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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50:55

바다사자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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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태동3. 계획 수립4. 계획 확정5. 세부내용 수정6. 최종 결정7. 구체적인 작전 계획8. 준비
8.1. 나치 독일 육군
8.1.1. 부유 전차와 잠수 전차8.1.2. 상륙군 보급용 장비8.1.3. 신무기
8.2. 나치 독일 해군
8.2.1. 기뢰8.2.2. 양동작전8.2.3. 해안포8.2.4. 호위함대8.2.5. 상륙함과 상륙정
8.3. 나치 독일 공군
8.3.1. 항공기8.3.2. 인적 자원 손실8.3.3. 대함공격능력 부족8.3.4. 공수부대8.3.5. 이탈리아 왕립 공군
9. 문제점
9.1. 목표 달성의 불확실성9.2. 완전히 확정된 작전이 없음9.3. 경험과 정보 부족9.4. 아직 강력한 영국군9.5. 방어군에게 유리한 지형9.6. 추가상륙 및 보급의 어려움9.7. 기본적인 수송능력 부족
10. 작전 중단과 사실상의 취소11. 영국의 대응
11.1. 의외의 약점
12. 작전 성공시의 예상
12.1. 준비되지 않은 후속조치
13. 전후의 시뮬레이션14. 여담15. 창작물에서16.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바다사자작전 계획도.png
바다사자 작전 계획도[1]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인 1940년, 프랑스 침공의 성공으로 유럽을 사실상 지배하는 데 성공한 아돌프 히틀러가 마지막 남은 영국이 유럽 동맹국들이 점령되었음에도 항복하지 않자 영국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세운 작전이다.

작전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데, 본래 작전명은 '사자 작전'이었다. 그런데 사자는 영국 왕실의 문장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아무리 작전명이란 게 눈 가리고 아웅이라지만 너무 대놓고 표현하는 것 아니냐'라는 의견 때문에 바다사자로 수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히틀러가 영국 침공을 '사냥'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독일군 수뇌부가 영국을 폄하할 겸, 히틀러의 비위를 맞출 겸 해서 영국 땅과 비슷한 동물을 정해서 '바다사자를 사냥한다'고 해서 작전이름이 바다사자 작전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우선적으로 독일 공군으로 하여금 상륙작전에 방해가 되는 방해물들 그중에서도 제1순위 목표인 영국 공군영국 해군을 무력화하고, 유럽에서 징집한 병력들을 수송선에 실어 영국에 상륙시킨 다음, 런던으로 진군하는 계획을 세웠다.

2. 태동

제2차 세계 대전이 개전한 1939년 9월의 시점에서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프랑스 침공에 대해서는 전쟁 계획을 만들어놓았으나 영국 본토 침공에 대해서는 소수의 소규모 연구안만 가지고 있었으며 그나마도 구체적이지가 않았다.

프랑스 침공이 나치 독일의 승리로 결정된 시기인 1940년 5월 26일에 영국의 외무장관이며 작위인 핼리팩스 경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우드이탈리아 왕국을 중재자로 해서 나치 독일과 평화협상을 진행하자는 안건을 제시했다. 평화협상안은 네빌 체임벌린이나 로이드 조지 같은 보수당의 거물들도 지지할 정도로 세력이 강했고 이에 대응해서 윈스턴 처칠은 노동당과 손을 잡으면서까지 9회의 논의 끝에 어떻게든 평화협상안을 폐기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키스트 아워에서 해당 사건을 다루고 있다.

윈스턴 처칠이 1940년 6월 4일에 영국 국회에서 항전 의지를 표명하는 연설을 하면서 영국의 전투의지가 굳건함을 깨달은 아돌프 히틀러는 1940년 6월 22일에 비시 프랑스가 성립되면서 프랑스 전선이 나치 독일의 승리로 일단락되자 영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논의에 들어갔다.

3. 계획 수립

1940년 6월에 이르자 프랑스 제3공화국이 만회할 수 없는 패배의 길로 빠졌다는 것을 확신한 나치 독일의 육군과 해군은 이전에 만들어놓은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연구안을 다시 꺼내서 재검토를 하기 시작하고 공군의 경우에도 새롭게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연구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1940년 6월 30일에 국방군최고사령부(OKW)의 알프레트 요들 작전부장은 정세 검토 회의의 결과물로 대영제국에 대한 향후 대응 방안을 6개로 정리해서 보고한다.

그리고 육군, 해군, 공군의 상황도 동시에 설명되었다.

나치 독일 육군의 경우에는 영국 본토에 성공적인 상륙만 할 수 있다면 그 뒤의 전과 확대나 영국의 항복은 충분히 받아낼 수 있다고 보았으며 경제 봉쇄나 공포 폭격만으로는 영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없고 영국 본토가 향후 연합군이 유럽 대륙 방향의 반격을 할 기지가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영국 본토에 직접 상륙하는 안을 많이 지지했다.

나치 독일 해군의 경우에는 이미 노르웨이 침공으로 보유한 군함의 상당수가 격침되거나 손상당한 상태라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진행한다면 비스마르크급 전함 2척이 모두 취역했을 것으로 보는 시기인 1941년 봄에 실시하는 것이 좋으며 1940년에는 해당 작전을 실시할 경우 전력의 차가 너무 심해서 영국의 본토함대와 맞설 수 없으므로 작전 실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에 더해서 해군 작전부는 수송능력 불충분과 날씨 문제도 거론하였다. 상륙 작전에 투입될 최소한의 수준인 10만명 이상의 병력과 물자와 장비를 수송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지려면 최소한 1940년 8월이 지나야 간신히 가능해지며 도버 해협의 날씨상 상륙작전이 가능한 시기는 길게 잡아봐야 1940년 9월 말이 한계이며 10월 이후에는 날씨가 거칠어져서 불가능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해군은 상륙작전보다는 경제 봉쇄와 간접 접근을 선호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당시의 U보트의 숫자 및 대서양까지 가서 통상파괴전이 가능한 숫자를 따져볼 경우에는 대서양에서 항상 전개 가능한 숫자가 고작 15척 정도가 한계이므로 경제 봉쇄를 하기에는 잠수함의 숫자가 부족하므로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나치 독일 공군의 경우에는 헤르만 괴링공군최고사령부(OKL)를 통해서 의견을 제시했다. 경제 봉쇄는 효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너무 걸리며 상륙작전을 실시하기에는 비용 및 희생이 과다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치 독일 공군은 힘이 있으며 이미 영국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보듯이 약해지고 겁에 질려 있으므로 공포 폭격을 실시함으로서 항전 의지를 날려버리고 평화 협상에 나서도록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보고를 받아본 히틀러는 6개 안중 어떤 것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1940년 6월 30일의 회의에서는 독소전쟁을 대비해서 바르바로사 작전을 연구하라고 육군최고사령부(OKH)에게 명령을 내리는 뜬금없는 지시를 내렸다.

물론 히틀러는 영국과의 외교 협상의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 나치 독일 공군이 영국의 도시를 폭격하는 것을 금지하고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평화 협상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나마 1940년 7월 19일에 히틀러가 독일 국회에서 한 연설이 노력이라고 볼 수는 있는데 그것도 평화인가 전면적 파괴인가 하는 수준의 반쯤 협박 성향의 연설이라 진정한 노력으로 보기는 어렵다.

해당 회의에서 나치 독일 육군 총참모장인 프란츠 할더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로부터 히틀러가 소련 침공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1940년 7월 1일에는 오토 슈니빈트 (Otto Schniewind) 제독을 만나서 논의한 결과 서로의 입장차는 유지하였으나 둘 다 상륙작전 실시 전에 제공권 획득이 필요하며 기뢰와 U보트가 영국 해군의 위협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임에는 동의했다. 오토 슈니빈트는 추가적으로 날씨 문제를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1940년 7월 2일에 국방군최고사령부는 히틀러가 특정 조건이 이루어진다면 영국 본토에 상륙작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나치 독일군 전체에 영국 본토 상륙작전에 대한 예비 계획을 시작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첫번째 조건은 제공권 확보이며 구체적으로 나치 독일 공군에게 언제까지 제공권을 확보할 것인지를 질문했다.

1940년 7월 10일에 프란츠 할더가 에리히 마르크스에게 소련 침공 계획을 수립할 준비를 하라고 요청한 후 나치 독일 공군에게서 답변을 받았다. 답변의 내용은 나치 독일 공군이 영국 공군을 제거하며 항공기를 생산하고 운반하는 산업과 시스템을 박살내며 영국 해군에게도 타격을 준다는 것이었다.

1940년 7월 11일의 회의에서 국방군최고사령부에게 제출된 나치 독일 공군의 보고서에서는 제공권을 확보하는데 14일에서 28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측한다고 적혔다. 그리고 영국이 소련과 뭔가를 논의한다는 소식도 따로 전달되었다. 같은 날에 나치 독일 해군의 수장인 에리히 레더는 히틀러를 방문한 자리에서 영국이 평화 협상에 나서게 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공군을 이용한 공격과 잠수함을 이용한 공격을 결합한 포위 공격이라고 히틀러를 설득했다. 히틀러는 영국 본토 상륙작전이 최후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동의했다.

1940년 7월 12일에 알프레트 요들이 영국 본토 상륙작전에 대한 국방군최고사령부의 제안을 각서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엄연하게 바다를 건너는 상륙작전을 해협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넓은 강을 건너가는 도강 작전 정도로 묘사해서 나치 독일 해군의 항의를 받게 된다.

1940년 7월 13일에 아돌프 히틀러는 프란츠 할더와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만나서 육군최고사령부에서 만든 상륙작전안을 보고받았다. 램즈게이트(Ramsgate)에서 와이트 섬 주변의 라임만까지 8곳에 13개 사단으로 구성되는 26만명을 2 ~ 3일 사이에 모두 상륙시킨 후 제2파를 포함하면 총 40개 사단을 영국 본토에 상륙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 안의 경우에는 나치 독일 해군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수송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안이라서 현실성이 없다시피 했다.

이런 상륙작전안을 받아든 히틀러는 평소처럼 작전에 대해 질문하지도 않았고 세부사항에 관심도 보이지 않았으며 작전 계획을 개선할만한 권장사항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냥 국방군최고사령부에게 준비를 시작하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해군최고사령부(OKM) 산하의 해군 작전부(SKL)에 소속된 쿠르트 프리케 소장이 정리한 해군의 상륙 작전안은 좀 더 현실성이 있었다. 영국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타격으로부터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을 노려서 가능한한 빠른 시기내에 영국 본토 남동부의 좁은 정면을 집중적으로 노려서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1940년 7월 16일에 히틀러는 총통지령 제16호를 발하고, 그 중에서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의 입안과 그 준비를 1940년 8월 중반까지 완료하는 일을 명령했다. 작전의 암호명도 바다사자로 확실하게 정해졌다. 이로서 바다사자 작전이 공식적으로 이름이 붙고 상세계획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4. 계획 확정

총통지령 제16호에 의거한 바다사자 작전은 작전 서문에서 영국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기에 영국에 대한 상륙작전을 준비했다고 했으며 작전의 목표는 독일과의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기지인 영국 본토를 점령하고 필요하다면 영국 전체를 완전히 점령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실행하기 위한 4가지 조건도 기록되었다.

상륙작전의 상륙범위는 나치 독일 육군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램즈게이트에서 와이트 섬 주변까지 광범위한 범위를 가지며 영국 공군을 제압하고 제공권을 확보하는 것은 1940년 8월 중순까지 마무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바다사자 작전에 대한 계획이 확정되었을 뿐 세부적인 내용은 전혀 결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보통 이러한 작전 계획을 확정할 때 같이 발표하는 내용의 상당수도 빠진 상태였다. 심지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연합군이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SHAEF)를 설립하여 육군, 해군, 공군 및 관련자가 모두 근무가능한 통합작전본부를 구성한다는 것처럼 바다사자 작전 시행을 위해서 나치 독일군을 통합해서 지휘할 통합작전본부를 만든다는 중요한 내용도 없을 정도였다. 결국 나치 독일의 육군, 해군, 공군이 알아서 잘 협의하라는 것인데 싸움이나 안나면 다행일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작전의 주역은 나치 독일 육군인데 작전의 내용만으로는 나치 독일 공군과 나치 독일 해군이 작전을 실행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고생해야 하며 작전 진행중에도 작전의 성공을 위해 짊어진 부담이 너무 컸다. 그래서 헤르만 괴링과 에리히 레더는 모두 이대로 작전을 진행할 열의가 없었으며 적극적인 반대에 돌입했다.

5. 세부내용 수정

1940년 7월 19일에 나치 독일 해군부터 반대의견이 나왔다. 에리히 레더는 국방군최고사령부에 각서를 보내서 육군과 공군에 비해서 해군에게 부과된 과다한 목표에 대해 항의함과 동시에 이대로라면 나치 독일 해군은 목표달성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1940년 7월 21일에 바다사자 작전에 관련한 첫번째 통합회의가 열렸다. 아돌프 히틀러, 발터 폰 브라우히치, 에리히 레더, 나치 독일 공군 총참모장 한스 예손넥(Hans Jeschonnek)이 참석한 회의에서 히틀러는 영국이 막다른 길에 몰려있지만 평화 협상을 택하는 대신 소련에게 독일의 석유 공급을 차단하라는 계락을 부린다고 언급한 후 상륙작전이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에 1940년 9월 중순까지 공습과 잠수함 공격을 제대로 실시하여 작전 시행전에 준비가 마무리 될 수 있는가를 질문했다.

