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수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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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131230><tablebgcolor=#131230> | 두산 베어스 2군 역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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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2대 | 3대 | 4대 | ||
강대중 (1983~1984) | 배수찬 (1985) | 이충순 (1986) | 이선덕 (1987) | 감독 대행 이광환 (1987) | |
5대 | 6대 | 7대 | 8대 | ||
이광환 (1988) | 감독 대행 이선덕 (1989~1990) | 윤동균 (1990~1991) | 정연회 (1991~1994) | 손상대 (1995~1996) | |
9대 | 10대 | 11대 | 12대 | 13대 | |
김윤겸 (1997) | 손상대 (1998) | 강태정 (1998) | 손상대 (1999~2003) | 송재박 (2004~2006) | |
14대 | 15대 | 16대 | 17대 | ||
박종훈 (2007~2009) | 김광림 (2010) | 박승호 (2011) | 송재박 (2012) | 감독 대행 김우열 (2012) | |
18대 | 19대 | 20대 | 21대 | 22대 | |
송일수 (2013) | 황병일 (2014) | 송재박 (2015) | 공필성 (2016~2017) | 이강철 (2017) | |
23대 | 24대 | 25대 | 26대 | ||
강석천 (2018~2019) | 박철우 (2019~2021) | 이복근 (2022) | 이정훈 (20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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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1982~1983) ★ | 김성근 (1984~1988) | 이광환 (1989~1990) | 감독대행 이재우 (1990) | 이재우 (1991) | |
<rowcolor=#fff> 4대 | 5대 | 6대 | 7대 | ||
감독대행 윤동균 (1991) | 윤동균 (1992~1994) | 감독대행 최주억 (1994) | 김인식 (1995~2003) ★ ☆ ★ | 김경문 (2004~2011) ☆ ☆ ☆ | |
<rowcolor=#fff> 7대 | 8대 | 9대 | 10대 | 11대 | |
감독대행 김광수 (2011) | 김진욱 (2012~2013) ☆ | 송일수 (2014) | 김태형 (2015~2022) ★ ★ ☆ ☆ ★ ☆ ☆ | 이승엽 (2023~)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3번 | ||||
박정환 (1982~1983) | → | 송일수 (1984~1986) | → | 박정환 (1987~1988) |
두산 베어스 등번호 86번 | ||||
조성민 (2011~2012) | → | 송일수 (2013~2014) | → | 강석천 (2015~2024) |
송일수 宋一秀 | |
본명 | 이시야마 가즈히데([ruby(石, ruby=いし)][ruby(山, ruby=やま)] [ruby(一, ruby=かず)][ruby(秀, ruby=ひで)]) |
출생 | 1950년 12월 13일 ([age(1950-12-13)]세) |
교토부 교토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1] |
학력 | 헤이안고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70년 드래프트 5라운드 (킨테츠) |
소속팀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970~1983) 삼성 라이온즈 (1984~1986) |
지도자 | 삼성 라이온즈 1군 트레이닝코치 (1984~1986)[2]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군 불펜/배터리코치 (1993~2004)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2013) 두산 베어스 감독 (2014) 리세이샤 의료스포츠 전문학교[3] 여자부 감독 (2020~) |
프런트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스카우트 (2005~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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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계 일본인 야구선수, 지도자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수였다. 본명은 이시야마 가즈히데([ruby(石, ruby=いし)][ruby(山, ruby=やま)][ruby(一, ruby=かず)][ruby(秀, ruby=ひで)]).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1969~1983)와 삼성 라이온즈(1984~1986)에서 활동하면서 한일 양국 프로야구를 전부 경험했다. 1986년을 끝으로 일본프로야구로 돌아가 코치, 스카우트로 일하다, 2013년 시즌을 앞두고 두산 베어스 2군 감독으로 한국프로야구에 컴백했고 2014년 시즌에 1군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성적 부진으로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단 1년 만에 경질되었다.
2. 선수 경력
2.1. 일본 시절
1950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적지않은 민족차별에 시달리며 평탄치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야구에 발을 들이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훈련에 매진하여 헤이안 고교[4] 시절 주전 포수와 5번 타자로 뛰면서 학교를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4강으로 이끌었다. 고교 졸업 전부터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지만 당시 규정상 외국인은 드래프트 대상이 아니었고, 게다가 구단당 외국인 선수는 2명까지 밖에 보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미 외국인 선수 T/O를 채운 킨테츠는 재일교포인 송일수를 1969년에 연습생(정확히는 구단 직원 신분)으로 영입하여 송일수는 1년 간 킨테츠의 불펜 포수로 활동했다.이듬해인 1970년 "일본에서 학교를 나온 외국인도 드래프트에 지원할 수 있다" 고 규약이 수정되면서 송일수는 드래프트 5순위로 킨테츠에 정식 입단할 수 있었다.[국적] 당시 감독이던 미하라 오사무는 송일수에게 직접 타격 지도를 해 주었으며, 후임 감독인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도 송일수에게 주전 자리를 보장할 여지가 없자 "보석을 썩히느니 차라리 다른 팀에서 뛸 수 있도록 보내주는 게 좋겠다" 며 스스로 나서 트레이드 대상팀을 물색할 정도로 여러 감독이 송일수의 포수 재능을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킨테츠에는 나시다 마사타카[6], 아리타 슈조 같은 뛰어난 포수들이 즐비했고, 송일수는 그에 비해 타격 능력이 떨어지는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였던지라 주로 백업 포수와 외야 대수비 요원으로 활약해야 했다.
그렇게 14년 동안 백업을 전전하다 결국 1983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결심했는데, 그해 10월 21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14대 17로 지고 있던 9회 말 2아웃 상황에서 대타로 들어섰다. 14년 동안 수많은 불펜 투구를 받아주며 고생한 송일수의 퇴단 사실을 알고 있던 세키구치 세이지[7] 감독이 송일수가 마지막을 잘 장식할 수 있도록 배려를 베푼 것으로, 이때 세키구치 감독이 송일수가 타석에 들어서기 직전 "멋지게 치고 들어와라"라고 격려했는데 이에 부응하듯 상대 투수인 모리 코지[8]를 상대로 프로 데뷔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큼지막한 홈런을 날렸다. 프로 마지막 타석에서 친 프로 첫 홈런으로, 데뷔 14년차에 첫 홈런을 기록한 것은 일본프로야구 최장 기록이다.[9] 이미 순위가 확정된 이후[10] 남은 경기 일정을 소화 중이던지라 홈으로 들어온 송일수를 킨테츠 동료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고 송일수의 사연을 알던 상대팀 한큐 선수들도 박수를 치며 축하해줬다고 한다.[11]
그렇게 유니폼을 벗은 송일수의 일본프로야구 통산 성적은 215경기 출장, 72타수 16안타 타율 0.222, 1홈런, 8타점 이었다. 출전 경기수에 비해 타석수가 눈에 띄게 적은데, 이는 1. 대수비 출장과 2. 선발 예고제가 없던 시절 상대 투수가 우완인지 좌완인지 알 수 없을 때 일단 선발 오더에 들어갔다가 상대 선발투수가 누군지 확인되면 본 경기에선 교체되는 이른바 아테우마[12] 작전으로 선발 출장한 경우가 많아 타석에 설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늘고 길게 선수생활을 했지만 선수 시절 동안 백업으로만 활동을 했기에 일본에서의 현역 시절 사진은 구글에 검색해봐도 찾기 어려운데 유투브에 올라와있는 당시 선수 명단 동영상을 봐야 겨우 볼 정도다. 그나마 현역 시절의 플레이를 확실하게 볼 수 있는게 하필이면 1980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랑 붙은 일본시리즈 7차전 9회 초에 병살타를 날려 팀의 패배를 결정지은 모습이다. 당시 영상 어차피 점수가 3:8이라서 따라잡기 힘들었다.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일본 리그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84년, 삼성 라이온즈가 김일융을 영입하면서 김일융의 전담 포수 겸 트레이닝 코치로 함께 영입되어 한국 무대에 발을 들였다. 백업이라지만 NPB 출신인 만큼 내심 주전 포수에 대한 욕심도 있었겠지만, 삼성의 주전 포수이던 이만수의 입지가 워낙 확고했던지라 삼성에서도 후보 신세를 면하기는 어려웠다.
