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02:03:44

오오츠카 야스오

오오츠카 야스오
[ruby(大塚, ruby=おおつか)][ruby(康生, ruby=やすお)] | Yasuo Ohtsuka
파일:오오츠카야스오.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1931년 7월 11일
시마네현
사망 2021년 3월 15일 (향년 89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직업 애니메이션 감독, 애니메이션 연출가, 애니메이터

1. 개요2. 생애3. 특징4. 일화5. 대표작6. 제자 및 인맥
6.1. 제자6.2. 인맥6.3. 영향을 받은 인물
7. 작화 샘플8. 기타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애니메이터, 애니메이션 감독.

토에이 동화 1기 입사생으로, 타카하타 이사오미야자키 하야오의 회사 선배이자 선생. 스승은 다이쿠하라 마코토(大工原章)를 거론한다. 다이쿠하라는 당시 혁신적이었던 입체감과 원근법을 넣은 작화를 하는 분이었고 그런 분에게 그림을 배워 자신의 그림에 입체감이 생겼다고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일본 애니계는 적은 동화 매수로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연출과 스토리로 살려볼려고 하는 데즈카 오사무가 설립한 무시 프로덕션 출신(데자키 오사무, 토미노 요시유키)과 캐릭터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중시하는 본래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생긴 이유인 그림을 움직인다는 본질을 추구하는 토에이 동화 출신(오오츠카 야스오,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코타베 요이치)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1]

2. 생애

원래는 애니메이터가 될 생각은 없었고 승려나 기관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시네마현에서 태어나서 2살 때 야마구치현으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야마구치현에서 증기기관차를 처음으로 보고 감동을 받고 스케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어디에도 증기기관차를 찍은 사진이 실린 잡지나 화보를 찾을 수가 없어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그렸다. 그때 그린 그림은 전부 소중하게 보관해서 나중에는 화집으로 출판도 했다. 그는 수집광 기록광적인 성격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일기도 쓰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어서 훗날에는 작화 땀투성이(作画汗まみれ)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소중한 자료를 출판하기도 했다.
* 전후에는 점령군 미군지프에 심취해 지프의 구조가 알고 싶어 지프를 너무 자세히 스케치하자 미군에서 스파이로 알고 취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다가 꿈이 만화가로 바뀌게 된다. #오오츠카 야스오의 자동차, 만화 스케치.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린 학생 신분인데도 징용을 당해서 약 2년간 규슈 등으로 끌려가서 강제로 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2] 1945년 8월에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강제 동원 노동을 하다가 패전을 맞이했다. 학교로 복학했다가 중퇴를 하고, 1951년에 야마구치현 현청에서 공무원으로 취업을 했다. 그러나 다음해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 도쿄로 상경한다.

1952년 후생성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도쿄도에서 후생성 마약 수사과(현 후생노동성 마약취체부)에서 일했다. 사실 공무원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고 당시엔 종전 후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세계의 감시를 받고 있어 이동과 거주에 제한이 있었다. 도쿄로 가서 만화가를 하고 싶으면 공무원이 되는 수 밖에 없어 공무원 시험을 친 것이라고 한다.
소련의 애니메이션 곱사등이 망아지를 보고 애니메이션에도 흥미를 느꼈지만, 인생의 목표는 정치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였다.

공무원 일과 만화가가 되려고 만화가 수행을 병행하며 만화계의 문을 두들겼으나 별로 반응이 없었고 과로로 결핵에 걸려 2년간 요양생활을 보냈다. 이때 프랑스의 애니메이션 영화로 훗날 왕과 새로 리메이크되는 [사팔뜨기 폭군](1955년 일본에서 극장 개봉)을 보고 만화가를 포기하고 애니메이터가 되기로 결심한다.

1956년 6월 도쿄 타임즈와 요미우리 신문 기사에 난 "토에이가 컬러 장편 만화 영화[4] '백사전'의 제작을 시작한다"라는 글을 보고 신바시의 토에이 교육 영화부에 찾아갔고, 토에이 측에서 일본동화사(日本動画社)로 가라 해서 이후에 토에이와 합병을 하기로 결정이 난 일본동화사의 연구생으로 입사한다. 이윽고 토에이 동화(토에이 애니메이션)가 창립하고 정식 공채 직원 1기생이 되었다.

