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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2:42:17

성주 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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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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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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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be673>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신라 6성
星州 裵氏 (星山 裵氏)
성주 배씨 (성산 배씨)
관향 <colbgcolor=#fff,#000>경상북도 성주군
비조 지타(祗陀)
도시조 배현경(裴玄慶)
시조 배위준(裵位俊)
중시조 배인경(裵仁敬)
집성촌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동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송촌리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본리동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
경상북도 금릉군 조마면 신안동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마산리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죽대리
함경남도 영흥군 억기면 양중리, 향하리
인구 148,672명(2015년)

1. 개요2. 분파3. 항렬자4. 인명
4.1. 고려시대4.2. 조선시대4.3. 그외 성주 배씨 인물4.4. 문과 급제자
5. 관련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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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성주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성산 배씨(星山 裵氏)라고도 하는데, 성산은 성주의 옛 이름이기 때문이다.

지역별 인구 분포도는 서울 15,184명, 부산 7,466명, 대구 16,010명, 인천 3,829명, 광주 808명, 대전 3,774명, 울산 1,726명, 경기 12,950명, 강원 1,509명, 충북 3,216명, 충남 3,825명, 전북 2,441명, 전남 5,593명, 경북 6,689명, 경남 5,010명, 제주 209명이다.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하며 6가야연합국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의 영토였다. 6세기 무렵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어 벽진군(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였다가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하여 개칭되었다.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바뀌어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경산부로 환원되었다. 1295년(충렬왕 21)에 와서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를 두어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다시 경산부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성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이후 1616년(광해군 9)에는 신안군으로, 1631년(인조 1)에는 신안현으로 개칭되어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성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는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관할면이 성주·벽진면 등 9개면으로 폐합되었고, 1979년에 성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시조인 배위준(裵位俊)은 고려 시대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다.
시조 배위준(裵位俊)은 배현경(裵玄慶)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삼중대광벽상공신에 올랐다. 본관을 성주로 정한 것은 그의 현손 배인경이 고려 원종 때 흥안(성산의 옛이름)군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조에 성산군에 봉해진 배천룡을 시조로 삼는다는 설도 있다. 성주는 경상북도 성주군의 지명이다.

성산배씨(星山裵氏)는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오른 배위준(位俊)을 파조(派祖)로 받들고, 그의 현손(玄孫) 배인경(仁慶)이 충선왕(忠宣王) 때 추밀원사(樞密院事)를 지낸 후 충숙왕(忠肅王) 때 흥안(興安) 부원군에 봉해진 연유로 성산(星山)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1764년(영조 40)에 편찬된 「갑신합보(甲申合普)」에는 중시조(中始祖) 배현경(玄慶)의 현손인 배사혁(斯革 : 삼중대광)의 둘째 아들 배천룡(天龍)을 파조(派祖)로 기록하고 있는데, 계대(系代) 소목(昭穆)이 미상(未詳)하므로 배위준(位俊)을 파조로 계대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이론이 지배적이다.

대체로 고려 말기에서부터 위세(威勢)를 떨쳤던 성산 배씨는 흥안부원군 배인경(仁慶)의 아들 배문적(文迪)과 배무적(武迪)이 크게 현달(顯達)하여 성산 배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고려 말에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를 지낸 배문적(文迪)의 손자 배진손(晋孫 : 추밀원사 배용성의 아들)은 천품이 온후하고 기개(氣槪)와 도량(度量)이 빼어나 여말(麗末)에 문과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우 배진후(晋后)는 태종 때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세종(世宗) 때 좌사간(左司諫)에 올라 청백(淸白)함으로 명망이 높았다.

조선 세종조(世宗朝)에서 지례 현령(知禮 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배규(規)는 배진손(晋孫)의 맏아들로 이조 참의(吏曹 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며 탁월한 문장으로 <관서(關西)의 공자(孔子)>로 일컬어져서 쌍성 총관(雙城 摠管)을 지낸 아우 배구(矩)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사간(司諫) 배진후(晋后)의 아들 배유(裕)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응교(集賢殿 應敎)가 되어 「고려사(高慮史)」 찬집에 참여했으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사육신(死六臣)이 화를 입게 되자<혈서상소(血書上疏)>로 충직을 호소하다가 청주로 유배되었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배무적(武迪)의 6세손 배극렴(克廉, 위위소윤 배현보의 둘째 아들)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 ․ 상주의 목사(牧使)와 계림(鷄林) ․ 화령(和寧)의 부윤(府尹)을 지내고 우왕(禑王) 때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양백연(梁伯淵) ․ 우인렬(禹仁烈) 등과 함께 진주와 사근역(沙斤驛 : 경산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으며,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위화도(威化島) 회군을 결행하고 우시중(右侍中)에 올라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한 배치(絺)가 울산 부사(府使)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총병(慶尙左道 水軍摠兵)을 지내며 정사(政事)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빈민 구제에 앞장서서 향민(鄕民)이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를 지낸 배수광(綉光)은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 구제에 전심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그 외 명종(明宗) 때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만들었던 배도(壔)와 가재(家財)를 기울여 빈민을 구제하여 왕으로부터 승일(乘馹)의 은전(恩典)을 받았던 배진서(振緖)가 유명했으며,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배흥립(興立)은 흥양 현감(興陽 縣監)으로 전함을 많이 만들어 임진왜란에 공을 세웠고 한산도(閑山島)와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주역으로 활약하여 고향에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특히 명종(明宗) 때 언양 현감(彦陽 縣監)을 지냈던 배덕문(德文)은 형조 좌랑(刑曹 佐郞)을 거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제독(提督)으로 임명되어 의병을 이끌고 성주 탈환을 성공시킴으로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어 크게 이름을 떨쳤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조방장(助防將)으로 한산도와 노량진 전투에 참가했던 배즙(楫)은 전장에서 순절하여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배명순(命純)은 정묘호란에 인조(仁祖)를 강화도(江華島)로 호송하여 도총부 도사(都摠府 都事)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 영장(營將)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결전을 주장했으나 주화론자(主和論者)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효종(孝宗)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배시량(時亮 : 배흥립의 아들)과 석학(碩學) 정구(鄭逑)의 고제(高弟)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배상룡(尙龍) ․ 배상호(尙虎)가 대표적이며, 비안 현감(比安 縣監) 배명전(明全)의 아들 배상유(尙瑜)는 <심성정이기(心性情理氣)>를 연구했고, 배상보(相補)는 인조(仁祖) 때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를 거쳐 명천 현령(明川 縣令)을 역임하여, 숙종 때 승지로 필명(筆名)을 떨쳤던 배정휘(正徽), 수문장(守門將) 배문범(文範 : 壬亂功臣星州居都長武範号管堂) 정선 현감 배무화(舞和)와 함께 성산 배씨를 더욱 빛냈다.