1986년까지 3년간 김일융의 전담 포수로 활동하면서 1985년 김일융이 25승으로 김시진과 다승 공동 1위에 오르는 데 공헌했고, 한편으로는 이만수를 받쳐주는 백업 포수로도 적지 않게 활약했다. 그리고 14년동안 일본에서 뛰며 쌓은 포수로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동료와 후배 포수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줬고, 불펜 포수가 모자랄 때에는 서슴지 않고 불펜에 올라가 투수들의 공을 받아주는 등 음지에서 구단을 위해 최선을 다한 바 있다.
1986년 시즌 종료 후 계약이 만료되면서 김일융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의 3년간 통산 성적은 159경기 출장, 351타수 78안타 타율 0.222, 4홈런 40타점.이다.
같은 재일교포 선수였던 장명부와는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 한국에 왔을 때 일본에 있던 가족 걱정으로 눈물을 흘리던 송일수를 장명부는 "야 울보야 또 우냐?" 라고 놀리면서도 한편으로 송일수에게 "너는 언젠가 인생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라며 격려해 줬다고 한다. 뒤에 얘기할 두산 감독 시절의 흑역사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야구계에서 현장직 최정점인 감독이란 자리를 한 시즌이라도 맡아 봤으니 그 격려가 현실이 된 셈. 장명부 항목에서 보면 알겠지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장명부보다 훨씬 성공한 야구인생을 살아 왔다고 할 수 있다.
3. 지도자 경력
3.1. 일본프로야구 시절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No.90 |
이시야마 가즈히데(石山一秀) |
코치 시절 사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스카우트 시절[13].
대개 일본으로 돌아간 재일교포 선수들이 초라한 말년을 보낸 것과는 달리[14], 송일수는 계속 일본 야구계에서 종사하며 비교적 안정적으로 생활하였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1988~1989년까지 2년간 친정 팀 킨테츠에서 불펜 포수로 활동했고, 1993년부터 2004년까지 불펜, 배터리 코치를 지냈다. 현역 시절 팀 동료이자 라이벌이던 나시다 마사타카는 킨테츠 감독 시절 "투수 보는 안목은 이시야마(송일수) 코치가 최고" 라면서 송일수를 총애했고 투수 교체 등에서 송일수의 조언을 많이 귀담아 들었다고 한다.
이후 킨테츠가 오릭스와 합병되어 해산된 후 코치직을 사임하고 2005년 신생 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소속을 옮겨 아시아 담당 스카우트로 근무했다. 김병현이 오랜 방황을 끝내고 라쿠텐으로 현역 복귀할 때 스카우트였던 송일수가 뒤에서 많이 도와줬다고 하며, 그 외에 스카우트로서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여 신생팀 라쿠텐이 제자리를 잡는데 크게 공헌하기도 했다. 적어도 이 때까지 배터리코치와 스카우트로써의 송일수는 평가가 상당히 좋았던 편이었다.
3.2. 두산 베어스 시절
두산 베어스 No.86 |
송일수(宋一秀) |
2012년 시즌이 끝난 후 라쿠텐 내부에서 구단 사장과 스카우트 팀 간의 갈등이 심해지며 송일수는 라쿠텐에 사직서를 던졌고, 2013년에 두산 베어스 2군 감독으로 영입되었다.[15]
2013년 2군 경기에서 허리가 안 좋은 고영민을 내외야 유틸리티로, 수비 때문에 제 포지션을 잡지 못하는 김재환을 유격수로, 입스 때문에 외야수로 전향한 박건우를 내야수로 기용하는 등, 선수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는지 이상한 운용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 때 선수들이 부상을 당해 다른 선수들로 공백을 메꿔야 하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상한 운용인 것은 틀림없었다.
사실 2군 감독 시절에 묻힌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지난 2010년 두산에서 활약했던 켈빈 히메네스를 2013 시즌을 앞두고 김진욱 감독 및 두산 구단 측에 강력추천했다가 히메네스의 개인적인 문제로 계약을 틀어지게 만든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던 것.#[16] 이는 네이버나 구글에 송일수 히메네스만 검색해도 나오니 관심있는 분들은 찾아보기 바람. 때문에 두산은 2013 시즌 내내 용병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다. 감히 2군 감독이 1군 감독에게 용병을 추천한다는 것은 2군 감독으로서는 월권이지만, 송일수 자체가 워낙 듣보잡이라 당시에는 묻혔다.
3.2.1. 2014 시즌
2013년 11월 27일, 김진욱 감독이 전격 경질되면서 후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취임사에서 김성근 감독과 같은 야구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링크 이에 국내야구 갤러리 등지에서는 송큰이라는 별명을 붙였다.3월 11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시범 경기 중 초유의 부정위 타자 연속 두번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웠다. 당시 상동 야구장에 전광판에 선수 리스트가 표시가 안되는 상태였다고 하나 두 번이나 부정위 타자 사태가 발생한 것은 한국어에 서투른 송일수 감독과 선수단 코칭스태프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반증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결국 송일수 감독은 12일 언론에 선수탓이 아니며 감독의 탓이라며 잘못을 시인하였다.
덕아웃 내 의사소통 문제도 상당수 개선된 모양. 우스갯소리를 하신다거나 심지어 자신의 대머리를 이용한 개드립을 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투더퓨처 대첩 때 대처가 미흡해서 대란을 자초한 것이 의사소통의 문제 때문이란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용병들과의 가족오락관식 3개 국어 동시통역을 하는 것을 보면 의사소통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고 볼수있다.
그 외에 경기를 이기면 선수 칭찬을, 지는 경우에는 경우가 좀 나뉘는데, 선수가 원인제공을 확실히 한 경우는 선수 잘못이라고 하지만, 뭘 해보지도 못하고 졌다고도 말하는 등, 100% 선수 탓으로는 돌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2군 감독 경험을 바탕으로, 2군에서 엔트리 제한을 철폐하고 출전 선수 제한만 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2군에서 호성적을 기록중인 김동주를 올리지 않고 있는 부분에서는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고있다. 이에 대해 7월 5일 "늘 말한 것과 같이 필요하면 부를 것이다. 지금은 김동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라고 입장을 밝혔다. 결국 7월 9일자 기사로 김동주 본인이 1주일 후 쯤에 구단에 자신을 풀어달라고 요구할 예정이라 밝혔다. 두산에서는 이제 기회가 없을것 같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에 대해서는 김동주 콜업 기준을 밝힐 수 없다고 답변했다.[17]
또한 6월 팀이 부진하면서 다시 까이고 있다. 단순히 선수들이 부진하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선수 기용이 석연찮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노경은인데, 누가봐도 부진함에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기어코 2014년 1호 10패 투수가 되고 나서야 2군행을 지시했다[18]. 거기다가 6월부터 시작된 부진은 반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8월 4일에는 팀의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에이스인 더스틴 니퍼트마저 등 근육통으로 부상을 당하면서 팬들에게 까이는 수준도 높아져 있는 상황. 여기에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가 복귀한 니퍼트를 올라온지 2경기만에 123구씩이나 던지게 해서 미친 듯이 까이고 있다.
결국 10월 11일,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였다. 이날 2:0으로 앞서있는 LG전 경기에서 8회 10실점이라는 경악스러운 경기력을 선사한 것은 물론, 이날 계속 부진했던 노경은을 등판시키며 많은 팬들과 심지어 상대팀 팬들에게도 욕을 먹고 있다. 이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두산 프런트는 이 경기를 보고 나서 송일수를 경질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10월 16일 SK전에서 5점차로 팀이 앞서나가자 주전들을 대거 교체하였다.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교체 때문에 뒷말이 많았다. 클린업 트리오가 이성곤-김재환[19]-오장훈이었으니 말 다했다. 심지어 팀은 7:5로 역전패를 당했고 오죽했으면 해당 경기의 중계방송에서 1일 해설위원을 맡았던 김인식 한국야구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이건 팬들을 모독하는 경기다, 감독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경기를 했냐 운운하는 역대급 극딜을 시전했다. 한편 해당 경기에 대해 일부 LG 팬들은 두산이 LG의 4강행을 막기 위해 고의 패배했다고 주장하면서 각종 게시판과 커뮤니티에서 키보드 배틀이 벌어졌다.
