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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로 | 河東路
1. 개요
송나라의 최상위 행정구역인 로(路) 중 하나로 오늘날 만리장성 이남 산시성(산서성) 지역을 관할했다.2. 역사
하동 지역은 북한이 통치하였고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었다. 북한의 멸망 이후인 997년 송나라는 이곳을 중심으로 하동로를 설치했다.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에 함락되었고, 금나라는 하동남로와 하동서로라는 로를 설치하였다.3. 행정구역
3.1. 태원부(太原府)
태원군(太原郡).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가 파견되었다. 979년 북한이 멸망한 뒤 군사주로 격하되고 성이 철거되었으며 치소는 유차현(楡次縣)으로 옮겨졌다. 또한 태원현(太原縣)을 폐지하고 평정현(平定縣)과 낙평현(樂平縣)이 평정군(平定軍)으로 이관되고 교성현(交城縣)이 대통감(大通監)으로 이관되었다. 982년 치소를 당명감(唐明監)으로 옮겼다. 1107년 대도독부로 승격되었다.- 현
- 감
- 대통감(大通監), 영리감(永利監)
3.2. 융덕부(隆德府)
상당군(上黨郡).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본래 노주(潞州)였다. 태평흥국 연간에 군명을 소덕군(昭德軍)으로 고쳤다. 1101년 군으로 고쳤고 1104년 융덕부로 승격되었으며, 다시 절도사를 파견하였다.3.3. 평양부(平陽府)
평양군(平陽郡). 건웅군절도사(建雄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본래 진주(晉州)였다가 1116년 평양부로 승격되었다.- 현
- 무
- 연반무(煉礬務), 반산무(礬山務)
- 군
- 경조군(慶祚軍)[12]
3.4. 강주(絳州)
강군(絳郡). 방어주였다.3.5. 택주(澤州)
고평군(高平郡).- 현
- 진성현(晉城縣), 고평현(高平縣), 양성현(陽城縣), 단씨현(端氏縣), 능천현(陵川縣), 심수현(沁水縣)
- 관
- 웅정관(雄定關)[15]
3.6. 대주(代州)
안문군(鴈門郡). 방어주였다. 1005년 당림현(唐林縣)을 폐지하였다. 연변안무사(沿邊安撫司)를 설치하기도 했다.3.7. 흔주(忻州)
정양군(定襄郡). 단련주였다.- 현
- 수용현(秀容縣)[19], 정양현(定襄縣)
3.8. 분주(汾州)
서하군(西河郡). 군사주였다.3.9. 요주(遼州)
낙평군(樂平郡). 1074년 주가 폐지되고 평성현(平城縣)과 화순현(和順縣)이 진으로 격하되고 요산현(遼山縣)에 통폐합되어 평정군(平定軍)으로 이관되고 유사현(楡社縣)이 진으로 격하되어 위승군(威勝軍) 무향현(武鄕縣)으로 통폐합되었다. 1085년 다시 복구되었다. 1086년 다시 화순현, 유사현, 평성현을 설치하였다.- 현
- 요산현(遼山縣)[23], 화순현(和順縣), 유사현(楡社縣), 평성현(平城縣)
3.10. 헌주(憲州)
분양군(汾源郡). 군사주였다. 원래 치소는 누번현(樓煩縣)에 있었으나 1002년 치소를 정락군(靜樂軍) 정락현(靜樂縣)으로 옮겼다가 정락군을 폐지했고 누번현은 남주 관할로 변경되었다. 1070년 헌주를 폐지하고 정락현을 남주로 이관하였다가 1077년 다시 헌주를 설치하고 정락현을 관할로 두었다. 1115년 군명을 받았다.- 현
