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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0:55:12

우성용

우성용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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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용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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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파일:player_coach_2019_우성용1.jp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우성용
禹成用 | Woo Sung-Yong
출생 1973년 8월 18일 ([age(1973-08-18)]세)
강원도 고성군
(現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속초초등학교 (졸업)
속초중학교 (졸업)
강릉농공고등학교 (졸업)
아주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 92 / 학사)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부산 대우 로얄즈/부산 아이콘스 (1996~2002)
포항 스틸러스 (2003~2004)
성남 일화 천마 (2005~2006)

울산 현대 (2007~2008)
인천 유나이티드 FC (2009)
감독 인천 유나이티드 FC 2군 (2010~2011 / 코치)
광성중학교 (2012~2018)
서울 이랜드 FC (2019 / 코치)
서울 이랜드 FC (2019 / 감독 대행)
등번호 22
국가대표 15경기 4골 (대한민국 / 1995~2007)
종교 불교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지도자 경력
4.1. 인천 유나이티드 코치4.2. 서울 이랜드 코치, 감독 대행
5. 플레이 스타일6. 논란 및 사건 사고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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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장신 스트라이커로 신장을 이용한 공중볼 다툼에 능해서 얻은 별명이 '우공룡'.

2. 클럽 경력

속초초등학교, 속초중학교, 강릉농공고등학교, 아주대학교를 거쳐 1996년 K리그 드래프트에서 대학 협약 구단인 부산 대우 로얄즈에 우선 지명을 받으며 프로에 데뷔하였다. 7시즌 동안 꾸준히 부산을 대표하는 공격수로 활약하면서 1997년 전무후무한 팀의 전관왕에도 일조하였다.

다만 이 부분은 부산의 팀 역사를 알지 못하면 오해를 살 수가 있는데, 대우그룹이 건재하던 시절 부산 대우 로얄즈는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팀이었다.[1] 당연히 선수 면면도 화려하기 짝이 없었는데, K리그 최초 영구결번 선수인 아시아의 삼손 김주성(1994~1999), 9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 대기록을 세운[2] 마니치(1996~2002), 반지의 제왕 안정환(1998~2000) 등 K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공격수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우성용이 부산 아이콘스를 대표하게 된 것은 대우그룹이 망하고 팀이 현대산업개발로 넘어가면서 재정지원이 줄어 많은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의 일이다. 후술하겠지만 우성용이 리그에 남긴 족적에 비하자면 엄청난 늦깎이였는데, 팬들이 좋은 공격수의 기준처럼 받아들이는 두 자리수 득점을 처음 기록한 해가 2001년이었다. 2001 시즌 기록은 33경기 16골 3도움으로, 산드로에 2골 차로 득점왕을 놓쳤다. 부산에서 프로 통산 217경기 54골을 넣었다.

2003년에는 FA 이적으로 계약금 1억 5000만원, 연봉 2억원에 계약 기간 3년으로 이민성과 함께 최순호 감독이 있던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했고, 이듬해 팀이 준우승을 차지할 때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또한 2001년부터 이해까지 4년 연속 두 자리수 득점을 기록하며 비로소 리그를 대표하는 골잡이 가운데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다.

2005년 우성용은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했다. 현금 2억원과 백영철을 트레이드한 조건. 이적 첫 해에는 주전 경쟁에서 김도훈이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에 밀려 교체 멤버로나 근근히 경기에 출전하며 고작 3골에 그쳤다. 하지만 김도훈이 은퇴한 2006년 팀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였다. 수원과의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 박진섭의 크로스를 헤딩 결승골로 연결하며 소속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선수 개인으로서도 41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해, 득점왕을 수상했다. 게다가 시즌 베스트11까지 뽑혔다. 33세의 나이로 전성기가 지난 선수 취급을 받던 처지에서 리그 최고의 활약을 보인 공격수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적지 않은 나이가 소속팀에게 있어서는 부담이었는지 성남은 우성용과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고, 우성용은 울산 현대 호랑이로 이적하여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울산에서의 두 번째 시즌인 2008년 9월 24일, 우성용은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 출전하여 개인통산 115호 골을 기록함으로써 K리그 역대 개인통산 최다골 기록을 경신하였다. 이는 공교롭게도 성남에서 우성용의 포지션 경쟁상대였고, 은퇴 후에는 멘토이기도 했던 김도훈의 기록을 경신한 것이라서 더 의미가 깊었다고 할 수 있다.

