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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9:35:15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설립자 및 총봉사자
O.F.M.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Franciscus Assisiensis
파일:아시시의성프란치스코.jpg
기도하는 성 프란치스코 |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colbgcolor=#705033,#705033><colcolor=#dccdb6,#dccdb6> 본명 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
(Giovanni di Pietro di Bernardone)
출생 1181년
신성 로마 제국 스폴레토 공국 아시시
사망 1226년 10월 3일 (향년 44~45세)
교황령 움브리아 아시시
학력 산 조르조 성당[1] 교리 학교 (라틴어 / 졸업)
직업 성직자(부제/수도자), 신학자, 시인, 작곡가
종교 가톨릭
소속 작은형제회
재임 기간 작은형제회 설립자 및 총봉사자
1210년~1226년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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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작은형제회 총봉사자
설립 초대
프란치스코 (1210년~1226년) 조반니 파렌티 (1227년~12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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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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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05033,#705033><colcolor=#dccdb6,#dccdb6> 성인명 가톨릭(한국): 프란치스코
성공회(한국): 프란시스
[언어별 명칭]
라틴어: 프란치스쿠스 아시시엔시스
(Franciscus Assisiensis)
영어: 프랜시스 오브 아시시
(Francis of Assisi)
프랑스어: 프랑수아 다시스
(François d'Assise)
이탈리아어: 프란체스코 다시시
(Francesco d'Assisi)
스페인어: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Francisco de Asís)
포르투갈어: 프란시스쿠 디 아시스
(Francisco de Assis)
독일어: 프란츠 폰 아시시
(Franz von Assisi)
네덜란드어: 프란시스쿠스 판 아시시
(Franciscus van Assisi)
그리스어: 프란기스코스 티스 아시지스
(Φραγκίσκος της Ασίζης)
폴란드어: 프란치셰크 즈 아시슈
(Franciszek z Asyżu)
에스페란토: 프란치스코 엘 아시조
(Francisko el Asizo)
러시아어: 프란치스크 아시스키
(Франци́ск Асси́зский)
루마니아어: 프란치스크 데 아시시
(Francisc de Assisi)
체코어: 프란티셰크 즈 아시시
(František z Assisi)
헝가리어: 아시시 페렌츠
(Assisi Ferenc)
튀르키예어: 아시실리 프란시스
(Assisili Fransis)
아랍어: 파란시스 알 아시지
(فرنسيس الأسيزي)
일본어: 앗시지노후란체스코
(アッシジのフランチェスコ)
중국어: 야시시더팡지거
(亚西西的方济各 / 亞西西的方濟各)
시성 1228년 7월 26일
교황령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주례
칭호 하느님음유시인
상징물 프란치스코회 수도복, , 성흔, 십자고상, , 해골
축일 9월 17일[2]
10월 4일
수호 동물, 빈민, 상인, 생태학, 이탈리아, 평화
}}}}}}}}} ||

1. 개요2. 이름3. 생애
3.1. 유소년 시절3.2. 회심과 세속 단절 선언3.3. 작은형제회 설립3.4. 성 클라라 수도회와 제3회 설립3.5. 선교 활동3.6. 말년
4. 기도5. 유명한 일화
5.1. 아시시 평원에서의 설교5.2. 아시시의 장미 가시덤불
6. 동물의 수호 성인7. 대중 매체8. 여담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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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l trovatore di Dio
하느님의 음유시인

–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칭호
이탈리아부제, 수도자, 신학자, 시인, 그리고 작곡가.

그는 생전에 뛰어난 지성과 빼어난 글솜씨를 갖춘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그는 라틴어 작문이 만연했던 당시에 이탈리아어 방언만의 언어적 아름다움을 살린 신비스럽고 미려한 글을 지은 최초의 이탈리아어권 시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그는 겸손한 성품과 포용력 있는 태도를 지닌 것으로도 익히 알려져 있었는데,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지내고 동물들을 소중히 대하는 소박하고 자연 친화적인 자세를 보여 주어 뭇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아울러 그는 작은형제회, 성 클라라 수도회, 프란치스칸 3회의 설립자이자 작은형제회의 실질적인 초대 수장[3]으로서 세속의 욕망을 등진 채 겸양의 마음으로 오로지 신앙과 봉사에 전념하는 청빈한 수도 정신을 전파하는 데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그는 하느님음유시인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기독교 내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회, 그리고 일부 정교회 수도원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10월 4일이다.

