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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제국 제2대 황제 | |
로마 제국 제119대 황제 요안니스 3세 Ιωάννης Γ΄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요안니스 두카스 바타지스 ωάννης Δούκας Βατάτζης |
출생 | 1192년 |
동로마 제국 | |
사망 | 1254년 11월 3일 (향년 62세) |
니케아 제국 님페온 | |
재위 기간 | 니케아 황제 |
1221년 12월 15일 ~ 1254년 11월 3일 (32년) | |
전임자 | 테오도로스 1세 |
후임자 | 테오도로스 2세 |
부모 | 아버지 : 바실 바타지스 어머니 : 불명 |
배우자 | 이리니 라스카리나 호엔슈타우펜의 안나 |
자녀 | 테오도로스 2세 |
종교 | 기독교(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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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제들의 부유함은 민의 부유함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매우 부유한 민으로서는 다른 군주에게 봉사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귀속시키는 것을 절대 수용할 수 없는 법이니라."
(아들 테오도로스 2세에게 한 훈계)
(아들 테오도로스 2세에게 한 훈계)
로마 제국 제119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의 잔존국 니케아 제국 라스카리스 왕조 제2대 황제.
선제 테오도로스 1세의 적장녀 이리니 라스카리나와 결혼, 데릴사위 자격으로 제위를 계승했다. 요안니스 3세 이후 바타치스 가문인 그의 부계 혈통으로 계승된 왕조를 바타치스 라스카리스 왕조라고 한다.[1]
2. 치세
2.1. 즉위
요안니스 3세는 바타치스 가문 출신이다. 바타치스 가문은 트라키아 아드리아노폴리스 인근의 귀족 가문이다. 테오도로스 바타치스가 콤니노스 왕조 제3대 황제 요안니스 2세의 막내딸 에브도키아 콤니니와 결혼, 데스포티스에 봉해진 이후 가문원들이 육군 총사령관(Megas Domestikos) 등 군 요직을 맡으며 가세를 확장했다.요안니스 3세는 가문의 배경과 본인의 군사적 능력으로 테오도로스 1세의 딸 이리니 라스카리나와 결혼해 사위가 된 것으로 보이며, 더 나아가 1221년에는 선제의 형제들이 있음에도 후계자로 선택받았다. 불만을 품은 테오도로스의 형제들[2]은 라틴 제국의 로베르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새파란 젊은이인 요안니스는 첫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1224년의 니케아 제국은 예전과 달랐고, 요안니스 3세는 선황제 시절 야전에서 이기질 못했던 라틴 제국을 상대로 13년전에 대패했던 포이마네논에서 보란듯이 승리하였다. 그 기세를 몰아 단숨에 아나톨리아 영토까지 회복한 요안니스는 마르마라 해를 건너 유럽 영토 일부까지 수복했다. 이 영토는 곧 이피로스의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라틴 제국을 완전히 몰락시켰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1225년 안드로니코스 네스톤고스와 이사키오스 네스톤고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요안니스는 동방으로 눈을 돌렸다.
2.2. 대 튀르크 전쟁
요안니스는 동방으로 눈을 돌린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수도를 니케아에서 니케아 황제의 겨울 별궁이 있던 님페온으로 옮겨버린다.[3] 아나톨리아의 경제적 중심지인 이오니아에 위치한 도시이자, 대 튀르크족 방어를 위한 중요한 거점이며, 동시에 황가인 바타치스 가문의 영지이기도 한 님페온으로의 천도는 니케아의 경제적 중심인 메안드로스, 에르모스, 카이스트로스의 3강(江) 유역을 중요시하며 황제의 권위를 확고히 함에 더해 튀르크족에게 더 이상의 서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황제 본인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1226~7년 곧바로 룸 술탄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해 트라키시온에서 카이쿠바드 1세의 룸 술탄국 군대를 격파하여 그들을 메안드로스 계곡 상류로 쫓아내 트리폴리스를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거기에 아나톨리아의 올림포스 산에 정착한 우즈 튀르크멘족 또한 니케아-룸 술탄국 사이의 무인 지역으로 쫓아내버리는 성과를 낸다. 이후 1229년까지 카이쿠바드 1세와 요안니스 3세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다 몽골 제국에 밀린 호라즘 왕조의 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아나톨리아를 침범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룸 술탄국은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고 호라즘 군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여파로 몽골 제국군의 진격이 가속화되면서 이를 막아야되는 상황에 놓이자 니케아 제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하고 마침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불가리아 제2제국에게 패해 몰락하면서 유럽 쪽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겠다 판단한 요안니스가 받아들이면서 평화협정이 체결된다.2.3. 패권을 확립하다