고의 패배 논란 다음날인 10월 17일 해명 인터뷰에서 "올 시즌 점수는 60점을 주고 싶다. 내년에는 80점 이상을 받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며 내년 시즌에 대한 각오를 밝혔다. 1년 전에 준우승을 하고, 최근 10년간 팀의 중심 김동주가 이탈했던 2006년과 온갖 사건사고 속에 김경문 감독이 사퇴하는 등의 내흥이 있던 2011년을 제외하고 모두 가을야구에 나간 팀이 올 시즌에 6위까지 추락한 현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서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밝혀서 두산 팬들의 분노를 부채질하고 있다.
두산 팬들 입장에서는 당장 쫓아내도 시원찮을 인물이지만, 아무래도 이제 임기 1년차라 프런트로서도 오기가 남아있을 법하고, 또한 KIA 타이거즈가 선동열 감독과 2년간 재계약한다고 발표함에 따라 유임이 유력하다는 평도 나왔지만 결국 2014년 10월 21일 전격 경질됐다. 후임은 전 두산 포수 / 배터리 코치 현 SK 와이번스 배터리코치 출신의 김태형이다.[20]
그리고 2015년 두산이 14년만에 한국시리즈를 우승하고 2016년에는 정규시즌 1위-한국시리즈 4:0 승리라는 퍼펙트 우승을 해내면서 이 사람의 삽질이 더욱 빛나고 있다.
송일수의 경질이 확정되면서 경질을 예언했던 지피셜 글은 성지가 되었다.
3.3. 이후
일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2017년 2월 학생야구 활동 자격을 회복해 아마야구 지도자 자격을 얻었다고 한다.현재 70이 넘은 나이지만 일본에서 꾸준히 야구지도자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는데 2018년 기록을 보면 일본 오사카의 리세이샤의료스포츠전문학교(履正社医療スポーツ専門学校)[21] 야구부 코치로 있다고 홈페이지에 나온다. 2020년에는 동 학교 여자 야구부 감독을 맡게 됐다.
4. 평가
4.1. 전임자 김진욱과의 비교
2014년 5월까지는 팀 성적이 2위를 유지하고 있어서 팬들은 송일수 감독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팀이 위기에 처할 때 해야 한다고 보고 평가를 보류하고 있었으나 6월 들어 팀 승률 5할이 붕괴하고 6, 7, 8, 9월 팀 승률이 2할 후반대와 3할 초반대를 맴도는 2014년 시즌과 2013년 시즌 김진욱 감독이 비슷한 시기, 비슷한 상황에서 연승을 거듭했던 상황과 비교되며 가루가 되도록 까이기 시작했다. 특히, 송일수 감독 부임 첫해인 2014년 시즌, 팀 분위기가 막장일 수밖에 없었던 2011년 이후로 3년만에 4강에서 밀려나며 팬들은 송일수 감독의 경질을 요구하고 있다.송일수를 옹호하는 일부 팬들[22]은 4강 탈락의 원인을 아래와 같이 말한다.
- 두산은 2010년 이후 5월 들어서 팀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지곤 한다. 올해는 그 시기가 늦춰져 6월에 나타났을 뿐이다.
- 송일수 감독은 감독 초짜고 한국말도 잘 못한다. 높은 기량을 기대하기는 애초에 어려웠다.
- 무분별한 FA로 주요 선수를 다 팔아먹은 바람에 팀 전력이 예전같지는 않다. 올해는 우승을 기대하기 어렵다.
- 팀 사이클이 그렇다면, 왜 김진욱 시절에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비난하였는가?
- 김진욱 감독 또한 초짜감독이지만, 첫 해에는 스탯 면으로든 분위기 면으로든 이 정도로 말아먹지는 않았다. 오히려 김경문 전 감독이 쑥대밭을 만들어놓은 투수진을 하나하나 복구해나가고 있었다.[23] 그리고 한국말을 잘 못 한 게 이유라면 제리 로이스터는?[24]
- FA로 나간 선수들이 주축으로 보이나, 사실 두산 입장에서는 투자 대비 효용이 크지 않다. 이종욱, 손시헌 등은 거액을 투자하기에 나이도 많거니와 미래 전망이 불투명했다. 또한 이종욱이라면 몰라도 손시헌은 2013시즌에 이미 김재호한테 밀리고 있었다. 윤석민 등은 포지션도 겹치고 당장 필요한 자원도 아니라 놀리기 아까운 선수였다. 이는 김경문 시절 포수장사 하던 것과 유사하다. 김선우는 말 할 필요도 없다. 이런지라, 객관적인 전력 하락은 크지 않다.[25] 애초에 두산은 현재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이다. 두산이 '리빌딩이 필요없는 젊은 팀'이라고 자랑스러워했던 것은 다름아닌 두산 팬 아니었던가? 그리고 이것보다 더 안 좋은 전력으로 다음 해에 우승했다.[26]
사실 팬덤에서 그동안 송일수 감독이 까이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6월 전까지는 성적이 괜찮았다는 점이 첫 번째요, 김진욱보다 투수교체를 더 잘 했다[27]는 게 두 번째였다. 하지만 6월 이후 선발이 무너지고 불펜이 무너지고 타격 사이클이 떨어지면서 6월 성적 5승 15패, 7월 성적 6승 10패의 어마어마한 패를 기록하자 감독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5월까지는 팀 성적이 좋으니 번트를 많이 대든 윤명준을 혹사시키는 기미가 보이든 '아직은 괜찮네' 하던 팬들이 6월부터는 못 참게 된 것이다. 김진욱도 번트를 김경문 시절까지의 두산보다 많이 대면서 비판받았지만 송일수 정도는 아니었다. 송일수의 야구는 완전한 스몰볼로, 무사 1루는 물론이고 무사 2루에서의 번트 역시 서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이를 번트 마스터 소리까지 듣고 있는 정수빈같은 선수들도 아니고 OPS가 0.9에 달하는 중심타자 홍성흔과 리그 타격 4위의 민병헌에게까지 시키고 있으니 팬들 입장에선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다.
송일수가 번트를 대는 것은 두산이 1-2점을 아끼고 불펜에서 막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였겠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패착인게 김경문 말기부터 이미 두산 전력은 사상누각에 가까웠다. 제대로 된 선발 하나 없고, 김경문의 소위 '발야구'도 약빨이 다 하고, 그저 몇몇 선수의 로또빨 하나로 버티는 게 두산이었다. 임태훈 사건 훨씬 이전부터 몰락이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는 소리다. 김진욱은 그 욕을 먹어가며 두산의 최대 문제 중 하나였던 선발 로테이션을 그나마 '정상'으로 돌려놨다.
사실 김경문 시절에도 두산 투수진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다. 다니엘 리오스와 맷 랜들의 외국인 원투펀치를 제외하면 늘 선발난에 시달렸으며 프런트가 도와주지 못했다는 말도 있지만 기묘하게 영입한 거물급 선발들도 한국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밥값도 못했다. 자체 육성한 선발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28] 그렇게 불펜만 죽어라 갈아넣은 결과 투수진의 대붕괴, 그리고 감독 중도 사퇴로 이어지게 된다. 그 당시는 이를 투수코치의 책임이니 감독의 책임이니 해서 논란이 많았지만, NC 감독으로서도 최금강, 이민호 등을 죽어라 굴리는 것까지 봤다면[29] 김경문이 두산 투수진에 깽판을 쳐놨다는 점은 이제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 김진욱 감독과 정명원 투수코치 부임 이후로 크게 바뀌었다. 더스틴 니퍼트가 한국에 길게 자리잡으며 믿을만한 에이스가 생겼고, 2012시즌에는 김경문 시절 이미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이용찬의 선발 전환이 성공했으며, 김진욱 감독이 2군 투수코치 시절 손수 키운 노경은도 터졌다.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등장한 김승회에 예전만은 못했으나 선발 로테이션은 채워준 김선우까지 이전과 전혀 다른 선발 야구가 가능했다. 2012년 두점 베어스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역대급 물타선이 돼버린 상황에서 최종 3위를 할 수 있었던 건 선발의 힘이 굉장히 컸다. 2013년에는 이용찬의 부상과 김승회의 보상선수 이탈, 김선우도 노쇠화가 더 극심해졌으나 니퍼트의 대체 선발로 올라와 로테이션에 자리를 잡은 유희관의 등장으로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30]
가끔 ERA 운운하며 2013년 두산의 투수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으니 송일수 역시 무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냐라는 의견도 있지만, "김진욱이 물려받은 투수진과 송일수가 물려받은 투수진 중 어느 쪽의 전력이 더 강력한가?"라고 100명의 두산 팬들에게 묻는다면 최소 99명은 당연히 송일수라고 답할 것이다. 애초에 김진욱이 시즌을 시작할 때 두산 투수진은 그냥 무(無)에 가까웠다. 밥값하는 선발이 변변찮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임태훈 때문에 많이들 잊고 있지만 불펜도 개판 오분 전이었다. 김경문의 명성에 이바지하던 소위 KILL 라인 중 당시 그나마 살아있던 건 이용찬 혼자 아니었던가? 반면 2014년 두산 투수진은 적어도 밥값은 할 것으로 예측했다.[31] 그런데도 시즌을 말아먹었다면 과연 그 원인은 어디에 있겠는가?
