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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7 15:53:23

쓰촨 분지




파일:fine_art_china.jpg
중간의 산지 가운데(갈색)의 초록색(평야)이 쓰촨 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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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四川盆地/사천분지/쓰촨분지

쓰촨성, 충칭시 지역의 분지 지형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중국 전체를 봤을 때, 중국의 딱 중남부에 위치해 있다. 1억명 이상이 거주하는 인구 밀집 지역이기도 하다.

전국책(戰國策)이 파나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전답이 비옥하고 좋으며, 백성이 많고 재물이 풍부하며, 만 승의 전차를 구비해 떨쳐 일어나면 백만 대군을 일으킬 수 있고, 비옥한 광야가 천 리나 뻗어 있고, 축적된 재물이 넉넉하며, 지세가 편안한 곳을 일러 천부(天府)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촉나라의 삼성퇴 도성은 상나라의 초기 도성보다 크고 중기 도성과 비슷하다. 삼성퇴의 유물은 중원의 유물과 판이하다. 상의 유물이 추상화한 기하학적 문양의 제기(祭器)인 데 반해 촉의 유물은 사람, 새 등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높이 2.6m, 무게 180kg의 청동상 등 규모도 크고 조형미도 뛰어난 삼성퇴 유물을 보면 촉의 탁월한 예술과 정교한 기술에 감탄하게 된다.

과거에는 파(巴)나라[1]+촉(蜀)나라[2] 의 이름을 따서 파촉이라고 불렸었다.

2. 고대 도시

3. 역사

3.1. 상나라 시기

원래 이곳은 황하 문명의 발흥지인 황하 유역과는 진령 산맥, 대파 산맥 등의 험한 산맥 지형으로 따로 떨어져 있던 곳이었다.

상대[3]에는 삼성퇴 유적으로 대표하는 고도로 발전했으면서도, 중원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청동기 문명이었던 듯하나 점차 중원사람들이 영역을 확장하였다가 이후에 독립국가가 나왔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상나라가 하나라를 멸망시킬 적에도 동맹군을 파견했다고 한다.

3.2. 주나라 시기

관중 분지주나라중원 평야상나라를 꺾은 이후에 건융에 의해서 주나라가 관중 분지에서 밀려나자 그 건융을 진나라가 몰아내었다. 그러자 진나라가 이곳을 노리기 시작했다. 험난한 지형을 바탕으로 한 파나라와 촉나라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진나라의 정복 자체에 크나큰 애를 먹었다. 특히 지형이 큰 문제였는데 검각은 지금도 사람 지나다니기 힘든 길이라는 악명이 자자할 정도이다.

원래 주나라 시절까지 이곳은 중국이 아니라서 천하 9주에도 안 들어가지만, 진나라 말기에 중국의 영역에 들어오고, 후한시절엔 자사를 보낸 13주의 하나가 된다.

3.3. 춘추전국시대, 전한, 후한, 삼국시대

혜문왕 시절 사마착의 정벌 의견을 받아들여 군을 보내고, 꾀를 써서 이 둘을 정복한 이후[4][5] 진나라는 천하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6국을 국력으로 압도하기 시작한 것도 쓰촨 일대를 정복하여 관중의 경제력에 쓰촨의 경제력이 합쳐진 시기였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쓰촨 문명 또한 중원한족 문화에 흡수되었다. 진나라가 촉나라와 파나라를 침공해서 점령한 이후에는 파군과 촉군으로 각각 불리게 되었다.

혜문왕 시기 사마착의 활약으로 쓰촨을 정벌하고 나서 위세를 크게 떨쳤으나, 쓰촨을 얻기 이전부터 진헌공진효공이 이미 대대적으로 국가를 정비해 군사강국 반열에 올라있었다. 또한 이미 관중을 가진 상태에서 치고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천 분지를 기반으로 일어섰다고 보기 힘들다.

이 지역은 일찍(전국시대 진나라)부터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한 관개사업을 잘한 곳이었다.[6] 물산이 풍부하고 지형이 험해서 외부의 침공을 막기 쉬워 난세마다 독립 세력이 하나씩 났다. '변방'이지만 고립한 지형과 비옥한 토지로 견제받지 않고 힘을 키우기 좋은 곳이라서 후한 시절 유언은 황제를 참칭하려고 했다. 또 헌제조비에게 선양하고 후한이 멸망하자 유비는 한실을 잇겠다며 이곳에서 촉한을 세우고 황제에 올랐다. 촉한은 규모는 작아도 동오가 자리잡은 강동과 달리 삼국시대 당시에 이미 개발도는 높아, 후한 13주 중 무려 10개주 가량을 차지한 위나라의 1/5 정도 되는 인구였다.

이렇게 쓰촨 분지의 경제력은 관중 분지와 더불어 시황제가 최초로 천하를 통일할 수 있게끔 한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기원전 256년에 촉군 태수 이빙(李冰)과 그의 아들 이랑(李郞)의 주도로 만들어진 도강언이 완공되면서 쓰촨은 식량 생산의 중심지가 된다.

