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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0:29:05

조지프 스틸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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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us_army_ww2.png 제2차 세계 대전 미군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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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of the Army / Fleet 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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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잭 플레처 | 제시 올덴도르프 | 윌리스 리 | 존 매케인 시니어 | 존 H. 타워스 | 줄리안 C. 스미스M| 로이 가이거M | 앨런 H. 터니지M | 드위트 클린턴 램지 | 프레더릭 C. 셔먼 | 찰스 록우드 | 로버트 C. 기펜 | 로버트 곰리 | 루이스 덴펠드 | 찰스 M. 쿠크 주니어 | 아서 L. 브리스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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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jor General / Rear 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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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밴 플리트 | 모리스 로즈 | 커티스 르메이AAF | 맥스웰 테일러 | 레슬리 그로브스 | 윌리엄 F. 딘 | 클레어 셰놀트AAF·전 | 랄프 스미스 | 월터 쇼트 | J. 로턴 콜린스 | 로버트 올즈AAF | 리먼 렘니처 | 호바트 R. 게이 | 로스코 B. 우드러프 | 에드윈 F. 하딩 | 스태퍼드 리로이 어윈 | 윌리엄 J. 도너번 | 존 P. 루카스 | 에드윈 D. 패트릭| 클래런스 L. 팅커AAF† | 로버트 아이첼버거 | 찰스 윌로비 | 윌리엄 B. 킨 | 핸퍼드 맥나이더 | 폴 뉴가든 | 프랭크 캐들 마힌 | 폴 J. 뮐러 | 노먼 코타 | 어니스트 N. 하먼 | 찰스 H. 게르하르트 | 앤드루 데이비스 브루스 | 로버트 W. 해즈브룩 | 제임스 로턴 콜린스 | 존 B. 콜터 | 패트릭 헐리 | 프랭크 W. 밀번 | 앨버트 W. 월드론 | 클로비스 E. 바이어스 | 윌리엄 W. 이글스 | 윌리엄 F. 샤프 | 프랭클린 C. 시버트 | 아이작 D. 화이트 | 조지 데커 | 카터 매그루더 | 로버트 B. 매클러 | 클라크 L. 러프너 | 앤서니 맥콜리프 | 레이먼드 바턴 | 로버트 N. 영 | 윌리엄 M. 호그 | 제임스 L. 브래들리 | 클래런스 R. 휴브너 | 윌러드 G. 와이먼 | 루이스 A. 크레이그 | 찰스 H. 콜렛 | 에드워드 H. 브룩스 | 가이 V. 헨리 주니어 | 앨버트 E. 브라운 | 월터 M. 로버트슨 | 새뮤얼 E. 앤더슨 AAF | 도널드 윌슨 AAF | 테리 앨런 | 도일 히키 | 길버트 R. 쿡 | 제임스 E. 채니 | 데이비드 바 | 에드워드 알몬드 | 에드워드 P. 킹 | 조지 M. 파커 | 조지 F. 무어 | 토머스 B. 라킨 | 러셀 P. 하틀 | 프랭크 오드리스콜 헌터 AAF 전 | 헨리 오랜드 | 찰스 W. 라이더 | 아처 L. 러치 | 찰스 L. 볼트 | 알프레드 그루엔터 | 로리스 노스타드 |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 | 레이 바커 | 에드윈 P. 파커 주니어 | 해리 J. 맬로니 | 찰스 L. 스콧 | 브루스 매그루더 | 올랜도 워드 | 존 밀리킨 | 존 W. 레너드 | 제임스 개러시 오드 | 제이 L. 베네딕트 | 로버트 S. 바이틀러N | 레너드 F. 윙N | 존 달퀴스트 | 프레드 L. 워커 | 어니스트 J. 돌리 | 유진 M. 랜드럼 | 프랭크 메릴 | 오벌 R. 쿡 AAF | 로렌스 S. 커터 AAF | 얼 E. 파트리지 AAF | 휴 존 케이시 | 레이먼드 A. 휠러 | 루이스 A. 픽 | 고든 P. 새빌 A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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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adier general / Rear admiral (lower ha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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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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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이 버크 | 해리 W. 힐 | 로렌스 A. 애버크롬비 | 메리트 에드슨M | 레이 A. 로빈슨M | 제임스 알렉산더 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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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55e93><colcolor=#fff> 미합중국 제6대 서부방위사령관
조지프 스틸웰
Joseph Stilwell
파일:Joseph_Stilwell.jpg
본명 조지프 워렌 스틸웰
Joseph Warren Stilwell
출생 1883년 3월 19일
플로리다 팔랏카
사망 1946년 10월 12일 (향년 63세)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묘소 웨스트포인트 국립묘지
재임기간 제6대 서부방위사령관
1945년 12월 ~ 194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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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55e93><colcolor=#fff> 복무 미합중국 육군
1904년 ~ 1946년
최종 계급 대장 (미합중국 육군)
주요 참전 미국-필리핀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국공내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국방수훈근무훈장
수훈십자장
육군수훈근무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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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 유라시아 전선의 연합군 내부의 적
3.1. 군사적 무능함3.2. 정치적 무능함3.3. 성격적 결함
4. 여담5.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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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대장.

