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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04:41

이천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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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1.1. 프로 데뷔 이전

고등학교 시절 이미 전국구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고교 축구계는 명실상부한 부평고 천하였는데, 부평고 같은 학년 선수인 이천수, 최태욱, 박용호 셋을 일컬어 부평고 귀각 3인중이라 했다.[1] 이 때에도 특유의 독특한 성격은 유명했던 것으로, 3학년때 교육감배 대회 운봉고전에서 다리부상으로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팀이 너무 못뛰어서 감독에게 경기 출장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하자 그 자리에서 깁스를 벗어던지고 나가서 결승골을 넣고 1:0으로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다소 근성 스포츠물 만화같은 일화가 있다. 2000년 1월에는 일본에서 열렸던 4개국 친선경기에서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 후반 37분 이천수의 득점에 힘입어 한국 대표팀이 1-0으로 승리해 이탈리아 프로팀들의 눈도장을 찍은 바 있었다.

고려대 시절인 2001년에 유럽의 여러 프로구단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당시 이천수가 유럽까지 날아가 외국 프로팀 입단 테스트를 본 이유는 대표팀 소집이 들지 않자 자신이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 대학 신분이기 때문이라 생각한 이천수가 고려대 감독에게 읍소해 성사한 것이었다. 당시 이천수는 이 팀에 가고싶다가 아니라 프로에 가야 월드컵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J리그 진출도 염두 해 두고 있었으나 1월에 유벤투스의 계약 제안[2]으로 J리그에서 유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이천수는 당해 1월에 유벤투스로 부터 100만달러의 계약 제안을 받았으나 이적과정에서 결렬이 되었는지 후속 보도는 없었던 상태였다. 이 때 이천수가 입단테스트를 받았던 팀들은 3월에 이탈리아의 브레시아 칼초, 6월에 파리 생제르맹 FC [3]LOSC 릴이었다. 릴에서는 2군에서 입단테스트를 보던 이천수를 테스트 3일만에 1군으로 올리며 이천수 대해 높은 관심을 드러냈지만[4] 이천수는 브레시아 칼초로 부터 받은 100만 달러, LOSC 릴로 부터 제안받았던 5개월 30만 달러[5]를 모두 거부하고 이듬해가 돼서야 울산 현대에 입단했다[6]. 비록 유럽 진출은 무산되었지만 네덜란드 전지훈련을 하던 히딩크가 이천수를 부르자 합류한 이후 시차적응이 끝난 유리한 상황에서 체력훈련 1등을 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며 눈도장을 따내어 소기의 목표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1.2. 울산 현대 호랑이 1기

파일:UUBWMHB6DOTBEJLI5APKFLMTQI.jpg
2002-2003
39경기 17골 15도움

1.2.1. 2002 시즌

파일:이천수울산1기.jpg
2002 K-리그 신인왕
2002 K-리그 도움왕
2002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김대의
FW
유상철
MF
신태용
MF
이천수
MF
안드레
MF
서정원
DF
김현수
DF
김태영
DF
최진철
DF
홍명보
GK
이운재

2002년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을 하자마자 2002년 K리그 18경기 7골, FA컵 3경기 2골 맹활약으로 K리그 준우승에 크게 공헌하여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 시즌 종료후에는 2002년 FIFA 월드컵에서의 활약과 K리그에서의 활약을 종합하여 AFC 올해의 신인상에 선정되었다.

2002 시즌: 21경기 9골 9도움
대회 경기 득점 도움
K-리그 18 7 9
FA컵 3 2 0
합계 21 9 9

1.2.2. 2003 시즌

2003년 역시 K리그 18경기 8골로 맹폭하며 리그 최고의 선수의 모습을 보이던 와중에 레알 소시에다드로 이적하게 되었다.

2003 시즌: 18경기 8골 6도움
대회 경기 득점 도움
K-리그 18 8 6
합계 18 8 6

1.3. 레알 소시에다드

파일:20201229_164455.jpg
2003-2004
21경기 1도움

1.3.1. 2003-04 시즌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의 활약을 바탕으로[7] 2003년 7월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레알 소시에다드로 이적했다. 레알 소시에다드는 2002-2003시즌 깜짝 준우승하여 다음 시즌준비를 위해 이천수를 영입하였다.

당시 레알 소시에다드에는 세르비아 출신 다르코 코바체비치터키 출신 니하트가 43골을 합작하였고, 미드필더에는 국내에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신인이었던 사비 알론소가 있었다. 당시 사비 알론소는 동갑인 이천수에 대해 "너는 프리메라리가에서 성공할 수 있다!"라고 립서비스를 하였다. 그러나 이천수는 당시 사비 알론소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성격도 좋지 못하다며 회고하였다. 사비 알론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알론소는 자기가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과 깊은 친분을 쌓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과감하게 거리를 두는 성격이다. 그러면서도 성격이 나긋나긋한 것도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스타일인데 이천수처럼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와는 친해지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 당시의 이천수는 성격이 당찬 정도를 넘어 자존심이 무진장 강했다. 알론소한테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슛포러브에서 풋살훈련시 골대를 옮기는 등의 사소한일로 사비 알론소와 빈번하게 다툼이 있었으며 거의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바람에 주변 동료들이 말릴 정도였다고 밝혔다.

오히려 이때 친해진 선수는 같은 방을 쓰던 소시에다드의 레전드로 꼽히는 미드필더 사비 프리에토. 이천수가 스페인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길을 모르니까 프리에토가 직접 픽업까지 해줬다고 한다. 실제로 슛포러브에서 소시에다드를 방문해 프리에토를 만났을 때 매우 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프리에토는 당시 이천수의 애창곡이던 '그대 안의 블루'까지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천수와 함께 즉석에서 그 노래를 클라이막스 부분까지 부르기도 했다(...) #.

스페인 언론에서도 이천수를 코리안 베컴이라고 소개하며 활약을 기대하였다.[8] 그러나 현실은 코너 위컴만도 못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이천수는 2003년 8월 30일(현지시간)에 2003-04시즌 RCD 에스파뇰과의 라리가 개막전 원정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87분간 뛰었고 이 경기에서 동점골을 도왔다.# 그러나, 사실 누가봐도 이천수의 골이었으나 볼이 골문을 통과하기 직전에 문전을 쇄도하던 다르코 코바체비치가 슬라이딩하면서 발을 갖다맞혀 도움이 되어버렸다. 이는 이천수가 언더셔츠에 문구를 적은 세리모니[9]를 펼쳤을 정도이며, 현지 언론은 도둑맞은 골이라고 보도할 정도로 이천수의 득점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아쉬운 장면이었다. 경기는 1:1로 비겼지만, 데뷔전이었던 리그 개막전부터 도움을 기록하고 MOM으로 선정되는 겹경사를 누렸다. 이 경기는 대한민국 국적 선수의 공식적인 최초의 프리메라리가 출장이다.[10]

