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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29 20:23:20

철도청 야구단

<colbgcolor=#0054a6><colcolor=#ffffff> 구단명 철도청 야구단
모기업 대한민국 철도청
창단 1913년([age(1913-01-01)]주년)
실업 전환 1946년 4월 18일([age(1946-04-18)]주년)
해체 1978년([age(1978-01-01)]주년)
구단명 변천 철도 구락부(1913~1945)
철도국 야구단(1946~1962)
철도청 야구단(1963~1979)
철우 야구단(1977)
홍익회 야구단(1978)

1. 개요2. 상세3. 관련 인물4. 관련 문서

1. 개요

1913년부터 1978년까지 존속했던 야구단이다.

2. 상세

일본인 오지마(大島勝太郞)가 쓰고 당시 철도도서관 주사(主事)인 임정일씨가 서문을 작성한 《조선 야구사》에 따르면 최초 창단은 1913년 봄에 이뤄 졌으며 그다음해인 1914년에 조선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각 지부별 야구단이 있어서 철도운동장에서 철도국내 대항 야구대회가 열렸는데 1926년 기준으로도 12개 지부 18개의 팀이 출전할 정도였으나 대부분은 재조선일본인들이었고 조선인은 소수였다. 해방 이전 철도 야구단은 조선 야구단을 대표하는 명문 구단 중 하나였으며 평양에도 철도야구단이 있었다고 한다.[1]
파일:attachment/korailbaseball1956.jpg
1956년 4월 18일, 철도청 창단식

해방 후 1946년에 철도국이 확대개편된 미군정청 운수국의 명의로 일본인들이 남겨놓은 야구용품을 가지고 한국인팀으로 거듭났으며, 48년 교통부 야구단으로 이어져왔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른 많은 야구팀들처럼 유야무야 팀이 없어졌다가 전쟁이 끝난후 다시 부활해 2년간(53~54)활동했으나 전후 지원미미로 해체되었고 1959년 가을 다시 실업야구부활을 위한 서울실업야구연맹의 발족에 맞춰 재창단한 후 교통부에서 철도청으로 팀이 이관되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이후 철도청이 적자로 돌아서면서 부터는 지원이 어려워지면서 1977년 철우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78년 자회사인 홍익회로 구단을 이관했으나 그 해 해체되었다. 이로인해 1970년대부터의 성적은 저조했다. 해체하기 전 3시즌 연속 승률이 3할을 못넘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굴지의 재벌인 롯데, 포철이 새로 야구단을 창단하면서 학생야구 유망주들을 싹쓸이한데다가, 홍익회는 당시 실업 야구단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선수들의 신분이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이었다고 한다. 승리 수당은 당연히 없었고.열정페이

3. 관련 인물

4. 관련 문서



[1] 해방 후 야구는 "자본주의"스포츠라며 강제 해산됐다고 한다.[2] 남궁택경의 조카 남궁성우도 홍익회 야구단에서 뛰었으며 남궁성우의 아들 남궁훈(개명 전 남궁지훈)도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은퇴 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스카우트가 됐다. 남궁훈과 덕수정보고 동기 투수가 류제국이다.[3] 김경기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