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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지도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전 알자스와 로렌 레지옹들의 데파르트망을 보여주는데, 본문이 다루는 역사적 지명 알자스-로렌은 이 중 노란선 이동, 모젤(Moselle, 57번), 바랭(Bas-Rhin, 67번), 오랭(Haute-Rhin, 68번)을 일컫는다.
프랑스어: Alsace-Moselle (알자스-모젤)[1]
독일어: Elsaß-Lothringen, Elsass-Lothringen[2] (엘자스-로트링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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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자스기 | 로렌기 |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주요 분쟁 지역이었다.
2. 범위
밖에서는 알자스-로렌으로 통칭하고 있지만, 주의할 점은 우선 알자스와 로렌은 고대 시대부터 대체로 분리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로렌 지방 역시 3개 가톨릭 주교령 지역과 로트링겐 공국 지역의 역사가 다르다. 실제로 알자스-로렌 지역은 자세히 따지고 들면 훨씬 복잡하지만 크게 알자스와 로렌 2개 지방으로 나뉜다. 19세기를 기준으로 로렌 지역의 대다수는 사실상 프랑스화되어 있었지만[4] 알자스 지역은 독일계 주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근대 이후 20세기까지 독일과 프랑스의 직접적인 분쟁이 되었던 지역은 1871년 독일 제국이 병합했다가 1918년 프랑스가 다시 차지한 '독일제국령 엘자스 로트링겐'(Reichsland Elsaß-Lothringen)이며, 위의 지도에서 노란선을 경계로 그 오른쪽에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알자스 로렌 지방들의 절반을 좀 넘는 크기로, 알자스 지역의 대부분(93%)과 로렌 지역의 일부(26%)를 포함하고 있다.[5] 프랑스어권인 메스와[6] 독일어권인 스트라스부르가 함께 넘어간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국경선에는 언어적, 지리적, 행정적 연고가 전혀 없었지만, 독일의 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적 의식과 12만 대군에 상당한다는 메스 요새의 전략적 중요성이 맞물리면서 독일어권인 알자스와 전략적 요충지인 메스 등 로렌 일부가 같이 할양된 것이다.
3. 중요성
3.1. 경제적 측면
라인 강과 보주 산맥 사이에 있는 알자스는 기후가 온화하여 포도주를 비롯한 농산물과 목재가 풍부하고, 알자스 북서쪽에 위치한 로렌은 평야 지역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로렌 지방은 석탄과 철광석 때문에 주목 받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철광석의 90% 이상이 알자스-로렌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인접한 독일의 루르, 자르 지역은 독일 석탄의 50% 이상이 매장된 대표적인 석탄 생산지여서, 양 지역의 철광석과 석탄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두 나라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끊임없는 충돌로 이어졌다.
- 이종민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유럽연합을 탄생시킨 철강자원 쟁탈전에서
간단하게 말하면 꿀땅. 프랑스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의 90%가 알자스에서 채굴된다고 하니 말 다했다. 아래의 역주에서도 나오는데, 1913년 독일 철강산업이 필요로 하는 철광석의 35%가 독일령 로렌에서 산출되었다. 로렌의 철광석이 저품위에 인과 황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만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프랑스든 독일이든 이 지역을 상실할 경우 경제계에 미칠 파장은 상당히 클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7]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로렌 지방은 석탄과 철광석 때문에 주목 받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철광석의 90% 이상이 알자스-로렌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인접한 독일의 루르, 자르 지역은 독일 석탄의 50% 이상이 매장된 대표적인 석탄 생산지여서, 양 지역의 철광석과 석탄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두 나라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끊임없는 충돌로 이어졌다.
- 이종민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유럽연합을 탄생시킨 철강자원 쟁탈전에서
독일은 35%였지만 프랑스에는 90%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보다 프랑스의 광물자원이 부족했고, 그렇기에 프랑스에게 더더욱 절실한 땅이다.[8] 덤으로 이곳은 이미 관련 산업시설들이 잘 발달된 곳이다. 즉, 땅만 얻으면 저 풍부한 자원을 바로 개발된 상태로 사용 가능.
3.2. 군사적 측면
알자스와 로렌은 서유럽의 젖줄인 라인 강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 프랑스가 이곳을 점령하면 라인 강과 아르덴 고원이 프랑스 동쪽을 방어하는 천혜의 장벽이 될 뿐 아니라, 라인 강을 관통하는 독일의 교통로를 단절시켜 전략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알자스와 로렌을 점령하면 라인 강을 통해 직접 대서양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링크)즉, 독일 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라인 강을 건너는 수고로움 없이 프랑스 지역으로 진출이 가능하고,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라인 강을 방어선 삼아 프랑스 지역을 방어할 수 있다. 그 유명한 마지노 선도 기본적으로는 알자스-로렌을 독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다.
4. 역사
알자스-로렌이 비교적 동질한 한 지역처럼 다루어지고 있지만, 역사, 문화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 지역이다. 고대 시대부터 약간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가 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으나 프랑크 왕국에서도 다른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로렌/로트링겐은 프랑크 왕국에서도 아우스트라시아에 속해 있었고, 알자스는 프랑크 왕국에 종속되어 있던 슈바벤(알레만니) 지역 중 라인강 이서 지역이었다. 따라서 언어(사투리)도 조금 다른데, 로트링겐(로렌)의 언어는 프랑코니안 방언 계열로 프랑크 왕국의 지배계층인 프랑크족의 언어와 같은 카테고리에 들어가며 현재 라인란트, 자를란트 지방의 사투리와 같은 계열이다. 반면 알자스의 언어는 알레만니 방언(슈바벤 방언)의 일종으로, 남서 독일과 스위스 독일어와 같은 계열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알자스와 로렌은 독일의 다른 부족에 속해 있었다.843년 베르됭 조약 때 로트링겐과 알자스는 일단 중프랑크에 속했다가 855년 중프랑크 왕국이 3분할될 때 함께 '로타링기아 왕국'에 속했다. 그러나 860년대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간의 분쟁지역이 되었다가 870년 메르센 조약에서 최종적으로 독일 왕국의 전신인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프랑크 왕국은 이 땅에 대한 미련을 보이며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하거나 아니면 로트링겐 공작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서프랑크 왕국의 이런 시도는 955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레히펠트 전투 때 마자르족과 로트링겐의 반란을 동시에 진압하면서 완전히 종식되었다.
