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1:20:56

성도부로

송나라의 행정구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북송
경기로 경동동로 경동서로 하동로
경서남로 경서북로 하북서로 하북동로
양절로 복건로 회남동로 회남서로
형호남로 형호북로 강남동로 강남서로
이주로 기주로 재주로 성도부로
광남동로 광남서로 영흥군로 진봉로
남송
양절동로 양절서로 회남동로 회남서로
형호남로 형호북로 강남동로 강남서로
이주로 기주로 동천부로 성도부로
광남동로 광남서로 복건로 경서남로 }}}}}}}}}

성도부로 成都府路

1. 개요2. 역사3. 행정구역
3.1. 성도부(成都府)3.2. 미주(眉州)3.3. 숭경부(崇慶府)3.4. 팽주(彭州)3.5. 면주(綿州)3.6. 한주(漢州)3.7. 가정부(嘉定府)3.8. 공주(邛州)3.9. 간주(簡州)3.10. 여주(黎州)3.11. 아주(雅州)3.12. 무주(茂州)3.13. 위주(威州)3.14. 영강군(永康軍)3.15. 선정감(仙井監)3.16. 석천군(石泉軍)

1. 개요

송나라의 최상위 행정구역인 로(路) 중 하나로 오늘날 청두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관할했다. 동천부로, 이주로, 기주로와 함께 사천(四川)의 유래가 되는 천협사로(川峽四路) 중의 하나이다.

2. 역사

왕소파, 이순의 봉기가 실패로 끝난 이후인 994년 성도부가 익주로 강등되었다. 성도부로는 송나라에서 로를 설치할 때 익주로라는 명칭으로 설치되었고 1059년 익주가 성도부로 승격되면서 다시 성도부로가 되었다.

3. 행정구역

3.1. 성도부(成都府)

촉군(蜀郡).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가 파견되었다. 성도부라는 명칭은 당나라에서 안녹산의 난이 일어날 당시인 757년 익주(益州)가 부로 승격되면서 이어졌던 명칭이었으며, 송대에도 이어졌다가 왕소파, 이순의 반란 이후 다시 익주로 격하되었다. 1060년 다시 성도부로 승격되고 1061년 절도사가 부활하였다.

3.2. 미주(眉州)

통의군(通義郡). 996년 방어주로 승격되었다.

3.3. 숭경부(崇慶府)

당안군(唐安郡). 본래 촉주(蜀州)로 군사주였다. 1144년 고종의 잠저가 촉주에 있었기에 숭경군절도사(崇慶軍節度使)가 파견되었고 1177년 부로 승격되었다.

3.4. 팽주(彭州)

몽양군(濛陽郡). 군사주였다.

3.5. 면주(綿州)

파서군(巴西郡). 군사주였다.

3.6. 한주(漢州)

덕양군(德陽郡). 군사주였다.

3.7. 가정부(嘉定府)

건위군(犍爲郡). 본래 가주(嘉州)였으며, 군사주였다. 966년 수산현(綏山縣), 나목현(羅目縣), 옥진현(玉津縣)을 폐지하였다. 영종이 즉위한 뒤인 1196년 가정부로 승격되었고 1205년 가경군절도사(嘉慶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3.8. 공주(邛州)

임공군(臨邛郡). 군사주였다.

3.9. 간주(簡州)

양안군(陽安郡). 군사주였다.

3.10. 여주(黎州)

한원군(漢源郡). 군사주였다.

3.11. 아주(雅州)

여산군(盧山郡). 군사주였다.

3.12. 무주(茂州)

통화군(通化郡). 군사주였다. 1072년 문천현(汶川縣)에 위융군사(威戎軍使)를 설치하고 석천현을 면주 관할로 두었다.

춘기성(春祺城)은 본래 보주(保州)의 기미를 맡았으며, 1114년 기주(祺州)가 설치되고 춘기현이라는 이름을 맡았다가 1121년 성으로 격하되고 무주 관할이 되었다.

수녕채(壽寧砦)는 본래 직주(直州)의 기미를 맡았으며, 1116년 무주로부터 5리 떨어진 대조강(大皂江) 바깥에 수녕군(壽寧軍)을 설치했다가 1118년 채로 격하되고 1121년 보로 격하되었다. 또한 부문관(敷文關)을 부문보(敷文堡)로 격하시켰다.

연녕채(延寧砦)는 본래 위융군(威戎軍)으로 희령 연간에 설치되었으며, 1116년 탕연준(湯延俊) 등이 귀순하면서 군성을 중축하고 연녕군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1121년 채로 격하되어 무주 관할이 되었다. 1123년 문천현에 통폐합되었다.

3.13. 위주(威州)

유천군(維川郡). 본래 유주(維州)였으며, 군사주였다. 1036년 유주(濰州)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위주로 고쳤다.

가회채(嘉會砦)는 본래 패주의 기미를 맡았으며, 1114년 형주(亨州)로 변경되고 가회현(嘉會縣)이라는 현이 되었으나, 1121년 주가 폐지되고 채로 격하되면서 위주 관할이 되었다.

