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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구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fffff [[삼미 슈퍼스타즈|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청보 핀토스]] 등번호 9번}}} | ||||
결번 | → | 이영구 (1983~1985) | → | 정구왕 (1986) |
왼쪽이 이영구, 오른쪽은 장명부. | |
이영구 李英求 | |
일본명 | [ruby(木山, ruby=きやま)] [ruby(英求, ruby=えいきゅう)] (키야마 에이큐) | Kiyama Eikyu |
출생 | 1954년 12월 24일 ([age(1954-12-24)]세) |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고코고등학교(呉港高等学校) |
포지션 | 외야수, 유격수, 3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73년 드래프트 9라운드 (히로시마) |
소속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3~1982)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1983~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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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소속 재일교포 야구선수.2. 선수 경력
2.1. 일본 프로야구 시절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시에 위치한 사립 고코(呉港)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3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9순위 지명으로 입단했다. 고교 시절에는 주로 유격수로 뛰었지만 히로시마 입단 이후에는 3루수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고 한다.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 후 1982년까지 10년 동안 단 10경기에 출장해 3타수 무안타의 성적 밖에 남기지 못하고[1] 1983년 평소 형처럼 따르던 팀 동료 장명부와 함께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한다.[2] 입단 당시 계약금은 2천만원, 연봉은 2천 4백만원[3]이었다고 한다.
2.2. KBO 리그 시절
삼미 슈퍼스타즈 입단 첫 해에는 다시 고교 시절 포지션이던 유격수로 주로 출전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과는 영 딴 판으로, 첫 해부터 전 경기 출장에, 타율 2할 7푼 7리로 유격수로써 나쁘지 않은 타율과 탄탄한 수비력은 대단히 고평가를 받았다. 이듬해 1984년에는 임호균이 롯데 자이언츠로 1:4 트레이드[4] 되면서 반대 급부로 권두조가 입단함에 따라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음에도 역시 전 경기 출장, 2할 5푼 7리의 타율로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었다.이영구의 삼미 입단을 책임졌던 장명부 답게 이영구의 연봉 인상과 재계약 또한 장명부가 자신의 연봉 협상때마다 책임졌는데, 1985년 장명부가 구단과 재계약 협상에서 실패했을 때 이영구도 협상을 거부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행적은 한국에서는 거의 불명이었는데...
3. 은퇴 후
2017년 JSports라는 스포츠 칼럼에서 오오제키 타카후미(尾関高文)[5]라는 기자에 의해 그의 근황이 공개되었다.2002년, 47세 때부터 시나가와구 근처에서 히로시마 츠케멘[6] 전문점을 차리고, 지금까지도 시나가와구 니시코야마역 근처에서 그의 이름을 딴 "求"라는 히로시마 츠케멘 전문점을 운영 중이라고 하며, 앞으로 남은 여생을 이 음식점 경영에 매진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가게를 가보면, 히로시마 츠케멘 집답게,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관련된 야구용품들이 함께 걸려있으며, 도요 카프의 경기 시간이 되면 가게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만 2023년 초에 폐업한 듯. 구글 지도 등에서 폐업으로 표기되고 있다.
4. 여담
일본 소설가이자 문학 평론가 세키가와 나쓰오가 쓴 "해협을 건넌 홈런"에 따르면, 이영구가 현역이던 시절 한국의 모 스포츠 신문에 "일본 2군에서 타격 2위였던 이영구가 한국프로야구에서는 타격 20위 안에도 들지 못한 것을 보면 한국프로야구는 일본프로야구의 1군과 2군 사이의 수준에 있다고 판단된다"는 내용의 칼럼이 올라왔다고 한다.[7]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1980 | 히로시마 | 1 | 2 | .000 | 0 | 0 | 0 | 0 | 0 | 0 | 0 |
1981 | 9 | 1 | .000 | 0 | 0 | 0 | 0 | 0 | 0 | 0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1983 | 삼미 | 100 | 368 | .277 | 102 | 21 (3위) | 2 | 5 | 36 | 48 | 5 |
1984 | 100 | 378 | .257 | 97 | 23 (3위) | 0 | 5 | 37 | 42 | 5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1985 | 청보 | 77 | 246 | .280 | 69 | 18 | 0 | 3 | 31 | 29 | 3 |
<colbgcolor=#ffff88> NPB 통산 (2시즌) | 10 | 3 | .000 | 0 | 0 | 0 | 0 | 0 | 0 | 0 | |
KBO 통산 (3시즌) | 277 | 992 | .270 | 268 | 62 | 2 | 13 | 104 | 119 | 13 |
6. 관련 문서
[1] 이영구의 일본프로야구 마지막 해인 1982년 웨스턴 리그에서 타율 .339로 2위를 차지했지만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2] 이영구의 삼미 슈퍼스타즈 입단은 장명부의 계약 조건이기도 했다.[3] 당시로서는 특급 계약조건이었다. 1년전의 박철순과 같은 대우.[4] 임호균 ↔ 권두조, 박정후, 우경하, 김정수[5] 오오제키 기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열렬한 팬이라고 하며, 위의 기사를 쓴 계기도 前 히로시마 OB 선수인 가네이시 아키히토(투수, 가네다 마사이치의 조카) 선수의 추천으로 가게 되면서 쓴 기사라고 한다.[6] 츠케멘 소스에 고추, 라유(고추기름) 등이 잔뜩 들어가 츠케멘 소스가 강렬한 붉은 빛을 띄며 면을 찍으면 면이 새빨갛게 올라 오게 되는 일본인 기준으로도 강렬하게 매운(激辛) 츠케멘에 속한다. 그렇다보니, 히로시마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매운맛을 즐기는 매니아들에게 인기가 있는 라면이라고들 한다.[7] 물론 지금도 한일프로야구는 수준의 차이가 분명 있지만, 이영구가 뛰던 시기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그 격차가 컸을 거라 추정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