한편 알자스-로렌은 프랑크 왕국의 분열 후 로트링기아로 통합되었다가, 925년 하인리히 1세가 알자스를 로트링겐(로렌)에서 분리시켜 슈바벤 공국에 병합시키면서 다시 카롤루스 대제 이전처럼 분리되었다.
오늘날 로렌(독일명 로트링겐)은 구 로렌 공국(로트링겐 공국)(로렌영역의 75%)과 3개의 주교령(로렌 영역의 25%)으로 구성된다.
4.1. 동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의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프랑크 왕국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으나, 그의 사후 베르됭 조약(843년)과 메르센 조약(870년)을 거치면서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고, 메르센 조약 이후 알자스-로렌 지역은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아들인 루트비히 경건왕을 거쳐 루트비히의 세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장남인 로타리우스 1세에게 이탈리아 왕국을, 샤를 2세에게는 서부 영지들과 아키텐을, 독일인 루트비히에게는 동부 영지를 물려주었다. 843년 프랑크 왕국 분열 당시 로타리우스 1세의 중프랑크 왕국은 855년 그의 사후 세 아들들에게 다시 분할 상속되었는데, 각각 루도비코 2세의 '이탈리아 왕국', 샤를의 '프로방스 왕국', 그리고 로타르 2세의 '로타링기아 왕국(Lotharingia)'이다. 이 '로타링기아', 또는 '로트링기아'는 로타르의 나라라는 뜻으로 이 지명은 중세 이후 로트링겐(로렌)의 어원이 된다. 현재의 로렌 지역은 당시 '로타링기아'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이 '로타링기아'는 대략적으로 오늘날의 베네룩스 3국과 알자스-로렌, 스위스 서부, 남프랑스 그리고 북이탈리아를 포함하고 있다.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알자스-로렌은 동프랑크 왕국에 귀속되었고 이후 알자스-로렌의 역사는 동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독일 왕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알프스 이북의 로타링기아는 동서로 분리되어 각각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다. 서로타링기아는 오늘날의 벨기에, 그리고 스위스의 서부 지역, 프랑스 남부에 해당하고, 동로타링기아는 네덜란드, 라인란트, 알자스-로렌, 스위스를 포함한다. 룩셈부르크 및 로렌 지방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로망스어권과 게르만어권의 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876년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가 동(東)로타링기아를 병합할 야욕으로 동프랑크 왕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안더나흐(Andernach) 전투에서 동프랑크 왕국의 젊은 국왕 루트비히 3세에게 오히려 역관광당하여 패퇴하고 말았고, 서로타링기아와 동로타링기아가 재통합되어 동프랑크 왕국에 귀속되게 되었으며(877년), 880년 리베몽 조약에서 이것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중세 시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이 확정되었고, 로트링겐(로렌)은 독일의 서쪽 경계가 되었다.
4.2. 독일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서기 899년 나이어린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동프랑크 국왕으로 즉위했고, 때마침 마자르족의 침공이 본격화되면서 동프랑크의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고 지역 방어를 위해 독일 5대 부족 공국[9]의 자치권이 확대되었다. 서기 900년 로트링겐 공작이 신설되면서 로타링기아는 사실상 왕국에서 공국으로 격하[10]되면서 독일의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가 되었다.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독일계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었다. 이에 독일 5대 공작들이 모여 콘라트 1세를 차기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는 독일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제도의 직접적인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로타링기아(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직 카롤링거 왕조가 다스리던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에게 충성하기 결의했다.
918년 유약했던 콘라트 1세가 사망하고 독일 제후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왕을 선출하기 위한 공작들의 회의에서 하인리히 1세는 작센 공작(하인리히 1세 본인)과 프랑켄 공작의 지지를 받았지만 바이에른과 슈바벤 공작의 지지를 받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자신을 반대했던 바이에른 공작과 슈바벤 공작을 무력과 유인책을 함께 사용하여 굴복시킨 후 919년 마침내 독일의 왕을 칭했다. 이로써 동프랑크 왕국이 끝나고 독일 왕국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하인리히 1세는 서프랑크 국왕 편에 붙은 로타링기아를 다시 되찾기 위해 나섰다. 결국 922년 로타링기아는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독일 왕국에 재병합되었다.
로타링기아를 재병합한 하인리히 1세는 형식적으로 존재하던 로타링기아 왕국을 925년 공식 소멸시켰다. 이전까지 중프랑크 왕국의 후계자 자격으로 왕의 지위를 칭할 수 있었던 로트링겐의 군주는 이로써 왕이라는 타이틀을 잃고 로트링겐 공작으로 격하되었다. 또 하인리히 1세는 로타링기아 왕국 폐지와 함께 로타링기아 지역의 가장 동쪽 지역(알자스)을 떼내어 슈바벤 공국에 병합시켰다. 이로써 로렌(로트링겐)과 알자스가 분리되었고, 이때부터 다시 알자스와 로렌(로트링겐)의 역사는 따로 흘러가게 된다.