시황제의 사후, 진이 항우에 의해 멸망한 이후, 쓰촨은 이 일대를 분봉 받은 한나라 왕, 즉 영주였던 유방의 세력권이 되었다. 사천 분지와 한중 일대의 생산력은 무시할 수 없으나, 그것만으로는 몇 배 이상 거대한 황하와 장강을 끼고 있는 중원 전체의 생산력에 비할 수 없고, 지형상 방어에는 유리하지만 공격에는 불리해 사천을 기반으로 한 독립 세력이 중국을 통일한 경우는 현대까지도 드물다. 유방의 한나라 세력도, 사람들이 멀고 먼 변방 쓰촨으로 간다면서 울고불고 난리였지만, 막 분봉을 받은 직후에는 익주의 중심부인 성도까지 가지는 않았다. 익주의 초입부인 한중의 동천(東川) 일대에서 잠시 세력을 가다듬고 삼진왕이 있던 관중으로 치고 나간 것이며, 물론 삼진왕과의 전쟁이 끝난 후 초한전쟁 당시에는 성도를 비롯한 쓰촨 성 일대 역시 유방의 세력기반인건 맞았으나, 소하가 열심히 보급에 치중한 것도 관중 지역이며[7] 천하 통일 역시 대체로 관중에서의 생산력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한나라가 단순히 익주를 기반으로 천하통일을 했다고 보기엔 조금 애매하다.[8]

이후 유방이 관중을 정복할 때 이 일대는 관중 정복을 위한 후방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동진하여 천하를 재통일하고 한을 세울 때까지 관중과 더불어 배후지로서 기능하였다. 이는 장안전한의 수도가 세워진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렇게 이미 한나라 건국기부터 수백년간 꾸준히 개발된 덕분에 나중에 삼국시대에도 촉한이 비록 땅은 나머지 둘에 비해 한참 작지만 위나라에 비해서 질적[9]으로는 떨어지지 않고 특히 옆동네 오나라 늪지대에 비하면 많이 개발된 땅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익주 하나만 가지고도 오랫동안 위, 오와 대치구도가 가능했다.

전한후한 시대에는 이 곳에 익주 자사부가 설치되었다. 신나라가 무너지면서 공손술이 성(成)나라를 세워 후한의 최후의 적이 되었다.

후한 말기 이곳은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했지만 225년 촉한제갈량에 의해 평정되면서 촉한의 통치에 들어온다. 일종의 준자치구가 됐다고 보면 될 듯. 안정적으로 이곳을 관리하던 촉한이 멸망하고 이곳은 촉한의 내항도독이었던 곽익이 계속 관리하다가 서진 시기인 271년에 익주에서 영주(寧州)로 나뉘었고 옛 촉한 남중 지역의 4군을 거느렸는데, 그 땅은 대략 현재의 윈난성 지역에 해당한다. 영주는 284년 폐지되었다가 302년에 다시 세워지는데 302년부터 306년까지 대대적인 반란이 있었으며 이때 칠군이 두절되어 위급한 상황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역병까지 돌아 남중은 십만명이 죽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피폐해진다. 310년 왕손이라는 인물이 영주자사가 되지만 남중은 폐허가 되었으며 왕손은 폭정을 일삼았고 결국 333년 남중은 성한 정권에 넘어간다. 이후 성한이 347년 동진의 환온에게 멸망하면서 남중은 다시 동진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나 통치력이 유효하지는 못했다.

황건적의 난 이후 군웅 할거 시대가 펼쳐지면서 익주는 유장의 세력권이 되었다가 제갈량천하삼분지계에 따라 형주를 지배하던 유비가 유장을 축출하고 익주 일대에 자리를 잡는다.

유비는 이 쓰촨 분지에 촉한을 세운다. 지금의 쓰촨성의 성도(省都)가 바로 성도(成都)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청두시다.[10] 그래서 청두 근교에 제갈공명의 무덤인 무후사가 있으며, 그 옆에 유비의 무덤도 만들어져 있다. 촉나라에 대한 여론은 당대에도 지역 주민들에게 좋았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덕분에 이러한 유적들이 2000여년 가까이 잘 남아있는 것이다.[11]

한중 공방전 초반 장합과 격돌한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후 '한나라 장군 장비가 정예병사 1만 명을 이끌고 팔몽에서 적의 수괴인 장합을 크게 격파했으니 이에 말을 세우고 글을 새기노라.(漢將軍飛, 率精卒萬人, 大破賊首張合於八蒙, 立馬勒銘)'라는 친필이 류징현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명나라 때 발견되어 지금까지 관광지가 되고 있다.

제갈량도강언과 각종 수리시설을 보강하였으며, 촉의 특산물인 비단 생산을 장려하고 염색 공정을 개량했다. 적대국인 위마저 촉금(蜀錦: 촉의 비단)을 수입했으니, 위의 돈이 위를 치는 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셈이다. 또한 제갈량은 제염, 제철업[12]을 육성해 경제를 발전시켰다.

촉의 승상이었던 제갈량의 경우 유방과 달리 온전히 익주를 차지하여 기반을 닦은 사례라고 하겠다. 제갈량은 한고제광무제의 예를 쫓아서 익주와 형주를 기반으로 천하를 통일하려 했으나, 형주를 빼앗기는 바람에 삼국분립의 계획이 크게 틀어졌고, 오나라의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 바람에 위나라의 군사력을 소모시키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제갈량의 계획 초안은 형주와 익주에서 동시에 북벌을 수행하는 것인데, 형주와 상용을 빼앗겼으니 익주에서만 치고 나가야 했다. 여기에다 위나라와의 국력 차이도 있어서 결국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다만 촉이 지키는 익주의 지형은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였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위촉의 경계인 한중을 두고 벌어진 공방에서는 거의 대등하게 일진일퇴를 벌였고, 흥세 전투에서도 알 수 있듯이 5배의 국력을 보유한 위나라가 촉에 쳐들어가는 걸 오랫동안 포기할 정도였다. 괜히 계륵의 원조가 아니다. 제갈량 사후에도 어떤 뛰어난 등산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거의 30년 동안 촉의 심장부는 위나라의 침략을 당하지 않았다.

