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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00:22:45

청년학파

1. 개요2. 배경3. 진행4. 결과5. 문제점
5.1. 검증안된 신기술에만 집중5.2. 대응기술의 발전 예측 실패5.3. 비대칭 전략과 연안해군 전략에만 집중5.4. 유사시 대안마련 부재5.5. 경쟁국의 약진과 한박자 늦은 대응의 연속5.6. 열강의 조건 충족의 필요성5.7. 신뢰도가 바닥인 대영제국
6. 반론7. 현대전의 비슷한 사례8. 관련 외부 링크9. 관련 서적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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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eune École. 영어로 번역하면 Young School 이지만 영어로도 고유명사 취급해서 그냥 Jeune École 라고 표기한다.

프랑스 해군군사 교리 학파. 어뢰정 양산으로 쉽게 해군력을 증강하자는 이론을 주장하는 학파이다. 일본에서는 신생학파(新生学派)라고도 한다.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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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19일 작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마르 라 투르 전투: 프로이센의 중장기병 7기가 프랑스 대포를 부수는 장면(1870년 8월 16일)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로 여파로 프랑스프로이센 왕국에게 거액의 배상금 지급을 하게 되고 이 때문에 국내 경제도 위축되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대항하기 위해 모든 전력을 육군 위주로 구성하고 군비증강도 그에 맞게 진행했고, 재정마저도 더 안 좋아졌기에 결과적으로 프랑스 해군의 예산은 대폭 축소됐다.

거기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당시 프랑스 해군이 보여준 활약이 미미했던 것도 문제였다. 프랑스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다수의 장갑함은 프로이센 해안 봉쇄나 상륙을 통한 후방 기습에 실패하였고, 오히려 수병이 육지로 기어 올라가 파리 방어전에 참가해야 했다. 이런 타의적이며 환경적인 요인으로 프랑스 해군은 실질적인 전력이 되지 못하였고, 그러한 점 때문에 정부, 국민들에게 외면 받았다.

물론 프랑스 해군에게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던 건 사실이나, 당시의 프랑스 여론이 프랑스 해군에게 좋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여기에 산업혁명은 불에 기름을 뿌리는 꼴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해군의 건함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해 불과 수 년 전에 건조된 함선이 구식함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당황한 프랑스의 국민들과 전략가들은 기존의 장갑함 위주 전력은 쓸모없다고 생각하였다. 거기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하여 프랑스 해군의 군비가 줄어들자 이런 인식이 더욱 고착됐다. 결국 프랑스의 많은 사람들이 전함과 같은 대형군함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대의 기술발전도 청년학파의 탄생을 도운 측면이 있다. 1820년대에 앙리 조세프 펙상(Henri-Joseph Paixhans)은 원시적인 고폭탄을 발사할 수 있는 함포인 벡상포를 개발했다. 그는 이 강력한 포를 다수의 증기추진식 소형 군함에 탑재함으로써 더 큰 배수량을 가진 전열함같은 주력함들을 격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벌어진 남북 전쟁에서 남군의 사략선앨라배마 (CSS Alabama)의 활약은 통상파괴전의 효과가 어느 정도는 실전에서도 활용할 정도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이런 배경하에 청년학파의 선조라고도 말할 수 있는 프랑스 해군의 루이 앙뜨와느 뤼실 그리벨 대령(Louis-Antoine-Richild Grivel 1827년 ~ 1883년)은 1869년에 출판된 책에서 “신병기의 개발과 통상파괴전이 영국을 상대하는 전략에 유효하다”고 발표했다. 이 사상은 이후 청년학파의 지도자적 입장이 된 테오필 오브 제독에게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테오필 오브(Hyacinthe Laurent Théophile Aube) 제독을 중심으로 뭉친 일단의 장교 무리인 청년학파가 사상적 배경을 체계화시키고 정리하였다. 테오필 오브는 전쟁의 목적은 적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것이며 기존의 해군 목적이었던 적군 함대를 격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과격한 주장을 했다. 이러한 테오필 오브와 추종자들의 입장은 기존의 해군 독트린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그들을 청년학파라는 의미의 주네 에콜(Jeune École)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청년학파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신형 무기와 장비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미 어뢰어뢰정은 개발된 후였고 발사된 후 스스로 항진해서 목표에 명중하는 자주추진식 어뢰도 발명되었기에 청년학파의 이론은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테오필 오브 제독은 1882년 《해군 전쟁과 프랑스의 군항》(La guerre maritime et les ports militaires de la France)이라는 제목이 쓰여진 38페이지 분량의 소책자를 발간했다. 여기에서 테오필 오브 제독이 언급한 것은 아래와 같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 예를 들어 어뢰를 이용하여 적의 해상봉쇄를 무너뜨릴 수 있다. 따라서, 해안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함을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어뢰정, 연안경비정, 충각정 등의 작은 군함이 있어야 한다. 공격에 관해서는 순양함을 이용한 통상파괴전을 실시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고속의 군함이 필요하다.

해당 소책자에서 나온 이론에 따른 실증도 나온 것처럼 보였다. 1883년에서 1885년까지 벌어진 청프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의 승리는 기존 방식의 해군에 대한 어뢰정의 승리 가능성을 실증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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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조제프 펙상(Henri-Joseph Paixhans), (1783년~1854년).

그리고 청년학파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것과는 달리 많은 숫자의 유력한 지지자가 있었다. 초기 청년학파의 지지자 중에는 그랑제콜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를 졸업한 육군 포병 장교 출신의 앙리조제프 펙상 장군도 있었다.

3. 진행

이들은 당시에 개발되기 시작한 최신기술인 자주추진방식 어뢰 등을 이용하여 연안방어와 통상파괴전 수행을 하자고 주장했고, 이 이론에 딱 들어맞는 어뢰정이야말로 이상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장갑함은 이동속도와 함포의 장전 속도가 너무 느려서 빠른 소형함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반면 어뢰정은 단 1 ~ 2회의 어뢰 공격만으로도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장갑함을 격침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갖추었기에 당시의 대형함에게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가격은 장갑함들보다 훨씬 싸고 운용 인원도 적었으니 군비가 감축되던 프랑스 해군으로써는 매혹적인 무기체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이 어뢰정을 바탕으로 대형함들의 해상봉쇄를 막아내는 수세적인 전략을 세워 기존의 대형함 중심 전력체계를 대체하자는 주장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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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8월 7일 프랑스의 테오필 오브 제독

1886년 1월 7일에는 청년학파의 핵심 인물인 테오필 오브 제독이 해군장관으로 취임했고, 이후 프랑스 해군은 청년학파의 주장에 맞춰 기존의 건함 계획을 연기하거나 취소하고 어뢰정과 순양함을 다수 취역하는 등 철저히 통상파괴와 연안해군 전략에 의존한다.