959년 로트링겐 공국이 남쪽의 상(上)로트링겐 공국(현 로렌 지역)과 북쪽의 하(下)로트링겐 공국(베네룩스 저지대)으로 분리되었다. 오토 1세의 동생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가 통치하고 있다가 브루노 사후 분리되었다. 초대 상로트링겐 공작 프레데릭은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의 누나인 베아트리체의 남편이며, 베아트리체의 모친인 헤드비게는 하인리히 1세의 딸로서 오토 1세와 브루노의 누나이므로, 오토 1세 및 브루노의 조카 사위였다. 이로써 로렌과 베네룩스 3국의 역사가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
베네룩스 지역인 하로트링겐 공국은 이후 1183년 브라반트 공국이 하로트링겐 공국에서 갈려져 나왔고, 1190년 브라반트 공작[11]이 나머지 하로트링겐 영토도 모두 다스리게 되면서 하로트링겐은 브라반트 공국에 흡수되어 소멸되었다. 하로트링겐이 소멸하면서 자연스레 상로트링겐 공국이 그냥 로트링겐 공국(로렌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는 현재의 로렌으로 이어진다.
중세 후반기에서 근세의 시점에서 로트링기아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다시 왕국으로 승격할 뻔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무산되었다. 이것은 발루아 왕가의 방계 종친으로서 부르고뉴 공작[12]이었던 필리프 3세(선량공)과 샤를(용담공)의 노력으로, 백년전쟁 후반기에 필리프 3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아라스에서 필리프의 영국지원을 중지시킨 대가로 샤를이 필리프에게 사실상의 독립을 허용한 일에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저지대(현재의 베네룩스 3국)와 부르고뉴 백작령[13]을 정복하면서 로타링기아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두 발루아 왕가 출신 부르고뉴 공작들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로렌과 알자스로, 샤를은 로렌의 정복에 대한 명분축적과 프랑스-정확히는 루이 11세의 간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목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에게 "로타링기아(부르고뉴)의 왕"이라는 칭호와 대관을 받으려고 시도하였고, 거의 성사직전까지 갔었다.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로타링기아 왕국이 부활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태가 되는 것이었지만, 황제가 대관식에 나오지 않아서 자동적으로 파기되었다. 그리고 점령하려던 로트링겐에서 격렬한 저항에 봉착한 샤를이 후사 없이 전사하면서 완전히 무산되어 버린다.
세력을 키우던 부르고뉴와 샤를을 아니꼽게 보던 루이 11세는 샤를이 전사하자마자 '살리카 법에 따라 남자 계승자가 없으니 발루아 왕실 본가의 당주이자 주군으로서 산하 제후국의 영지를 회수한다'는 명분으로 부르고뉴를 침공, 부르고뉴를 합병하면서[14]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로트링겐을 합병하려던 부르고뉴가 사라지면서, 이후 로트링겐은 신성 로마 제국 산하의 독립된 공국으로 계속해서 남아있게 되었다.
4.3. 프랑스의 점진적인 병합
로트링겐(로렌) 3 주교령 획득 (1552년)그동안 쭉 독일계 국가들의 땅이었던 알자스와 로렌 땅에 프랑스가 처음 발을 디디게 된 것은 1552년이다. 신성 로마 제국이 종교 전쟁에 휩싸여 있던 와중인 1552년,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는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이끄는 독일 신교파 제후들과 동맹(샹보르 조약)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는 전쟁을 지원하는 대가로 로트링겐(로렌)에 존재하는 메츠, 비르텐, 툴 3개의 주교령을 획득했다. 이 3 주교령(전체 로렌 지역의 약 25%)은 가장 먼저 프랑스에 병합되었던데다가, 이 당시는 발루아 왕조 말기라서, 뒤이은 부르봉 왕조 시대, 곧 중앙집권화가 더욱 진전되고 국가 정체성이 강해진 절대왕정 및 앙시앵 레짐 기간을 오롯이 프랑스와 함께했기 때문에, 이미 프랑스 혁명이 그리 머지 않은 200여년 후에 병합된 나머지 로렌 지역(즉 로트링겐 공국)에 비해 빠르게 프랑스화되었다. 이 3개 주교령 지역과 그 주변 로렌 지방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여 알자스-로렌을 재합병할 때 이미 완전히 프랑스 문화권으로 흡수되었고, 이 때문에 당시 독일의 알자스-로렌의 병합을 반대하는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 3개 주교령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어권 서부 로렌 지역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국에 합병되지 않고 프랑스에 남게 되었다.
알자스 중남부 획득 (1648년)
1648년 30년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알자스의 중부 이하(준트가우(Sundgau) 지방. 현 프랑스 오랭(Haut-Rhin) 주)를 병합했다. 스트라스부르를 비롯한 북부 알자스는 계속 신성 로마 제국에 남았다.
