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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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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명칭Washington Naval Treaty[1]
장소워싱턴 D.C.
시기1921년 11월 12일 ~ 1922년 2월 6일

1. 개요2. 배경3. 국가별 상황4. 조약 내용5. 결과
5.1. 생존 함선 목록5.2. 단계적 퇴역과 건조 일정5.3. 즉시 퇴역 함선 목록5.4. 조약형 해군 시기 함선들5.5. 일본의 반응5.6. 미국의 반응5.7. 그 외의 국가들의 반응
6. 한국과의 관계7. 기타8.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워싱턴 군축 조약.jpg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서명
1921년 ~ 1922년 두 해에 걸쳐 타결되어 1936년 말까지 예고된 미국, 영국, 일본 제국,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 5대 열강국가의 해군 군축조약. 가장 유사한 예를 들자면 핵확산금지조약으로서, 그 당시에는 핵무기와 위상이 가장 가까운 전략 병기에 해당되던 군함의 생산을 제한하기 위해 맺은 열강 국가 간의 조약이었다. 끔찍했던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인류가 더이상의 대규모 전쟁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특히 일본 제국의 해군팽창을 억제하는 데 공헌하였던 이 조약은 군축이행완료 약속 시점인 1936년을 2년을 앞둔 1934년, 일본 제국에 의해서 깨지게 된다.

이 조약의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로 늘 거론되는 것이 영국독일 제국건함경쟁이다.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와 해군제독 알프레히트 폰 티르피츠가 추진한 건함정책에 맞서, 1 > 2+3 정책이라고 해서 해군력 2위, 3위 국가의 전력합계보다 더 강력한 해군력을 상시적으로 유지한다는 영국의 전통적인 해군전략(Two-power standard)을 유지하기위한 영국의 대규모 건함, 그리고 이에 자극받은 다른 열강들의 건함 경쟁 합류는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1차대전 이전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이유였다.

결국 이런 과열된 건함경쟁은 전후 승전국들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다. 건함경쟁의 당사자 중 하나인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여기서 밀려났고,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인해 다시 부활할 가능성도 제로에 육박했지만, 전쟁에서 이긴 5대 열강국가들은 여전히 막대한 예산을 퍼부으면서 건함 경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특히 1차대전으로 신흥국으로 떠오른 미국서태평양의 패권국가로 발돋음한 일본을 중심으로 한 건함경쟁은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를 만들어냈다. 실제 미국에서는 1920~1921년 사이에 건조스케줄상 미국과 일본 제국의 전함 총량이 균형에 도달하는 1923년에 전쟁이 터진다는 예측을 하는 저서들이 횡행하고 있었을 정도다.

게다가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출현한 이후 전함은 날로 거대해졌고, 건조비용도 폭발적으로 상승하였다. 따라서 전함을 포함한 해군력 확충은 각 국의 재정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으며, 참혹한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각국의 국민들도 이런 군비경쟁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이에 따라 각국의 정치가들은 새로운 타개책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3. 국가별 상황

3.1. 미국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다른 참전국보다 늦은 1917년에 참전하여 피해가 덜했다. 오히려 그동안 유럽국가들에 자금을 빌려주거나 각종 군수품을 판매하여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다. 비교적 늦은 시기에 대규모로 병력을 파병하여 최종적인 승전에 기여했기에 이때부터 국제외교가에서 미국의 입지와 영향력이 상당해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만해도 미국의 군사력은 지금처럼 타국보다 우월한 수준이 아니었다. 미 해군은 뒤늦게 건함경쟁에 돌입했다. 유럽 국가들이 치열하게 교전하던 1916년에 8척의 주력함을 건조하기로 했고, 1918년에는 28척으로 늘리기 위해, 의회에 추가 예산을 요청했다. 그러나 행정부와 의회는 예산부족을 이유로 삭감했고 16척만 건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의 건함 슬로건은 'second to none.' 즉, 2등은 의미가 없고, 오직 해군력 1등이 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미국은 당대 세계 최대의 전함 보유국이 될 수 있었다.

미 해군이 이와 같은 대규모 건함 계획을 추진하게된 배경에는 영일동맹이 있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의 미국은 영국과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상정했고, 미 해군은 대서양 방면에서 영국을, 태평양 방면에서 일본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미 해군은 두 해역에서 두 강대국을 상대로 하는 양면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었다.[2]

이와 같은 안보적 위협을 미 행정부에서는 외교적 이상주의로 타개하고자 했다. 이상주의자였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국제연맹 제안으로 시작된 미 행정부의 이상주의는 워런 하딩 행정부에도 이어졌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모든 강대국들의 군사력을 억제한다면 전쟁 가능성이 낮아져 평화로워진다는 것이었다.

3.2. 영국

영국의 군사적 목표는 경쟁국들을 물적, 질적으로 압도하는 것이었다. 대영제국으로서 전세계를 군림하던 영국은 2위, 3위의 해군력을 가진 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영국에게 도전할 가능성을 우려했고[3], 이에 대한 대응책이 2위, 3위 해군의 합산보다 더 거대한 해군력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이국 표준 정책이라 부르며, 영어로는 Two-power standard 정책이라 한다. 이 전략은 1889년 제정된 해군 방위법에 따라 시행되었다.

처음 상정한 적국인 독일의 함대가 스캐퍼플로에서 몰락함에 따라 전후의 상대는 다음 가는 해군 강국인 미국과 일본이었다. 당시 영일동맹은 최전성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건함 목표는 미국과 일본의 함대 총합보다 거대한 해군력을 운영하겠다는 것이 되었다.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미국은 대서양을 두고 대립하는 가상적국이었으며, 일본 제국과의 영일동맹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추진된 만큼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4]

전후 영국에서는 각각 4척의 전함과 순양전함을 건조하는 N3/G3 건함 계획이 진행되었다. N3급 전함은 아직 계획조차 없던 야마토급 전함과 비등했고, G3급 순양 전함은 당대의 거함이었던 어드미럴급 순양전함 이상급이었다. N3급을 위한 18인치 주포는 실제로도 발주되었다. 1920년 12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정부가 기술을 제공한다는 조건 하에 2개 제작사가 입찰했는데, 조약이 거의 마무리 단계였던 1922년 1월 30일에 발주가 취소된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체결 직후 건조된 넬슨급 전함에는 G3급에 장착하려 했던 16인치 포가 완성되어 탑재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팍스 브리타니카의 세계최강 대영제국이라고 해도 독일 제국과의 치열한 건함경쟁과 5년 동안 세계 대전을 치르며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면서 국력이 소진되었다. 전후의 영국은 팍스 브리타니카를 유지하기 버거워지고 있었으며, 건함경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이당시 전함 수병들에게 줄 봉급조차 없어서 수병들이 파업을 할 정도로 어려웠다.(인버고든 항명)[5]

