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기와 학창 시절
아버지(미야자키 카즈지 1914년생)는 할아버지대부터 시작한 미야자키 일가가 경영하는 '미야자키 항공흥학제작소(宮崎航空機製作所)'의 간부였는데, 아버지의 형인 큰아버지가 사장이었고. 종업원이 평시에도 천 명에서 1500명 규모였고, 한창 전쟁 중으로 피크일 때는 2800명이 넘는 꽤나 큰 공장이었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폐결핵에 걸려서 하야오의 아버지가 실질적인 사장으로 운영했다고 한다. 이 회사는 나카지마 비행기사의 하청으로 군용기의 부품을 생산 조립했는데, 나카지마사는 제로센 전투기를 만들기도 했다. 하야오는 어릴 적 제로센의 꼬리날개 등을 조립하는 광경을 봤던 기억이 있다고. [1]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에는 생필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업종을 전환했는데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비행기 공장은 전후에 다른 회사에 매각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미야자키가의 공장 사정이 어려워져 가세가 기울었다는 말도 있므는데, 미야자키 본인이 어릴 적이나 젊었을 때에 가난하게 자랐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걸 보면 이는 루머로 보인다. 오히려 하야오는 이 시기 남들은 전쟁으로 고생하고 힘들었는데 자신은 집안이 전쟁을 이용해 떼돈을 벌고 풍족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운 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문에 아버지와 싸우기도 했다고.
주변에 고급 기술자와 군인 출신이 득시글대는 독특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이런 배경은 그의 작품세계 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어린 미야자키는 주변인들이 일본이 옆나라에서 무슨 짓을 하며 다녔는지 떠벌리고 다니는걸 보며 조국인 일본을 싫어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 노래가 부르기 싫어 러시아 민요를 부르고 다녔을 정도라고.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전후 일본의 경제가 붕괴된 시절에도, 남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는데도, 어린 '하야오'는 언제나 삼시 세끼 흰 쌀밥을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적어도 어린 시절은 유복하게 자란 것은 사실이다. 우츠노미야시에서 살던 집도 마당이 넓고 정원이 있는 2층 단독 저택이었다. 미야자키의 어린 시절을 조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점'이라는 책에 나오는 설명은 이 집은 원래는 '하야오'의 친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큰아버지의 별장이었는데, 대지 면적이 2~3천평으로 정원에는 연못도 있고 폭포도 있었다고 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나오는 으리으리한 큰 저택은 이 시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추정된다.
1945년 4살 때 우츠노미야 시는 미군의 공습을 받았다. 일가는 피난을 떠나야 했고, 큰아버지가 소형 트럭 2대를 끌고 와서 데리러 왔다. 어머니와 두 남동생은 조수석에, 하야오, 형과 아버지는 뒷짐칸에 타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아기를 안은 여인이 "제발, 태워주세요."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트럭은 비행기 공장이 있던 옆도시 카누마 시로 향했다. 훗날 밝히길 미야자키는 이 때 그 사람을 태우자고 말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린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소년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영화를 만들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 기억은 확실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기억으로 아버지하고는 대립했지만, 훗날 바람이 분다를 제작하고 있을 때, 우츠노미야에 살던 집의 옆집에서 살던 '하야오'보다 4살 위의 사람이 편지를 보내왔다. 이 날 공습으로 살고 있던 집이 불에 타서 전소됐고 하필 그 날은 비까지 와서 하야오가 살던 집 앞 대문으로 가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하야오의 아버지가 그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면서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서 줬다는 사연이었다. 하야오는 당시 일본에는 초콜릿 같은 고급 과자는 없었다고 하면서[2] "어디서 초콜릿을 구했는지 궁금하다면서 나한테는 초콜릿같은 것은 한 번도 준 적이 없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초콜릿을 먹은 것은 점령군 미군한테 얻어먹은 것이었다" 라고 회상하면서 그 당시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납득했다.
아버지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전쟁에는 반대하는 반전주의자였는데도, 전쟁 특수(特需)로 돈을 잘 벌던 그 시절을 태연하게 떠벌리기도 했는데, 대학생이 되고 좌익 사상에 빠진 아들 하야오는 "아버지는 전쟁부역자(戰爭附逆者)잖아요!"라고 따져서, 대판 말싸움을 한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점령군(미군)과 친구가 되어 그를 집에 데려왔을 때에는, 미야자키는 일장기가 달린 비행기 장난감을 서둘러서 감춰야 했다.
2023년에 극장 개봉 공개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그려진 주인공 소년 마히토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친부 미야자키 카츠지에 대해 관심이 쏠렸는데, 그 동안 '하야오'는 아버지에 대해 좋게 말해오지 않았다. 까놓고 말하면 군수 산업으로 돈 벌은 졸부의 집안에서 자란 차남으로 돈 많은 한량 기질이라서 유흥가에서 기생들 데리고 놀아나는 버릇을 못 고쳐서 70살이 넘어서 죽을 때까지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직 미성년자인 하야오한테 내가 너 나이 때는 기생집에서 신나게 놀았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어살에 나온 내용이 어느 정도 현실 반영인 것은 그는 젊은 나이에 한 번 결혼을 한 적이 있었고, 첫 번째 부인과는 사별하고 1년이 지나기 전에 하야오의 생모와 재혼했다.
어머니는 하야오가 6살 때 결핵균이 척추까지 감염되어 오랫동안(9년간) 누워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3] 결핵균이 전염될까 어머니 곁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여장부 스타일로 씩씩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큰 아들 아라타(1938년생)의 말로는, 어머니는 말로 살살 달래는 스타일이 아니라 꾸중하고 화를 내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아들인 하야오도 어머니는 본심은 상냥한데도 말투는 퉁명스러웠다고 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나오는 여해적 도라는 돌아가신 하야오의 어머니의 성격을 반영했다고 한다. 하야오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는 어머니를 모티브로 하는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어머니가 누워지내서, 어릴 적에는 식모가 집안일을 도와주었지만, 이후에는 미야자키 형제들은 스스로 밥을 짓고 가사일을 하고 동생을 돌보며 자랐다. 훗날 만든 이웃집 토토로에서 여주인공 사츠키를 보고 스즈키 토시오가 '이야~ 초등학생이 이렇게 집안 일도 잘 하고 동생도 돌보고 이런 애는 현실에 없어요."라고 불평하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있어요. 내가 그랬으니까."라고 쏘아붙였다. 사츠키는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체험을 투영해서 만든 인물이다. 태어난 연도(1941)도 같고.
소학생 시절, 키도 작고 체격도 작고 몸이 약해 운동에는 소질이 없어 달리기 경주를 하면 꼴찌였고, 이러한 경험으로 열등감에 시달렸다. 어린 나이인데도 시력이 약해 안경을 쓴 것도 콤플렉스였다. 당시에는 안경을 쓴 어린이는 드물었다. 그가 그린 자신을 투영한 남자 주인공을 보면 요즘처럼 기술이 발달해서 나온 얇은 렌즈가 아니라 두꺼운 렌즈가 달린 둔탁한 테의 안경을 쓰고 나온다.[4] 이 당시에 일본에서 그런 안경을 쓴다는 것은 약하고 못생기고 비인기남의 전형이었다.[5] 방안에 틀어박혀 그림 그리기와 독서에 열중했다. 맏형은 이런 동생을 걱정했다고 한다.
데즈카 오사무, 스기우라 시게루(杉浦茂)[6] 만화를 좋아했고, 특히 초등학교 4~6학년 때 탐독한 그래픽 노블 사막의 마왕의 열렬한 팬이었다. 이 사막의 마왕에는 사람이 하늘을 날게 하는 비행석이 등장한다. 이 비행석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SF 판타지 모험 활극이다. 그리고 천공의 성 라퓨타의 타이거 모스 비행선의 선두의 디자인이라든가, 미래소년 코난에 등장하는 플라잉 머신같은 비행체도 등장한다.#1 #2
훗날 노년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이런 만화를 읽으면 강한 주인공을 보면서 (체력이 약한 어린) 자신도 강해진 것 같은 느낌(대리 만족)이 들어서 좋아했다"라고 말했다. 미래소년 코난이 초인적인 힘을 가진 것이 왜 그런지를 알 수 있는 말이다.
우츠노미야 시의 소학교 등하교 길에는 대장간이 있어서 자주 들러서 구경을 하곤 했다. 어릴 때는 대장간 일을 직업으로 삼으려 한 적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서는 대장간이 자주 묘사된다. 대표적인 작품은 모노노케 히메.
1953년 중학교 입학. 매주 영화를 보러 다녔다. 중학교에 근무하던 프랑스 유학파 미술 선생님에게서 뎃생의 기초부터 개인 교습을 받았다.
1956년 고등학교 입학하고 만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만화는 중학생이 되면서 보지 않게 되었고, 고등학생 시절에는 용돈이 있어도 만화를 사는 것이 부끄러워서 남동생에게도 심부름을 시키지도 못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어렴풋이 만화가를 지망하고 있었다.