알자스 완전 병합 (1697년)
1683년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제2차 빈 공방전이 일어났다. 빈 방어에 성공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주변 기독교 국가들을 포섭하여 신성 동맹을 맺고 패퇴하는 오스만을 뒤쫒으면서 대 튀르크 전쟁(신성 동맹 전쟁)(1683년~1698년)이 일어났다.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들이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을 발칸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신성 동맹의 뒷통수를 때리며 신성 로마 제국의 서쪽 영토, 즉 알자스 지역을 침공하여 9년 전쟁(1688~1697)을 일으켰다. 신성 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손쉽게 알자스를 완전히 병합했다(1697년). 로렌 동쪽의 알자스를 완전히 병합하면서 프랑스의 영토는 로트링겐 공국을 완전히 둘러싸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에 병합된 스트라스부르(슈트라스부르크)와 그 인근의 북알자스 지역은 알자스-로렌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스트라스부르는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발명된 근세 독일 출판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알자스 지역은 라인강을 따라 상류의 스위스와 하류의 라인란트를 연결하면서 경제권이 형성되어 있어 있어 독일 경제권에 포함되어 있었고 특히 슈바벤[15] 및 라인란트 지역과 연계성이 강했다. 때문에 알자스 지역은 20세기초까지만 해도 주민의 대부분이 독일어를 사용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독일계 성을 가진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16]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후 알자스-로렌을 가져간 데 이어 알자스 북쪽으로 라인강을 따라 이어지는 라인란트까지 차지하려 했지만 다른 협상국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로트링겐 공국 병합 (1766년)
프랑스는 30년 전쟁과 루이 14세 시절을 거치며 로트링겐(로렌)을 수차례 침공하였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방어로 로트링겐은 위기를 극복했다. 17세기 이후 로트링겐 공작들은 프랑스의 위협 앞에 바람 앞에 등불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실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로트링겐 공작들은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잘보이기 위해 로트링겐을 비우고 제국의 수도 빈에 오랜 기간 거처하기도 했다. 로트링겐 공작 카를 5세는 아예 오스트리아군의 직업 장군이 되어 대튀르크 전쟁, 9년 전쟁 등 여러 전쟁에서 활약하며 무공을 세우기도 했다. 로트링겐 가문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서녀와 혼맥을 맺기도 했다.
18세기 초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아들이 없어 왕조가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구 프랑크 왕국 계열의 국가들은 살리카법의 전통에 의해 여성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을 발표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하여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순조롭게 물려받기 위해서는 주변 국가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누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될 것인가가 전유럽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마리아 테레지아가 선택한 신랑은 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슈테판(프랑수아 에티엔,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이었다.
로트링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프랑스는, 로트링겐 공작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 상황에 처하게 되자 이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트링겐 공작 슈테판의 결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인 로트링겐 공국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프랑스의 요구는 말도 안 되는 무리한 것이었지만, 카를 6세는 어떻게 해서든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안정적으로 물려주려고 했다. 결국 카를 6세와 루이 15세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로트링겐 공국은 1736년 루이 15세의 장인이자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었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17]에게 주어진 후 그의 사망 후 프랑스에 병합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18] 대신 메디치 가문의 후사가 끊긴 이탈리아 반도의 토스카나 대공국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먹는 것을 프랑스가 용인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영지를 빼앗기게 된 프란츠 슈테판은 당연히 반발했으나 결국 자신의 영지를 포기해야 했고,[19]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이 되었다. 1766년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사망하면서 로트링겐 공국은 프랑스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병합된 지역은 프랑스화가 이루어졌다. 강제적인 프랑스화 정책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라는 국민국가의 일원이 되어 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까지 알자스 대부분과 로렌의 동부 지역은 여전히 독일어 방언을 모어로 사용했으며, 독일 라인강 경제권에 속해 있었다.
4.4. 독일 제국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자세한 내용은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문서 참고하십시오.4.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독일이 그랬듯 알자스-로렌을 합병했다.[20]알자스 로렌 주민들은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을 가졌던 사람과 그 자손에 대해서는 잔류 및 프랑스 국적 취득이 허용되었고, 1870년 이후에 독일에서 이주한 사람 111,915명은 독일인으로 간주되어 1921년 7월까지 추방되었다.[21]
프랑스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반(反)하여 주민선거 없이 일방적으로 알자스-로렌을 강제 병합하자 커다란 반발이 일어났다. 특히 대다수의 주민이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던 알자스 지역에서 반발이 심했다(프랑스화가 진행된 로렌과 달리, 알자스는 언어부터가 독일어가 강세였다. 알자스 독일어는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알자스에서는 프랑스 정부의 성급한 동화정책, 특히 지역의 전통적인 교회학교를 국립학교로 대체시키려는 계획과 독일어 신문을 폐간하려는 시도는 반발에 부딪쳤다.