하지만 이천수 특유의 패턴인 데뷔전 좋은 활약 후 차츰 경기력이 떨어져갔다. 이러한 이유인지 리그 4라운드까지 한 경기 교체투입을 제외하면 선발로 꾸준히 기회를 받다가 5라운드부터 차츰 교체로 나서는 횟수가 늘어났다. 11라운드부터는 교체명단과 명단제외를 오가다가 이후로 아예 출전명단에서도 제외되어 경기에 나서지도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 출전 선수 명단에 드는 날이면 간간히 교체로 투입되었지만 별다른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이 시기 코파 델 레이에선 선발 풀타임 기회를 부여받기도 했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선 경기 후반에 조커로 간간히 피치를 누볐다. 결국 적응 실패와 향수병 등으로 첫 시즌은 실패로 끝났고 다음 시즌에 CD 누만시아로 임대가 확정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구단 내부에서의 인터뷰[11]에서 "몸값 올려서 레알 가는 게 꿈"이라 당당히 입을 털었던 흑역사가 유명하다.레알(La Real)에서 뛰었으니 꿈은 이뤘다.[12][13] 거기에 더해서 모 fmkorea 유저가 이 인터뷰에 대해 조사하다가 새로운 흑역사도 발견했는데,2년안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뒤 다시 2년뒤에 레알마드리드로 간다는 인터뷰도 했다. [14] 그나마 다행인건 저 인터뷰가 한국언론인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여서 해외쪽에선 덜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일화로는 슛 포 러브에 출연하여 밝히길 FC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서 카를레스 푸욜과 만났는데 거의 발렸다고 한다. 본인 언급으로 푸욜은 진짜 벽 같았으며, 이쪽 저쪽 수비를 혼자 다 하고, 제쳐버려도 끝까지 쫓아왔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화장실까지 따라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2003-04시즌의 성적은 라리가 13경기(선발 4경기) 0득점 1도움, 코파 델 레이 2경기(선발 2경기) 0득점 0도움, UEFA 챔피언스 리그 6경기(선발 1경기) 0득점 0도움으로 시즌 총합 21경기(선발 7경기) 0득점 1도움을 기록하였다. 큰 기대를 받고 입단한 것에 비하면 아쉬운 활약이었다.

2003-04 시즌: 21경기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13 4 9 0 1
코파 델 레이 2 2 0 0 0
UEFA 챔피언스 리그 6 1 5 0 0
합계 21 7 14 0 1

1.3.2. CD 누만시아 (임대)

파일:이천수누만시아.jpg
2003-2004
15경기
1.3.2.1. 2004-05 시즌
2004년 7월 1일에 CD 누만시아로 임대를 떠났다. 누만시아에 입성하고 시작된 2004-05시즌 라리가 21라운드까지 15경기(선발 10경기)에서 918분을 출전하였다. 확실히 레알 소시에다드 시절보단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21라운드 이후 경기에서 모든 경기의 출전명단에 포함되지 못했으며 그대로 시즌을 마쳤다. 사실은 이미 2005년 3월에 원 소속팀 레알 소시에다드와 합의하여 전 소속팀 울산 현대로 복귀가 확정되었고, 그해 7월에 국내에서 열릴 2005 피스컵 코리아레알 소시에다드 소속으로 출전하는 조건으로 레알 소시에다드는 피스컵 조직위로부터 계약금을 받았다.#[15] 이러한 이유로 2005년 4월부터 울산에 합류한 이천수는 피스컵 출전에 대비하여 국내에서 대비 훈련을 하기 위해 상호합의 하에 21라운드 이후로 누만시아의 출전 명단에서 제외된 것이다.

피스컵이 열린 2005년 7월에 국내에서 레알 소시에다드 선수단에 합류한 이천수는 선다운스 FC와의 1차전에서 45분, CA 보카 주니어스와의 2차전에서 21분, 마지막으로 토트넘 홋스퍼 FC와의 3차전에서 90분을 뛰면서 국내에서 레알 소시에다드 소속으로 고별전을 치렀다. 이후 정식으로 다시 울산 현대의 선수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스페인 진출은 이천수에게 있어 흑역사 수준의 경험을 남길 수 밖에 없었다. 소시에다드의 디렉터가 훗날 밝히길, 비즈니스적 측면까지 보고 이천수를 데려오긴 했지만, 생각보다 리그 적응에 어려움을 겪어서 아차 싶었다고 한다. 특히, 위의 푸욜과의 일화도 있었지만, 몸싸움에서 대단히 소극적이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나중에 이천수는 디렉터에게도 격렬한 몸싸움 때문에 쇄골이 부러질 정도로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2004-05시즌의 성적은 라리가 15경기(선발 10경기) 0득점 0도움이다.

2004-05 시즌: 15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15 10 5 0 0
합계 15 10 5 0 0

1.4. 울산 현대 호랑이 2기

파일:이천수울산2기.jpg
2005-2007
80경기 33골 13도움
2002-2003, 2005-2007
119경기 50골 28도움

1.4.1. 2005 시즌

파일:이천수MVP.jpg
2005 K-리그 MVP
2005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박주영
FW
마차도
MF
김두현
MF
이천수
MF
이호
MF
조원희
DF
임중용
DF
유경렬
DF
조용형
DF
김영철
GK
김병지

해외진출이 폭망하고 2005년 울산 현대로 복귀하여 바로 2005 K리그 MVP를 수상. 풀시즌 40여 경기를 소화한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17경기(정규시즌 14경기, 플레이오프 3경기)에서 10골 7도움을 기록한 이천수가 MVP로 선정되었다. 이 시즌 울산은 수비와 조직력 면에서는 탄탄했지만 경기의 흐름을 바꿀 선수가 없었는데, 시즌 중간에 투입된 이천수가 이런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며 정말 리그의 수준을 뛰어넘는 기량을 보여주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기에, 이 시즌 울산의 우승은 이천수가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반 시즌 만을 소화하고도 MVP에 선정될 수 있었다. 이 시즌의 이천수는 말 그대로 사기유닛이라 불리며 K리그를 평정했다. 당시 울산 현대를 이끌던 김정남 감독은 이천수에게 재갈을 물리려 하지 않고 이천수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며 팀의 최전방을 휘저어 줄 것을 당부했고, 이천수는 마음껏 뛰면서 그 기대에 보답했다. 여러 팀을 거친 이천수의 선수 경력에서 팀 안팎으로 트러블이 없었던 적은 울산 현대 시절이 거의 유일했다.

2005 시즌: 21경기 10골 7도움
대회 경기 득점 도움
K-리그 18 7 5
K-리그 플레이오프 3 3 2
FA컵 1 0 0
합계 21 10 7

1.4.2. 2006 시즌

파일:kp1_2060808w3780-minai01.jpg
2006 A3 챔피언스컵 MVP 및 득점왕

이 당시에는 한중일 우승 클럽들끼리 모여서 하는 A3 챔피언스컵이라는 친선 대회가 있었는데, 2006년 8월 5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울산 현대와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에서 이천수는 감기몸살로 전반을 쉬고 후반에'만' 들어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한일 모든 축구 매치 통틀어 6-0 대승을 이루었다.[16]
파일:2006 울산 오사카 하이라이트 3.gif
파일:2006 울산 오사카 하이라이트 4.gif
파일:2006 울산 오사카 하이라이트 5.gif

2006 시즌: 29경기 10골 1도움[17]
대회 경기 득점 도움
K-리그 18 5 1
삼성 하우젠컵 6 2 0
AFC 챔피언스 리그 4 3 0
수퍼컵 1 0 0
합계 29 10 1

