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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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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호봉 장명부 최계훈 정성만 최계훈
1987~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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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균 김신부 정명진 양상문 김민태
1993 1994 1995 1996 1997 ~ 2000
양상문 안병원 정민태 위재영 정민태
2001 ~ 2002 2003 ~ 2004 2005 2006 ~ 2007
임선동 정민태 김수경 캘리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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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균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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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우승엠블럼V1.jp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4

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12번
결번 임호균
(1983)
최상수
(1984)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4번
김덕열
(1982~1983)
임호균
(1984~1986)
이재성
(1987)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14번
양후승
(1986)
임호균
(1987~1990)
전일수
(1991~1992.6.29)
LG 트윈스 등번호 74번
김윤겸
(1989)
임호균
(1994~1995)
유종겸
(1997~1998)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4번
우용득
(1985~1987)
임호균
(1996~1998)
장효조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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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균
任昊均 | Ho-Gyun Lim
출생 1956년 3월 26일 ([age(1956-03-26)]세)
인천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창영초 - 인천남중 - 인천고 - 동아대 - 세인트토머스대(마케팅학 석사)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3년 1차 지명 (삼미)
소속팀 철도청 야구단 (1975)
한국전력 야구단 (1980~1982)
삼미 슈퍼스타즈 (1983)
롯데 자이언츠 (1984~1986)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1987~1990)
지도자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1994)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1995)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1996~1998)
성남 블루팬더스 감독 (2017~2018)
병역 예술체육요원[1]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3. 연도별 주요 성적4. 은퇴 이후5. 기타6. 참조 링크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KBO 리그에서 활약했던 야구선수. 포지션은 투수이며, 주로 선발 투수를 맡았다.

플레이 스타일은 변화구와 제구력 위주의 기교파 타입으로, 컨트롤 아티스트로 불릴 정도로 훌륭한 제구력을 자랑했다.[2]

비록 장명부와의 불화로 롯데로 트레이드되었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던 우여곡절도 있었고 본인의 선수 시절 최전성기는 롯데 자이언츠에서 기록했지만, 인천 출신 선수로서 인천야구 최초의 프랜차이즈 선수 중 한 명이다.

다만 27세라는 제법 늦은 나이에 프로야구에 입문했기 때문에 제대로 활약한 기간이 짧았고, 그나마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는 롯데 시절은 당시 롯데의 에이스였던 최동원에 가려 상대적으로 묻힌 느낌이 크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파일:/image/sports/2009/baseball/expert_contents/pdh/ec_content/expert_220/1239588681_file_image_1.jpg
인천고 시절

인천 창영초 - 인천남중을 거쳐 인천고에 입학했다. 1974년 한 해 동안 노히트 노런을 2번 달성하는 괴력[3]을 발휘하며 야구계를 뒤흔들었지만, 정작 학교는 우승권과 다소 거리가 있었다.[4]

1975년 고교 졸업 후 집안 사정으로 인해 1년간 실업야구 팀인 철도청 야구단에서 뛴 후 부산광역시동아대에 진학했다. 서울의 여러 대학교에서도 연락이 많이 왔지만, 동아대 관계자가 부산에서 인천 집까지 올라온 게 주효했다. 여기에 감명받은 임호균의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권유해 동아대 입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1978년 연세대와의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준결승전에 선발로 등판하여 상대 선발인 최동원과 무려 연장 18회를 완투하는[5] 혈투를 벌였다. 결국 김봉연에게 끝내기 홈런을 얻어맞고 패했지만,[6] 그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 월드컵 대회 대표로 선발되어 대한민국 야구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 제패라는 쾌거을 달성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고,[7] 동아대를 졸업한 후 실업 팀인 한국전력 소속으로 활약했다.