해당 회의에서 나치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의 전투기를 격추하도록 대규모 공습을 제안했고 나치 독일 해군의 경우에는 상륙작전이 단순하게 큰 강 건너기 급의 도강 작전이 아님을 분명하게 못박았으며 1940년 8월 중순까지 상륙작전에 대한 준비를 완료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히틀러는 이런 대답에 대해서 공습이 1940년 8월 초에 시작되기를 원했으며 공습결과가 좋다면 영국 해협의 날씨가 나빠지기 전인 1940년 8월 25일 경에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시행하기를 원했다.

히틀러의 대답이 엉성했던 이유는 이미 히틀러의 주요 관심이 소련 침공에 쏠려있었으며 나머지 관심도 침공 전에 영국의 책략에 따라 소련이 쓸데없이 개입하는 문제를 저지하는 것에 쏠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다사자 작전이 주요 의제로 올라온 회의에서 부수적으로 프란츠 할더가 소련 침공에 대한 첫 견해를 밝히는 것을 듣고 소련 침공의 세부사항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히틀러의 관심이 쏠린 상황이었다.

1940년 7월 25일에 에리히 레더가 히틀러를 만난 자리에서 나치 독일 해군의 현재 상황이 보고되었다. 여기서 바다사자 작전에 대응하여 나치 독일 해군의 준비가 8월 안에 완료될 수 있을 지 확신하기 어렵다고 이야기가 나왔다.

1940년 7월 28일에 에리히 레더는 국방군최고사령부에 언급한 의견에서 기존의 계획보다 훨씬 좁은 상륙작전 지역을 감안하더라도 이미 예정된 상륙군을 영국 본토에 완전히 상륙시키는데만 10일이 소요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프란츠 할더는 에리히 레더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나치 독일 해군이 여태까지 한 말은 모조리 쓰레기통에 들어갈 수준이며 바다사자 작전 전체를 내다 버려야 할 지경이라고 비난했고 다음 날에는 해군의 주장을 일축하고 새로운 계획을 요구했다.

1940년 7월 29일에 나치 독일 공군은 정보 보고서를 통해서 8월 초에 대규모 공습을 실시할 수 있으며 효과도 결정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폭격기의 절반 정도는 상륙작전 실시때 지원을 나가기 위해 예비병력으로 둔다는 것도 발표했다. 나치 독일 해군은 나치 독일 육군과의 회의에서 비스마르크급 전함 2척이 취역하여 전투준비가 완료되는 1941년 5월까지 바다사자 작전을 연기할 것을 제안했다.

1940년 7월 30일에 나치 독일 해군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각서를 발행하였다. 각서의 내용은 상륙작전이 영국 해군의 공격에 취약할 것이며 가을의 날씨는 점점 거칠어지므로 작전 수행시 필요한 보급품 유지 및 관리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국방군최고사령부는 소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중해에서 영국을 공격하는 것을 포함한 확장 작전을 선호했다.

1940년 7월 31일의 회의에서 나치 독일 공군은 참여하지 않았다. 에리히 레더는 바지선상륙함상륙정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1940년 9월 15일에나 완료될 것이며 1940년도에 상륙작전이 가능한 시기는 9월 22일에서 9월 26일 정도가 될 것인데 그나마 날씨가 좋지 못해서 작전에 지장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상륙지점은 현재 시점에서는 나치 독일 육군이 만족하지 못할 수준의 아주 좁은 면적만 가능하며 이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려면 1941년 봄까지는 작전이 연기되어야 한다고도 언급했다.

히틀러는 영국군이 빠른 속도로 증강하고 있으므로 9월에는 상륙작전을 진행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에리히 레더가 회의를 마치고 퇴장한 후에 히틀러는 프란츠 할더와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영국 본토에 대한 공습이 8월 5일경에 실시될 것이며 결과가 좋으면 공습 실시후 8일에서 14일 사이에 상륙작전을 진행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로는 영국 정부가 소련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낙관주의에 빠져있기에 이를 교정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6. 최종 결정

1940년 8월 1일에 총통지령 제17호가 발표되었다. 여기서 히틀러는 나치 독일 공군에게 주로 작전지시를 내렸다.

영국을 최종 정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확립할 목적으로 공중전과 해상전을 강화하는 것이 기본 목적이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나치 독일 해군의 능력이 모자라므로 나치 독일 공군에게 많은 짐을 짊어져야 했다.

종합하자면 나치 독일 공군이 엄청난 폭격을 먼저 가해서 바다사자 작전을 실시 가능할 수준으로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그 후에 바다사자 작전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치 독일 해군은 자신의 능력 안에서 상륙작전 개시 전에는 작전 준비를 진행하고 요청이 있을 경우에 한해 나치 독일 공군을 적절하게 도와주면 끝이며 나치 독일 육군은 상륙작전 개시 전까지 상륙군을 마련해놓고 승선 예정지역에 대기시키면 된다.

이렇게 나치 독일 공군이 작전의 초기 주역이 된 이유는 헤르만 괴링이 원인이었다. 바다사자 작전보다는 해당 작전을 실시하기 위한 전제 조건 확립이 더 중요해진 상황에서 작전의 주역이 나치 독일 공군으로 넘어왔으며, 프랑스 침공등 이전의 전투에서 발생한 성과가 나름대로 정확하게 정리되어 보고가 되었고 1940년 7월부터 시작된 영국 본토 항공전의 초기 성과도 스스로 파악하기에는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다. 괴링의 입장에서도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큰 작전을 앞두고 공군이 활약을 해주기만 한다면 군 내부에서 자신과 공군의 입지를 더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앞서 언급한 여러가지 자료가 말해주듯이 '우리 공군이 영국 공군과 해군을 격파해주겠다.'라며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선 괴링의 태도에 바다사자 작전을 연기하고 싶어했던 나치 독일 해군과 독소전쟁 준비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던 나치 독일 육군의 의향이 맞아떨어진 것이다.[2]

영국 본토 상륙작전이 아직은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나치 독일 공군이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상륙작전 준비를 해놓았다가 영국 공군이 무력화되고 영국 해군이 상륙작전 방해를 못 할 수준으로 전락해버리는 등 조건이 좋아지면 바다사자 작전을 실시하면 되며 그렇지 않고 사실상 나치 독일 공군이 실패하면 바다사자 작전을 실시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3] 그리고 이전까지의 전투에서 독일 공군의 활약상을 생각하면 나치 독일 공군이 작전을 말아먹는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이에 따라 이미 1940년 7월부터 시작된 영국 본토 항공전이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7. 구체적인 작전 계획

바다사자 작전의 구체적인 실시 계획은 1940년 9월 중반을 목표로 하며, 상륙작전 첫날을 S데이로 한다. 상륙선단의 항로를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는 미리 방어목적의 기뢰지대 설치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 S데이의 10일 전인 S -10데이까지는 작전의 실행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상륙작전의 주력이 되는 A집단군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지휘하에 16군과 9군을 포함하며 상륙작전의 주력을 담당한다. 상륙지점 B와 C는 에른스트 부슈가 지휘하는 제16군의 관할로 로테르담, 앤트워프, 오스텐데, 됭케르크, 칼레에서 출발한다. 상륙지점 D와 E는 아돌프 스트라우스가 지휘하는 제9군의 관할로 불로뉴 쉬르메르, 르아브르, 세르부르에서 출발한다.

상륙부대의 제1파는 보병사단과 산악병사단과 공수사단을 합한 10개 사단으로 구성되며 S데이의 새벽에 4개 지점에 상륙한다.

제1파의 목표는 상륙해안을 확보하고 포크스톤(Folkestone)과 뉴헤이븐(Newhaven)의 항구시설을 점령하며 비행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항구 시설을 손상없이 점령하거나 긴급수리를 통해 사용가능하게 할 경우에는 제2파와 그 이후의 병력은 항구의 부두를 통해 수송선으로 접안해서 빠르게 상륙이 가능하므로 항구 시설의 확보가 상당히 중시되었다. 제1파는 중장비 운송이 어려우므로 병력 구성이 정예보병부대로 이루어진다.

제2파에는 16군 소속으로 2개 기갑사단 (8, 10)과 2개 보병사단(12,30)과 제29 차량화 보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의 전신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차량화 보병 연대와 제1SS기갑사단의 전신인 LSSAH사단(여단 규모)가 포함되어 상륙지점 B와 C로 상륙하며 제9군 소속으로 2개 기갑사단 (4, 7)과 제20 차량화 보병사단으로 구성되어 상륙지점 D와 E에 상륙한다. 제2파는 상륙해안을 확보하고 교두보가 만들어졌으며 항구시설도 어느 정도 확보한 것으로 가정했으므로 기갑, 포병을 포함한 중장비를 보유한 부대로 구성된다.

제3파에는 16군 소속으로 4개 보병사단(24, 58, 45, 164)가 포함되어 상륙지점 B와 C로 상륙하며 제9군 소속으로 2개 보병사단 (15, 78)으로 구성되어 상륙지점 D와 E에 상륙한다. 제3파는 수송, 군마, PX 및 기타 서비스를 제공하는 부대를 다수 포함한 구성으로 상륙군을 지원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기본적으로 제1파는 상륙함, 상륙정, 바지선으로 상륙지점에 직접 상륙하지만 제2파와 제3파는 제1파의 후속으로 이미 확보한 상륙해안에 제1파와 동일한 방식으로 상륙한다는 기본계획과 함께 만일 상륙한 병력이 성공적으로 항구를 점령하고 해당 항구가 정상적으로 가동이 가능할 경우에는 확보한 항구에 직접 입항해서 병력과 보급품을 빠른 속도로 양륙시킬 보조계획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상륙작전의 지원 및 보조를 담당한 C집단군은 빌헬름 리터 폰 레프의 지휘하에 6군을 포함하며 6군은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지휘를 받으며 제2군단 소속의 2개 보병사단 (6, 256)과 나치 독일 공군 소속의 공수부대인 제7항공사단과 제22보병사단 (수송기로 공중수송 가능)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수부대인 제800 특수임무 건설훈련연대 브란덴부르크도 포함된다. 이들의 임무는 공수작전 및 상륙지점에 대한 지원과 증원이다. 공수작전은 상륙 제1파와 비슷한 시간에 실시된다.

나치 독일 공군은 S데이에 상륙지점에서의 제공권을 확보하고 영국 해군의 상륙작전 방해에 대한 대처를 임무로 부여받았다. 나치 독일 해군은 상륙작전 이전에는 항로의 소해와 방어용 기뢰밭의 설치를 담당하고 S데이에는 상륙부대의 수송과 보호를 임무로 한다. 그리고 S -3데이 전후에는 상륙작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각종 견제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계획하였다.

1944년에 벌어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보급항의 확보가 문제가 되었으며 나치 독일은 해군력이 미약한만큼 보급항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나치 독일 육군은 항만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램즈게이트(Ramsgate)나 도버같은 대형 항구로의 직접 상륙을 원했지만 나치 독일 해군의 반대로 계획에서 삭제되었다. 이미 선정된 상륙지점 중에서 포크스턴에는 항구가 있었지만 소규모라서 대규모의 군대를 대상으로 한 보급에는 불충분했다.

상륙장비의 부족으로 인해 제2파의 상륙에는 제1파의 상륙에 사용한 선박과 상륙선 및 호위 함선이 필요해질 뿐 아니라 상륙작전시 손실이나 항해중 손상등으로 인해 수리같은 작업도 필요하며 상륙해안에서 이들 운송수단을 회수해서 다시 항구로 보낼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므로 나치 독일 해군의 예상으로는 상륙부대가 모두 상륙했고 만사가 다 잘되는 상황에서도 최소 10일 후에나 제1파보다 적은 규모로만 추가적인 지원군의 상륙이 가능하다.

나치 독일 육군의 고위급 장성들은 좁고 몇 개 안되는 상륙지점때문에 상륙하자마자 영국군이 상륙지점에서 내륙으로 가는 통로를 막고 상륙지점 자체를 봉쇄할 가능성이 높고, 보급에 사용할 수 있는 대규모 항만을 즉시 점령할 수 없는 가능성이 높아서 보급에 문제가 생기며, 영국 해군의 방해를 진짜로 배제할 수 있는지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등의 중대한 우려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해당 작전안에는 확신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상륙지점의 숫자를 늘리고 폭도 늘려서 영국군의 방어역량이 모든 곳에 골고루 적용하지 못하게 하려고 지속적으로 나치 독일 해군을 압박했다. 일단 위에 언급한 구체적인 작전 계획은 1940년 8월 30일에 확정된 것이나 상황에 따라서 필요할 경우에는 임기응변적으로 변경이 가능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이 있었다. 이 점을 이용해서 8월부터 나치 독일 육군은 브라이튼 해안에서 직접 수송선을 접안해서 병력을 상륙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포츠머스에 주둔한 영국 해군의 상륙작전 방해 가능성이 있으니 상륙지점의 일부를 이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나치 독일 육군의 주장은 나치 독일 해군에 의해 수송능력 부족과 호위병력 부족등의 이유로 거부당했다.

8. 준비

바다사자 작전이 빠른 속도로 만들어지자마자 상륙작전에 대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때까지 나치 독일군이 영국 본토에 상륙작전을 시행한다는 것 자체를 거의 떠올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준비를 시작할 무렵에는 나치 독일군은 육군이건 해군이건 공군이건 간에 상륙작전용 장비같은 것은 아예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을 하거나 잘 해봐야 순수한 연구 목적에서 시제품 제작을 몇 건 한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매우 미흡했다.