1.4.3. 2007 시즌

2007 시즌에도 여전히 울산의 주축으로써 활약하던 중 다시 한 번 꿈을 이루기 위해 유럽 진출을 타진했고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의 명문팀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관심을 받았다. 페예노르트는 임대 이적을 제시했으나 울산 구단이 헐값의 임대료를 이유로 거절했다. 이천수를 간절히 원했던 페예노르트는 이적시장 종료 직전 이적료 약 26억 원의 완전 이적을 제시했고 울산이 받아들이며 이천수는 네덜란드 무대에 진출하게 되었다.[18]

2007 시즌: 27경기 7골 3도움
대회 경기 득점 도움
K-리그 16 5 2
삼성 하우젠컵 10 2 1
FA컵 1 0 0
합계 27 7 3

1.5.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파일:attachment/Lee_Feyenoord.jpg
2007-2009
14경기

1.5.1. 2007-08 시즌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7-08 시즌 송종국이 뛰었던 네덜란드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으로 이적해서 데뷔경기 엄청난 활약을 펼쳤으나[19] 폼이 점점 떨어져, 여전히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 에레디비시 12경기 0골 KNVB 베이커 2경기 0골로 이번에도 유럽무대 득점을 기록하는 것에 실패했다.[20]당시 네덜란드와 한국을 오가면서 향수병이다 태업이다 말이 많았는데, 훗날 밝혀진 바로는 국내에서 사기를 당해 입단 계약금을 몽땅 날리는 바람에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21][22] 이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한창 적응해야 할 시간에 저러고 있었으니 네덜란드 언론이나 페예노르트 구단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훗날 유튜브에서 송종국과 떠들다가 나온 얘기에 의하면 페예노르트는 굉장히 패거리문화가 강한 팀이었기 때문에 선수들끼리 화합하고 어울리는 것이 중요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천수에 대해서 구단은 이천수가 스페인어를 잘 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를 하는 코치가 있어서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 하며 한국어 통역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훈련과 경기에 있어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2007-08 시즌: 14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에레디비시 12 4 8 0 0
KNVB 베이커 2 1 1 0 0
합계 14 5 9 0 0

1.5.2. 수원 삼성 블루윙즈 (임대)

파일:이천수수원.jpg
4경기 1골
1.5.2.1. 2008 시즌
결국 2008년 1년 임대로 K리그 수원으로 복귀했는데, 울산 시절 '사기 유닛'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인 데다 설상가상 부상까지 당하며 팀 전력에서 제외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다수 축구팬들은 지금 당장은 네덜란드 진출 실패 여파로 이천수의 활약상이 저조하지만, 머잖아 심신을 추스리면 예전 기량을 되찾으리란 믿음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수원의 코칭 스텝에게 항명 파동을 일으킨다. 부상을 핑계로 팀 훈련에 무단으로 불참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면 삼성 스포츠과학 지원실에서 재활훈련을 하라는[23] 팀의 지시조차 거부했다. 거기에 문민귀가 이천수에게 폭행당해 전치 12주로 아주대병원에 눕게되자 결국 차범근 감독은 분노해 이천수를 임의탈퇴 공시했다.[24][25]

2008 시즌: 4경기 1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3 1 2 0 0
FA컵 1 0 1 1 0
합계 4 1 3 1 0

1.5.3. 전남 드래곤즈 (임대)

파일:이천수전남.jpg
9경기 4골 1도움
1.5.3.1. 2009 시즌
2009년 초기에는 박항서 감독의 지휘 아래 예전 기량을 찾을 뻔했지만, 6월 후반 들어 계약서 조항 자작극이나 주먹다짐 등 평지풍파가 끊이지 않다 소동 끝에 임의탈퇴가 되어버렸다. 자세한 것은 문서 하단 전남 부분으로.

전남으로 이적한 후에도 여러가지 사건 사고에 휘말렸으나, 준수한 활약으로 역시 이천수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2009년 6월 이천수는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르고 마는데 그 과정이 복잡하지만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남에서 뛰는 도중 사우디 클럽인 알 나스르에서 이천수에게 오퍼가 왔다. 한창 6강 싸움 중이던 전남은 이천수를 잔류시키고자 했고, 이에 불복한 이천수는 전 소속팀 페예노르트와의 이면 계약을 이유로 알 나스르로의 이적을 확정 짓는다. 이천수를 보내게 된 전남은 마지막으로 고별경기를 뛰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천수는 거부한다. 명목은 사타구니 부상이었으나, 이천수의 몸상태를 알고 있는 김봉수 코치가 이의를 제기하자. 이천수는 코치진과 맞짱을 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몸상태가 아니라 이적이 확정돼서 테스트 때문에 경기 안뛰는거라는걸 다 알고 있는 일이고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서 경기 뛰게 하지 말라고 공문까지 보냈는데 코치진이 일방적으로 성질낸것이다. 맞짱이란 표현 보다 코치 쪽에서 컵을 벽에 투척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이천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2군 캠프로 옮겼다는 반론 역시 있다.

이천수는 그 날로 숙소를 이탈했고, 전격적으로 알 나스르로의 이적을 확정지었다. 그 후 이천수의 에이전트였던 김민재 대표의 이면계약은 없다는 폭풍의 기자회견이 나오며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이중계약도 아닌 거짓계약으로 이적을 한 이천수는 임의탈퇴 처분이 내려지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뛰게 되었으니 당사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듯 하다.[26]

2009 시즌: 9경기 4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7 6 1 4 1
피스컵 코리아 1 0 1 0 0
FA컵 1 0 1 0 0
합계 9 6 3 4 1

1.6. 알 나스르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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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경기 3골 1도움

1.6.1. 2009-10 시즌

알 나스르에서는 주전으로 뛰며 활약했으나, 임금 체불을 이유로 또다시 무단 이탈 후 귀국한다.

선수 은퇴 이후로 본인이 회고하기를 라마단 기간에 무슬림 선수들이 금식을 해서 경기력이 낮아진 틈을 타 골을 몰아 넣었다고 한다.

2009-10 시즌: 15경기 3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 15 10 5 3 1
합계 15 10 5 3 1

1.7. 오미야 아르디자

파일:이천수오미야.jpg
2010-2011
46경기 10골 5도움

1.7.1. 2010 시즌

3개월간 소속팀이 없던 이천수는 2010년 6월 J리그오미야 아르디자의 훈련 캠프에 합류했고, 8월에 6개월 정식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울산 현대에서 함께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이호도 비슷한 시기에 오미야로 이적하며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2010 시즌에는 주전으로 뛰며 컵대회 포함 4골 1도움을 기록했다.

2010 시즌: 18경기 4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J1리그 16 16 0 2 0
천황배 2 2 0 2 1
합계 18 18 0 4 1

1.7.2. 2011 시즌

팀과 1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2011 시즌에도 많은 경기를 소화하며 28경기 6골 4도움을 기록했다.

2011 시즌: 28경기 6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J1리그 27 24 3 6 4
천황배 1 0 1 0 0
합계 28 24 4 6 4

1.8. 무적 시절

오미야 아르디자와 계약이 만료된 후 재계약을 하지 않았고 2013년 초까지 무적 상태였다.