영국은 그동안 지출이 심했던 국고를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독일에게 받아서 채우려고 했지만 독일은 지불할 능력조차 없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배상금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디폴트를 선언했고, 결국 독일이 내야될 전쟁배상금은 도스 안영 안을 통해 감경되었다.[6] 결국 영국은 부족한 자금을 충당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계 모든 해역에서의 제해권을 계속 쥐고 있어야 했다. 기존의 1 > 2+3 정책의 유지를 한다는 것은 제국의 해체를 가속화시키는 일이었다. 영국 스스로가 자부심을 가지며 쌓아올린 정치적 유산을 모두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건함 경쟁을 자제하는 것이 영국 내부적으로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셈법에 따라 미국의 이상주의에 따른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3.3. 일본 제국

러시아 혁명으로 강대했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대러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결성된 영일동맹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일본은 독자적인 세력강화와 이를 뒷받침하기위한 막강한 해군력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쓰시마 해전에서의 승리로 발언권이 높아진 해군의 강력한 요구와 군부의 팽창주의적 사고가 결합되어 해군은 빠르게 팽창했다. 1916년 84함대, 1918년 86함대에 이어 전후인 1920년에는 88함대[7] 편성을 요구, 의회의 승인을 받아 건함 예산까지 받았다.

이당시 일본 해군은 보유함 대부분이 건조된지 오래되거나 러일전쟁 당시 노획하여 편입시킨 노후함이라는 이유로 신조함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사실 그 노후함들은 이미 예비전력이었으니 변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1921년 시점 해군의 건함사업이 국가 예산의 30% 이상을 차지하면서 자연스레 반발이 일어났다. 당대의 건함사업의 중요성을 감안해도 분명히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당장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인 1930년대 초중반에도 군국주의에 사로잡혔음에도 국방예산은 전체 예산 중 2할 이내로 억제되었다.

19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함은 주력화기로 11~12인치 거포 4문을 탑재하고, 장갑순양함은 8~9.4인치 중간포 4문을 주력화기로 탑재해서 당시 일본의 재정 상황으로도 88함대는 충분히 보유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때만 해도 일본 해군 측에서도 32척의 주력전투함은 환상이나 다름없고 16척이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거포다수탑재함인 드레드노트와 일반적인 장갑순양함을 넘어서는 덩치 및 전함의 주포와 동등한 화포를 다수 탑재하는 인빈시블급 순양전함이 등장하면서 주력함 건조비용이 척당 3배 이상 치솟아 버렸다. 이는 일본 내에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사실 88함대는 전함과 순양전함 8척씩만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좌하는 호위 전력인 순양함 수십 척, 구축함 백여 척, 항공정찰과 포격관측을 위한 항공모함[8] 다수,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보조함대 수십 척과 잠수함 백여 척, 기타 지원함대까지 필요했다. 이 모든 호위함대까지 새로 건조해 해군 자체를 일신하는 계획이었다. 아무리 일본의 국력이 구미열강들과 나란히 할 정도로 강성해졌다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9]

3.4. 프랑스이탈리아 왕국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주력함 건함경쟁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있는 입장이었다. 이는 두 나라 해군전략에 기인하는데, 프랑스는 청년학파의 영향으로 인해 영국의 제해권에 주력함들끼리의 전면전보다는 통상파괴전과 어뢰정을 중심으로 한 기습, 그리고 현존함대 전략에 치중했다. 이탈리아 역시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았으며 해군의 작전 해역이 본국 주변인 지중해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규모 함대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러나 전후의 국제적 환경이 달라지면서 양국 역시 주력함 건함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두 나라 모두 승전국임에도 피해는 엄청나게 입고 전비지출도 막대해서 건함경쟁에 나서기에는 국가적 여력이 부족했다. 특히 그 당시의 해군전력으로는 뒤늦게 건함경쟁에 뛰어들어도 이미 거대한 해군력을 구축한 영국이나 미국, 일본을 따라잡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양국은 공통적으로 건함경쟁에 돌입해도 격차가 좁혀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니 차라리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 미국•영국•일본과의 해군력 격차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4. 조약 내용

여기서는 대략적인 조약 내용을 소개하며, 부가설명은 별도의 표시로 추가한다. 조약 문구에서 사용한 단위는 미터법 톤(1천 킬로그램)이 아니라 영국식 롱 톤(2240 파운드, 1016 킬로그램)이다. 단위의 혼란을 막기 위해 조약 내용에도 ''별도로 '미터법 톤'으로 언급하지 않는 경우 1톤은 2,240 파운드(1,016 킬로그램)으로 규정한다.' 라는 문장이 있다.

일본 내의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그 결과 일본은 미래의 적국에게 16인치 주포를 탑재한 전함 4척을 추가로 허용하는 바람에 전략, 전술상으로 크게 불리해졌다고 비판한다. 당시에야 나가토와 무츠를 나라의 자랑이라고까지 했다지만 무츠 한 척과 영/미의 4척과 바꾸는 게 대전과였을 거라며 무츠의 어이없는 최후와 맞물려 더 비판한다.

