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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부로 | 潼川府路
1. 개요
송나라의 최상위 행정구역인 로(路) 중 하나였다.2. 역사
997년,송나라에서 최상위 행정구역인 로(路)를 설치할 때 오늘날 사천 지역에 서천로(西川路)를 설치하였다. 1001년, 서천로는 익주로와 자주로(梓州路)로 분할되었다. 1118년 자주가 동천부로 승격되었다.3. 행정구역
3.1. 동천부(潼川府)
동천군(梓潼郡). 본래 자주(梓州)였으며, 검남동천절도사(劍南東川節度使)가 파견되었다. 966년 군액을 정융군(靜戎軍)으로 고치고 동관현(東關縣)을 설치하였다. 태평흥국 연간에 군액을 안정군(安靜軍)으로 고쳤다. 988년 동천(東川)으로 고쳤다가 1080년 검남(劍南)을 더하여 검남동천이 되었다. 1118년 부로 승격되었다.- 현
3.2. 수령부(遂寧府)
수령군(遂寧郡). 도독부로 무신군절도사(武信軍節度使)가 도독을 맡았다. 본래 수주(遂州)였으며, 1115년 수령부로 승격되었다. 1123년 대번(大藩)으로 승격되었다. 1236년 반란이 일어나 임시로 치소를 봉계채(蓬溪砦)로 옮기기도 했다.3.3. 순경부(順慶府)
남충군(南充郡). 본래 과주(果州)로 단련주였다. 1227년 이종의 첫 잠번이 이곳에 있었기에 부로 승격되고 검남동로(劍南東路) 관할이 되었다. 1236년 반란이 일어났다. 1249년 치소를 청거산(靑居山)으로 옮겼다.- 현
- 남충현(南充縣), 서충현(西充縣), 유계현(流溪縣)[7]
3.4. 자주(資州)
자양군(資陽郡). 군사주였다. 967년 월산현(月山縣), 단산현(丹山縣), 은산현(銀山縣), 청계현(淸溪縣)을 폐지하였다. 1120년 용수현을 자천현으로 고쳤다가 다시 용수현으로 고쳤고 1243년 폐지하였다.- 현
- 반석현(磐石縣), 자양현(資陽縣), 용수현(龍水縣), 내강현(內江縣)
3.5. 보주(普州)
안악군(安岳郡). 군사주였다. 967년 숭감현(崇龕縣)과 보자현(普慈縣)을 폐지하였다. 1236년 반란이 일어났다. 1243년 험지를 따라 치소를 설치했다가 보우 연간에 폐지하였다.- 현
- 안악현(安岳縣)[8], 안거현(安居縣), 악지현(樂至縣)
3.6. 창주(昌州)
창원군(昌元郡). 군사주였다.- 현
- 대족현(大足縣), 창원현(昌元縣)[9], 영천현(永川縣)
3.7. 서주(敍州)
남계군(南溪郡). 군사주로 본래 명칭은 융주(戎州)였다. 건덕 연간에 개변현(開邊縣)과 귀순현(歸順縣)이 폐지되었다. 1114년 서주로 고쳐졌다. 1267년 치소를 등고산(登高山)으로 옮겼다.- 채
- 유원채(柔遠砦), 낙종채(樂從砦), 청평채(淸平砦), 석문채(石門砦), 회원채(懷遠砦)[14]
- 기미주(羈縻州)
3.8. 노주(瀘州)
노천군(瀘川郡). 본래 군사주였으나 1119년 노천군(瀘川軍)이라는 군액을 받고 절도사가 파견되었다. 1170년 안무사(安撫使)로 승격되었다. 1261년 유정이 몽골에 항복하면서 몽골에 함락되었다가 다시 수복하고 강안주(江安州)로 고쳤다.- 보채
- 기미주
- 납주(納州), 설주(薛州), 안주(晏州), 공주(鞏州), 봉주(奉州), 열주(悅州), 사아주(思峨州), 장녕주(長寧州), 능주(能州), 육주(淯州), 절주(浙州), 정주(定州), 송주(宋州), 순주(順州), 남주(藍州), 진주(溱州), 고주(高州), 요주(姚州)
3.9. 합주(合州)