독학으로 그림을 습작했는데, 폴 세잔과 인상파 화가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야오'의 어머니가 추억하기로는 어릴 적부터 매일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그림은 다락방에 한가득 던져넣고는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형의 말에 의하면 어릴 적에 종이만 있으면 그림을 그리는데, 채색화가 아닌 연필로 인물보다는 주로 탱크 같은 것을 그렸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밀리터리 잡지에 투고한 글@이 훗날 발굴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평생에 걸친 미야자키의 밀리터리 매니아 취향은, 어린 시절 본 비행기 부품 제조 공장의 기억과, 미군 통치가 끝난 후, 반동(反動)처럼 몰아닥친 태평양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우익 성향의 아동 잡지의 기사들(제로센, 전함 야마토 찬양)의 영향을 받았다. '몇 년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훌륭한 '군국 소년'으로 자랐을 것'이라고 그는 고백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토에이 동화의 《백사전》(1958)을 보고 여주인공에게 심쿵하고[7](3일 연속 극장을 찾았다),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라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홀딱 반해버렸다고 한다.
그 전에도 디즈니 작품이나 미국 애니메이션은 많이 봤지만, 애니메이션 업계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이 작품이다. 만화가가 되려는 마음은 있었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 지는 모르고 있었는데, 이 낯간지러운 멜로 드라마 영화를 보고 자신이 이런 것을 엄청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끄럽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 다음에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대학은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가쿠슈인대학 정경학부(정치경제학)로 진학했다. 대학 재학 기간 당시 일본은 한창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절이었으나, 가쿠슈인은 대표적 부르주아 교육기관(귀족학교)이라 학생운동의 무풍지대였다. 하야오도 처음에는 철없는 학생이었지만, 1960년 안보투쟁에는 주간지 <아사히 클럽> 6월 임시증간호에 실린 사진(경찰이 대학생을 유혈진압)을 보고 충격을 받고 뒤늦게 데모에 참여했다.[8]
대학 재학 시, 학교에 만화 서클이 없었기에[9]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아동문화 연구회(児童文化研究会)에 소속한다. 본인의 말로는 막상 들어가 보니 아동문화는 뒷전으로 그냥 친목 모임으로 성실하게 서클 활동을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실망하고 인형극 몇 편을 연출하려다 제대로 안 됐던 경험뿐이라고 회상했다. 여담으로 이 때 인형극의 주인공 이름으로 예정하고 만든 '파즈(해적 선원의 이름)'와 '시타(그리스어 알파벳)'는 훗날 천공의 성 라퓨타의 주인공의 이름이 된다.
이 시기, 몇 편의 사회주의 혁명을 그린 만화 습작 원고를 들고 카시혼(대여본) 만화 출판사에 찾아갔지만, "우리 회사는 시대극은 안 받습니다." 라며 편집자한테 거부 당한 경험이 있다. 그 편집자가 바보같아서 이런 사람에게 내 만화를 보여준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 그 이후로는 다시는 출판사에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만화가와 애니메이터라는 진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극화의 세계와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 어디가 표현방법으로 뛰어날까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애니메이션이 뛰어나다고 결론을 내린다.
2. 토에이 동화 재직 시절
우측의 사진에서 드러 누워 있는 사람은 타카하타 이사오 |
정말로 어떤 생각이나 마음을 전하려고, 심플하고 정성들여 만들면 애니메이션도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10] 영화는 한 번밖에 안 봤지만(VCR라는 것이 없던 시절), 아는 사람에게 구한 눈의 여왕의 소리만 녹음한 음향 테잎 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테잎이 늘어지도록 들었다. 러시아어는 전혀 몰랐지만 그 소리가 좋았다고 한다.
입사 1년차 신입 동화맨였던 미야자키는 걸리버의 우주여행(1965)의 라스트 씬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제안해서 선배들을 놀라게 했다. 선배였던 오오츠카 야스오와 코타베 요이치는 그의 연출가 재능에 감탄했다. 미야자키가 평생의 '전우'라 불렀던 야스다 미치요[11]는 "대단한 놈이 들어왔다."고 회사내에서 소문이 났다고 회상했다.
1961년에 토에이 동화에는 환경과 처우문제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미야자키도 입사후 노조에 가입하고 1964년에는 제2대 서기장으로 선출됐다.(참고로 제1대 서기장이 오오츠카 야스오) 실은 투쟁같은 것은 하고 싶지않았지만, '너가 말을 잘 하니까 하라'고 해서 주변에 떠밀려서 노조 간부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같은 노조의 간부(1961년에 노동조합 부위원장)였던 입사 4년 선배인 타카하타 이사오와 친해졌다. 노조의 임원이 되고 나니 엄청난 업무와 함께 무거운 책임과 부담을 느끼고 있을 때, "자네, 그것도 모르나?"라며 도와줬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의 절친이자 라이벌 콤비가 되었다.
1965년, 동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인 같은 직장 동료인 3살 연상의 여인(오오타 아케미 大田朱美 1938년생# )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다.어머니도 연상 커플이어서 아들의 결혼에 반대를 못했다고 한다.[12] 그녀는 미야자키 하야오보다도 그림을 잘 그렸고, 회사에서도 장래가 기대되는 인재였다. 그녀는 여성으로는 드물게 동화맨에서 원화맨으로 1965년에 승격했고, 당시는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는데도 결혼 후에도 애니메이터 일을 계속하고 맞벌이를 하기로 약속했는데, 아들 2명을 낳은 뒤에 하야오의 권유로 1972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장남이 미야자키 고로) 미야자키는 자신이 아내가 애니메이터를 포기하도록 한 것에 대해 항상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모리 야스지는 제자였던 그녀를 높이 평가해서, 훌륭한 애니메이터를 잃었다고 말했다. 오오타 아케미 작화
1965년부터 토에이 동화 노동조합 주도로 제작을 시작한 타카하타 이사오의 첫 극장용 영화 연출작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에서는, 미야자키는 아직 신인이면서도 장면설계와 원화로 참가, 바위 거인같은 캐릭터부터, 그릇·잡기·집게·활·무기·건물의 투시도 등등 방대한 설정 그림을 그려서 타카하타가 연출하려는 작품 세계 전부를 실체화했다. 하지만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은 막대한 예산(1억 3천만 엔)과 시간(3년)을 투입하고도 상업적으로 참패, 토에이 동화가 망할 뻔할 정도로 휘청했고, 호루스 제작팀은 회사내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미야자키는 이때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을 하면서 엄청나게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와. 나는 감독은 하지 말아야겠다."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음 작품 장화신은 고양이(1969)는 지금도 명액션 장면으로 회자되는 오오츠카 야스오 작화 장면와, 타고난 공간 감각을 이용한 종횡무진으로 펼쳐지는 스릴과 유머가 가미된 액션 장면을 그린 미야자키의 작화 장면이 돋보이는 클라이맥스의 추격전은 어린이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흥행에도 대성공해서 후속편이 2편이나 만들어졌다. 주인공 고양이 페로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미야자키는 영화 선전을 위해 만화판을 그려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 1969년 9월부터 1970년 3월까지 일본공산당의 청소년지 "소년소녀신문"에 필명을 사용하여 "사막의 백성(砂漠の民)"(총 26회)#이라는 만화를 게재하기도 했다. 11세기 말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실크로드를 둘러싼 민족분쟁과 노예 반란을 주동하는 소년 주인공을 그린 작품으로, 슈나의 여행,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원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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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에 성공한 장화신은 고양이의 차기작 하늘을 나는 유령선(1969)#에서는 거대로봇 고렘이 빌딩을 파괴하는 씬과 탱크가 폭주하고 고렘과 싸우는 씬 등의 명장면의 원화를 그렸다. 이 전투기의 조종사의 시점에서 그린 장면을 본 카나다 요시노리가 애니메이터가 되기로 결심. 이 장면은 루팡 3세 2기에서도 본인이 연출한 에피소드에서 셀프 오마쥬했다.
동물 보물섬(1971년 3월 20일 개봉)에서도 여주인공이 남자 못지 않는 액션을 펼치는 장면의 원화를 그렸고###, 알리바바와 40마리의 도적에서 원화로 참가한 것이 토에이 동화에서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토에이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화 작화보루
3.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활약
토에이 동화는 노조탄압을 시작했고, 회사는 이들을 희망퇴직이라는 명분으로 나가 달라며 내쫓았다. 제작비와 제작기간을 초과하고 흥행 실적은 막대한 적자를 불러들인 타카하타 이사오에 대한 징벌 처분이었다. 타카하타는 호루스의 흥행 실패 이후 TVA 연출 보조직에서 끌어 내려져 연출을 못 하게 되는 등, 토에이 동화에서 찬밥 신세가 되었고, 그의 동료 미야자키도 원화나 그리게 해서, 토에이에서 그가 연출을 맡을 수 있는 기회는 요원(遙遠)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토에이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토에이 출신이라는 점을 알리고 있다.1971년 6월, 희망퇴직이라는 명목으로 쫓겨나듯이 타카하타 이사오, 코타베 요이치(9월) 선배와 함께 3인방은 토에이 동화를 떠나, 토에이의 선배 오오츠카 야스오가 1968년에 먼저 이적해 있던 A 프로덕션(현재의 신에이 동화)로 이적했다. 오오츠카 선배와 A 프로덕션의 원청 회사였던 도쿄 무비의 사장 후지오카 유타카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오오츠카 선배가 작화감독으로 활약한 무민을 보고, 여기라면 우리들이 만들고 싶어하는 작품을 마음껏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리라는
1972년 10월 28일 중국에서 선물로 보낸 판다가 큰 인기를 얻었다. 우에노 동물원에서는 사람들이 몇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겨우 1분 관람하고 자리를 빠져나와야 할 정도였다. 애니메이션 업계에도 판다를 소재로 한 영상화 이야기가 나돌았다.[13] 미야자키는 타카하타와 상담하고 기획이 엎어진 말괄량이 삐삐의 설정과 캐릭터를 살려서 각본을 쓰고 판다 아기 판다(1972)라는 극장용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이 무렵 미야자키도 타카하타도 나이가 어린 자식이 있었는데 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작품이었다. 미야자키도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마음으로 만든 것은 처음이었다고 고백했다.[14] 원안·각본·화면설정·원화를 맡은 이 작품은 관객 수는 적었지만, 극장에 온 어린이들이 보는 내내 깔깔거리며 즐거워하고 엔딩에서는 주제가를 대합창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만든 영화는 극장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돌아다니면서 집중을 안했는데, 정말로 아이들 편에 서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면 이렇게 집중해서 본다는 것을 그 동안 이론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직접 실감하고, 스텝들은 만든 보람이 있었다라며 행복감을 느끼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화면 속에 자극적인 장면이 없어도 어린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만들면 된다는 체험은 다음 작품인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기초가 되었다. <판다 아기 판다>는 좋은 반응 덕분에 속편 <비오는 서커스 편>도 만들어졌다.[15]
1973년, 즈이요 엔터프라이즈의 사장이 오오츠카 야스오의 추천으로 타카하타 이사오를 감독으로 발탁하여, 함께 즈이요 영상(현재의 닛폰 애니메이션)으로 이적, 세계명작극장 시리즈가 되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에서 장면설정과 레이아웃을 맡았다. 장면설정과 레이아웃이란 화면에 보이는 모든 그림의 (건물이나 소품을 비롯한) 설정과 구도의 설계도인데,이런 작업은 보통의 애니메이터는 하루 10컷 정도 그리는 것이 기껏인데, 하야오는 하루에 50컷 이상, 한 에피스드 당 300컷 이상을 그려서, 하이디 전52화 전 컷을 혼자서 해치웠다.