처음에 토에이 측에선 공무원을 하던 사람이 애니메이터 같은 시궁창 일을 하겠다니까 기겁하면서 입사면접을 보던 토에이 동화의 사장과 임원들이 공무원직을 그만두는 것은 아깝다. 당신은 나이도 많고(당시 26세) 이제와서 그림을 하기보단 하던 공무원 일을 계속하라고 설득했으나 오오츠카 야스오는 죽어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토에이에서 받는 신입사원 급여는 공무원을 하던 때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토에이는 모리 야스지에게 오오츠카 야스오를 가르쳐보라고 했는데 원래 재능이 있고 꾸준히 연습을 해서 크게 가르칠 건 없었고 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활약을 했다. 오히려 모리 야스지가 아니라 다이쿠하라 마코토(大工原章)에게 작화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동화맨의 양성 기간은 6개월로, 2달 마다 테스트가 있어서, 불합격 되면 시아게(단순한 채색 공정)으로 떨어지고, 좌절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오오츠카는 2달만에 합격해서 몇 가지 단편 작품을 거치고, 토에이 동화가 심혈을 기울인 장편 대작인 백사전(1958년도 개봉)에서 제2원화(후반에는 제1원화)를 담당했다.
이후, 액션 장면을 그리는 센스가 뛰어나서 인정을 받아서 그 부문 전문 애니메이터로 활약한다. 오오츠카가 애니메이션의 실력자로 백사전에서는 파도 장면을 그린 사람으로 유명했고, 그가 이끄는 작화반은 다이나믹한 액션과 자연 현상 묘사를 담당했다. 그리고 훗날 한 평론가가 말하길 이팩트 액션 메카닉 작화 등의 여러 분야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이 전까지 스크린에서 횡으로만 좌우로 이동하는 구도의 그림을 공간을 입체적으로 설계해서 위아래 종횡무진으로 캐릭터가 활동하는 구도를 집어넣은 사람이고, 캐릭터의 시점에서 위에서 밑으로 내려보거나 밑에서 위를 쳐다보는 구도라든가를 집어넣었고, 작화부로 지금 용어로 레이아웃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의 무대 공간의 설계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이 점은 미야자키 하야오도 영향을 받았다.

토에이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 코타베 요이치는 오오츠카는 작업 속도가 빨라서 한참 일하고 있다가 뒤돌아 보면 어느새 일 끝내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가, 어느새 다시 나타나고는 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일화로는 토에이의 작화반장 두 사람이 호랑이를 그리는 것에 경쟁이 붙었는데, 현장의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호랑이를 자신있게 이것은 이런 식으로 그린다면서 설명해 가면서 쓱싹쓱싹 그리는 것을 보고, 그의 그림 실력과 그 동안 열심히 연구했구나 라고 그 내공에 감탄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토에이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호랑이가 주요 빌런 캐릭터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1963년작 멍멍 츄신구라(わんわん忠臣蔵)이며유튜브, 코타베 요이치는 이 작품에는 원화맨으로 참여했다.

전후 일본은 가난했고 임금도 낮아서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1959년에 시도했던 제1차 노조결성에서 오오츠카는 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는데 회사가 압력으로 실패했고, 1961년에 결성된 토에이 동화 노동조합에서는 제1대 서기장을 맡았다. 참고로 제2대 서기장은 1963년에 입사한 미야자키 하야오였다. 노동 운동가이기도 하며 애니메이터에 대한 대우가 안 좋았던 토에이 동화의 대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노동조합용의 사내 신문의 편집일도 하고 일러스트도 그렸다고. 밤 2시까지 1장짜리 등사판 신문을 만들어서 그 날 아침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1965년에 토에이 노동조합이 주도하게 되는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의 작화감독으로 발탁되자, 타카하타 이사오를 연출직으로 추천해서 그가 첫 극장 연출작을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장면 설계를, 코다베 요이치에게는 캐릭터를 맡겼다. 코다베 요이치가 말하기를 그는 자신의 팀원이라서 같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마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적합한 사람을 불러 와서는 적재적소에 기용하고 조직을 이끄는 리더였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는 흥행에 참패했고 작화감독이었던 오오츠카 야스오는 받기로 했던 작화감독의 수당이 절반으로 깍이는 등 푸대접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루팡 3세(1971)를 애니메이션화 하고 싶어하는 도쿄 무비의 후지오카 유타카 사장의 스카웃으로 1968년에 도쿄 무비 산하의 A 프로덕션으로 옮겼다.

루팡 3세는 실제작에 들어가는데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무민에 작화감독을 맡으면서 참가했다. 이윽고 토에이 노조분규 사태가 발생했고 노조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노조 간부였던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코타베 요이치 3총사는 후지오카 유타카와 오오츠카 야스오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여 1971년 6월에 그가 일하고 있던 A 프로덕션으로 이적해 온다.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A 프로덕션(신에이 동화)에서 루팡 3세(애니메이션 1기)(1971), 닛폰 애니메이션에서 미래소년 코난(1978),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1979)에서 작화감독을 맡았고, 그 외 많은 작품에서 함께 일했다. 미래소년 코난은 미야자키가 그를 작화감독으로 지명해서 원하자, 신에이 동화에서 임원직이었고 주변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도 물리치고 같이 일하면 몸이 힘들 것을 알아서 싫은데도 닛폰 애니메이션사로 파견을 가서 도와준 것이다. 두 사람은 총기류, 군용차, 군용기, 탱크 등 군병기를 좋아하는 밀덕이기도 했고, 외제차를 좋아하는 취미가 통하기도 해서 사이가 좋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토미자와 노부오가 말하길,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실질적인 프로듀서는 오오츠카 씨로, 자신의 급여도 오오츠카씨가 미래소년 코난에서는 원화맨으로 얼마 받았냐고 물어서 18만 엔이라고 대답하니까, 자, 20만 엔 준다고 새로운 회사로 이적했으니까 월급이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며 월급 액수 책정을 오오츠카가 했다고 한다. [5] 그리고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감독을 미야자키 하야오가 맡게 된 것도, 오오츠카가 사장인 후지오카 유타카에게 말해서 결정되었다고 한다. 루팡 3세 극장판 1기가 개봉해서 상영중인데, 2기는 오오츠카 야스오가 감독을 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인데, 오오츠카 씨가 머리를 감싸고 뭘 만들까라고 고민하고 있는데 1979년 5월 쯤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홀연히 나타나서 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탓에 타카하타 이사오 연출의 제작중이던 빨강머리 앤의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주요 스태프를 빼가서 이후의 제작에서 개고생을 했다고 한다.