파일:external/www.incheonutd.com/home090505%EA%B0%95%EC%9B%90-%EC%9A%B0%EC%84%B1%EC%9A%A9%EC%84%B8%EB%A6%AC%EB%A8%B8%EB%8B%882.jpg
울산과의 계약이 만료되자 2009년인천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고 한 시즌을 더 뛴 후 은퇴했다. 인천에서 기록한 골은 단 1골 뿐이었으나, 2009년 5월 5일 그가 넣은 마지막 골은 개인통산 116골로 3년 뒤 2012년 3월 3일 이동국이 깨뜨리기까지 K리그 개인 통산 최다골 기록이었다. 또한 그 마지막 골 역시 헤더로 기록하며 K리그 통산 33번째 헤더골로 이 부문 최다 기록 보유자로 은퇴했다.[3]

은퇴할 때의 나이가 대한민국 나이 기준으로 37살이었으니 필드 플레이어 치고는 상당히 많은 나이까지 뛴 셈이다.

선수 개인으로는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 프로데뷔 팀인 부산을 제외하고는 3년 이상을 꾸준히 한 팀에 몸담은 적이 없을 정도로 저니맨 생활을 했기 때문에 어느 한 팀의 레전드 대접을 받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도 포항, 성남, 울산 등 K리그 전통의 강호들이 항상 러브콜을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이 정상급이라는 의미고 3팀에서 각각 리그와 컵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리기도 했고, 은퇴 시점 K리그 통산 최다 골 & 최다 출장 3위 기록을 보유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 축구계에서 공격수 레전드에 이름을 올리기에 손색이 없다.

3. 국가대표 경력

리그에서의 화려한 커리어와 대비되는 통산 A매치 14경기 출전에 4골[4] 이라는 초라한 기록에서 보이다시피 국대 복은 없는 편이다.

아주대학교 축구부 4학년 때였던 1995년 다이너스티컵 중국전을 통해 A매치 데뷔를 했다.

2003년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이끌던 국가대표팀에도 발탁이 된다. 그런데 하필 일이 꼬이려는지 오만 쇼크가 터진다.

1 이운재
C
· 2 송종국 · 3 김진규 · 4 김동진 · 6 이호 · 7 최성국 · 8 김두현 · 9 조재진
10 이천수 · 11 이근호 · 12 이동국 · 13 김치곤 · 14 김상식 · 15 김치우 · 16 오범석 · 17 김정우
18 우성용 · 19 염기훈 · 20 손대호 · 21 김용대 · 22 강민수 · 23 정성룡 · 27 오장은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코치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브라질 국기.svg 코사

메이저 대회 엔트리에 든 경력은 2006시즌 K-리그 득점왕 수상 이후인 2007 AFC 아시안컵이 유일하다.

문제는 하필이면 이 때 이운재, 이동국, 김상식과 함께 음주 파동을 일으킨 주범 4명 중 한 명이었다는 것. 이로 인해 술타스틱 4라는 오명과 함께 대한축구협회로부터 국가대표 1년 자격정지 및 대한축구협회 주관대회 2년 간 출전금지라는 중징계를 받았고, 그렇게 불명예스럽게 국가대표팀에서 자연히 물러났다. 반면 다른 세 명은 추후에 다시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다.

4. 지도자 경력

4.1. 인천 유나이티드 코치

은퇴 후 인천의 2군 코치직을 맡으며 지도자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인천 U-15팀 광성중학교 2대 감독에 부임했다. #

광성중학교를 맡으면서 2013 금강대기 우승, 2013 소년체전 준우승, 2013 왕중왕전 준우승, 2015 왕중왕전 우승, 2016 소년체전 우승, 2016 예산사과기 준우승 등을 거두면서 인천 광성중을 중등축구리그 최강자 반열에 올려놓는 지도력을 인정 받았으며, 성적 이외에도 김보섭, 김진야, 정우영, 천성훈, 최범경 등 수많은 우수 자원을 양성해내며 후진 양성에도 크게 힘을 쏟았다.

4.2. 서울 이랜드 코치, 감독 대행

파일:우성용감독대행.jpg

2019 시즌을 앞두고 서울 이랜드 FC의 코치로 부임하며 부산 시절 한솥밥을 먹던 김현수 감독을 보좌하였다.

