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0054a6><colcolor=#ffffff> 구단명 | 철도청 야구단 |
| 모기업 | 대한민국 철도청 |
| 창단 | 1913년([age(1913-01-01)]주년) |
| 실업 전환 | 1946년 4월 18일([age(1946-04-18)]주년) |
| 해체 | 1978년([age(1978-01-01)]주년) |
| 구단명 변천 | 철도 구락부(1913~1945) 철도국 야구단(1946~1962) 철도청 야구단(1963~1979) 철우 야구단(1977) 홍익회 야구단(1978) |
1. 개요
1913년부터 1978년까지 존속했던 야구단이다.2. 상세
일본인 오지마(大島勝太郞)가 쓰고 당시 철도도서관 주사(主事)인 임정일씨가 서문을 작성한 《조선 야구사》에 따르면 최초 창단은 1913년 봄에 이뤄 졌으며 그다음해인 1914년에 조선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각 지부별 야구단이 있어서 철도운동장에서 철도국내 대항 야구대회가 열렸는데 1926년 기준으로도 12개 지부 18개의 팀이 출전할 정도였으나 대부분은 재조선일본인들이었고 조선인은 소수였다. 해방 이전 철도 야구단은 조선 야구단을 대표하는 명문 구단 중 하나였으며 평양에도 철도야구단이 있었다고 한다.[1]| |
| 1956년 4월 18일, 철도청 창단식 |
해방 후 1946년에 철도국이 확대개편된 미군정청 운수국의 명의로 일본인들이 남겨놓은 야구용품을 가지고 한국인팀으로 거듭났으며, 48년 교통부 야구단으로 이어져왔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른 많은 야구팀들처럼 유야무야 팀이 없어졌다가 전쟁이 끝난후 다시 부활해 2년간(53~54)활동했으나 전후 지원미미로 해체되었고 1959년 가을 다시 실업야구부활을 위한 서울실업야구연맹의 발족에 맞춰 재창단한 후 교통부에서 철도청으로 팀이 이관되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이후 철도청이 적자로 돌아서면서 부터는 지원이 어려워지면서 1977년 철우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78년 자회사인 홍익회로 구단을 이관했으나 그 해 해체되었다. 이로인해 1970년대부터의 성적은 저조했다. 해체하기 전 3시즌 연속 승률이 3할을 못넘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굴지의 재벌인 롯데, 포철이 새로 야구단을 창단하면서 학생야구 유망주들을 싹쓸이한데다가, 홍익회는 당시 실업 야구단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선수들의 신분이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이었다고 한다. 승리 수당은 당연히 없었고.
3. 관련 인물
- 남궁택경[2]: 한국 야구사 최초의 언더핸드 투수. 철도청 야구단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 김진영[3]: 철도국 야구단 1960~63년, 1963~64년 철도청이 교통부 외청이 되면서 철도청 야구단으로 뛰었다.
- 김광철: 성남고 졸업 후 1966~70년 철도청에서 뛴 후, 육군 경리단을 통해 군 복무를 하였다. 군 제대 후 철도청에 복귀해 1972~73년까지 철도청에서 우익수로 활약하였다.
- 김영호: 1970년 철도청 야구단 단장을 역임했다.
- 김구길: 인천고 졸업 후 1972~79년 철도청에서 뛰었다.
- 황태환: 철도고 졸업 후 1973년 철도청 야구단 입단 후 육군 경리단 제대 후 1976년 철도청 복귀 후 1977년 한양대에 진학하였다.
- 유지훤: 대광고 졸업 후 1974~75년 철도청에서 뛰었다.
- 금광옥: 동산고 졸업 후 1975~76년 철도청에서 뛰었다.
- 임호균: 인천고 졸업 후 1975년 철도청에서 뛰다 1976년 부산 동아대로 진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