2. 이름

이름의 유래는 고전 라틴어 프란키스쿠스(Franciscus, [franˈkis.kus])로 자유로운 사람, 혹은 프랑크족 사람이라는 의미다.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프란치스코라는 명칭은 한국 천주교외국 성인명 등의 한글 표기에 따라 프란키스쿠스를 교회 라틴어식으로 발음한 프란치스쿠스(Franciscus, [franˈt͡ʃis.kus])의 탈격 호칭 프란치스코(Francisco, [franˈt͡ʃis.ko])에서 따온 것이다. 과거 대한민국에서 성인명 표기법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때에는 방지거[4], 혹은 프란치스꼬라고 주로 표기했다.[5]

대한성공회에서는 영국식 영어 발음을 바탕으로 표기한 프란시스(Francis, [ˈfɹɑːnsɪs])로 일컫는다.

3. 생애

3.1. 유소년 시절

프란치스코는 1181년경 스폴레토 공국아시시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Pietro di Bernardone)는 부유한 포목상이었고, 그의 어머니 피카 드 부를르몽(Pica de Bourlemont)은 프로방스 지방 출신의 귀족이었다. 그의 본명 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Giovanni di Pietro di Bernardone)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의 아들 조반니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잠시 프랑스로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어머니가 세례자 요한의 이름[6]으로 세례를 받게 해 지어진 것이다. 한편 아버지는 프랑스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곳에서의 좋은 기억을 기념하고자 자신의 아들을 프랑스인이라는 의미를 가진 프란체스코(Francesco)[7]라는 호칭으로 주로 불렀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프란치스코는 당시 전형적인 부잣집 자제의 면모를 드러냈다. 10대 때 그는 언제나 멋진 옷을 차려입었고, 익살스러운 말솜씨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으며, 자신과 같이 부유한 친구들과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향락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마냥 자신의 이익과 쾌락만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바쁜 아버지를 대신에 옷감을 팔고 있었던 그에게 적선을 부탁했고,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던 그는 자신의 지갑에 들어 있던 모든 돈을 그 거지에게 건네주었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된 아버지는 그에게 불필요한 짓을 하지 말라고 꾸지람했고, 친구들은 그를 조롱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3.2. 회심과 세속 단절 선언

1202년경 프란치스코는 명예로운 군인을 꿈꾸며 아시시 지방의 세력과 페루자 지방의 세력 간의 전쟁에 호기롭게 참전했으나, 머지않아 콜레스트라다 지방에서 포로로 붙잡혔다. 그렇게 그곳의 감옥에 갇혀 지내던 그는 갑작스레 열병을 앓게 되었고, 약 1년이 지난 1203년 아버지가 그의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포로 신분에서 풀려나자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서 병상에 누운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1205년 교황 측 군대를 원조하고자 브리엔 백작 고티에 3세(Gautier III)가 주도한 모병에 지원하기 위해 풀리아 지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것이 훗날 그의 인생을 탈바꿈할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목적지로 가던 도중 또다시 열병에 시달린 프란치스코는 어딘가에서 자신에게 “사람이 아닌 를 모시기 위해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는 신비스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처음에 그는 병으로 신체가 나약해져 발생한 환청이겠거니 하고 가벼이 치부했지만, 여정이 지속될수록 이상하게도 세속에 대한 흥미가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 결국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아시시에 당도했을 때는 그는 이미 세속적 욕구를 완전히 잃어 향락을 추구하는 것을 멀리하기 시작했으며, 그 대신 여생을 온전히 신앙에만 헌신하면서 보내기로 다짐했다.

프란치스코는 집을 나온 후 세속과의 연을 끊는 길을 걸었다. 평소 고향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아무도 없는 음침한 곳에서 홀로 묵상에 전념했고, 로마순례를 떠났을 때에는 그곳의 성당 앞에서 거지들과 함께 구걸을 했다. 그러던 중 그는 특별한 체험을 겪기도 했다. 어느 날 아시시 외곽의 황량한 산 다미아노 수도원 내 성당에서 기도를 하던 그는 “프란치스코야, 무너져 가는 나의 교회를 고치거라(Francisce, vade, repara domum meam, quae, ut cernis, tota destruitur)”고 호소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 말을 무너져 가는 수도원의 성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아버지의 가게에 있는 일부 옷감을 몰래 팔아 번 돈으로 해당 건물을 수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곳의 주임사제가 부당하게 얻은 수익금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자, 프란치스코는 억지로라도 그에게 돈을 쥐어 주고서는 보수 공사를 간곡히 요청한 뒤 이내 자리를 떠났다. 시간이 흘러 그는 그 목소리가 산 다미아노 성당이 아닌 기울어져 가는 가톨릭교회 자체를 되살리라는 뜻임을 깨달았다.