반면 반론으로는, 무츠를 사수하지 못했다면, 당시 야마토급 전함의 건조도 정해지지 않았던 시점에서 일본의 주력 전함은 나가토 한 척에 불과하게 되어, 일본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해진다. 따라서 무츠의 건조 진도와는 별도로, 강짜를 부릴 만한 상황이었다. 아래 서술될 미국의 도청 행위는 이 점을 알아낸 뒤 '미국의 2척 추가 건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일본 협상단은 본국에 가져가야 하는 최저한의 성과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윽박지른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에 각각 전함을 배치해야 했고, 영, 일, 미는 조약 협상 내내 삼각 대립을 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숫적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즉,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조인 시점만 두고 보면 일본, 미국, 영국[10]이 1:1:0에서 2:3:2로 비율이 바뀌었고, 미국은 대양 두 곳에 전함을 두어야하므로 단순 계산 시 일본:미국&미국:영국의 비율이 1:1 & 0:0에서 2:1.5 & 1.5:2의 비율이 되므로 일본이 이득을 본 셈이다. 반대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이 광대하므로 시간을 벌 수 있고, 자국의 전함을 파나마를 통해 오가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론이긴 하나, 이 양보의 결과물로 나온 미국의 콜로라도급 전함과 영국의 넬슨급 전함은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다만 그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일본 입장에서 제일 큰 문제점은 이런 과정을 통해 겨우 살려낸 무츠가 제대로 전함 전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모항에서의 탄약고 폭발로 침몰했다는 것이었다. ||
협상과정에서 미국은 국무부의 암호부서 "Black Chamber"에서 일본의 외교 암호를 해독하여 기밀사항-대미 7할을 관철하되 미국이 강경하게 고집할 경우 6할 유지 및 무츠의 완공함 인정을 받아내라는 내각명령을 알아챘고, 결국 강경대응한 끝에 일본은 대미 6할 수용 및 무츠 보유의 대가로 미영에게 16인치 포격전함의 추가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정보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헌데 이후 취임한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 국무장관이 암호해독을 신사이라면서 암호부서를 폐지[12] 하고 부서 책임관이었던 Herbert Yardley 가 1930년대에 일본 측 암호를 해독했다고 자랑하는 저서를 내면서 들통나 버렸다.[13] 이 폭로는 일본 해군이 군축조약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기준배수량 기준이다. 워싱턴 조약은 각 함의 배수량 기준까지 세밀하게 규정했는데 기준배수량은 탄약 적재 및 승조원 탑승이 된 상태이나 연료 등은 싣지않은 상태를 기준배수량으로 규정했다. 이후 이 규정이 기준배수량의 기본이 된다. 이 관행은 현재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위키백과 등에 등재되는 군함 배수량은 대부분 만재배수량이지만, 정부에서 사용하는 배수량은 기준배수량인 경우가 많다. 정당한 이유가 있는데, 임무에 따라 만재배수량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외가 가장 많은 조항이다. 일단 아무리 허용된 배수량 쿼터가 많아도 16인치 함포를 단 전함을 각국의 동의 없이 함부로 추가 건조할 수 없고, 영국의 순양전함 후드처럼 이미 만들어진 상태인데 3만 5천 톤을 넘기는 경우에는 협상의 결과에 따라 존속이 결정되었다.
항공모함이란 간판만 붙인 채 수상기 몇 대 정도만 보유하는 전함을 만드는 꼼수를 금지하는 조항이다. 따라서 이런 꼼수를 써도 제대로 된 전함으로 만들 수 없는 1만 톤 미만 항공모함은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성립하기 전까지는 예외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7천 톤대 랭글리를, 일본도 7천 톤대 호쇼를 조약외 항공모함으로 취급함으로써 더 신형의 항공모함을 허용된 항공모함 총배수량 범위 내에서 추가로 만들 수 있었다.
도크에서 한참 건조 중이던 함선을 몽땅 박살내고 고철로 처리해야 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국가들에게 일부 함선을 재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조항이다. 이 조항에서 배수량 제한이 늘어난 것은 기존의 전함과 순양전함의 배수량이 크기 때문에 이들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하더라도 배수량을 줄이기 힘들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조항을 이용해서 항공모함으로 변신한 전함과 순양전함들은 함령이 오래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어느 정도 활약하였다. 당장 덩치가 커서 신형 항공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베아른급 항공모함처럼 예외는 있었다.
이 조항은 1만 톤급 이상의 배를 만들고 이 배가 구축함이나 경순양함 드립을 치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1900년대까지만 해도 8~9.4인치 포 다수을 탑재하는 상비배수량 1만 5천 톤대의 장갑순양함들은 영국을 중심으로 여러 척이 만들어졌고, 함포의 발달을 고려해보건데 순양함에는 공수주의 균형을 위해서는 그 이상의 배수량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약토의 무렵은 5.5인치~6인치 포를 주력으로 하는 6천 톤에서 7500톤대 경순양함들이 건조되던 시점인 데다, 당사자들이 전함과 항공모함에만 신경 쓰고 순양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를 한 나라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일이 보유한 8인치포 4문 장비 장갑순양함의 상비배수량 상한인 1만 톤을 '보조함' 기준배수량의 상한선으로 적당히 타협하였다. 바로 이렇게 엉성하게 순양함의 배수량 상한을 정해놓는 바람에 조약형 중순양함들은 "양철판 순양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하나같이 극심한 방어력 부족에 시달렸다.
수출하지 말라는 소리다. 이외에도 형식상으로 독립시켜놓은 식민지 종속국에게 서류상으로만 판매했다가 유사시 다시 끌어와서 재사용하는 것을 금지할 목적이기도 하다.
전력의 현상유지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조항이며, 대체건조시기를 늦춘 이유는 당장 함선건조예산을 크게 줄이기 위함과 동시에 새로 등장하는 신기술을 함선에 빠르게 적용시켜서 숫자상으로는 균형이 맞으나 실제로는 개함간 능력격차가 커져서 전력균형이 안맞는 문제를 막기 위함이었다.
이는 주력함 비율이 가장 낮은 양국에 대한 일종의 혜택이다.
주력함 비율을 5대 3.5로 하자던 일본 제국의 제안을 미국이 강력 거부하자, 그 대안으로 일본 제국이 요구한 것을 미국과 영국이 수용했다. 영국의 경우, 홍콩이 동경 110도 동쪽에 위치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홍콩 요새화에 실패하여 훗날 홍콩이 손쉽게 함락되는 원인이 되었다. 싱가포르의 경우 동경 110도 서쪽에 위치했기에 요새화를 할 수 있었으나 싱가포르 전투에서 너무 졸전하는 바람에 무의미했다. 미국 역시 이 조항으로 , 웨이크섬을 손쉽게 내주어야 했으나 대신 예외지역으로 인정받은 하와이에 우주방어급 요새를 건설하였다.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 버틴 드럼 요새의 경우 1919년에 완공되어 조약의 논의대상이 아니었고, 워싱턴조약 파기 이후 강화조치가 이뤄졌다. 반대로 일본 제국 역시 태평양 도서 지역에 대한 요새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미군의 반격이 시작된 이후 쭉쭉 밀려났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장관이던 이 아저씨칠레오스만 제국의 주문을 받아 건조중이던 전함들을 강탈한 것 때문에 추가된 조항.[17]
조약의 실효일을 미리 정해둠으로서 조약이 지속되지 않을 경우 각국이 미리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탈퇴하는 국가가 독자적으로 해군 전력을 증강할 것에 대비해서 조약에 아직 남아있는 국가들이 서로 협의를 통해 조약을 개정하고 전력을 증강할 여유가 있어야 하므로 2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 말고도 수두룩하다. 각 조항마다 부칙도 수두룩 달려있고, 항공모함의 조건부 개장 옵션이라든가, 장착가능 화포의 숫자 및 구경 제한도 더 자세하고, 폐기처분하는 주력함의 폐기방법 및 그 수단 등등….