2. 생애

1883년 플로리다에서 출생했다. 1904년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도중 화약고 폭발 사고로 눈에 큰 상처를 입었다.[1] 그 이후 톈진 조계지 주둔 미 육군 제15보병연대 작전과장, 주중 미국 공사관 국방무관 등으로 중국에서 10여년을 복무해 표준 중국어에 매우 능통해 스스로 시장 한바닥에서 서민들과 어울릴 정도로 중국인들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스틸웰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퇴역을 앞둔 육군 중장이었는데, 전쟁 발발로 인해 퇴역을 연기하고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장제스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미중관계의 강화를 위해 미국인 참모장 파견을 요청하였다. 루스벨트와 육군 수뇌부는 먼저 휴 A. 드럼 중장에게 중국 파견을 제안하였으나, 드럼은 더 중요한 보직을 맡고 싶어했으며, 자신을 요직에서 배제한 조지 C. 마셜에게 불만이 있었기에 중국행을 거절했다.[2] 그래서 중국어에 능통한 스틸웰이 당초 예정되었던 북아프리카 대신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스틸웰은 대규모 부대를 다룬 경험이 없었고 성향도 무모할 정도로 공격적이었다. 그 때문에 버마 전역에서 패배하는 등 전과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적을 너무 얕잡아보는 성향이 강하여 창더 전투, 대륙타통작전의 파멸적 피해를 야기한 바가 있다. 이러한 성격적 결함으로 인하여 중국은 물론 영국 및 같은 미국인들과의 마찰도 극심했다.

1943년 스틸웰은 인도에서 육성한 중국 육군 정예군인 X군과 영국군, 미 육군 메릴 부대, Y군과 연합, 버마를 탈환함으로 그나마 설욕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중국군 지휘권을 가지려는 욕심을 부리다가 분노한 장제스에 의해 해고당하고 앨버트 웨드마이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44년 8월에 육군 대장으로 진급,[3] 미 육군 지상군 사령관,[4] 제10야전군사령관[5] 등을 거쳐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후 중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장제스에게 입국 거부당했으며 이후 남한 군정사령관이 될 뻔했으나 장제스가 반대하여 하지가 대신 군정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자서전을 집필하려 했으나 미완성 서문의 초고만 여러 개 만든 채 1946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중국 측에서도 어쨌든 미우나고우나 함께 싸운 연합국 장군이었기에 칭호를 서훈했다.

3. 평가: 유라시아 전선의 연합군 내부의 적

"만일 스틸웰이 중국 장군이었다면 추호의 의심도 없이 총살 집행대에서 끝장냈을 터였다."
- 클레어 셰놀트
스틸웰의 영웅적 지위를 논하자면 그의 용기와 중국 문제에 관한 식견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다. 타임의 시어도어 화이트는 뒤이어 스틸웰의 일기를 출판함으로 성인화 운동을 추진했다. 이 운동은 1970년 바바라 터크만이 스틸웰 전기를 출판해 퓰리처상을 수상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스틸웰의 전장 성과에 대한 기록으로는 그를 위대한 사령관으로 나타내기 어려웠다. 동시에 군사 정치 측면에서 그는 수행해야 할 사명을 완수하는 데 실패했고, 그가 장제스에게 제안한 것들은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없었다. 근본적으로 말해 스틸웰이 이루고자 했던 목적과 그가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방식은 불가능했다.
-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 532~533페이지
그(스틸웰)는 능력 있고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휘하 병사들을 거의 극한까지 내모는 일도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속이고 술수를 쓰고 무능한 것을 절대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한 공격적이고 조심성이 없으며 고집스럽고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싫어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중국에서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일을 하는데는 편견이 더 적고 외교적 수완이 더 많이 필요했다.
-리처드 번스타인,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당시 미국에는 중국 전역에 파견할 만한 인재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스틸웰은 갑작스럽게 생각지도 못한 중책을 맡아버렸다.[6][7]