- 정락현(靜樂縣)[24]
3.11. 남주(嵐州)
창번군(昌煩郡). 군사주였다. 981년 남곡현(嵐谷縣)이 가람군(岢嵐軍)으로 이관되었다.3.12. 석주(石州)
창화군(昌化郡). 군사주였다. 남주(嵐州), 석주, 습주(隰州)를 관할하는 도순검사(都巡檢使)의 치소가 있었다. 1082년 가로채(葭蘆砦)와 오보채(吳堡砦)를 설치하고 가로채와 오보채를 관할하는 연변도순검사(沿邊都巡檢使)를 설치했다. 또한 남주, 석주, 습주에 각각 연변도순검사를 두었다. 1099년 가로채를 진령군(晉寧軍)으로 승격시키고 임천현(臨泉縣)을 진령군으로 이관하였다. 1109년 정호현(定胡縣)이 다시 진령군으로 이관되었다.- 현
- 이석현(離石縣), 평이현(平夷縣)[28], 방산현(方山縣)
3.13. 습주(隰州)
대녕군(大寧郡). 단련주였다. 1072년 자주를 폐지하면서 길향현을 습주 관할로 이관하고 길향군사(吉鄕軍使)를 두었으며, 문성현을 진으로 격하시켰다. 1086년 자주를 다시 설치했다. 1092년 상평관(上平關)과 영령관(永寧關)이 주의 서쪽 경계와 가까워서 치소를 옮겼다.]3.14. 자주(慈州)
단련주였다. 길향현(吉鄕縣), 문성현(文城縣), 향녕현(鄕寧縣)을 관할했으나 1072년 자주를 폐지하면서 길향현은 습주(隰州) 관할로 이관되고 길향군사(吉鄕軍使)를 두었으며, 문성현은 진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향녕현은 진주(晉州) 양릉현(襄陵縣)으로 이관되었다. 1086년 길향군을 자주로 복구했다.- 현
- 길향현(吉鄕縣)
3.15. 인주(麟州)
신진군(新秦郡). 건덕 연간에 치소를 오아보(吳兒堡)로 옮겼고 967년 건녕군절도사(建寧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988년 건녕군이 진서군(鎭西軍)으로 개칭되었다.- 현
- 신진현(新秦縣)[31]
3.16. 부주(府州)
영하군(榮河郡). 정국군절도사(靖康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본래 군액은 영안군(永安軍)이었으나 1102년 정국군으로 고쳤다. 1115년 영하군이라는 군명을 받았다. 인부로군마사(麟府路軍馬司)를 두었다가 태원부(太原府) 대주로검할(代州路鈐轄)이 관할하였다.- 현
- 부곡현(府谷縣)[34]
- 보
- 영천보(寧川堡)[35]
- 채
- 영변채(寧邊砦)[36]
- 성
- 진위성(震威城)[37]
3.17. 풍주(豐州)
영풍군(寧豐郡). 군사주였다. 1041년 이원호에게 함락되었으며, 1062년 부주(府州) 나박천(蘿泊川) 일대에 다시 주를 설치하였다. 1115년 영풍군이라는 군명을 받았다.- 채
- 영안채(永安砦), 보령채(保寧砦)
3.18. 위승군(威勝軍)
978년 노주(潞州) 동제현(銅鞮縣)에서 일어난 亂柳石圍中建爲軍。3.19. 평정군(平定軍)
977년 진주(鎭州) 광양채(廣陽砦)에 군을 설치한 것이 시초였다. 979년 병주(并州) 평정현(平定縣)과 낙평현(樂平縣)을 평정군 관할로 두었다.3.20. 가람군(岢嵐軍)
980년 남주(嵐州) 남곡현(嵐谷縣)에 군을 설치한 것이 시초였다.- 현
- 남곡현(嵐谷縣)[44]
3.21. 영화군(寧化軍)
- 현
- 영화현(寧化縣)[45]
3.22. 화산군(火山軍)
982년 남주(嵐州)를 분할하여 화산군을 설치했다. 1067년 화산현(火山縣)을 설치했다가 1071년 폐지하였다.- 채
- 하진채(下鎭砦)[46]
3.23. 보덕군(保德軍)
993년 남주(嵐州)를 분할하여 정강군(定羌軍)을 설치했으며, 1004년 보덕군으로 고쳤다.- 진