한국전력 시절 1981년에는 15승 1패 방어율 1.56이라는 빼어난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고, 당시 같은 팀에 있었던 최동원은 15승 6패 방어율 2.25를 기록하였다.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느라 원년 한국프로야구에 데뷔하지 못했다. 당시 최동원, 심재원, 이해창, 김재박, 장효조 등도 이 대회에 출전하느라 프로 원년에 데뷔를 하지 못했다. 이 대회에서 방어율 0이란 뛰어난 기록으로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결승전에 앞서 오전에 치른 호주와의 서스펜디드 연장전에는 전날의 선발 최동원이 공략당하는 바람에 5:5 동점이 된 상황에 구원 등판했고, 이후의 5이닝을 무실점으로 책임져 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 비록 결승전 승리투수가 된 선동열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그 역시 대한민국의 우승에 큰 기여를 했던 셈.

김시진, 최동원과 함께 국가대표 트로이카로 꼽혔고 국가대표 7년을 했지만, 그는 선수 시절을 통틀어 줄곧 2인자였다. 대학 시절에는 최동원, 프로 입단 후 삼미 시절에는 장명부, 그리고 롯데 시절에도 다시 최동원에 가려졌던 것.

2.2.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

파일:external/blog.koreadaily.com/01210503_4.jpg
파일:/image/sports/2009/baseball/expert_contents/pdh/ec_content/expert_220/1239589186_file_image_1.jpg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

1983년 계약금 2천만원, 연봉 2천 4백만원의 당시로선 초특급 대우로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였고, 그 해 일본에서 건너온 장명부와 원투펀치를 이루며 활약했다. 12승 15패를 기록하였는데 비록 승수보다 패가 더 많긴 하지만, 당시 리그 최하위권인 삼미의 전력을 감안할 필요가 있으며 평균자책점도 3.03으로 호성적이고 무엇보다도 235이닝을 던졌다는걸[8] 감안하면 엄청난 성적. 비록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1년 전 승률 2할에도 못 미칠 정도로 형편 없는 꼴지 팀이었던 삼미를 83년도에 3위까지 올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뿐만 아니라 인천 연고지 출신의 임호균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인품으로 삼미 투수들의 리더 노릇을 했다. 하지만 임호균의 보스 기질을 못마땅해 하던 장명부가 구단 고위층에 "임호균을 트레이드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구단은 장명부의 손을 들어 주며 임호균은 1983년 11월 우경하, 박정후, 김정수, 권두조를 상대로 한 1:4 트레이드[9]롯데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자신의 트레이드 소식을 TV 뉴스로 알게 된 임호균은 격분하여 골프 연습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던 삼미의 김현철 구단주를 직접 찾아가 "내가 왜 트레이드 되어야 하느냐?" 하고 따졌는데, 정작 김현철 회장 또한 임호균의 트레이드 사실을 TV를 보고서야 깨달은 상황이었다. 체념한 임호균은 "어떤 선수가 삼미라는 팀을 진심으로 원하고 자랑스러워 했는지, 나중에 톡톡히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다.[10]

2.3. 롯데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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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유니폼을 입은 임호균

롯데의 일원이 된 임호균은 최동원이란 또다른 최고의 에이스의 뒤를 받치는 팀의 제2선발로 원투펀치를 이루며 1984 시즌에 10승[11] 9패 평균자책 2.95를 기록하며 롯데를 그해 후기리그 우승과[12] 한국시리즈 진출로 이끌었다. 그리고 롯데는 한국시리즈 제패의 기염을 토했다. 그해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최동원의 초인적인 투혼이 큰 주역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임호균이 선발과 중간을 가리지 않고 3경기에 등판하면서 최동원의 부담을 덜어주지 않았다면 롯데의 84년 우승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1984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 선발로 출전해서 호투하여 4회까지 3대 1로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5회 최동원으로 교체되었다. 5회부터 9회까지 마운드에 오른 최동원은 무실점으로 팀의 리드를 그대로 지켜내어 6차전 승리 투수가 되었다. 임호균은 당시의 투수 교체가 스스로 양보한 것이라고 말하였고, 강병철 감독은 훗날 KBS N 스포츠에서 당시 4회에 임호균의 손가락 살이 까지는 부상으로 공을 더 이상 던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교체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임호균은 1986년까지 총 3시즌 동안 롯데에서 활약했다.