파서군(巴川郡). 군사주였다. 1243년 치소를 조어산(釣魚山)으로 옮겼다.3.10. 영주(榮州)
화의군(和義郡). 군사주였다. 1169년 화의현(和義縣)을 폐지하였다. 1236년 임시로 치소를 다른 곳에 설치했다가 보우 연간 이후 폐지하였다.- 현
- 영덕현(榮德縣)[37], 위원현(威遠縣), 자관현(資官縣), 응령현(應靈縣)
3.11. 거주(渠州)
인산군(鄰山郡). 군사주였다. 1255년 치소를 예의산(禮義山)으로 옮겼다.3.12. 회안군(懷安軍)
967년 간주(簡州) 금수현(金水縣)에 설치되었다.- 현
- 금수현(金水縣), 금당현(金堂縣)[42]
3.13. 영서군(寧西軍)
969년 합주(合州) 농회진(儂洄鎭)과 거주(渠州) 신명진(新明鎭)에 광안군(廣安軍)을 설치한 것이 시초였다. 1243년 대량평(大良平)에 성을 세우고 치소를 두었다. 보우(寶祐) 연간 말 몽골에 함락되었다가 경정(景定) 연간에 수복하였다. 1266년 영서군으로 고쳤다.3.14. 부순감(富順監)
노주(瀘州) 부의현(富義縣)에 설치되어 전염(煎鹽)을 담당하였으며, 966년 부의감(富義監)으로 승격되었다. 976년 부순감으로 고쳐졌다. 1064년 부순현(富順縣)을 설치했다가 1068년 폐지되었다. 1237년 반란이 일어나 부순감이 폐지되었다. 1265년 치소를 호두산(虎頭山)으로 옮겼다.[1] 수나라 때 명칭은 현무현(玄武縣)이었지만 1012년 중강현으로 고쳤다.[2] 1072년 진으로 격하되어 염정현에 통폐합되었으나 정강의 변 이후 다시 설치되었다.[3] 수나라 때 방의현(方義縣)이라는 이름이었으며, 태평흥국 연간에 설치되었다.[4] 1236년 하삼현(下三縣)과 함께 폐지되었다.[5] 1073년 폐지되어 수령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074년 복구되었다.[6] 당나라 때 설치된 현이다.[7] 1073년 진으로 격하되어 남충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157년 복구되었다.[8] 1072년 보강현(普康縣)을 폐지하여 안악현에 통폐합하였다.[9] 1001년 치소를 나시(羅市)로 옮겼다.[10] 당나라 때 설치된 의빈현(義賓縣)으로, 태종이 즉위한 976년 한자만 바꿔서 바꿔서 의빈현(宜賓縣)으로 하였다. 1071년 진으로 격하되어 북도현(僰道縣)이 되었으며, 1114년 북도현을 의빈현으로 고쳤다.[11] 건덕 연간에 치소를 옛 분성(奮城)으로 옮겼다.[12] 당나라 때 설치된 의빈현(義賓縣)으로, 태종이 즉위한 976년 한자만 바꿔서 바꿔서 의빈현(宜賓縣)으로 하였다. 1071년 진으로 격하되어 북도현(僰道縣)에 속하였다. 1119년 다시 현이 되고 선화현으로 고쳐졌다.[13] 본래 서주 변경 바깥에 있던 땅이었지만 1113년 상주(祥州)를 설치하고 경부현과 내부현(來附縣)을 설치하였다. 1121년 상주가 폐지되고 내부현이 경부현에 통폐합되었으며, 서주 관할이 되었다.[14] 1126년 유원채와 낙종채가 폐지되어 회원채에 통폐합되었다.[15] 이상이 남광계동(南廣溪洞)에 있었다.[16] 이상이 마호강(馬湖江)에 있었다.[17] 이상이 석문로(石門路)에 있었다.[18] 요구채(遙埧砦), 청산채(靑山砦), 안계채(安溪砦), 소계채(小溪砦), 대두채(帶頭砦), 사군(使君砦)가 있었다. 대관(大觀) 3년(1109년) 안계채(安溪砦)에 현을 설치하여 순주(純州) 관할로 두었다가 순주가 폐지되면서 채로 격하되었다. 