 식민지를 개척하게 만들면, 그리스 본토의 치안이 안정됨과 동시에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본토보다 훨씬 넓고 풍요로운 아시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그리스 세계의 떠오르는 강대국이었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인 필리포스 2세한테 편지로 써서 보냈다. 이 편지는 필리포스 2세가 읽었고, 그 편지에 담긴 주장에 따라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3세(흔히 말하는 알렉산더 대왕)가 원정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를 포함한 페르시아의 방대한 영토를 정복하자, 페르시아 각지로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주하였다.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44] 문제는 당시 시대는 제국주의 시대에 비해서 인구가 한참 적은 먼 옛날으로 인구가 적은 이유로 식민도시를 세우는데 있어 무리는 딱히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혹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도시 단위이므로 통제도 쉬웠고 로마의 경우 포에니 전쟁 이전부터 이민족들에게도 시민권을 내주었고 포에니 전쟁 이후에 동맹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동맹시들이 받던 대우도 노예마냥 처참한 대우를 받았다기보다는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해나가는 와중에 그 과실을 로마만 보고 동맹시에는 별다른 혜택이 없었을 뿐이었고 동맹시들의 주장도 동맹시 전쟁 이전까지는 로마 시민권의 획득이었다.(이전까지는 로마 시민권을 얻을 자격이 있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이를 제한했다. 결국 동맹시 전쟁 이후 로마는 동맹시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45] 허나 제국주의 시대에는 인구가 전반적으로 증가했다. 이렇다 보니 제국주의 열강들도 현지의 원주민이자 피정복민들의 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또한 워낙 멀리 떨어져 있던 관계로 문화가 너무 달라 정복민과 피정복민간의 융화도 이뤄지지 않았다. 즉 그 때에 비해서 식민지를 얻으려면 비용은 많이 드는데 유지비는 더럽게 많이 드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피정복민에 대해서 온화한 태도로 나온다면 모를까 로마가 정복한 속주에 참정권을 제외하면 로마 시민과 다르지 않은 라틴 시민권을 준 반면 제국주의 열강들은 대부분 인종주의에 찌들어 원주민들을 핍박하기 일쑤였다. 예외적으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 같은 나라들은 모국이었던 영국과 사이가 좋은 나라이지만 이 나라들은 영국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밀어내고 주류를 차지한 나라다.[46] 그러나 맵 크기에 한계가 있고 자원 배분도 조금 다르기 때문에, 보통 중국이 개사기 입지를 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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