성산복야공파(星山僕野公派)는 고려 말에 좌복야(左僕野)를 지낸 배영찬(英贊)을 기일세(起一世)로 하고 있다.

「배씨대족보(裵氏大族普)」에 의하면 그는 달성군(達城君) 배운룡(雲龍)의 10대손이며 상서좌복야(尙書左僕野)와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를 지낸 배천경(天慶)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관계 문헌의 고증(考證)에 따라 성산파(星山派)의 지파(支派)라는 이론이 지배적이다.

재미있는 점은 도시조 배현경[1]은 고려의 개국공신인데 후손인 배극렴은 바로 그 고려를 무너트리고 건국된 조선의 개국공신이다.[2]

배극렴은 고려 충숙왕 2년(1325년) 경북 성주읍 대황동에서 위위소윤(衛尉小尹)으로 있던 아버지 배현보와 어머니 서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관향인 성주 관하리에 살고 있을 때 그는 근처의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짓게 했다. 백성들은 그의 공을 고맙게 생각해 그 곳의 땅이나 하천을 배천(裵川), 배야(裵野)라고 불렀다. 공민왕 12년(1363) 진주목사로 부임했을 때는 산에서 잣나무를 북쪽 관아에 옮겨 심었다. 진주 사람들은 배극렴을 추앙해 이 나무를 시중백(侍中栢)이라 했다.

배극렴은 우시중으로 있던 1392년 조준, 정도전 등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국 일등공신이 되어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지고 문하좌시중이 됐다. 1392년 이성계가 세자를 책봉할 때 조준, 배극렴 등은 "평화시에는 적자가 책봉돼야 하고 난시에는 공이 많은 사람이 세자로 책봉돼야 한다.'며 이방원을 의중에 두고 주장하다가 묵살당했다. 이로 인해 조준은 사직당하고 배극렴은 불정면 삼방리로 귀양을 갔다. 이방원은 임금이 된 뒤 배극렴이 머물던 이곳의 산을 어래산(御來山), 마을을 삼방리(三訪里)라 부르게 했다.

2. 분파

3. 항렬자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26동(東)상(相)병(秉)락(樂)27환(煥)휴(烋)찬(燦)희(熙)28효(孝)중(重)경(坰)재(在)
29호(鎬)흠(欽)종(鍾)탁(鐸)30태(泰)영(泳)한(漢)호(浩)31식(植)근(根)주(柱)표(杓)
32노(魯)용(容)연(然)병(炳)33곤(坤)규(圭)달(達)기(基)34현(鉉)용(鏞)용(鎔)진(鎭)
35원(源)해(海)담(湛)경(逕)36영(榮)정(禎)병(柄)종(棕)37현(炫)훈(熏)렬(烈)황(煌)
38규(奎)장(墇)치(埴)재(載)39석(錫)주(鑄)옥(鈺)현(鋧)40수(洙)기(淇)윤(潤)락(洛)
41환(桓)락(極)근(槿)권(權)42희(熹)돈(焞)영(煐)형(炯)43원(垣)훈(塤)준(埈)증(增)

4. 인명

4.1. 고려시대

4.2. 조선시대

院吏來傳頂玉淸(원리내전정옥청)
사간원(司諫院) 서리(胥吏)는 관리들 청렴하다 하고
鷄塒牛巷便生命(계시우항편생명)
닭장과 소 다니는 거리 밝아 오는구나
家君舍弟曾經此(가군사제증경차)
아버님과 동생도 이곳에서 벼슬하여
壁上題三父子名(벽상제삼부자명)
삼부자 이름이 벽 위에 나란하네 }}} ||

4.3. 그외 성주 배씨 인물

배인익(裵仁益) 고려조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배양쾌(裵良快) 고려 때 판전리(判典理)를 지냈다.

배원서(裵元舒) 고려 때 좌복야(左僕野)를 역임하였다.

배인경(裵仁慶) 고려 원종(元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어전(御 前)에서 신맹섭(申孟攝) ․ 김구락(金九洛) ․ 이당진(李唐珍) ․ 박 규두(朴奎斗) 등과 함께 홍범(洪範) ․ 월령(月令) ․ 중용편(中庸 篇)을 강독하였다. 28세 때 보문각 직학사(寶文閣 直學士)가 되 어 충렬왕(忠烈王)에게 논어(論語)를 강의하였으며, 충선왕(忠宣 王) 때 지추밀언사(知樞密院事)에 올랐다. 연로하여 치사(致仕) 코저 하니 왕이 만류하여 “경은 대대로 공신의 자손으로 선조 의 은총을 받은 노신인데 어찌 나를 멀리 하려 하는가”하고 궤 장(几杖)을 특사(特賜)하였다. 충숙왕(忠肅王) 즉위 후 치사(致 仕)하고 귀향하게 되자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다.