통화군(通化軍)은 희령(熙寧) 연간에 보주와 패주 근방에 설치되었다. 1113년 동순자(董舜咨)가 귀순하면서 옛 이름을 따서 군성을 중축했다가 1121년 군사를 감압(監押)으로 격하시킨 뒤 위주 관할로 두었다.

3.14. 영강군(永康軍)

본래 팽주(彭州) 도강현(導江縣) 관구진(灌口鎭)이었으며, 당나라 때 진정군(鎭靜軍)이 설치되었다. 966년 영안군(永安軍)으로 고치고 촉주(蜀州)의 청성현(靑城縣)과 도강현을 관할에 두었다. 978년 영강군으로 개칭되었다. 1072년 폐지되었다가 1076년 도강현의 치소에 영강군사(永康軍使)를 두고 팽주 관할로 두었다가 원우 연간에 복구하였다.

3.15. 선정감(仙井監)

본래 능주(陵州)였으며, 997년 단련주로 승격되었다. 1001년 폐지되어 현으로 설치되었다가 1072년 능정감(陵井監)으로 격하되었다. 1122년 선정감(仙井監)으로 고쳤다. 1163년 융주(隆州)로 고쳤다.

3.16. 석천군(石泉軍)

본래 면주(綿州) 석천현(石泉縣)에 설치한 것이 시초로 1117년 군으로 승격되었으며,영강현(永康縣), 용안현(龍安縣), 신천현(神泉縣)이 관할이 되었다. 1121년 군사주로 격하되고 관할 현들이 원래의 관할로 돌아갔으나 1125년 복구되었다.

[1] 994년 서포현(犀浦縣)이 진으로 격하되어 비현으로 통폐합되었다.[2] 한대의 명칭은 번현(繁縣)이었으나 전촉 때 고쳐졌다.[3] 1072년 능주(陵州)를 폐지할 때 귀평현(貴平縣)과 적현(籍縣)을 진으로 격하시킨 뒤 광도현에 통폐합하였다.[4] 옛 명칭은 영지현(靈池縣)이었으나 1026년 영천현으로 고쳤다.[5] 수나라 때 통의현(通義縣)이라는 명칭이었으나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에 미산현으로 고쳤다.[6] 당나라 때 당안현이라는 명칭이었다가 971년 고쳐졌다.[7] 당나라 때 설치된 현이었다. 1069년 붕구현(堋口縣)을 설치했다가 1071년 격하하여 진으로 통폐합하였다., 녹각채(鹿角砦), 붕구다장(堋口茶塲), 목두다장(木頭茶塲)이 있었다.[8] 唐昌縣。1102년 연호인 숭녕을 따서 숭녕현으로 고쳤다.[9] 1072년 평강현(平羌縣)을 폐지하고 용유현에 통폐합하였다. 1119년 가상현(嘉祥縣)으로 개명되었으나 뒤에 복구되었다.[10] 993년 미주에서 가주 관할로 변경되었다.[11] 1011년 치소를 징비진(懲非鎭)으로 옮겼다.[12] 1072년 임계현(臨溪縣)을 진으로 격하시킨 뒤 통폐합했다.[13] 연공채(延貢砦)가 있었다.[14] 사안채(思安砦)가 있었다.[15] 염정감(鹽井監)과 염정채(鹽井砦)가 있었다.[16] 970년 치소를 평락진(平樂鎭)으로 옮겼다가 997년 복구하였다.[17] 철전의 주조를 맡았으나 1129년 폐지되었다.[18] 1046년 통망현(通望縣)을 폐지하고 한원현에 통폐합하였다.[19] 조문채(碉門砦)가 있었다.[20] 영관채(靈關砦)가 있었다.[21] 1072년 설치되었으며, 진으로 격하되어 명산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087년 복구되었다.[22] 정강의 변 이후 설치되었다.[23] 1072년 설치되었다.[24] 1072년 설치되었다.[25] 당나라 때 설성현(薛城縣)이라는 명칭이었으나 남당 때 고쳤다.[26] 1023년 금천현(金川縣)으로 고쳤다가 1037년 복구하였다. 1066년 통화군(通化軍)을 통화현에 통폐합하였다. 박역장(博易塲)이 있었다[27] 건덕 연간에 팽주 관할에서 변경되었다. 1072년 영강군이 폐지되면서 팽주 관할이 되었다가 다시 영강군을 설치하였다. 박마장(博馬塲)이 있었다.[28] 건덕 연간에 촉주 관할에서 변경되었다. 마찬가지로 영강군이 폐지되면서 촉주 관할이 되었으나 다시 영강군 관할이 된 시기는 불명이다.[29] 1072년 광도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170년 복구되었다.[30] 귀평현과 마찬가지로 통폐합되었다가 복구되었다.[31] 원래 영안진(永安鎭)이었으나 1103년 개칭되었다.[32] 석관채(石關砦)가 있었다.[33] 삼반채(三盤砦)와 다장(茶塲)이 있었다. 1119년 안창현(安昌縣)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다. 보우(寶祐) 연간 이후 치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