끊임없이 K리그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으나, 임의탈퇴 조치를 한 전남구단은 입장 변화가 없었다. 일단은 프로연맹에서도 사인한 에이전트가 내야하는 것이기에 그 에이전트는 손해를 보기 때문에 징계를 내리지 않는다는 기사가 있었고, 재판도 그리 진행되었다. 진짜 위약금이 발생할 상황이라면 계약당사자인 페예노르트에 물려야겠지만 문제가 없었고 그걸 이천수에게 물린다는 계약내용 자체가 심각하게 문제가 있던 것이다.

K리그 복귀는 요원한 상황에서 이천수도 해외리그 재진출을 노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잘 안 됐는데 2012년 7월 7일 QPR에서 아시아 선수를 영입한다고 공언하여 알싸등 각종 커뮤니티에서 이천수가 아닌가 말이 있었지만 그 대상은 박지성이었다.

2012년 9월 호주 클럽에서 오퍼가 왔지만 K리그에서 용서받기 위해서 K리그에서 다시 뛰고 싶다고 밝히면서, K리그계에서 이천수 논란을 재점화했다(참고). 이후 10월에 전남구단 홈 경기가 열린 날 경기장을 방문, 관객들에게 사과의 인사를 전했다. 이천수 본인은 용서받을 때까지 홈그라운드 경기가 열리는 날마다 와서 사과하겠다고 말했는데, 축구인들 상당수는 '진정성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평하고 있다.(링크)

그러다가 마침내 2013년 2월 5일. 마침내 K리그가 다시 그를 받아주게 되었다. 임의탈퇴를 풀어 주기로 결정된 것. 관련기사

그리고 2013년 2월 22일, 전남 드래곤즈도 그의 임의탈퇴 공시를 해제하며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고향 팀인 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다. 등번호는 10번.

1.9. 인천 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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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015
68경기 5골 10도움

1.9.1. 2013 시즌

4년 만에 드디어 K리그에 복귀하는 만큼 각오가 남다른 모양이다. 그렇게 놀기 좋아하던 선수가 아버지가 주시는 술도 거절하는 등 절주를 선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방황하던 기간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심적으로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거기에 K리그에 복귀한 2013년에 득녀까지 한 상황. 오로지 가족과 축구에만 모든걸 집중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2013년 3월 31일 K리그 클래식 4R 대전 시티즌과의 홈경기에서 교체선수로 복귀전을 치렀다. 4년 만에 돌아온 선수치곤 나쁘지 않았다는 평. 그러나 팀은 2-1로 패배했다.

4월 16일에 치른 7R 전남 드래곤즈와의 홈경기에서 선발로 출전해 많은 축구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전성기 때를 방불케 하는 활약을 펼쳤다. 데드볼 상황에서의 킥이 다소 부정확했다는 게 흠이지만, 지는 건 죽는 것보다 싫다는 특유의 악바리 근성과 공수 양면에서 엄청난 활동량으로 종횡무진 경기장을 누비며 '역시 이천수 ㄷㄷ'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인저리 타임에는 골대 하단을 노린 강력한 중거리슛을 때렸지만 김병지의 선방으로 데뷔골 무산. 결과적으로 경기는 0-0으로 비겼으나 본인의 크랙 기질을 유감없이 선보인 승부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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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난 뒤 전남 서포터석을 찾아 깍듯이 인사했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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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정 온 전남 서포터들은 그에게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약 2년 간의 공백기가 있는데다 30대 초반이기 때문에 보통은 전성기 시절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지만, 경기에 출전할수록 점점 경기력이 올라갔기에 팬들의 기대는 높아졌다. 4월 20일 8R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홈경기에서 역전골을 어시스트하면서 팀의 막판 역전승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는 2009년 5월 23일 성남 일화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한 이후 1,428일만의 공격포인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친정팀이라 할수있는 울산 현대와의 K리그 클래식 9R 경기에서도 0:1 지고 있던 상황에서 동점골을 어시스트. 2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서서히 예전 전성기 시절의 폼을 끌어올리는 중.

이날 역시 이천수는 전남전과 마찬가지로 정중히 친정팀의 팬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고 울산 홈팬들도 'K리거 이천수를 보고싶다'라는 걸개까지 내걸며 이천수의 K리그 복귀를 축하하고 격려해주었다.

다음 상대는 어찌보면 '이천수 사건'의 모든것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 전남, 울산, 수원까지 1달동안 연속해서 이천수의 과거와 밀접하게 얽혀있는 팀들과 대결하는게 흥미로웠는데 역시나 수원 홈팬들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 이천수는 90분 폴타임 출전하며 고군분투 했으나 팀은 0:1로 패배했다. 이후 팀 동료 김남일과 함께 수원팬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며[27]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사를 어느정도는 청산하며 마음의 짐을 덜었다.[28]

친정팀과의 대결 이후 마음이 가벼워진건지 5월 12일 K리그 클래식 11R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는 거의 전성기 시절을 방불케하는 시즌 최고의 경기력으로 시종일관 골문을 두드렸으나 이 날 MVP에 선정된 박준혁 골키퍼의 미친선방과 골대불운속에 아쉽게도 득점은 올리지 못했다.

5월 19일 K리그 클래식 12R 강원 FC에서는 전반전 프리킥 상황에서 안재준의 헤딩골을 어시스트 하며 시즌 3호 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원정경기를 나서는 강원의 빗장수비탓에 전체적으로 경기력이 좋지 않았는데[29] 강등권에 처한 상황에서 처절한 수비를 보여준 강원을 상대로 꾸역꾸역 공격포인트와 승점을 챙기는 이천수의 클래스를 볼수 있었던 경기였다.
5월 25일 K리그 클래식 13R 부산 아이파크전에서 드디어 터진 시즌 첫 골을 포함해 1골 1도움 맹활약하며 팀의 3:0 완승을 이끌어냈다. 이로서 인천은 6승 5무 2패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무리. 기분좋게 휴식기를 보낼수 있게 되었다.

6월 딸을 득녀하며 그도 이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덕분에 올스타전에서 득녀세레모니를 하였다. 후반기가 시작됐지만 급작스런 현역 복귀로 몸이 적응을 못했는지 발목 부상이 도져 줄곧 출전을 못하고 있다. 전반기부터 통증이 계속 있었다고. 일단은 이석현을 비롯한 후배선수들에게 자리를 맡기고 차분히 다시 몸을 만드는 중이다.

8월 3일 K리그 클래식 21R 울산 현대전에서 오랜만에 다시 복귀전을 가졌다. 과감한 움직임으로 전반전 골대를 한번 맞추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 날 경기를 지배했던 심판의 벽을 넘지 못하고 2:2 무승부에 만족해야 했다. 옛날 성격은 못버렸는지 참다참다 주심에게 판정에 관해 항의를 하다 경고를 받기도 했다.

8월 10일 K리그 클래식 22R FC 서울과의 경기에도 선발 출전. 전반전 설기현의 골을 어시스트 하며 K리그 통산 32번째로 30-30 클럽에 가입을 했다. 다만 경기는 아쉽게도 2:3 인천의 패배.