배진손(裵晋孫) 자(字)는 사려(士麗), 호(號)는 아당(我堂).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판공부사(判工部事)를 지냈고 그후 여러 관직 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 다.

배진후(裵晋后) 호는 동암(東菴). 1393년(태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 한림(讀書堂 翰林) ․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 시강원 필선(侍講院 弼善) 등을 역 임하고 외직으로 나아가 많은 치적을 남기고 정사(政事)를 공정 히 처리하였다. 1406년(태종 6) 예문관 전한(藝文館 典翰)이 되고, 1416년(태종 16)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 右副承旨), 이 어 1420년(세종 2) 사간원 좌사간(司諫院 左司諫)에 이르렀다.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다.

배규(裵 規) 자는 중원(仲員), 호는 화당(花堂).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 독서당 한림(讀書堂 翰林) ․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 平) ․ 장령(掌令) 등을 거쳐 세종 때 지례 현령(知禮 縣令)으로 나아가 치정(治政)이 청백하였고, 그후 응교(應敎) ․ 전한(典翰) 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승진되고,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을 역임하였다. 문장이 탁월하여 세인이 관서(關西)의 공 자(孔子)라 치하였고, 유집(遺集)으로 「실기(實記)」 한 권이 전 해온다. 삼강서원(三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구(裵 矩) 고려 말에 무과에 급제하고 서해 안렴사(西海 安廉使)로 재직 중 김노(金虜)의 난이 일어나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가설 할 때 그 감독을 맡아 대군(大軍)의 도강(渡江)에 공이 많아 가 선대부(嘉善大夫)로 서북안렴사(西北安廉使) 겸 쌍성총관(雙城摠 管)에 승진되었다. 정사(政事)에 청백하고 공평하여 관내가 평온 하였다.

배유(裵 裕) 호는 녹야당(綠野堂). 1446년(세종 28) 생원시(生員試) 에 합격,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 弼善)이 되고, 1450년(세종 32) 한원(翰苑)에 뽑혔으며, 이듬해 집현전 응요(集賢殿 應敎)가 되어 왕명으로 「고려사(高麗史)」 를 찬집(纂輯)하였다. 단산축성역(湍山築城役)의 중지를 문종(文 宗)에게 상소하여 이를 실현하였고, 1453년(단종 1) 승정원 우 부승지(承政院 右副承旨)가 되고, 1455년(단종 3) 집현전 직제 학(集賢殿 直提學) ․ 지제교(知製敎)에 올랐다. 1456년 육신(六 臣)이 화를 입게 되자 혈서 상소(血書 上疏)하고 충직(忠直)으로 호소하다가 청주로 유배되어 풀리지 못하고 죽었다. 1691년(숙 종 17) 육신이 신원(伸寃)됨에 따라 그도 신원복작(伸寃復爵)되 었다. 자헌대부(資憲大夫) ․ 예조판서(禮曹判書) ․ 지의금부사(知 義禁府使)에 추증(追贈)되었다.

배한(裵 閑), 1414년(태종 14)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1419년 (세종 1)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이 되고, 1434년(세종 16) 정언(正言)을 거쳐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이 되었다. 1435년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가 되고 사간원 좌사간(司諫院 左司諫) 을 지냈다. 문장이 뛰어났고,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다.

배윤(裵 閏)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 1423년(세종 5) 교리 (校理) ․ 응교(應敎) 등을 거쳐 1430년(세종 12) 사간원 대사간 (司諫院 大司諫)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 直提學) ․ 지제교 (知製敎)에 이르렀다. 죽은 뒤 부인 손씨(孫氏)는 주자가례(朱子 家禮)에 따라 상례(喪禮)를 치르고 묘하(墓下)에 막(幕)을 짓고 삭발하여 정렬(貞烈)을 종신토록 지키니 왕이 천문(薦聞)하고 정 려(旌閭)를 명했다.

배온(裵 蘊) 자는 사옥(士玉), 호는 청산(靑山). 1417년(태종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청산 현감(靑山 縣監) ․ 청주 진관절 제 도위(淸州 鎭管節制 都尉)를 지냈다.

배선보(裵善輔): 자는 성원(聖元)이고 호는 회은(晦隱)이다. 성균관 직강(直講), 배윤겸(允謙)과 선략장군 최적의 따님 양천 최씨(陽川崔氏)사이에서 태어났다. 효우로 천거되어 참봉을 거쳐 성현도찰방을 지냈으며 당쟁으로 인한 화(禍)가 그치지 않아 벼슬길에 다시 나아갈 뜻을 접고 전원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었다.

배은(裵垠):자는 자호(子浩)이며 성현도찰방 배선보와 직장 송소의 따님인 야성 송씨(冶城宋氏) 사이에서 성종 14년(1483년) 태어났다. 유일로 천거되어 사직서 참봉에 제수되고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와 빙고별제(氷庫別提)를 지냈다.

배진경(裵振經): 자는 박옥(璞玉)이고 호는 막재(幕齋)이다. 사복시 주부 배은(垠)과 숙인(淑人)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중종 5년(1510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인효의 지성이 있었고 부친이 돌아가시자 애훼(哀毁:슬퍼함)함이 예의에 지나쳤으며 3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효행으로 천거(薦擧)되어 참봉을 지냈다.