- 대보진(大堡津), 사곡진(沙谷津)
3.24. 진령군(晉寧軍)
본래 가로채(葭蘆砦)였으며, 1082년 수복하여 오보채(吳堡砦)와 함께 석주(石州) 관할이 되었다. 1089년 가로채가 서하에게 함락되었다가 1097년 수복되었다. 1099년 가로채에 진령군을 설치하고 석주 임천현을 진령군으로 이관하였다. 진령군의 군정이 남석로연변안무사(嵐石路沿邊安撫使)와 남석습주도순검사(嵐石隰州都巡檢使)를 겸임하였다. 1109년 다시 석주 정호현을 진령군 관할로 두었다.- 보, 채
[1] 백정채(百井砦)와 양흥채(陽興砦)를 관할로 두었다.[2] 1039년 대통감(大通監)에서 태원부 관할이 되었다.[3] 1070년 양곡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115년 복구되었다.[4] 1072년 폐지되어 여성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086년 복구되었다.[5] 1025년 치소를 섭현의 동남쪽 백마역(白馬驛)으로 옮겼다.[6] 1072년 자주 향녕현의 일부를 통폐합했다. 조장채(雕掌砦)와 표미채(豹尾砦)가 있었다.[7] 한매보(韓買堡), 안국보(安國堡), 사벽보(史壁堡), 누두보(疊頭堡) 등이 있었다.[8] 1072년 진으로 격하되어 홍동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088년 복구되었다.[9] 후예채(厚裔砦), 청안채(靑岸砦), 석교채(石橋砦), 청산채(靑山砦), 변백채(邊柏砦)가 있었다.[10] 부성채(府城砦), 영흥채(永興砦), 도천보(陶川堡), 백련보(白練堡), 당곡보(當谷堡), 횡령보(橫嶺堡)가 있었다.[11] 981년 심주(沁州)를 폐지하면서 진주 관할이 되었다. 1072년 진으로 격하되어 기씨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086년 다시 현으로 설치되었다.[12] 1113년 조성현 보시봉(父始封)에 설치하였다.[13] 1072년 자주(慈州)를 폐지하고 향녕현(鄕寧縣)을 태평현과 직산현에 각각 소속시켰다.[14] 중산채(中山砦), 화애채(花崖砦), 화산채(華山砦)가 있었다.[15] 진성현 관할이었으며, 명칭은 천정관(天井關)이었다가 1126년 웅정관으로 명칭을 고쳤다.[16] 서형채(西陘砦), 호곡채(胡谷砦), 안문채(鴈門砦)가 있었다.[17] 누판채(樓板砦), 양무채(陽武砦), 석협채(石峽砦), 토등채(土墱砦)가 있었다.[18] 번치채(繁畤砦), 여월채(茹越砦), 대석채(大石砦), 의흥야채(義興冶砦), 보흥군채(寶興軍砦), 병형채(甁形砦), 매회채(梅回砦), 마곡채(麻谷砦)가 있었다.[19] 1072년 폐지되어 정양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086년 복구되었다. 석령관채(石嶺關砦), 흔구채(忻口砦), 운내채(雲內砦), 도합채(徒合砦)가 있었다.[20] 영리서감(永利西監)이 있었다.[21] 양량남관(陽涼南關)과 양량북관(陽涼北關)이 있었다.[22] 976년 중양현(中陽縣)으로 고쳐졌다가 다시 효의현이 되었다. 1072년 진으로 격하되어 개휴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086년 복구되었다.[23] 황택채(黃澤砦)가 있었다.[24] 1002년 천지현(天池縣)과 현지현(玄池縣)을 통폐합하였다.[25] 비연보(飛鳶堡)가 있었다.[26] 유낭보(乳浪砦)가 있었다.