함의 크기의 기준이 전장이 아닌 배수량(무게)으로 정해진 이유는 파나마 운하의 존재 때문. 미국은 함대의 운용을 위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게끔 함선의 전폭에 제한이 있었고, 커다란 함을 만들기 위해선 전폭을 줄이는 대신 그만큼 전장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전장을 기준으로 함선의 크기를 결정할 경우 미국에게만 불리해지는 규정이었던 것. 미국의 잔머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조약의 취지가 "예산 좀 아낍시다"였기 때문에, 배수량 = 배값이라 여기에도 부합한다. 배수량이 늘어나면 보통 거기 들어가는 재료비도 정비례하여 많아지니.

5. 결과

5.1. 생존 함선 목록

capital ship으로 서술된 함을 서술하면 아래와 같은데, 조약에서는 구분하지 않으나 전함과 순양전함만 서술되어 있다. 조약문에서는 항공모함은 건조 가능한 조건만 작성되어 있고, 살생부(?)는 없다. 순양함은 물론 그 탄생 배경상, 식민지를 운영하던 열강들이 스펙이라면 모를까 국가별로 보유한 순양함의 배수량 합계를 스스로 규제할리가 없는 함종이고...

5.2. 단계적 퇴역과 건조 일정

1922년에 즉시 퇴역 함선 목록의 배들이 폐기되었다. 이후로는 아래와 같은 식으로 1942년까지 계획되어 있었으나, 일본이 군축 조약 탈퇴를 선언한 1934년 12월까지만 준수되었다. 아래의 표는 미국, 영국, 일본만 정리한 것이다.

표를 보면 알겠지만 다들 대공황에 허덕이던 시기여서, 영, 미, 일 모두 신규 건조 옵션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킹 조지 5세급 항목의 설명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군축 조약에서 합의한 일정에 맞춰 퇴역시키기 위해 노력한 국가는 오로지 영국뿐이었고, 미국은 1930년의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협상이 시작되자, 플로리다만 퇴역시키고 나서 관망세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미국 영국 일본
연도 건조시작 취역 퇴역 건조시작 취역 퇴역 건조시작 취역 퇴역
1922년 콜로라도[25], 웨스트버지니아[26] 즉시 퇴역대상 넬슨, 로드니 즉시 퇴역대상[27] 즉시 퇴역대상
1923~4년
1925년 넬슨[28], 로드니[29] 킹 조지 5세[30], 에이잭스[31], 센츄리온[32], 썬더러[33]
1926~30년
1931년 C, D C, D A
1932년 E, F E, F B
1933년 G G C
1934년 H, I C, D 플로리다[34], 유타[35], 와이오밍[36] H, I C, D 아이언듀크[37], 말보로[38], 엠퍼러 오브 인디아[39], 벤보우[40] D A 공고[41]
1935년 J E, F 아칸소[42], 텍사스[43], 뉴욕[44] J E, F 타이거[45], 퀸 엘리자베스, 워스파이트, 버럼 E B 히에이[46], 하루나

※ 1935년까지 군축조약에 따르지 않은 배는 볼드 처리.

5.3. 즉시 퇴역 함선 목록

그 어느 해전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만큼 많은 주력함을 침몰시킨 적이 없다. 당시 폐함처분된 함선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가 붙은 함선은 취역하지 못하고 퇴역한 함선
이 모든 전함 및 순양전함들이 현역이었던 건 아니다. 저중엔 대전 직후 바로 퇴역한 함선, 건조중이던 함선, 예비함이던 함선, 현역인 함선이 다 섞여 있다. 그러나 퇴역이건 예비역이건 얄짤없이 폐기처분해야 하는 강력한 군축조약의 규정상 모두 몇 년 내로 폐함되어서 고철로 처분되었다.

위의 함선들 외에도, 건조 중이던 주력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장 가능하다는 규정을 이용해 항공모함으로 용도변경된 전함도 상당수 있으며, 군축조약 타결 시점에서 아직 건조가 시작되지 않은 프로젝트 함선들도 상당하는 걸 생각하면 워싱턴 군축 조약의 여파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보조함 전력비율에 대한 규정이 없었지만, 이는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통해 완성되었다. 사실상 인류가 만들어 낸 최대규모의 군축 성과이다.

한편 이 시기에 건조된 주력함들을 조약형 전함이라 부르며, 이 시기 해군을 역시 조약해군이라고 부른다. 조약 해군 시기는 주력함 보유의 제한으로 보조함 및 항공모함에 대한 연구 및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거함거포주의가 종말을 맞이하고 항공모함 중심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기반이 된다.

5.4. 조약형 해군 시기 함선들

5.5. 일본의 반응

일본은 이 군축조약에 매우 불만이었다. 총리대신 하라 타카시가 1921년 조약 체결 직전에 암살된 이후, 일본 정계는 어수선해졌고 민간정부와 의회의 힘은 차츰 약화되어 갔다. 해군은 해군대로 미국 및 영국 대비 겨우 60%라는 해군전력 수준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며 민간정부를 맹공격했다.