그렇다고 타국의 사례를 참조해서 카피하는 것도 곤란했다. 1940년의 시점에서는 사단 규모 이상의 병력을 적진에 상륙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집단은 일본군 뿐이었다. 게다가 일본군도 1937년의 상하이 전투에서 최초로 대규모의 상륙작전 실전경험을 했는데 국민혁명군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쑹 전투에서 기관총 정도의 경장비로 무장한 국민혁명군의 해안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엄청난 사상자가 나는 등 성과에 비해 피해가 엄청났다.

여기에 더해서 말로만 같은 추축국이지 나치 독일일본 제국은 일부 분야에서는 공동교전국에 가까울 정도로 별로 친하지 않았으며 특히 일본이 독일에게 기술력 같은 것을 전달할 때는 아카기(항공모함)의 신식 단일 항공갑판 기술이 아니라 예전에 적용했던 구식이며 문제많은 3단 항공갑판 기술을 선심쓰듯이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 건조에 참조하라고 돈 받고 주는 등 같은 동맹을 맺은 국가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기술전달에서 불성실했다.

이러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나치 독일군은 바다사자 작전을 시행하기 위해서 상륙작전 준비 분야에서 사실상 맨땅에 헤딩하듯이 모든 것을 창조해야 했다.

8.1. 나치 독일 육군

폴란드 침공부터 프랑스 침공까지 놀라운 성과를 보였으며 장비도 충실한 편이었다. 그래서 일단 제대로 된 병력이 상륙을 성공하면 그 이후의 전과 확대는 보급과 보충만 적절하게 수행된다면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고 바다사자 작전을 위해서 상륙작전의 선봉으로 투입될 예정이었던 해군 육전대와 육군 산악부대가 프랑스 해안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육군 산악병들이 투입되는 이유는 알프스산맥에서 훈련받은 정예병들이므로 상륙작전에서도 쓸만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작전의 준비라는 목적에서 채널 제도를 점령했다.

그러나 상륙 제1파에 전차를 비롯한 기갑부대를 동반하지 않으면 상륙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면서 동시에 상륙이 실패할 가능성을 높게 보았고 상륙 이후에도 적절한 항구시설이 없어서 보급을 제대로 못받을 것을 걱정하였다.

기본적으로 육상에서의 전투에만 전문적이었던 나치 독일 육군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수륙양용전차를 만들어내거나 인공적인 보급항을 제조한다는 것처럼 의의로 상당히 유연한 생각을 떠올리고 실천에 옮겼지만 경험의 부족으로 상륙장갑차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못하는 등 미흡한 점도 많았다.

8.1.1. 부유 전차와 잠수 전차

나치 독일 해군에서 제공할 수 있는 상륙용 선박들이 전차를 빠르게 육지로 양륙하는데는 부적합한데다가 적의 공격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상륙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상륙 제1파에 어떻게든 전차를 동반시키기 위해 부유 전차와 잠수 전차를 제작하였다.

부유 전차는 2호 전차를 선택했다. 중량이 8.9톤 정도라 전차 자체의 양 측면에 부유낭을 부착하면 전차가 해면 위에 떠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부유낭을 알루미늄 소재로 제작한 후 내부에 케이폭나무(Kapok)가 들어간 자루를 집어넣어서 부력을 확보했다. 그 외에 침수를 방지하기 위해 포탑링 같은 부분에 방수처리를 하였으며 상륙 중에 교전을 감안해서 포탑에 장착된 주포인 2cm KwK 30 기관포 1문과 공축기관총인 7.92mm MG34 기관총 1정은 사용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에 포탑을 회전시켜도 방수에 지장이 없도록 포탑링 주변에 팽창식 고무호스를 부착해서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수상에서의 추진력은 전차의 무한궤도와 연결된 프로펠러 사프트에 달린 스크류를 돌려서 얻으며 속도는 수상에서 5.7km/h 이다. 부유 전차로 개조된 2호 전차는 52대이며 명칭은 슈빔판처(Schwimmpanzer) II로 부여되었다.

잠수 전차는 3호 전차4호 전차를 선택했다. 이들 전차는 중량 문제로 인해 부유 방식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조준경, 출입구, 흡기구 같이 물이 들어올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방수처리했다. 포탑링 부분은 팽창식 고무호스로 막았고 주포의 포방패, 전차장용 큐폴라, 무전수의 차체 기관총 같은 곳에는 특수한 고무마개를 부착했다. 전차가 물 속을 벗어나서 해안에 완전하게 상륙하면 도폭선을 사용해서 잠수시 필요한 모든 봉인이나 마개를 제거할 수 있었고 그렇게 된 후에는 정상적인 교전이 가능했다.

잠수 전차는 바다 밑바닥을 무한궤도로 주행하면서 움직이므로 전차 승무원과 엔진을 위한 산소가 필요했다. 산소의 공급과 환기를 위해서 출구에 부유물이 부착된 18m 길이의 고무호스가 설치되었으며 잠수 전차와 외부와의 통신을 위해서 고무호스에 달린 부유물에 무선용 안테나도 설치되었다. 바다 속에서 전차 엔진을 가동하기 위해서 전차의 엔진은 해수로 냉각이 가능하도록 개조되었고 배기관에는 해수 역류를 막기 위한 과압 밸브가 설치되었다. 전차 차내로 침투하는 물은 내부에 있는 펌프로 외부 배출이 가능했다.

잠수 전차는 자체적인 시야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이로스코프를 사용해서 직진하거나 상륙선에서 무선으로 지시하는 것을 전달받아서 방향을 설정했다. 그래서 잠수 전차는 최대 15m의 수심에서 정상적인 동작이 가능했고 대략적인 수중속도는 6km/h 다. 잠수 전차로 개조된 3호 전차는 160대, 4호 전차는 42대이며 잠수 전차는 Tauchpanzer III 과 Tauchpanzer IV로 명명되었다.

1940년 8월 말까지 나치 독일 육군은 총 254대의 부유 전차와 잠수 전차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들 전차들은 A, B, C, D라고 표기된 4개의 대대급 부대로 배속되었고 일부는 여기서 분견대로 추가로 나누어서 제1파 상륙부대와 같이 상륙하도록 배치되었다. 그리고 부유 전차를 위해 C형 바지선이 개발되었고 잠수 전차를 위해 B형 바지선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전차들이 200km 정도의 전투행동반경을 유지할 정도의 연료와 탄약도 같이 운송하도록 했다.

부유 전차와 잠수 전차는 해안에 직접 상륙하지 않고도 해안 근처의 바다에서 전차를 내보내서 전차를 적이 방어하는 해안선에 상륙시킬 수 있다는 이점을 제공했다. 육상전을 주력으로 하는 나치 독일 육군이 어느 정도는 제대로 돌아가는 수륙양용전차를 만든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미숙한 점도 많았다. 부유 전차는 부유력을 유지하는 부유낭에 방탄 능력이 없어서 적의 공격을 받아서 피탄이 발생하면 침몰할 위험성이 높았고 엔진 부위의 흡기구에 물이 들어가서 작동정지될 위험성이 높았다.

잠수 전차는 더 심각했다. 해저의 바닥이 탄탄하지 못하면 그대로 전차가 바닥에 박힌 채로 멈춰서 전차와 승무원을 모조리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았고 해저 바닥에 박힌 바위나 구덩이 같은 것과 충돌해서 전진이 막히는 경우도 속출했다. 덤으로 일단 바다에 투입되면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이동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해저 바닥에 무한궤도가 박히면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점도 발견되었다. 시야 확보가 안 되므로 앞서 이야기한 보조장비를 쓰더라도 엉뚱한 방향으로 가다가 침몰할 위험성도 존재하였다.

빌헬름스하펜 근처의 실링(Schilling)에서 1940년 6월 말과 7월 초에 실시한 실험에서도 이렇게 굵직한 문제점이 속출했으므로 실제로 실전에 투입되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나올지는 다들 몰랐다. 결국 부유 전차와 잠수 전차는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된 후 독소전쟁의 시작인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부크 강을 도하할 때 사용되었으며 원래 도해 작전을 위해 사용될 물건인지라 도하 작전의 난이도가 더 낮으므로 성공적으로 운용되었다고 한다.

8.1.2. 상륙군 보급용 장비

조립식 인공항구는 1944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사용된 조립식 인공항구인 멀베리 항구(Mulberry harbour)의 축소판이라고 보면 되며 바다사자 작전에서 상륙군이 제대로 돌아가는 항구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에 대체품으로 사용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크루프사의 제품과 도르트문트 연합(Dortmunder Union)의 제품이 경쟁하였으며 시제품들이 북해에서 1941년과 1942년 사이의 겨울을 버티는 것에 성공하여 내구성을 입증하였다. 여기서 경쟁에 승리한 것은 크루프 사의 제품인데 그 이유는 도르트문트 연합의 제품은 설치에 28일이 소요되지만 크루프사의 제품은 설치에 1일만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크루프사의 제품은 32m 길이를 가진 연결다리로 만들어진 플랫폼으로 구성되었고 각 플랫폼은 4개의 강철기둥을 해저에 박아서 지탱했다.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서 강력하고 튼튼한 윈치로 플랫폼 자체를 상하로 이동시킬 수 있다. 나치 독일 욱군은 크루프 사의 제품을 채용한 후 6개의 플랫폼으로 구성된 조립식 인공항구 1개를 기준으로 해서 8개의 조립식 인공항구를 주문했으나 바다사자 작전이 계속 연기되면서 1941년 가을에 6개로 축소되었다가 결국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된 것이 명확해지자 모두 주문취소되었다.

조립식 인공항구의 주요 사용처가 사라지자 양사의 시제품은 채널 제도올더니 섬으로 이동한 후 설치되었다. 이렇게 외딴 섬에 설치된 이유는 대서양 방벽의 구간 중 일부로 올더니 섬이 선택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조립식 인공항구는 섬을 요새화하는 자재를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대로 남아서 현지 주민에게 독일 부두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결국 1978년 ~ 1979년에 철거될 때까지 36년동안 버티면서 장기간 내구성도 본의 아니게 입증하였다.

조립식 인공항구 외에도 조수간만의 차에 대응하고 해변에서 임시로 부두를 연결해서 사용가능하도록 부유식 부두, 일명 잔다리 부두라고 불리는 물건도 개발했다. Seeschlange (바다뱀)이라고 명명된 해당 부두는 각각의 견인 가능한 구조물을 집결시킨 후에 조립해서 사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래서 철도 운송이 쉽게 이루어진다. 해당 부유식 부두는 1941년 가을에 르아브르에서 나치 독일 육군의 훈련부대에서 실험하여 성공적이라는 결과를 얻었으며 몰타 항공전이 추축국의 승리로 끝나면 몰타 침공시에 사용하려고 준비했다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끝난다.

1935년부터 개발하던 특수 운반 차량도 존재했다. Landwasserschlepper 라고 불리며 소형선박의 하부에 무한궤도를 장착한 것처럼 보이는 수륙양용 트랙터는 원래 육군 공병이 도하 작전시에 사용하도록 만들어졌다. 무동력 바지선을 해변으로 끌어당기고 각종 차량이 해변의 구덩이에 빠지면 견인하며 만일 보급을 담당한 바지선이 좌초되거나 하면 직접 보급품을 운송이 가능했다. 바다사자 작전에서는 직접 보급품을 운송할 경우에는 6시간 정도의 밀물 시간이 적당하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수륙양용 트랙터 뒤에 추가적인 수륙양용 트레일러를 붙여서 10톤에서 20톤 정도의 화물을 추가로 운송하는 방안도 제시되었다.

1940년 8월 2일에 유틀란트 반도 남서쪽의 실트(Sylt) 섬에서 실시한 실험에서 프란츠 할더는 Landwasserschlepper의 전반적인 유용성을 인정했으며 바다사자 작전시 침공에 참여하는 바지선당 1 ~ 2대 정도는 분배할 수준으로 많은 수량을 제조하라고 제안했다.

바다와 인연이 없다시피하는 나치 독일 육군 치고는 그럭저럭 성능이 보장되는 조립식 인공항구와 부유식 부두, 특수 운반 차량을 개발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조립식 인공항구와 부유식 부두는 바다사자 작전의 실제 실행 가능 시기인 1940년 9월 시점에서는 개발도 완료되지 않은 상태라 때를 놓쳤으며 특수 운반 차량의 경우에는 시기는 간신히 맞추었으나 대량생산이 어려워서 보급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각각의 단점도 존재했다. 조립식 인공부두는 내구성은 좋았으나 크기가 작아서 하역 가능 용량이 과연 바다사자 작전에 참여하는 상륙군에게 충분한 보급을 해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존재했고 특수 운반 차량은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에는 거대하고 높은 모습 때문에 적에게 빠르게 발각되어 집중공격을 받기 쉽고 방탄성능이 부족하다는 것이 언급될 정도였다.

8.1.3. 신무기

바다사자 작전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나치 독일 육군이 1940년 9월에 해당 작전이 실시되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신무기가 존재했다.