배준(裵 峻) 자는 백고(伯高), 호는 묵암(黙菴). 조선 때 이홍량(李弘 量)으로부터 곽율 ․ 박이장(朴而章)과 함께 의리(義理)를 수강(受 講)하였고, 선인들의 미발안(未發案)을 많이 터득하여 사표(師表) 가 되었다. 천거(薦擧)로 훈도(訓導)가 되고 후에 안음 현감(安陰 縣監)이 되어 정사를 청백하게 처리하였다.

배극귀(裵克貴) 자는 성도(聖道), 고려 말에 사마(司馬)에 합격했으나 장차 조선(朝鮮)이 개국될 것을 알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隱 居),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배극렴(裵克廉) 1325(충숙왕 12) ~ 1392(태조 1) 자는 양가(量可), 호는 필암(筆菴) ․ 주금당(晝錦堂), 시호는 정절(貞節). 공민왕 (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 진주(晋州) ․ 상주(尙州)의 목사(牧 使), 계림(鷄林) ․ 화령(和寧)의 부윤(府尹), 합포진 첨사(合浦鎭 僉事) 등을 역임, 1376년(우왕 2)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 로 양백연(梁伯淵) ․ 우인렬(禹仁烈) 등과 진주에 쳐들어 온 왜 구를 반성현(班城縣)에서 대파하고, 1378년 삼도원수(三道元 帥)로 경산부 사근역(京山府 沙斤驛)에서 또다시 왜구를 격파했 다. 이후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 고 1388년(우왕 14)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위화도(威化島)에 서 이성계 등과 회군(回軍)을 결행, 구세력을 추방했고, 이듬해 평리(評理) ․ 양광도 찰리사(陽廣道 察里使) 등을 역임, 1390년 (공양왕 1) 중군총제(中軍摠制) ․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수 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1392년 우시중(右侍中)으로 조 준(趙 浚) 등과 모의, 공양왕(恭讓王)을 폐하고 이성계(李成 桂)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 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되었다.

배극명(裵克明) 호 미은(薇隱). 공민왕(恭愍王)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 슬이 도총제(都摠制)에 올랐다. 이태조(李太祖)께서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위에 등극함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를 지키니 이태조께서 공의 충절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고 감탄했다.

배윤겸(裵允謙) 1454년(단종 2)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 ․ 교리 (校理) 등을 역임하고 1461년(세조 6) 직강(直講)이 되었으나 사임하고 귀향하여 관하리(管下里) 영하금원(嶺下琴院)에서 동 지(同志) 사우(士友)들과 춘추(春秋)를 강론(講論)하였다.

배치(裵 絺) 호는 청백(淸白). 조선 세조(世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만호(水軍萬戶) ․ 울산 부사(蔚山 府使) 등을 거쳐 경상좌도 수군총병(水軍摠兵)에 이르렀다. 정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고 세 인(世人)을 교화(敎化)하였으며 백성에게 손해를 끼친 일이 없었고 빈민에게 의복과 식량을 나누어 주니 향민(鄕民)이 청덕거사 비(淸德去思碑)를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배수광(裵綉光) 자는 일약(日若), 호는 봉암(鳳菴). 조선 세조(世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함안 군수(咸安 郡守)를 지냈다. 재임시 정 사를 청백하게 처리하였고, 흉년이 들자 굶주린 백성 구제에 전 심(專心)하니 군민(郡民)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선정(善政)을 치하하였다.

배신(裵 紳) 1520(중종 15) ~ 1573(선조 6) 자는 경여(景餘), 호 는 낙천(洛川). 현풍(玄風) 출신. 조식(曺植) ․ 이황(李滉)의 문 인. 1561년(명종 16) 진사가 되고, 남부 참봉(南部 參奉) ․ 경 기전 참봉(慶基殿 參奉) ․ 경릉 참봉(景陵 參奉)을 지낸 후 사임 했다. 뒤에 천거를 받아 교관(敎官)이 되었다. 현풍(玄風)의 도동 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도(裵 壔) 자는 수옥(壽玉), 호는 매곡(梅谷). 1546년(명종 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태학(太學)에 있을 때 요승(妖僧) 보우 (普雨)가 세상을 현혹함으로 처참(處斬)을 소청(疏請)하였고, 이 황(李滉)으로부터 승평 교수(昇平 敎授)에 천거되어 제생(諸生) 을 훈회(訓誨)하여 재능에 따라 성취시키고 유풍(儒風)을 진흥하 였다. 정소(鄭沼) ․ 허엄(許淹) ․ 정사익(鄭思翊) 등과 이학(理學) 을 강구(講究)하니 세인이 승평사은(昇平四隱)이라 하였다. 후에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작성하였다.

배영담(裵齡聃) 자는 내익(乃益), 호는 송헌(松軒). 조선 때 시례 (詩禮)의 훈(訓)과 경국(經國)의 사(史)에 박학(博學)하였고, 특 히 정주(程朱)의 서(書)를 정구(精究)하여 「태극도(太極圖) ․ 이기설(理氣設) ․ 성리론(性理論) ․ 중화론(中和論)」등을 편저 (編著)하였다. 1576년(선조 9) 사림의 천거로 창릉 참봉(昌陵 參奉)에 임명되었다.