테오필 오브 제독이 해군장관에 취임하자마자 청년학파의 사상을 입증하기 위한 각종 시험이 실시되었다.

일단 어뢰정의 원양항해능력을 시험하였다. 1861년 2월에는 대서양 방면의 쉘부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지중해 방면의 툴롱까지 어뢰정을 항해시키는 실험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전장 33m 정도의 어뢰정으로는 원양을 항해하는 것은 어려웠다는 결론이 나왔다.

다음으로는 어뢰정의 타격능력을 시험하였다. 1861년 5월에서 6월까지 8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공격측 함대를 20척 남짓의 어뢰정이 순양함 3척과 해방전함 1척이 지원하는 방식으로 저지하는 연습전을 실시하였다. 연습전 결과 공격측 함대는 툴롱을 함포 사격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대부분이 격침 판정을 받았다. 그 결과 대형 군함으로 기존의 해상봉쇄 방식인 항구에 접근해서 해상봉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와 같은 시험결과를 바탕으로 1861년 12월에 테오필 오브 제독은 아래와 같이 프랑스의 해군 전략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단순하게 어뢰정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잠수함의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아무래도 영국 해군의 주력함에 근접하려면 어뢰정만으로는 어려움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오필 오브는 해군장관 취임 후 3개월만에 최초의 전동추진식 잠수함의 건조를 승인했다.

여기에 더하여 청년학파는 프랑스 해군 조직 전략의 5가지 원칙도 정립했다.
1 해군 전략 자체를 방어전에 특화
2 다목적 범용군함보다 1가지 목적에 특화한 군함이 필요
3 가능한 한도내에서 가장 속도가 높은 군함이 필요
4 배수량이 단순히 큰 군함이 아니라 배수량이 가볍고 작은 군함이 필요
5 해안선에 해군 거점을 다수 건설

위에 나온 5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영국 해군의 대형 군함을 효과적으로 방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통상파괴전으로 내보낸 순양함과 어뢰정으로 통상파괴전을 지속하면 산업발달을 위해 영국 본토의 식량의 자급자족을 포기하고 해상으로 식량을 운반하는 대영제국이 상선이 계속 격침당하면서 굶주리게 되므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중에 독일 제국이 수행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나 나치 독일대서양 전투를 프랑스 해군이 통상파괴전용 순양함과 연안방어용 어뢰정을 가지고 수행한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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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SMS 루씬 어뢰순양함.
제조/운용국 함급 만재(전투)배수량 기준 배수량 취역
스웨덴 HSwMS 클로스 우글라 어뢰순양함 810톤 1900년 11월 28일
스웨덴 HSwMS 프실란더 어뢰순양함 810톤 1900년 7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SMS 루씬 어뢰순양함 995톤 1884년 7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SMS 티거 어뢰순양함(1887년) 1,657톤 1888년 3월

1880년 당시의 순양함은 현대의 순양함과 달리 800톤에서 2,000톤 사이의 경량급 전투수상함인 어뢰순양함이 있었는데, 이건 사실상 현재의 어뢰정이거나 초계함급이다. 이 당시는 순양함이라는 단어가 나온 초기라서 그냥 대양을 넘나드는 순양항해능력이 있으면 순양함인 거고, 현대의 순양함 함급과는 의미가 다르다.
제조/운용국 함급 만재(전투)배수량 기준 배수량 취역
프랑스 라페루즈급 포좌순양함 2,240톤 1877년 11월 5일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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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운용국 함급 만재(전투)배수량 기준 배수량 취역
프랑스 아미랄 세실급 방호순양함 5,900톤 1890년 10월 9일 취역

그리고 동일한 시기에 2,000톤에서 6,000톤 사이의 포좌순양함(Barbette cruiser)과 장갑순양함(Armoured cruiser), 방호순양함(Protected cruiser)이 건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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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1895년, 프랑스 해군의 어뢰정 No. 63(33미터형).

19세기 말부터 프랑스 해군은 청년학파의 주장에 따랐고, 당시 프랑스는 거의 200척에 가까운 어뢰정을 보유한 당대 최대의 어뢰정 보유국이 되었다. 만약 청년학파의 예측대로 되었더라면 프랑스는 이 때 세계 최강의 해군이었을 것이다.

4. 결과

하지만 청년학파의 예측과는 달리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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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세이어 머핸, (1840년~1914년).

1890년앨프리드 세이어 머핸[1]은 해군 역사를 정리한 책인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2]을 발표하며 통상파괴전의 한계를 주장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청년학파의 의미는 점점 퇴색해 간다.

이때만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비판을 덜 받는 상황이었고, 어뢰정의 건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1895년 시점에서 195척의 어뢰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술발전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청년학파와 전통적인 거함주의자(함대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있었다. 특히 1898년에 파쇼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프랑스는 영국의 우세를 빠르게 인정해서 사건을 손쉽게 마무리지을 수 있었으나 그 원인으로 프랑스 해군의 주력이 원양항해를 할 수 없어서 영국 해군에게 전혀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이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1900년에 전함주의의 복귀로 1900년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대형군함 건조계획이 시작되면서 청년학파의 시대는 1차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1902년 7월에 카미유 페르탕(Camille Pelletan)이 해군 장관에 취임하면서 청년학파가 다시 등장한다. 카미유 페르탕은 청년학파를 부활시키면서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 해군이 자신이 건조와 설계에 참여한 어뢰정을 사용해서 활약한 것과 함께 구식 전함인 보빗을 기뢰 때문에 상실한 것등을 이유로 들었다. 그리고 보조함, 어뢰정, 잠수함을 합하여 89척의 주문을 넣었다.

하지만 정작 청일전쟁에서 어뢰정은 일본 제국 해군이 열정적으로 활용해보려고 해도 그렇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1904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1905년에 벌어진 쓰시마 해전에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중심으로 한 대형군함의 유용성이 드러나고 어뢰정은 원양에서 운용이 힘들어서 성과는 없다시피 하고 피해만 많았다는 것이 알려지며 청년학파는 1905년 1월에 카미유 페르탕이 해군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최종적으로 붕괴된다.

결국 청년학파가 영향을 준 20여년의 기간 동안 프랑스 해군은 연안해군으로 머물렀다.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진 1914년 7월 28일의 기준에서도 프랑스 해군은 여전히 118척의 어뢰정을 보유하는 데 반해 드레드노트급 전함은 쿠르베급 전함 4척이 전부였으며 그나마 2척만 실전투입 가능상태였고 1척은 취역후 2주도 안된 상태라 초기 훈련중이었으며 나머지 1척은 전쟁이 터진 후인 1914년 8월 1일에나 취역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독일 해군의 대양 함대에서 분견대라도 파견하면 순식간에 개박살나기 딱 좋은 상태였다. 그래서 전쟁 직전에 진수한 브르타뉴급 전함 3척을 전황이 매우 급박하고 어려워짐에도 불구하고 1915년 6월부터 1916년 7월까지 무리수를 써가면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취역시킬 수 밖에 없었다.