사천 분지의 어마어마한 생산량 때문에 촉나라가 저개발지 강동에 자리잡은 오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부강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라 보기 힘들다. 삼국지 시대에 중원이나 익주에 비해 장강 이남이 비록 덜 개발된 지역이긴 하지만, 이 시대의 경제력이란 사실상 인구수를 의미한다.[13] 개개인은 보다 풍족하게 살았을지 모르나, 프리츠 하버의 질소 고정법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아무리 풍족해봐야 1.5배 정도이다. 인구에 따른 식량생산량의 증가가 곧 국가의 총 경제력이므로 인구가 적으면 자연스레 경제력도 뒤떨어진다. 즉 절대적인 규모 면에선 인구가 오나라의 절반이었던 촉나라가 경제력으로 오나라를 능가할 리 없는 것이다.

촉한이 위나라에게 망하고 곧 이어 서진이 들어선 265년, 북동부 '파' 지역에 양주(梁州), 271년 건녕 등 남부에 영주(寧州)를 신설했다(269년에는 무도·음평·농서 지역은 옹주에서 나눠 진주(秦州)를 세웠다). 따라서 서진 19주 가운데 4주가 옛 촉의 땅이었다. 이후 오호십육국시대 때는 저족의 이민족 왕조 성한이 들어섰고 이후 남조의 동진이 점령했다가 화북정권인 서위(북주)가 빼앗아 이후로 수나라~당나라 시절에 이른다. 당나라 시절엔 안사의 난으로 당현종이 청두로 피난했을 당시 반란진압기간 동안 장안에서 임시로 천도하기도 했다.

참고로 중국 역사상 현재의 운남성 일대에 해당되는 남중칠군까지 확실하게 통치권을 확보한건 한나라 한무제 때부터이지만 독립적인 성격도 강했다. 실제로 당나라 현종 천보 연간 남조 때 중국은 윈난성 전체의 지배력을 상실했고 명나라 초기까지 운남성은 무려 630여년이나 중국과는 다른 독립상태~준 독립상태를 유지했다.

3.4. 위진 남북조 시대

촉한등애종회의 공격으로 에게 멸망하고 다시 위가 서진에게 멸망하고 서진이 천하를 재통일하나 팔왕의 난 이후 흉노, 선비족, 강족 등 주변의 이민족들이 중원으로 밀고 들어와 각자 나라를 세우는 오호십육국시대의 대혼란이 펼쳐진다. 익주 또한 그 영향을 피해가지 못했는데 저족의 족장 이특이 익주 일대를 점거하여 성한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하지만 얼마 못가 서진 황실이 강남으로 도망가 다시 세운 동진환온이 '촉 지역은 부유하고 호구가 번성하니 제갈량이 이를 이용해 중원에 맞섰다'는 원교의 의견을 들어 성한을 정벌해 멸망한다.

이민족들이 날뛰던 중원 일대가 하나의 왕조로 재편되고 천하가 남북으로 갈린 남북조 시대엔 554년 소량의 교체기에 서위에게 빼앗길 때까지 이곳은 줄곧 남조의 영역에 속했다.

3.5. 수나라 & 당나라

이후 위진 남북조 시대가 끝나고 수나라, 당나라 대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수대에는 양주, 당대에는 검남[14]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당대 중엽 안사의 난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당 조정이 이 곳으로 옮겨가 10년 가까이 임시 수도로서 기능한 적도 있었고 당대 말엽 황소의 난으로 수도 장안이 함락되자 또다시 당 조정이 이곳으로 옮겨간 적도 있었다.

동진, 유송, 남제 영주 관할에는 지금의 윈난성 전역, 구이저우성 중서부 지역이 있다. 중기 이후 폐지되었다가 서위(북주)가 554년 남영주(南寧州)를 세웠다가 수나라 초에 남영주총괄부를 두었다 폐지하고, 그 땅은 남조의 전신인 육조가 차지했다. 한편 당나라는 이 지역의 남영주총괄부를 이어받아 남은 지역을 남영주(南寧州)라고 칭하고. 치소를 미현(지금의 윈난성 취징시 서북쪽)으로 했으며 634년에는 낭주(郎州)로 개명했다가 717년 남영주로 다시 개칭했고 당현종 천보말년인 754년 이곳도 남조에 점령되어 석성군으로 바뀌었다.

3.6. 송나라

당이 멸망한 이후 중원은 다시 오대십국시대라는 혼란에 빠지는데 이 일대에는 십국에 속하는 전촉, 후촉이라는 지방 정권이 잠시 들어선다. 하지만 얼마 못가 더 강대한 세력에게 멸망하는 지방 정권 특성상 곧 중원 통일에 나선 조광윤의 송(북송)으로 편입된다.