평균 20%가 넘는 고시청률을 얻고, 아이들과 함께 보고 있다는 동창생의 격려 엽서도 받고, "세상 한 구석에서
차기작《엄마찾아 삼만리》에서도 전 에피소드 전 컷의 장면 설정, 레이아웃을 담당했는데, 주제가 가사처럼 '산도 계곡도 없는' 전개에 50화가 되도록 엄마를 만나지 못하는 것에 "적당히 좀 해라!"며, "마르코도 힘들었겠지만 자신도 지루한 작업을 하면서 힘들었다"고 푸념했다. 시리즈 다음작 꼬마 너구리 라스칼에선 원화로 참여했다.
1977년, 일본에서는 우주전함 야마토의 극장판 편집 영화의 히트와 스타워즈의 영향으로 아니메와 SF 붐이 일었다. NHK도 이런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고자 유소년과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연속극을 방영하기로 기획하고 스폰서(물주)로 나섰다.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로 인기를 얻고 있는 닛폰 애니메이션에게 실제작을 의뢰했다. 프로듀서의 추천으로 미야자키는 감독으로 발탁됐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생애 처음으로 연출(감독)을 맡은 TVA 연속 시리즈(총 26화) 《미래소년 코난》(1978)에서 혼자서 10인분을 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타카하타와 함께 두 편의 TVA 시리즈의 전 컷의 레이아웃과 화면설정을 한 경험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얻은 것이다. 작화감독이었던 오오츠카 야스오는 "말도 안 되는 괴물(빠케모노)이 돼서 나타났다."고 회상했다. 기발한 연출을 연발하니까 오오츠카는 어떻게 이런 것을 착상했냐고 물으니, 미야자키는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저절로 나오니 어쩔 수 없다고 대답했다. 코난은 첫 방송에서는 시청률이 높지 않았지만(평균 9%) 재방송을 하면서 작품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지금도 회자되는 고전 명작이 되었다. 미래소년 코난을 보고 애니메이터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후배들의 고백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 일본 최정상급의 애니메이터인 이노우에 토시유키가 있다.
1979년에는 타카하타 팀으로 복귀, 세계명작극장 시리즈 빨강머리 앤에서 참가했지만, 앤이 총을 들고 오토바이를 타는 그림을 그려서 벽에 거는 등 따분한 일상극에 욕구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즈음 선배인 오오츠카 야스오가 도쿄무비신사,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서 제작하는 극장용 영화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감독직 의뢰를 받고 고민한다는 전화를 받고 "내가 할게!"라며 달려들었다.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인기리에 방영 중이었던 루팡 3세(애니메이션 2기)의 안티테제적인 작품이었고, 3억 엔의 제작비를 들여 극장에서 벌어들인 돈은 1억 5천만 엔 수준으로 흥행에서 완전히 참패했다. 이 시기 일본은 공전의 SF 붐이었고 이 작품은 유행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물론 나중에 명작이라는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극 중에 루팡이 내뱉은 "로리콘 백작!"은 나중에 로리콘이라는 단어를 퍼트린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인터뷰를 받은 적이 있다.(로리콘 문서 참조)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은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흥행 참패는 극장 영화로 데뷔한 39살의 미야자키에게는 정신적 데미지가 컸다. 다시는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 애니메이터도 그만두고 만화가가 되든지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든지, 인생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이때 그림책으로 구상한 것이 이웃집 토토로와 그래픽 노벨인 슈나의 여행이 있다.
이후 도쿄무비신사의 산하 실제작사인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서 이탈리아와의 합작 TVA 명탐정 홈즈의 5편을 연출하고, 도쿄무비신사가 세계 시장 진출을 노린 야심 찬 대작 리틀 네모 제작을 위해 타카하타 이사오, 오오츠카 야스오와 함께 미국 LA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준비했지만, 기획에 대한 의문을 품고 도중하차,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텔레콤에 여러 다른 기획안을 제출하지만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982년 11월 22일 퇴사하고 프리랜서가 된다.
이 시절 기획이 훗날 토토로, 나우시카,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로 실현됐다. |
나우시카는 아니메쥬에서 그럭저럭 인기를 얻었고, 단행본 1권이 발행되자, 1시간 분량의 OVA로 제작하자는 소리가 나왔다. 미야자키는 이왕이면 장편 극장용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하여, 당시 영상사업에 의욕이 있었던 도쿠마 쇼텐의 사장을 아니메쥬 초대 편집장 오가타 히데오와 2대 편집장 스즈키 토시오가 설득하고, 미야자키의 남동생이 근무하는 광고대행사 하쿠호도가 공동투자를 하기로 해서 영화화가 결정, 프로젝트팀(제작위원회)이 결성됐다. 톱 크래프트를 제작 거점으로 제작팀을 꾸려, 1984년 3월 11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극장 공개했다. 관객동원 수는 약 91만 5천 명으로, 대박을 터트린 정도로 히트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야자키는 '다음 작품을 만들 기회가 또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안심했다. 운이 좋았다.'고 평했다.
나우시카는 그 해 아니메 그랑프리, 일본 아니메 대상 등에서 상을 타고, 영화잡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문 칼럼에서도 주제의식과 작품성에 대해 절찬했고, 다음 해 TV 방영이 되면서 호평을 얻고, 비디오 판매와 렌탈 수입으로 높은 매상을 기록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나우시카 작품 자체의 평가는 필름 원본을 불태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했다. 제작 스텝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인력난에 긴박한 제작 기간이 겹쳐, 원하는 퀄리티가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영상화를 고려하지 않고 그린 작품이라 이제까지의 그림을 움직이기 쉬운 단순한 캐릭터와 메카가 아니라, 복장이나 총, 비행선, 하나 하나가 손이 많이 가는 작화였다. 스토리도 영화는 만화 원작의 프롤로그 소개 수준에 억지로 만든 결말을 덧붙인 미완성작이었다. 라스트 씬도 애초의 콘티에는 나우시카는 오무와 서로 마주 서는 장면으로 끝났다. 미야자키는 오무를 한 마리도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결말을 지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즈키 토시오와 타카하타 이사오 두 사람이 카페에서 8시간을 토론한 끝에, 이대로라면 영화의 결말이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며 3가지 결말을 제시했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화를 내며 오무를 "죽이면 돼!". 그래서 택한 것이 지금의 엔딩이었다.[16] 그 말을 들은 하야오는 "알았다."라고 콘티를 그렸다. 하지만 이 결말에 대해 오시이 마모루는 특공이라는 둥의 비판을 하고, 나우시카가 부활하는 장면은 종교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도 생겼다. 원래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평을 들은 미야자키는 만화판에서 그 비판을 뒤짚어 엎는 전개를 펼친다.
- 미야자키가 원래 그린 그림 콘티는, 거신병(원래는 머리 부분에 조종석이 있는 거대로봇이었다)에 올라탄 크로토와가 오무와 육탄전을 벌이고 싸우다 오무의 인해전술에 끝내 쓰러지고, 그 정체는 원래 커다란 유충 번데기였던 오무는 탈피를 해서 커다란 나방으로 변태해서 수 천마리가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날아간다는 장대한 엔딩이었다. 거신병으로 대표하는 인간이 만든 기계 문명과 오무로 대표하는 자연과의 대결에서 자연이 승리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촉박한 제작 기간과 부족한 예산 때문에 이 장면은 없던 것으로 되었고 콘티도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 실제로 이 콘티를 그리기로 했던 안노 히데아키는 거신병과 오무의 대결 장면에 과연 이것을 내가 그릴 수 있을까라고 불안해하면서도 흥분했는데, 정작 제작 사정으로 흐물흐물 녹아져 내려가는 거신병을 그리게 되었고, 이것은 불만이 생겨서 나우시카의 후속작(특히 만화판 7권)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미야자키 하야오를 조르게 되었다.