한편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수소문해서 찾기 시작했고, 프란치스코는 이를 모면하고자 산 다미아노 수도원 근처의 동굴에 은둔했다. 그러나 약 한 달이 지나자 배고픔과 피로감에 시달린 그는 밥이라도 구하고자 마지못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결국 아버지의 손아귀에 붙잡혀 집으로 끌려가게 된 그는 흠씬 두들겨 맞은 후 줄에 꽁꽁 묶인 채 자그마한 저장고에 갇혔다. 그렇게 그의 금욕적인 생활은 끝내 저지되는가 싶었지만, 자신의 아들을 불쌍히 여겼던 어머니가 아버지가 자리를 잠시 비운 틈에 그를 풀어 주었다. 기적적으로 해방된 그는 곧장 수도원으로 도망을 갔고, 이러한 사정을 접한 주임사제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프란치스코의 상속권 박탈을 심사하는 재판을 의뢰해 고압적인 방법으로라도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의 고집은 완강했다. 법정에 나선 그는 당시 재판장이었던 아시시교구장 주교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진 뒤 이렇게 외쳤다: “지금까지 저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를 저의 아버지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그에게서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부터 저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와의 절연을 모자라 세속적인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한편 그의 당찬 고백에 감탄을 한 주교는 존경의 표시로 자신의 망토를 알몸인 그에게 걸쳐 주었다.

이후 몇 달 동안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언덕 일대를 떠돌아다니며 동냥질을 했고, 이따금씩 옆 마을의 수도원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이윽고 그는 페루자 지방에 위치한 마을인 구비오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옛 친구의 도움으로 순례자의 옷과 약간의 생활비를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산 다미아노 수도원의 성당을 수리해야겠다는 목표를 품고 있었던 그는 이내 아시시로 돌아가 공사에 쓰이는 돌을 구걸했고, 그렇게 얻은 원자재를 해당 장소로 짊어 옮기고는 직접 벽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점으로 약 2년 간 그는 지난날의 방탕한 삶을 회개한다는 심정으로 산 다미아노 성당을 포함한 마을 주변의 버려진 종교 시설들을 재건하는 데에 힘썼다. 그가 손보아 고친 건물들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산 피에트로 델라 스피나 성당과 산타 마리아 델라 안젤리 대성당의 포르치운콜라 경당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는 한센병천연두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는 데에도 주력했는데, 이들이 모여 사는 집단촌을 종종 방문해 환자 한 명 한 명 정성껏 간호했다.

3.3. 작은형제회 설립

1208년 2월 24일 아침, 프란치스코는 여느 때처럼 포르치운콜라 경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날 설교에는 마태오의 복음서 10장 1절부터 10절까지의 부분[8]이 언급되었는데, 이는 예수가 자신의 열두 제자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도록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곧바로 청빈한 삶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밑단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거친 모직 튜닉을 입고 밧줄을 허리 부분에 두른 후,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여러 장소를 두루 돌아다니며 마을 주민들에게 회개, 사랑, 그리고 평화의 전언을 전파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에 대해 대부분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감명을 받은 이들도 소수나마 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지 않아 11명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그는 이 소규모 공동체를 작은 형제들(Fratres Minores)이라고 칭했다. 이들은 아시시 근교의 텅 빈 한센병 환자 집단촌에 옹기종기 모여 검소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때로는 움브리아 지방 전역을 전전하며 뭇사람에게 설교를 하기도 했다. 이듬해 1209년 프란치스코는 공동체 내 생활 양식에 대해 기초적인 규정이 있어야 함을 인지해 <원회칙(Regula primitiva)>이라는 짧고 단순한 규칙을 만들었다. 원회칙의 주요 골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같은 해 프란치스코는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으로부터 작은 형제들을 정식 수도회로 인준을 받고자 동료들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목적지로 향하던 중 그는 아시시의 주교 귀도(Guido d'Assisi)와 사비나추기경 조반니 디 산 파올로(Giovanni di San Paolo)를 조우했으며, 이 둘에게 공동체가 로마로 향하는 배경을 찬찬히 설명했다. 교황의 최측근이었던 추기경은 그의 결의에 경탄해 인노첸시오 3세와의 알현을 주선했고, 결국 교황은 작은 형제들을 인가하리라 약속했다. 교황에게는 이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가 따로 있었다. 바로 며칠 전 그는 꿈에서 어느 수도자가 무너져 가는 라테라노 대성당[9]을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잠에서 깬 그는 그것이 조만간 자신에게 기울어져 가는 가톨릭교회 자체를 일으켜 세울 귀인이 찾아오리라 예고하는 꿈임을 직감했다. 이로 인해 그가 프란치스코로부터 그의 공동체에 대한 인준을 요청했을 때 다른 고문들이 극히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10] 이를 허락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210년 4월 16일 작은 형제들은 작은형제회(Ordo Fratrum Minorum)라는 이름하에 교황이 공인한 수도회로 발전했다. 새로이 탄생한 조직체는 포르치운콜라 경당을 본거지로 삼았고, 소속된 수도자들은 이탈리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다. 한편 프란치스코는 동료들의 만장일치에 따라 총봉사자[11]로 선출되었으나, 정작 자신이 수장으로서 대접을 받는 것을 원치 않아 오히려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후 그는 부제 서품을 받았다.