배진서(裵振緖) 자는 성옥(聲玉), 호는 송강(松岡). 조선 때 선무 랑 별좌(宣務郞 別坐)를 거쳐 황주 목사(黃州 牧使)를 지냈다. 재임시 가재(家財)를 기울여 빈민을 구제하니 백성으로부터 칭 송이 자자하였고, 왕으로부터 승일(乘馹)이 은전(恩典)을 받았다. 자부(子婦) 성산이씨(星山 李氏)는 묘실(廟室)이 화재를 당 했을 때 70세이 노령으로 입실하여 위패(位牌)를 보전하고 전 신에 화상을 입었다. 이 사실을 전문(傳聞)한 조정에서 정려(旌 閭)를 세워 포상하도록 명하였다.

배흥립(裵興立) 1546(명종 1) ~ 1608(선조 41) 자는 백기(伯起), 시호는 효숙(孝肅), 현감 인범(仁範)의 아들.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결성(結城) ․ 장흥(長興) ․ 흥양(興陽)의 현감(縣監), 영흥 부사(永興 府使)를 거쳐 1592 년 임진왜란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 夫)에 승진했다. 1600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 듬해 전라절도사(全羅節度使), 1604년 공조참판(工曹參判) ․ 충 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등을 지내고, 1604년 총관(摠管) 으로서 영흥 대도호부(永興 大都護府)에 나갔다가 1608년 병으 로 귀경하여 죽었다. 일찍이 흥양 현감(興陽 縣監)으로 전함(戰 艦)을 많이 건조하여 임진왜란 때에 큰 도움이 되었고, 칠천도 (七川島) 싸움에서 도망한 원균(元均)의 뒤를 맡아 단선(單船) 으로 적의 진격을 지연시켰으며, 한산도 대첩(閑山島 大捷) ․ 행 주대첩(幸州 大捷) 때는 모두 선등(先登)의 공을 세웠고, 특히 이순신의 전보(戰報)에 공신으로 천거되었다. 뒤에 고향에 정문 (旌門)이 세워졌다.

배경가(裵褧可) 자는 장보(章甫), 호는 달천(達川). 일찍이 서사원 (徐思遠) ․ 손처눌(孫處訥)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만시(晩時)에 정구(鄭逑) ․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 다. 임진왜란 때 서사원(徐思遠)을 이병장(義兵將)으로 천거하고 부장(副將)이 되었으나 무탁(無托)한 양친(兩親)으로 인하여 창 의(倡義)에 가담하지 못했다. 류시번(柳時蕃) ․ 류사온(柳思溫) 과 도의상교(道義相交)하였다.

배덕문(裵德文) 자는 숙회(叔晦), 호는 서암(書巖). 일찍이 김희삼 (金希參)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워 이를 궁행실천(躬行 實踐)하였고, 1561년(명종 16) 언양 현감(彦陽 縣監)이 되었 다. 1563년(명종 18) 형조 좌랑(刑曹 佐郞)을 거쳐 한성부윤 (漢城府尹)을 지냈다. 15 72년(선조 5)에 요승(妖僧) 보우(普 雨)를 물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김우옹(金宇顒) ․ 정구(鄭逑) 등과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다가 본주(本州) 교관(敎官)으로 기용되어 많은 인재를 교육시켜 재능에 따라 성취시켰다.

배설(裵 楔) 1551(명종 6) ~ 1599(선조 32) 배덕문(德文)의 자. 무 과에 올라 합천군수 ․ 진주목사시 선정(善政)으로 거사비(去思碑) 를 세우고 본도 우수사(本道 右水使)를 지내고, 선산 부사(善山 府使)시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고 구정칠택(九井七澤)과 혜창 (惠倉)을 설립하였다. 정유재란시 경상도 우수사(右水使)로 장작 구선(거북선)를 만들어 웅천해전, 명랑해전에서 대승하고 한산해 전에서 차전차퇴(且戰且退)하였다. 오랜 수중 생활로 수질이 악 화, 49세로 하세하였다.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배철보(裵哲輔) 자는 성안(聖安), 벽상공신 배위준의 12세손으로 1450년에 생(生)하여 1521년에 사망하였으며 기축년에 성균 관 진사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를 제수 받으셨고 산음 현감 (山陰 縣監)을 지내셨다. 서랑(壻郞)이 영의정(領議政) 김수동 (金壽童)이다. 자(子)는 어모장군 서생포 만호 균(均) 2子 增

배균(裵 均) 1475 ~ 1520 자는 자연(子衍), 배철보(哲輔)의 자. 무예(武藝)가 특출하여 무과 급제 후 내금위장(內禁衛將), 영국원 종공신(寧國原從功臣), 어모장군 서생포 만호(禦侮將軍 西生浦 萬戶)를 지내셨다.

배순직(裵舜直) 자는 영무(英武), 벽상공신 배위준 공의 14세손이 다. 무예(武藝)가 출중하여 일찍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중 수문장(守門將)을 지냈으며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증직(贈職)되셨다. 배씨가 처음으로 거제 (巨濟)에 입도(入島)하신 분이며 그 후손들이 거제 전역에 산재 하였고, 다수가 살고 있는 배골(梨谷)이라는 곳이 생겨났으며 오늘날에는 공을 주벽으로 모시는 숭모사(崇慕詞)가 세워졌으며 지금도 후손들이 10월 15일에는 향사를 올리고 있다.