2.4.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시절

파일:external/blog.koreadaily.com/04190311_1.jpg
청보 핀토스 시절

1987년 시즌을 앞두고 임호균은 청보 핀토스와의 5:3 트레이드[13]로 고향 팀에 돌아왔다. 그해 9승 10패 평균자책점 3.78로 트레이드 당시 함께 온 양상문과 함께 팀의 원투펀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특히 8월 25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홈경기에 등판하여 73개의 투구수로 역대 최소투구 완봉승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이 큰 화제가 되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소투구 완봉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파일:태평양임호균.jpg
태평양 돌핀스 시절

그러나 이듬해인 1988년 태평양 돌핀스로 팀명이 바뀐 후 급격한 노쇠화를 겪으며 성적이 하락했고, 팀 에이스의 자리는 양상문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이렇다 할 활약은 보이지 못한 채 1989년 시즌 종료 후 임호균은 이미 자신이 더 이상 프로에서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마음을 정리하고 구단에 은퇴의사를 밝히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장을 선호하기로 유명한 김성근 당시 태평양 감독이 "내년에 임호균이 5승을 못 거두면 옷 벗는다"면서 임호균의 잔류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자 구단에서 선발 5승이라는 내용의 각서를 요구하면서 이른바 임호균 각서 파동이 터졌다. 각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은 결국 1990년 시즌 내내 일부러 임호균을 선발로 한 경기도 등판시키지 않아[14] 김성근이 삼성 감독으로 가기 위해 고의로 각서를 써서 짤리려고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시 스포츠 신문과 주간지에도 이 내용이 실릴 정도였다. 김성근의 오대산 극기훈련에 감명을 받은 삼성그룹 총수가 직접 김성근을 점찍어 차기 감독으로 내정했고, 이에 김성근이 3시즌이나 계약이 더 남은 태평양을 떠나기 위해서 고의로 각서 파동을 일으켰다는 것.

김성근은 임호균이 구단에 의해 강제로 은퇴를 하려고 하자 제자를 위해 자신이 감독직을 걸고 이를 막기 위해 각서를 썼다고 언론플레이를 말했지만, 한참 후에야 임호균이 직접 언론과 한 인터뷰가 나오면서 김성근의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전설을 찾아> 임호균, “김성근 감독 5승 각서 원하지 않았다” 下

결국 1990년에 김성근은 태평양을 떠났고, 임호균도 태평양에서 방출당한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현역시절 통산 기록은 8시즌 동안 154경기 849이닝 44승 56패 3세이브 40완투 3완봉 평균자책점 3.32를 기록했다.

3.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1983 삼미 슈퍼스타즈 35 234⅔
(2위)
12 15 2 0 0.444 3.03 231 58 86
(5위)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1984 롯데 자이언츠 27 161⅔ 10 9 0 0 0.526 2.95 151 83 44
1985 27 145 10 10 0 0 0.500 3.23 136 77 43
1986 19 89⅓ 3 8 0 0 0.273 3.32 95 50 27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1987 청보 핀토스 27 173⅔ 9 10 0 0 0.474 3.78 185 86 38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1988 태평양 돌핀스 5 14 0 3 0 0 0.000 7.07 23 10 4
1989 7 15 0 1 1 0 0.000 2.40 13 8 6
1990 7 15⅔ 0 0 0 0 0.000 4.60 14 7 4
통산 154 849 44 56 3 0 0.440 3.32 848 379 252

4. 은퇴 이후

파일:/image/sports/2009/baseball/expert_contents/pdh/ec_content/expert_220/1239589553_file_image_1.jpg
토론토 블루제이스 코치 연수 시절의 임호균(좌)

은퇴 후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귀국한 임호균은 해설가, 야구교실 운영 등으로 야구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다가 LG 트윈스의 부름을 받아 프로 코치로 첫 발을 내딛었다. 신바람 야구로 상징되는 1994년 LG의 우승 당시 2군에서 투수코치로 기여했고, 1995년에는 1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그러다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에서 투수코치를 맡은 것을 끝으로 돌연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애미의 세인트 토머스 대학에 스포츠마케팅 전공으로 입학하여 학업의 길에 들어섰다. 참고로 삼성의 투수코치 시절에 그가 발굴한 투수가 정현욱이다.