그 스스로를 포장하는 재주는 뛰어나, 전쟁 당시는 물론 전후에도 상당히 고평가받았다. 1942년 버마에서 참패했을 당시 걸어서 달아나는 처지였는데도 불굴의 장군이라는 영예를 얻었으며, 전후에도 시어도어 화이트 등을 비롯하여 서구권 기자들은 '스틸웰 장군은 유능하고 강직한데 무능하고 부패한 장제스와 중국국민당이 모든 걸 망쳤다'는 모함 기사를 써 댔고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 등 서구권의 중일전쟁을 다룬 저서나 매체들도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었다. 이후 바바라 터크먼이 스틸웰 전기를 출판함으로 스틸웰 장군은 장제스에게 희생된 명장으로 알려졌고 중일전쟁 담론이 재평가되기 이전에는 이에 낚인 사람들이 미국은 미개한 중국을 도우려 했는데 부패한 국민당과 무능한 장제스가 모든 걸 망쳤다~라는 식으로 중일전쟁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의 과장되고 왜곡된 명성은 공고화되고 중국의 명예는 땅을 쳤다. 이후 미 육군에서 남긴 스틸웰 장군의 평가 또한 기본적인 소스를 터크먼의 스틸웰 전기를 바탕으로 함에 따라 스틸웰을 매우 고평가하고 있다.

허나 비교적 빠르게 스틸웰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끝내고 이전부터 그와 마찰을 빚던 영국에서는 진작부터 스틸웰을 무타구치 렌야와 동급인 인물이라고 힐난했고,[8] 이후의 다른 연구들에서도 태평양 전쟁 중에 남방작전, 대륙타통작전이 발굴되면서 졸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별개로 미국의 반중공 보수주의자들과 장제스 지지자들은 스틸웰 장군이 마오쩌둥의 집권을 도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스틸웰 장군이 공산당을 들먹이며 장제스를 길들이려고 한 것과 별개로 스틸웰 장군이 공산당에게 도움을 준 것은 한 차례의 의료품 수송이 전부였으니 스틸웰 장군이 공산당을 직접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아군을 망쳐놓는 것이 적을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것인데 스틸웰은 국민당군을 제대로 망치면서 공산당의 집권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9] 스틸웰 장군은 무능한 작전으로 국민당의 주력 부대들이 파멸적 타격을 입고 국민당의 국제적 입지가 좁아졌으며 미국에서 반중화민국 감정을 심화했다는 것에서 비판받는 것이다.

중국 위협론이 대두됨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에 크게 일조한 스틸웰의 평가는 더 나락으로 추락중이다. 오죽하면 가능한 자국에 누워서 침 뱉기는 하고 싶지 않아 스틸웰을 온건하게 평가하던 미국에서조차 날이 갈수록 스틸웰을 대놓고 욕하는 일이 늘고 있다.

스틸웰 장군이 비판을 당하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3.1. 군사적 무능함

사실 스틸웰은 명령받은 일은 성실하게 수행하고, 부하 장병과 모난 것 없이 잘 지내는 "무난한" 인물이었다. 미군 내부에서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고, 별다른 하자도 없던 장군이었다. 애초에 그 정도 역량도 없었다면 전간기에 장성까지 승급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무난한 인물이라는 특징과 더불어 북양정부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된 경력이 있다보니, 태평양과 대서양 두 전선에서 고생하던 미국 입장에선 대충 중국에다 던져넣기 아주 최적인 인사였다. 당시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이해는 현대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족했으며, 중일전쟁이 거의 독소전쟁에 맞먹는 규모의 대전장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는 현대 군사학계에서도 드물다. 그러니 당시 미국에서도 스틸웰 한 명이면 충분했을 것이라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장군 한명을 대충 던져넣고 잊어버리기엔, 중국이 너무나 거대했고 중요했다.