5. 문제점

이들은 현대의 고속정과 비슷한 다수의 어뢰정으로 영국의 대형군함을 상대한다는 비대칭 전략을 수립하였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청년학파에 대하여 비난하였고 역사적인 기록도 비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5.1. 검증안된 신기술에만 집중

가장 큰 문제는 개발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태라 아직 기술의 안정성이 떨어지고 실전에서 제대로 검증되지 못한 어뢰라는 신기술에 너무 많은 집중을 했다는 것이다.

21세기라면 몰라도 청년학파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어뢰 자체가 신뢰할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수백년을 사용하며 개량되어 신뢰성을 단단히 확보한 함포와 다르게 어뢰는 당시 기준은 물론이거니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도 신뢰받지 못하는 무기였다.

당시의 어뢰는 말그대로 신뢰성이 바닥이었다. 사정거리도 짧고 유도는 당연히 안되지만 직선항주조차 제대로 못하는데다가 신뢰성이 낮아 명중하더라도 제대로 폭발해주면 다행인 무기 취급도 하기 어려운 무언가였다. 설상가상으로 위험성도 높았다. 실전에서는 사소한 피탄으로도 유폭의 가능성도 매우 높았고 제대로 발사했더라도 항주중에 혼자 자폭하기도 했다. 어뢰가 1,829m (2천야드) 정도의 초근접거리라면 명중을 어느 정도 보장해줄 수 있게 발전한 시기가 이미 20세기가 된 1900년대에 들어와서야 간신히 가능해진 상황이었다.

그런 주제에 가격이 높고 수시로 오버홀 급에 가까운 집중점검을 해야 그나마 어뢰가 작동하는 것을 보장하기 때문에 실전 전투병들도, 후방 장교들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무기였다. 영국 해군이 어뢰를 중요무기중 하나로 도입하기는 했지만 어뢰에 올인하지 않은 이유가 다 있던 것이다.

그리고 어뢰의 신뢰성과 안정성이 실전 수준에서도 안정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올라가는 시간도 매우 많이 걸렸다. 청년학파가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난 1차대전 시기에도 잠수함들은 어뢰보다는 갑판에 장착한 덱건을 더 신뢰했고 덱건으로 올린 전과도 더 좋았다. 2차대전 시기쯤 가야 어뢰가 어느 정도 안정화를 이룩했지만 미국의 어뢰 스캔들처럼 문제가 발생하거나 일본의 산소어뢰처럼 적에게 주는 타격력도 높지만 아군에게도 위험물 그 자체인 물건이 실전에서 사용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결국 청년학파가 원하는 성능의 어뢰는 2차대전 이후에 유도식 어뢰가 실전배치될 때지만 이미 대함 미사일이 해전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므로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에 몰빵하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중의 상식이지만 청년학파는 이런 것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청년학파가 얼마나 현실에 대해 무지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5.2. 대응기술의 발전 예측 실패

간단하게 말해서 상대방 해군이 대응기술을 발전시킬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프랑스 해군이 어뢰정에 어뢰를 적재하고 적군의 대형군함을 공격하면 적군의 해군에서는 그걸 대응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부터 답이 없다.

당장 군함들이 속사포와 같은 신형 무기들을 속속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대형군함들은 어뢰정에 대항할 힘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주력함을 호위함들이 호위하는 진형도 체계적으로 만들어놓고 항시 주력함을 호위함이 호위하는 구조를 만들자 어뢰정이 대형함을 공격하려고 목표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워졌다.

마지막으로, 영국이 어뢰정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구축함이라는 중간급 함급을 고안한 게 결정타였다. 영국은 프랑스 해군이 어뢰정 위주로 함선을 건조하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1893년에 최초의 구축함을 개발하고 그 해부터 '5개년 건함계획'을 세워 총 82척을 찍었다.

크기도 더 크고 어뢰정을 사냥할 무기를 갖추었고 속도도 대형함보다 빨라서 어뢰로 공격하기도 힘든 구축함은 어뢰정으로 상대하는 게 힘들었다. 애초에 구축함(destroyer)이란 함급 이름자체가 어뢰정을 구축하는 군함(torpedo boat destroyer)이란 뜻이므로 어찌보면 당연한 것. 이러한 구축함이 대형함을 호위하기 시작하면서 실질적으로 어뢰정의 타격능력이 무력화되었고, 대형함 타격 능력 외의 작전능력을 갖추지 못한 프랑스의 200척에 가까운 어뢰정 전력은 그대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5.3. 비대칭 전략과 연안해군 전략에만 집중

청년학파의 이론과 현실은 철저한 비대칭 전략과 연안해군에 의존한 해군이 어떠한 결과를 만드는 지에 대한 좋은 예시다. 간극을 메꾸기 위한 무리수는 어차피 위험한 도박이 따른다. 때문에 무리한 전략의 추진은 위험성이 있다.

유틀란트 해전이나 쓰시마 해전 같이 비슷한 성능의 군함을 보유한 해군이 일정한 규모의 격차를 극복한 사례는 있다. 하지만 청년학파처럼 기술의 출현에 따라서 상대도 안될 수 있는 소형군함들을 수량만 늘려서 도배한 경우라면 말 그대로 일방적인 학살극이 벌어질 수 있다. 이때는 작전이나 운도 바라기 힘든 지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비대칭전략이나 요행은 상황에 따라서 격차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경우 격차를 오히려 매우 크게 벌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비슷한 성능의 함선을 갖추었으나 수적으로 열세인 경우에는 전술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한 범위일 수 있다. 그러나 '강력한 한 방'을 갖춘 소형선으로 대형함을 상대하는 경우에는 그 '강력한 한 방'이 무력화 되는 순간 전술이고 뭐고 없다. 이쪽의 그 어떤 무기를 들이대더라도 상대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는 반면, 이쪽은 상대의 화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이미 전차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 구식 대전차화기만을 가진 보병 부대를 최신형 전차 부대 상대하라고 보내는 꼴이다. 게임이라면 물량으로 게임에서도 아드레날린 업글은 한다. 찍어누르는 것도 가능하다지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미 언급했듯 프랑스는 배를 마구잡이로 찍어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즉, 물량으로 압도할 수도 없었다.

5.4. 유사시 대안마련 부재

신기술이 유망해보이고 비대칭전략을 중점으로 운영하려고 해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최소한의 안전장치와 대안을 마련해놓고 실행해야 최악의 경우를 막을 수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한 고려는 없다시피 했다.