반면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 조약의 진정한 의미는 일본이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영/미를 5로 묶은 것이다.'라면서 오히려 일본에 유리한 조약으로 평가했다.[67] 하버드대 유학과 주미대사관 무관 근무로 미국의 엄청난 공업생산력을 체감하고 있던 야마모토는 본격적인 '건함 경쟁'을 하게 되면 일본 해군미해군의 전력격차가 1:10까지 벌어진다고 예측하였으며, 이는 2차대전 말기에 실제로 증명되었다.[68] 또한 조약대로라면 양 대양으로 전력을 나누어야 하는 미국, 전 세계에 전력이 분산된 영국에 비해 일본은 해군력의 집중이 가능했다. 즉, 저 60%로도 여차하면 미영 해군에 대한 우세를 점할 수가 있었다. 이 부분도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공습에서 실증해보였다.

이외에도 일본 국내 한정으로 함선 건조에 관련된 흑역사가 있다. 바로 워싱턴, 런던 해군 군축조약 아래에서 각 함선의 전투력을 어떻게든 높이려고 무리를 한 결과, 각 함선의 무게중심이 상승하고 구조재에 균열이 가거나, 아직 제대로 익히지 않은 최신기술인 전기용접을 대량으로 적용한 것이다. 덕분에 파도가 조금 거칠다고 어뢰정이 뒤집어지는 토모즈루 사건이나, 태풍과 접촉해서 각종 함선이 큰 피해를 보는 제4함대 사건이 발생했고[69], 결국 일본군은 다시 돈을 들여서 함선들을 대규모로 재수리하고 무게중심을 낮추고 속도를 줄이는 등의 고생을 하게 된다.[70]

이 동안 함선들을 군축조약 아래에서 항해성능을 개선하려는 과정에서 용접을 포기하고 리벳접합으로 회귀하는 기술적 퇴보까지 벌어졌으며, 기본적인 항해성능조차 불안한 조약형 군함에 대한 불안을 가지게 된 중립적인 대다수 해군장교들은 군축조약을 부정하는 군령부 위주의 함대파와 조약의 유지를 주장하는 해군성 위주의 조약파간 대립에서 함대파에 대거 가담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쓰시마 해전의 영웅으로서 해군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도고 헤이하치로가 함대파의 영수인 군령부총장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을 지지하는 듯한 언행을 보인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래서 1934년에 조약을 탈퇴한다.

일본은 조약형 경순양함이라는 미명하에 조약의 헛점을 악용해서 주포를 8인치로 바꿀 수 있게 모가미급 경순양함을 건조한 다음 조약 탈퇴 후 바로 8인치 함포로 교체하여 중순양함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원래 8인치 함포는 1만 톤급 미만에서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힘들다. 함포는 운용가능할지는 몰라도 방어력이 종잇장이라 6인치를 잘못 맞아도 함이 위험해진다. 그러므로 이때 일본이 배수량을 속였을 것이라고 대체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실재 일본의 모가미급은 8인치 함포를 단후 기준 배수량이 12,400톤(만재 15,057톤)이 넘어가게 된다.
1930년 런던 군축조약 이후 기준 배수량 1만 톤 이상 중순양함
연도국가함급기준 배수량만재 배수량
1935년일본모가미급 중순양함12,400 톤15,057 톤[71]
1939년독일아드미랄 히퍼급 중순양함14,050 톤[72]18,200 톤
1943년미국볼티모어급 중순양함14,733 톤17,273 톤
1948년미국디모인급 중순양함15,653 톤18,991 톤

조약이 휴짓조각이 된 이후 각국이 건조한 중순양함의 배수량은 사실상 1만 톤 ~ 2만 톤 사이의 8인치 함포를 단 전투함 호칭으로 변질되게 되었다. 원래 중순양함과 경순양함이 모두 1만 톤 미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조약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5.6. 미국의 반응

미국의 해군장교들은 군축조약의 진정한 승리자는 일본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예산을 타낼 핑계가 생겼으므로 같이 건함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태평양 지역에 있던 미국 식민지인 필리핀, , 웨이크, 미드웨이에서 요새 공사를 중지시킬 수 있었고, 어쨌든 일본은 모든 종류의 군함들을 망라한 총배수량이 미국 대비 5할도 안 되는 판(전함만이라면 6.7할)이라 타국과는 달리 대규모의 함선건조가 조약 내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와는 별도로, 미국은 협정 외적인 거대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다. 미국은 '영일동맹이 유지된다면 조약에서 결정된 건함 비율이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다'는 점을 들어, 조약에 조인하는 조건으로 영국 측에게 영일동맹의 종료를 요구하였다. 영국 측 역시 군축이 매우 절실하였고, 영일동맹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효용성이 떨어지는 반면, 군축으로 평화 기조가 유지된다면 동맹 자체도 그다지 쓸모가 없는 것이 되므로, 미국의 요구를 순순히 수용한다. 이 밀약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일환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으나, 표면상으로는 워싱턴 해군 회의 기간 동안에 공개적으로 진행된 회의[73]였기 때문에 일본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결과 일본이 무츠를 지키기 위해서 계산했던 모든 것들이 이 한 방으로 싸그리 어그러지게 되고, 일본만이 조약의 유일한 패배자로 남게 된다. 더 길게 보자면, 2차 대전의 양대 세력인 영미 연합군과 추축군의 구도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5.7. 그 외의 국가들의 반응

영국은 이 군축조약으로 엄청난 해군력 유지부담을 한번에 훌훌 털어버리게 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무리한 건함경쟁을 할 필요가 사라지게 되면서 세계는 전쟁없는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물론 바라보기만 했다

소련은 이를 대항해서 '극동피압박인민대회'를 개최하여 워싱턴 회의를 비난하였다. 한편 조약 당사국이 아니라서 마음대로 군비를 늘릴 수 있었지만 하필 대숙청이 벌어지는 등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기회를 날렸다. 게다가 전신인 러시아 제국이 함대를 싸그리 날려먹는 바람에[74] 해군 전력 양성은 커녕 손실을 만회하기도 벅찼다.