8월 28일 K리그 클래식 25R 수원 삼성과의 홈경기에서 오랜만에 멋진 활약을 보이며 3:1 완승. 상위 스플릿 리그 진출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직접적인 어시스트는 없었지만 날카로운 프리킥과 넓은 시야로 사실상 두 골을 만들어낸거나 다름없없다.

이후 인천 유나이티드가 상위 스플릿 라운드에 올라간 뒤에도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선 골까지 기록하였다. 하지만 아래에 후술할 음주 폭행 논란으로 10월 6일 FC 서울과의 홈경기가 그의 2013 시즌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

2013 시즌 총 기록은 20경기 출전 2골 5도움.

2013 시즌: 20경기 2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클래식 19 15 4 2 5
FA컵 1 0 1 0 0
합계 20 15 5 2 5

1.9.2. 2014 시즌

인천 유나이티드가 시즌 전체적으로 강등권에 위치하면서 이천수 본인도 부진한 시즌이었다. 28경기 1골 3도움. 아무래도 나이가 있어서인지 전체적인 체력이 떨어졌고, 본인의 다른 장점인 킥력도 약해졌으며 이천수 하면 떠오르는 미친 활동량이 크게 줄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나마 돌파력은 준수했고 어떻게 어떻게 경기장 끝까지 공을 몰고 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2014 시즌: 28경기 1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클래식 28 27 1 1 3
합계 28 27 1 1 3

1.9.3. 2015 시즌

시 지원금이 줄어들어 재정난이 심각해진 인천에서 고액연봉자로 분류되어 있었고, 계약기간도 끝난데다 중국 중동 쪽에서 고액 오퍼도 오고 다른 팀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연봉 삭감을 감수하고 인천과 재계약했다. 본인 말로는 "내가 한참 어려운 시기일 때 인천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줬는데, 이제 와서 팀이 어렵다고 외면할 수 없다"라고 재계약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2015 시즌을 앞두고 인천이 감독선임으로 난항을 겪으며 감독없이 동계시즌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있을 때 자체적으로 후배들을 모아 연습을 시키는 등 팀 최고참으로서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러다 보니 대다수 국축팬들은 이제야 나이먹고 철이 들었다는 반응으로, 때마침 뒤통수를 치고 갑자기 은퇴한 같은 팀 전 동료 설기현과 멘탈 면에서 많이 비교되고 있다.

개막 첫경기에서 날카로운 패스로 김도혁의 첫 골을 어시스트하여 시즌 첫 어시스트와 K리그 클래식 2015시즌 첫 득점 기록에 일조한다. 이후 체력이 떨어져 풀타임을 소화하진 못하지만 지속적으로 출장하고 있으며, 케빈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골로 연결하기도 했다. 전체적인 경기력도 저번 시즌에 비해 많이 올라왔으며, 잘 풀리는 날에는 어느 정도 과거의 사기유닛 시절을 보는 듯한 돌파력을 보여주고 있다.

5월 4일에는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1억원을 기부했다.

8월 2일 현재 중퇴했던 고려대학교에 재입학 신청을 하였고, 재입학 허가가 받아들여졌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나이를 속일 수는 없는지 시즌이 지나면서 한계점이 다시 보이고 있다. 돌파력과 별개로 이후의 슈팅이 막히는 경우가 많으며, 노쇠화로 인한 부족한 체력은 항상 교체카드 하나를 잡아먹는 상황이다. 세트피스와 킥력이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지만, 애매해졌다. 이천수의 킥이 돋보인 상황은 전남 드래곤즈 상대로 케빈 오리스의 득점을 어시스트한 것, 그리고 대전 시티즌 상대로 터뜨린 프리킥 골 정도. 무엇보다도 부상 빈도가 높아져서 출전 빈도도 줄었다. 최근에는 박세직이 주전으로 나오는 상황. 그럼에도 경험 많은 이천수의 존재는 인천에게 보탬이 되고 있다.

그 결과 인천은 시즌 초반 강등후보라는 예상을 뒤엎고 마지막까지 제주와 상위스플릿 진출을 놓고 경쟁했으나, 아쉽게 팀은 상위스플릿 진출에 실패. 그리고 이천수 역시 부상으로 팀에서 이탈하면서 서울과의 FA컵 결승마저 관중석에서 응원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팀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인천의 FA컵 우승을 바랬으나 결국 준우승.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2015 시즌: 20경기 2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클래식 20 16 4 2 2
합계 20 16 4 2 2

1.10. 현역 은퇴

그리고 11월 5일 이천수는 JTBC 뉴스룸에 나와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30] 멘탈갑으로 유명했던 선수들이 보통 은퇴할 때도 욕 먹는 경우가 많은데 이천수는 그래도 깔끔하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편.[31] 다른 멘탈갑 선수류들과 같이 실력은 정말 좋았는데 하면서 아쉬워하는 팬들도 많다.

은퇴하면서 "천재가 아닌 악바리로 팬들에게 기억되길 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은퇴 후 바로 JTBC의 축구 해설위원을 맡기로 했다. 다만 해설 뿐만 아니라 방송인 활동도 염두에 두는 듯 하는데, 이영표와 안정환이 해설과 방송인을 겸하는 걸 생각하면 크게 이상할 건 없다. 어찌됐건 평소 잘 보여주던 입담을 본다면 딱 맞는 직업이라는 팬들의 평가. 그의 파란만장했던 선수 시절을 생각해서라도 그의 제 2의 삶이 순탄하기를 진심으로 빌어 주자.

그리고 인천 유나이티드의 유소년(U-12) 총괄 디렉터를 맡는다고 한다.

은퇴 직전에 태국 파타야 유나이티드[32] 등 태국리그 여러팀에서 오퍼가 들어왔었다. 돈도 넉넉하게 줄수있는 구단들이었지만 지난 알 나스르에서의 경험이 걸려서인지 거절하고 고향팀 인천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는걸 고른다.

11월 28일 시즌 마지막 홈경기가 은퇴 경기가 될 예정.. 근데 그 상대가 하필 전남 드래곤즈.

하지만 부상이 낫지 않아, 결국 은퇴 경기를 못 치르고 은퇴식으로 대체했다. 이천수 본인도 김도훈 감독도 굉장히 아쉬워했다고. 그래도 마지막에는 인천 시민들과 팬들에게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인천을 위해 일하겠다는 말로 은퇴식을 장식했고, 서포터즈 측에서도 "풍운아를 품은 우리는 행운아"라는 걸개로 이천수를 환영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의 마지막을 배웅하게 된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던 악동이었지만 미워할 순 없던 최고의 풍운아가 그라운드를 떠나는 순간이었다. 그의 커리어는 항상 비난과 조소에 휩싸여 있었지만 마지막만큼은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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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가대표 경력

2.1.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1999년 청소년 대표팀 주전으로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방가반두 컵[33]에 나가 준우승을 거둬들였다. 이 당시 태국 올림픽 대표팀을 상대로 7:2 대승을 거둬들였는데 이 경기에서 4골을 이천수가 넣었다. 당시 브라질 청소년 대표팀까지 이기고 결승에서 일본 JFL(실업리그)팀에게 2:3으로 석패했지만 8골을 기록하며 득점왕 및 대회 MVP를 차지했다. 이 때부터 미디어의 주목을 받으며 "밀레니엄 특급" 이라는 별명까지 생기기도 했다.