만일 스틸웰이 다른 대장급 장성의 휘하 부관 혹은 군단장으로 파견된 것이었다면, 사고치는 일 없이 무난하게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틸웰의 역할은 장제스에게 파견된 연합군 참모장으로서 아시아 전선 전역을 총괄하는 것이었고, 그가 참모로서 조언해야 했던 곳은 100만 단위에 이르는 무지막지한 병력이 중원이라는 드넓은 대지에서 수 개 전역으로 얽혀있는 아수라장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전역이라면 원수 몇 명이 담당해도 모자란 수준이었는데[10] 스틸웰은 대규모 군대를 야전에서 지휘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미국이 스틸웰 장군에게 원하던 것은 그가 아시아의 연합군을 지휘하여 뭐 대단한 일을 해보라는 것이 아닌, 루스벨트 행정부가 아시아의 연합국인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틸웰 장군은 생전 처음으로 대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능력 밖의 목표만을 세웠다.

그가 처음으로 친 사고는 1942년 버마 전투였는데 연합국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대하려 했던 장제스가 영국에 버마 방위를 돕겠다고 제안하자 자신이 버마 원정군 10만 명의 지휘관이 되어 버마로 달려가서 10만 명을 통째로 날려먹었다.[11] 중화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지형도 잘 모르고 민심도 험악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중국 입지가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영국이 지극히 비협조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12] 스틸웰 장군이 무리하게 공세 작전을 펼쳤다가 박살이 났던 것이다. 게다가 이 10만 명의 군대는 중국 전선에서 4년 동안 일본과 싸워 오며 많은 전과를 올린 부대였고, 특히 쑨리런 휘하의 38사단은 영국 육군들도 노련한 베테랑이라고 칭송할 정도로 전과를 올려 왔던 부대다.[13] 그러나 이 부대는 단지 스틸웰 장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그리고 스틸웰 장군의 패배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무능한 군대로 매도당했다.[14]

그 외에도 중일전쟁의 양상에 대한 이해도 없이 장제스와 국민당이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 위주의 전략과 지연전, 소모전을 채택했다고 싸울 의지가 없는 무능하고 소극적인 자들이라고 일단 비웃고 봤다. 그러나 국민혁명군의 소모전 위주 전략은 경험을 통해 얻어낸 전략으로 일본 육군의 진격을 저지한, 매우 유효한 작전이었다. 이는 비단 스틸웰 장군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 육군 참모들도 답습한 오류였다. 그래 놓고 자신은 일본 육군을 얕잡아보고 공세를 지시했다가 버마에서 박살났다.

또한 적을 근거 없이 깔보곤 했는데 그는 버마에 일본 육군 10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5개 사단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마구잡이로 병력을 돌진시켰다가 크게 고생을 했다. 대륙타통작전 직전에도 장제스가 일본 육군의 대규모 공세를 예고하자 50만이나 되는 일본 육군이 집결하는데도 장제스의 엄살이라 주장하며 장제스의 유일한 예비대인 Y군을 버마로 보내 버리는 희대의 자폭 행위를 저질렀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함이나 실수에 대해 죽어도 인정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남 탓만 하며 발악했다. 그런 주제에 야망은 커서 버마 탈환, 중국군 지휘권 박탈 등을 노리며 끈질기게 장제스를 괴롭혔고 심지어 장제스 암살 작전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다만 실전과는 달리 워게임은 잘해서 진주만 공습 후 LA에서 진행된 워게임에서 일본식 기동전을 응용해 일방적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그가 가고 싶었던 북아프리카 대신 중국으로 복귀하는 촌극이 벌어졌지만. 영화 1941 참고. 탁상 위 공론과 현실 군정은 다름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3.2. 정치적 무능함

(스틸웰의) 방식은 미국인이 선언한 민주주의와 민족 자결의 약속을 단지 조롱거리로 만들 뿐인 신식민주의를 중국에 강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조너선 펜비
그런가 하면 자신이 한 나라를 대표해 동맹국에 파견된 참모장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 난폭하고 일방적인 행동만 일삼았다. 당시 그의 위치는 단순한 주재무관 정도가 아니라, 그의 판단에 따라 미국의 동아시아 관련 정책이 뒤바뀔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는지 장제스가 스틸웰의 해임을 요구하면서 동맹 간에 보여야 할 기본적인 상호 존중과 배려를 전혀 보이지 않은 사람이라 비난했을 정도다. 스틸웰 장군은 자신의 일기장에 장제스를 땅콩, 독사라고 비난하는 글을 써댔고 인종차별주의와 편견으로 똘똘 뭉쳐서 중국을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동맹국인 중국을 폄하, 모함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으니 장제스와의 마찰은 극도로 심화되었다.