3.4. 성 클라라 수도회와 제3회 설립

작은형제회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프란치스코를 초청하고자 하는 목소리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1211년 그가 아시시의 산 루피노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 그 자리에 클라라(Clara)[12]라는 17살의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아시시 일대를 주름잡던 유력 귀족 파바로네 디 오프레두초 델리 시피(Favarone di Offreduccio degli Scifi)의 장녀였고, 18살이 되는 해에 부모님이 추천한 귀족 남자와 원치 않은 혼인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신자였던 그녀는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그처럼 청빈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꾸준히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가 그에게 종교적인 조언을 구했으며, 그녀의 열정을 대견하게 본 그는 언제나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212년 3월 28일 자신의 결혼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클라라는 자신의 고모와 일부 시녀들을 대동하고 부모님 몰래 집을 뛰쳐나가 작은형제회의 거점인 포르치운콜라 경당에 당도했다. 프란치스코는 일행의 방문을 환영했으며, 수도자로 입회하고 싶다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작은형제회는 남자들만을 위한 공동체였기 때문에 그는 신조와 체제가 동일한 여성 수도회를 창설하기로 결정했고, 그 이름을 가난한 자매회(Ordo Sororum Pauperum)로 지었다. 우선 그는 작은형제회의 입회 방식과 똑같이 세속과의 연을 단절한다는 의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으며,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수도복을 준 뒤 새로운 여성 공동체의 본거지를 마련할 때까지만큼은 잠시 근방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녀원인 산탄젤로 디 판초 수녀원에서 머물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클라라의 부모님은 수소문 끝에 그곳으로 찾아갔다. 이들은 훗날 상속받을 막대한 부와 귀족 남자와의 혼인으로 얻을 수 있는 안정된 삶을 언급하며 자신의 딸을 수차례 회유해 보기도 하고 강압적으로 끌고 가 보려고도 했으나 끝내 그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그녀의 완강한 모습에 감명을 받은 몇몇 여자들이 곧바로 그녀를 따르기로 했는데, 대표적으로 그녀의 3살 어린 여동생 아녜스(Agnes)[13]가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머니 오르톨라나(Ortolana)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딸을 따라 수녀의 길을 걸었다.

한편 프란치스코는 예전에 자신이 산 다미아노 수도원 내 성당을 직접 보수하면서 같이 손을 본 자그마한 오두막을 가난한 자매회의 본거지로 정하고, 수녀들을 모두 수용하게끔 작은형제회의 수도자들과 함께 건물을 확장하고 있었다. 다만 공사는 급하게 진행되었는데, 자신의 두 딸을 모두 잃은 아버지가 그의 일가 친척들을 동원해 이들을 되찾고자 수녀원에게까지 피해를 입힐지도 모르므로 그 전에 빨리 완공하고자 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이윽고 확장이 마무리되자 클라라와 아녜스를 비롯한 가난한 자매회의 수녀들은 프란치스코와 작은형제회 수도자들의 도움으로 서둘러 본거지로 이사했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여성 공동체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가난한 자매회는 공동 설립자 클라라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성 클라라 수도회(Ordo Sanctae Clarae)로 명칭을 바꾸었다.