일단 운반용으로 프랑스제 로렌 37L TRC이나 르노 UE 슈니예트와 같은 장갑 트랙터를 프랑스 침공의 성공으로 대량으로 노획했다. 이들 장갑 트랙터는 화포같은 중장비를 견인할 수 있는 능력과 내부에 소규모 화물을 운송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트레일러를 연결해서 중규모 화물을 운송가능한 능력을 보유했으며 최소한의 장갑판도 보유해서 포탄 파편과 소총탄을 막을 수 있었다.

나치 독일군이 노획한 로렌 37L TRC 360대와 르노 UE 슈니예트 약 3,000대는 바다사자 작전의 상륙 제1파를 차량화하는 데 충분하였으며 덕분에 원래 제1파에 필요한 군마의 수량을 45,000마리에서 4,200마리로 크게 줄여서 군마가 먹을 마초와 같은 보급 소요를 크게 줄이고 병력을 좀 더 기동능력이 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기갑전력에서는 3호 돌격포는 50mm 장갑을 보유하고 상부구조물을 개량했으며 향상된 현가장치를 보유한 B형이 투입되고 3호 전차는 F형과 G형이 투입되는데 이들은 포방패의 두께가 증가하였으며 주포를 3.7cm 구경과 46.5 구경장의 포신을 가진 KwK 36에서 5cm 구경과 42구경장의 포신을 가진 KwK 38로 업그레이드 하는 중이라 화력 향상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 외에 2호 전차 계열의 화염방사전차도 투입된다.

화포면에서도 네벨베르퍼라고 불리는 연막탄 발사도 가능한 105mm 중(重)박격포가 투입되고 공수부대용으로 7.5 cm Leichtgeschütz 40이라고 하는 무반동포가 투입되는데 해당 무반동포는 4부분으로 분해되어 각각의 부분이 공수낙하가 가능하며 현장에서 간편하게 조립할 수 있는 무기였다.

대전차포의 경우에는 37mm PaK 36텅스텐을 탄심으로 사용한 Pzgr. 40 탄약을 도입해서 마틸다 전차발렌타인 전차제외한 영국군의 전차 대부분을 격파 가능했으며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제 47mm 대전차포도 사용가능했고 50mm PaK 38도 도입이 시작되었으므로 정예부대에 소량을 지급하여 마탈다 전차나 발렌타인 전차같이 장갑이 두꺼운 영국군의 전차를 격파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전반적으로 프랑스 침공시에 비해서는 나치 독일 육군의 장비가 향상되었으나 대전차 화력 면에서 영국군의 보병전차중 일부와 같이 두꺼운 장갑을 가진 전차를 격파하기에는 뭔가 약간 모자란 능력을 보이고 있다.

8.2. 나치 독일 해군

바다사자 작전 전반에 걸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총체적 난국 그 자체였다. 나치 독일 해군의 전력은 과거부터 상당히 미약했다. 1940년에 들어서야 샤른호르스트급 전함과 아직 취역이 완료되지 않은 비스마르크급 전함을 합쳐 4척의 전함을 보유하였고, 순양함의 경우에는 경순양함중순양함을 모두 합쳐도 고작 8척[4]에 불과하였다. 항공모함은 계획을 세워둔 함선과 건조중이던 그라프 채펠린급 외 실전배치된 함은 한 척도 없었다.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슐레지엔과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하노버도 있었지만, 이 3척은 1940년대에 들어서 사실상 전력외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노르웨이 침공 때 수상 함대에 큰 타격을 입었으며, 바다사자 작전이 계속 연기중이던 1941년 5월에는 그나마 얼마 없던 전함 4척중 하나인 비스마르크격침당해버리는 등 손실이 점점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급 전함 2척이 취역해서 전투가 가능해지는 시점까지 바다사자 작전을 연기하려고 했지만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11인치급 주포 탑재 전함 2척과 15인치급 주포 탑재 전함 2척을 합쳐 전함 4척과 약간의 호위함만으로 영국 해군의 주력인 본토함대를 상대하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U보트는 기본적으로 통상파괴전용이지 정규 해전용이 아니었고 이미 노르웨이 침공시에 이런 사실이 입증된 상황이었다.

항복한 프랑스 해군의 군함을 노획해서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이미 영국이 캐터펄트 작전으로 쓸만한 프랑스 군함을 전부 파손시킨 상태였다. 그러나 남아 있었다고 해도 타국의 군함을 편입해서 전투에서 제대로 사용할 정도로 만들려면 시간과 노력과 자재가 많이 들어가야 하는데 당시의 나치 독일은 그러한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비시 프랑스군을 바다사자 작전에 동원할 수도 없었다. 비시 프랑스 측에서는 자국의 현역 군함들을 나치 독일이 압수하려고 하면 차라리 자침시킬 계획과 준비를 해놓은 상황이었고 실제로 실행에 옮겨 툴롱 프랑스 함대 자침이 일어났다.

이탈리아 왕립 해군을 바다사자 작전에 참여시키는 안도 있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이 지키고 있는 지브롤터 해협을 돌파하는 것부터 난관이었고 이탈리아 해군은 지리적 특성상 지중해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을 고려해서 항속거리가 극단적으로 짧았다. 또한 베니토 무솔리니가 즉흥적으로 개전한 덕분에 이탈리아 해군은 연료보유량도 부족한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해야해서 지중해를 떠날 수 없었다. 결국 이 안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나치 독일 내부에서도 나치 독일 해군이 바다사자 작전을 개시할 경우에 영국 해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며 그로 인해 상륙작전에 치명적인 위험이 초래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분위기였다. 대표적으로 1940년 8월 13일 국방군최고사령부의 알프레트 요들이 보고서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거론하였다.

8.2.1. 기뢰

영국 해군을 막아낼 수상함 전력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영국 해군이 상륙지점으로 근접해서 상륙작전을 방해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내기 위해서는 기뢰를 대규모로 부설하는 방법이 가장 유용했다.

기뢰밭은 크게 4곳의 대규모 기뢰밭으로 구성된다. ANTON은 웨스트 서식스(West Sussex)의 셀시 빌(Selsey Bill)에 부설하고 BRUNO는 이스트 서식스(East Sussex)의 비치 헤드(Beachy Head)에 부설해서 포츠머스 방면에서 다가오는 영국 해군을 막는다. CAESAR는 도버 방면에서 다가오는 영국 해군을 막기 위해 상륙지점 B를 보호하는 형태로 부설한다. DORA는 라임 만(Lyme Bay)에 부설해서 플리머스 방면에서 출격하는 영국 해군을 막는다. 각각의 기뢰밭은 4개의 열로 구성된 3,000개의 기뢰로 구성된다.

1940년 9월의 시점에서 나치 독일 해군의 기뢰 부설 실력 및 대규모 부설 능력은 입증되었기에 바다사자 작전 실행일 9일 전인 S -9일부터 시작되는 기뢰부설 자체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영국 해군이 소해 작업을 통해 기뢰를 제거하는 것을 막아낼 적당한 방법은 없었기 때문에 기뢰밭이 상륙작전이 완료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8.2.2. 양동작전

기뢰가 영국 해협에 배치된 영국 해군을 저지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부설되었다면 양동 작전은 영국의 본토함대를 비롯한 다른 함대들이 영국 해협에 진입하여 상륙작전을 방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엉뚱한 방향으로 영국 함대를 유인하는 것을 말한다.

작전의 내용은 화물선, 여객선, 병원선이나 노후화된 훈련함등을 소수의 구식 경순양함, 어뢰정, 기뢰함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독일과 노르웨이의 주요 항구를 오가면서 병력을 양륙하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바다사자 작전 개시일에 영국 본토 함대의 모항인 스캐퍼플로가 있는 오크니 제도 쪽으로 살짝 이동해서 영국 본토함대의 시선을 돌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소형 선박에 레이더 반사 면적을 늘리는 반사판을 달아놓는 등 영국 함대의 시선에 잘 걸리게 하는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1번함인 아트미랄 히퍼를 북대서양에 보내서 통상파괴전을 실시함으로서 영국 해군의 시선을 끄는 작전도 병행한다. 이 작전에는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2번함인 아트마랄 셰어 같은 다른 대형함들도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1940년 9월에 바다사자 작전이 실시될 경우에는 다른 대형함들은 수리가 완료되지 않아서 아트미랄 히퍼만 통상파괴전에 나서게 된다.

기본적으로 양동작전의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영국 해군이 이런 낚시에 걸릴 것인가에 의문점이 있고 일단 제대로 걸렸다고 해도 영국 해군의 전력이 워낙 압도적이므로 전력을 약간 나누어서 영국 해군의 일부라도 도버 해협에 투입되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바다사자 작전이 심각한 방해를 받는 것은 여전한데다가 양동작전을 담당한 부대는 말 그대로 전멸을 각오해야 하는 등의 무리수가 존재한다. 일종의 궁여지책이라고 봐야 할 정도다.

8.2.3. 해안포

나치 독일 해군의 전력이 미약한 상황에서 영국의 본토함대가 도버 해협으로 진입할 경우 가장 유력한 통과지점인 도버와 칼레 사이의 폭 34km 정도의 좁은 해협을 장악하려면 해안포가 필수적이다.

이미 1940년 7월 22일부터 영국 해협을 오고 가는 영국 선박을 격침시키기 위해서 사용 가능한 모든 중포를 조립하고 배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토드 조직(Organisation Todt)이 작업을 수행중이었다. 중포는 육군용이나 해군용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대서양 방벽이 설치되기 한참 전의 상황인지라 집결한 중포의 상당수가 대수상함용으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주로 육군에서 운용하는 열차포의 경우에는 크루프 K5처럼 자체적으로는 포신 선회가 불가능해서 포구를 돌리기 위해서는 거대한 원형을 이루는 철도를 부설해야 하는 등 아예 지상표적에만 적합한 화포가 많았으며 포신을 제한적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한 열차포라고 해도 포신 선회 속도와 재장전 속도가 모두 엄청나게 느려서 실전에서 군함을 목표로 사격하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1940년 9월 중순까지 설치된 나치 독일 해군 소속의 11인치(280mm)와 12인치(305mm) 해안포가 배치된 4개 해안포대가 주력을 담당해야 했다. 이들 해안포대가 보유한 해안포 중에는 비스마르크급 전함에서 사용하는 함포와 동일한 14.96인치(380mm)도 존재하였다. 해안포의 조준을 위해서는 정찰기와 레이더를 사용했는데 영국에서 사용하는 소형 순찰선을 40km에서 탐지가능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바다사자 작전이 실시되고 상륙군이 교두보를 성공적으로 확보할 경우에는 교두보 보호를 위해서 점령한 영국 본토에 중소구경 해안포를 긴급배치할 예정이었다. 구경은 105mm와 150mm였다.

해안포는 기본적으로 영국 해협의 동쪽 출구는 완전하게 유효사정거리 안에 넣고 서쪽 방면의 경우에는 사정거리가 닿지는 않으나 상륙군의 수송로를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을 수준의 범위는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점은 대서양 방벽이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더 많은 해안포가 증설되면서 강화된다.

하지만 영국도 영국 본토쪽 해안포와 요새를 증설 및 강화하기 시작하였고 실제로 역사상에 벌어졌던 도버 해협에서의 쌍방간 포격전을 살펴볼 때 영국의 해안포요새포는 목표 탐색과 격파에 독일의 해안포보다 상당히 나은 실적을 보여준 반면에 독일의 해안포는 실적이 안좋았으며 특히 수상함을 목표로 할 경우에는 군함 1척의 약간의 손상과 1명의 승무원 사망 및 몇명의 부상 정도 수준이라는 초라하면서도 피해라고 보기에도 힘든 수준의 실적을 거두었다. 이래서는 실제로 바다사자 작전이 시작되면 영국 해군의 본토함대를 상대로 얼마나 실적을 거둘 수 있을 지 의문이다.

8.2.4. 호위함대

양동작전으로 그나마 있던 순양함까지 대형 군함은 모두 투입한 결과 상륙부대를 호위할 호위함대에 투입할 군함들은 구축함 이하의 소형 군함밖에 남지 않았고 수량도 적었다.

1940년 9월 14일에 귄터 뤼첸스가 수정 및 확정한 호위계획에 따르면 5척의 U보트, 7척의 구축함, 17척의 어뢰정으로 3개 전대를 구성하여 서부 기뢰밭 방면의 방어를 담당하고 3척의 U보트와 가용 가능한 모든 슈넬보트로 2개 전대를 구성하여 도버 방면과 해협의 동북쪽 방면의 방어를 담당하게 한다.

그리고 상륙선단 내에도 무장상선을 배치하는데 4척의 연안 화물선은 1문의 150mm 함포와 2문의 105mm 함포를 장착하여 보조 건보트로 개조했고 27척의 소형 선박들은 프랑스제 1897년식 75mm 야포를 1문 장착하여 투입한다. 이들은 상륙해안의 포격지원 임무 외에도 영국 해군의 정규 군함인 순양함과 구축함을 상대하는 임무까지 담당한다.

서류만 대강 보더라도 말도 안될 지경으로 호위함대의 수와 질이 모조리 떨어지기 때문에 전드레드노트급 전함도이칠란트급 전함 2척을 추가로 투입하려고 시도했다. 이들 군함들은 폴란드 침공에도 함포사격 지원으로 참가했기에 당장 운용은 가능하지만 이미 1차대전 당시의 유틀란트 해전에서 자매함인 포메른이 영국 구축함의 어뢰공격을 받아서 탄약고 유폭으로 격침된 것을 감안하면 최소한의 근대화개장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워낙 낡은 군함이기에 그동안 제대로 된 대규모 개장을 받은 적이 없어서 정식 해전에 참가할 수준의 최소한의 개장을 하더라도 6주가 소요된다는 판단이 나오자 바다사자 작전 투입이 취소된다.