결국 두산의 투수력이 온전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지 않고 경기 초반부터 번트를 대는 송일수의 야구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빅이닝을 못 만들고 점수 차가 얼마 안 나니 불펜들을 죄다 끌어 쓰며 시즌 중반부터 퍼지게 했고, 5월의 불 붙은 타격감도 수많은 번트로 야금야금 타격감을 잃어가다 6월, 7월에는 타자들마저 완전히 헤메는 상황이다. 두산의 팀컬러였던 허슬이 사라지고 있고 도루는 성공률이 높음에도 팀도루 시즌 6위를 기록하며 뛰지 않고 있다. 그래서 골수 팬덤에선 송일수가 하는 두산 야구는 '두산의 야구'가 아니며 그가 하는 것은 두산이라는 팀의 특성에 전혀 맞지 않는 스몰볼이라 주장하며, 그들에게 지금까지 송일수가 경기에서 보여준 것은 투수진의 소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셈. 팬들은 송일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 차라리 낫다. 실상은 퍼져가는 선수단을 짜내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게다가 그의 야수 기용은 더욱 황당하다. 6월 들어 김재호가 정신 못 차리고 원데이 원에러 수준의 수비와 시즌 병살 1위를 향해 달려가는 와중에도 허경민은 덕아웃에서 손만 빨고 있었으며, 이원석은 타고투저 시대에 나홀로 투고타저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음에도 최주환은 덕아웃에서 놀고 있었고, 김동주는 2군에서 '김동주는 필요없다'는 말이나 듣고 있었어야 했다. 송일수가 취임될 때 프런트는 "김진욱은 승부사 기질이 부족하다, 송일수가 승부사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입을 털었으나, 송일수에게서 승부사 기질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초반 선발 싸움에서부터 밀려 헤매다 게임이 넘어난 극후반에야 줄줄이 오재일, 최주환, 김재환 등의 대타를 내고 있는 작태로 두산팬들의 혈압을 올리기 일쑤. 14시즌 팀 무득점 패배만 봐도 두산이 단독 1위(7회)를 차지했을 정도였다.
물론 프런트가 만악의 근원이고 프런트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물타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두산 프런트와 김태룡이 팬들에게 막장이라고 그간 무수한 욕을 먹어왔지만, 두산 야구를 오래 봐온 사람이라면 최소한 선수 운용 면에서는 원래 저런 프런트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014년 두목곰의 상황을 보면 알듯이 고참 내치기로도 유명한 곳이 두산 프런트다.[32] 그래서 일부 팬들은 두산을 상징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화수분 야구도 사실은 돈 아끼려고 고참들 트레이드시켜서 젊은 선수들만 남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33]
7월 들어 잇다른 불펜 투수들의 혹사, 선발 투수의 불펜 돌려막기,[34] 재활해야 할 선수들을 그대로 1군에 기용하는 것 등 팀이 망가지는 모습이 객관적으로도 분명해지니 김진욱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늘어나고 있다만, 경질한 프런트는 물론이고 걸핏하면 이게 다 김진욱 때문이다라며 퇴진을 외쳤던 일부 팬들의[35] 책임도 없다고는 못하니 자업자득일 뿐이다.
거기다가 10월 16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 경기에서는 일부러 져주기 논란까지 보여주면서 두산을 넘어 프로야구 팬 전체한테 논란거리를 안겼다. 이 날 송일수 감독의 선수 기용은 라이벌 LG의 4강행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두산이 SK에 패하면서 정규시즌 4위는 17일 최종전에 결정되게 됐다. 4위 LG가 롯데에 승리할 경우 자력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게 되는데 5-0으로 앞선 4회에 주력선수를 거의 다 교체하고 막판에는 노경은을 올려 노경은의 시즌 최다실점과 패를 안겨주는 불명예까지 안겨준다. 그날 해설을 맡았던 김인식 감독은 “두산은 팬들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선수들은 그렇게 했는데 송일수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경기는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정도.[36]
4.2. 사실은...
사실 송일수가 벌인 일에 비해 욕을 이상하리만치 덜 먹고 있는 진짜 이유는 2014년 스토브리그에서 두산 프런트가 엄청나게 어그로를 끌었던 점도 있어서 이에 따른 반사 이익을 얻었다는 견해가 있다. 즉 FA도 내치고, 있는 선수 다 내친데다가 거기에 반발한다고 감독까지 내쳤으니 두산 팬들의 분노가 김태룡을 위시한 프런트에게 집중되었고, 이렇게 선수단이 초토화됐으니 두산 팬들도 송일수에게 별 기대를 안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김진욱 감독의 경우 구단 내부의 뒷사정은 모른 채 2011년에 임태훈 건으로 김경문 감독이 사퇴하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수단의 사기가 떨어져서 일시적으로 성적이 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한 두산 팬들이 앞뒤 사정을 모르고 깠다. 반면 송일수는 애초에 프런트가 선수 팔아먹고 팀을 초토화시켜 놓은 뒷사정을 팬들이 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까인 것이다. 그나마도 선수진을 쥐어짜내는 행각을 했음에도 가을야구조차 못 간 것은 물론 12년만에 옆방 팀보다도 낮은 순위표를 받아들면서 그 동안 받았던 실드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 거기다 팀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정신적 지주 격인 두목곰 김동주를 자리 없다는 식으로 나 몰라라 격의 언플을 날려서 두산 팬들은 더욱 피꺼솟하게 한데다, 노경은을 무식하게 혹사시키면서[37] 타 팀 팬들에게도 비아냥을 듣고 있다. 물론 김동주는 이후 인터뷰나 행보 등에서 팬들마저 등을 돌려버려 재평가 여지가 있지 않느냐 싶지만, 실상을 파보면 이 건에 대해서도 송일수가 잘한 것 따윈 전혀 없다.[38]
그리고 일수강점기가 끝나자마자 2015년에 두산 베어스는 2014년보다 더 답이 없는 외국인들[39]을 데리고도 김태형 감독 체제로 정규시즌 3위를 달성했고, 가을야구에서도 넥센과 NC를 연파하며 한국시리즈에서 삼성마저 꺾고 우승하면서, 그가 얼마나 무능하고 답이 없는 감독이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사살됐다.
팀에 대한 졸속 운영 때문에 일각에선 그를 조롱하기 위해 일본식 이름인 이시야마 카즈히데로 부르거나[40] 혹은 일수꾼, 일수 할배, 송노망, 송영감, 쪽동님, IS 등으로 부르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급기야 "두산은 14시즌 야구를 안 했다"는 식의 드립을 치는 팬들도 있을 정도다.
명선수가 꼭 명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송일수는 선수 시절부터 눈에 띄지 못했을 뿐더러 지도자로서의 행보는 더욱 처절하다. 실제로 컴플렉스 때문에 조급함을 보인 것은 아닌가 하는 칼럼도 나왔을 정도다.