프란치스코와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이들의 검소한 생활 방식과 봉사 정신을 실천하고 싶은 평신도들도 나란히 늘어났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성별에 따라 작은형제회, 혹은 가난한 자매회에 입회했지만, 이미 결혼을 했거나 마음대로 직업을 그만둘 수 없는 신자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에 1209년 프란치스코는 회개의 형제자매회(Fratres et Sorores de Poenitentia)라는 이름의 제3회[14]를 설립함으로써 이들이 작은형제회 및 가난한 자매회의 규범을 따르는 세속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해당 조직체는 1221년 당시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인준을 받음으로써 정식 공동체로 발전했다.

3.5. 선교 활동

그 뒤에도 프란치스코는 선교 활동을 하러 모로코 등지로 가려 했지만 스페인을 떠나지도 못하고 병이 들어 되돌아왔다. 그 뒤 무일푼으로 밀항을 하는 등 3번인가 재시도한 끝에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도달했는데, 마침 가톨릭이슬람 간의 격한 충돌이 있었던 시기였다.

순교를 하느님을 향한 제일의 덕이라 여기던 프란치스코는 일루미나토 수사와 더불어 당당히 붙잡혀, 각종 폭력과 모욕을 당하며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술탄 알 카밀 앞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밝혔고, 술탄은 그 용기가 가상해 일단 그의 말을 경청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기꺼이 순교하여 그리스도교이슬람보다 거룩한 신앙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말했고, 술탄은 정말 그것이 실현된다면 제사장들이나 백성들 사이에서 올 혼란이 염려되어 거절했다. 대신 프란치스코의 태도에 대한 존경심이 든 술탄은 그저 조용히 물러나 달라는 뜻에서 값나가는 선물들을 보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선물에서 신앙의 정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물리고 나왔다.[15]

자신이 선교 활동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거두어들였던 형제들을 튀니지, 그리스, 프랑스, 모로코 등으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특히 모로코에 파견된 5명의 작은형제회 수사(修士)들은 프란치스코회의 첫 번째 순교자(franciscan protomartyrs[16])로 유명하다. 원래는 비탈레 수사가 이끄는 6명이 파견되었는데, 비탈레 수사가 아라곤에서 병이 나서 가지 못하게 되자 성 베라르도 신부가 나머지 4명, 즉 성 피에트로, 성 아주토, 성 아쿠르시오, 성 오토네를 이끌고 세비야로 가 모스크 근처에서 설교하다 잡혀 모로코로 끌려갔다. 아부 야곱이란 이름을 지닌 모로코의 왕 '미라몰린'은 그리스도교에 유화적[17]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석방시켜 그 지역의 가톨릭 신자인 '돔 페드로'의 집에서 살게 했다. 리더인 베라르도 신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랍어를 배워 근처에서 설교했다.

지나가다 이를 본 미라몰린은 돔 페드로를 시켜 5명을 아시시로 다시 돌려보내려 했는데, 귀향하던 5명은 다시 모로코의 마라케시로 돌아가 설교하다 또 붙잡힌다. 미라몰린은 이번엔 체우타로 쫓아보냈지만 다시 마라케시로 돌아왔다. 돔 페드로는 베라르도 신부 일행에게 마라케시에 사는 가톨릭 교우들한테 폐를 끼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고지식한 수사들은 그런 거 모른다. 결국 이슬람의 안식일에까지 거리로 나와 설교하던 베라르도 신부 일행은 그날따라 운도 나쁘게 미라몰린의 매의 눈에 포착됐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미라몰린은 그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심문한 뒤, 수사들의 맹랑한 대꾸에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시미터를 뽑아들어 그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때가 1220년 1월 16일이고, 이날이 성 베라르도를 비롯한 수사 5명의 축일이다. 이들의 시신을 돔 페드로가 포르투갈의 코임브라로 운구했다. 그들의 장례 미사에 참례한 성 십자가 수도회의 수사 페르난도는 이때 자신도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여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 페르난도가 가톨릭 성인 중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다.

또한 이들의 순교 7년 후인 1227년에는 성 다니엘이 이끄는 7명의 수사, 즉 성 사무엘레, 성 안젤로, 성 레오, 성 돔노, 성 니콜로, 성 우골리노가 모로코체우타로 갔다가 온갖 굴욕을 당하고 순교한다. 이들의 축일은 10월 10일. 어쨌든 결국 이슬람 지역 선교 활동은 2번이나 실패한 모로코 선교활동을 비롯하여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가 40세가 될 무렵, 작은형제회는 3천 명이 넘는 거대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에 따라 일부에서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 하자 여러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존 회칙을 재정비했다. 약간 완화된 회칙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인가를 받아 쐐기를 박았다. 그는 수도회 장상직을 사임한 후, 다시 소수 동료들만 데리고 라베르나산으로 떠나 수도생활을 계속하였다.