1241년이 되면서 요안니스는 곧바로 경쟁자중 하나였던 이피로스의 데스포티스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니케아로 초청했다. 물론 이는 그를 포로로 잡아두기 위한 계략이었고 그는 이듬해 여름에야 니케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동안 또 하나의 빅 찬스가 있었으니 바로 몽골의 아나톨리아 침공이었다. 이 원정으로 말미암아 쾨세다 전투에서 룸 술탄국이 패배해 완전히 몰락하고 트라페준타 제국도 몽골에게 갈려나가면서 아나톨리아의 경쟁자가 둘이나 사라지게 된 것이다. 처음에 요안니스는 몽골을 경계하면서 룸 술탄국에 소수의 지원병력을 보내기도 했으나 기적같이 몽골은 룸 술탄국과 트라페준타 제국만 갈아버린채 그 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니케아 제국은 몽골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요안니스는 불가리아으로 관심을 돌렸고 역시나 몽골에게 짓밟힌데다 차르 칼로얀이 죽고난 후 혼란을 겪고 있던 불가리아도 그에게 무릎을 꿇게 되어 요안니스는 마케도니아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거기에 테살로니키 제국이 항복하면서 남은건 이피로스 뿐이었는데, 이피로스의 지역 특성상 장기전이 될 것을 우려해 우호조약을 체결했지만 앞에서 언급한 테오도로스가 충동질을 일으켜 우호조약이 박살나 버렸고 이에 단단히 화가 난 요안니스가 1253년에 이들을 격파하고 이피로스가 불가리아에게서 뺏은 영토를 다시 가져간다. 테오도로스는 감옥에 갇힌 채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고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아들과 요안니스의 손녀딸이 결혼하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된다.[4]2.4. 도시를 눈앞에 두고
몽골의 침략으로 대부분의 경쟁자들이 힘을 잃게 되고 이피로스도 고개를 숙이면서 이제 요안니스에게 남은 것은 도시, 즉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뿐이었다. 라틴 제국은 포이마네논 전투에서 박살난 것을 아직 회복하지 못했기에 더욱 적기였다. 실제로 1235~6년 당시 한 번 공격을 시도했다가 장 드 브리엔의 악전고투와 라틴 제국의 자리에 적성국이 생기는 것을 우려한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실패했던 적이 있었기에 더욱 절박했다. 열정적으로 원정을 준비했던 그였지만 고질적인 간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그는 간질로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62세 였다.요안니스 3세가 죽은 직후의 니케아 제국, 사실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하면 4차 십자군 직전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
3. 경제
그의 시대에는 장인이었던 테오도로스 1세가 착실히 키워놓은 제국도 있었지만 그 역시도 그 경제를 확실하게 되살린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는 요안니스 본인이 검소했기에 가능했다. 우선 그는 황실 직속 토지 외에는 일절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5]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에 이런 정책이 자칫 군대를 약화시킬 수 있지 않느냐고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시민의 부유함이 궁극적인 국가 방위의 근본임을 알았기에 세금을 걷지 않는 대신 자신부터 검소한 생활을 하여 모범을 보였다. 단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위해서는 서로 희생하는 게 있어야 한다면서 외국에서의 사치품 수입은 일절 금지했고 자급자족 생활을 권장했으며, 요안니스 본인이 직접 농장을 운영하여 살림에 보태 썼다. 농장에서 나온 계란을 팔아 그 돈으로 보석을 사서 작은 왕관을 만들어 공식 석상에서 아내 이레네에게 선물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황제의 검소함은 제국의 경제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4. 평가
동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황제 중 하나이다. 장인 테오도로스 1세가 니케아 제국을 양면 전선으로부터 기적적으로 보존해냈다면, 그는 이를 바탕으로 옛 동로마 세력을 거의 재건하는 데에 성공했다. 생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지만, 사실상 그의 덕망과 재능으로 13세기의 결정적 위기를 타개해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헛되게, 바타치스 라스카리스 왕조는 미하일 8세에게 찬탈당하였으며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요안니스 4세는 눈을 뽑히고 유폐된다.5. 대중매체에서
대체역사물 몽골에서 유럽까지에서는 주인공과 협력 관계로 나오며 그덕에 원역사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콘스탄티노플 수복에 성공한다.동로마를 다시 위대하게에서는 요안니스 두카스의 손녀사위로 임명되어 원역사처럼 테오도로스 1세의 사위가 되지는 않았다. 단, 아버지인 바실리오스와 테오도로스 1세가 이 세계관에서는 주인공의 신하로 활동했기에 그 뒤를 따라 몽골과의 전쟁에서 주인공과 함께 활약한다.