북송 대에는 이주로, 성도부로 등의 행정 구역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정강의 변여진족이 세운 화북 전역을 점령한 이후 강남으로 도망간 송 황실이 재건한 송(남송)을 완전히 멸망시키려 강남으로 침공할 때 이 지역도 금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남송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금군이 철수하면서 이 지역은 송의 지배 하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쯔궁시 문서에 나오듯, 쓰촨 일대는 중국 최대의 소금 생산지로써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남송 대에는 송도종의 부친이자 송공종의 조부인 조여예가 소희부(쯔궁) 일대를 봉토로 하사받아 영왕으로 봉해지기도 하였다. 당시 남송에서는 '만약 촉을 수비하지 못한다면, 장쑤와 저장이 요동칠 것' (蜀若不守,江浙自摇)이란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그에 대한 반증이라도 하듯 몽송전쟁 때는 주요 격전지가 되었다.

1235년 몽골의 1차 침공 당시 남송의 맹장 조우문이 양평관에서 왕세현[15]이 이끄는 군대에 저항하나 결국 도륙당하고 쓰촨 지역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1241년, 양회 전선에서 활약했던 여개의 지휘 하에 쓰촨 지역에 산성을 쌓아 몽골군을 방어하게 된다. 그러나 1259년 성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과 쓰촨 분지가 몽골군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화북 세력은 쓰촨을 거점 삼아 강남을 병합해 천하 통일에 나선다.

그리고 쓰촨 분지는 남송 정권의 세금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이었으며, 나머지는 사실상 장강 평야다.

3.7. 원나라

남조, 다리 왕조(대리국)가 있었던 곳에서 몽골 제국이 멸망시킨 후 운남등처행중서성(雲南等處行中書省)을 세웠다.

몽골 제국중국 대륙을 정복하기 위해 오고타이 칸서하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뭉케 칸남송으로 밀고 내려올 당시 이 지역은 뭉케 칸이 직접 지휘하는 몽골군 정예 부대가 침공해 왔다.

하지만 뭉케 칸의 몽골군은 이 곳의 조어성[16]에서 6개월이나 가로막혀 정복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뭉케 칸 본인도 조어성 공략 도중 병사한다.

하지만 후임인 쿠빌라이 칸은 기어이 남송을 멸망시켜 이 지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고 중국의 몽골 울루스가 재편되어 세워진 왕조 은 이 일대에 사천행중서성이라는 행정 구역을 설치하는데, 바로 이 사천행중서성이라는 이름이 오늘날 이 일대의 행정 구역인 '쓰촨(사천)'이라는 이름의 기원이다.

원나라 말기, 명옥진이 이 일대를 중심으로 명하를 세우고,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게 멸망당하고, 주원장의 배려로 명옥진의 아들 명승과 그 일족은 고려로 보내져 오늘날 한국에서 서촉 명씨를 이루게 되었다.

3.8. 명나라

원나라 말기 운남에 고립되어 있던 몽골 괴뢰정권인 양왕(梁王)의 정권을 명나라 홍무제가 멸망시켰을 때, 이 지역에서 몽골 황족들을 도우면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리 단씨는 양왕국을 배신하고 명나라에 붙어 그 공으로 재독립을 꿈꾸었다. 하지만 대리의 은광산에 눈독을 들인 홍무제 주원장은 기대를 무참히 짓밟고 운남등처승선포정사사(雲南等處承宣布政使司)를 세워 1390년에 직할령으로 만들어버렸다. 명나라는 대리 단씨를 비롯한 바이족을 귀속시킨 이후로도 대리국의 왕족들에게 계속해서 총독, 진무 같은 벼슬을 주면서 현지의 토사(土司)로 삼았다고 한다.

원나라의 지배층 몽골인들이 중원에서 만리장성 너머 내몽골 고비 사막 일대로 쫒겨나 북원으로 쪼그라든 이후, 쓰촨은 한족 명나라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어 지금의 쓰촨성이라 불리는 행정 구역이 설치되었으며, 쓰촨 분지도 여기에 포함되게 되었다.

명나라 말, 만주 남부와 연해주에서 건주 여진이 세운 이 내려오고 각지에서 농민군이 일어나 명 사회가 혼란해질 무렵, 농민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장헌충이 쓰촨을 정복하고 지방 정권인 서를 세우나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대순을 격파하고 중원으로 내려온 청에 의해 간단히 멸망한다. 이때 장헌충 및 청나라군이 쓰촨 원주민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해, 쓰촨을 장악한 청 조정은 북부 지방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쓰촨 땅을 채울 수 밖에 없었다.[17]

3.9. 청나라

청이 중원을 정복한 이후, 삼번의 난 당시엔 오삼계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정복당한 적도 있으나 곧 탈환되었다. 이후 청나라 정부는 구 형주 일대인 후베이성/후난성과 주변 윈난성, 간쑤성 등 주변 지역의 인구를 사천으로 이주시켰다.

건륭제 통치 당시에는 준가르 제국 정복 과정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티베트 그리고 칭하이성[18] 정복을 위한 후방 기지 역할을 수행했다.[19]

가경제 통치 당시에는 비밀 결사인 백련교도들이 일으킨 백련교도의 난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었고 태평천국 운동 당시에는 강남의 태평천국에 호응해 쓰촨에서도 태평천국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의 사건 또한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는 비용으로 약 3천만 냥 이상의 은이 쓰촨 지역으로 유입되어,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고 상인과 지주층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부터 중국에도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닥쳐 충칭, 청두 등의 도시가 개항되어 근대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911년 우창 봉기로 인해 촉발된 신해혁명 발발 당시 강남의 여러 성들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때 쓰촨 또한 독립을 선언하여 중화민국에 가담했으며 중화민국 편을 들어 청에 대항하는 '보로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터진 곳 역시 쓰촨이었다.