4.3. 결론
2010년대 중반까지는 이종운과 비교된 적도 있고, 더군다나 저 양반도 기형적인 경기 운영과 미흡한 선수 관리로 큰 지탄을 받았지만, 어쨌거나 롯데는 이종운 부임 전에도 2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해서 점차 추락 중인 팀이었고, 본인을 취임시킨 사장 최하진이 CCTV 사찰 사건의 주범으로 밝혀져 쫓겨난 직후의 상황이었다. 냉정하게 보면, 직전 2년 동안 못한 팀이 다음 시즌에도 못하는 건 딱히 특이한 일도 아니다. 이종운 후에도 조원우가 2017년 3위 한 차례 찍은 게 끝.[41]그러나 두산은 경우가 다르다. 송일수 본인의 전임자 김진욱은 2012년 정규시즌 3위, 2013년 정규시즌 4위+KBO 한국시리즈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만들어냈으며[42] 송일수 경질 이후 부임한 김태형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팀에 14년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선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2021년까지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과 3번의 우승이라는 성과로 베어스의 황금기를 일궈냈다.[43][44] 다시 말해, 전임자도 후임자도 모두 포스트시즌에 팀을 꾸준히 출석시켰는데, 송일수만 결석시킨 것. 범위를 조금 더 넓히면, 김인식 감독이 이끈 OB-두산의 중흥기가 저물고 김경문 감독이 바통을 넘겨받은 2004년 이래, 두산이 PS 진출에 실패한 건 2006년, 2011년, 그리고 2014년 단 세 차례다. 이중에서도 2006년은 주축 타자 김동주의 장기 부상을 비롯한 여러 악재들 때문에 부침이 있었으며, 그 와중에도 5할 승률은 찍고 단 한 경기 차이로 5위를 찍으며 밀려난 것이었다. 때문에 보다 직접적인 비교가 가능한 건 김경문이 중간에 탈주한 2011년 정돈데, 이것도 결국 김경문이 수년간 팀의 투수자원을 다 탕진해버린 바람에 자연스레 붕괴된 것. 결국 이것저것 다 따져보면 2014년의 추락이 훨씬 더 문제다. 그리고 재임기간 투수 자원을 다 갈아넣은 탓에 비록 마지막은 비참해졌지만 어쨌든 김경문은 재임 기간 준우승을 세 차례 기록하며 송일수 따위도 절대 범접할 수 없는 호성적을 쌓았고, 팀 외적으로도 두산의 주축 야수들이 대거 참가한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표팀을 이끌며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 두산의 인기와 위상과 평판을 크게 상승시키기도 했으며, 고영민과 김현수의 병역 문제도 말끔하게 해결해줬다.[45] 이렇듯 전과 비교하든 후와 비교하든 두산 팬들 입장에서는 좋게 얘기해줄 리가 만무하다. 잠실 더비 이후에 팬들이 대놓고 '빠가야로!'라 외쳐가면서 사퇴 시위까지 벌였을 정도.
심지어는 애초에 바지 감독으로 내세울 작정이었던 프런트조차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1년만에 경질시켰고, 게다가 이듬해 두산이 우승하자 다른 의미로 레전드 취급을 받고 있다.[46] 이쯤 되면 백인천, 이순철[47] 수준만 아닐 뿐 두산 팬들에게는 충분히 금지어다. 심지어 김성근, 이종운과 함께 2010년대 중반 리그 최악의 감독으로 꼽히며, 백인천, 이순철, 김성근 다음 가는 리그 역대 최악의 감독을 꼽을 때 2020년 염경엽, 삼성 감독 시절 김한수[48]와 함께 자주 언급되니 말 다 했다.
그나마 일부 SK-SSG 팬들은 2012-2014 이만수보다는 낫다고 하는데, 송일수는 물론 짤렸다 하더라도 이만수는 왕조를 무너뜨리고 임기를 채웠으니 그럴법도 할 수 있겠다.[49] 대략 삼성 라이온즈 시절 김한수와 비슷한 포지션의 인물이기 때문. 그러나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비교하면 이만수는 조금 심각했다는 정도로 끝나는 반면, 송일수는 아예 역사상 최악의 감독 중 하나로 거론된다.
결국 계약 기간도 다 못 채우고 1년 만에 경질된 송일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과 함께 지낼 예정이라고 한다. 잔여 연봉을 지급하기 위해[50][51] 경질 이후에도 송일수 전 감독에게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일본 야구 정보원 자리를 주기로 했다.
김동주는 은퇴 시에 나온 온갖 일련의 기사 때문에 명성이 제대로 추락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사람 보는 눈은 있다는 말도 있지만, 위의 각주에서도 밝혔듯이 송일수는 업적이랄 게 전혀 없다.[52] 무엇보다 저걸 빼고 봐도 팀을 너무 막장스럽게 운영했기 때문에 송일수를 조금이라도 좋게 보려는 두산 팬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극렬 김커피 안티일지라도 송일수 편은 절대 들지 않는다.
박동희한테 4류 감독이라고 까였다.
오죽하면 두산 베어스 홈페이지의 역대 감독 소개란에서도 까였을 정도다. 이재우 감독도 나쁜 말이 없고, 항명 사태로 불명예 퇴진한 윤동균 역시 부정적으로 소개하지 않았건만 말이다.[53]
축구로 비교하자면 통산 FIFA 월드컵 4회 우승에 빛나는 세계적인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2018 FIFA 월드컵 지역예선 탈락에 빠뜨린 잔 피에로 벤투라와 비슷하다. 후임자가 팀에 14년만에 메이저 대회 우승 트로피를 안긴 것도 똑같다. 후임자가 잘 나갈 때마다 욕먹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 이후 두산 팬들은 불필요한 상황에서 번트 작전이 남발되면 송일수식 야구가 부활했냐고 놀린다. 두산 팬들도 전통적 빅볼이 아닌 번트야구의 후유증이 워낙 극심한 나머지 점수를 짜내야 하는 긴급상황이 아니면 번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2024년 현재는 현 두산 감독 이승엽이 이해 불가능한 선수 기용과 스몰볼을 보여주면서 송일수 다음 가는 감독 혹은 송일수랑 동급이나 다름없는 감독으로 까이고 있지만, 이승엽은 적어도 포스트시즌은 갔다. 2번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3전 전패로 물러난데다가 투수는 혹사시키고 야수 세대교체도 못 하면서 낸 결과인지라 여론은 최악이지만 그렇다고 송일수가 투수 보호[54], 야수 육성[55]에서 성과를 낸 것도 없다.
5. 기타
두산 베어스의 현 2군 타격코치인[56] 송재박 코치와 매우 닮은데에다가 둘다 재일교포 출신이고 성이 같아 형제가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고[57] 이것으로 기사가 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주장인 홍성흔 역시 이 둘이 가끔 구분이 안된다고 한다.
2014년 10월 1일 두산 vs KIA 전에서 덕아웃으로 굴러 떨어지는 최재훈을 지켜보다가 파울 타구에 맞았다. 57초부터 제일 왼쪽 주목 왠지 귀엽다는 반응이 많다.