나우시카가 잘 팔린 덕분으로 미야자키에게도 원작자 지분의 저작권 로얄티로 꽤 많은 돈(본인 표현으로는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17])이 들어왔다. 애니메이터는 가난한 직업이라 이 돈을 혼자서 갖는다는 것이 양심에 걸렸다. 그래서 미야자키는 이 돈을 타카하타 선배를 위해 쓰기로 했다. 나우시카를 만들 때 프로듀서를 맡아 준 은혜를 갚기 위해 이번에는 자신이 타카하타 작품의 프로듀서가 되어 그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지원했다. 그런데, 타카하타 이사오 특유의 느긋하고 돈 먹는 하마 스타일대로, 강과 인간의 관계, 썩어가던 강을 청소해서 살린 공무원과 주민들을 그린 문화 다큐멘터리 영화는 절반도 완성되기 전에 제작비가 바닥이 나버렸다. 보통이라면 자주 제작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라면 1~2억 원이면 충분한 예산인데 5천만 엔이 증발하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본인 자택을 저당까지 잡혀야 할 처지에 놓였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미야자키에게 스즈키 토시오가 "이렇다면 영화 한 편을 더 만들어서 돈을 벌 수밖에 없겠네요." 그 말을 들은 미야자키는 곧 한 편의 기획서를 꺼내들었다. 리틀 네모와 NHK TVA 기획을 위해 제안한 기획서로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해서 가다듬고 있던 거였다. 이 기획서는 《천공의 성 라퓨타》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고,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이 붙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탄생했다.《마녀 배달부 키키》가 히트치기 전까지 미야자키는 항상 스폰서들의 압박 속에서 작업에 임해야 했다. 그는 스즈키 토시오에게 언제나 감사한다고 말했다.
4. 스튜디오 지브리 시절
1985년, 도쿠마 쇼텐의 출자로, 나우시카의 제작거점이었던 톱크래프트를 해산, 재창립하는 형식으로 스튜디오 지브리가 설립됐다.《천공의 성 라퓨타》(1986)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첫 작품으로 타카하타 이사오가 프로듀서를 맡아주었다. 19세기 후반 "기계가 아직 기계의 즐거움을 가진 시대, 과학이 반드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여기지 않은 시대'를 무대로 한 소년 소녀의 모험활극으로 미야자키 취향의 모험 활극론을 펼친 작품이다. 미야자키는 이 시대에 모험 활극을 만들기가 어려워졌는데 그래도 자신이 어릴 적 읽고 자란 모험 활극에 담긴 것을 후대에 전해주고 싶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에게 모험 활극이란 소년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립해가는, 어른이 돼가는 체험으로, 언젠가는 부모한테서 떨어져나와 자신의 인생을 열어나가는, 비록 힘들어도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였다. 지브리는 프로듀서로 스즈키 토시오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영화 홍보 활동에는 무심했고, 관객 동원수는 약 77만 명으로 전작인 나우시카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TV 방영으로 고시청률을 기록하고, '바루스 현상'이 생길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작이 되었다.
"일본의 풍경을 재발견하고, 어릴 적의 나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
70년대 후반부터 조각조각 이미지 파편으로 구상해 온 《이웃집 토토로》 기획서를 스즈키 토시오가 도쿠마 쇼텐에 건의를 했으나 쇼와 30년대(1950년대)의 도깨비 이야기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말을 듣고 거절당한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타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이의 묘"와 두 편을 동시상영을 하는 것이었다. 도쿠마 쇼텐 측은 이 건의를 듣고 진짜 화가 났다. 그러다 원작 소설을 출판한 신초샤에서 "반딧불이의 묘"의 출자를 결정하자 도쿠마 쇼텐 역시 토토로 제작을 결심했다. 유행하는 것을 쫓아가지 않겠다는 것이 타카하타와 미야자키의 작가로서의 자존심이었다.[18]
지브리는 토토로팀과 반딧불팀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듯 1년간 죽어라 일하게 된다. 원래는 60분짜리 두 편 동시개봉 예정이었는데, 타카하타 감독의 반딧불이의 묘가 60분으로는 원작을 다 못 담는다면서 상영시간을 90분으로 늘려버리자, 미야자키도 경쟁심이 발동해서 한 명의 소녀가 주인공이었던 것을 자매로 바꿔서 80분의 장편으로 만들었다. 상영시간이 늘어나면서 제작환경은 더더욱 힘들어져서 실컷 고생한 다음에 마침내 겨우 개봉할 수 있었다. 더구나 반딧불이의 묘는 개봉일을 못 맞춰서 몇 장면은 채색이 안 되어 하얀 화면에 선화(線畵)만 움직이는 미완성 상태였다. 미야자키는 '어차피 손님이 안 올거라며 만들었는데, 정말로 손님이 없었다'라고 자조했듯이, 영화는 홍보에도 신경 쓰지 않아 흥행은 참패에 가까웠고, 지브리는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웃집 토토로는 일본영화잡지 <키네마 준보>가 뽑은 그해 일본영화 베스트 1위가 되고, TV 방영이 되면서(1989년 4월 28일) 21.4% 고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거의 매년 재방송을 해도 매번 20%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영화 선전을 위해 만들었던 토토로의 봉제 인형도 인기를 얻고 많이 팔렸다. 토토로는 지브리를 먹여 살리는 효자 상품이 되었고, 지브리의 마스코트 캐릭터가 되었다. 라이벌인 타카하타 이사오도 토토로를 절찬했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우리 애가 토토로를 너무 좋아해서 60번을 봤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고 자책하기도 했다. 토토로를 본 계기로 아이들이 자연으로 가서 직접 시각·청각·후각·촉각으로 즐기고 뛰어놀기를 바라는데, 집에 앉아서 시각과 청각으로만 느끼는 화면 안의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면 어쩌냐는 염려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부터 제작을 시작한《마녀 배달부 키키》(1989)는 젊은 감독(카타부치 스나오)을 데려와서, 지브리의 신입사원을 중심으로 실력 향상을 위한 기획으로 만들어졌으나, 어른들의 사정상(스폰서의 압력으로) 원래는 프로듀서를 맡기로 한 미야자키가 감독도 맡게 된 작품이다. 80년대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당연시되고, 거품경제로 일본은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주체못하고 엔고로 세계여행이 보편화하고, 줄리아나 도쿄로 대표되듯 일본 전체가 흥청망청하던 시기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13살의 소녀를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상경해서 혼자서 자립하고 살아가는 여성으로 대입했다. 키키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마법은 오토바이나 자동차 운전을 하는 정도의 능력이다. 사회에 나와서 비록 힘든 일이 있고, 때론 좌절하더라도 인생은 그래도 살만한 것이라는 용기를 주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이 영화는 많은 여성의 공감을 얻고 인생작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작품부터 여주인공을 그리는 태도가 달라지는데, 주인공 키키는 이제까지 미야자키가 바라는 이상형을 투영한 공주님 스타일이 아니라, 화장실에서 볼일도 보는 현실적인 모습이다. 지브리의 여성 직원들의 의견(미야자키 작품 속의 여성은 공주 스타일이라서 화장실도 안 갈 것 같다는)을 받아들였고, 1993년까지 13년간 나우시카 만화를 연재해 가면서, 자연과 인간, 불결(汚れ)과 정화(淨化)의 관계를 궁리하다, 자연이 더러움(인간이 자연을 오염시키는 짓)을 포용하기도 하지만, 자연은 잔인하다며 서로 공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내가 13살 때는 바보같은 짓만 했다고 생각한다. 50을 눈 앞에 둔 나이가 돼서야 그런 것을 허(許)하게 되었고, 그런 것을 용서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을 인정하자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20대는 그 굴욕을 참을 수 없어서 "우와와" 분노의 고함을 지른 적도 있었죠.
흥행 면에서도 1989년에 미야자키의 권유로 지브리에 입사한 스즈키 토시오가 장사 수완을 발휘해서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 활동을 펼쳤다. 스폰서였던 야마토 운수에서도 각종 캠페인을 벌여 광고 활동을 했다. (다만, 이 작품 전부터 TV로 방영된 지브리 작품들이 높은 시청률을 얻고 시청자들에게는 이미 지브리와 미야자키라는 이름이 익숙한 상태였다.) 대대적인 선전 효과 덕분에 크게 히트해서 관객동원 수 나우시카 91만 5천 명, 라퓨타 77만 5천 명, 토토로/반딧불의 묘가 62만 2천 명으로 점점 내려앉던 것이, 마녀 배달부 키키는 265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작품이 성공한 덕분에 지브리는 정사원제와 월급제를 도입해서 열악한 애니메이터들의 고용 환경을 개선했다. 보수도 2배로 올렸다. 토에이 동화 시절 노조 투쟁으로 이루려 했던 목표를 성취한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제작비도 2배로 늘어났고, 부담도 늘어났다. 정사원제와 월급제를 채택한 결과, 지브리는 자전거 페달을 쉬지 않고 밟아야 쓰러지지 않듯이, 쉬지 않고 연속으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사원제 아이디어를 꺼내든 것이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인데 가장 큰 부담을 느끼게 된 것도 미야자키 자신이었다. 타카하타 감독의 추억은 방울방울(1991)이 제작을 마치기 전에 다음 작품을 기획하고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추억은 방울방울은 제작 준비 기간이 늘어나고, 작화팀의 베테랑 메인 스태프가 전원 몰려가 매달린 상황이었다. "붉은 돼지는 나 혼자 만들라는 건가." 추억은 방울방울이 완성해도, 지친 베테랑 스태프에게 연속으로 체력적인 부담을 줄 수 없었기에, 이번에는 메인 스태프를 쇄신해서 여성 애니메이터를 중심으로 하는 간단한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19]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도 연속으로 장편 영화를 만들다 보니 심신이 피곤하고 지친 상태였다.