먼저 파견되었던 소련바실리 블류헤르, 미하일 보로딘, 그리고 나치 독일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등을 위시로 한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하다 못해 다른 미국인 고문인 미 육군 항공대 준장 클레어 셰놀트 장군이 장제스와 잘 지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스틸웰은 장제스가 준 10만 정예병을 말아먹고도 미안한 줄을 몰랐다. 대륙타통작전 직전인 장제스를 무시해 놓고 중화민국군 50만 명의 목숨을 날렸을 때는 장제스는 당해야 정신을 차린다고 고소해 하며, 아마 장제스가 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해 일부러 져주었으리라는 음모론을 떠들고 다녔다. 장제스를 압박하고자 장제스에게 주어야 할 원조를 착복하며 장제스를 위협했고 공산당을 찬양하는 한편[15] 본국에 장제스가 얼마나 한심하고 무능하고 망상에 찬 인간인지 헐뜯는 보고를 끊임없이 올림으로써 미국의 대중여론까지 망쳐놨다. 만약 셰놀트 장군이나 장제스가 직접 루스벨트에게 연락을 넣어 스틸웰 장군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으면 중국이 받을 지원은 더욱 줄었거나 아예 끊어졌을 것이다.

당장 스틸웰 장군의 해임만 해도 자기 자신이 자초한 것이었는데 스틸웰 장군은 장제스를 모욕하고 협박하면 장제스가 자신에게 지휘권을 바칠 것이라 확신했지만 실제로 장제스는 스틸웰 장군에게 지휘권을 주느니 그냥 미국과의 동맹을 끊겠다고 나왔고 잘린 것은 스틸웰 장군이었다. 바로 스틸웰 장군 옆에서 미국 특사 패트릭 헐리가 장제스를 자극해서 나올 것이 없다고 뜯어말리는데도 날뛰다가 생긴 결과물이 자신의 해고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잘못해서 해고당했다는 생각은 못한 채 그저 해고당했다는 사실에 빡쳐서는 후임자인 웨드마이어에게 인수인계조차 하지 않은 채 인도로 떠났다.

3.3. 성격적 결함

스틸웰은 중국인들에게 성마르게 굴었고, 정도 면에서 그 성마름을 넘어서는 것은 자기의 협력상대인 영국인들에게 보이는 무례함뿐이었다.
존 키건, 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820페이지.
스틸웰 장군의 별명은 Vinegar Joe, 즉 '초치는 조'[16]였는데 그는 딱 자기 별명대로 굴었던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태클을 걸고 보니 같은 미 육군 장교인 클레어 셰놀트 장군과의 사이도 심각하게 나빴고 미 육군 소속 특수목적부대 메릴의 부대[17]조차도 스틸웰 장군의 지휘에 대해서 항명을 하며 격렬히 반발할 정도였다.

스틸웰은 자신의 마음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으면 무조건 남만 비난했다. 예컨대 그가 계획하던 버마 탈환 작전이 영미의 비협조로 순조롭지 않자, 장제스도 미군의 도움 없이는 중국군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스틸웰이 장제스 최정예 부대 10만 명을 날려버렸음을 생각하면 매우 당연하거니와[18]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해도 국가 지도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자기 나라 군대만 피 흘려야 하는 상황을 대뜸 받아들일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도 스틸웰은 장제스가 정신 나간 미친놈이라고 저주해댔다.

그리고 대륙타통 작전으로 중국 전체가 박살이 나는 상황에서 장제스가 스틸웰 장군이 농간을 부려 뺏어간 Y군을 돌려달라 하자 장제스를 잡놈이라 비난했다. 자신의 명예만 충족되면 그는 중국이 망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장제스로부터 지휘권을 뺏을 수 있다면 '배가 침몰 직전까지 가도 상관없다.'고 할 정도로 그는 이기심에 강했다. 이러하니 장제스는 스틸웰 장군의 성격이야말로 문제라 지적했다. 중일전쟁의 저자 권성욱은 스틸웰 장군이 불화만 불러오르는 사람이라 비판했다.