유네스키 마야와 만나면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재일교포로서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식 이름을 사용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송일수를 까기 위해 송일수의 국적이 일본이라는 사실을 명분삼아 이시야마 가즈히데로 부르는 일도 많다. 예전에는 이 문서명 역시 송일수가 아니라 한동안 송일수의 일본명으로 되어 있었을 정도였다. 유명한 재일교포, 그러니까 한국계 일본인 야구인들이 여전히 본명 대신 한국식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58] 송일수만큼은 팬들이 '이시야마 가즈히데', 'IS', '그 할배', '그 영감탱이', '쪽바리 ㅅㄲ' 등의 오만 멸칭들로 부르면서 까는 걸 보면 송일수가 얼마나 두산빠들한테 비호감으로 단단히 찍혔는지 알 수 있다. 애초에 크보에서 감독 단 1년차에 짤리는 업적은 아무나 달성하는 게 아니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6.1. 선수 시절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74 | 긴테쓰 버팔로즈 | 3 | 6 | .167 | 1 | 1 | 0 | 0 | 0 | 1 | 0 | 0 | .333 | .167 |
1975 | 25 | 17 | .235 | 4 | 0 | 0 | 0 | 1 | 1 | 0 | 0 | .235 | .235 | |
1976 | 54 | 5 | .200 | 1 | 0 | 0 | 0 | 0 | 0 | 0 | 0 | .200 | .200 | |
1977 | 51 | 4 | .500 | 2 | 1 | 0 | 0 | 0 | 1 | 0 | 0 | .750 | .500 | |
1978 | 21 | 9 | .333 | 3 | 0 | 0 | 0 | 2 | 1 | 0 | 2 | .333 | .455 | |
1979 | 15 | 8 | .125 | 1 | 0 | 0 | 0 | 0 | 1 | 0 | 0 | .125 | .125 | |
1980 | 22 | 8 | .125 | 1 | 1 | 0 | 0 | 2 | 1 | 0 | 1 | .250 | .222 | |
1981 | 6 | 0 | - | 0 | 0 | 0 | 0 | 0 | 0 | 0 | 0 | - | - | |
1982 | 6 | 2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
1983 | 12 | 13 | .231 | 3 | 1 | 0 | 1 | 3 | 2 | 0 | 1 | .538 | .286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4 | 삼성 라이온즈 | 64 | 137 | .277 | 38 | 3 | 2 | 2 | 16 | 15 | 1 | 8 | .372 | .315 |
1985 | 55 | 130 | .208 | 27 | 7 | 0 | 2 | 20 | 16 | 2 | 15 | .308 | .286 | |
1986 | 40 | 84 | .155 | 13 | 3 | 0 | 0 | 4 | 7 | 0 | 4 | .190 | .193 | |
NPB 통산 (10시즌) | 215 | 72 | .222 | 16 | 4 | 0 | 1 | 8 | 8 | 0 | 4 | .319 | .263 | |
KBO 리그 통산 (3시즌) | 159 | 351 | .222 | 78 | 13 | 2 | 4 | 40 | 38 | 3 | 27 | .305 | .276 | |
개인 통산 (13시즌) | 374 | 423 | .222 | 94 | 17 | 2 | 5 | 48 | 46 | 3 | 31 | .364 | .274 |
6.2. 감독 시절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14 | 두산 베어스 | 128 | 59 | 68 | 1 | 6위 | |
통산 | 128 | 59 | 68 | 1 |
7. 관련 문서
[1] 프로 입단 이후 결혼과 함께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2] 후술하겠지만 선수 겸 플레잉코치 신분이었다.[3] 履正社医療スポーツ専門学校[4] 고시엔 역대 다승2위, 우승횟수 7위의 야구명문고로, 같은 교토 출신으로 가쓰라 고교를 나온 김성근 감독의 당초 지망교였고, 장훈 또한 고향 히로시마의 고등학교로부터 입학을 거부당했을 때 야구를 계속하고자 전학가고 싶어했던 대단한 야구 명문 학교였다(만약 헤이안 고교가 학기 중에도 전학생을 받았다면 장훈은 나니와 상고가 아닌 헤이안에 들어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국적] [6] 야구 감독, 해설가 및 평론가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마지막 감독이기도 하다. 이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을 맡았고, 2016 시즌부터 2018년 6월까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의 감독 역임.[7] 1950년대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중심타선으로 활약한 선수로, 이나오 카즈히사의 4연승 맹활약으로 유명한 1958년 일본시리즈 5차전 당시 9회 말 2아웃 1점 열세 상황에서 후지타 모토시에게 일명 '1천만엔짜리 안타'로 불리는 동점 안타를 뽑아내며 팀의 역스윕에 공헌했다. 은퇴 후 한큐, 니시테츠, 킨테츠에서 코치를 역임했고 킨테츠에선 1982-1983년에 감독까지 역임했으나 우승엔 실패한 채 2년 만에 사임했다. 이후 해설가 등을 맡다 2007년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향년 81세에 별세.[8] 현역 시절엔 주로 중간계투로 뛰었고, 1993년 야쿠르트에서 은퇴한 뒤 현재는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프런트로 일하고 있다.[9] 참고로 송일수의 데뷔 홈런은 생후 12001일에 친 것으로 KBO 기록인 강명구의 11142일과 거의 3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다만 최연장 기록은 아닌데, 이미 양대리그 초창기 때 30대 중후반까지 아마추어에서 뛰다 프로에 와서 홈런을 쳤던 선수들이 몇 명 있기 때문이다.[10] 당시 세이부가 압도적인 승차로 리그 우승을 거뒀고 한큐는 2위, 킨테츠는 4위였다.[11] 여담으로 이 경기는 홈런 9방이 나올 정도의 난타전이 펼쳐졌는데 송일수 외에도 SK 코치로 알려진 후쿠하라 미네오, 같은 재일교포 출신이자 노모 히데오의 팀메이트로 알려진 카네무라 요시아키가 프로 첫 홈런을 이 경기에서 기록했으며, 송일수에게 홈런을 맞은 모리의 후속 투수로 훗날 삼성, 쌍방울에서 뛰게 되는 김성길이 나와 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리고 상술했듯 1983년을 끝으로 사임한 세키구치 세이지 감독의 고별전이기도 했다. 팬사이트 경기 기록[12] 当て馬, 경마에서 교배할 때 교배 시도만 하는 말인 시정마를 뜻한다. 야구에서는 위장오더의 의미로 쓰인다.[13] 참고로, 이 사진은 이따금씩 페이스북이나 인터넷에서 안경닦이 장인이라는 제목으로 돌아다닌다.[14] 지금도 야구 평론가, 해설가로 활약 중인 김일융과 더불어 생활이 힘들지 않았다. 다른 재일교포 선수의 경우, 장명부는 한국 시절 벌어놓은 많은 돈을 다 날리고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의 코치로 일했지만 얼마 못 가 유니폼을 벗은 후 마약 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에서 영구 추방당한 뒤 일본에서 어렵게 살다가 2005년에 사망했고, 해태 타이거즈에서 뛴 김무종은 삼성 라이온즈 코치까지 지냈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운수업, 정확히는 트럭 운전으로 생계를 잇고 있으며 같은 팀에서 배터리를 이룬 주동식은 사업가로 성공하긴 했으나 2012년 성매매 업소를 운영했다는 혐의로 쇠고랑을 차는 흑역사를 남겼다. 게다가 김성길은 혹사로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주유소 직원으로 일하던 2001년 1월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되었다. 홍문종이나 이영구처럼 일본 복귀 후의 행적이 불명인 경우도 있고.(이영구는 2017년에 뒤늦게 근황이 밝혀졌는데, 도쿄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며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야구인으로써의 인생만 비교하자면 60대를 넘긴 노년까지 계속 지도자 또는 프런트로 야구계에 종사해온 송일수에 비하면 밀린다.)