제트 여객기내에서는 산소가 조금 결핍이라서, 지상에 있을 때보다는 머리가 둔해지니까, 단순한 이야기가 좋다고 해서 돼지라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해서, 아드리아해를 무대로 해서, 산소결핍 상태에서 보는 영화를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 미야자키 하야오, 제작발표회에서
밀리터리 모델 잡지에 게재한 단편 만화를 원작으로 한 붉은 돼지(1992)는 15분짜리 단편으로 JAL 여객기 내에서만 상영할 소품으로 기획되었다. 머리도 식힐 겸 평소 좋아하는 비행기와 비행사 이야기라면 배경은 텅빈 하늘에 구름과 바다만 그리면 되고, 조종석에 앉아 있는 장면은 하반신은 그릴 필요가 없으니 달린다든가 하는 동화매수가 많이 필요한 장면도 적으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붉은 돼지는 포르코 로쏘가 공적에게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는 이야기로 끝나는 단편이었다. 콘티를 읽은 스즈키 토시오는 '엥? 이걸로 끝인가요? 왜 돼지가 되었느냐'라고 물으니, 미야자키는 '일본영화는 원인과 결과를 밝히려 든다. 결과만으로도 좋잖아.'라고 화를 냈다. 그래도 관객이 납득을 못할 거라고 하니 내놓은 것이 미망인 지나의 등장과 마법에 걸려 돼지가 되었다는 설정의 30분짜리 콘티였다. 스즈키가 다시 이걸로 끝이냐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자 미야자키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점점 내용이 덧붙여져서 결국 장편으로 늘어나서 극장 개봉되었다. 출처 미야자키는 '자신의 취미를 위해 영화를 만들면 안 되는데,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라고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고 이제까지 어린이들을 위한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왜 이런 것을 만들어버렸는지 후회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스튜디오 지브리 영화는 나올 때마다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미야자키는 흥행보증수표가 되었다.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설계한 신사옥(제1 스튜디오)을 짓고, 지금의 장소로 이사했다.
다음 작품으로 작은 벌레의 모험 이야기나 81년에 구상했던 동화 모노노케 히메 기획에서 출발한 일본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장편 액션 활극을 만들까 선택에 고민하는 상태에서,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는 이제 미야자키도 나이도 있고, 더 나이를 먹으면 액션 대작을 만들 수 없고, 지브리도 설립하고 10년이 되어 사원들도 30대 초반으로 체력도 있고 실력도 올랐으니 이번에 전력투구해서 화끈하고 화려한 작품을 하나 터트려보자고 조언했다. 하야오는 이번 작품이 마지막 감독작으로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자신의 철학과 모든 기술과 노하우를 담아내고, (이번에 흥행에 실패하면 망해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기둥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약 22억 엔의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하고, 이제까지 다른 작품이 4만에서 8만 장의 동화매수였던 것에 비해 무려 14만 장의 동화를 사용한 대작이 완성됐다.
이즈음 지브리는 타카하타 감독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콘도 요시후미의 귀를 기울이면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단편 On Your Mark(1995)을 개봉한다. 미야자키는 자신들의 영화가 시대의 전환기에 대응하지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세상은 천안문 사태(젊은 시절 미야자키는 문화대혁명에 찬동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소련 해체로 변하고 있었고, 내전과 전쟁과 학살은 여전히 도처에서 일어났다 . 일본 국내에서도 거품 경제는 꺼지고,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에 의한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이 발생, 한국에서도 다미선교회의 휴거 소등이 일어나는 등, 세기말 현상으로 사회는 혼란한 분위기였다. 미야자키는 "간단히 사람을 미워하게 된 시대"가 되었다며, 그런 것을 외면하고 태평스럽게 어린이에게 '오늘은 즐겁고 씩씩하게 삽시다'라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는 질문에 사로잡혔다. 이제까지 어린이에게 희망을 가지고 밝고 건강하게 살라는 응원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실제로 어린이들이 마주치는 현실 세계는 응원으로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다루지 않고는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있는가 하면 해결 불능의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해결 가능한 문제에 한해서, 숙제를 클리어한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그런 식으로는 현대에 우리에게 부딪친 문제에는 길항(拮抗)할 수 없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해답을 낼 수 없는 문제를 해답이 없는 채로 작품으로 내놓기로 했다. 모노노케 히메는 사춘기 소년 소녀의 마음의 문제[20], 부조리한 사회와 차별 문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서로 증오하고 살육하는 인간 관계의 문제 등의 복잡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오락 영화로 만들어야 했다.
나는, 모노노케 히메를 인간불신을 조장하는 영화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좋은 것이라는 시점도 버렸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 안에는 어리석음도 현명함도 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私は、『もののけ姫』を、人間不信を助長するような映画にはしたくなかったんです。かといって、人間はいいものだという視点も捨てました。一人の人間の中には愚かさもあれば賢さもある。それが人間なんです。
私は、『もののけ姫』を、人間不信を助長するような映画にはしたくなかったんです。かといって、人間はいいものだという視点も捨てました。一人の人間の中には愚かさもあれば賢さもある。それが人間なんです。
시대극은 히트하지 못할 거라는 예측과는 달리, 《모노노케 히메》(1997)는 약 190억엔을 벌어들이고 총 1450만명을 동원, 일본 박스오피스 사상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21] 지브리라는 브랜드 인지도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이자 은퇴작이라는 화제성으로 의무적으로 봐 줘야 한다는 사회적 현상의 결과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은 그 난해한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를 분석하는 해설서와 연구서가 출판됐다. 게다가 영화를 만든 장본인인 미야자키도 "자신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소화를 다 못하고 있습니다."(1997,10, 30일 일본 배급수익 신기록 수립 기념 기자회견에서) "역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어떤 테마를 주장하고 싶다면, 자신이 그 테마를 소화해야 하지만, 식물을 소중하게 여기자는 따위의 테마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거고, 이 만큼 스토리를 만들었으니 영화를 보면 다들 이해할 겁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합니다만. (웃음)"라며 관객에게 알아서 해답을 찾으라고 화두를 던진 영화였다. 이후 라디오 인터뷰나 무대 인사에서 '인류는 과연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가?' '손득(손해와 득실)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 자체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어린이에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선배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자 그 동안 작품 제작에 참여해서 조언을 해주던 타카하타 이사오는 "이 영화를 본다고 해서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이미지 트레이닝은 안 된다" 라며 신랄한 비판을 했다. 타카하타는 판타지 안에 현실 세계의 문제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아이들이 보는 판타지는 앞으로 이들이 겪어야 할 현실 세계를 간접 체험하는 이미지 트레이닝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이런 비판에 대해, 미야자키도 "이웃집 야마다군 같은 영화는 자신은 만들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다"면서, 타카하타와는 "판타지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 그 주제로 말을 꺼내면 서로 싸우게 되니까 아예 말을 안 꺼낸다"고 말했다.
영화 평론가 마치야마 토모히로는 미야자키의 영화가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만화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완결된 후인 1994년부터라면서 이후 미야자키의 작품에서는 권선징악이니 어디가 선이고 어디가 악이니 하는 구별이 사라졌다.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어디를 응원해야 할 지 관객들은 당황한다. 만화판 나우시카에서 미야자키는 생명이란 빛과 어둠 모두가 생명이다. 함께 공존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치야마는 모노노케 히메를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그래서 이 영화가 뭘 말하는 것인지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린다면서, 모노노케 이후 극장에 관객이 몰리지만, 감독과 관객 사이의 괴리감을 지적했다.
모노노케 히메부터 미야자키는 관객은 내팽겨치고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었고,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라는 브랜드 이름만으로 영화관을 찾아 온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소화불량(消化不良)에 시달려야 했다.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의 은퇴작으로 알려졌는데, 은퇴설의 진실에 관해서는 TV 인터뷰[22]에서도 밝혔지만, "다음 작품은 무엇을 할 겁니까?"라고 물으니 "다음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그렇게 되어버렸다면서, 애니메이션 감독이라고 하면 쭈욱 감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1선에서 조금 벗어나서 2선에서 다른 하고 싶은 일(자신의 스튜디오 건설, 작은 소품 영화)을 하고 싶다. 이 체력이나 여러 면을 고려하면 계속 일선에서 있는 것은 노욕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순위로 해야 할 일 리스트에서 감독직을 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니 가수 은퇴선언처럼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라며 부풀려진 면이 있다고 밝혔다. (이후 은퇴번복 후 만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관련 방송의 인터뷰에서는 그 질문을 한 사람이 무례했다면서, 아직 모노노케 히메 작품이 완성이 되지도 않았는데 다음 작품은 뭘 할 겁니까? 라고 물으니 화가 나서 그렇게 말했다면서 실언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결과적으로는 '이번에 센과 치히로가 마지막이어서 정말로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출전 )
그러나 '은퇴작이다.' '이번이 마지막 작품이다.'라고 하는 것은 화제성이 높으니까 매스컴에서 다루어주고, 이는 작품의 선전과 흥행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후에도 센과 치히로를 만들고 은퇴 선언, 바람이 분다를 만들고 은퇴선언하더니 또 은퇴 번복하고는 '그대들'을 만들었다.