6. 한국과의 관계

이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태평양회의(對太平洋會議)' 외교 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태평양 회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이승만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밀항하여 상하이에 와 있었는데 1921년 5월 20일, 많은 임시정부 요인과 교포들의 환송을 받으며 미국 기선 컬럼비아 호를 타고 필리핀마닐라를 거쳐 워싱턴 D.C.로 향하였다. 임시정부는 파견된 대표단의 활동을 뒤에서 후원하였으며, 뉴욕에서도 후원회가 조직되어 대표단의 외교 경비를 뒷받침해 주었다. 특히 뉴욕서 유학하던 조병옥, 허정 등의 청년 유학생들이 함께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a]
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 회담에 참가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이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76]

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 회담(Washington Naval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한인 대표단이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오전 8시 30분에 샌프란시스코 도착하자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이승만을 인터뷰 하였다. 이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한국민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워싱턴으로 돌아왔으며, 회의가 미국 영토에서 열리기 때문에 파리 평화회의에서처럼 한국 대표들이 일본 외교관들에게 질식을 당하지는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77][78]
파일:KADA-HenryDeYoung-096A (1).jpg 파일:Syngman Rhee and Philip Jaisohn (2).jpg
1921년 초, 태평양 해군 군축 회담서 한국의 입장을 교섭하기 위해 워싱턴 D.C. 구미위원부 청사를 나서는 한국대표단의 이승만 단장과 서재필 부단장.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국 대표가 공식적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 위원회를 꾸리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 대표단이 공식적이라는 인상을 가능한 띄기 위하여 이승만의 평생의 독립운동 동지인 국제 통신사INS(International News Service)의 젊은 기자 J. 제롬 윌리암스 주선으로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기자 회견을 열고 억압에 눌린 한국인들의 투쟁사를 설파하며 기자들을 통해 먼저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임시정부가 과연 한국민의 전체를 대표한 것인지 의문을 품는 자들도 상당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공식 신임장을 전보로 요청하였고 1921년 9월 29일, 다음과 같은 신임장을 받게 되었다.[a]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9월 25일, 정식으로 전 각료의 특별 회의를 소집하고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음을 이에 밝히는 바이다. 즉,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1921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되는 군비 축소회의에 전권을 가질 한국 대표단을 다음과 같이 선정 임명한다.

전권대사 이승만, 전권부사 서재필, 비서관 정한경, 고문관 프레드 A. 돌프

전권 대사에게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며 대표 1명을 더 추가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대표단의 전 인원은 5명으로 구성한다. 따라서 본 군축 회의에 한국 문제에 관한 주장을 제의할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군축 회의에서 제기되는 모든 협정, 의정서, 조약 일체에 대한 협정 및 체결을 할 권한을 부여하는 바이다.

이 신임장을 미국 대표단의 단장인 허그스 국무장관과 군축 회의 사무국에 직접 제출하고 한국 대표단이 이 회의에 정식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렇다할 아무런 회답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한국 대표부는 옵저버로서라도 이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목표한 바는 이루지 못하였고 다만 법률 자문이었던 프레드 돌프의 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논설이 1921년 12월 1일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결과만을 달성했다. 애초에 제국주의 열강간의 과도한 군비경쟁 해소 및 이권 조정이 회의의 목적이였던만큼 그들의 식민지에 대한 독립 등의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이 때 그는 이 회의가 끝나자 열강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였다.[a]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탈취할 수 있는대로 탈취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통용될 때, 강대국은 이해가 상반되는 다른 강대국으로부터 정치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 이 결과가 전쟁을 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오직 이러한 현실에서 외면당한 약소 국민만이 그들의 정당한 주장조차 펴지 못하고 주권을 유린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회의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서구권 열강에게 더이상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고, 마침 소련 주도로 공산주의 운동이 커지면서 좌익과 우익 분화를 촉진하는 영향을 끼쳤다.

7. 기타

워런 하딩 미국 대통령이 개최한 워싱턴 해군 회의에서는 해군 군축문제외에도 중국문제와 영일동맹 문제도 같이 다루어졌다.

중국문제를 다룬 회의에서는 일본이 중국정부에게 강요한 21개조 요구를 취소시키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인정된 산둥성의 독일 이권들을 중국에게 넘기도록 하는 한편, 공평한 문호개방을 내세워서 중국의 현유영토의 유지와 균등한 중국 내 상업기회 보장 등을 요구하는 9개국 조약[81]을 성립시켰다. 중국은 스자오지를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여 산동반도 문제, 조계지 문제, 관세자주권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때 중화민국 대표로 참석한 구웨이쥔은 불리한 정세 아래에서도 중국의 국익을 되찾아왔다면서 "민국외교영웅" 등으로 불리며, 군벌내전에서 총리 후보로 단골 추대되는 등 여러 정파의 추대를 받았다. 훗날 중화민국 외교부장에 임명되는 뤄원간은 이때 중국 대표단의 고문으로 참석했다.

영일동맹은 이미 제정 러시아독일 제국이 대전이 끝나면서 사라지면서 그 효력이 의심받게 되었지만, 미국과 밀착관계에 있던 신대륙오세아니아영연방 국가-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영일동맹이 지속될 경우 미일간의 전쟁에서 자치령의 이익보호를 위해 종주국인 영국과 전쟁(!)을 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협박(?) 및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독주를 영국이 묵인할지도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 등이 겹치게 되었다. 실제로 이 당시 미국은 서류상의 계획이긴 하지만 '레드 계획'이라 하여 캐나다 등지에서 영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작전 시나리오를 구상하기도 했다. 따라서 워싱턴 조약에선 일본의 폭주를 견제하는 목적으로 영일동맹을 해소하고 이를 대체하는 조약으로서 중국 지역에 다대한 이권을 가진 미국/영국/일본/프랑스 4개국이 이권보장을 추구한다는 4개국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모든 종류의 회의에서 일본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추구를 제한당하게 된 셈이다. 사실,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팽창양상은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인 미국과 서유럽 제국들조차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것이어서 일본의 팽창욕을 제한하려는 의식이 서양국가들에게 있었다.[82] 물론 이 사건이 오히려 일본의 팽창욕을 자극해서 20년 뒤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고 말긴 하지만..

그리고 받아먹기만한 감은 있지만 워런 하딩 최고의 업적으로 꼽힌다.