8.2.5. 상륙함과 상륙정

바다사자 작전 수행시 나치 독일 해군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자 아킬레스건이다.

나치 독일 해군은 재무장도 늦었고 자금지원도 열악했으며 기술단절도 있었고 해군력 재건의 목표도 Z 계획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양함대 재건이 주 목적이었으며 그나마 빠른 개전으로 인해 Z 계획이 취소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는 바람에 상륙함이나 상륙정에 대한 것은 연구 목적에서의 관심 수준에 그쳤다.

나치 독일 해군이 연구한 상륙정은 Pionierlandungsboot 39 인데 공병상륙정 39년형이라는 명칭답게 45명의 보병과 2대의 가벼운 차량을 운반하거나 20톤의 화물을 적재하여 해안에 양륙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선수에 출입문과 경사로를 가진 동력선이었다. 하지만 1940년에 2척의 프로토타입만 생산되었고 연구가 완료되지 않았으며 양산은 아직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나치 독일 해군이 연구한 상륙함은 Marinefährprahm 라고 부르는 적재량 220톤의 군함이었다. 전차와 보병과 화물을 동시에 해안에 양륙할 필요성을 느껴서 개발에 돌입했지만 1940년 9월의 시점에서는 개발도 완료되지 않았고 첫번째 시제품도 1941년 4월에나 나왔으며 여러가지 고쳐야 할 문제점이 많아서 실전에서 사용이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0년 9월에 바다사자 작전을 실행하려는 계획이 잡히자 잘 해봐야 2달이라는 빠듯한 시간제한이 발생하였고 어쩔 수 없이 라인강 같은 내륙 수운에 사용되던 바지선을 끌어모아서 상륙함과 상륙정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그래서 독일에서 860척,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1,200척, 프랑스에서 350척을 합쳐서 나치 독일이 점령한 유럽에서 대략적으로 2,400척의 바지선을 집결시킬 수 있었으나 이중에서 800척만 자체 동력으로 움직이는 게 가능했으며 나머지는 항해 및 단순이동에도 예인선을 필요로 했다.

설상가상으로 종류도 다양해서 임시적으로 2가지 분류로 나누어서 바지선을 관리해야 했다. 페니체(peniche) 는 전장이 38.5m에 360톤의 화물을 운반가능했고 1,336척이 해당 분류로 구분된다. 캄피네(Kampine)는 전장이 50m에 620톤의 화물을 운반가능했고 982척이 해당 분류로 구분된다. 게다가 이런 구분도 대강 시행할 정도로 분류 내부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바지선이 있으므로 페니체 내부에서 정식 기준에 맞는 페니체는 A1형으로 분류하고 그보다 조금 큰 형태는 모조리 A2형으로 분류했다.

그 외에도 전차 탑재나 특수 목적에 따른 개조형태가 존재한다.
항공기 엔진은 선체 후방 끝에 장착한 철제 비계로 지지되는 플랫폼에 부착했으며 엔진용 냉각수는 갑판 위에 설치된 탱크에 저장했다. 이런 식으로 완성된 AF형의 항행속도는 6노트(11km/h)였으며, 보조 연료 탱크를 장착하지 않은 경우 항속거리는 60해리(110km)였다.
다만 간이 동력정답게 선체를 후진시킬 수 없고 기동성이 제한적이며 원래 항공기용 엔진인지라 강력한 엔진의 소음으로 인해 음성으로 명령하는 것에 큰 방해가 되는 단점이 존재한다.
어찌되었든 동력선이 늘어나므로 1940년 10월 1일까지 128대의 A형 상륙정이 개조되었으며 10월 말에는 개조된 상륙정이 200척 이상으로 늘어난다.

이런 식으로 바지선을 끌어모으고 개조하는 여러가지 노력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륙 항행용 선박인 관계로 인해 보퍼트 풍력 계급으로 계급 5 정도의 중간 파도(moderate wave) 상황 정도가 항행가능한 한계이며 실제로는 개조 및 중량물 탑재로 인해 계급 4 정도의 작은 파도(small wave) 상황에서도 항행에 많은 지장이 올 정도로 상륙작전에는 사용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예인선이 없으면 항해는 커녕 단순한 이동도 못하는 무동력 바지선의 숫자가 1,600척으로 상륙함과 상륙정의 주력이라는 것도 문제다. 결국 자력 항해가 가능한 바지선 1척당 무동력 바지선 1척을 견인하도록 하거나 예인선 1척이 무동력 바지선 2척을 예인하게 하는 등의 각종 궁여지책이 나오게 되었으나 실전에서 적의 견제사격이라도 날아올 경우에는 말 그대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거대한 표적으로 전락해서 사격을 얻어맞는 것과 동시에 예인로프가 끊어지면서 무동력 바지선이 거친 바다에 표류하는 막장사태가 날 것이 이미 예견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수량도 절대적으로 모자란데다가 예비수량이 전혀 없어서 제1파가 사용한 상륙함과 상륙정을 다시 예인선으로 끌어와서 재사용하지 않으면 수송 및 보급이 곤란해지므로 상륙 후 추가 상륙이나 보급에도 큰 지장이 온다. 덤으로 원래 내륙 수운에 사용되던 물건이고 장기간 징발하면 산업과 경제에 큰 악영향이 오므로 오랜기간 상륙작전 대비를 위해 묶어놓을 수도 없다.

따라서 해당 문제 때문에 만사가 잘 풀리는 상황에서도 바다사자 작전의 수행이 좌초될 수 밖에 없었다. 바다사자 작전의 개시일 근처에서 바다가 약간 거칠어지기만 해도 다수의 바지선이 그대로 바다 속으로 들어가버리거나 표류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8.3. 나치 독일 공군

나치 독일의 군대 중에서 가장 상황이 좋은 경우다. 폴란드 침공부터 프랑스 침공까지 공군력의 우위를 항상 가져갔고 바다사자 작전을 구상하는 시기에는 사실상 세계 1위의 공군력을 보유하였다. 그러니 헤르만 괴링이 자신있게 장담을 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나치 독일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육상에서 제공권을 확보하며 육상 전투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군이 창설되고 급격하게 덩치를 불린 것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8.3.1. 항공기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자세하게 나오지만 주력 전투기인 Bf 109는 아직 외장형 보조연료탱크가 제대로 도입되지 않아서 런던 상공에서 15분 정도의 전투가능시간만 가지는 등 항속거리의 문제가 심했고 Bf 110은 영국의 단발 단좌 단엽전투기와 공중전을 할 능력이 부족했으며 Do 17과 같은 폭격기들은 기체 방어력이 빈약하고 폭장량이 부족하며 Ju 87과 같은 급강하폭격기는 제대로 된 호위가 없으면 날아다니는 표적에 불과하다는 등의 여러가지 문제점이 산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Fw 190같은 신예기는 아직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레이더의 지원까지 받는 영국 공군을 본거지에서 제압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실제 역사처럼 영국 공군을 신속하게 제압하지 못하고 공중전이 지속되면서 발이라도 묶이게 되면 그냥 바다사자 작전 자체가 무기한 연기되거나 취소당하게 된다.

8.3.2. 인적 자원 손실

앞서 말한 항공기의 문제 덕분에 기체 방어력이 부족하거나 항속거리가 짧아서 영국 본토에 불시착하거나 영국 해협의 바다 위에 착수해서 인적 자원 손실을 보는 경우가 이미 1940년 7월부터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손실을 줄일 능력도 부족한게 현실이었다. 파일럿이 영국 본토에 불시착하면 그냥 포로가 되는 것이고 바다에 착수하면 그냥 익사하니 답이 없었다. 설령 바다에 표류하면서 버티더라도 영국의 항구에서 출격해서 자국 파일럿을 구조하던 영국 해군에게 구조당해서 포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문제점은 영국 본토 항공전이 진행됨에 따라 바다 위에 표류자 피난 및 대피용으로 내부에 난방장치와 비상식량과 식수와 예비 피복을 적재하고 방수가 되는 선실까지 있는 대형 부이를 다수 뿌리고 주기적으로 독일 어뢰정이 독일 파일럿을 구하려고 부이들을 순회하는 코스를 잡으면서 출격하는 등의 방법으로 손실을 줄였으나 바다사자 작전 당시에는 그런 대응책이 거의 없으므로 나치 독일 공군이 엄청난 인적 자원 손실을 볼 것이 분명했다.

여기에 더해서 인적 자원을 보충할 준비도 제대로 안된 상태였다. 베르사유 조약을 피해서 공군을 만들다보니까 파일럿을 양성하는 제대로 된 전문기관이 단 1곳밖에 없었다. 이미 글라이더 클럽등의 변칙 수단을 동원해서 양성한 파일럿은 대부분 현역으로 입대한 상태였고 손실되는 파일럿을 보충할 방법이 별로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나치 독일 공군의 파일럿이 모자르게 되는게 현실인데 영국 공군과 싸우다가 인적 자원 손실을 심하게 입기 시작하면 답이 없어진다.

8.3.3. 대함공격능력 부족

놀라운 일이지만 바다사자 작전 시기까지 나치 독일 공군은 대함공격능력이 크게 부족했다.

뇌격기로 당시에 사용할만한 물건은 저성능이며 138기라는 극소수만 존재하는 하인켈 He-115라는 수상기 밖에 없었고 나머지 항공기는 항공 폭탄만 장착가능했고 항공 어뢰는 아직 장착이 불가능했다.

항공 폭탄의 경우도 장갑을 갖춘 군함에 효과적인 철갑 폭탄의 종류와 수량이 모두 부족한데다가 나치 독일 공군은 아직까지 대함 공격에 대한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였고 특히 고속성능과 선회성능을 모두 갖춘 소형 군함에 대한 공격능력은 말 그대로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덕분에 제공권을 확보한 노르웨이 침공에서도 경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 격침이라는 초라한 성과를 올렸으며 1940년 전체를 따져봐도 영국 근처에서 활동중인 영국 구축함 9척이 격침되었는데 그중 5척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의 손실이라는 점을 따진다면 성과가 미약한 편이다. 심지어 영국이 700척 ~ 800척 정도 보유한 어뢰정급 소형 군함의 경우에는 2차대전 기간중 115척이 격침당했으나 공습으로는 꼴랑 9척이 격침당하는 데 그쳤다.

물론 이런 문제도 항공 어뢰를 장착 가능한 항공기가 늘어나고 대함 공격능력을 향상시켰으며 철갑 폭탄의 종류와 숫자도 늘리면서 프리츠 X와 같은 유도폭탄이라는 신무기도 연구 및 양산과 실전 투입까지 하였지만 바다사자 작전 기간에는 기본적인 연구개발도 전혀 안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만일 바다사자 작전이 시작되었다면 나치 독일 공군이 영국 본토함대를 제압하기는 커녕 도버 해협에 있는 영국 항구에 정박한 모터 어뢰정(Motor Torpedo boat;MTB)이나 모터 건보트(Motor Gunboat; MGB)가 상륙선단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에도 벅찰 가능성이 높다.

8.3.4. 공수부대

나치 독일의 공수부대는 나치 독일 공군의 소속이었으며 에반-에마엘 요새 함락같은 전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프랑스 침공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바다사자 작전에서도 공수부대의 투입이 결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성과에 가려진 희생이 너무 많아서 바다사자 작전 시기에는 투입 가능한 병력 숫자가 모자라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네덜란드의 사실상의 행정수도인 헤이그를 공중강습해서 네덜란드 정부를 조기에 무력화하려는 작전이 사실상 실패로 끝나면서 Ju 52 수송기 약 250대가 격추되거나 손실되고 포로가 1,300명이나 발생하여 영국으로 끌려갔으며 그 외에도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의 일이 터진 게 큰 문제였다.

그래서 1940년 9월에 바다사자 작전이 발동할 경우에는 나치 독일 공군이 투입할 수 있는 공수부대는 대략 3,000명에 불과하였다. 이 정도로는 공수투하한 곳의 비행장이라도 제대로 점령할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수송기 부족 문제도 심각했다. Ju 52의 생산은 우선도 순위에서 하위권을 달렸기 때문에 손실된 수송기를 보충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1940년 9월 중순의 작전 예정 시기에는 약 220기의 Ju 52와 50기 정도의 DFS 230 글라이더가 사용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이 정도의 수량은 크레타 섬 전투에 투입된 수송기 수량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정도라서 이미 있는 공수부대 투입에도 빠듯한 실정이므로 추가적으로 공수부대를 더 모집했더라도 수송기 부족으로 실제 전장에 투입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더해서 수송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미 투입된 공수부대에 대한 공중보급이나 상륙군에 대한 긴급공수보급 같은 것을 수행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돌발사태가 생기더라도 긴급보급이 어려워지므로 상륙군이 불리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8.3.5. 이탈리아 왕립 공군

베니토 무솔리니가 바다사자 작전에 한번 발을 살짝 담그고 나중에 나치 독일에게 큰 보상을 받을 목적으로 외무장관인 갈레아초 치아노를 통해 히틀러에게 최대 10개 사단과 30개 비행대 파견을 신속하게 제안한 바가 있다. 히틀러는 처음에는 무솔리니의 제안을 거부하였으나 곧 생각을 바꿔서 이탈리아 왕립 공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로 구성된 소규모의 이탈리아 항공대의 파견을 승인했다.