선화(宣和) 3년(1121)년 요파(遙壩)가 폐지되었다가 이듬해에 복구되었다.[19] 황우(皇祐) 3년(1052년) 납계구(納溪口)에 설치되었다. 소정(紹定) 5년(1232년) 현으로 승격되었다.[20] 가정(嘉定) 4년(1211년) 안이채(安夷砦)를 현으로 승격하였다. 무령채(武寧砦)와 영원채(寧遠砦)가 있었다.[21] 1081년 설치되었다.[22] 1108년 순주(純州)를 설치하면서 구지현(九支縣)과 안계현(安溪縣), 미리성(美利城)이 관할이 되었다. 1121년 순주와 구지현을 구지성으로 격하시키고 안계현과 미리성을 채로 격하시키고 자죽채(慈竹砦)를 보로 격하시켰다.[23] 1109년 자주(滋州)를 설치하면서 승류현(承流縣)과 인회현(仁懷縣)을 설치하였다. 1121년 자주를 무도성으로 격하시키고 인회현을 보로 격하시키고 승류현을 인회보에 통폐합하였다.[24] 원풍(元豊) 3년(1080년) 평이보(平夷堡)를 폐지한 뒤 나지(羅池)에 새롭게 설치되었다. 1110년 폐지되었다가 1115년 복구되었다.[25] 1117년 설치되었다.[26] 1116년 설치되었다.[27] 무도성에 속했으나 1121년 노주 직할이 되었다.[28] 본래 기미주였으며, 1075년 육정감(淯井監)이 설치되어 노주 관할로 들어온다. 1114년 장녕군으로 설치되었다.[29] 1115년 설치되었다.[30] 상주(祥州)에 속했으며, 1112년 설치되었다. 1121년 상주가 폐지되어 장녕군 관할이 되었다.[31] 1075년 설치되었으며 원래 소계구채(小溪口砦)라는 이름이었다. 1077년 무령채로 고쳤다. 1081년 폐지되었다가 1082년 복구되었다. 1114년 장령군의 현이 되었다가 1120년 보로 격하되었다. 1122년 다시 채가 되었다.[32] 1049년 삼강채(三江砦)가 설치되고 1051년 영원채로 이름을 고쳤다. 1120년 보가 되었다가 1122년 다시 채가 되었다.[33] 1073년 파사채(婆娑砦)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1110년 폐지되었다가 1116년 다시 설치되었다.[34] 1115년 설치되었다. 매뢰채(梅賴砦)라는 이름이었으나 뒤에 석순보로 고쳐졌다.[35] 위나라 때 석감현(石鑒縣)이라는 명칭이었으나 965년 석조현으로 고쳤다.[36] 1071년 폐지되어 동량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074년 다시 설치되었다.[37] 욱천현(旭川縣)이라는 이름이었지만 1067년 고쳐졌다. 1071년 공정현(公井縣)을 진으로 격하시켜 영덕현에 통폐합했다. 염감이 있었으나 1236년 폐지되었다.[38] 서위 때 설치된 현이었다.[39] 당나라 때 설치된 현으로 966년 치소를 곤루진(昆樓鎭)으로 옮겼다.[40] 양나라 때 설치된 현으로 965년 치소를 옛 인주성(鄰州城)으로 옮겼다.[41] 1036년 유강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133년 다시 설치되었다.[42] 967년 한주(漢州)에서 회안군 관할이 되었다.[43] 969년 거주에서 영서군 관할이 되었다.[44] 969년 과주에서 영서군 관할이 되었다.[45] 969년 합주에서 영서군 관할이 되었다. 973년 치소를 단계진(單溪鎭)으로 옮겼다.[46] 1207년 화계진을 현으로 승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