결국 알자스-로렌은 1920년대에 자치 운동을 전개했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독일에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이 책정되었고, 그 결과 독일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유사 이래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파탄 수준으로 붕괴되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당시 알자스-로렌 주민들이 적극적인 독일 재합병론을 펼치는 대신 일단 프랑스로부터 자치권을 주장하는 선에서 그쳤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라인란트를 노리고 있었고[22], 알자스-로렌의 자치 요구가 결국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의 재병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프랑스 정부는 알자스-로렌의 자치권 요구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결국 알자스-로렌의 자치권 획득 운동은 실패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패주하자, 나치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포함한 북프랑스를 점령하였다. 전황이 좋은 초기에는 전후 유럽을 이끌 파트너로 비시 프랑스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영토적인 합병은 하지 않았다가 1943년 공식적으로 합병했다. 나치 독일은 처음에는 알자스-로렌의 젊은이들의 충성심이 약하다는 이유로 징집은 실시하지 않고 자원 입대만 받았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자 나중에는 징집을 실시했다. 알자스-로렌에서는 징집이 아니라 자진해서 독일군에 입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알자스-로렌의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자진입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프랑스 제4공화국 정부는 이전 정부의 억압적인 강제동화 정책이 알자스-로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음을 거울삼아 강제동화 정책의 철폐를 선언하였고 이는 알자스-로렌 주민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는 데 일조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제4공화국은 세속국가였지만 알자스-로렌은 그 원칙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프랑스에선 독일군 부대에 자원 입대한 자들을 반역죄로 처벌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알자스-로렌 출신이 적지 않았다. 기 사예르의 경험에 따르면 부모 중 한 쪽이라도 독일계인 사람은 처형을 당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입대하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알자스의 주도 스트라스부르 출신의 축구 감독인 아르센 벵거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은 어린 시절 여느 스트라스부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알자스 독일어를 말하며 자랐으며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말했다. 학교에서는 항상 독일에 대한 증오를 가르쳤지만 자라서 독일에 가보니 자신의 동네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4.6. 종합
외부에서는 알자스-로렌이라는 같은 지역으로 묶어서 보고 있지만 두 지역은 차이가 있다. 로렌의 경우 일찍이 프랑스어권이었으며, 때문에 17세기 이후 로렌은 대체로 독일보다 프랑스에 대한 동질감이 더 강한 편이었다. 반면 알자스의 경우 더 동쪽에 있고 라인강에 접해 있다보니 독일어권에 대한 귀속 및 소속감의 정도가 로렌보다도 더욱 높았다. 그 결과 알자스 주민들의 대다수는 20세기 중후반까지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했고, 지금도 스트라스부르를 비롯한 알자스 지역 사람들의 상당수는 독일어에 매우 능통하다. 로렌 지방 안에서도 메스, 베르됭 등 프랑스 본토에 가깝고 16세기에 프랑스에 병합된 지역은 매우 프랑스화의 정도가 높지만 룩셈부르크나 자를란트와 인접한 변경의 로렌 지역에서는 독일어를 쓰는 사람이 많은 경우도 있었다. 또 알자스에서도 남부 지역은 북부에 비해 비교적 프랑스화가 더 진전되었다.로렌의 경우 역사적으로 친프랑스적인 경우가 발견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발루아 왕조의 분가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아예 프랑스의 울타리에서 독립해 나가려던 샤를 용담공의 기도를 로렌의 귀족들이 전쟁을 통하여 좌절시킨 것과(샤를이 전사하기까지 했다!), 기즈 공작 가문으로 기즈 가문은 애초에 로렌 가문 소속이다. 로렌에 본거지를 둔 기즈 가문은 위그노 전쟁에서 프랑스 가톨릭 진영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유명한 잔 다르크 또한 로렌 출신으로[23], 그녀가 전장에서 사용했던 십자 문양은 '로렌의 십자'로 알려져 자유 프랑스가 상징으로 쓰고 다녔다. 다만 중세 유럽은 귀족들과 백성들의 민족 의식이 동질했던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의 사례로 성급하게 일반화해서는 안된다.
근본적으로 알자스-로렌이란 행정구역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별개로 이어져 오던 두개의 지역을 후대에 재결합하여 탄생된 것이다. 알자스와 모젤[24]은 둘 다 동프랑크 제국와 독일 왕국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을 거쳐왔지만, 서로 별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알자스의 경우 거의 독일어 방언을 유지하고 있었고 훨신 나중인 17세기에 프랑스의 일부가 된 반면, 로렌 지방은 물론 독일이 합병한 로렌의 모젤 지역의 상당수도 프랑스에 동화되었다. 알자스-로렌이 독일 제국에 병합되었을 때 모젤 지역의 프랑스인들은 독일 국경 내에 묶이게 되었고 탄압으로 독일통치에 대한 반감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근대 이전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선이었던 알자스 로렌지방은 수백년간 프랑스의 영향과 지배를 받으면서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이미 프랑스에 많이 동화된 상태였고, 프랑스의 고유한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영토의 일부였다. 이를 간파한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알자스-로렌의 병합으로 프랑스의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영구적인 적대국으로 만들 수 있다며 반대했고, 또 프랑스 정부도 알자스-로렌 대신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할양을 제안하며 어떻게든 병합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몰트케와 군부의 반발로 끝내 독일로 병합되었다. 빌헬름 1세나 비스마르크는 애초에 명분은 방어 전쟁이었는데[25] 영토합병을 하면 침략전쟁으로 변질되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된다고 해서 심각하게 우려했고 빌헬름 1세는 당시 영국대사에게 알자스-로렌의 합병은 그저 프랑스의 침략에 대비해서 거리를 버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명했을 정도 였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1차대전까지 프랑스가 알자스-로렌 수복을 위해 칼을 갈고 적극적으로 러시아에 접근하면서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알자스-로렌이라는 분쟁지역이 없었다면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 요소가 현격히 줄었을 것이므로, 어쩌면 역사 자체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즉 이 작은 지역은 19세기와 20세 초반 유럽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쟁점지로 꼽혔다. 현재 알자스-로렌에 대한 인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프랑스 '고유의 영토'라는 입장에서 벗어나고 유럽 내에서 독일도 프랑스도 아닌 고유의 문화 지역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26]
5. 출신 인물
- 기 사예르 - <잊혀진 병사>의 저자. 다만 출생지는 파리이고, 이후 알자스에서 성장했다.
- 니콜라 빌렘 신부 - 안중근 토마스 의사 및 그의 집안과 친밀했던 프랑스인 신부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할 때 고해성사를 집전해 준 신부이다.
- 마리 손탁
- 아르센 벵거 - 축구선수, 감독, 행정가. 아스날 FC의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자 최고의 감독. EPL 유일 무패우승을 기록한 명장이다. 알자스 스트라스부르시 듀틀렌하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동네 사람과 마찬가지로 알자스 독일어 방언을 쓰며 자랐으며, 초등학교에 들어가 학교에서 처음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한다. Wenger 역시 독일계 성씨이기 때문에 프랑스어 표기법인 벵게르가 아닌 벵거로 읽는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27]
- 알프레드 드레퓌스 - 군인. 드레퓌스 사건의 당시자. 알자스-로렌이 독일에 넘어갈 당시에 프랑스로 이주한 실향민이다.