3.6. 말년

내 형제 죽음이여, 어서 오라.
성 프란치스코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18]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던 1224년 9월 14일 새벽, 프란치스코는 라베르나산에서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 못박힌 케루빔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다섯 상처를 자신의 손과 발, 옆구리에 똑같이 입었다.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성흔이며, 다른 성흔 체험자로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카푸친회 소속이었던 오상의 성 비오 신부 등이 있다.[19] 성흔 현상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그는 이때 이탈리아어로 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포르치운콜라에 온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해질 무렵,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알자 동료 수도자들에게 자신이 걸친 옷을 모두 벗겨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런 뒤 그들에게 요한이 전한 수난기를 읽어달라고 청하고 나서 시편 141편을 읊은 뒤 선종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죽음도 '자매'였다.

시편 141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니 어서 저에게 오소서. 제가 당신께 부르짖을 때 제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저의 기도 당신 면전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손 들어 올리니 저녁 제물로 여겨 주소서.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제 입술의 문을 지켜 주소서.
제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나쁜 짓 하는 사내들과 함께 불의한 행동을 하지 않게 하소서. 저들의 진미를 즐기지 않으오리다.
의인이 자애로 저를 때려도 저를 벌해도 좋습니다. 그것은 머릿기름, 제 머리가 마다하지 않으오리다. 저들의 악행을 거슬러 저는 늘 기도드립니다.
저들이 심판자들의 손에 떨어지면 제 말이 얼마나 좋은지 들어 알리이다.
누가 밭을 갈아 땅을 파헤쳤을 때처럼 저들의 뼈가 저승 어귀에 흩어지리이다.
정녕 주 하느님, 제 눈이 당신을 향합니다. 제가 당신께 피신합니다. 제 영혼을 쏟아 버리지 마소서.
저들이 쳐 놓은 덫에서, 나쁜 짓 하는 자들의 올가미에서 저를 지키소서.
제가 탈 없이 지나가는 동안 악인들은 자기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다음 날 성 조르조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된 후, 1230년 5월 25일 그를 기념하여 지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또한 1939년 이탈리아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0월 3일 저녁 오후 해진 뒤에 성 프란치스코가 숨을 거두었는데, 전례적 기준에 따르면 일몰 뒤라 다음 날로 간주되었으므로 10월 4일을 프란치스코 축일로 정하였다. 지금도 프란치스코회에서는 10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 전이예식(transitus)라고 하여 성 프란치스코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행사를 한다.[20] 전이예식이라는 이름은 성 프란치스코가 그날 지상에서 천국으로 전이(옮겨감)했다는 뜻이다.

그의 사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마하트마 간디는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4. 기도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중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기념일에 가톨릭 교회의 미사 때 바치는 본기도와 시간 전례 때 바치는 마침 기도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로마 미사 경본』 926면,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전자책 링크. 전례문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또한, 성 프란치스코는 살아 생전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 표지를 보거든 이렇게 기도하라고 그의 형제들에게 권고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기에, 저희는 여기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흠숭하나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지향과 동일하다 여겨지는[21] <평화의 기도> 역시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쓰이며 그 내용과 문장의 아름다움으로 종교를 떠나 자주 사용된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태양의 노래>는 성인이 눈병을 얻어 치료를 하면서 지은 것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구술한 것을 다른 형제 수사가 받아썼다고 전한다. 원제는 <피조물의 찬가(Laudes Creaturarum)>였는데 후에 성가로 작곡되면서 <태양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한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경애하는 형제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22]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자매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자매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자매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형제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자매이자 (또한)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자매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최민순 사도 요한 신부 역/엔하위키 미러 편집
<태양의 노래>를 소재로 만든 성가 <태양의 찬가>.

성인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심지어는 물이나 불까지도 형제요, 자매라고 불렀다. 하느님의 창조 아래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했다는 뜻. 병의 치료를 위해 불에 달군 인두를 몸에 지져야 할 때가 있었는데, 성인이 인두를 달구는 불을 향해 "내 사랑하는 불 자매여, 내가 언제 그대를 함부로 대한 적이 있었습니까? 나의 사랑을 기억해서라도 나의 몸에 닿을 때 조금만 뜨겁지 않게 해 주오"라고 말했더니 성인의 몸에 닿았을 때 살이 타고 연기가 나도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5. 유명한 일화

5.1. 아시시 평원에서의 설교

파일:external/saintleonardchurchboston.org/Saint-Francis-Jpeg-Photo1.jpg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
(조토 디 본도네 作,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프란시스코가 아시시 평원에서 새들에게 전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평원을 걸어가다가 들이 떼지어 있는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서 설교하였다.