2000년 1월 23일에 있었던 일본 신년 대회에서 이탈리아 U-19 대표를 상대로 83분에 넣은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2000년 11월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도 출전했으나, 중국과 이라크에 밀려 예선에서 탈락해 U-20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했다.

2.2.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2.1. 2000 시드니 올림픽

올림픽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오른 것은 2000년(당시 19세). 특히 시드니 올림픽 2차전[34] 모로코와의 경기 때의 일화가 나름 재밌는데, 전반 종료 직전에 한국이 페널티킥을 얻고 주장을 비롯한 팀내 고참들이 모여 누가 찰지를 정하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누군가가 아무말 없이 공을 들고서 페널티 지역으로 걸어가길래 다들 황당해 하며 쳐다보니까 이천수였다.[35] 그리하여 이천수가 페널티킥을 찼는데, 골키퍼의 선방에 걸려서 튕겨나온 볼을 다시 차넣어 1:0 이 되었고, 그대로 결승골이 되면서 한국은 스페인과의 1차전 0-3 패배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36] 2승 1패의 호성적을 거뒀음에도 득실차에 밀려 대회 9등으로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영표의 말에 따르면 처음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부터 비범했단다. 이천수가 합류할 당시 대표팀은 한일전에서 패배한 상태라 분위기가 대단히 무거웠다. 그런데 합류 직후 선배 선수들과 대화하던 도중 한일전 이야기가 나오자 "어떻게 일본에 질 수가 있냐. 내가 있었으면 이겼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2.2.2. 2004 아테네 올림픽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 이란과의 원정 경기에서 골을 뽑아 냈는데, 아직 A대표팀도 2무 3패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대표팀을 통틀어 이란 아자디 원정에서 결승골을 넣은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또한 아테네 올림픽 본선에서도 출전하였으며, 파라과이와의 8강전에서는 0:3으로 뒤진 후반에 중거리슛과 페널티킥으로 2골을 혼자 만회했으나 끝내 패배. 경기 종료 직후 주저 앉아 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서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2.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00년 4월 5일, 허정무 감독 시절인 2000 AFC 아시안컵 예선 라오스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데뷔골도 넣었다.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에도 대표팀 명단에 선발되며 기회를 받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직전에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4:1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2007년 2월 6일, 그리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본인의 장기인 프리킥으로 선제 결승골을 넣어 1:0으로 승리했다. 마지막 A매치 출전은 2008년 9월 10일, 북한과의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 경기이다.

2.3.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2002년 월드컵에서는 주전은 아니었지만 교체로 투입되며 스피드와 체력을 이용해서 수비진을 자주 흔들어줬다. 폴란드전에서는 유상철을 대신해 후반전에 출전하였고, 미국전에서는 부상당한 박지성을 대신해 교체되어 활약했다. 페널티킥이 선언되자 자신이 차려 했지만 이을용이 순번이라서 찼지만 실축.[37] 그리고 안정환의 동점골 때 아폴로 안톤 오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전과 스페인전에서도 교체로 활약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전에서는 말디니에게 싸커킥을 시전했으나 주심이 못보고 넘어가는 행운도 있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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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독일전에서는 부상이 있던 안정환설기현을 대신해 차두리와 선발로 나서서 거의 골과 다름없던 슛도 날렸으나 올리버 칸에게 막혔다.[39] 박지성이나 안정환 등처럼 눈에 띄는 공격 포인트는 없었지만 특유의 패기 넘치는 플레이로 활력을 불어 넣는데 충분했다.

2.3.2. 2006 FIFA 월드컵 독일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딕 아드보카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스태프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기동





2006 독일 월드컵에도 출전, 2002 한일 월드컵 때의 후보로서의 모습과 달리 월드컵 데뷔 첫 골인 토고전 프리킥 골[40]을 비롯해 한국이 출전한 3경기 모두 굉장한 활약을 보여주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토고전은 결승골을 넣은 안정환에, 프랑스전은 동점 골을 넣은 박지성에, 스위스전은 심판판정에서 오프사이드는 아니었지만, 스위스의 여러 핸들링 반칙에도 심판은 그냥 넘어가는 등 심판판정에 문제가 많았고, 오심이라는 명목하에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경기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본다면, 2006년 국가대표팀의 실질적인 에이스는 단연 이천수였다. 이 시절의 이천수를 보지 못한 팬들의 저평가도 있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둘 중 누가 더 에이스인지 고민 하게 만들 정도.[41][42][43] 여담으로 스위스와의 경기가 끝나고 1승 1무 1패 월드컵 17위로 16강은 아쉽게 실패하면서 분한 나머지 그라운드에 엎드려 울어 또 다시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2.3.3. 2007 AFC 아시안컵 아세안

1 이운재
C
· 2 송종국 · 3 김진규 · 4 김동진 · 6 이호 · 7 최성국 · 8 김두현 · 9 조재진
10 이천수 · 11 이근호 · 12 이동국 · 13 김치곤 · 14 김상식 · 15 김치우 · 16 오범석 · 17 김정우
18 우성용 · 19 염기훈 · 20 손대호 · 21 김용대 · 22 강민수 · 23 정성룡 · 27 오장은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코치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브라질 국기.svg 코사


2007년 아시안컵에도 승선했다. 그러나 대표팀의 핵심 자원인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이 대회 직전 부상으로 불참하게 되었고, 안정환, 박주영, 차두리 등은 소속팀에서의 극심한 슬럼프로 인해 명단에서 제외된 상황이었기에 이천수가 짊어질 책임감이 어떤 대회보다도 컸다.

이 대회에서 이천수의 활약상은 대단했다.[44] 이천수는 한국이 치른 6경기에 모두 출전하였다. 또한, 이 대회에서 6경기 동안 터트린 득점이 단 3골이었고 이 중에서 2골을 모두 이천수가 도왔다.[45] 이 때 대표팀이 주축 선수들의 부재 및 전체적으로 수비적이고 답답한 전술로 인해 빈공에 시달리며 비록 득점은 없었지만 시종일관 그라운드를 누비며 상대에게 가장 위협적인 선수였다. 승부차기에서도 이천수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8강 이란전과 4강 이라크전에서의 승부차기에서 모두 1번 키커를 맡으며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다.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은 결국 3,4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승부차기로 꺾고 대회 3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일본전에서 나카무라 슌스케가 가만히 지나가던 이근호에게 로우킥을 날리며 시비를 걸자, 선수들끼리 몸싸움이 나던 혼전중 몰래 다가가 나카무라를 가격하는 참교육을 실시했다. 이천수는 일본 애들이 먼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선배로서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골키퍼 이운재와 함께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도 선정되었다.