3.10. 중화민국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중화민국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 각 지방이 사실상의 독립 정권으로 전락할 때 쓰촨에서도 여러 군벌들이 세운 독립 정권들이 난립했었다.

그러다 장제스의 북벌로 중화민국이 형식상 재통일되어 모든 지역이 장제스난징 국민정부 아래로 들어오자 쓰촨의 군벌들 또한 형식상 국민 정부 아래로 들어왔다. 그러다 장제스에 대항해 군벌 연합 세력이 중원대전을 일으키자 쓰촨 또한 군벌 연합에 가담했으며 중원 대전이 국민 정부의 승리로 끝나자 쓰촨은 다시 국민 정부에 충성하기로 한다. 하지만 국민 정부 아래로 다시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쓰촨을 실제로 다스리고 있던 자는 국민 정부가 아닌 토착 군벌 세력들이었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동년 12월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장제스는 수도를 한커우로 옮기고 이듬해 8월 한커우마저 함락되자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일본군에 대해 결사 항전한다. 이후 일본이 항복하는 1945년 8월까지 쓰촨의 대도시 충칭은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로서 기능했으며, 쓰촨은 아직 일본에게 함락되지 않은 중화민국 서남부, 이른바 '대후방'의 핵심 지역으로서 전쟁 기간 내내 항일 전선의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충칭 대공습과 같은 참혹한 전쟁 범죄도 있었다.

중일전쟁일본 제국의 항복으로 중화민국의 승리로 종결되나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일전쟁 이전부터 지겹도록 싸워댄 두 세력, 장제스중국국민당마오쩌둥중국공산당 간에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국공내전 말엽 중국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져 1949년 4월 수도 난징이 공산군 손에 떨어지고, 임시 수도 광저우마저 동년 10월 공산군이 화남을 석권하면서 함락되자 장제스는 중일전쟁 당시처럼 정부를 쓰촨 분지로 옮겨 계속 저항할 생각이었으나, 쓰촨 분지 내부의 토착 군벌들이 장제스를 배신하고 공산군 측에 붙자, 쓰촨 분지마저 포기하고 결국 타이완으로 떠났다.

11월에 충칭, 12월에 청두가 공산군에게 넘어가고 1950년 4월 쓰촨성 시창의 국부군 잔존 세력마저 완전 소탕된 뒤 쓰촨 분지는 중국 공산당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 통제 하에 든다.

3.11.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엔 1950년대대약진운동의 피해가 매우 큰 지역이었다.

195 ~ 60년대 중소결렬소련과의 사이가 나빠지고 전쟁 위기가 닥치자 중국 정부는 이곳에 쳐박혀 지구전을 펼쳐 끝내 승리한 중일 전쟁의 전훈에 따라 이곳에 엄청난 수의 산업 지대를 건설해 놓았다. 그리하여 항공 회사인 청두항공[20] 및 철강 제조 회사, 로켓을 쏠 수 있는 우주기지 [21]도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까지는 이곳의 공업 성장율이 중국의 상위권이었다.

1980년대 덩샤오핑[22]이 주석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중국 공산당이 흑묘백묘론[23]으로 대표되는 개혁 개방 정책을 펴면서 동남부 임해 지역인 상하이나 주변부의 항저우, 난징, 그리고 푸젠성 및 동부 광둥성 등은 크게 발전하지만 서남부 내륙 지역이던 쓰촨 분지는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딜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서간의 경제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서부대개발 정책이 시작되었다.[24]

1996년에 성 동부에 위치한 최대도시 충칭이 직할시로 독립한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성도이자 새 최대도시 청두(成都)는 인구가 1,200만 명으로 매년 13% ~ 15%대의 고성장을 이어가 서부내륙의 성장 엔진으로 불린다.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이 발생한 후 크고 작은 지진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 지역이 히말라야산맥 근처의 판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의 동쪽 끄트머리인 윈난성 역시 마찬가지로 지각이 불안정하고 해발고도가 높다.

2017년 6월 24일에는 산사태가 일어나 한 마을이 매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7년 8월 8일에 또 다시 규모 7.0 지진이 발생했다. 19명이 사망하고 300여명 가까이 부상당했다.#

2017년 11월 말 제갈량이 북벌 나가던 길을 따라서 청두에서 시안까지 가는 고속철도가 개통됐다. 시안까지 3시간, 베이징까지 8시간이면 간다. 과거 검각을 넘나들거나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와야 하는 힘든 여정을 생각하면 진짜로 좋아진 거 맞다.

2019년 6월 17일 오후 10시 55분 이빈(宜賓)시에서 규모 6.0의 지진이 발생했다. 13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했으며 산사태로 고속도로가 소실되었고 72개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12개 건물은 크게 파손됐다.#

4. 지리

'쓰촨 분지'는 남한 지역(휴전선 이남)보다 넓다. 저 거대한 분지만 해도 한 국가의 영토로서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며, 저 평지의 면적만 놓고 보더라도 서주나 연주, 청주 같은 주의 (산지 등을 포함한) 주 전체보다 확연히 넓다.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말했던 소금이 풍부하다는 내용은 암염인 듯하다. 제갈량의 시대 개간사업이나 수레 사용 등으로 개발을 진두지휘하여 영토에 비해 더 생산력이 증가한 듯하다. 삼협의 댐이 대표적.