[27] 1002년 헌주에서 남주로 이관되었다.[28] 복락진채(伏落津砦)가 있었다.[29] 녹반무(碌礬務), 수두채(水頭砦), 백벽채(白壁砦), 선봉채(先鋒砦)가 있었다.[30] 상평채(上平砦), 영령채(永寧砦)가 있었다.[31] 1114년 은성현(銀城縣)과 연곡현(連谷縣)을 신진현에 통폐합하였다. 신당채(神堂砦), 정강채(靜羌砦), 혜녕보(惠寧堡), 진천보(鎭川堡)가 있었다. 은성현은 굴야천(屈野川), 오원새(五原塞), 은성채(銀城砦), 신목채(神木砦), 건녕채(建寧砦), 숙정보(肅定堡), 신목보(神木堡), 통진보(通津堡), 난간보(闌干堡)가 있었다. 연곡현은 굴야천보(屈野川堡)와 횡양보(橫陽堡)가 있었다.[32] 1099년 대화곡(大和谷)에 설치되었다.[33] 1099년 마먀낭(麻乜娘)에 설치되어 대화보라는 이름을 받았다.[34] 안풍채(安豐砦), 영부채(寧府砦), 백승채(百勝砦), 하빈보(河濱堡), 척후보(斥堠堡), 정안보(靖安堡), 서안보(西安堡)가 있었다.[35] 부주 안풍채 바깥에 있는 9번째 채로 1098년 영천보라는 이름을 받았다.[36] 1099년 설치되었다.[37] 1124년 철로골퇴(鐵爐骨堆)에 채를 설치하고 진위성으로 명명하였다.[38] 태평흥국 연간에 무향현과 함께 노주에서 위승군으로 이관되었다.[39] 1074년 요주를 폐지하고 유사현을 진으로 격하시킨 뒤 무향현에 통폐합했다가 1093년 다시 복구하였다.[40] 981년 심주를 폐지하면서 심원현을 위승군으로 이관하였다.[41] 1039년 대통감(大通監)에서 위승군으로 이관되었다. 1046년 치소를 군의 서북쪽 대각사(大覺寺)로 옮겼다.[42] 당나라 때 광양현(廣陽縣)이었다가 979년 고쳐졌다. 옛 정형관(井陘關)과 백정채(百井砦)가 있었다.[43] 정양채(靜陽砦)가 있었다.[44] 1070년 폐지했다가 1091년 복구하였다. 6개의 채(砦)가 있었다.[45] 1070년 폐지했다가 1086년 복구하였다. 1104년 다시 진으로 격하되었다. 서양채(西陽砦), 뇌자채(腦子砦), 세요채(細腰砦), 굴곡채(窟谷砦)가 있었다.[46] 웅용채(雄勇砦), 편두채(偏頭砦), 동가채(董家砦), 횡곡채(橫谷砦), 길고채(桔槔砦), 호수채(護水砦)가 있었다가 경력 연간 초에 하진채를 설치하였다. 1061년 편두채를 폐지하고 1078년 길고채를 폐지하였다. 《원풍구역지(元豐九域志)》에 하진채로 통폐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47] 정호진채(定胡津砦), 천혼진채(天渾津砦), 오보채(吳堡砦)를 관할하였다.[48] 극호채(克胡砦)와 가로채(葭蘆砦)를 관할했다가 가로채를 1082년 수복하여 뒤에 진령군(晉寧軍)으로 하였다.[49] 유목천(楡木川)에 설치되었으며, 가로채(葭蘆砦) 북쪽에 있었다. 1098년 신천채로 명명되었다.[50] 삼교천령(三交川嶺)에 채를 설치했고 1098년 신천채가 설치된 뒤 함께 설치되었다.[51] 1099년 오룡채로 명명되었다.[52] 승라령(升囉嶺)에 설치된 채를 1099년 통진채로 명명하였다.[53] 굴설령(窟薛嶺)에 설치된 채를 1099년 영하채로 명명하였다.[54] 미륵천(彌勒川)에 설치된 채를 1099년 미천채로 명명하였다.[55] 정이보(精移堡)를 1099년 통진채의 이름을 따서 통진보로 개칭하였다.[56] 가애령(哥崖嶺)에 설치된 채로 1099년 영하채의 이름을 땄다.[57] 소홍애(小紅崖)에 설치된 보를 1099년 미천채의 이름을 따서 개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