아무튼 세간에는 은퇴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동안 장편 제작에 매달리느라 못했던 하고 싶었던 일을 했다. 새로운 개인 아트리에(이름은 '부타야(돼지집)' )를 건축했고, 지브리 미술관을 설계해서 2001년에 개관했다. 1998년 1월에는 20년 이상 작화면에서 오른팔 역할을 해주던 동료 콘도 요시후미가 사망하는 슬픈 일도 겪었다. 같은 해 3월에는 가장 좋아하는 책 [인간의 대지]의 작가 생텍쥐페리의 발자취를 따라 남프랑스 툴루즈에서 사하라 사막까지 복엽기 비행 여행을 하기도 했다.
97년부터 지브리의 차기작에 대한 구상에 들어갔다. 은퇴를 했다고 해서 작품 제작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고, 귀를 기울이면처럼 각본과 그림콘티(스토리 보드)는 미야자키가, 감독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몇 편의 원작이 후보로 올랐지만, 스토리를 대거 뜯어 고쳐서 각색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오리지널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1년간 구상하고 이미지 보드를 만든 예정작은 여주인공이 요즘 시대 사람 같지 않다는 스즈키 토시오의 평을 듣고 뒤짚어엎었다. 스즈키 토시오가 훗날 밝힌 비화를 들어보면, 스무 살(일본 나이로는 18살)의 소녀가 60살의 노인과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였다고 한다. #
그 즈음 지인들을 자신의 별장에 초대해서 소풍을 갔을때 일어났던 해프닝(지인의 딸이 냇물에서 놀다가 신발이 떠내려갔던 소동)에서 착상을 얻고, 지인의 10살난 딸을 주인공으로 그 소녀를 위한 이야기를 만들기로 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한 어린 소녀가 스튜디오 지브리 같은 세계에 흘러들어와 온갖 이상한 일을 경험하고,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용기와 힘을 발휘한다는 내용이었다. 감독은 31살의 유망주 안도 마사시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안도는 미야자키의 각본과 그림콘티로 감독을 하는 것을 거절했다. 안도는 리얼리즘 지향으로 미야자키와는 만들고자하는 방향성이 다르다는 이유였다. 어쩔 수 없이 미야자키 본인이 감독으로 복귀하였고, 안도에게는 작화감독을 맡겼다. 미야자키와 다른 감독이 다른 점은 원화 체크는 원래 작화감독이 하는 일인데, 미야자키는 작화감독이 해야 할 원화체크도 혼자서 다 해버려서 작화감독이 하는 일은 미야자키가 체크한 원화를 깨끗하게 다시 그리는 정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체력을 고려해서, 작화팀을 총괄하고 작화를 책임지는 모든 공정을 작화감독인 안도 마사시가 전담하기로 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나중에 서로 반목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버전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크라바트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2001년 7월에 개봉됐다. 온국민이 기다리는 기대작이었다. 일본 안에서만 최종 흥행수입 308억 엔[23], 총 관객수 2350만 명으로, 역대 일본 극장 개봉 영화 기록을 새로 갈아치웠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공동수상했다.(또 하나는 《블러디 선데이》) 2003년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상도 수상했다. 미야자키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등극했다.
신인 감독을 데려와 동시 상영작으로 추진했던 고양이의 보은(2002)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고양이의 보은은 무사히 완성돼서 단독작으로 개봉했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제작 과정에서 트러블이 생겨서 제작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호소다 마모루를 발탁해서 각본과 감독을 맡기기로 한《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은 2002년에 제작이 중단되었다. 호소다 판 하울이 왜 중단되었는지는, 지브리 측이나 호소다 본인도 말을 꺼내는 것을 꺼리고 있어서 자세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미야자키는 자신이 선택한 원작 소설이었기에, 기획을 이어받아 다시 처음부터 각본을 쓰고 작품을 완성했다. 신년 휴가까지 포기하고 만든 이 작품은 이전까지의 미야자키의 작품에 비해 아쉽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래도 미야자키+기무라 타쿠야의 네임 파워로 제작비 24억 엔, 흥행수입 190억엔, 관객동원 수 1600만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다.
미야자키는 "원작 소설의 덫에 걸린 작품이다. 원작의 모티브에 매료되어 시작했지만, 원작의 작가는 소설 속의 마법의 원리라든가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가 힘들었다."고 자평했고, 마음 속에 가시처럼 남는 작품이 되었다고 아쉬워했다. 2013년의 은퇴 기자회견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뭐냐는 질문에 하울을 꼽으며 '게임의 세계인데 드라마로 만들려고 해서 스타트부터 잘못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어스시 연대기의 원작자 어슐러 K. 르 귄은 오래 전부터 미야자키의 애니화 희망을 거절했었지만, 일본어판 번역자의 소개로 미야자키의 작품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감동을 받아서 자신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좋다는 뜻을 스튜디오 지브리에게 전했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이미 어스시 연대기를 영상화 할 의욕이 사라진 지 오래여서 감독직을 거부했다. 이에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가 미야자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에게 하야오가 만든 계획안과 원안을 주고는 스토리 보드를 그려보라는 요청을 했고, 고로의 스토리 보드를 본 스즈키 프로듀서가 고로가 감독을 맡아야 한다고 추천했다고 한다. 이 때 미야자키와 다른 사람들은 그가 그 전까지 영화 제작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결국 고로가 감독을 맡아 게드전기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흥행은 어느정도 했지만 실망스런 완성도, 특히 원작파괴로 비난을 받았다.
이 때 상업 제작사인 지브리를 자신을 정점으로 한 개인 기업화하려 했고 그 일환으로 족벌 체제 구축을 위해 문외한인 아들에게 연출을 맡기는 무리수를 두다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타카하타 이사오가 99년 이래로 11년간 단 한편의 신작도 연출하지 못했던 현실이 이를 반증한다는 시각이 있다.), 인터뷰 등을 보면 고로더러 감독을 하라고 한 건 미야자키가 아니라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다. 게다가 미야자키는 나름대로 후계자 양성에 적극적이었고, 고양이의 보은 등을 젊은 감독에게 맡겨 후계자를 양성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한 편이다. 오히려 스폰서 측에서 미야자키라는 흥행보증수표의 이름값 때문에 감독을 강요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2007년에는 지브리 사원을 위한 보육원을 만들었다.
2008년 《벼랑 위의 포뇨》를 개봉했다.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 하울로 갈수록 점점 스토리가 복잡해지는데 자질구레한 설명은 안 하기로 했더니, 관객의 절반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지 못 했다. 특히, 하울에 대한 평가는 미야자키를 화나게 했다.[24] 그래서 방향성을 바꿔서 눈높이를 낮추어 어린이 관객을 대상으로 한 단순명쾌한 이야기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제작에 들어가면 특유의 스타일대로, 원작도 각본도 없이 그때 그때 머리 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나열하는 스토리 보드(그림 콘티)에 스토리를 짜맞춰서 만들다 보니, 다시 기승전결은 없고, 세계관의 설명도 없고, 복선의 수습도 없고, 관객은 그저 화면에 펼쳐지는 스토리를 따라가기에도 급급한 난해한 작품이 탄생했다. 주요 타겟이었던 어린이 관객도 기대한 만큼의 좋은 반응이 아니었다. 스튜디오 지브리 사원들의 자식들과 근처 유아원의 아이들을 초대해서 가진 자체 시사회에서 보인 어린 관객들은 영화 내용을 이해 못하고 지루해하는 반응을 보였고, 포뇨가 파도를 타고 달려오는 장면에는 무서워서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도 많았다. 흥행에 대한 적신호가 켜졌고, 관계자들은 불안함을 가졌다. 일본의 영화 평론가 우타마루는 포뇨를 평하면서, 입장 전에는 관객들이 포뇨 포뇨 주제가를 신나게 노래했는데, 영화가 끝날 쯤에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이 극장 전체가 싸해졌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후배 오시이 마모루는 이건 영화가 아니라, 미야자키의 망상 덩어리라며, 스즈키와 타카하타는 왜 말리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들었다. 사실 그동안 미야자키 작품은 타카하타와 스즈키가 스토리를 확인하고 조언을 주었는데, 모노노케 히메부터는 타카하타는 작품에 간섭하지 않았다. 미야자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드는 내내, 스토리가 치히로의 시점만으로 흘러가는 것에 '이러면 파쿠상(타카하타의 애칭)한테 혼나는데'라며 중얼거렸다.