"나의 자매들이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만드신 분을 많이 찬미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옷을 입히시려고 깃을 주셨고, 날아다니도록 날개를 주셨으며,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모두 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물 중에서도 여러분을 특별히 귀하게 만드셨고, 맑은 대기 속에다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여러분을 보살피십니다."

그러자 새들은 프란치스코의 말을 경청하며, 그들의 본성대로 목을 늘이거나 날개를 빼고 입을 벌려 기이한 몸짓으로 흥겨워하며 그를 응시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복 자락으로 새들을 스치며 새들의 한가운데를 오갔다. 그리고는 십자성호를 그어 새들을 축복하자, 새들은 기쁜 듯이 몸짓을 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5.2. 아시시의 장미 가시덤불

파일:external/santuariodesanantonio.files.wordpress.com/the-thornless-roses-in-assisi1.jpg
아시시의 가시 없는 장미

이렇듯 믿음과 수도생활에 투철한 성인이었으나, 남자로서 느끼는 고유한 성욕을 떨치는 일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느끼는 음탕한 욕망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서, 틈만 나면 장미 가시덤불 위에서 맨몸으로 데굴데굴 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피어난 아시시의 장미들에서는 가시가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아시시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마당에 피는 장미꽃들은 가시가 없다! 아시시를 벗어나 다른 곳에 심으면 장미 가시가 생겨나고 다시 아시시로 옮겨와서 심으면 다시 가시가 없어진다고.

6. 동물의 수호 성인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매년 10월 4일이면 동물의 수호 성인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기념해 동물 축복식을 연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날 성당에 온갖 반려 동물들이 모여든다.

이처럼 별의별 동물들이 다 모였지만 의연하게 성수를 뿌려 주시는 신부님과 얌전히 축복을 받는 동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영상

다만 가톨릭에 무지한 기자들이 이를 동물 세례식이라 잘못 번역해 오해를 자아내는 듯. 게다가 성인 이름도 틀렸다. 이 영상에 나온 신부님은 세인트 프랜시스[23]라고 했는데, 자막에선 성 안토니라고 나왔다. (성 안토니오의 성상과 닮긴 했다) 그리고 목사가 아니라 신부이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성당 정보에 Priest라고 나왔다. 링크 - 아니라 1/17에 성 안토니오 아빠스 또한 동물 수호성인이다. 그래서 동물 축복은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과 성프란치스코 기념일에 한다. 그래서 기사 정보는 맞다.

물론 우리나라 성당에서도 가능하다. 반려 동물 전문 잡지에서 이러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었다. 링크

새들에게 설교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일화에 의하면 프란치스코가 새들을 불러 축복하고 진리를 말하자, 새들도 날개를 펼쳐 화답하며 지저귀면서 함께 즐거워했다고 한다. 사실, 성서에 동물과 인간이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동물은 희생 제물이나 소유물, 혹은 비유의 대상으로만 나타난다. '창세기'의 뱀이 유일한 예외다. 사악하게 그려진 파충류와 하와의 소통은 그러나 낙원의 상실이라는 파국으로 귀결된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시초부터 갈등, 적대, 그리고 기만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 프란체스코의 일화가 얼마나 독특하고 특이한 사건인지 깨달을 수 있다. 그는 아무런 조건 없이 동물을 귀하게 대우한다. 심지어 동물들과 진리를 함께 나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라는 가치가 인간의 세계를 넘어 동물의 삶으로까지 확장되어 간다.링크

7. 대중 매체

파일:프란체스코.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8. 여담

모든 만물에
봉오리가 선다.
꽃을 피우지 않는 것들조차,
자기 안에서 스스로 축복을 내리며 꽃을 피운다.

가끔 눈에 잘 띄지 않는 당신에게도 사랑스럽다는 말을
전하고 싶을 때가 있다
꽃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고 싶고,
그 사랑스러움을
말과 손짓을 섞어 전하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축복을 내리며 꽃을 피운다.