배선보(裵善輔) 자는 성원(聖元). 조선때 문과에 급제, 성현도 찰 방(省峴道 察訪)으로 있을 때 당쟁이 계속됨을 개탄하고 관직을 떠나 고령(高靈) 학동(鶴洞)에 은거, 후진양성에 힘썼다. 왕을 위한 충성의 시를 읊었으나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

배몽성(裵夢星) 자는 산보(山甫). 1573년(선조 6) 무과에 급제하 여 수문장(守門將)이 되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자 의병을 모아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진주 촉석성(晋州矗石 城)에서 참전했고, 1593년 김시민(金時敏) 등과 함께 전사했다. 병조 참의(兵曹 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시경(裵時褧) 자는 문중(文仲). 호는 소암(巢庵). 일찍이 학문에 전심하고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세상의 혼란함을 보고 과거를 포기 하고 은병산(隱屛山) 밑에 살면서 독서와 후진 교육으로 일생을 마쳤다.

배건(裵 揵) 자는 수부(守夫). 조선 때 음보(蔭補)로 선무랑(宣務 郞)에 오르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금산(金山) 여남현(汝南峴)으로 가다가 적병을 만나 역 전끝에 전사했다.

배즙(裵 楫)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 1590년(선조 23) 호방별과(虎榜別科)에 급제하여 사직(司直)이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개산(開山) 등지에서 왜병(倭兵)과 싸워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와 선무사(宣撫使)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丁酉再亂)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한산도(閑山島)에 출전했고, 다시 노량진(露梁津)에 이르러 혼자서 역전 끝에 적탄(敵彈)에 맞아 순사(殉死)했다. 원종이등훈(原從二等勳)에 오르고, 가선대 부(嘉善大夫) ․ 병조 참판(兵曹 參判) ․ 훈련원사(訓練院事)에 추증되었다.

배명순(裵命純) 1597(선조 30) ~ 1636(인조 14) 자는 수초(遂 初), 시호는 충숙(忠肅).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 선전관 (宣傳官)이 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仁祖)를 강화도(江華島)에 호종(扈從), 도총부 도사(都摠府 都事) 등 여 러 벼슬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영장(營將) 이 되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결전(決戰)을 주장했으나 주화 론자(主和論者)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화의가 성립된 후 철수하는 청병과 철령(澈嶺)에서 싸워 승리했고, 계속 적을 얕본 주장(主將)의 명령으로 약간 강행군을 하다가 적의 복병을 만나 역전 끝에 전사했다. 병조 판서(兵曹 判書)에 추증(追贈)되 었다.

배시량(裵時亮) 1604(선조 37) ~ 1657(효종 8) 자는 자명(子 明), 공조 참판(工曹 參判) 배흥립(興立)의 아들. 2630년 9월(인 조 8) 무과에 급제, 훈련원 첨정(訓練院 僉正)에 이르러 1635 년 모친상으로 사직,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경 상좌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민영(閔泳)의 군문에 종군, 민영 이 패사(敗死)하자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했다. 1638년 숙천 부 사(肅川 府使), 이어 경상좌도 우후(虞侯)를 거쳐 양주 목사(楊 州 牧師)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1645년(인조 23) 공청 도 병마철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병사했다.

배상룡(裵尙龍)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조선 때 정구 (鄭逑)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이 뛰어났으므로 제일의 고제 (高弟)로 추앙(推仰)되었다. 선조(宣祖) 때 누차 징명(徵命)이 있었으나 불취(不就)하였고, 인조(仁祖) 때 정언(正言)에 임명되 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 도천서원 (刀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상호(裵尙虎) 자는 계장(季章), 호는 괴재(愧齋). 조선 때 정구 (鄭逑)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장과 도학이 출중하였고, 부모에 대한 효행과 형제의 우애가 극진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 ․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 (追贈)되었다.

배명전(裵明全) 자는 복초(復初). 조선 때 건원릉 참봉(建元陵 參 奉)을 지내고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를 거쳐 상서원 직장(尙書 院 直長)에 올랐다. 이어 장원서 별제(掌院書 別提)가 되고, 사 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거쳐 비안 현감(比安 縣監)을 역임하 였다.

배상유(裵尙瑜) 1610(광해군 2) ~ 1686(숙종 12) 자는 공근(公瑾), 호는 만학당(晩學堂). 현감(縣監) 배명전(命全)의 아들. 류염(柳 淰)의 문인 1671년(현종 12) 추천을 받아 창릉 참봉(昌陵 參 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677년(숙종 3) 사직서 참봉(社 稷署 參奉)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류형원(柳馨遠)의 「반계수 록(磻溪隧錄)」을 탐독, 그 취지에 의거하여 임금의 도리, 정치 의 규모, 전제(田制)에 관한 소신을 상소, 숙종(肅宗)의 가납을 받았다. 낙향 후에는 심성정이기(心性情理氣)의 설을 깊이 연구 했다.

배상보(裵尙輔) 자는 국장(國章), 호는 연정(蓮亭). 1613년(광해 군 5) 선교랑(宣敎郞)에 오르고, 이어 습독관(習讀官)으로 경연 (經筵)에 들었으며, 인조(仁祖) 때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를 거쳐 명천 현령(明天 縣令)을 지냈다.

배정휘(裵正徽) 1645(선조) ~ 1709(숙종) 배상호(尙虎)의 손자, 미수 허목(許穆)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 무장 현감(茂長 縣監)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바른 말을 잘하며 전상지호(殿上之虎)라 일컬었다. 숙종, 중종, 민비를 내쫓으려 할 때 3일간 극간 판결사(判 決事)가 되고 누찬관이 되어 바른 말, 이치에 맞는 말만 하였다. 강계무사를 지낸 후 거사비를 세웠다. 글씨를 잘 써 비표(碑表) 가 많이 남아 있다.

배문범(裵文範) 자는 군숙(君叔).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전력부 위(展力副尉)로 수문장(守門將)이 되어 도병(道兵)을 이끌고 도 원수(都元帥)를 따라 여러 차례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병조 참 판(兵曹 參判) ․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官)에 추증 (追贈)되었다.