[15] 그 구단 사장은 결국 구단 부회장으로 부임한 호시노 센이치에게 시원하게 모가지 당했다.[16] 2010년 두산에서 뛰던 히메네스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할 당시 송일수가 라쿠텐 스카우트 담당이었으며 계약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후 히메네스가 라쿠텐에서 방출될 즈음 송일수 역시 라쿠텐 구단에서 나와 두산 2군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그 히메네스를 두고 몸 상태가 좋으니 영입해도 좋다며 두산 측에 적극 추천한 것. 하지만 정작 히메네스는 개인 사정으로 팀 합류가 늦어진데다 결론적으로 팔꿈치 부상이 발견되는 바람에 두산은 그와 계약을 취소한다.[17] 기사 내용을 보면 그 와중에 "홍성흔도 몇 년이 지나면 이런 시기가 올 것이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18] 그러나 이 부분은 아무리 송일수라도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한 것이, 노경은이 없으면 선발 로테이션이 아예 돌아갈 수 없다. 물론 송일수의 백정짓으로 인한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결국 새 용병인 마야와 계약하자마자 노경은을 2군으로 보내버렸다.[19] 두산 팬들이 생각하는 그 김재환 맞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보여준 것이 별로 없는 선수였다.[20] 웃긴 건 2011시즌 직후 두산이 감독 후보를 물색할 때도 김태형은 물망에 올랐었다. 이 때는 부정적인 여론이 강했는데, 2014시즌 직후에는 그딴 거 없고 송일수만 아니면 된다며 찬성 여론이 압도적이었다.[21] SSG 랜더스의 한두솔이 광주일고 졸업 후 진학한 학교이며 한두솔이 2학년 재학 중 부임 하였다.[22] 믿기 힘들겠지만 실제로 있었고, 5월까진 그 수도 많았다. 물론 6월부터 성적이 처참해지자 발언권을 잃게 됐고, 시즌 자체가 망해버린 후에는 아무도 옹호하지 않는다. 애초에 김진욱도 재임 당시에는 부당할 정도의 욕을 먹다가 송일수가 시즌을 파탄낸 후에야 재평가받은 감독이다.[23] 두산이 김경문 감독의 소모식 불펜야구로 황폐화된 상황에서 관리야구로 선수들을 보호하며 현재 두산의 선발야구 시스템과 불펜 체계화 시스템을 자리잡게 한 사람이 다름아닌 김진욱 감독이다.[24] 거기에 3년 뒤 트레이 힐만은 팀을 우승시킨 우승감독이 되었고 다른 스포츠로 가자면 대한민국 월드컵 4강 주역의 감독이 누구였는가?[25] 다만 후술하듯 김진욱 감독이 경질된 이유도 이 선수들을 다짜고짜 내보낸 것에 대한 반발로 프런트와 대립각을 세운 것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마냥 잘한 일은 아니다. 특히 윤석민의 트레이드 대상인 장민석은 두산 외야진에서 내세울만한 강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윤석민 트레이드 자체가 김진욱 감독의 수족을 차례로 쳐내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고.[26] 전력에 플러스가 된 부분은 장원준을 FA로 영입한게 다고, 오히려 보상선수로 핵심 불펜이자 베테랑인 정재훈을 내줬으니 전력이 좋아졌다고 볼 수도 없다. 게다가 이용찬, 홍상삼, 이원석 마저 군입대로 빠진 상황이고 2015년부터 빛을 본 선수들이 많아졌을 뿐이다. 대표적으로 타자는 김재호, 오재일, 최주환, 김재환, 허경민, 투수는 김강률, 함덕주, 허준혁, 이현호 등이며 여기서 송일수 체제에 없던 선수는 이현호 뿐이다. 굳이 또 하나 추가를 하자면 오히려 송일수 체제에서는 용병타자로 호르헤 칸투가 후반기에는 홈런이 0개일 정도로 주춤했지만 전반기에는 잠시 홈런 1위까지 할 정도로 팀 내 중심타선을 이끈 반면, 김태형 체제에서 시작한 잭 루츠는 2015시즌 1호 퇴출 외국인 선수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런 상황에서 가을야구만 해도 김태형은 잘한거다.라는 말이 나온 와중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으니 말 다 한거다.[27] 사실 김진욱은 투수를 이상하게 오래 끌고 가다 사단이 난 경우가 꽤 있었다. 대표사례가 바로 한국시리즈 6차전. 반대로 송일수는 타이밍이 아니다 싶으면 닥치고 교체하는 성향이 있었고, 초반 타격이 대박친 것과 결부되어 성적이 좋게 나왔던 것이다. MLB파크에서도 초반 송일수 평가가 좋을 때 김진욱의 투수교체 타이밍과 비교해서 평가하는 글과 댓글이 꽤 있었다. 물론 6월 이후로는 투수교체 면에서도 김진욱보다 더 형편없었다는 것만 증명됐지만.[28] 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경문만큼 장기간 재임을 하면서도 선발 육성을 제대로 못한 KBO 감독은 없다시피하다.[29] 심지어 이민호의 경우는 임태훈이 구르던 형국과 너무나도 비슷하다.[30]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13시즌은 12시즌보다 투수진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이용찬은 13시즌 등판 자체를 거의 못 했고 니퍼트도 부상으로 중도 이탈한 것은 물론 홍상삼 또한 상당히 불안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나머지 외국인 선수들 역시 불펜에서 맡은 역할을 어느 정도는 수행해줬던 프록터와 달리 13시즌에는 데려오는 선수마다 삽만 죽어라 팔 뿐이었다. 유희관만으로는 이 모든 구멍을 메울 수가 없었다. 대신 타선이 제대로 환골탈태한 덕택에 마운드가 어찌저찌 버텨만 주면 타격으로 상쇄할 수 있었고, 포스트시즌에서도 사실상 타선의 힘으로 우승 직전까지 갔던 것이다.[31] 올라오면 QS 정도는 장담할 수 있는 선발투수 3명, 볼 때는 똥줄타지만 스탯은 나쁘지 않았던 불펜투수 4명. 뼈대는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32] 사실 김동주는 은퇴 이후의 행보 때문에 자업자득이라는 평가가 많긴 하다.[33] 물론 고참 선수들이 팀을 떠난 후 젊은 선수들이 그 자리를 제대로 메우지 못하면 그대로 팀 성적은 망한다. 그래도 두산은 꾸준히 팀 성적이 나오는 걸 보면 선수를 잘 발굴해내는 것도 맞다. 실제로 김진욱 시절에 팀을 이끌었던 멤버들은 소위 문차일드라 불린 김경문 시절의 주역 선수들에 가려저 빛을 못 보던 선수들이 대거 부각을 나타난 결과였다.[34] 니퍼트 본인이 선발 등판일 외에 하는 뭄풀기 공 30개 던지기를 안 하고 자진 등판한 것이지만 니퍼트가 불펜으로 나서야 했을 정도로 투수 운영이 개판이었음을 잘 보여준 사례다. 그리고 이 자진 등판 이후 내보낼 투수가 없어서 3일만에 다시 선발로 세웠다. 그나마 올스타 브레이크가 끼어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시즌 도중 니퍼트가 퍼질 뻔했다. 당연히 송일수는 까였다. 그리고 니퍼트는 이렇게 구른 대가를 다음 시즌에 치러야 했다.[35] "팀을 운영할 전권은 최종적으로 감독에게 있으며, 거기에 대한 칭찬이나 비판은 오로지 성적과 선수들의 상태, 혹은 팀 분위기를 기준으로 한다"는 야구의 기본 전제를 생각해보면 그들의 비난은 도가 지나쳤다.[36] 사실 정말 LG만 떨어뜨릴 심산으로 져줄 작정이었다면 전날인 15일부터 연달아 졌어야 맞는데, 정작 그날은 이겼다. 그냥 송일수는 시즌 내내 해왔던 야구를 똑같이 했을 뿐이고, 그 결과물이 바로 6위라는 성적표다. LG 팬들이 이에 대해 일부러 져준 거 아니냐고 비난하자 두산 팬들도 "송일수가 시즌 내내 저랬으니 우리가 가을야구 못 갔지"라고 받아쳤을 정도다.[37] 노경은은 2013시즌 정규시즌에만 180이닝을 던졌고 포스트시즌까지 포함하면 200이닝을 넘긴데다 시즌 전 WBC 국대 등판 기록까지 있었던지라 김진욱 감독 역시 14시즌에는 관리를 시킬 것이라 공언했으나 곧바로 경질되었고, 뒤이어 부임한 송일수가 이런 사정 따위 생각조차 안 하고 무작정 등판시킨 결과 시즌 ERA 9점대 선발이라는 희대의 오명을 안겨버렸다.[38] 김동주가 2군으로 내려온 초기 의욕 저하로 불성실하게 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선수(전력외)로 리포트를 올렸다. 1군 감독이 된 뒤에는 당연히 2군 감독 시절의 불성실한 김동주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김동주는 성실하게 임하고 있었고, 2군 감독의 인터뷰도 이를 뒷받침했다. 