이미 당대의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제2식민제국의 절정인 상태로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보유한 해양 대국이라 어뢰정 중심 전력으로는 이 넓은 해양을 모두 수비하지 못해서 작전계획에 많은 애로사항이 꽃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절이었고 식민지가 종합적으로는 경제력에 큰 보탬이 안된다고 해도 식민지를 늘리는 이유가 있었다. 유사시에 안정적인 자원 확보 및 자국 산업을 유지할 시장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같은 외국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들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프랑스와 다른 국가간에 전쟁이 터지고 영국같은 열강이 해당 전쟁에 대해 중립국 선언같은 걸 해버리면 아주 비싼 비용을 들여야 간신히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거나 아예 조달이 불가능할 수 있다. 안그래도 전쟁비용이 높은 상황에서 이런 일이 터지면 경제력 부족으로 패전하기 딱 좋다. 여기에 더해서 돈이 없어서 물물교환을 하더라도 뭔가 거래 상대방 국가에게 먹힐만한 자원은 보유하고 있어야 하며 보통 그런 것은 식민지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식민지를 타국에게 넘기면서 반대급부로 전쟁에 급히 필요한 물자나 군사 장비나 지원군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열강들이 식민지를 무리수를 쓰더라도 계속 손에 쥐고 있던 것이다.

비록 프랑스가 제1적국인 독일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서 예산의 상당수를 프랑스 육군에 써야한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프랑스 해군을 포기할 입장은 아니었고 비용 절감을 위해서 어뢰정에 집중한다고 해도 건함 비용의 일부를 다른 곳으로 돌려서 최소한의 대형군함 건조는 조금씩이라도 시행하여 유사시 대응 및 기술력 유지 정도는 해줘야 했다. 실제로 200여척에 가까운 어뢰정이 다른 용도로 전환도 매우 어려운 수준의 쓰레기로 전락해버리자 프랑스 해군에 남은 것은 구식 군함이나 보조함 밖에 없었으며 대형군함을 건조할 능력도 상당수를 상실해서 다시 처음부터 만들어내야 했다.

이런 교훈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공식이다. 오히려 무기체계가 과거보다 복잡해진만큼 최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적절한 건함 사이클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일본 제국과 함께 최초의 항공모함 개발국이자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상당한 항공모함 대국이었던 영국의 왕립 해군도 오데이셔스급 항공모함이 1979년에 퇴역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캐터펄트 발진식 항공모함을 한동안 운용하지 않자 노하우를 모두 상실하여 정규항공모함인 퀸 엘리자베스급 항공모함을 건조하려고 해도 미 해군에 연수 가서 교육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결국 캐터펄트 탑재를 포기하고 F-35의 단거리 이륙/수직 착륙형(STOVL) 함재기를 도입했다. 해군 양성론자들이 목에 피가 나도록 주장하는 3,000톤급 이상 대형함의 꾸준한 건조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5.5. 경쟁국의 약진과 한박자 늦은 대응의 연속

1880년대에서 189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프랑스는 장갑함전함 건조를 소홀히 하였다. 반면 동시기 프랑스의 경쟁국인 이탈리아는 여러 척의 장갑함과 전함 건조를 시작하여 프랑스와의 격차를 좁혔다. 일부 소규모 국가들만 프랑스 청년학파의 주장처럼 해군을 구성했고, 20여년 동안 프랑스 해군을 지배했던 청년학파의 전략은 선두 영국과 더 긴 격차를 벌어지게 했으며 후발주자인 이탈리아가 프랑스를 따라잡는 계기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20여년간의 격차를 따라잡기 위해 프랑스가 말 그대로 고난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다. 어뢰정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제1적국인 독일 제국대양함대를 건설하고 영국 해군 다음가는 세계 제2위의 해군강국이 되는 바람에 오히려 프랑스의 영토가 독일 함대의 함포사격을 맞기 딱 좋게 변한 것이다. 독일의 함대가 영국만을 상대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대의 상식이었다.

물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영국과 프랑스는 협상국으로 동맹을 맺고 독일 제국을 상대했으므로 독일의 대양함대를 프랑스 해군이 혼자 상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이건 급박한 정세에 따라서 행운이 터진 결과였다. 실제로는 영국과 프랑스는 1천여년에 가까운 수준의 라이벌이었고 과거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처럼 영국이 프랑스가 터지건 말건 방관하면서 중립국 자리를 유지할 경우 프랑스 해군이 순식간에 개박살나고 프랑스 육군도 해안가에 독일 함포탄이 날아오면서 해안가를 중심으로 독일군이 방어선을 우회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프랑스의 주력함 건조 역사를 살펴보면 레퓌블리크급 전함으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만들고 리베흐테급 전함으로 간신히 중간포를 도입하여 후기형 전드레드노트급 전함까지 따라잡자 영국이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건조하기 시작했고, 이걸 한번에 따라잡는게 불가능하니 준(準)드레드노트급 전함인 당통급 전함을 만들었다. 그 동안 영국이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만들자 프랑스는 그제서야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쿠르베급 전함을 만든 후 간신히 브르타뉴급 전함을 만들어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식의 긴급대응을 하면서 무리수가 속출하고 비용이 낭비되었다.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진정한 의미를 덜 깨달아서 당통급 전함같은 답없는 물건을 6척이나 만드는 바람에 쿠르베급 전함을 만들 비용이 크게 줄어들었다. 시간도 모자라서 쿠르베급 전함은 당통급 전함의 중간포를 주포로 교체한 수준이고 브르타뉴급 전함은 쿠르베급 전함을 기반으로 주포만 대구경화한 것이라 긴급수요는 맞추었으나 둘 다 만족스럽지 못한 성능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정면으로 독일 제국의 대양함대와 전투를 치루기가 곤란했다.

설상가상으로 20년간의 시간낭비에 따른 악영향도 오래갔다. 노르망디급 전함을 건조시작하고 리옹급 전함을 계획하여 이제서야 해군 열강에 걸맞은 주력함을 가질 수 있는가 했는데 1차대전이 터지면서 모조리 중단되었고 1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전쟁때 입은 피해에다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런던 해군 군축조약으로 브르타뉴급 전함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군함이 1급 전함인 시절을 보내야 했다.

결국 됭케르크급 전함을 만들어서 고속전함 건조에 한 발을 올린 후 리슐리외급 전함을 만들어서 간신히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 우세해졌다. 하지만 2차대전이 터지면서 리슐리외급 전함은 제대로 완성하지도 못하고 계획중인 알자스급 전함도 취소당하면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무너진다.

이와는 반대로 청년학파 시절에도 건함과 운용이 지속되었던 순양함과 구축함 분야에서는 프랑스는 해군 강대국다운 군함들을 필요한 시기에 적절하게 건조해서 운용이 가능했다. 심지어 전간기 시절에 마지노선에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던 시기에도 모가도르급 구축함같은 소형 경순양함급의 대형구축함 겸 지휘구축함을 만들었고 순양함도 라 갈리소니에르급 경순양함알제리급 중순양함을 만들어서 조약의 제한 아래에서 만들 수 있는 순양함중에서는 매우 훌륭한 군함을 건조할 수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번 시간낭비를 거하게 해버리면 프랑스 같은 강대국도 그걸 따라잡는게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이후 건함들이 뭔가 한박자씩 늦어지면서 유사시에 쉽게 써먹을 정도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20년간의 시간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게 한 청년학파의 능력은 진짜로 경쟁국만 좋게 만들어주었다.