하지만 5월 김현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면서 5월 25일 FC 안양전을 감독 대행으로 지휘하게 되었고, 이 날 서울 이랜드는 기존의 후방에서부터 빌드업을 통한 공격작업을 펼치는 방식 대신 3-4-3 포메이션과 4-1-2-3 포메이션을 토대로 전방으로 공을 먼저 보내고 기회를 만드는 모습을 보이면서 전반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경기에 임하였으며, 선취골을 기록하며 초반 기세를 올렸지만 후반 들어 급격히 경기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1:2 역전패했으며, 이후 서울 이랜드는 6월 2일 아산 무궁화전까지 내리 10연패, FA컵 포함 11연패를 기록하며 좀처럼 부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7월 28일 전남 드래곤즈전에서 드디어 감독 대행 부임 이후 첫 승을 기록했으며, 이후 결과를 내기보다는 수비 조직력 강화에 힘쓴 끝에 마침내 반등기에는 수비 조직력 강화가 결실을 맺었다. 수비가 큰 개선을 보였고, 내리 3연승을 달리면서 상승세를 이어갔고, 마침내 탈꼴찌에서 성공했으며, 8월 18일 무패행진을 이어가던 FC 안양마저 물리치면서 4연승을 질주,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전까지는 중앙 미드필더들이 계속해서 상대 진영으로 전진했고, 수비라인을 지키는 선수가 한 명 내지는 없을 때가 많았던 서울 이랜드였지만우성용은 최한솔과 허범산을 수비라인 바로 앞에 고정시켜 상대 공격을 막도록 했다. 이는 상대와의 중원싸움에서 두 가지 우위를 가져왔다. 우선, 2선에서의 중원사움에서 지더라도 수비라인을 보호하는 선수가 두 명이나 있어 상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또, 좀 더 낮은 위치의 중원싸움에서 승리하면서 상대의 2선이 하는 압박에서 보다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술을 토대로 서울 이랜드는 4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였으며, 근본적인 문제였던 수비 불안을 제대로 개선하지 못하면서 다시 10경기 무승을 기록, 다시 부진의 늪에 빠졌고, 특히 10월 26일 9위 대전 시티즌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탈꼴찌의 가능성이 멀어졌고, 11월 2일 부천 FC전에서 3:2로 역전패하며 결국 리그 최하위가 확정되었다.

부산 아이파크와의 리그 폐막전에서도 수비 불안을 개선해내지 못하며 5:3 참패하며 씁쓸하게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한편 이날 경기 종료 후 인터뷰에서 “선수들 안일하고 배고픔 없다."고 말하며 선수들에게 강한 질책을 남기기도 하였다.#

2019시즌을 끝으로 정정용 감독이 새로 부임하면서 감독 대행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5. 플레이 스타일

쌍팔년도 축구팬들이 장신 스트라이커 하면 김재한을 떠올리고 2002년 이후의 젊은 축구팬들은 김신욱이호재, 그리고 허율을 떠올린다면, 7080 축구팬들은 우성용을 맨 처음 떠올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키를 주무기로 삼는 선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팬들이 장신 공격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우성용의 몸싸움 능력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포항 시절까지만 해도 우성용은 몸싸움을 회피하는 편이었고, 그렇다고 딱히 발기술이 좋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부산 시절엔 우성용이 드리블을 치면 한눈에 확 들어오는 꺽다리가 어색하게 볼을 굴리는 모습에 관중석에서 폭소가 터질 정도였다.[5] 이처럼 상대 수비수와 적극적인 경합을 벌이며 골을 넣기보다는 탁월한 위치 선정과 순간적인 유연성이 부각되는 선수였다. 성남으로 이적한 이후 김도훈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몸싸움이 어느 정도 늘게 된 것이다.

6. 논란 및 사건 사고

6.1. 2007 아시안컵 숙소 이탈 및 룸살롱 출입 논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베어벡호 2007 AFC 아시안컵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숙소 이탈 및 룸살롱 출입 논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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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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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이런 표현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97년 전관왕을 차지하기 전까지 대우로얄즈는 90년대 내내 하위권을 맴돌았기 때문이다.[2] 이 기록은 17년 세월이 흐른 뒤 2014년 이명주가 깨뜨린다.[3] 이후 2014년 3월 김신욱이 이 기록을 깬다.[4] 이 조차도 단 두경기에서 닷새 사이에 기록하였다.[5] 실제로 최순호도 2000년대 중반에 '현역 선수들 중 내가 생각하는 스트라이커의 유형에 가장 가까우나, 순간 스피드가 떨어지고 스타일이 밋밋해서 경기를 뒤집지 못한다'는 평가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