2.3.4. 이후

2007 아시안컵 이후에는 여러가지 사건사고들 때문에 국가대표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이천수는 북한과의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이 열렸던 2008년 9월을 끝으로 더 이상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지 못했다. 2년이 지난 2010년 1월, 허정무 감독이 해외 전지훈련을 앞두고 "이천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했으나, 아쉽게도 이천수는 끝내 남아공 땅을 밞아보지 못했다. 결국 그의 마지막 메이저대회는 2007 아시안컵이 되었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 기록

3.3. 수훈

3.4. 통산 성적

3.4.1. 국가대표

2017년 9월 5일 기준이다.
연령 출전
U - 17 0 0
U - 20 13 20
U - 23 27 11
A 대표 78 10
종합기록 118 41


[1] 여담으로 이들의 1년 후배가 김정우. 또한 이들 넷은 그대로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에서 뛰면서 8강을 달성했다.[2] 미국 프로축구(MLS)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에이전트 마이클 조가 뉴욕에서 진행된 유럽클럽팀 구단주 모임에서 이천수를 소개했던 것이 계기였다.[3] 2021년 6월 배우 장동직과 함께 받았다. 장동직은 도전 지구탐험대 방송을 위한 이벤트성이었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줬다.[4] 당시 릴은 3년간의 2부리그 생활을 끝마친 뒤 전 시즌에 1부리그로 승격하여 3위를 기록했다.알리 로직 감독이 추구한 수비축구의 결과물이었으나 공격적인 모습이 약했기 때문에 스피드가 빠르고 양발잡이었던 이천수에게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알리 로직 감독은 네덜란드 국가대표 출신이었던 미켈 베크의 뒤를 받치는 처진 스트라이커 역할에 이천수를 염두 해 두고 있었다.[5] 릴은 이미 외국인 쿼터 5명을 모두 소모한 상태였기 때문에 단기 계약 뒤 재계약을 제안했지만 당장 내년에 월드컵 국가대표 엔트리를 위해 1군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야 했던 이천수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다.[6] 이천수의 유럽진출을 아쉬워 하는 팬들 중에서는 당시 고려대 감독이었던 조민국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조민국 감독은 "지금 당장 해외에 진출해도 주전 보장이 되지 않기 때문에 국내 프로팀 입단을 타진한다.#"고 했는데, 사실 당시 유럽 5대리그 어느 프로팀에 가더라도 K리그 팀보다 높은 레벨이라는 상황은 같기 때문에 계약 성사 단계까지 다 와서 주전 보장을 이유로 계약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국내 프로구단들과의 모종의 거래가 있던게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다.[7] 물론 2002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이천수는 청소년대표팀 시절에도 스페인과 몇 차례 대결을 벌인 바 있는데, 그 때마다 스페인 상대로 상당한 활약을 보여줬다. 스페인 관계자들에게는 아마 어느 정도 인상이 있는 상태에서 2002년의 활약으로 정점을 찍으며 이적한 것이다.[8] 이 때 이천수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냐면, 이천수는 2002 FIFA 월드컵 이전에도 LOSC 릴에서 입단을 타진하였을 만큼 기대주였으며, 이 때문에 거스 히딩크릴(Lille)+리(Lee)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2002 FIFA 월드컵 4강으로 스타가 되었고, 스페인과의 8강전에도 출전했기 때문에 이 때의 활약을 본 스페인 축구 팬들의 기대가 큰 상황이었다. 또한, 후에 이천수 이후로 라리가에 진출한 이호진슛 포 러브 천재투어에 출연해서 "천수 형은 솔직히 레드카펫(이) 깔리면서 갔잖아요. 저는 그냥 가방하나 메고 간 사람이라서"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당시 라리가에 진출한 이천수에 대한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9] 레알 소시에다드에 입단하기 전인 울산 현대 시절부터 하던 세리모니다.[10] 아시아 최초는 1933년부터 레알 사라고사에서 활동한 필리핀(당시 필리핀 군도 도민정청 시절)의 그레고리 아메즈토이(Gregorio Ameztoy)로 추정된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3살 때 스페인으로 건너가서 자연히 스페인 국적이 된 파울리노 알칸타라가 아시안 게임의 전신인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 필리핀 국가대표로 뛴 적이 있기 때문에, 그를 필리핀 선수로 본다면 파울리노 알칸타라가 최초가 되지만, 그는 이후 확실하게 스페인 국적을 취득하여 카탈루냐 대표나 스페인 국가대표로 활약한다.[11] 본인은 입단 기자회견으로 언급하지만, 사실은 입단 이후에 있었던 구단과의 인터뷰라고 한다.[12] 스페인 현지에서 단순히 "레알"이라고 말하면 이는 레알 소시에다드를 수식하는 별칭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엘 마드리드"(El Madrid)로 수식한다.[13] 은퇴 이후 슛 포 러브나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자폭 개그로 써먹고 있다.[14] 실제로 이 인터뷰가 재발굴된 뒤로 찍은 이천수의 유튜브에서도 이천수 본인도 본인의 언행에 감탄할 정도[15] 피스컵 출전으로 레알 소시에다드는 이천수에게 투자한 금액을 어느 정도 회수했다고 한다.#[16] 당시 울산 감독은 김정남이고, 오사카 감독은 2018 월드컵에서 일본을 16강 15위로 이끈 니시노 아키라다.[17] A3 챔피언스컵의 기록은 친선대회의 기록이어서 집계하지 않았다. 참고로 해당 대회에서 이천수는 3경기 6골 2도움을 기록했다.[18] 여기에 대해서 리춘수 채널을 통해 이천수가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었다. 이적 전날에 페예노르트는 이천수를 임대로 데려갈 생각을 했다. 이천수는 당시만해도 임대계약이었기 때문에 갈 생각이 없었고 클럽에서 놀고있었고.... 실제로 당시 울산 김정남 감독이 임대인데 안가면 안되냐는 이적만류 전화에 안 간다고 말하고 잤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이적계약이 성사되었다고 듣고 메디컬 받으러 네덜란드로 가야하는 상황에서 밍기적대면서 비행기를 놓치고 이적이 무산되길 내심 기대했지만 비행기를 놓치는데 성공했지만 메디컬은 결국 한국에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웃긴건 페예노르트 이적을 준비한 에이전트는 이천수의 주된 에이전트가 아닌 생판 모르는 에이전트였고 에이전트가 나쁜 맘먹으면 선수 앞길 막는다는 비판으로 마무리[19] 기록만 보면 믿기지 않겠지만, 데뷔경기 포함 초반 몇경기를 본 축구 팬들은 영점조절만 되면 무난하게 주전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20] 그래도 이 시즌 팀이 KNVB 베이커에서 우승하며 커리어 최초로 해외 대회 트로피를 거머쥐었다.[21] 훗날에도 이적을 둘러싼 불상사, 특히 돈에 얽힌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 시기에는 이러한 케이스가 상당히 많았다. 서드 파티와 유사한 형태인데, 현재까지도 이런 유사한 일이 꽤 발생할 정도로 많은 선수들이 피해를 호소하고 있을 정도.[22] 많은 프로 선수들이 이런 사기를 당한다. 운동에만 전념하고자 믿는 사람한테 맡기는데 안정환도 당했었다.