개봉 전부터 TV 방송에서는 여러 편의 특집 프로그램이 꾸려지고, 포뇨의 주제가는 베스트셀러 히트송이 되는 등 대단한 주목을 받았으나, 최종 흥행 수입은 155억 엔으로 선전(善戰)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비 34억 엔을 쏟아붓고 손으로 그린 동화매수 17만 장이 넘는 대작치고는 기대 이하의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미야자키는 포뇨의 흥행성적이 하울보다도 낮다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포뇨의 세계'를 좋아하고, 이거야 말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애니메이션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만들고 보니 세상의 물결과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았다. 하나의 장르는 파도처럼 흥망성쇠가 있는데 이제는 상당히 곤란한 시기가 왔다. 포뇨는 어찌보면 결론 같은 작품이다. 우리는 포뇨로 마침표를 찍었다." 라고 씁쓸한 심정을 자평했다. 포뇨를 만들 때만 해도 체력의 한계로 이번 작이 마지막 장편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런 상태로 은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장편 영화를 한 편 더 만들 거라고 말을 꺼내들었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에게 72세에 죽으려고 하는데(하야오의 어머니가 이 나이에 돌아가셔서 자신도 72살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제 5년 남았으니 앞으로 하나 정도 밖에 못 만들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즈음 미야자키 하야오는 첫 손자가 생겼다. 그래서 그 손자를 즐겁게 해주고 싶은 생각에 벼랑 위의 포뇨의 속편을 만들고 싶어 했다.
지브리는 후계자 양성과 세대교체를 준비중으로 3년 내에 2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내놓을 구상을 발표했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의 감독 데뷔작 마루 밑 아리에티(2010)와 미야자키 고로의 두 번째 감독작 코쿠리코 언덕에서(2011)가 극장 개봉했다. 두 작품 모두 미야자키 하야오가 각본을 썼고, 아리에티는 총 프로듀서를 맡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2013년에 극장용 장편은 이번이 마지막 작품이라는 바람이 분다를 공개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부인은 이웃집 토토로 같은 영화를 만들지 왜 그런 작품을 만드느냐고 말렸다고 한다. 실은 스즈키 토시오의 모략에 넘어가서 만들 생각도 없던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그 메이킹 과정은 다큐멘터리 〈꿈과 광기의 왕국 (夢と狂気の王国) 〉(2013)을 참고하자.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쟁에는 반대하면서도 전쟁 병기는 좋아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야 말로 영화의 테마로 다뤄 볼 만한 소재라고 여겼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처음에는 몇 번이나 거부했다가, 마침내 마지막 작품에서 자신의 지금까지의 애니메이터로의 인생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비행기의 설계도를 그리는 엔지니어와 애니메이션의 그림 콘티를 그리는 애니메이터를 동일시한다. 둘 다 도화지/설계 도면 위에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상상해서 선을 긋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다만, 주인공이 만드는 비행기가 하필이면 제로센이라서, 한국에서는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거 아니냐?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익 아니냐? 나이 먹더니 노망난 거냐는 거센 비판의 소리를 들어야 했고 한국 개봉 후에도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말한다. "나는 제로센을 좋아해서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은 오타쿠다. 나는 오타쿠가 아니다" 라고. 실은 그 해답은 영화 안에 들어있다. 거대한 피라미드[25]가 있는 세상이 좋으냐 없는 세상이 좋으냐는 질문에 주인공 소년은 피라미드가 있는 세상을 택한다. 그는 결코 전쟁을 좋아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쟁 무기로 쓰일 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이 좋아하고 꿈꾸는 이상적인 전투기를 설계한다. 소년은 그저 멋지고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도 마찬가지다. 전쟁은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작품 안에는 늘 자신이 좋아하는 전쟁 병기를 줄곧 그려 넣었다. '그게 전쟁에 찬동하는 행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가 그가 내린 결론이다. 주인공이 폐결핵에 걸린 부인 앞에서도 태연하게 담배를 뻐끔 뻐끔 피는 모습을 일부러 묘사한 것은 미야자키 자신이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고백이다.[26]
《바람이 분다》는 흥행 수입 120억 엔을 올리고 2013년의 최고 히트작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 개봉 수익만으로는 손익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27] 영화가 완성된 후 미야자키 하야오는 은퇴를 발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5. 흥행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애니메이션 영화 1억 미국 달러 이상 흥행이 가장 많은 감독이다.
6. 공식 은퇴 발표와 은퇴 번복
이번에는 진심입니다.
2013년 9월 1일에 공식은퇴 발표가 떴다. 9월 6일 베니스 국제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은퇴의 이유로 나이를 들었다. 벼랑위의 포뇨에서 바람이 분다가 나올때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더이상 작품을 만들기가 버거워서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몇 번 은퇴선언 후 번복하긴 했지만 이번엔 진심이다라고 주장했다(...) 은퇴 이후에는 운전이 가능할 때까지 매일 지브리 미술관에 다니면서 쉴 예정이라고. 하지만 후계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2014년 연초부터 은퇴 번복의 기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12월 31일 도쿄FM 라디오 인터뷰에서 스즈키 토시오가 미야자키 감독이 "자원봉사 차원이라면 영화를 만들어도 좋다"고 밝혔다. 진행자가 은퇴 철회를 시사하는거냐고 묻자, 스즈키 프로듀서가 애매한 한마디를 던진다. 원래 은퇴 기자회견에서도 자유롭게 산다고 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자유도 있다. 일각에서는 미야자키의 은퇴 선언이 지브리 경영자들과 충분한 교감 없이 내지른 것이거나, 혹은 미야자키 은퇴 후 구도에 대한 우려때문에 은퇴 번복에 대한 압박이 나오는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일단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두고봐야 하겠지만, 그가 복귀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듯 하다.
2014년 7월에 지브리 해체설이 불거지고 추억의 마니가 최악의 시작을 보이면서 결국 미야자키가 은퇴 번복하고 다시 돌아오는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슬금슬금 나왔다.
그런데 미야자키가 추억의 마니 제작진들에게 이것저것 제안하기도 했다는데 제작진이 이번에는 미야자키에서 벗어나서 우리끼리 해보자라고 했다고.# 은퇴했다는 양반이 저러는걸 두고 젊은 사람들 못 믿고 간섭하려드는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14년 12월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제작 부문은 해체됐다.
2015년 7월. 지브리 박물관에서 상영할 10분 분량의 단편을 제작 중이라고 한다. 털벌레가 주인공이며 3D와 CG 작업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 #
2015년 8월 30일. 오키나와 현 구메지마 삼림공원에 약 1만 평 규모의 생태체험시설을 조성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내년 4월 착공해 2018년 완공을 목표로 하며 해당 기초자치단체에 기증될 예정이라고 한다. #
레드 터틀 제작보고회에서 조건부 복귀를 내비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 다만 본래 은퇴 발표를 했을 때도 업계에서 완전 은퇴하는게 아니라 장편 영화 제작에서 은퇴한다는 이야기였다.
2016년 10월, 미야자키가 '평생의 전우'라고 불렀던 토에이 동화 시절부터 동료였던 야스다 미치요가 암으로 사망하고 상심한다. 미치요는 입버릇처럼 이대로 은퇴하지 말고 한 편 더 만들라고 말했는데, 미야자키는 미치요가 (건강을 되찾아서) 같이 만든다면 만들겠다고 대답했는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2016년 11월 13일 방송한 일본 NHK 스페셜 다큐멘터리 <끝나지 않은 사람, 미야자키 하야오>에 출연해 은퇴를 번복했다. 현재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털벌레 보로>를 제작 중이고, 새로운 극장용 장편 영화를 만들 의향을 비췄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전까지 제작을 끝내고 개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그때면 연세가 무려 80세가 되시니 정말로 마지막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스즈키 토시오에 의하면#, 아일랜드 작가 존 코널리의 잃어버린 것들의 책을 원안으로 무대를 일본으로 옮긴 오리지널 장편 기획이 진행중이다. 2017년 여름에는 작화작업에 들어가서 2019년에 완성 예정으로 작화감독은 스튜디오 카라 소속의 혼다 타케시가 담당한다. 4월 30일발 소식으론 그림콘티(스토리 보드)는 20분 분량이 완성됐고, 2019년 개봉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2017년 5월 28일, 일본의 한 시사&예능 방송 프로그램(ワイドナショー 2017年5月28日)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 선언 발언이라면서, 일본의 트위터 유저가 장난 삼아 올린 글을 마치 미야자키 감독이 실제로 한 발언으로 소개하며, 은퇴 철회 발언을 비웃으며 놀려대는 방송을 내보냈다. 결국 진위가 밝혀지면서 잘못된 자료를 인용해서 방송을 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를 했다. 그렇다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전부터 극장용 영화 감독직을 몇 번이고 그만하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이 조작이라는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본인이 인터뷰와 직접 쓴 글에서 몇 번이나 감독직은 힘들어서 그만 두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공식적으로 은퇴 기자회견을 갖고 은퇴 선언을 한 것은 바람이 분다를 만들고 나서이다. 비화를 들어보면, "나 은퇴 할거야!"라고 하면서 공표하지 않으면 못지킬거니까 기자를 불러달라고 해서, 스즈키 토시오는 공식 은퇴 기자회견 중계까지 마련했는데, 그 직전 타카하타 이사오와 만난 자리에서는 "정말로 은퇴할 거야?"라고 물어보니, 미야자키는 "그것은 스즈키 씨의 음모에요."라고 말해서 스즈키가 벙벙했다든가, 타카하타는 "영화 감독한테 은퇴라는 것은 없어!"라고 말하면서 엄청 화를 냈다고 한다. 은퇴 기자회견을 앞두고, 완전 은퇴에서 "나는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직에서만 은퇴할 거고 단편 작품은 계속 만들거야."라고 말을 돌렸다라든가, 2017년 시점에서 은퇴 번복을 하고 장편 영화를 만들려고 의욕적이라는 소식을 보면, 한 작품을 만들고 나서 체력이나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푸념처럼 은퇴 발언을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창작 의욕이 생기면 은퇴를 번복하는 패턴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은퇴 사기꾼'으로 조롱을 받고 있다.