한마디로 자기가 심사가 뒤틀려 안 쓴 거라고 봐도 무방하며, 이 건으로 송일수를 재평가한다는 건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김동주가 2군을 맹폭할 때 조범현이 김동주의 정신적인 면에서 괜찮아졌다 판단하여 KT에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까지 감안하면, 오히려 이 역시 두산에서 오래 활약한 선수를 자기 2군 시절 잠시 본 것만으로 판단해서 결과적으로는 두산에 큰 해를 끼친 것이다.[39] 기대를 받으며 외국인 최고 계약을 따낸 니퍼트는 시즌 절반을 드러누우며 90이닝밖에 못 던졌는데, 마야는 노히트 노런 이후 급속도로 퇴물화, 스와잭은 시즌 내내 나사 빠진 모습만 보이다가 가을야구가 시작되자마자 아프다고 드러누워 버렸다. 루츠와 로메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40] 다만 한평생 일본 국적을 가진 적이 없었던 김성근과 다르게 이쪽은 일본 국적이 맞다보니 이시야마 카즈히데가 본명이고, 송일수라는 이름은 외국인 선수들의 KBO 등록명과 같은 개념이다.[41] 심지어는 그 이종운조차도 준우승 팀의 전력을 물려받은 송일수와 달리 CCTV 사건까지 터져 분위기도 상당히 어수선했던데다 원체 좋지 못한 전력을 갖춘 팀에서 감독으로 임명됐다는 점에서 조건 자체가 송일수보다 안 좋았다. 여기에 결과론적이긴 해도 장성우를 내주고 데려온 박세웅이 롯데 선발의 주축으로 자리잡았다는 점 또한 플러스 요소. 그렇지만 송일수는 선수를 보는 안목으로나 경기 운영 능력으로나 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점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마이너스만 잔뜩 되었을 뿐이다.[42] 게다가 김진욱은 김경문의 감독직이 장기화되면서 선발진 육성을 단 한 명도 성공하지 못하고 소모식 불펜야구로 투수진이 황폐화되어버린 극악의 상황에서 혹사가 없는 전혀 관리야구로 선수들을 보호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두산의 선발야구 시스템과 불펜 체계화 시스템을 자리잡게 하며 부임 2년 동안 모두 가을야구 진출과 더불어 2년차에는 기어이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기록하였다. 김경문 체제에서 이뤄지지 못한 선발진 육성과 더불어 불펜 시스템 체계화를 부임 2년만에 적립시켰다는 점에서 김진욱의 성과는 실로 엄청나다고 해도 무방하다.[43] 두산 이전의 최장기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기록은 왕조 시절 SK 와이번스가 김성근의 2007년( ~ 2010년)부터 이만수의 (2011년 ~ )2012년까지, 그리고 왕조 시절 삼성 라이온즈가 선동열의 2010년부터 시작해 류중일의 (2011년 ~ )2015년까지, 6년 연속만 두 차례 나왔었다. 그 기록을 깨버린 것. 심지어 이조차도 SK와 삼성은 모두 두 감독의 합작 기록이지만, 두산은 이 7년 연속 진출을 모두 김태형 혼자서 달성했다.[44] '한국시리즈 7회 진출 감독'으로서는 김영덕, 김응용에 이은 통산 3호.[45] 물론 이 양반도 2021 도쿄 올림픽 야구대표팀을 제대로 말아먹으며 본질이 다 까발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송일수와 비견되긴 힘들다. 무엇보다 김경문의 단점은 지휘봉을 오래 잡고 있을 때 극단적으로 부각되는 것이기 때문에 불과 1년만에 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을 그렇게 추락시키고 겨우 한 시즌만에 해임당한 송일수는 그 김경문과도 비교하기 힘들다. 그리고 김경문은 두산의 지휘봉을 내려놓고 이후 신생팀이었던 NC 다이노스의 창단 감독을 맡아 부임 2년만에 가을야구 진출 성공에 이어 4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 및 한국시리즈 준우승 1회를 기록하였다.[46] 이후 야구에서 감독의 영향이 별로 없다는 말의 대표적인 반례로도 종종 인용된다. 즉, 감독이 팀을 멱살캐리하는 것은 어려워도 말아먹기는 매우 쉽다는 뜻이다. 당장 백인천만 봐도 알 수 있다.[47] 이 둘은 해당 팬덤에게 있어 감독 취급조차 못 받는 신세다. 굳이 더하자면 한화 이글스 시절의 김성근 정도. 저들을 추후 자팀의 감독으로 만날 일이 사실상 없을 두산 팬들에게야 송일수가 독보적인 최악이자 넘사벽이겠지만, 굳이 수치적인 기준을 제시해보자면 백인천은 8888577, 이순철은 6668587667, 김성근은 5886899678의 핵심이다. 두산이 다행히 빨리 잘라버려서 저런 일을 막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게다가 김성근은 LG의 비밀번호에도 크게 관여한 장본인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순철을 피해자라 하기에는 역시 지분이 크므로 결론은 도찐개찐. 단, 백인천은 롯데에서 역대급으로 말아먹은 탓에 취급이 저렇게까지 박해진 것일 뿐 LG에서는 첫 우승을 안겨줬으며, 삼성에서는 비밀번호를 끊고 리빌딩을 한 공이라도 있다.[48] 2021년 허문회의 경우 감정싸움으로 인하여 팬들에게 욕을 먹었던 면이 크며, 2023년에는 김종국, 박진만이 이들만큼이나 욕을 많이 먹고 있다. 2024년에는 이승엽이 이에 해당한다. 그나마 김종국의 경우 현재 팀이 8연승해서 이런 비난은 좀 줄어들었고, 박진만의 경우 행적이나 성적만 보자면 절대 꿇리지 않지만 2022년 하반기 좋은 성적을 낸 적도 있어서 지켜보자는 여론이 많고, 2023년 막바지 최악으로 평가가 떨어졌다가 2024년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올려놓으며 평가가 반전되었다. 김종국은 반대로 배임수재까지 걸리며 진짜로 이순철 수준의 금지어로 전락하고 말았다.[49] 2012년에는 정규시즌 2위에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당시엔 전임자가 어느 정도 받쳐준 게 있었다고 할 수 있고, 2013-2014 두 해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것을 보면 이해가 쉽게 될 수 있다.[50] 본인이 다 포기하고 물러나는 자진사퇴는 잔여 연봉을 안 줘도 되나, 송일수는 경질이므로 당연히 잔여 연봉을 다 줘야 한다. 계약 위반을 한 측에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런 원칙은 지켜져야 된다.[51] 사실 자진사퇴도 예우의 표시로 잔여 연봉을 안 줘도 되는데도 그냥 주는 경우도 꽤 있다. 대표적 인물이 김경문 전 NC 감독. 두산 감독 시절엔 자진사퇴 후 급속도로 NC 감독으로 가서 프런트가 잔여 연봉을 끊어버렸다고...[52] 전술했듯 김동주가 2군에서 변화를 겪은 부분에 대해서는 무시한 채 송일수가 멋대로 기용을 안 했다고 봐야 되는 만큼 절대 옳다고 볼 수 없다. 조범현과 황병일 2군 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2014년 김동주의 2군은 성실성이 있다 판단되기 때문이었단다. 사생활과 관련되어 박동희 등의 글 등으로 불확실한 부분까지 확대 재생산된 부분이 크다. 단, 기용조차 않았던 점은 송일수의 판단보단 김태룡 단장의 지시였다는 의견도 있다.[53] 이는 KBO 첫 선수 출신 감독이라는 의의와 OB 베어스 프랜차이즈 출신이었다는 것도 있었던데다, 항명 사건만 빼고 보면 감독으로서의 성적도 나쁘진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좋게 쓰려는 의도를 가지면 저런 소개 멘트가 나와도 딱히 이상하진 않다.[54] 니퍼트에게 불펜 알바를 시켜 다음 시즌을 공치게 만들었고 노경은을 100실점 투수로 만들었으며 윤명준, 이현승, 이용찬도 갈려나갔다.[55] 2013년에 가능성을 보였던 오재일, 김재호, 이원석이 폭망했고 최주환, 허경민, 김재환은 제대로 된 기회도 받지 못했다. 입대한 이원석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김태형이 2년 내로 각성시켰다.[56] 송일수 시절에는 1군 수석코치였다.[57] 그러나 이 둘이 성이 같고 제일교포 출신이라 해도 송일수 감독의 일본식 성은 石山(이시야마)이고 송재박 코치의 일본식 성은 요시모토(吉本)이다.[58] 순수 일본인인 도이 쇼스케조차도 한국에서 코치일을 하던 시절 등록명인 도위창으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보통 외국인 선수나 코치들도 원래 이름이 어떻든 그냥 KBO 등록명으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