4. 여담

5. 대중 매체



[1] 왼쪽 눈은 완전히 실명했으며 오른쪽 눈은 두꺼운 안경이 필요했다.[2] 휴 드럼은 이후 미국 본토를 방어하는 동부방위사령부(Eastern Defense Command) 사령관으로 근무하다가 퇴역했다.[3] 이 시기 스틸웰은 2차대전 미 육군에서 임명된 전시 대장급 장성 16명중 진급서열 4위였다. 선임자는 더글러스 맥아더(남서 태평양 전구 사령관/41년 12월-최초 전시 진급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북서 유럽 전구 사령관/43년 2월), 헨리 아놀드(육군항공대-공군참모총장/43년 3월)로 44년 연말에 모두 원수로 진급했고, 다른 대장 12명은 45년이 되어야 우르르 진급했으니 사실상 4성 장군 No.1이었던 것이다.[4] 레슬리 맥네어 중장의 후임이었다.[5] 오키나와 전투 막바지에 전사한 사이먼 B. 버크너 중장의 후임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단 실제 전투는 10군 예하의 3상륙군단장이었던 로이 가이거 해병중장이 스틸웰 부임 전 야전군사령관 대행으로 마무리 지었고, 스틸웰은 전투 종료 후의 행정 처리를 맡았다. 참고로 로이 가이거 중장은 유일하게 야전군을 지휘해본 해병대 장성으로 이름을 남겼다.[6] 문제는 당시 미국에는 중국어가 가능한 장성이 스틸웰을 제외하면 없다시피 했다는 점과 중국 전선의 중요도는 태평양, 유럽에 비해서는 한참 밀린다는 것이었다. 대략 요약하자면 애초에 다른 쓸만한 인물도 없다시피 했고, 중국에서 뭔가를 혼자서 해볼만큼 유능한 인물이 있었다면 그런 인물은 태평양, 유럽에서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7] 참고로 스틸웰과 같은 나이, 같은 계급이었고 그 대신 북아프리카에 파견된 인물은 다름아닌 희대의 똥별 로이드 프레덴달이었다. 이를 보면 그냥 당시 미군의 인재풀이 부족했던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8] 윙게이트 여단 참모장이었던 데릭 소장의 언급했다. 그리고 영국 측에서는 클레어 셰놀트 역시 형편없는 장군으로 평가했다.[9]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라고 놀림받는 무타구치 렌야나 일본의 명장이라는 조롱을 듣는 원균과 비슷한 경우라고 보면 될 것이다.[10] 아주 당연히도, 일본군 또한 그런 역량이 없었으므로 대륙타통 작전에서 실망스런 성과를 얻었다.[11] 이 숫자는 당시 중국군의 전략예비대의 ⅓에 달하는 엄청난 수다.[12] 여기에 중국군에게 온 트럭 150대와 거기에 실려있던 탄약 등의 랜드리스 물자 중 기관총 20정만 내주고 죄다 꿀꺽했다. 출저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 152쪽.[13] 물론 이들과 같은 정예병력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제대로 된 개인화기 보급조차 되지 않았고, 고위 지휘관들 또한 간단한 독도법 조차 깨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예부대들을 상당수 잃은 중국군은 말 그대로 전근대적인 군대였고, 그 때문에 일본군과 맞붙었다 하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전비가 극악이었다.[14] 다 양보해서 이 중국군들이 오합지졸이었다고 해도, 지극히 불리한 상황에서 다짜고짜 공세를 명령한 스틸웰 장군의 작전이 근본적 문제였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정예병이라 하더라도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기강이 해이해지면 오합지졸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15] 정작 본인이 그토록 찬양하는 공산당은 항일에 소극적인 정도가 아니라 같은 국민당군을 공격하며 세력 확장이나 하고 일본군에 국민당군 기밀을 팔아넘기고 있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장제스와 중국을 까려고 혈안이 된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16] 번역이 다양하다.[17] 지휘관 프랭크 메릴 대령의 이름을 따 Merrill's Marauders로 불리던 버마 전선의 연대급 미육군 혼성부대로, 태평양 전선 각급 부대의 정글전 유경험자들의 자원을 받아 임시 편성한 장거리 정찰 및 침투, 타격 전문 특수목적 부대였다. 전후 75연대로 흡수, 재편되어 현대 미군의 티어 2급 특수부대인 제75레인저연대의 직접 조상이 되었다. 그린베레, MACV-SOG 등 이후 미군 특수부대에 많은 영감을 준 전설적인 부대이자 현대 그린베레, 네이비 씰 등의 미군 특수부대들의 효시이자 교과서급인 고조할아버지급의 특수부대이다.[18] 원정군의 75%가 날아갔다.[19] 만주국과 중국공산당은 미국와의 관계 향상 트리는 있지만(독/소/불/영/미/일 중점은 삼국 공용이다) 이념 및 다른 중점들을 먼저 찍어야 해서+이념(파시즘/공산주의) 문제로 중화민국이 아니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