2018년 5월 15일, 라이벌이자 절친인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작별의 모임에 출석해서, 개회사를 낭독했다.2019년 NHK 방송에선 "몸이 안 좋아서 은퇴했는데 건강 상태가 좋아지니까 지금까지 못해본 게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또 은퇴냐고 욕 먹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때는 정말 몸이 안 좋았고 정말 그 당시에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것이다." 라고 발언하였다. #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년 7월 개봉)를 제작하였으며 아마도 진짜 마지막 작품이 될 것으로 보였다. 딱히 전후에 은퇴 관련하여 발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연령과 건강상태를 고려할 경우 무리일 수 밖에 없다는 평이 일본 내외를 비롯하여 정론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
은퇴를 번복한 이유에 대해 자신의 손자에게 남길 만한 자랑스러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 한편,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의 말에 따르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은퇴 이후의 평범한 삶을 스스로 견디지 못 했고, 다시금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창작 활동에 복귀했다고 한다. #
그렇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완성, 그리고 개봉으로 정말로 은퇴하나 싶었지만… 2023년 9월 8일 지브리 스튜디오의 부사장 니시오카 준이치가 "하야오가 새 아이디어를 들고 사무실에 출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로써 은퇴설은 단지 팬들의 설레발이었음이 확실시 되었다. 9월 10일에 공개된 니시오카 준이치의 인터뷰에 따르면 하야오는 여전히 활발하게 일하고 있으며 은퇴선언은 안한다고(...)# 이쯤되면 저 양반은 그냥 죽기 전까지 작품을 만들지 싶다는 의견들이[28] 많다.
최근 미야자키 고로가 미아자키 하야오의 신작에 대해 언급했다. 뭔가를 만들고 있고 그것은 미야자키 고로 본인이 의뢰한 것이며 해당 작품은 모험활극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차기작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2024년 8월 31일, 2024년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 정확하게는 꼬리날개에 장착하는 방향타다. 미야자키 공장은 제로센의 방향타를 생산했다.[2] 하야오가 잘못 알고 있었는데, 메이지 제과에서 '메이지 밀크 초콜릿'을 1926년부터 판매하고 있었다. '그어살'에서는 아버지가 이 초콜릿을 챙기는 장면이 나온다.[3] 다행히 미야자키의 어머니는 치료약이 개발되어 어찌어찌 건강을 회복했고 73세까지 살았다. 노년의 하야오는 자신도 어머니처럼 73살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벼랑 위의 포뇨에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토키는 노년의 어머니가 모델이라고 한다.[4] 그리고 하야오가 자신을 멋지게 보이고 싶을 때는 붉은 돼지와 무스카처럼 선글라스를 쓰기도 한다.[5] 실제로 스승이자 선배인 오오츠카 야스오의 증언에 의하면 하야오는 토에이 동화에 입사한 후에도 직장내의 여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반면 토쿄대 출신의 타카하타 이사오는 여직원들 사이에 엄청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6] 훗날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원작 후보이기도 하고 너구리가 단순하게 데포르메로 그려지는 것은 스기우라 시게루의 그림체를 따라한 것이다. 2009년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기획하고 장남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가 연출을 맡아서 지브리에서 스기우라의 만화를 원작으로 요미우리 신문의 광고 애니메이션 '풍선껌 대단해(ふうせんガムすけ) '편을 만들기도 했다.[7] 특히나 여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영원한 삶과 마법을 포기하는 자기희생 정신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8] 미소 냉전체제하에 사회주의에 경도된 시기였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사상적으로 크게 흔들렸다.[9] 당시 만화의 사회적 지위는 낮아서 대학에 만화 동아리라는 것이 생긴 것은 한참 훗날이다[10] 산적에게 포로로 잡힌 여주인공이 자신이 찾고있는 소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이야기하자, 산적의 딸이 공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랑에 감명을 받고는 소녀를 풀어주고 탈출하게 하는 장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도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11] 1939년-2016. 1958년에 토에이 동화 입사, 이후 미야자키의 작품과 스튜디오 지브리의 모든 작품의 색채설계를 담당#.[12] 어머니의 이름은 미야자키 요시코(처녀적에는 야마모토 요시코) 1910년생으로 하야오의 아버지는 1914년생으로 서너 살 연상이다.[13] 토에이 동화도 1973년 3월 17일에 판다의 대모험(パンダの大冒険)이라는 50분짜리 중편 애니메이션을 극장 개봉한다.[14] 이후 센과 치히로는 지인의 10살난 딸을 위해 만든 어떤 특정인을 위해 만든 두 번째 작품이다.[15] 일상적인 삶을 착실하게 보여주고, 그런 중에 발생한 비일상적인 환타지와 아빠 판다 캐릭터는 훗날 이웃집 토토로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비오는 서커스 편에서 홍수로 세상이 물로 가득찬 세계는 벼랑 위의 포뇨의 원형이 되었다.[16] ぼくは『ナウシカ』の最後の大ラストのところで絵コンテが進まなくなっちゃって。なぜ進まないかっていったらね、王蟲を1匹も殺したくないんですよね。もう殺したくない!って。でパクさんに「殺しゃあいいんだ!」って怒鳴られてね「じゃあ殺す」って、それであっという間に絵コンテできたんですよね。[17] 스즈키 토시오 말로는 약 5천만 엔 정도였다고 한다. 거의 신인 감독인데도 이렇게 돈이 많이 들어온 이유는 스즈키 토시오가 계약서를 작성할 때 옆에서 개입해서 최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유리하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도록 러닝 개런티 조항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천: 스즈키 토시오의 지브리의 천재들 마침 그 무렵 미야에게 목돈이 굴러들어왔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들 때, 나는 영화의 흥행 수입과 기타 수입이 감독에게도 배분되도록 계약서를 만들었다. 그때까지 애니메이션 감독의 수입은 월급뿐이었다. 따라서 회사에 속해 영화를 만드는 경우, 저작권은 회사에 귀속된다. 하지만 나는 출판사에 다니는 만큼, 저작물에 대한 창작자의 권리를 지켜주고 싶었다. 영화를 만든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도 알고 있어서, 이번 기회에 감독 개인의 저작권을 확보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과 미야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거금을 손에 들고 눈을 크게 떴다.[18] 流行りものを作りたいと思わないというのは、パクさんと僕は東映動画時代からそうでした。僕らのそういう傾向が『となりのトトロ』や『火垂るの墓』を作らせたと思います。それが後には、ある意味ジブリ作品の傾向にもなっていった感じがしますね。[19] 작중에서 비행기 공장에서 여성들이 일을 하는 모습은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일하는 여성 사원들의 모습이다. 여담으로 피콜로 영감이 여성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붉은 돼지에게 "心配するな、女はいいぞ。よく働くし、粘り強いしなあ("걱정하지마. 여자가 좋아. 일도 잘하고, 네바리쯔요이시(책임감을 가지고 끈질기게 임한다는)")는 칭찬하는 대사를 치는데, 지브리 여성 직원들은 그 대사를 듣고 여성은 남성보다 일을 못한다는 선입관이 드러난 거라면서 기분나빠했다는 후일담이 있다.[20] 사카키바라 사건에 대해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는가. 그날 이후 TV도 신문도 보고 싶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20년전 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어른들은 여전히 대응을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21] 이 기록은 6개월만에 《타이타닉》이 깼다. 하지만 또그리고 다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깨버렸다. 참고로 모노노케 히메와 같은 날 개봉한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쥬라기 공원 2》 였고, 센과 치히로와 같은 달 개봉한 영화가 스필버그가 제작한 《쥬라기 공원 3》였다.[22] 출전: トップランナー アニメ監督 宮崎駿 (1997年).[23] 200억 엔을 넘긴 작품은 몇 작품 있으나, 300억 엔을 돌파한 건 일본 영화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24] 하울의 평가에는 화가 납니다. 굉장히! 설명하기 위한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상, 나는 설명 안 해! 라는 것을 했더니, 역시나 절반쯤의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더군요. 이것은 몹시도 불쾌한 현실이었어요.『ハウル』の評価には怒ってますよ、ものすごく! 説明するための映画は作らないと決めた以上、俺は説明しない!っていうことでやったら、やっぱり半分ぐらいの人はわからないみたいなんですよね。これはきわめて不愉快な現実でしたね。[25] 일본에서는 그 모습이 한자 金과 닮았다고 금자탑(金字塔)이라고 부르고, 금자탑은 어떤 업적을 가르키는 말이기도 하다,[26] 좋아하는 일(애니메이션)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부인과 두 아들을 소홀히 했다[27] 이때는 극장 흥행 수익에서 지브리가 가져가는 지분은 4분의 1(25%)였다. 즉, 120억 엔에서 30억 엔이 지브리의 몫이다. 바람이 분다의 제작비용이 30억 엔이 넘었다면 지브리는 손해를 본 셈이다. 그리고 최신의 정보에 의하면 2023년 공개 예정작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경우는 지브리가 제작비를 전액 부담하는 자주 제작 독립영화라서 지분율은 50%이다.[28] 실제로 후지코 F. 후지오는 실신 당시(사망 3일 전)까지 노비타의 태엽도시 모험기 콘티를 그리던 중이었을 정도로 은퇴라는 개념이 없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