- 에밀 뒤르켕(혹은 뒤르케임) - 사회학자. 성이 독일식인 이유로, 이 양반의 이름을 프랑스식인 뒤르켕으로 부를 것이냐 독일식인 뒤르카임으로 부를 것이냐를 가지고 한국 사회학계가 미친 듯이 싸운 적이 있었다.(★)
- 에밀 발퇴펠
- 에밀 베낭트 - 프랑스의 축구선수
- 파트리샤 카스 - 샹송 가수
-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 - 프랑스의 조각가
- 샤를 뮌슈(Charles Münch, Karl Münch) -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지휘자로 꼽히는 인물.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를 거쳐 프랑스 정부가 창단한 파리 오케스트라의 초대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샤를 뮌슈(칼 뮌히)는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나 자란 후 독일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하여 베르됭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1930년대 초반까지 독일의 명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을 역임했다. 1932년 프랑스 네슬레 그룹의 딸과 결혼한 후 아내의 재력으로 오케스트라를 사서 파리에서 지휘자로 데뷔하였고 이후 프랑스로 귀화했다.
- 스트로브-위예 중 장 마리 스트로브 - 스트로보는 알자스-로렌 지방 메츠 출신으로 국적은 프랑스지만, 독일에서 활동을 주로 했다. 반대로 동반자였던 위예는 파리 출신이다.
- 토미 웅거러 - 동화작가.
- 한스 베테 - 물리학자. 스트라스부르 출생으로 1912년 킬로 이주할 때까지 스트라스부르에서 성장했다.[28] 이후 프랑크푸르트, 뮌헨을 거쳐 튀빙겐에서 거주하다, 나치의 유대인[29] 공직 추방령으로 튀빙겐 대학교 조교수직에서 해임되자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6. 여담
지금은 프랑스 영토지만 독일 문화권이었던만큼 자우어크라우트가 이 지방 요리의 대표격이다. 향토요리 파는 식당 가면 메뉴판에 자우어크라우트 옵션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주민들의 성씨는 다수가 독일계다. 또한 스트라스부르에는 유럽의회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것과 TGV 고속철이 부설된 것을 핑계로 삼아서 그랑제콜이었던 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ENA; 2022년 폐교)가 파리에서 이전해 왔다. 주민들은 프랑스보다는 독일 쪽에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고, 그쪽으로 인적, 물적자원 교류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교통로도 독일과 가까운 편. 실제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자전거로 20분 밟으면 독일이다. 또한 이 지역의 철도는 일반적인 프랑스식의 좌측통행이 아닌 독일식의 우측통행이다. 심지어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 행 루프트한자 리무진 버스가 이곳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독일에 합병되었던 로렌 지역인 모젤 데파르트망, 특히 메스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룩셈부르크[30]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이는 룩셈부르크 국경 쪽 벨기에, 독일 도시들도 마찬가지로 룩셈부르크의 초월적인 임금수준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벨기에에 직장을 가진 경우도 꽤 있다. 이 모젤 데파르트망 지역은 대우그룹이 망하기 전까지는 대우그룹의 공장들이 원활하게 돌아갔던 지역으로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나서 지역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경험이 있다. 특히 벨기에 국경의 롱위 시는 이때 당시 노동자들이 갈 곳을 잃어서 실업난이 꽤 극심했던 편이다. 이후 프랑스 물류기업들이 대거 들어오고 룩셈부르크란 대안을 찾으면서 상황은 나아진 편. 한편 티옹빌(Thionville)을 포함한 모젤 데파르트망의 룩셈부르크 국경지대 근처는 룩셈부르크어 사용 지역이기도 하다.
Strasbourg는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라 '스트라스부르'로 표기하고 있지만, 프랑스 관광청 공식 한국어 페이지에는 '스트라스부르그'라 표기되어 있다.
Metz는 프랑스어로는 '메스'이고 물론 우리나라의 프랑스어 표기법으로도 동일하지만 간혹 해외기사에 등장할 때 독일어식 발음인 '메츠'로 표기될 때가 많다.[31] 현지에서 '메츠'라고 발음하면 현지인들과 갈등 빚을 소지가 많다.(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는 수준이다.) 2016년 4월 7일 프랑스-독일 정상회담 기사 독일과 프랑스 두 정상 양쪽에게 있어 가장 접근하기 쉬운 도시가 메스이다. 파리에서 TGV로 1시간 반도 안 걸리며,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면으로도 TGV노선이 연결되어있다. 파리에서 룩셈부르크를 갈 때도 메스를 거친 뒤 룩셈부르크로 넘어간다. 스트라스부르의 경우 독일 입장에서는 상당히 남쪽에 치우친 도시라 수도나 중심도시들과는 거리거 있는 편이며(다만, 슈투트가르트와는 가까운 편) 파리에서도 TGV 기준 2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애초에 프랑스 동부방면 TGV 노선은 파리 동역-메스-스트라스부르 순으로 지나간다.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하여 브뤼셀까지 가는 노선도 스트라스부르-메스-룩셈부르크-브뤼셀 순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노선에 유럽연합 본부가 세워져있는 도시들이 무려 3곳이나 된다.[32]
스트라스부르 인근 도시인 Entzheim은 프랑스어로 '엔스아임'이라 발음하지만 상술한 메스처럼 독일식 이름인 엔츠하임으로 표기하는 일이 잦다. 이 곳에 있는 공항인 스트라스부르 엔스아임 국제공항도 스트라스부르 엔츠하임 국제공항이라 부르는 일이 잦다. 알자스-로렌 지방의 지명은 철자는 독일식이되 프랑스어로 읽을 때는 프랑스식의 변형된 발음으로 읽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물론 독일식 발음 역시 독일어권에서는 그 지명의 독일어 이름으로 통용된다.