5.6. 열강의 조건 충족의 필요성

21세기인 현대 시점에서 프랑스 제3공화국을 본다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패배한 후부터는 프랑스 육군에만 집중투자했으면 1차대전이고 2차대전이고 간에 모조리 쉽게 승리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고 일정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건 당대의 상황을 별로 감안하지 않은 결과론일 뿐이다. 당대의 열강이라는 시스템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실제로는 열강의 지위를 유지하고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해군 전력 건설과 투자는 필수적이었다.

당대의 열강은 오늘날의 강대국보다 원시적이었고 야만적이었다. 톡 까놓고 말해서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를 압도하지 못하는 군웅할거에 더 가까웠다. 그러므로 열강중 누군가가 약화되기만 하면 주변 국가들이 뜯어먹으려고 바로 태세전환하는 것은 상식에 가까웠다.

그리고 열강의 능력을 발휘하려면 원거리에 있는 식민지 같은 거점에 자력으로 충분한 병력을 이동 및 유지가 가능하며 이러한 병력이동을 방해하는 세력을 물리치거나 최소한 견제할 능력이 반드시 요구되었다. 이게 충족이 안되면 강대국이 아니라 그냥 지역강국수준으로 취급받으며 열강회의 같은 곳에 참석할 자격도 없게 된다.

그래서 열강들은 원거리에 병력을 파병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건함 경쟁에 뛰어들며 중간 경유지로 식민지를 확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원양을 항해중에 상대방 해군의 공격으로 수송선과 병력이 세트로 물고기밥이 되기 딱 좋으며 식민지 따위는 모조리 상실하고 국제적인 영향력이 제로에 가깝게 변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승리하였으나 일본 제국 해군은 기습적으로 러시아 해군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괴멸 및 무력화 시킨 후 당시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의 식민지를 경유지로 삼으면서 일본 본토에 근접하는 발트함대쓰시마 해전에서 괴멸시킨다는 난이도 특급의 곡예에 가까운 전투를 진행해야 했다. 전쟁이 일본 본토 근방에서 벌어진다는 홈그라운드 이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원거리에서 무력 투사가 가능한 유럽 열강의 맛을 톡톡히 보았고 간신히 극복한 것이다.

그래서 강대국의 최소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왕국이 해군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같이 중유럽과 동유럽에만 관련성이 높은 내륙국에 가까운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처럼 육군강국도 해군을 육성했으며 심지어 지역강국 수준에도 약간 못미치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도 ABC 건함경쟁이라는 그들만의 작은 건함 경쟁을 실시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의 조계와 같은 작은 식민지 거점에도 포함이나 순양함같은 소수의 해군전력을 주둔시켜놓는 것도 필수요소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키아우초우에 주둔한 막시밀리안 폰 슈페 제독 휘하의 독일 제국 해군 동방함대로 1차대전에서 영국이 본국으로 후퇴하는 동방함대를 잡으려다가 코로넬 해전에서 대참패한 끝에 포클랜드 해전에서 본토함대에서 빼온 인빈시블급 순양전함 2척이라는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한 끝에서야 토벌에 성공할 정도로 고생했다.

만일 이렇게 해군력 강화를 제대로 못하게 되면 바로 다른 국가에게 해군력으로 철퇴를 맞는다. 스페인 제국이 몰락하기 시작하고 미국이 해군력을 육성하기 시작하자마자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순식간에 스페인은 쿠바필리핀, 등을 빼앗기고 순양함 11척과 구축함 2척과 소형군함 6척이 격침당하는 대패를 겪는다. 스페인이 나름대로 해군력 관리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해군력 격차가 나자마자 스페인 본토에 있는 주력함대가 근접하기도 전에 철퇴를 맞고 뚝배기가 깨지게 된 것이다.

심지어 프랑스도 청년학파 이후에 다시 해군력을 재건하는 동안 독일 제국에게 땅을 추가로 뜯겼다. 모로코 위기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당시 독일 제국의 황제인 빌헬름 2세가 해군력을 육성하고 세계 정책을 추구하면서 독일과는 별 연관이 없는 모로코에 있는 기존 영향세력인 프랑스와 스페인을 압박한 것이다. 심지어 1911년의 제2차 모로코 위기에서는 독일 제국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독일인 민간인 한 명을 아가디르에 파견한 뒤 구출을 핑계로 독일 제국 해군 포함 판터 호를 모로코에 파견했으며 프랑스는 여기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미 어뢰정이 무기의 효용성을 대부분 상실했으며 원양항해가 불가능해서 모로코까지 전투력을 유지한 채 도달할 수 없던 상황에서 기존의 구식 군함들과 순양함같은 것으로는 대응 자체가 안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불협상으로 영국이 프랑스를 도와주려고 전함을 현지에 파견하면서 2차례의 모로코 위기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판정승으로 끝났지만 타국 군함을 동원한 댓가가 매우 비싸게 먹혔으며 빌헬름 2세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일부를 독일 제국에게 할양해주었다. 해군력이 약해져서 도저히 독일 제국의 대양함대를 상대할 수 없었기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이렇게 열강이라는 당대 시스템이 틈만 보이면 우호국이건 뭐건 간에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위험성이 높았고 동맹을 맺었다고 해도 동맹의 군대를 동원하게 되면 댓가가 매우 비싸게 들어가며 판정승을 거두었더라도 자력으로 거둔 것이 아니므로 만만치 않은 추가적인 타격이 들어온다. 그러므로 현대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같은 신뢰성 높은 공동방위체계가 없기 때문에 육군국이라고 육군에만 몰빵한다던지 하는 행위를 할 수 없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스로 해군전력의 몰락을 가져와서 열강의 지위에서 프랑스가 밀려날 뻔 하게 만들고 이후의 역사 전개를 망가뜨린 청년학파는 참 답이 없다고 볼 수 있다.