이들은 1940년 10월과 11월 사이에 나치 독일 공군과 같이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가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피해만 입었다. CR. 42같은 복엽기와 구식 항공기로 구성된 탓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물론 공중전에서 대등하게 붙어서 영국 공군에게 그런 낡은 항공기를 몰고도 저 정도라니 하는 수준의 경각심을 주었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나마 전투기는 공중전이라도 시행했지만 폭격기는 목표를 찾지도 못하고 귀환하거나 엉뚱한 곳에 도달해서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 진짜로 답이 없는 실적을 거두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본다면 실제로 바다사자 작전에 이탈리아 왕립 공군이 참전하더라도 영국 공군의 전투력 중 극히 일부를 잠깐동안 붙잡아두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움이 안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9. 문제점

작전의 목표부터 실행준비까지 전체 분야에 걸쳐서 문제점이 아닌 것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문제가 많다. 총체적 난국이라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다.

9.1. 목표 달성의 불확실성

바다사자 작전의 목표는 영국이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단순해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봐도 목표 달성이 매우 어려운 것을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다. 영국 본토인 그레이트브리튼섬을 어느 정도까지 점령해야 영국이 항복할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수도인 런던과 근방 정도만 점령하여 잉글랜드 남동부만 확보하면 되는 것인지, 리버풀, 맨체스터, 버밍엄, 브리스톨, 셰필드 같은 잉글랜드의 중요 지역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잉글랜드를 대부분 점령해야 하는 것인지, 스코틀랜드웨일스를 포함한 그레이트브리튼섬을 대부분 점령해야 하는 것인지에 따라서 작전의 난이도와 준비 과정이 엄청나게 달라지는데 전혀 그러한 것에 대한 논의가 없다.

그리고 그레이트브리튼섬을 석권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당장 북아일랜드로 영국 정부가 피난가면 아일랜드섬도 점령해야 하는데 그렇게 될 경우에는 상륙작전을 또 한번 반복해야 한다. 해당 섬의 상당부분을 점유하는 중립국아일랜드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이며 어느 정도 개입할 것인지 여부도 결정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영국 정부가 근거리만 피난하더라도 귀찮은 문제가 엄청나게 발생한다.

설상가상으로 대영제국답게 캐나다 자치령이나 호주 자치령과 같이 유럽에서 멀리 떨어졌으며 백인이 많이 거주하고 영국의 국민이 많으며 영토도 넓고 자원도 풍족하며 산업도 어느 정도 발달한 식민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기에 유사시에 영국 정부가 피난해버리면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대응할 방법이 없다. 이건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실제로 영국이 본토를 잃어버릴 상황이 되면 미국의 협조를 얻어서 캐나다 자치령에다가 영국의 국왕을 포함한 윈저 왕조를 피난시키고[5] 정부 구성원을 이동시켜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이 엄연하게 존재한다. 나치 독일이 이렇게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점령하려고 억지로 대응했다가는 미국의 세력권을 침범하게 되므로 미국이 참전해버릴 가능성이 높아지며 이렇게 되면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잘 해봐야 말 그대로 소모전의 늪에 빠져들면서 최종적으로는 패배하게 된다.

이렇게 작전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는 지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이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프랑스 침공에서 보듯이 영국 정부도 충격과 공포에 빠져서 조기에 항복하리라고 본 것이 크다. 하지만 이렇게 프랑스가 조기에 항복해서 나치 독일에 유리한 결과가 나온 것은 많은 부분이 행운에서 비롯되었으며 영국은 프랑스와 전혀 다른 존재였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아프리카 식민지로 도망쳐서 항전한다는 선택지가 존재했으나 당시 프랑스의 영 좋지 못한 내부 사정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이고, 영국의 경우에는 비교적 잘 단합된 상태에서 항전 의지가 이어졌다. 독일이 정말 영국 전토를 장악하고 정부가 캐나다나 호주로 망명한다고 해서 나치의 가장 큰 걸림돌인 영국 함대가 증발하는 것도 아니고, 독일은 여전히 해상에서 난적을 마주한 채로 영국의 6천만 시민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엄청난 문제가 생긴다. 히틀러가 특히 이 문제를 굉장히 고민했다는 증언이 여럿 존재한다.

9.2. 완전히 확정된 작전이 없음

바다사자 작전은 앞서 설명한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간신히 확정수준에 가까운 작전안이 나왔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합의안에 불과하고 나치 독일의 육군, 해군, 공군이 모두 만족하지 않았으며 수시로 자신들의 이익이 먹혀들도록 히틀러를 설득하면서 작전의 변경을 추구했기에 완전하게 확정된 작전이 없다.

당장 나치 독일 육군은 상륙지점을 넓게 잡고 숫자를 늘려서 영국군이 상륙지점을 틀어막는 작전을 못하도록 하려고 시도했고 나치 독일 해군은 호위능력과 수송능력 부족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대했으며 나치 독일 공군은 타군의 적절한 협조만 있다면 공군만으로 영국 공군과 영국 해군을 제압할 수 있다는 호언장담을 늘어놓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바다사자 작전의 개시일도 확정이 안된 상태였다.

이렇게 일이 진행되는 결과로 인해 세부작전안이 확립되지도 않았으며 작전 시행에 필요한 준비과정도 혼란을 겪게 된다. 바다사자 작전 시행일과 상륙지점의 숫자와 위치가 수시로 변동하는 등 작전의 중요한 뼈대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세부작전안을 확립시킬 수 없고 준비과정도 얼마나 어느 정도 해야 할 지 감이 안잡히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히 확정된 작전이 없기 때문에 세부작전안도 부실하고 준비도 미흡할 수 밖에 없으므로 실제로 바다사자 작전이 진행되었다면 현장 지휘관의 임기응변에 따라서 주먹구구식으로 대충 작전이 진행되면 다행이고 보통은 영국군의 통렬한 반격이나 맞고 작전이 초반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아진다.

9.3. 경험과 정보 부족

작전 수립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치 독일 해군이나 나치 독일 육군이나 나치 독일 공군이나 상륙전에 대해서 연구나 훈련을 아예 한 적이 없었고, 영국 침공이 눈앞에 보이자 그제서야 부랴부랴 상륙전 교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전투 교리라는 건 아무리 연구나 훈련을 한다고 하더라도 갈리폴리 전투디에프 상륙 작전, 타라와 전투, 노르망디 상륙 작전처럼 실전에서 피를 봐야지 그제서야 상륙전 교리의 문제점을 알 정도인데, 벼락치기 공부하는 독일군이 성공할 확률은 없다고 보는것이 나았다.

당장 경험 부족으로 인해 나치 독일의 3군이 준비한 내용을 보면 미흡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저렇게 준비를 부실하게 해놓고 상륙작전을 실시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정보 수집도 문제라서 나치 독일이 영국의 방어 상황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아프베어와 나치 독일 공군 정찰기의 역할이었으나 둘 다 신통치 않았다. 아프베어가 실시한 스파이 잠입은 거의 실패하여 유용한 정보를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치 독일 공군 정찰기가 실시한 사진 정찰은 영국 공군의 사진 정찰과 비교하면 체계적이지 못하고 미숙한 점도 많아서 나치 독일은 상륙 예정 지점의 방어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결국 작전이 엉망이면 현지에서 임기응변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상황에서 경험과 정보까지 부족하니 실제 상황에서는 혼란에 빠지다가 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독일군의 상륙작전은 바이킹 시절 수준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9.4. 아직 강력한 영국군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영국 육군이 상당수의 장비를 상실하고 영국 공군이 타격을 입기는 했으나 영국 해군은 여전히 막강했다.

원래부터 영국 해군은, 양적이나 역사적이나 모든 분야에서 당대 세계 최대 해군 보유국 중 하나였으며 질적으로도 바다의 패권을 두고 타국과 본격적으로 경쟁하던 시절이 무려 엘리자베스 1세 시기부터고 대항해 시대에 들어서자 바다로 적극적인 진출을 시행했으며 19세기부터 세계의 바다를 지배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 전술, 건함 능력, 장교단수병의 질 등 모든 면에서 독일 해군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비록 전간기대공황을 비롯한 경제난으로 쇠퇴의 기미가 약간 있었으나 영국 해군은 1940년 여름을 기준으로 본토함대만 따져도 전함 4척, 항공모함 1척, 순양함 11척, 구축함 8척을 배치하고 있었고 지중해 함대에도 전함 7척과 항공모함 2척, 순양함 7척과 다수의 구축함이 있었다. 이를 다 합치면 대형함만 따져도 전함 11척, 항공모함 3척, 순양함 18척이다.

그리고 바다사자 작전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영국 본토에 대한 증강을 서둘러서 본토함대는 전함 3척, 순양전함 2척, 항공모함 2척,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14척, 구축함 89척, 잠수함 26척을 스코틀랜드의 오크니 제도에 있는 스캐퍼플로 항구와 주변에 집결시켜놓았다. 본토함대에 소속된 전력은 유사시에 즉시 출격할 수 있는 대비체제가 완성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서 바다사자 작전 개시 당시에 바로 대응가능한 전력으로 도버 해협과 영국 본토 남부에 배치해놓은 전력도 엄청났다. 플리머스에는 15인치 주포 8문으로 무장한 리벤지급 전함 리벤지와 경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이 정박중이고 포츠머스에는 구축함 8척과 잠수함 2척이 정박하고 있으며 도버에는 구축함 3척이 정박하고 있어서 빠른 대응이 가능했다. 그 외에도 좁은 해협에서 신속하게 대응가능한 어뢰정을 추가적으로 엄청나게 배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영국 공군의 경우에도 프랑스 침공 등으로 받은 타격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전투기를 증산하고 있으며 호커 허리케인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가 전투기의 주요 기종이었으므로 성능면에서 독일군의 전투기보다 크게 모자라지 않은데다가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방어전을 펼치는 것이므로 파일럿의 생존률과 복귀율이 높았다. 여기에 더해서 체인홈이라고 부르는 레이더를 이용한 조기경보시스템을 가동중이었다. 이러한 시스템을 활용해서 영국 본토 항공전이 영국 공군의 승리로 끝난 것을 생각한다면 바다사자 작전에 대한 대응능력은 입증된다.

영국 육군의 경우에는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1940년 9월의 시점에서는 23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사단, 4개 영연방 소속 보병사단을 영국 본토에 보유하고 있었으며 홈가드도 긴급하게 편성 및 배치하고 있어서 인원면에서는 어느 정도 대응할만 했다.

이런 문제로 인해 영국 해군과 영국 공군을 어떻게든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바다사자 작전을 실행하기 불가능할 정도기 때문에 나치 독일 공군이 얼마나 능력을 발휘하는 가에 따라 작전 실행이 결정될 정도였다.

9.5. 방어군에게 유리한 지형

1940년 9월에 설정된 상륙지점을 살펴보면 영국 본토 남동부에 밀집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해당 지역은 방어군에게 유리한 지형일 뿐 아니라 항구시설이 부족해서 보급도 힘든 지역이다.

우선 상륙지점 자체가 근처의 항구에 주둔한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기 쉽고 상륙해안을 방어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고 상륙 해안 전체가 쑥대밭이 되기 딱 좋다는 이야기다.

다음으로 상륙지점 근처의 교통이 불편하다. 보통 도로가 1개에서 2개 정도 있고 해당 도로는 해안 근처의 마을을 지나가며 해당 마을을 점령하지 않으면 진격이 차단된다. 그리고 마을을 점령한다고 해도 런던 남부와 남동부에 인접한 관계로 도로 교통망이 런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상륙지점간 연결이 불편해진다.

세번째로 런던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이 있다. 런던을 점령하려면 엄청난 규모의 시가전을 치러야 할 뿐 아니라 런던을 포위한 후 공격하지 않으면 영국 정부와 주요 인사들은 런던을 떠나서 피난을 가기 때문에 런던은 신속하게 포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상륙지점에서 조금만 북쪽으로 전진하면 런던 시가지와 충돌하며 동쪽은 도버등 요새가 많은 도시가 존재하며 막다른 길이므로 서쪽으로 우회해야 하는데 그럴 공간이 매우 부족하다.

네번째로 항구 시설이 크게 부족하다. 상륙지점에서 쓸만한 항구는 포크스턴 뿐이며 그나마 규모가 작은데다가 전투중에 파괴되거나 영국군이 박살낼 가능성이 높아서 사용가능성이 높지 않다. 이래서는 상륙작전시 제1파가 상륙하기도 힘들어지며 상륙작전 이후의 보급이나 제2파 이후의 항구를 통한 빠른 상륙도 어려워진다.

마지막으로 이미 영국군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륙지점인데다가 중요 거점인 런던과 가깝기 때문에 미리 방어진지를 건설하고 증원군이 빠른 속도로 충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륙하자마자 무리할 정도로 빠른 진격을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좁은 상륙지점에 상륙 병력들이 밀집한 채 고립되므로 작전이 실패할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진다.

이런 문제로 인해 나치 독일 육군이 상륙지점의 숫자를 늘리고 범위도 넓히며 위치도 영국 남부 해안의 절반 이상으로 크게 분산하고 가능하다면 영국 본토의 동부 해안에도 약간의 병력을 조공 역할로 상륙시켜서 영국군을 분산시키고 램즈게이트나 도버같은 항구에 강습돌입해서 항구 자체를 빠르게 점령하자는 안을 지속적으로 내놓게 되는 것이다.