알자스 사투리는 프랑스어의 영향인지 발음체계가 매우 독특하게 변한 것이 특징이다. 본디 독일 남부 사투리는 무성음-유성음 대립보다는 유기음-무기음 대립에 가까운데 무기음만 존재하는 언어의 영향으로 인해 k, g구별을 제외하고 파열음 음운이 애매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p-b, t-d 구별이 안된다)[33]
알자스 지방의 알자스어뿐만 아니라 로렌 지방에도 '로렌 프랑크어'(francique lorrain)라는 방언/언어가 존재한다. 다만 알자스어만큼 사용인구가 많지는 않으며 독일에 합병되었던 모젤 지방의 일부에서만 발견된다. 이외에도 프랑스어를 바탕으로 한 사투리가 존재한다.
2011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 지역에서 농민들에게 연설을 하면서 "프랑스와 독일의 불공정한 거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독일 영토(en Allemagne) 위에 있기 때문이다."[34]라는 희대의 망언을 해 파문이 일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대통령이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발언한 격이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사르코지 대통령도 헝가리계 이민자 출신이라 극우민족주의가 다시 득세하는 프랑스의 정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세계맥주 점 같은데 가면 볼 수 있는 파란색 병의 프랑스 맥주 크로넨부르크(Kronenburg, 프랑스어로는 Cronenbourg(크로넝부르))는 스트라스부르가 원산지이다. 정확히는 주변의 작은 위성도시에 양조장이 존재한다.
프랑스 해군의 설계상 최후의 전함인 알자스급 전함도 이 지역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마탄의 왕과 바나디스의 주인공이 통치하는 지역이 바로 이곳의 이름을 땄다. 다만 현실의 알자스와 달리 자원이 많거나 하지는 않고 그냥 작은 변두리 지역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은 알자스의 소도시인 콜마르를 모티브로 하였다. 콜마르의 작은 시내공간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순간 바로 "아 여기가 모티브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콜마르는 지금은 독일과 프랑스 전국에서 유명해진 '크리스마스 마켓(Marché de Noël)'의 원조인 도시이다. 애초에 신성로마제국 시절 알자스에서 시작된 이 크리스마스 관련 행사가 신성로마제국의 후신인 독일과 알자스를 획득한 프랑스 전국으로 퍼져나가서 지금은 겨울철 독일과 프랑스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주요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위에도 언급 된 내용이지만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 Koi의 만화 주문은 토끼입니까?도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있다.
저먼 셰퍼드의 원산지이다. 다들 독일 개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원산지는 여기.[35] 심지어 영연방권에선 알자티안(Alsatian)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극우 및 인종차별로 악명높다고 한다.
[1]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독일에 편입된 이 지역은 위에서도 보이듯 알자스 레지옹의 대다수와 (모젤 데파르트망 대부분을 포함한) 로렌 레지옹의 일부만을 포함하며 로렌 레지옹의 대부분을 포함하지 않고, 독일의 구 행정구역이자 역사적 명칭이 아닌 지리적 명칭으로는 "알자스-모젤"이라 지칭되었다. 그렇기에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전의 행정구역으로 환원되어 우리에게 알려진 '알자스-로렌'을 총괄하는 행정구역이 유지되지 않기도 했다.[2] "ß"가 1996년 독일어 발음 표기법 개정 반영[3] 독일 제국의 일부였을 때에는 하나의 행정구역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여러 개의 주로 나뉘어져 있는 지역일 뿐이다. 프랑스인들은 그 지역을 묶어서 알자스-로렌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안 부른다.[4] 그러나 모젤 북부의 자를란트, 룩셈부르크 접경 지역에서는 여전히 독일어 방언이 사용되었다.[5] 이 알자스-로렌의 로렌 지방은 대부분 모젤 지방의 일부이기에 전술했듯 이 지방은 프랑스어로는 '알자스-모젤'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된다.[6] 이 도시는 이미 17세기 초에도 프랑스어권에 속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로렌 지방의 독일어권은 점차 독일 국경 쪽으로 밀려났지만, 로렌에서도 독일 국경지대와 그 인근 지역은 로렌 프랑코니아어나 룩셈부르크어 등의 독일어 방언이 통용되는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7] 실제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여 독일에게 알자스 로렌을 빼앗겼던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하여 알자스 로렌을 다시 돌려받기 전까지 철광석이 부족하여 산업화 속도가 굉장히 느려졌었다.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한 때 영국과 자웅을 겨루던 국력이 무색하게 공업력에서 독일의 절반, 경제규모 역시 독일의 60%에 불과하여 농업국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을 정도다. 알자스-로렌의 철, 석탄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전간기에는 프랑스의 제철산업이 빠르게 발전했다.[8] 독일은 오늘날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인 베스트팔렌이나 현재 폴란드로 대부분 넘어간 슐레지엔 주에 광물 자원이 있었다.[9] 작센 공국, 바이에른 공국, 슈바벤 공국, 프랑켄 공국, 그리고 로트링겐 공국[10] 아래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로트링겐 공작과 별도로 로타링기아 국왕 직책도 925년까지는 존재했다.[11] 현재의 벨기에지역으로, 벨기에 왕세자는 브라반트 공작이라고 불린다.[12] 왕자령으로서 받았다.