관중과 쓰촨(파촉)을 동시에 쥔 세력은 대부분 중국 통일에 성공했다. 식량, 소금, 철, 말 등 전략자원이 전부 있는데다가 방어하기 쉬운 지형이라 유리할 때만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대륙에서 손꼽히는 오지였다. 고대부터 쓰촨 분지를 내외를 오가려면 한중 지역을 통과하거나, 검각을 통과하여 잔도로 다니거나, 장강 중류의 험준한 계곡인 장강삼협(長江三峽)을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야 했다. 그 외에는 사실상 길이 없었다.
蜀道之難難於上青天
촉나라 (가는) 길 험하기가 하늘 오르는 것보다 더하구나
이백, 촉도난(蜀道難) 中
쓰촨 분지의 지리는 대체로 서쪽이 해발 고도가 높고 동쪽이 낮은 편인데, 서부는 티베트고원의 동부로 히말라야산맥의 일부에 해당되고 중부/동부는 분지 지형이며, 동북 쪽으로는 산시성(陕西省)과 접해 있는데 산시성과의 경계를 또 산맥이 가로지르는 형태다. 장강(長江), 민강(岷江), 타강(陀江), 가릉강(嘉陵江) 등이 흐르고 있다.

이렇게 고립된 지형인지라 쓰촨 분지 밖에서 쓰촨 분지 안의 동부 분지로 들어오려면 서쪽과 북쪽의 산맥, 산지를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남쪽에는 윈난성과 이웃해 있는데 쓰촨 분지 지역보다 윈난성 중북부가 해발고도가 더 높다.

싼샤 댐이 세워진 후 장강삼협 루트는 막혀버려 현대에는 수운 교통을 통한 진입은 불가능하지만, 오늘날엔 여객기가 생기고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여럿 뚫려서 예전과 같은 고립된 곳은 아니다.

성내 최고봉은 티베트와 쓰촨 분지를 나누는 다쉐 산맥에 위치한 궁가산(贡嘎山)으로, 높이가 무려 해발 7,556m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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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동그란 모양의 분지가 바로 삼국지에서 '파촉'으로 불리는 지역. 현재의 충칭시청두시 인근을 포함하는 부근이다. 한국에서는 강원도에서나 볼 수 있는 해발 1,500m ~ 2,500m대의 험준한 산맥이 동그란 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가운데 장강이 관통하며 넓은 평야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쓰촨 분지 내의 완전한 평지 지역은 청두 시 인근을 비롯한 일부이고 그 외에는 언덕들이 있는 구릉 지대에 가깝다.

초한전쟁기나 삼국지에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세력'으로 묘사되기에 첩첩산중에 있는 조그마한 촌구석인 이미지지만 현실은 남한 면적의 1.6배에 달하는 거대한 분지[25]다. 연의에서 서촉을 정복하겠다고 온 주유가 돌아가자 제갈량이 보낸 편지에서 '그곳 사람들은 굳세고 요새는 바위와 같은데 어찌 정벌하시려 하시겠습니까?' 라고 했는데 실제로 유비는 이곳을 정복하는데 애를 많이 먹어야 했다. 유장이란 군주의 무능함과 촉 내부의 협력자들이 아니었다면, 형주 일부의 국력만으로 쓰촨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시 '촉도난'에서 이백은 '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렵다'라는 표현이 썼을 정도로 촉으로 가는 길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험난한 여정이었다. 촉으로 가려면 험한 산 여럿을 넘어야 하고 비행기가 없던 중세시대에는 일일이 암벽등반을 하거나 위험하게 잔도로 가야했기에 촉으로 가다가 진짜 죽을수도 있었다. 중일전쟁 시기 중국이 쓰촨 분지 내의 충칭으로 수도를 옮겼을 때[26] 동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가 잘된 일본군마저도 지형의 험난함에 충칭에 대한 지상작전은 포기하고 폭격작전만 수행하였다. 다만 국공내전기에는 국민군이 공산군에게 패배했다. 중화민국도 대만섬과 쓰촨 중 어디로 갈지 고민했었다.

유라시아 판과 인도 판이 충돌하는 지역이라 지진이 잦다. 이 일대는 히말라야산맥 동쪽 끄트머리에 해당하여 판의 경계선에 있다. 중국 지질연구소는 관측이 시작된 지난 백 년간 진도 5.0 규모 이상 지진만 150회 이상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리히터 규모 8.0 이상의 초 거대 지진이 바로 2007년 있었다.[27] 공식 피해액만 27조 원에 달했다. 더구나 셴수이허 단층대가 깨어난 것으로 중국 지질당국은 파악하고 있으며 이후 2008년 대지진부터 해서 진도 6.0 이상의 대지진이 1년이 멀다하고 이어지는 중이다.