5.7. 신뢰도가 바닥인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이 프랑스 육군에만 몰빵하려면 대영제국혈맹 수준의 튼튼한 동맹관계가 유지되어야 가능하다. 그래야 대영제국이 해군을 담당하고 프랑스가 육군을 담당하는 식으로 분업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면서 1차대전과 2차대전에서 상대적으로 더 유리해지게 된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신뢰성은 바닥이었다. 애초에 영국과 프랑스는 1천여년간의 적대적인 라이벌이었으며 특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하는 시기에는 그냥 프랑스의 불구대천지원수급 적이었고 두 나라의 관계가 그나마 우호적인 시기였던 나폴레옹 3세 시기에도 결정적인 사건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영국은 프로이센 왕국 손을 들어주었다. 애초에 서로간에 신뢰도가 쌓이는 관계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영불협상이 이루어진 것도 영국의 패권을 위협할 정도로 국력이 급상승한 독일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황급하게 손을 잡은 것이라 별로 튼튼하지 못했다.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도 설마 서로 누대의 원수관계인 영국과 프랑스가 설마 손을 잡을까 하고 믿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실제로 영불협상이 체결되기는 했지만 동맹이 아니었다. 영국은 계속 영불협상영러협상이 군사적인 의무를 가지는 동맹이 아니라고 특별하게 강조했다. 그래서 앞서 설명한 모로코 위기 같은 경우에도 영국이 전함을 마지 못해서 파견하면서도 전쟁발발시 참여하지 않겠다는 개소리를 늘어놓을 정도였고 프랑스가 영국 해군을 동원한 댓가를 단단히 지불해야 했다. 그리고 판정승 후에도 독일 제국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 프랑스 식민지중 일부를 떼어주는 댓가도 지불해야 했다.

이건 1차대전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협상국 소리가 나올 정도로 영국과 프랑스는 따로국밥식으로 전투를 진행했으며 결국 전쟁 말기인 1918년에 루덴도르프 공세라는 최후의 위기를 맞이하고 파국 직전까지 몰려서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페르디낭 포슈를 연합군 대원수로 임명하고 상당한 실권을 줌으로서 서부전선 한정으로 지휘권을 통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와중에도 1914년의 국경 전투에서 프랑스는 125만명을 동원하고 벨기에도 11만 7천여명을 동원했는데 영국군은 고작 7만여명이 참전한 주제에 프랑스 해군 전력이 너무 개판이라서 영국의 본토함대가 독일의 대양함대를 홀로 상대해야 한다고 불평불만이 높았던 것이 바로 대영제국이었다. 이쯤 가면 동맹국이라기보다는 공동의 적과 싸우는 공동교전국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그렇게 프랑스 제3공화국의 해군전력이 빈약하다고 욕을 했으면 프랑스의 해군 전력 보강에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열강들끼리 독일 제국 해군의 주력함들을 갈라먹는 협상과정을 길게 늘어뜨리다가 대양함대가 자침해버리자 내심 좋아하는 추태를 보인 것이 대영제국이었다. 프랑스가 1차대전 전에 수립한 주력함 70만 톤 계획안이 전쟁으로 파탄난 것을 뻔히 알고 있었고 전쟁중에 본토 북부가 전쟁터가 되는 등 피해를 많이 입은 프랑스가 저렴하게 해군전력을 재건해서 프랑스 육군에도 투자를 많이 하려면 독일의 군함들이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랬다는 게 참 답이 없다.

그 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따로국밥으로 놀았으며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런던 해군 군축조약, 제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등으로 대영제국은 프랑스를 필사적으로 견제했다. 심지어 제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 시기에는 이탈리아와 일본이 군축조약에서 탈퇴하여 군축조약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필사적으로 해군증강을 하던 시기인데다가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나치 독일을 베르사유 조약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게 한 것도 대영제국이 맞다. 그 와중에 프랑스가 자기 몸 지키려고 리슐리외급 전함의 추가 건조를 계획하자마자 군축조약의 배수량 쿼터를 위반한다고 소리지르는 것도 대영제국이셨다.

이런 점을 종합해본다면 2차대전 직전까지의 영국은 프랑스가 쓸만한 동맹국이어야 하지만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에 도전할 능력은 전혀 보유하지 않아야 하는데 막상 전쟁이 터지면 육군은 프랑스가 전담급으로 활약해주면서 해군쪽에서도 프랑스가 쓸만한 전력을 투입해서 협력해줘야 한다는 모순의 극치이자 자국이익만 최대화하는 막장급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뻔히 알 수 있다.

물론 프랑스도 뮌헨 협정 같은 것을 보면 영국과 동급으로 못 믿을 놈들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영국이 프랑스를 유사시의 육군 셔틀로 써먹으려고 하는 동시에 그렇다고 영국 해군으로 프랑스를 보호해주거나 도움을 준다는 것도 아니고 어지간하면 프랑스를 내버리고 전쟁에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계속 보이는 상황에서 대영제국 믿고 프랑스 육군에 몰빵한다는 결정을 내릴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프랑스는 전간기에 없는 돈을 끌어모아서 필사적으로 해군 전력을 자력으로 증강시켜서 최대한 능력을 향상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은 프랑스 제3공화국이 무너지기 전까지 개전 초반에 영국 해군과 협동작전을 하면서 나름 쓸모있게 사용했고 영국 해군도 개전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방해질 넣은 것은 싹 잊은 듯이 행동하면서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노르웨이 침공 작전에서 영국을 보조하거나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 추적에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과 같이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독일 제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이 별로 쓸모 없게 보인 것은 운용 문제지 해군 그 자체로는 쓸만했다. 애초에 영국에게 압박이라도 제대로 가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해군전력은 반드시 보유해야 한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해군 전력 부족으로 인해 영국을 제압하지 못했고 나치 독일도 해군 전력이 미약해서 바다사자 작전을 실제로 수행할 능력이 없어서 영국을 제압하지 못했으며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붕괴되고 비시 프랑스가 수립되지 않았다면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군이 빠져나가며 생긴 전력부족에 시달리면서 말레이 해전같은 패배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청년학파도 프랑스로 접근하는 영국 해군을 어뢰정과 잠수함으로 방어하고 타격을 주며 순양함을 이용한 통상파괴전으로 영국 본토를 고사시켜서 최종적으로 승리한다는 식의 생각을 했지 해군은 포기하고 육군에 몰빵한다는 식의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신무기를 이용해서 저렴하게 영국 해군을 맞상대하려는 것이지 해군 포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서로 신뢰도를 쌓기에는 극한대립의 경험이 압도적으로 더 많은 국가들이었고 서로 신뢰도가 제로에 가까운 수준이었으며 단지 독일을 상대하기 위해 서로 손을 살짝 잡은 정도의 공동교전국에 가까웠다고 보면 된다. 영국과 프랑스가 진정한 동맹관계가 된 것은 2차대전이 끝난 이후였다.

그러므로 신뢰도가 없다시피 하는 대영제국을 믿고 프랑스가 해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몰빵한다는 것은 당대의 인물중 누구도 선택할 수 없는 방안이었다. 후대의 사람들이야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라는 평가를 할 수 있고 결과론적으로는 그 말이 맞지만 당시의 상황이 저렇게 답이 없는 지경이니 방법이 없었다.