[23] 특히 야구팬이 이곳의 명성을 익히 잘 알고 있을 텐데, 삼성 트레이닝 센터는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24] 차범근 감독의 말에 따르면 임의탈퇴를 시켰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하는 생각으로 임의탈퇴를 풀고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천수의 정신자세가 모자라다 판단, 다른 팀에서라도 뛰는 편이 좋겠다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분노해서 방출했다고 보긴 어렵다.[25] 여담으로 이 이후로 차범근이천수는 공식 석상에서 함께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가, 2022년 7월 1일에 차범근이 이천수가 조원희와 함께 패널로 출연 중인 FIFA 온라인 4 웹예능인 이거해조 춘수트럭에 함께 게스트로 나왔다. 자막에서 14년 만의 만남인 것이 언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인건지 같은 고려대 출신에 2002 대표팀 동료인 차두리와는 거의 교류가 없어 보이는데, 이천수 본인의 개인 유튜브나 기타 방송에서 같은 81년생이지만 취학연도가 1년 빠른 박지성에게는 "지성이 형"이라고 부르지만, 박지성과 친구이면서 자신의 고려대학교 1년 선배인 80년생 차두리에게는 "차두리"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채널에서 아내가 이상형 월드컵을 하면서 차두리를 언급하면서 호평을 하자 이천수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천수의 과거가 워낙 화려하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워낙 큰 차두리 쪽에서 아예 연을 두고 싶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26] 임의탈퇴는 징계가 아니다. 연맹에서 징계 먹였으면 페예노르트, FIFA와 싸웠어야 할 판이다.[27] 김남일 역시 팀을 떠날때 큰 갈등을 빚어 수원팬들과 사이가 좋지않다. 자세한 내막은 항목참조[28] 정확히 말하자면 이때 수원팬들과 완전히 화해한 것은 아니다. 김남일과 이천수가 손잡고 수원 서포터 응원석으로 올 때에 경기 마친 수원선수들도 마침 같은 응원석 쪽으로 오던 터라 자기 선수들에게 쳐준 박수가 제 3자가 보기엔 김남일과 이천수에게 쳐준 것으로 보였던 것.[29] 지난시즌부터 불거진 우려였는데 인천은 공격적으로 나서는 팀을 상대로 역습을 하는데 강하지만 시작부터 걸어잠그는 팀을 상대로는 이상하리만치 약한모습을 보여주었다. 개막전 경남 FC와 시즌 첫패를 안겨줬던 대전 시티즌이 대표적인 예[30] 파올로 말디니를 일부러 걷어찼음을 이 날 밝혔다.[31] 인천 팬들의 경우 갑자기 뒤통수를 치고 도망간 설기현 때문에 그에 대비되는 이천수의 모습에 고마워했다.[32] 이천수의 은사 임종헌감독이 있었던 팀이다.[33] 이상하게도 방가반두컵을 검색하면 국내 인터넷 블로그나 기자들까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대회로 적었다. 틀림없이 방가반두는 방글라데시에서 열렸던 대회다. 그나마 1999년 연합뉴스를 찾아보면 제대로 나와 있다.[34] 16개국 본선 조별리그[35] 그리고 2002년 월드컵 미국전 당시 페널티킥을 얻었을때도 이 때와 비슷하게 원래 본인이 차려고 했었다. 물론 이번에는 저지당해서 게임 시작 전부터 전담 키커로 지정되어 있었던 이을용이 찼지만 실축한다.[36] 하지만 조별리그 3차전 칠레와의 경기에서 퇴장을 당해 한국은 숫적 열세 속에서 남은 경기를 치러야 했다. 경기는 이동국의 골로 1:0 승.[37] 당시 1순위 키커가 황선홍이었는데 머리 부상 때문에 못차서 선수들이 서로 눈치만보니까 '어, 아무도 안차는 분위기야?'라고 생각하고 차려했다고 한다. 근데 차려고 공을 가져다 놨는데 벤치에서 지켜보던 스탭들이 모두 깜작 놀라서 다 일어났다고 한다. 그후 벤치에서 이을용이 차라고 지시가 내려갔고 이을용이 찼다.[38]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이천수는 게임 내내 비에리가 김태영의 코뼈를 박살내는 등의 거칠게 플레이했던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화가 나있었고 자기가 투입되면 뭐라도 하나 해야겠다며 보복을 할 마음에 꽂혀 있었는데 그러다가 말디니가 걸린 것이다. 운좋게 넘어가서 그렇지 이천수의 싸커킥을 목격한 최진철은 순간 "X됐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정신나간 돌발행동이었다. 한편, 김태영은 "이게 전우애고 동료애"라며(...) 흡족해했다. 자세한 내용은 히딩크호/이탈리아전 참조[39] 이 때 본인 말로는 차는 순간 들어갔다라는 걸 느꼈는데 그 슛이 막히는걸 보고 '이번에는 정말로 질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40] 참고로 당시 프리킥은 왼발잡이에게 유리한 지점이라 이을용이 차기로 했는데 이천수의 부탁에 선뜻 내주었다고 한다.[41] 2005년 울산 복귀 이후부터 2007년 페예노르트로 이적할 때까지가 이천수의 최전성기로, 박지성과 비견되는 오프더볼 움직임 및 활동량, 세계 최상위권의 정지된 상태에서 킥 능력, 탄탄한 신체 밸런스와 순간 속도를 이용한 돌파, 뛰어난 축구지능을 이용한 연계 모두가 어우러진 만능 공격수였다. 박지성보다 더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1:1 돌파를 중시하던 일부를 제외하면 당시 축구를 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천수의 활약에 대해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에야 박지성이 압도적인 커리어와 경기력으로 평가를 압살하지만, 그 즈음의 신문지상에서는 박지성과 함께 국가대표 에이스 취급을 받았다.[42] 조재진은 과거 황선홍, 최용수와는 달리 최전방에서 포스트 플레이 역할이 중심이라 각광 받지 않았고, 박주영은 데뷔 시즌 이후인 2006-07 시즌에 급격한 부진에 빠지는 등 당시에는 주전이 절대 아니었다. 설기현의 경우 월드컵 이후 레딩에서 폼이 좋았던 편이지만 잠깐이고 소속팀에서의 삐걱거림이 너무 잦았다. 안정환은 이 시기 노장측에 들어서는 시기였고, 소속팀 문제로 폼이 온전하지 못했다. 이동국은 독일 월드컵 예선에서 꾸준한 득점력으로 국가대표에서 최고의 활약을 했지만, 월드컵 직전 리그에서 불운한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하차. 예선을 하드캐리한 정경호도 상당히 활약했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기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 월드컵 당시 이천수와 박지성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에이스 역할이 없었다.[43] 다만 설기현은 클럽 커리어로 따지면 당시에 이미 발롱도르 후보 및 챔피언스 리그 한국인 첫 골 기록 등을 달성했고, 이후에도 EPL 선수랭킹 11위를 찍는 등 유럽에서 한골도 못넣은 이천수와는 비교가 어렵다. 그러나 설기현과 차두리 등 피지컬 중심의 축구를 하는 선수들은 국대에서 당시 박지성 중심의 전술에 안 맞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아드보카트 감독도 설기현을 주로 후반 조커로만 기용하였다.[44] 몇몇 팬들이 1:1을 잘 못했다고 저평가하기도 하지만 이천수는 이운재와 함께 대회 공식 베스트 XI에 뽑히기도 했다.[45] 16강 조별리그 2차전 바레인전에서 김두현의 선취골과 16강 조별리그 3차전 인도네시아전에서 김정우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대한민국 선수단 내에서 대회 통틀어 최다 공격포인트(2개)를 올렸다.[46] vs 이라크 (준결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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