성 프란체스코가
암퇘지의 주름진 이마 위에 손을 대고
암퇘지에게 땅의 축복을 말로, 손길로 베풀자,
암퇘지는 흙으로 늘 지저분한 자신의 주둥이로부터
먹이와 흙탕물로 뒤범벅된 몸을 거쳐 영적으로 말린 꼬리까지
자신의 둔중한 몸을 앞뒤로 하나씩 기억해내기 시작하고,
단단한 척추가 불뚝불뚝 튀어나온 등허리부터
그 아래 크게 상처받은 심장을 거쳐
꿈틀거리며 젖을 만들어내는 꿈결 같은 푸른 젖통까지,
그 아래 열네 개의 젖꼭지를 물고 빠는 열네 마리의 새끼까지,
하나씩 기억해내기 시작한다.
암퇘지의 길고도 완벽한 사랑스러움을.

9. 관련 문서



[1] 현재 아시시에 소재해 있는 산타 키아라 대성당의 전신.[2]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로 프란치스코회 내에서 기념한다.[3] 정작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수도회의 수장으로서 대우를 받는 것을 바라지 않아 기록상 초대 수장은 그의 뒤를 이은 조반니 파렌티(Giovanni Parenti)다.[4] 프란치스코의 한자 표기인 방제각(方濟各)을 중국어식으로 발음한 명칭.[5] 이로 인해 노년층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해당 이름들을 세례명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시인 정지용이 있다.[6] 조반니가 요한의 이탈리아어식 명칭이다.[7] 프란치스코의 이탈리아어식 명칭이다.[8]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10: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0:3 필립보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타대오, 10: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0: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10: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10: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10: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10: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9] 교황성좌가 있어 가톨릭교회에서는 가장 지위가 높은 성당이다.[10] 고문들이 만류했던 이유는 작은 형제들이 표방하는 청빈한 신앙 생활 방식이 불안전하고 비실용적이어서 이들을 정식 수도회로 승격하면 교회의 명성에 흠이 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11] 라틴어로는 Minister generalis. 프란치스코회 계열 수도회의 총책임자를 일컫는 직함이다.[12] 라틴어식 이름으로 본명은 클라라의 이탈리아어식 명칭인 키아라(Chiara)다.[13] 본명은 카테리나(Caterina)지만, 언니를 따라 수녀가 된 후 아녜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14] 라틴어로는 Tertius ordo. 세속에서 특정 수도회의 정신과 생활 방식을 따르는 평신도들로 구성된 재속 단체를 일컫는다.[15] 위의 설명은 다분히 프란치스코측 관점의 서술이다. 실제로는 당시는 5차 십자군이 이집트를 공격해 다미에타를 점령한 상태였고, 술탄은 예루살렘을 넘겨주는 대신에 십자군이 이집트에서 철수할 것을 조건으로 십자군과 휴전협상중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진영을 통해 술탄을 만났기 때문에, 술탄은 이들이 협상사절단의 일원으로 착각하여 정중히 맞이했으며, 따라서 프란치스코 측이 주장한 수난들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알 카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관대한 편으로 유명했다.[16] 그냥 'protomatyr'라 하면 성 스테파노를 가리킨다.[17] 시기와 아부 야곱(야쿱)이라는 이름, 장소로 봐서 알모하드 왕조의 유수프 2세이다. 이 사람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나왔을 수 있다.[18] 이 유언을 남기면서 그는 다른 수도자 두 명한테 부축을 받으며 선 채로 죽음을 맞았다고 전해진다.[19] 그 밖에도 많은 사례가 전해지고 있으나 교황청에서 인정하는 성흔은 성 프란치스코의 것 하나뿐이다. 카타리나나 오상의 성 비오 신부도 단지 성흔 때문에 성인이 된 것은 아니다.[20] 단, 카푸친회에서는 전이예식을 10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밤에 하는 관습이 있다.[21] 성인이 직접 지은 것인지는 불명이다. 프랑스인 크리스티앙 르누의 조사에 따르면, 20세기 초 가톨릭계 프랑스 잡지에 기재된 것보다 이전의 것으로 추측되지만, 성인 본인이 지은 것인지는 말했듯 아직 확실치 않다.[22] 2015년 6월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 과정을 주도한 첫 번째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가 바로 이 구절에서 비롯된 이름이다.[23] 성 프란치스코의 영어식 명칭.[24] 제2번은 똑같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가진 성 파울라 프란치스코가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선보인 일화를 바탕으로 한 “물 위를 걷는 성 프란치스코”이다.[25] 기사에는 1973년작 이탈리아 영화라고 나오지만 구글에는 1972년 영국/ 이탈리아 합작 영화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