청년학파가 비판을 받는 것도 이러한 위기를 스스로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그냥 정상적으로 영국과 같은 길을 걸어가면서 적당한 수준으로 해군을 육성하면 검증 안된 신무기에 몰빵했다가 해군 전력을 말아먹고 그걸 무리수를 써서 복구했지만 한박자씩 늦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프랑스 육군 양성에도 지장을 주는 위기의 연속을 맞이하지 않았을 수 있었을 것이다.

6. 반론

프랑스가 바보여서 이 문제 많은 전략을 오랜 기간 유지했던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 프랑스는 적대적인 독일 제국과 국경을 맞댄 상태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새로이 탄생한 통일 독일은 경제, 인구 및 육군 전력에 있어 프랑스를 추월했다. 심지어 프랑스는 1871년에 알자스-로렌을 상실하면서 자연장벽인 보주 산맥라인 강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독일 제국군은 평시에도 라인 강 서안 프랑스 국경에 자그마치 4개 군단을 박아놨고, 보주 산맥 위에서 파리 분지를 감제했다. 국경으로부터 수도 파리까지는 방어선을 삼을 만한 지형지물이 부족했다.[3] 이는 자연스럽게 국경을 방위하는 프랑스 육군의 부담이 전에 없을 정도로 늘어났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프랑스는 우세한 적을 맞아 열세한 국력으로 구멍 난 기나긴 육상 국경을 메워야 했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프랑스에게 필요한 것은 전함이 아닌, 당장 동원 가능한 더 많은 육군 장병들과 야포들, 그리고 견고한 요새들이었다. 아무리 해군 전력을 고르게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한들, 주적과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패가 육상에서 결정될 것이 명백하다면 최대한 해군에 들어갈 여력을 아끼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다. 당장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만 하더라도 프랑스 해군이 독일 해안선을 봉쇄했지만, 막상 전쟁의 승패는 해상에서의 우위와는 상관없이 육상의 스당 전투에서 결정되었다. 스당의 전훈은 프랑스가 청년학파 건함사상을 도입하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였다.

따라서 청년학파의 전략을 통해 최소한의 해안 방어 체계만을 구축한 채 남는 여력을 전부 육군에 투자하는 것이 독일 육군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해군이야 어쨌건 프랑스의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다. 실제로, 이렇게 여력을 최대한 쥐어짜내며 유지했던 프랑스 육군은 1870년 스당에서와 달리, 1914년 여름의 독일군 공세를 제1차 마른 전투에서 기어이 돈좌시켜 버리는 것으로 그 값어치를 입증했다. 결론적으로 청년학파 전략은 해군 전략 그 자체로써는 문제가 많을지 몰라도, 역사적으로 당대 프랑스의 상황에서는 이를 채택하는 것이 어느 정도 불가피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멀리 갈것도 없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가 단기간에 패배했던 이유들 중 하나로 대부분의 국방예산을 육군에 몰빵했던 독일 국방군과는 다르게 안 그래도 대공황여파로 예산부족에 고통받는 상황에서 해군에도 상당한 예산 소모를 강요당한것도 꼽는다. [4] 전간기 프랑스군은 상당한 규모의 해군을 유지시켰고, 당연히 이는 육군력 강화에 방해가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침공의 승패 역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시기와 마찬가지로 해군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100% 육지전으로만 승패가 갈렸다.

또한 해외 식민지들을 방위해야 하므로 해군이 필요하다는 주장 역시 당시에는 프랑스인들에게는 배부른 소리였다. 1880년대 프랑스 식민제국의 확장은 당대 수상 겸 외무장관 쥘 페리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었다. 막상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은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정부의 식민정책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좌파는 식민정책에 너무 많은 지출이 발생한다고 여겼으며, 우파는 무능한 정부 놈들이 알자스-로렌 문제로부터 국민들의 눈을 돌리려는 얕은 수작질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극우파들은 "우리는 2명의 아이(알자스-로렌)를 잃었는데 정부는 20명의 하인(식민지)를 두고 있다"며 정부를 공격했다. 당대 프랑스 국민들의 외교적 제1 관심사는 식민지가 아니라 독일, 그것도 그들로부터 빼앗긴 자국 영토인 알자스-로렌을 되찾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강대한 해군이 아닌 강력한 육군이었다.

반대로 동시대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야말로, 자국의 안보 상황에 적합하지 않음에도 무리해서 대양해군을 건설하다 국가안보를 망쳤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경우 프랑스와 러시아에 양쪽으로 포위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겨냥하며 무리한 건함 경쟁을 일삼은 끝에 적을 하나 더 늘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경우, 넓은 육상 국경과는 대비되는 좁은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오트란토 해협의 입구만 막으면 해안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 이상의 대해군을 유지한 대가로, 실제 주적인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상대하는 데 필요한 육군 전력 강화에 악영향을 겪었다.

7. 현대전의 비슷한 사례

19세기의 구형 어뢰정 → 20세기의 어뢰정 → 미사일 고속정지대함 미사일

비슷한 사례는 현대전에서도 존재한다. 구축함의 출현으로 몰락한 프랑스의 어뢰정과 다르게 세계대전에서도 어뢰정은 출현하였다. 현대전의 어뢰정은 1935년 이후 더욱 빠른 속력과 강력해진 어뢰로 인해 나름 성과를 거두었으나 생산된 척수에 비하면 여전히 별다른 활약을 할수 없었다.

주요 해전이 벌어진 태평양 전쟁을 잘 살펴보면 왜 어뢰정이 활약할 수 없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미군 함대와 일본군 함대는 어뢰정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해역에서 해전을 벌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거의 항상 어뢰정의 천적 구축함들이 함께 돌아다녔다. 일본 제국연합함대도 어뢰정을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했으나 점감요격작전에서 예상한 것과는 달리 어뢰정같은 소형군함이 항행하기 어려운 원양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결국 구축함이 산소어뢰를 탑재하고 수뢰전에 돌입해야 했다. 그리고 이미 해전의 대세는 항공모함의 항공전으로 넘어가던 추세였고, 함재기의 기총소사조차 견디기 힘든 어뢰정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다.

물론 아예 쓸모없진 않았고 어쨌든 연안방어에는 잘 써먹기도 했으며 비스마르크해 해전 같은 곳에서도 간간히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신형 어뢰정들도 19세기의 어뢰정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병기인 대함 미사일이 출현하면서 몰락하였다.

이 대함 미사일을 장착한 미사일 고속정은 '에일라트 쇼크'라는 충격을 주며 임팩트있는 출현을 하였지만 다시 대함 미사일을 격추할 수 있는 대공체계를 갖춘 대형함들에 저지당하고 시 스쿠아 미사일 등 고속정을 격파할 수 있는 경량 대함 미사일을 장비한 대잠헬기들에 학살당하며 몰락했다.

여기서 고속정들이 대함 미사일을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식의 군함이 되려면 배수량이 엄청나게 늘어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미 고속정이 아니다.