9.6. 추가상륙 및 보급의 어려움

나치 독일 해군이 좁고 숫자가 적은 상륙지점안을 여러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고집한 이유가 있다. 당장 상륙군 제1파를 상륙시키는 것도 힘에 부치는 상황에서 제2파와 제3파같은 기존에 책정된 상륙병력을 계속 상륙하는 것만 따져도 행운을 빌어야 하며 그 이후의 추가상륙 및 보급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상륙지점을 더 늘리는 것 자체가 답이 안나오기 때문이었다.

당장 상륙군을 상륙선단에 승선시키는 것부터 고난이었다. 중장비, 차량, 물자가 바지선과 수송선에 적재되는 시작 시간이 앤트워프 같은 큰 항구에서는 S -9일부터 시작되며 됭케르크 같이 상대적으로 작은 항구에서는 S -8일부터 시작해야 상륙일에 맞출 수 있었다. 군마는 S -2일부터 승선이 시작되고 병력은 S -2일이나 S -1일부터 바지선에 승선이 시작된다. 승선에만 9일이 소모되는 것이다.

상륙은 더 난관이었다. 일단 제1파기 바지선을 이용해서 상륙한 후에 바지선을 해안에서 회수해서 수송선으로 돌려보낸 후 재사용하여 포병, 기갑, 기타 중장비로 구성된 제2파를 수송선에서 바지선으로 해상에서 환적해서 상륙시킨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적어도 S데이 당일날 오후에는 상륙한 바지선을 예인선으로 끌어서 회수해야 하므로 선두부대의 상륙은 새벽 만조시간의 2시간 이내에 달성되어야 한다. 상황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중간부대는 S데이의 밤에 바지선으로 환적을 끝내고 S +1일에 상륙할 예정이며 그 이후에는 같은 방법을 사용해서 제3파가 S +2일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바지선 재사용을 2번이나 성공적으로 한 후 나치 독일 해군의 상륙부대는 이런 식으로 영국 남부 해안 근처의 위험해역에서 3일을 보낸 후 상륙지점에 나치 독일 육군을 남긴 채 S +2일 밤에 일단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의 항구로 귀환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설명한 것은 고작 상륙군만 상륙시키는 건이다. 적당한 항구를 온전하게 확보하기 전까지는 보급에도 앞서 말한 과정을 반복해야 하므로 최소한 10일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 상륙지점의 나치 독일 육군이 상륙시 휴대한 보급품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추가 보급을 받으려면 최소한 10일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륙만 따져도 가용 가능한 대부분의 선박을 사용하며 상륙지점의 해안을 비워놓아야 물자의 적재가 가능하므로 추가 보급은 상륙이 완료된 후에나 가능하다. 그러므로 적당한 수준의 항구를 온전하게 확보하지 못한다면 보급품의 탑재부터 운송 및 하역에 이르는 광대한 비효율적 문제로 인해 일선의 장병들 입장에서는 1달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에나 제대로 보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돌아가는 것도 만사가 다 잘 풀리는 경우다. 상륙하면서 상륙함, 상륙정, 바지선의 손실이 안나올 수가 없으며 예인선의 숫자도 모자르므로 바지선의 회수율이 점점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상륙의 진행도가 늦어지므로 영국 남부 해안 근처의 위험해역에서 상륙부대가 지내야 할 시간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그 동안 영국 해군과 영국 공군의 공격을 안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을 바라는 것 수준의 상태가 된다.

그래서 나치 독일 해군의 상륙부대가 위험해역에서 버티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일단 제2파까지만 상륙시킨 후 상륙부대가 귀항한 후에 제3파는 별도의 호송선단을 구성해서 보내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나치 독일 해군은 지금 상태에서도 호위부대가 부족한 판국에 그렇게 별도의 호송선단을 보내면 호위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언급하며 거부했다.

따라서 원래 작전계획대로 해도 적당한 항구를 온전하게 확보하지 못하면 보급은 1달 이상 걸리므로 상륙한 부대가 휴대한 무기, 탄약, 물자만 가지고 최소 1달동안 혼자서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이러니 나치 독일 육군의 상륙지점 확대방안 같은 것은 나치 독일 해군의 능력 부족으로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륙 완료에도 시간이 걸리고 보급도 힘든 판국이라 상륙 자체가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휴대한 물자만 보유하는 소수의 군대만으로 상륙지점을 확보하고 급속전진하여 런던을 공격해서 영국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고 상륙지점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기에도 벅찬게 현실이다.

물론 배 말고도 비행기라는 신통방통한 물건이 있었다고는 하나, 영국을 점령하는데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모두 비행기로 실어나를 수는 없었다. 당시 존재하던 수송기로는 보병 1개 소대도 태우기 힘들었고, 그 당시 독일 최대의 수송기 메서슈미트 323는 개발완료도 안된 상황인데다가 탑재량도 경전차 38(t), 2호 전차, 잘 쳐줘야 마르더 한 대 실어나르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독일군이 제공권을 100% 장악한 게 아닌 이상 수송기 운송에도 상당한 위험부담이 뒤따랐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당시 상황은 나치 독일 공군의 공수부대 투입과 보급에도 수송기가 모자란 실정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상륙을 위해서는 해상 운송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9.7. 기본적인 수송능력 부족

상륙작전이 어려운 이유를 따져보기 시작하면 애초부터 나치 독일이 가진 해상수송능력이 매우 부족한게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가진 해상수송능력의 경우에는 민간에서 산업용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함부로 징발하기도 곤란하고 징발해봤자 군용으로 쓰기 곤란하며 오랜 기간 징발하면 산업과 경제에 악영향을 주므로 빨리 돌려주어야 했다. 당장 바지선들도 오랜 기간 징발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영국 해협의 거친 바다를 건널 수송선 역시 상선들을 대거 징발해도 턱없이 부족했고, 육상 병력들을 어찌어찌 수송한다고 쳐도 상륙전에 필요한 중장비를 옮길만한 대형 수송선은 아예 없다고 보아도 되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노르웨이 침공 때도 상륙에 동원된 육군 산악부대는 배가 모자라 상당수가 순양함구축함에 분승해서 이동해야 할 상황이었고 덕분에 노르웨이 침공 과정에서 블뤼허가 격침당할 때 수많은 산악부대원들이 같이 수장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작전을 수행가능한 것도 노르웨이의 해군력이 순찰선 수준으로 매우 미약하여 나치 독일의 군함들이 그냥 항구로 기습돌격해서 접안한 후에 대량의 육군을 부둣가에 쏟아붙는 방식으로 항구에 바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블뤼허가 당한 것처럼 항로상에 노르웨이군의 저항거점이 있으면 피해가 날 수 밖에 없는데 쓸만한 항구마다 영국 해군이 일정한 수준의 군함들을 정박시키는 영국 본토 침공에서 같은 작전을 썼다가는 군함과 탑승한 육군 병력이 세트로 침몰당하고 끝난다. 여기에 더해서 노르웨이 침공으로 그렇게 사용할만한 대형 군함의 숫자도 줄어들었고 심지어 구축함까지 대규모 손해를 봐서 호위함대를 편성하기도 모자르므로 강습상륙에 쓸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항공모함으로 마개조당할 뻔 했던 대형 여객선 에우로파도 이 작전에 사용될 계획이었으며,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병원선이었던 독일 최대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역시 작전이 개시되었다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들 함선들도 상당한 숫자가 앞서 말한 양동작전에 동원될 예정이었으므로 실제 수송에 투입될 가능성이 적어서 수송능력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상륙작전을 진행시키는 것도 곤란한데 이미 상륙한 상륙병력에게 추가적인 보급을 해주는 것도 곤란했다. 영국 정보부가 예상한 것만 보더라도 상륙 제1파와 공수부대를 합한 10개 보병사단의 병력은 매일 3,300톤의 보급품이 필요할 것으로 보았다. 일단 전투식량비상식량을 포함해서 2주 정도를 버틸 식량과 물자를 가지고 상륙을 진행하게 되지만 추가보급이 빠르게 필요할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건 제2파와 제3파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실제로는 더 많은 보급품이 필요했다.

하지만 영국 해군과 영국 공군이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비현실적인 조건에서 상륙지점의 포크스턴 항구가 멀쩡한 상태로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초반에는 하루에 150톤의 하역이 가능하고 나치 독일군이 추가적인 정비를 가하면 하루에 600톤의 하역이 가능해서 보급품 수요를 충당하기도 어렵다. 인근의 도버 항구를 추가로 손상없이 점령하면 하루에 800톤의 하역이 가능해서 숨통이 좀 트이게 되지만 도버 항구의 함락도 어렵고 함락시켜도 항구는 박살날 확률이 높아서 가능성이 없다시피 하다.

따라서 제대로 된 추가보급을 받으려면 멀쩡한 항구를 더 많이 점령해야 하며 수송선단도 다수 투입해야 한다. 그런데 항구를 추가로 함락시키기도 어렵고 함락된 항구가 멀쩡하기도 어렵고 영국 해협을 오가는 수송선을 영국 해군과 영국 공군이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기에 영국에 상륙한 나치 독일군은 최대한 빠르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노획같은 비상조치를 취하더라도 얼마 가지도 못하고 보급부족으로 망하게 된다.

애초에 해상수송능력 문제는 국력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고 항구 건설과 선박 건조에 시간이 걸리므로 빠른 해결이 곤란하였고 독소전쟁 준비도 있었기 때문에 독소전쟁시 필요한 육상수송능력 증강과 같은 자원을 나눠먹는 식이 되어 버리므로 육상수송능력을 증강하면 해상수송능력이 줄어드는 등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기 곤란했다.

10. 작전 중단과 사실상의 취소

결국 바다사자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제공권제해권을 얻어야 하고 그럴 능력을 보유한 군대는 나치 독일 공군밖에 없었다. 헤르만 괴링이 호언장담까지 했으니 나치 독일 공군이 성과를 얼마나 거두는 지에 따라 바다사자 작전 실행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1940년 7월, 당시 유럽 최강이던 독일 공군과 영국 공군이 영국 본토에서 맞대결하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1940년 9월 16일에 영국 전투기 620대와 독일 항공기 1,120대(이중 폭격기가 500대)를 투입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게 되지만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 그 결과 17일에 바다 사자 작전은 무기한 연기된다. 이후 물량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에게 패하고 영국 상공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항공전에서 독일군은 1,977대, 영국군은 1,744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이후 소련 침공, 이른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됨으로서 독소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며 계획이 실시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43년까지 가뭄에 콩 나듯이 신장비 개발등의 사유로 준비가 약간씩 진행되고 있었으나 전황의 악화로 인해 그러한 대비도 다른 곳에 전용하기 위해서 바다사자 작전의 사실상의 취소가 이루어지게 된다.

바다사자 작전에 대한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 중 마지막으로 기록된 내용은 1944년 1월 24일자로 발표된 명령이다. 해당 명령에서는 영국 본토 침공을 위해 아직 비축되어 있던 장비를 다른 목적으로 재사용한다는 것과 함께 영국 본토 침공을 재개할 경우에는 12개월 전에 통지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11. 영국의 대응

영국에서는 프랑스의 패배 이후 나치 독일이 영국 본토에 상륙한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으며 상륙지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해상력이 약한 나치 독일이 상륙작전을 벌이게 되면 상륙이 가능할만한 위치는 영국의 군사 관계자라면 이미 누구나 알 수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이라고 해도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 육군의 경우에는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인해 대량의 무기, 탄약, 물자,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 철수한 상황이었기에 장비 보급률이 상당히 낮았으며 급격한 징병으로 인해 병력들의 훈련도도 엄청나게 떨어진 상태였다. 세계에 있는 영국의 식민지에 주둔한 병력은 해당 위치에서도 필요하기도 하고 빠르게 영국 본토로 집결시키기도 어려우며 집결시켜도 보급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일설로는 편제상과 달리 실제로 완편되었으며 전투능력이 확실한 영국 육군은 영국 본토에서는 2개 사단 정도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홈가드의 경우에는 병력은 충분하지만 병사 자체의 연령이 높았고 영국 정규군에게 지급할 장비도 모자란 판국에 홈가드에게 줄 무기는 없다시피했다. 그래서 홈가드의 전투능력은 매우 부족했다. 제식 소총도 모자라서 여러 명이 1정의 소총을 돌려쓰는 상태였고 총검과 쇠파이프를 결합한 간이형 창을 제작해서 지급했다가 홈가드 대원들에게 욕을 거하게 먹은 사건까지 발생할 지경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독일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창고에서 썩고 있던 루이스 경기관총을 들고 어떻게 해보려고 하거나 해안가에 송유관과 화염방사기를 설치하는 등 생고생이 많았다. 화염방사기를 설치하는 이유는 독일군이 해안에 도달하는 순간 기름을 방출하고 불을 붙여 상륙군을 물 위에서 태워 죽이려는 계획이 있기 때문이었다.[6] 거기에다 당대에는 기밀이었지만 이런 수단들이 통하지 않으면 마지막엔 독가스를 자국 해안에다 살포할 계획이었다.