5. 기후

습하고 더운 편이며, 지구 온난화가 많이 진행된 지금에는 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영상일 정도로 온화하다.[28]

그리고 일조량이 중국에서 가장 적은 지방이다. 1985년-2014년 29년 간 평년값을 기준으로 청두의 일조 시간은 연간 925시간 정도로 날씨 흐리기로 유명한 런던의 절반 수준으로, 북극권에 위치한 아이슬란드레이캬비크보다도 적은 수준이다. 서울과 비교했을 때 우기인 7월 ~ 8월에는 일조 시간이 비슷하지만 가을에서 봄까지는 거의 서울의 1/3일 수준이다. 분지라는 지리 조건 때문에 이 지역에는 구름안개가 많이 끼는데 더운 공기들이 쓰촨성 쪽으로 올라오거나 내려올 때 차가운 산맥을 거치면서 쉽게 구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예로부터 유명해, 오죽하면 '촉나라 개는 해를 보고 짖는다'는 뜻의 '촉견폐일'(蜀犬吠日)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을 정도. 개가 해를 보면 이상하게 여겨 짖어댈 정도로 해 볼 일이 드문 곳이라는 얘기다.

5.1. 비단

날씨가 온화하고 따스해서 누에를 기르기에는 아주 적합한 날씨이며, 쓰촨의 비단인 촉금(蜀錦)이 굉장히 유명하다.

촉금(성도촉금, 成都蜀锦)은 난징의 운금(南京云锦), 쑤저우의 송금(苏州宋锦), 광시 좡족 자치구의 장금(广西壮锦) 등 중국 4대 비단으로 하나로 중국에서 유명한데 이 중에서도 촉금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고 가장 오래 명성을 떨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000년의 긴 역사를 가진 촉금은 일찍이 서한(西漢)시대부터 짜기 시작하여 촉한(蜀漢) 시대에는 쓰촨 분지를 대표하는 물건이 되었으며 촉한 정부는 비단을 매우 중요시 여겨 승상 제갈량의 지휘하에 촉금의 생산과 질을 높여 촉금을 명품으로 만들었다. 촉금은 '쓰촨산(四川産) 꽃무늬 비단'이라고도 하는데 전부 수공으로 만들고 그 공예가 복잡하며 높은 기교를 가지고 있다.

당나라 때 와서는 그 당시 가장 좋은 비단으로 소문났으며 당태종 이세민은 사천 비단을 무조건 황실에 보내야 한다고 명했다. 또한 사천 비단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유럽에까지 팔려나갔으며, 남으로는 일본에도 나갔다. 하여 일본 사람들은 이 비단을 "촉강금"(蜀江錦) 라 불렀는데 지금도 일본의 쇼소인(正倉院), 호류지(法隆寺)에서는 당나라 때 보낸 촉금을 보관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 이 전통적인 촉금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청두시 정부는 이에 관한 전문인재를 배양하고 투자하여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방방금(方方錦), 월화금(月花錦), 우사금(雨絲錦), 완화금(浣花錦) 같은 촉금은 가장 많은 내외 고객이 애용하는 품종이다.

옷감의 질이 좋은만큼 자수(刺繡) 역시 유명하다. 이는 바늘로 각종 색상의 실을 꿰매어 미리 설계한 무늬와 색갈에 따라 화려한 도안을 수놓는 것이다. 사천 자수를 촉수(蜀繡)라 부르는데 중국 4대자수인 쑤저우의 소수(蘇繡), 후난성의 상수(湘繡), 광둥성의 월수 중의 하나이다. 한나라 말기 삼국 시기 때 촉금(蜀锦)의 발전과 함께 촉수(蜀繡)는 천하에 그 명성을 떨쳤고 이것으로 북방의 전마(戰馬) 등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였으며 촉한 정권의 가장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 되었다. 당나라 시기와서 이름이 더 날렸는데 각 지역 소수민족 두령들도 모두 촉수로 자기 몸을 장식했으며 송나라 때는 하늘 아래 최고의 품질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1831년 청나라 도광제 시기에 자수업이 더욱 발전했는데 조정에서 자수업을 직접 관리하고 크게 지원했다. 이로서 더 많은 자수예인 (艺人)들이 모여서 작업소가 60여개나 되어 인재만 천여명이 되였으며 생산한 품종이 다양하고 공예의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청나라 말기에 와서는 촉수(蜀繡)가 더 높은 수준에 올라 1915년파나마에서 열린 전람회에서 금상을 받았으며 관련 상품이 멀리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인도, 동남아시아, 호주 등 여러 곳에까지 팔려나갔다.

중국 전통 문화가 다 그랬듯이, 문화대혁명 때 이것도 된서리를 맞았으나 1971년에 와서 저우언라이의 관심하에 예인들이 다시 복귀해 촉수(蜀繡) 생산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혁개방정책 초기인 1982년 중국 공예품 회의에서 사천 촉수(蜀繡)는 2등상을 받으면서 다시 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1985년 프랑스 전시회 때도 우수 상품으로 평가받아 지금도 여러 지역으로 수출되고 있다.

현재의 베이징 인민 대회당 내 제 4회 의청에 "부용잉어" 라는 병풍이 있는데 이것은 쓰촨성 내 150명이나 되는 수공들이 18일 동안 만든 촉수(蜀繡)라 한다.

현대에도 이 비단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해서, 고우영이 쓰촨성의 중심지인 청두를 방문했을 때 청두의 관광 안내도에는 실크로드를 장안이 아닌 청두로 연장해서 그린 그림을 올려놨다고 한다. (고우영 십팔사략 후한 편 참조)

6. 출신인물

6.1. 삼국시대

이곳의 삼국시대 행정지명인 익주를 다스리던 유장 휘하의 상당수의 신하는 모두 이곳 출신이다. 하지만 유장 본인은 형주 출신이며, 법정은 부풍군 미현(현재 섬서성 바오지시) , 오반은 진류 (현재 허난성 카이펑시) 출신이다.