대공호위함의 결정체는 바로 위상배열 레이더와 스탠다드 미사일을 운용하는 이지스함이다. 이지스함이 되고 싶다면 최소한 7천톤 이상의 배수량을 갖추어야 하고 자신만을 방어하려고 최소한의 요격장치를 가지려고 해도 3,000톤급 이상의 배수량을 갖추어야 크고 무거운 레이더와 대공 미사일 등 각종 무기체계를 탑재할 수 있어 대함 미사일이나 항공기를 격추하기 용이하다.

그러나 미사일 고속정은 주력 무기인 대함 미사일을 장착하면 배수량이 거의 안 남기 때문에 대공기관총을 거치하는 것이 고작이고 중장거리 대공방어체계를 구성하기에 매우 요원하다. 따라서 고속정보다도 날렵한 대잠헬기나 고정익 항공기 입장에서는 둔한 고속정을 마음놓고 신명나게 팰 수 있는 것.

이처럼 소형함은 신기술이 출현할 때 단기간의 선점은 가능하지만 이후에는 통상 대형함에서도 유사한 체계가 장착돼 몰락하게 된다.

해군의 싸움을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무조건 큰 놈이 이긴다."라고 할 수 있다. 단기간의 전투에서 대형함들이 물먹은 적은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항상 대형함들이 승리해왔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대형함의 대표주자인 전함이 몰락했다지만 이는 거함거포주의가 사장된 것일 뿐 큰 배가 유리하다는 대전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대형함의 대표주자인 전함이 몰락했다고 하지만 그 위상을 대체한 항공모함은 전함 이상으로 크다. 그러니까 거함거포주의가 사장되었다는 것과는 별개로 해전에서는 무조건 큰 배가 무조건 유리하다는 전제는 여전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대포' 라는 구시대의 무기체계가 '미사일과 함재기' 라는 새로운 무기체계로 대체된 것일 뿐이고, 이 새로운 무기체계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큰 배일수록 유리하다는 전제는 여전한 것이다.

그리고 2차대전 시기까지는 전함도 아직 효용성이 높았다. 거포를 장비했기 때문에 통상적인 수상함선과의 교전에서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구축함이나 순양함은 전함 근처에 얼씬도 못했다. 전함이 퇴물 취급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함과 동일한 역할을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항공모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조차도 30기 정도 싣는 소형 호위항모 정도가 투입할 수 있는 뇌격기급강하폭격기는 신형 전함의 경우에는 탑재한 수많은 대공포로 막아낼 수 있었다. 순수 해전에서 전함을 잡으려면 최소한 전함에 맞먹는 수만톤급 정규항모가 필요했다.

대전 이후 해전의 주역이 된 항공모함잠수함에도 거함주의는 유효하다. 항공모함은 덩치가 클수록 많은 항공기를 운용할 수 있고, 잠수함은 항상 협소한 공간으로 인한 문제에 시달리니 말할 것도 없다.

또한 현대 수상전투함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구축함은 과거의 순양함에 비견될 만한 배수량을 갖춰 더 이상 과거의 구축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래서 현대의 구축함은 더 이상 소형함으로 치지 않으며 주력함으로 분류된다. 과거의 구축함들이 맡던 역할은 호위함으로 불리는 프리깃과 고속정들이 담당하고 있다. 좀 비꼬아 말하자면 전함의 도태 이후 항공모함을 제외하면 구축함이 주력 전투함, 순양햠이 최대 전투함의 위상을 차지했다고 하더니 어느새 그 배들이 조금씩 커져서 옛날 전함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수준까지 커졌다고 할 정도.

이렇게 해군이 더 큰 배를 추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배가 클 수록 작전 반경이 커지고 더 많은 무장을 탑재할 수 있으며 더 두터운 장갑을 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군의 역사는 대형함 발전의 역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해군 뿐만 아니라 육군이나 공군에도 얼추 통용되는 법칙이다. 전차나 전투기도 크면 클수록 무장과 장갑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다만 중력과 비행력의 한계 때문에 크기 발전에 제약이 있을 뿐이다. 같은 이유로 해군 역시 10만 톤 정도가 한계이고, 수십만 톤 급의 과도한 크기는 역시 지양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현재는 소형함을 주력으로 굴리는 국가는 주변국들의 국력이 약한 곳이나, 아니면 국제적으로 재재를 받는 국가들로 한정되어 있고 경제력이 여유가 있으면 되도록 대형함을 1척이라도 운용하는 경우가 많다.

21세기 들어서 각종 대함 자산을 이용해 고속정들이 대형함을 몰아낼 수 있다는 A2/AD 전략 이론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거함거포주의의 기세가 드높던 시절에도 해안포 1문은 동급의 함포 3문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 상식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함선이라는 제한된 기반에 비해 육지를 기반으로 할 때 훨씬 강력한 위력의 무기체계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육지 기반 무기체계는 함대와 같은 전략적 기동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 역시 당연한 말이다. 물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해안포와 견시수가 담당하던 역할을 21세기 초에는 대함미사일과 항공기, 레이더가 담당하게 됨으로써 '해안 접근 거부'가 미치는 거리 자체는 훨씬 길어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거리가 함대가 가지는 전략적 기동성을 무의미하게 만들만한 거리라고 할 수는 없고, 따라서 구도 자체는 딱히 변했다고 보기 어렵다.

결국 특정한 상황에서는 해안의 방어거점과 연계한 연안해군이 대형함으로 편성된 함대에 대해서도 강력한 저지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이는 이미 널리 알려져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다.[5]

8. 관련 외부 링크

9. 관련 서적

10. 관련 문서



[1] 머핸급 구축함이 앨프리드 머핸의 이름을 따서 지은 함급이다.[2] 1999년 <책세상> 출판사에서 1,2권으로 나누어 번역출판하였다. 현재도 쉽게 구매할 수 있으며, 웬만한 도서관에는 모두 비치되어 있다.[3] 북부 유럽 대평원은 이런 방어선으로 삼을 만한 지형지물이 부족한 편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러시아까지 가는 데도 딱히 앞길을 가로막는 지형지물이 별로 없어서 나폴레옹이 러시아까지 쭉 밀고 들어갔을 정도. 반면 한반도에는 압록강(강동 6주), 대동강(평양), 임진강(개성), 북한산(서울 북부), 한강(서울 남부), 낙동강(부산) 등 작은 땅인데도 방어선으로 삼을 만한 곳이 상당히 많았다.[4] 자세한 사항은 프랑스 침공의 프랑스를 위한 변명 항목 참고[5] 물론 해안선이 복잡한 일부 연안에서는 소형 잠수함이 활동하기 편리한 경우도 있는데, 이와 같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청년학파의 주장과 같이 해안 전력과 연계한 소형함 위주의 전략이 유효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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