[13] 현재의 프랑스 영토인 프랑쉬-콩테 지역[14] 다만 프랑슈콩테와 피카르디를 제외한 저지대 일대는 막시밀리안 1세의 개입으로 막시밀리안과 결혼한 샤를의 유일한 자식인 딸 마리에게 넘어가면서 프랑스가 합병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15] 알자스는 슈바벤 공국의 일부였고 나중에 일부 지역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진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로 합쳐진다.[16] 스포츠계에서 아르센 벵거, 앙투안 그리즈만 등이 있다. 음악계에서는 에밀 발퇴펠. 샤를 뮌슈 등이 있다.[17] 루이 15세의 장인. 이 양반은 일생이 참 기구한데 대북방전쟁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탈탈 털어버린 스웨덴 국왕 칼 12세가 휴전 조건으로 왕을 갈아치우라고 요구하면서 친 스웨덴 귀족이었던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전황이 북방동맹 쪽으로 기우면서 원래 왕이었던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가 다시 왕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그는 유럽 각지를 떠돌다가 알자스에 머물던 중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를 사위로 맞았다. 프랑스라는 강력한 지원 세력을 얻은 그는 폴란드 왕위를 되찾기 위해 아우구스트 2세 사후 폴란드로 돌아와 2번째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이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주장하며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폴란드를 침공,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결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로 선출되었으며 2번째로 폴란드 왕위를 잃은 장인어른에게 사위가 "위로 겸 남은 여생을 보내시라"고 로트링겐 공국을 영지로 주었다.[18] 스타니스와프에게는 딸만 둘이 있었을 뿐 아들이 없었다.[19]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자네가 로트링겐을 포기하지 않으면 딸과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장인 카를 6세가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20] 독일로 넘어간 모젤 주와 뫼르트 주 일부 지역이 반환되었음에도 프랑스는 뫼르트에모젤 주를 폐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였다. 대신 프랑스는 그 지역을 통합하여 새로운 모젤 주를 신설하였다. 독일로 넘어갔던 옛 보주 주 일부 지역은 바랭 주에 통합시켰고 테리투아르드벨포르 주는 원래 소속이던 오랭 주에 합병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결과적으로 반환 전의 주를 그대로 유지하고 반환된 지역에 새로운 주를 설치한 셈이 되어,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유효했던 프랑스-독일 간 국경이 이들 주의 경계로 남게 되었다.[21]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프랑스는 알자스 로렌을 수복한 후 이곳 주민들을 A, B, C, D그룹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자였던 사람은 A그룹, A그룹에 해당하는 사람의 자손은 B그룹, 협상국이나 중립국 국적의 외국인은 C그룹, 1870년 이후에 독일에서 이주한 사람과 그 자손은 D그룹으로 분류되었고, A그룹과 B그룹은 잔류 및 프랑스 국적 회복/취득을 허용하였으며 D그룹은 추방하였다.[22] 물론 이는 독일의 엄청난 반발, 그리고 미국과 영국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23] 본 문서가 지칭하는 알자스-로렌에 포함되는 지역이 출신지는 아니다. 잔 다르크가 출생한 지역 동레미는 로렌 레지옹에서 독일이 합병한 모젤 데파르트망이 아닌 보주 데파르트망에 속했으며 독일에 합병된 적이 없다.[24] 이 점에서는 독일에 합병된 모젤 지역 외의 로렌(로트링겐) 지역도 해당한다.[25] 독일 통일을 반대하던 프랑스를 굴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예상보다 너무 쉽게 무너져서 독일군과 독일내 여론이 이런 대가를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게 되었다.[26] 독일-프랑스 공동교과서[27] 본인의 정체성을 독일인으로 여겼지만, 알자스-로렌이 프랑스에 반환되어 프랑스 국적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자 프랑스 식민지인 가봉에서 활동하려면 프랑스 국적인 것이 더 편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국적을 프랑스로 바꾸었다. 그래서 슈바이처 박사는 말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여받을때 프랑스인이었다.[28] 그의 아버지는 슈테틴(현 폴란드 슈체친) 출생으로, 다시 말해 스트라스부르 토박이는 아니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생리학 강사로 일하게 되어 스트라스부르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이때 한스 베테가 태어났다. 이후 킬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킬로 이사했다가 1915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하게 되었다.[29] 한스 베테는 유대계이긴 했으나, 유대교 집안이 아닌 개신교 집안이었고 특별히 유대인이라는 자각도 없었다. 당대 유대계 중 비유대인으로 동화되어 유대교를 믿지 않고 유대인이라는 자각 없이 사는 경우는 상당히 흔했으나, 조상 중에 유대인이 있다고 하여 나치에 의해 유대인으로 몰린 경우다.[30] 프랑스어권과 독일어권 모두에 포함되는 나라이다.[31] 프랑스어에 /ts/ 음운이 없기 때문에 그냥 /s/로 읽은게 맞다. 한국인들이 히라가나 'つ'를 '쓰'로 알아듣는 거랑 비슷하다.[32] 소위 '유럽연합 3대 수도(Capitals of European Union)'로, 유럽의회의 스트라스부르, 유럽연합사법재판소의 룩셈부르크, 유럽집행위원회의 브뤼셀이다.[33] 출처(프랑스어)[34] 실수인 것을 인지하고 곧바로 "알자스 위에"라고 정정하였다.[35] 다만 견종으로 확립되었을 때 알자스 로렌은 독일의 영토였고, 품종을 개량한 브리더도 독일인이니 독일의 개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