배이인(裵爾仁) 자는 시효(始孝), 호는 묵암(黙庵). 모친이 질병으 로 생명이 위급할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받아먹여 회생케 하였 는데, 조정에서 천문(薦聞)하고 포상(褒賞)을 내렸다. 동몽교관 (童蒙敎官) ․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다.

배무화(裵舞和) 자는 시중(時中), 호는 묵당(黙堂). 1679년(숙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이 되고,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거쳐 성권 찰방(成權 察訪) ․ 정선 현감(旌 善 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이 뛰어났다.

배기종(裵奇鍾) 자는 의서(義瑞), 호는 송정(松亭). 효행이 뛰어나 향리(鄕里) ․ 사림의 천거로 1880년(고종 17) 효자 정문(旌門) 이 세워지고, 통정대부(通政大夫) ․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추증(追贈)되었다.

배혜(裵 惠) 호는 북청(北靑). 조선 세조조(世祖朝)에 문과에 급제, 북청 도호부사(北靑 都護府使)를 거쳐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 使)에 이르렀고 재임중에 청백한 목민관(牧民官)으로 지방민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배응경(裵應褧) 자는 회남(晦南), 호는 안촌(安村).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76년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 (乙科)로 급제, 정랑(正郞)을 거쳐 청도 군수(淸道 郡守)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였으며 1595년(선조 28) 순천 부사(順天 府使)가 되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영의정(領議政)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나주 목사(羅州 牧使) 에 승진되어 금산(錦山)을 수비하다가 이순신(李舜臣)과 합세, 후진하는 적의 퇴로를 막아 분쇄하려 했으나 관찰사(觀察使) 황 신(黃愼)의 무고로 투옥당했다가 곧 심희수(沈喜壽) ․ 서경주(徐 景주)의 상소로 풀려나 1601년(선조 34) 대구부사(大邱 府使) 를 지낸 후 사직 은퇴(隱退), 김늑(金玏) ․ 김우옹(金宇顒) 등과 교유(交遊)하였고 예조참판(禮曺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인지(裵紉芷) 자(字)는 사수(士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자 청도 군수(淸道 郡守)인 아버지를 도와 창의(倡義)하여 전공 (戰功)이 있어 1593년 군자감 직장(軍資監 直長)에 기용되었고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에 추증되었다.

배상익(裵尙益) 1616년(광해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24년 (인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 을 거쳐 전라 ․ 황해도사(黃海道事)를 역임했다. 정묘호란(丁卯 胡亂)때 왕이 강화도(江華島)로 몽진(蒙塵)하자 호종(扈從)하여 일기주서(日記注書)가 되어 사실 기록(史實 記錄)에 힘썼다. 김창군(金昌君) ․ 류정량(柳廷亮) ․ 이식(李埴) 등과 도의교(道義 交)가 있었고 1631년(인조 9) 진주판관(判官)으로 부임도중 죽었다. 봉계서원(鳳溪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치암일고 (痴巖逸稿)」가 있다.

배유화(裵幼華) 자(字)는 화은(華隱), 호는 팔사(八斯). 1667년(현종 8) 음보(蔭補)로 찰방(察訪)이 되고, 1670년 종부사직장(宗簿 寺直長)을 거쳐 1672년 주부(主簿)에 오르고, 이듬해 의금부도 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으며 저서로 「팔사유고(八斯遺稿)」가 있다.

배유장(裵幼章) 자(字)는 장은(章隱), 호는 유암(楡巖). 1636년(인조 14) 대소향시(大小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으 로 벼슬에 뜻이 없고 오직 학업에 전심하였으며 1655년(효종 6)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원휘(裵遠徽) 자(字)는 혜보(惠甫), 호는 지암(枝巖). 달천공(達川 公)의 5세손이시며, 재덕을 겸비하고 일찍 경서(經書)를 연구하고 우애가 두터워 학업을 서로 권장하고 의리(義理)를 실행하여 명성을 얻었다. 갑신(甲申)년에 배씨 4파가 합보를 만들 때 일 부에서 날조함에 변정록(卞正錄)을 저술하여 의혹을 설파(說破) 하여 오류를 막았고 후일의 본보기가 됐다.

배정조(裵貞祚) 자(字)는 계경(季卿), 호는 외암(畏巖). 정재(定齋) 류 치명(柳致明)과 지헌(止軒) 최효술(崔孝述) 양선생(兩先生) 문하 에서 공부하였다. 서실(書室)에서 학도들과 성리학(性理學)을 강론(講論)하였고 사자의의(四子疑義)를 편집(編輯)하였으며 소학 도(小學圖)를 저술하였다. 가례복제도(家禮服制圖)를 보완하였고 화담(花潭)위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기니 제현(諸賢)들이 화담주인으로 추대(推戴)하였다.

배진서(裵振緖): 자는 성옥(聲玉)·경승(景承)이고 호는 송강(松岡)이다. 사복시 주부 배은(垠)과 숙인(淑人) 밀양 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효행과 학행으로 천거되어 상의원 별좌로 벼슬길에 나아가 통정대부 황주목사를 지냈다. 고을을 다스림에 청간(淸簡 : 성품이 깨끗하고 곧음)과 애민(愛民)을 우선하였다. 흉년에 곡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 : 도와줌)하니 강우(江右) 여러 고을의 가난과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그 은혜를 입었다.