행정학자인 파킨슨은 1914년부터 1928년까지 영국 해군의 함선 수와 장병 수가 모두 감소했음에도 행정인력은 오히려 증가했음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공무원 수는 업무량과 관계 없이 증가한다는 파킨슨의 법칙을 제시한다. 파킨슨의 법칙은 관료제에 대한 유명한 설명 중 하나이지만, 하필 예시로 든 영국 해군이 이 군축조약의 거대한 영향 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사례가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 군축조약은 국가와 국가 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라 깨지기가 쉽기에 나가리가 될 때를 대비해 예비 인원들을 대기시켜 놓을 수밖에 없다. 군함이 줄어든다고 사람까지 줄였다가 나중에 누군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조약으로 사라진 숙련병들을 찾느라 애를 먹게 될 것이다.[83]

동아시아사 근현대사 파트에 꼭 나온다.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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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ashington Naval Conference는 Washington Naval Treaty를 조인하고, 중국 문제와 영일동맹 문제를 논의한 전체 회합을 가리킨다.[2] 물론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양면전쟁을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실질적으로 전선만 분리되었을 뿐, 상대가 스페인만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전쟁과 조건은 다르지 않았다. 사실 스페인도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으로 군사력을 투사해야 되는 양면전선임은 동일했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경우가 다르다.[3] 이와 같은 영국의 우려는 2차례의 군축 조약을 거친 결과, 2차 대전시기 독일(33%) + 이탈리아(33%) + 일본(70%) 해군력이 영국(100%)의 해군력을 상당히 앞서게 되면서 현실화되었다.[4] 그외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각각 전통적인 경쟁세력과 지중해에서의 제해권을 위협하는 신흥세력으로 충돌의 여지가 다분하여 우군이라고 할 수 없었다.[5] 여기서 유혈 진압을 했다면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진 로마노프 왕조처럼 윈저 왕조도 그들의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 다만 러시아만큼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기 때문에 수병들은 계급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파업했고, 이를 받아들인 일선 장교들이 중재하면서 주동자 수병 몇몇이 퇴역하는 선에서 매듭지어졌다.[6] 이후 나치 독일이 집권하고 영국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배상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독일 패망 이후로도 독일이 분단되는 상황에서 배상금은 요구할 수 없었고, 결국 독일은 100년 가까히 지난 2009년이 되어서야 모든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7] 88함대란 전함 8척과 순양전함 8척으로 구성된 해군 주력함대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구성이 나온 이유는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사토 데츠타로가 러일전쟁 직후 세계해전의 역사와 러일전쟁에서의 해전상황을 분석하여 포격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중심으로 해군전력을 구축하고, 예비전력으로서 노후화된 포격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보유하는 것, 즉 전함 총 16척과 장갑순양함 16척이 이상적이라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88함대 이론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8] 전함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항공력이 필요하다는 사상에 따른 조건이었다.[9] 88함대 계획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대체역사 동인지인 88함대 1934에 따르면 '88함대를 건조하는 것만으로 끝없이 총력전'이었으며 결국 88함대를 건설하기 위해 중일전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역사를 개변했다.[10] 이 나열 순서는 지도에서 연상하기 편하도록 구성한 것임.[11] 조약 초기의 비율은 본문과 같으나 일본이 전함 무츠의 보유를 인정받음으로써 미·영/일본의 한계톤수가 50만 톤/30만 톤에서 52만 5천톤/31만 5천 톤이 되어 최종적인 비율은 5 : 5 : 3 : 1.67 : 1.67로 조정되었다.[12] 원자력의 무궁무진한 사용 가능성을 예측하거나, 전후 독일의 산업기반을 완전히 일소한다는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는 등 능력이나 식견이 뛰어났던 인물임은 분명한데, 이미 시대의 흐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는 총력전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음에도 스팀슨 장관은 사고방식 자체가 구시대에 머물러 있었다는 계 한계(...) 신혼여행의 추억이 망가지는 것은 싫다며 교토 원자폭탄 투하를 반대한(...) 것도 이 양반. 그 때문에 당초 우선폭격지 리스트에서 교토가 빠지고 나가사키가 추가되었다.[13] 이때 나온 유명한 말이 "신사는 남의 편지를 열어보지 않는다(gentlemen don't read each other's mail)"[14] 다만, 타국에 기지를 세우는 건 가능했다. 사실 해당 조항을 제안한 일본의 입장에서도 영미가 태평양 지역의 타국에 기지를 세워도 별 큰 문제는 없었다. 우선, 서태평양 지역은 영미 말고는 러시아, 프랑스 영토뿐이라 영미와 맞먹을 만큼 강력한 이들이 순순히 자국 영토에 해군 기지를 세우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그나마 비벼볼 만한 곳이 아메리카 지역인데, 일본이 굳이 아메리카까지 가서 영향력을 행사할 일이 없으니 영미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라도 여지를 두는 편이 일본에게 이익이었을 테다. 애초에 일본은 일본에서 그나마 가까운 알래스카 지역도 예외 지역으로 인정했다.[15] 영국은 추가로 동경 110도 동쪽에서 태평양 지역까지의 모든 연안에서 요새화가 금지되었다.[16] 일본은 추가로 타이완섬과 펑후 열도에서의 모든 연안에서 요새화가 금지되었다. 다만, 타이완섬에는 부속도서 요새화를 금지시키지 않아 사실상 유명무실했다.[17] 이 사건으로 오스만 제국의 대영 감정이 매우 악화되었고, 이를 노린 독일 제국의 개입으로 결국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을 필두로 한 동맹국에 붙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18] 뉴욕, 텍사스, 아칸소는 2차 대전에도 참전하였다.