동로마의 황제로 회귀하다에서는 주인공인 요안니스 4세가 너무 어릴 때 죽어 언급만 되는데, 그 대우가 썩 좋은 건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각종 위대한 업적 때문에 유력 귀족들에게나 지방민들에게나 성자 대우를 받으나, 황태후로 있던 안나(본명은 콘스탄체 호엔슈타우펜)를 버려두고 그 시녀를 정부로 삼는 등 사생활에 흠이 있었다는 언급과 함께 연애관을 놓고 외동아들인 테오도로스 2세와 벌인 대립이 그 친우인 아크로폴리티스의 서신 폭로로 주인공에게 까발려지는 등 수난 아닌 수난을 겪는다.
5.1. 게임에서
- 크루세이더 킹즈 2: 니케아 제국 황제로 플레이할 수 있다.
-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에 추가된 1229년 시나리오에서 니케아 제국의 국왕이다.
능력치 | 특기 | 병과 적성 |
정치 67, 전투 69, 지모 57 | 등용, 기동, 돌격, 화공 | 보B 궁C 기A 수B |
부하로 룸 셀주크의 술탄이었던 케이쿠바드[6]를 두고 있으며, 능력치와 특기도 괜찮아서 초반 러시로 라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어서 아이유브 왕조도 정복하면 문화도가 높은 도시를 초반에 세 곳 갖고 시작하기에 이후 플레이가 편하다. S급이나 A급 장수은 아니지만 같은 시나리오에서 주변에 능력치가 더 좋은 왕도 없다. 라틴 제국 황제인 보두앵 2세는 능력치가 삼국지 시리즈의 유선 수준으로 낮고, 헝가리와 폴란드는 서로 싸우기 바빠서 콘스탄티노플을 노리지 않으며 시나리오 3에선 능력치 좋은 장수나 왕도 없고, 키예프 루시는 문화도가 낮아서 장수의 질도 낮기에[7] 게임에서 라틴 제국 이후에 실질적인 위협은 아이유브 왕조가 된다.[8] 불가리아의 왕이었던 이반 아센은 능력치가 요안니스와 비슷하지만 징기스칸 4에선 라틴 제국 소속이며, 라틴 제국을 미는 김에 장수로 등용하면 도움이 된다.
하지만 AI가 맡을 경우 항상 라틴 제국과 아이유브 왕조 사이에 끼여 멸망해서 시나리오 4의 오스만 제국처럼 사람이 잡을 때와 컴퓨터가 잡을 때의 격차가 크다.
미디블2: 토탈 워의 모드인 SS모드에서는 후계자로 등장한다.
토탈 워: 아틸라의 거대 모드인 Medieval Kingdoms Total War 1212 AD에서는 니케아 제국의 귀족 중 1명으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많은 유저들이 원역사대로 사위로 삼아 후계자로 지정하는 경우가 많다.
[1] 새 왕조를 개창한 것이 아니라, 선제의 데릴사위 자격으로 제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후손의 첫 번째 성은 모계 혈통 라스카리스이며, 왕조도 라스카리스 왕조이다. 바타치스 라스카리스 왕조는 후대의 역사 용어이다.[2] 테오도로스의 동생들인 알렉시오스 라스카리스, 이사키오스 라스카리스이다. 이들은 1224년 라틴 제국의 지원을 받고 요안니스 3세에게 대항했으나 실패하였다.[3] 사실 니케아가 라틴 제국과 지척이라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전부터 님페온에서 주로 머물고 있었는데 이걸 정식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여름철에는 근처의 스미르니나 마그니시아에서 머물기도 했다.[4] 출처:네이버 블로그 아마추어의 장(물의 백작 블로그)[5] 걷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아 환급해 주었다.[6] 잘랄 웃 딘 밍부르누를 물리친 사람이다.[7] 1240년대 무렵에 등장하는 알렉산드르를 제외한 나머지 사실 장수들의 능력치가 낮고, 문화가 낮아서 가상 장수의 질도 낮다.[8] 징기스칸 4에서 컴퓨터가 조종하는 아이유브 왕조와 맘루크 왕조는 바그다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항상 콘스탄티노플부터 공격한다. PK에서는 중간에 니케아와 부르사도 같이 공격해서 니케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극초반에 콘스탄티노플을 먹고 다마스커스를 확보하지 못하면 난이도가 어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