배준(裵埈): 자는 백고(伯高)·여첨(汝瞻)이고 호는 묵암(默庵)이다. 참봉 배진경과 참봉 곽당의 따님인 의인 포산곽씨 사이에서 중종 37년(1542년) 태어났다. 유일(遺逸)로 장사로 훈도를 지내고 여러 관직을 거쳐 안음현감에 이르렀다. 당대의 명사인 용재 이홍기, 예곡, 곽율, 용담 박이장(朴而章) 등과 교유하였다.

배병한(裵炳翰)초휘(初諱)는 욱(煜)이며 자는 여란(汝鸞)이고, 호는 의암(宜庵)이다. 충훈부 도사를 지낸 배영근과 최학문(翯文)의 따님인 양천최씨(陽川崔氏)와의 사이에서 고종 19년(1882년) 3월 3일 고령군 쌍림면 학동에서 태어났다. 면우 곽종석(郭鍾錫)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더 널리 배우고자 하여 대계 이승희(李承熙)와 회당 장석영(張錫英) 두 선생에게서 사사 받았다. 또 동향 출신 홍와 이두훈(李斗勳)‧송강(松岡) 김성하(金聲夏)‧만송(晩松) 한남교(韓南敎) 등과 교유하였다. 사서를 곁에 두고 밥 먹는 것도 잊고 연구에 전념하면서, 학문은 마음과 성품을 다스리기 위해 하는 것이지 사장(詞章)에 힘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48년 9월 3일 향년 67세로 사망했다.

배규(裵規) : 1382년(고려 우왕 8년)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태종 때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배윤(裵閏) : 배규의 아들. 1411년(조선 태종 11)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배응경(裵應褧, 1544년 ~ 1602년) : 1576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배극렴: 고려 문하시중, 조선 개국공신, 조선 문하좌시중[4]

배명순(裵命純, 1597년 ~ 1637년) :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고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배정휘(裵正徽, 1645년 ~ 1709년) : 배설의 증손. 1673년(현종 1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평강현감을 역임하였다.

배용순: 윤봉길의 부인

배성룡(裵成龍, 1896년 ~ 1964년) : 통일독립촉진회 조직에 참여해 상무집행위원, 조직국장 등을 지내면서 남북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현대 인물
* 배영호(裵泳鎬) : 제21대 법무부 장관
* 배정현(裵廷鉉, 1909년 ~ 1978년) : 대법관
* 배수곤(裵秀坤, 1923년 ~ 2007년) : 제5대 은행감독원장
* 배상태(裵相台) : 대한민국의 작곡가
* 배영식(裵英植) : 제18대 국회의원
* 배일도(裵一道) : 제17대 국회의원
* 배호영 : 연구인, 작가
* 배건우: 유튜버
* 배기성: 가수.
* 배다빈: 배우.
* 배진아: 트로트 가수
* 배아현: 트로트 가수
* 배수지: 가수,배우
* 배지연: 모델
* 배진아: 배우
* 배재성: 모델, 배우
* 배보람: 배우
* 배단희: 배우
* 배수현: 배우,모델
* 배강희: 배우
* 배영만: 코미디언.
* 배영식: 국회의원.
* 배영호: 법조인.
* 배용준: 배우.
* 배우희: 가수.
* 배지현: 前 아나운서.
* 배승민: 가수
* 배중배: 국가공무원
* 배기동: 교사

4.4. 문과 급제자

《대과》
배상익(裵尙益)
배윤(裵閏)
배응경(裵應褧)
배윤명(裵胤命)
배정휘(裵正徽)
배덕문(裵德文)
배추(裵樞)
배한(裵瀚)
배한(裵閑)
배헌장(裵憲璋)||

《생원시》
배상룡(裵象龍)
배상익(裵尙益)
배석기(裵石麒)
배성오(裵星五)
배순명(裵順命)
배승희(裵升喜)
배영수(裵穎秀)
배윤명(裵胤命)
배응경(裵應褧)
배응곤(裵應袞)
배익휘(裵益徽)
배준민(裵俊敏)
배진강(裵振綱)
배진휘(裵晉徽)
배충범(裵忠範)
배한(裵閑)
배한룡(裵漢龍)||
《진사시》
배상익(裵尙益)
배상호(裵尙虎)
배석곤(裵錫坤)
배순룡(裵舜龍)
배신(裵紳)
배우(裵祐)
배유화(裵幼華)
배윤성(裵胤性)
배윤장(裵允章)
배윤휴(裵胤休)
배이장(裵以章)
배장환(裵章煥)
배정휘(裵正徽)
배정희(裵鼎喜)
배준수(裵俊秀)||

5. 관련 유적지

파일:흥안재.jpg
흥안재(興安齋)


[1] 배현경에 대해서는 경주 배씨의 중시조라고도 한다.[2] 고려 개국공신의 후예 배문裵門의 일부에서는 끝까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추종을 거부했다. 배문우裵文祐(고려 직제학直提學)·배상지裵尙志(고려 판복시사判僕寺事)는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고 학자 배을서裵乙瑞도 왕자(방원芳遠)의 사부를 삼겠다고 이성계가 여러 차례 부르는데도 나아가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3] 관서부자(關西夫子)는 원래 중국 후한(後漢) 때의 양진(楊震)을 가리킨다. 양진은 성품이 몹시 청렴결백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서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경전에 특히 밝아서 당시의 선비들이 ‘관서공자(關西孔子)’라고 칭하였다. 배규(裵規)를 양진(楊震)에 빗대어 관서부자(關西夫子)라고 불렀다.[4] 문하좌시중은 문하좌정승을 거쳐 좌의정으로 변한다. 이런 점에서 태조 때 문화좌시중을 지낸 배극렴은 초대 좌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의정은 태종 때에 가서야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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