늦은 나이에 다시 만학도가 된 임호균은 노력 끝에 2010년 5월 세인트 토머스 대학 스포츠 마케팅 및 매니지먼트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의 요청으로 일시 귀국하여 산하 마케팅 회사인 KBOP의 인턴 사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현재는 "임호균 베이스볼 아카데미&클리닉"을 운영 중이며, 가끔 언론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 듯하다. 2012년부터는 해설가 허구연이 주도하는 다문화가정과 새터민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고양시 무지개 리틀야구단의 코치로 참여 중이고 채널A의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중계 때 인천고 출신으로서 편파 중계 해설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5년 8월에는 최계훈 코치가 외국인 선수를 알아보려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자리를 비우게 되자, 최계훈을 대신하여 NC 다이노스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로 2개월 단기 계약을 맺고 활동했다.

이후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스포츠투아이에서 운영하는 독립야구단 성남 블루팬더스의 감독으로 재직하였으며 호서대학교 대학원에서도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2018년부터는 최동원상의 심사위원으로도 활약중이다.

5. 기타

6. 참조 링크

7. 관련 문서


[1]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2]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홈플레이트 위에 올려놓은 담뱃불을 붙인 담배를 맞췄다는 (정확히는 침을 묻혀 상자에 붙인 불 붙은 담배를 담배는 가만히 두고 담뱃불만 껐다는) 임호균의 제구력을 묘사한 내용이 나온다.[3] 당대 최강인 대구상고휘문고를 상대로 거둔 것이다.[4] 김진영이 활약하던 1950~1960년대 초반의 인천고는 전국 최강이었지만 이후 1989년까지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 사이 고교야구 전국 판도를 종종 흔들었던 동향 팀은 인천고의 라이벌인 동산고였다.[5] 연장 14회 0-0 상황에서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어 잔여이닝은 다음날로 미뤄졌다. 말 그대로 1박 2일 동안 던진 셈(...).[6] 한술 더 떠 최동원은 준결승이 끝나고 바로 거행된 성균관대와의 결승전마저 완투승하며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7] 그때의 활약으로 체육훈장 백마장을 받았다.[8] 지금처럼 한팀이 페넌트레이스 144경기를 치르는 게 아니라 100경기를 치르던 시절에 235이닝을 던졌다는 건 144경기 체제 기준으로는 거의 350이닝에 해당할 정도니 혹사라 할만하다. 한편 장명부는 임호균의 2배에 가까운 400이닝.[9]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일대 다자간 트레이드였다.[10] 그리고 임호균은 자신의 말대로 삼미를 상대로 더 강한 투구를 보여주었으며 롯데에서 우승 반지도 얻은 것에 반해 삼미는 장명부의 태업과 혹사 후유증(30승을 달성하면 1억원을 주겠다는 삼미 사장의 말을 믿고 1983년에 30승을 기록했으며 구단에서 말을 바꾸자 의욕을 잃었다.)이 겹치는 등의 악재로 이듬해인 1984년에는 도로 꼴지로 추락했다.[11] 이중 3승은 친정팀 삼미를 상대로 거두었다. 장명부와 연장 10회까지 맞대결하여 완투승을 거두는 등 자신을 버린 삼미에 대한 복수는 톡톡히 한 셈. 오죽 서운했으면 장명부를 완투 접전끝에 물리친 그날 경기 후 야구장에 와 있던 삼미 사장에게 자신을 왜 버렸냐는 듯한 손짓을 하기도 했다고.[12] 이는 삼성이 롯데를 손쉬운 상대로 여겨 노골적으로 져주기 게임에 나선 결과였다.[13] 롯데에서는 임호균과 더불어 양상문, 이진우, 배경환, 김진근을, 청보는 정구선, 정성만, 우경하를 내놓았다.[14] 중간계투로 7경기 등판,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4.60의 성적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