6.2. 당송시대

6.3. 근대


[1] 파나라의 수도였던 중경은 지금의 충칭시에 위치했었다.[2] 촉나라의 수도였던 성도는 지금의 청두시에 위치했었다.[3] 상나라는 수도 은허에서 따온 은나라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4] 이 때 촉왕이 잔도를 구축하는 아둔한 행동으로 사직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고사인 소탐대실이 나왔다.[5] 중일전쟁 기간 가장 아시아에서 가장 산업화된 일본군마저도 너무 험준하여서 육상 작전을 포기하고 항공 작전 위주로 할 수 밖에없었다.[6] 도강언 항목 참고.[7] 후한 말의 지명으로 치면 옹주(장안 일대)와 사주 일부, 예주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8] 다만 관중까지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검각을 통해 한중으로 나오는 방법 뿐인데 검각 일대는 현대에도 깎아지르는 절벽길이 길이 거의 수 백리에 가깝다는걸 생각해보면... 소하 역시 사천성 분지의 생산력을 제대로 안한게 아니라 못한 것일 수도 있다.[9] 생산량, 인구밀도[10] 청두는 성도라는 이름이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11] 반면, 조조의 묘는 발견되었다고는 하나 신뢰성이 의심되며 손권의 묘는 아예 현재로서 찾을길이 없다.[12] 오늘날에도 쓰촨은 중국의 10대 철산지다.[13] 현대의 GDP 개념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한 국가의 GDP란 결국 '1인당 GDP×인구수'이다. (물론 실제로는 '해당 국가의 GDP÷인구수'로 1인당 GDP를 산출하는 것이 맞지만 나눗셈의 역산은 곱셈이니 결과는 같다.) 어차피 GDP 자체가 산업 및 경제구조가 고도화된 근대 이후부터 사용된 개념이기는 하지만, 심지어 그 GDP를 산출하는 데 있어서도 인구는 가장 중요한 매개변수 중 하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활동이든 그것을 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꼬우면 강인공지능 개발해라.) 그나마 산업과 경제구조, 기술의 발전이 극히 고도화된 현대에는 국가의 기술, 산업, 경제수준에 따라 1인당 GDP가 수배~십여배 이상 차이나는 것도 가능하지만 전근대의 기술과 산업 수준으로는 이런 것도 불가능하다. 조금 더 풍족한 지역과 덜 풍족한 지역의 차이는 물론 있지만 현대만큼 큰 격차는 발생할 수 없고, 따라서 전근대의 경제력은 현대보다 더더더더더욱 심하게 인구수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경제력 역시 인구수에 강하게 종속되는 것은 여전하다. 1인당 국민소득으로는 GDP 기준이든 PPP 기준이든) 중위권 수준밖에 안되는 중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2위고, 하위권 수준이라고 해야 할 인도 역시 5~7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하물며 중세라기보다는 고대사의 영역인 중국 삼국시대의 국가가 생산력의 힘으로 인구수 격차를 뛰어넘는 부강함을 이루었으리라는 분석은 너무 무모한 것.)[14] 劍南. 검각 남쪽 지역이라는 의미이다.[15] 처음에는 금의 인물로, 몽골 왕고부족 출신[16] 현재의 충칭시[17] 장헌충의 학살 규모가 과장되었다는 이견이 있다. 자세한 것은 장헌충 문서 참고.[18] 당시에는 코코노르라는 몽골어 명칭으로 불렀다. 이 칭하이와 신장이 언어도 민족도 전혀 상관없었던 지역인 외몽골과 티베트를 이어 주는 루트였다.[19] 청의 준가르 정복은 3대 째 이어져 강희제는 제일 먼저 외몽골을 점령하고 할하 부족들을 휘하에 편입시켰으며 할하의 세첸칸부나 투세투칸부 등 외할하 왕공족들이 반 독립상태로 청에 조공을 시작했다. 그리고 옹정제 때엔 코코노르에 진출을 시작해 이 지역을 칭하이라 칭하였으며 건륭제 때 신장과 티베트 정벌로 완전히 준가르의 숨통을 끊어버렸다.[20] J-10, J-20을 만드는 회사다.[21] 시창 우주기지. 중국의 우주기지는 이곳 말고도 간쑤성의 주취안 우주센터도 있으며 최근에 하이난섬에 새 우주기지를 만들었다.[22] 쓰촨성 출신이다.[23]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실용 논리다.[24] 이 프로젝트로 간쑤성, 칭하이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 자치구 등의 소외된 서부 내륙 지역들의 개발도 시작되었다.[25] 16.5만 ㎢나 된다. 남한 면적은 100,432㎢.[26] 당시 충칭은 수도였던 기간 중에 직할시가 된 적이 있긴 하다.[27] 원촨 대지진으로 2008년 대지진의 전주곡이었다.[28] 그러나 남중국 일대처럼 겨울 기온이 13-14도의 봄/가을 수준으로 많이 높은 건 아니고 영상 0-1도 정도로 쌀쌀하다.[29] 지금의 충칭출신, 출생 당시 쓰촨 - 충칭 행정 구역 분할 전이라 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