1940년 7월의 시점에서 영국 공군의 사진 정찰로 유럽 대륙의 북해 연안 항구에서 나치 독일이 대량의 선박을 집결하는 것이 관측되었다. 해당 시점에서 상륙작전은 현실적 문제로 영국에게 다가왔다. 영국의 참모본부는 상륙작전의 실행 시기에 대해서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해양 기상 조건에서 9월 말까지가 위험하다고 했지만 상륙 지점에 대해서는 이미 다들 예상하던 도버 해협에 면한 영국 남부 해안이라는 주장과 북해를 통해 영국 본토의 동해안을 강습한다는 주장이 충돌하기도 했다. 아직 독일 암호에 대한 영국의 암호해독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1940년 7월부터 영국 본토의 동부와 남부에 위치한 상륙작전이 예상되는 후보 지역인 대략 40개소의 지역에서 방위 설비나 해중 장애물등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공사의 진척상황은 늦어서 1940년 9월의 상황에서는 완성되지 못한 시설물이 흩어진 상황이라서 실질 방어력은 약한 수준에 머물렀다.

그래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실력이 입증된 영국 공군이나 아직 막강한 수준인 영국 해군이 있고 설령 상륙지점의 제공권을 영국이 빼앗겨도 당시의 항공기만으로는 야간에 접근하는 수상함 세력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주간에 독일군이 물자를 안전한 곳으로 빠르게 이동시키지 못하면 야간을 이용해서 영국 수상함대가 점령당한 항구에 있는 나치 독일군의 물자들을 박살내는것도 가능하므로 방어능력이 그렇게 낮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만일 영국 본토 항공전이 기적같이 성공하고 바다사자 작전이 실시되어 독일군이 상륙 자체에 성공한다해도, 영국에 상륙한 독일군은 종국엔 영국 해군에게 봉쇄되어 싹 다 고사했을 확률이 높았다. 설령 완전히 봉쇄되지는 않았더라도 보급에 어마어마한 차질이 생겼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11.1. 의외의 약점

만일 나치 독일군에게 운이 따라준다면 영국 해군이 독일의 상륙선단 저지를 실패하는 순간 바로 끝장이 날 수도 있던 약점도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영국 육군이 앞서 말한 약점들 때문에 홈가드까지 동원해서 간신히 상륙지점의 해안에 얇은 방어선을 건설한 상태이므로 나치 독일군이 상륙해서 신속하게 방어선을 돌파하면 그 뒤에는 제대로 된 방어거점이 없다시피하므로 영국 본토 전체가 혼란에 빠질 우려가 높았다. 게다가 1940년 9월의 시점에서는 방어선이 아직 완공이 안된 지점도 많아서 취약점이 더 많았다.

물론 영국 육군도 최대한 전차의 생산을 늘리고 있었으나 영국 본토 항공전에 대응하고 제공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기 생산이 가장 우선시되었으므로 짧은 기간 내에 충분한 숫자의 전차를 생산하는 것이 어려웠으며 전차를 생산해도 그걸 부대에 배치하고 훈련해서 제대로 된 기갑부대를 만드는 것은 숙련병이 있더라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1940년 9월의 시점에서는 전략적인 기동부대로 쓸만한 부대가 별로 없어서 일단 방어선이 돌파되면 그걸 즉시 메꾸기가 어려웠다.

영국의 정치상황도 예측불허의 상황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윈스턴 처칠이 에드워드 우드 같은 평화협상파를 정적인 노동당까지 동원해서 간신히 눌러놓은 상황이었으므로 만일 영국 본토에 독일군이 상륙해서 쉽게 격퇴가 안되는 순간 윈스턴 처칠이 실각하고 평화협상파가 재집권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던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정규군이 나치 독일군이 만들 돌파구를 메꿀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홈가드를 소집하고 스텐 기관단총을 급하게 개발해서 생산하는 등의 난리가 난 것이다.

12. 작전 성공시의 예상

나치 독일의 상황이 총체적 난국 수준이었기 때문에 바다사자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시피하지만 프랑스 침공도 당시 연합군의 오판으로 스스로 패배를 자초한 면이 크기 때문에 바다사자 작전도 영국이 무능하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면 나치 독일의 승산이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만일 그런 상황이 닥쳤을 경우를 가정한다면 우선 영국 정부는 캐나다로 망명할 공산이 크다. 그리고 영국이 연합군의 유럽 진군을 준비한 발판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영국이 함락된다면 유럽 상륙이 크게 지연될 것은 자명하다. 최악의 경우 미국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대독전쟁 및 유럽 탈환을 포기한다면 전후 세계는 미소냉전이 아닌 미독소 3개국의 냉전 양상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유럽을 지배하게된 독일이 초강대국 수준으로 상당히 강성해진다면 미국과 소련이 실제 역사처럼 대립하지 않고, 연합국 관계를 유지해서 대독공동전선을 펼칠 여지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가정은 소련을 배제한, 서부전선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영국의 몰락으로 소련이 독일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다면 실제 역사에서처럼 개전 초반에 일방적으로 밀릴 가능성은 낮아진다. 소련의 국력이 나치 독일에게 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을 점령한다고 해도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 이전에도 유럽전선에 개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던만큼 미국이 중립을 유지했을 가능성 역시 낮다.

분명한 것은, 영국이라는 전진기지가 상실된 미국은 실제 역사 이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독일의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더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더많은 인명 피해를 야기했을 것이다.

12.1. 준비되지 않은 후속조치

바다사자 작전 자체도 총체적 난국이었지만 만일 작전이 성공한다고 해도 후속 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

우선적으로 영국 본토 침공이 성공하고 영국 본토를 점령한 후에는 에드워드 8세를 복위시키고 프랑스처럼 괴뢰국을 만든 후 미국과 소련에 맞서 함께 대항하는 방안도 연구되었다. 실제 통치의 경우 6개의 나치 독일군 산하 군정사령부가 담당하고 중심은 런던에 두는 형태로 영국 본토와 아일랜드를 점령통치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세부 내용은 구체적이지 않았고, 영국 점령 후에 영국을 어떤 상태로 놓을 것인지에 대해 나치의 고관들간의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돌프 히틀러조차 여기에 대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였다.

당장 대영제국의 존속과 해체 여부도 결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영국 본토인 그레이트브리튼섬도 어느 정도까지 점령할 지도 결정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웨일스를 나치 독일의 괴뢰국으로 분리독립시키고, 북아일랜드아일랜드에게 넘겨주는 대신 아일랜드를 나치 독일의 동맹국으로 삼는 안 같이 여러 제안이 중구난방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런 제안 중에서 영국 본토 주민에게 지급할 식량 확보 및 분배 계획이나 영국의 산업설비를 어떻게 나치 독일에게 유용하도록 운용할 것인지, 영국군을 해산시키고 물자와 장비를 노획한 뒤, 일부 잔존 병력은 괴뢰국의 병력으로 운용하는 방안같은 당장 필요한 계획은 거의 논의되지도 않았다. 구체적인 계획없이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생각이었다.

구체적인 통치에 관한 계획은 무주공산이었지만 불필요하거나 잔혹한 정책은 상당히 많았다. 발터 폰 브라우히치가 문서에 언급한 것에 따르면 영국 주민들중 17세에서 45세 사이의 건강한 남성들은 현지에서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다른 조치의 대상이 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억류되어 유럽 대륙으로 끌려갈 것이며 민간인 인질을 잡고 가장 사소한 저항 행위에 대해서도 즉시 사형을 선고하는 등 영국인들은 가혹한 정책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재정적, 군사적, 산업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모든 것을 약탈당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부관 발터 셸렌베르크살생부인 블랙북을 만들어 영국 점령 이후 처형, 체포할 인원에 대한 명단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명단 내 인물들에 대한 정보나 선정은 매우 부실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항공기술 연구 성과 및 중요 장비와 게르만 예술 작품을 확보해서 나치 독일로 보내는 임무도 있었다.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 300,000명을 '처리'할 목적으로 아인자츠그루펜의 파견 역시 예정되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아인자츠그루펜 이집트로 편성되어 롬멜이 알렉산드리아를 돌파한 이후 팔레스타인에 도달할 시 유대인들을 처형할 계획이었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 패배 이후 이 계획도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또한 나치즘을 선전할 목적인지 나의 투쟁 영문판을 1940년 여름까지 완성해서 인쇄까지 해두기도 했다. 이 영문판은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되자 포로 수용소에서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포로들에게 배포되기도 했다.

13. 전후의 시뮬레이션

1974년에 영국육군사관학교에서 2차대전 당시 영국 및 나치 독일의 관계자들이 모여 바다사자 작전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수행했다. 나치 독일군은 제공권을 확보할 수 없었지만 런던 대공습같이 전력을 분산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영국 남부의 영국군 비행장을 계속 공습하여 일시적으로 영국 공군을 약화시켰다고 판단, 영국 해협을 기뢰로 봉쇄함으로써 바지선의 안전을 확보하고 최초의 상륙이 성공했다는 조건에서 이루어졌다.

나치 독일군은 1940년 9월 22일 상륙군 제1파의 거의 모든 병력을 상륙에 성공시킨 후 영국 본토 남동부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영국군은 포크스턴과 뉴헤이븐의 항구시설을 파괴했으나 나치 독일군은 두 지역을 점령했다. 영국군은 런던 남부 철도망이 나치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받아서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남동부로 부대 이동이 지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뉴헤이븐과 도버 주변의 위치를 사수하여 나치 독일군의 진격을 막았다. 해상에서는 영국 남부에 정박한 소규모의 영국 함대가 독일 상륙선단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나치 독일 공군과 나치 독일 해군의 연합공격 및 기뢰로 인해 실패했다. 이런 식으로 영국군은 GHQ라인(상륙을 상정한 방어라인)까지 지체전투를 벌여 나치 독일군의 진군속도 저하에 착수했다.
영국 공군과 나치 독일 공군은 모두 첫날에 가용 전력의 거의 4분의 1을 상실했다. 이렇게 되자 나치 독일은 영국 공군이 여전히 전투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았다. 영국 공군이 가진 제공권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결과, 1940년 9월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야간에 영국 해군은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구성된 고속부대를 파견하여 독일 상륙부대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갑, 포병, 물자, 중장비, 보급을 적재한 독일 상륙군 제2파와 제3파를 탑재한 바지선의 대부분을 격침시켰다. 이런 식으로 독일군은 해상으로 보급이 가로막혀 10개 사단을 상륙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어느정도 시간을 확보하자 영국군은 홈가드를 동원해서 방어선을 강화하고 증설하는 한편, 초기 공세로 손실을 입은 정규군을 재편성해 전선으로 복귀시켰다. 나치 독일군은 공수부대가 고립당하고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로 며칠간 대치가 이어졌으나 제대로된 기갑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포병, 차량, 연료 및 탄약 공급이 끊어지면서 점차 말라죽어갔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 공군에게 폭격 대신 공중수송이 가능한 지 물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때쯤 스캐퍼플로에서 출격한 영국 본토함대가 기뢰밭을 돌파하고 도버 해협에 도착했다. 해안포는 별로 효과가 없었으며 나치 독일군의 해상 수송은 완전히 파괴되어 보급과 증원이 끊겼다. 결국 나치 독일군은 상륙한 병력을 다시 프랑스 방면으로 후퇴시키기로 결정하고, 가용한 모든 선박을 동원했으나 영국 해군과 영국 공군의 방해를 받는다. 상륙지점의 일부 해안은 해상호위가 불가능해서 철수작전에서 제외되었으며, 4일 동안의 철수 작전이 종료된 후 결국 6일 후에 보급이 두절되었고 퇴로가 막힌 나치 독일군의 잔여병력은 마침내 영국군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치 독일군 상륙병력 90,000명 중 프랑스로 돌아온 사람은 15,400명에 불과했다. 33,000명이 포로로 잡혔고, 26,000명이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15,000명이 영국 해협에서 익사했다. 2차대전에서 실제로 지휘봉을 잡고 실전에 참가한 양측 군대의 고위 지휘관으로 구성된 6명의 심판 모두 바다사자 작전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시물레이션은 영국군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1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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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해군의 바다사자 작전 참전 휘장

나치 독일 해군은 바다사자 작전 후 이 작전에 참가해 지상전을 치른 해군 육전대 장병들에게 수여할 목적의 훈장인 해군 상륙전 휘장을 제정했다. 그러나 작전 자체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수여자도 전무하다. 그럼에도 휘장 재현품은 어느정도 있다.

15. 창작물에서

16. 관련 문서



[1] 기존 계획안에 나치 독일 육군의 의향이 추가 반영된 계획도[2] 그런데 생각하보면 동상이몽도 이런 동상이몽이 없다. 군이 모두 힘을 합쳐 작전을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공군은 순수히 군 내 영향력 강화를 위해 바다사자 작전에 적극적이고,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이오 심하면 전멸할 것이 뻔한 해군은 필사적으로 작전에 반대하고 있으며, 육군은 영국에 아예 큰 관심도 없는 형국이었니 말이다.[3] 그리고 실제로 영국 본토 항공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며 결말은 이 쪽으로 흘러갔다.[4] 엠덴급 경순양함 1척,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1척, 라이프치히급 경순양함 2척,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2척,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2척[5]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내각이 조지 6세에게 캐나다로의 피난을 권유했으나 국왕 스스로가 이를 거부한 바 있다. 다만 사직 보존을 위해 일부 왕족을 캐나다로 피신시키고 자신도 런던을 벗어나 버킹엄궁과 윈저성을 오가는 삶을 하기도 했다.[6] 동일한 방어시설이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바레브 라인의 요새에 설치되어 있었다.[7] 엠파이어 어스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인물들 이름이 죄다 이 모양으로 번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