[19] 콜로라도급 전함 웨스트버지니아와 콜로라도를 건조하려면 폐기하도록 되어 있다. 참고로, 조인 문서에는 이 2척의 콜로라도급 전함이 웨스트버지니아급으로 간주된다.[20] 2척의 전함을 건조하려면 폐기하도록 되어 있다.[21] 제2차 세계 대전당시 킹 조지 5세와는 다른 함급[22] 나머지는 이미 전함 구실을 못하는 배들이어서, 폐기 목록에도 올라가지 못했다.[23] 풀네임인 카이오 줄리오 체자레가 아니라 이렇게 적혀있다.[24] 조약 체결 당시 폭발사고로 큰 손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예산 부족으로 수리가 중단되어 1923년 해체되었다.[25] 1923년에 취역함[26] 1923년에 취역함[27] 썬더러와 킹조지 5세급 제외[28] 1927년에 취역함[29] 1927년에 취역함[30] 1926년에 스크랩됨[31] 1926년에 스크랩됨[32] 표적함이 되었다가 1941년에 가짜 주포를 달고 재취역, 1944년에 오마하 해변에서 둑으로 쓰기 위해 자침.[33] 1926년에 스크랩됨[34] 1931년에 퇴역[35] 표적함으로 전환, 1946년에 퇴역[36] 훈련함으로 전환, 1947년에 퇴역[37] 훈련함으로 전환, 1946년에 스크랩됨[38] 1932년에 스크랩됨[39] 1932년에 스크랩됨[40] 1931년에 스크랩됨[41] 이 함 대신 히에이가 훈련함으로 전환[42] 1946년에 퇴역[43] 1948년에 퇴역[44] 1946년에 퇴역[45] 1932년에 스크랩됨[46] 훈련함으로 전환되었으나 조약 탈퇴 후 개장을 받고 현역 복귀[47] 콜로라도급 2척이 추가로 취역시 폐기 조건[48] 렉싱턴과 사라토가는 이미 한창 건조중이었기 때문에, 조약 체결 후 설계가 변경되어 렉싱턴급 항공모함으로 개조된다.[49] 건함경쟁을 일으키고 결국 이 군축조약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만든 그 드레드노트급의 네임쉽이다. 매우 역사적인 함선인 만큼 보존할 가치가 있었지만, 군축조약의 대상에 포함되었다.[50] 콜링우드는 비전투함으로 사용 가능한 옵션이 있었다.[51] 콜로서스는 비전투함으로 사용 가능한 옵션이 있었다.[52] 썬더러는 넬슨급 건조 시작시 폐기 조건[53] 제2차 세계 대전당시 킹 조지 5세와는 다른 함급[54] 넬슨급 취역시 폐기 조건[55] 아사히와 시키시마는 비전투함으로 바꾸는 옵션을 행사했다.[56] 쓰시마 해전 그 자체를 상징하는 배이기에 일본에서 이것만은 살려달라고 한 결과 다시 항해가 불가능하도록 콘크리트로 부어서 육지에 고정시켜버렸다.[57] 러일전쟁때 황해에서 일본 해군에 격침된뒤 인양된 레트비잔이다.[58] 무장이 해제되어 훈련용 표적함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으며, 이후 구레 군항 공습에서 미 항공기의 공격을 받아 대파착저한 뒤 전후 스크랩된다.[59] 카가는 항공모함으로 변경[60] 이 둘은 실제로 건조에 착수되진 않았고, 함명까지 부여받은 상태에서 자재 발주도 이루어졌으나 건조를 목전에 둔 채로 계획이 취소되었다.[61] 순양전함으로 재분류되었다.[62] 순양전함으로 재분류되었다.[63] 아마기는 항공모함으로 개장 도중 지진에 의해 대파되어 폐기. 아카기는 항공모함으로 변경.[64] 네임쉽인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는 항공모함으로 개장이 결정되면서 조약 효력 발생 시점에는 폐기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이후 예산 부족으로 계획이 중단되면서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도 26년경 해체되었다.[65] 퓨리어스를 커레이저스급의 개량형으로 보는 관점이 주이기 때문에 커레이저스급 항공모함 3번함으로 분류하기도 한다.[66] 상술했듯 아마기는 건조 도중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용골 파손으로 폐기[67] 단, 그의 이 부분 발언은 맡은 직책이 다를 때 한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항목 참조.[68] 가장 쉬운 예로, 2차대전 중기~말기에 일본이 건조한 신형 정규 항공모함이라고는 운류급 추가건조 2척, 장갑항모 다이호, 야마토급 함체를 활용한 시나노 정도에 불과했지만(이것조차도 자재가 부족해서 운류급은 구축함 자재를 가져다 땜빵하듯 만들었고 시나노도 침몰 당시 수밀방수도 제대로 안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 시기에 미국은 에식스급 정규항모를 20척 가량 컨베이어 벨트 돌리듯 찍어내고 있었고 호위 항모는 총합 100여 척이 넘게 건조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대전 말기에는 더 신형의 미드웨이급 항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69] 다만 저 경우는 함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저런 상황에서 훈련을 강행한 지휘부의 잘못이 크다. 저런 상황은 일본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함정이라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할만큼 악천후였다. 가령 미국도 태풍 때문에 호되게 고생한적이 있다. 코브라(태풍) 문서를 참고.[70] 하지만 일본은 이 대규모 개장으로 태평양 전쟁 동안 태풍으로 인한 함선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제7차 다호 작전 중 태풍을 만난 구축함 타케는 태풍을 조우했지만 무사히 귀환했다.[71] #[72] #[73] 기타 단락에서 설명하고 있다.[74] 말할 것도 없이 러일전쟁에서 쓰시마 전쟁의 패배가 원인이다.[a]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155-160[76] 파테 뉴스(Pathe News)와 주간 국제뉴스(International News Weekly)가 금문교 공원에서 촬영하였다.[77] David P. Fields 외 공편, 《Log Book : 이승만 일기》, 2015, 대한민국역사박물관, p. 111[78] 『Oakland Tribune』, 1921년 8월 17일자 기사[a] [a] [81] 9국 공약, 9국 조약으로도 불린다.[82]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열강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할 당시에도 일본이 열강들 중 가장 많은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병하여 여차하면 시베리아를 병탄하려고 시도하였고 또 가장 늦게 철군하였다. 서구에서 전간기라 부르는 시기 일본은 내내 전쟁하며 점령지를 늘리고 있었으니 이해의 범위를 넘어설 수밖에.[83] 실제로 영국 해군은 군축 조약으로 인한 규모 감소 문제를 장병들의 숙련도와 예비대로 극복하고자 했고, 이런 노력 덕에 2차 대전 발발 전까지 사격 통제 장치 등 주포와 장갑이 아닌 소프트 스펙 면에서는 타국 대비 상당한 우위를 점했다. 2차 대전 발발 후에도 전쟁 전부터 관리하던 예비대 조직 덕에, 막대한 함선과 승조원의 손실 및 전쟁 중 해군 규모가 오히려 커지는데도 승조원 기량 문제를 비교적 크게 겪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미 해군이 물론 팽창 규모가 너무 컸던 탓도 있지만 예비대 조직의 부족으로 인해 승조원 기량 문제를 겪던 것과 비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