타카하타 이사오와도 그가 감독한 극장판 쟈린코 치에(1981)의 작화감독을 하는 등 좋은 관계였다. 타카하타가 말하길 입사해서 처음으로 배속받은 작화반이 오오츠카 야스오가 이끄는 팀이었고, 애니메이션의 기초부터 가르쳐주었다. 타카하타가 호기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봐도 귀찮아하고 싫은 내색도 없이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1979년에 도쿄 무비의 새로 생긴 자회사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으로 이적해서 리틀 네모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텔레콤에는 기술고문으로 남았고 이후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텔레콤으로 가게 된 이유는 신입 사원의 교육을 츠키오카 사다오가 했는데 교육을 이상하게 해 놔서, 직원 교육이 잘 안되고 있다고 후지오카 유타카 사장이 와 달라고 부탁해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가보니까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엉망진창 무정부 상태였다. 후일담은 텔레콤 문서 참고.

토모나가 카즈히데는 오오프로에서 미래소년 코난에서 하청 원화로 참가하고, 오오츠카씨가 오오프로의 사장이랑 친해서 가끔씩 놀러와서 이 사람이 오오츠카 씨인가?라고 존경의 눈으로 바라봤고, 이윽고 오오츠카가 텔레콤의 신입사원의 교육 때문에 골치라서 도와 달라고 불러서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으로 이적해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오오츠카와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가까운 책상에서 일하게 됐는데, 전설적인 그들의 실력과 (하루종일) 일하는 것을 보고, "엄청난 곳에 와 버렸다. 여긴 올 데가 아니었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은 자동차도 제대로 못 그리고 끙끙거리고 있으면[6], 뒤에서 미야자키가 오오츠카 씨의 수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큰 소리로 따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고. 그리고 그도 명탐정 홈즈에서는 그려도 그려도 끝이 없는 원화를 그리면서 실컷 고생했다. 오오츠카는 성격이 꽤나 싹싹한 사람으로 손에 콜라병을 들고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마실래 하면서 한 잔씩 따라주었다고 한다.

40대부터는 허리도 아프고 몸이 많이 상해서 현역에서 은퇴 후에는 주로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과 미래소년 코난(1978)에서 작화감독을 할 때는 진짜로 힘들어서 문자 그대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렇게 무리 안 하고 스트레스 안 받는 성격을 장수비결로 꼽기도 했다.

1985년에 스튜디오 지브리가 발족했을 때는 스즈키 토시오가 집으로 찾아와서 지브리에서 함께 일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타카하타하고 미야자키하고 함께 일하면 몸이 힘드니까 싫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은퇴해서 몸도 맘도 편하게 살고 싶었다고 한다. 지브리에서는 초청 강사로 가서 신입 사원 교육을 한 적이 있다.

그 밖에 여러 애니메이션 회사에 가서 수업을 했다. 프랑스에 가서도 가르친 적도 있다.

1991년부터 도쿄 요요기역 부근에 있는 요요기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강사로 일을 했다. 2001년에는 애니메이터 육성 프로그램 '아니메쥬쿠(アニメ塾)'의 숙장으로 취임.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 공을 인정받아 2002년 일본 문화청 장관상을 받았다. 감독이 아닌 작화 애니메이터가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자 이례적이었다.[7] 그만큼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인물이다. 2005년부터는 후생성 주최의 기능오륜전국대회(통칭 기능 올림픽)의 심사위원도 맡았다.

그 후 여생을 보내다 2021년 3월 15일에 노환으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 제자 중 사다모토 요시유키, 이타가키 신,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등이 추모글을 올렸다. 그 밖에도 관계자와 팬들이 추모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 이 중에는 프로모델 회사 타미야도 있다.

3. 특징

못 그리는 것이 없다. 그리는 걸로는 제자인 미야자키 하야오도 못 따라간다고 혀를 내두른 인물이다. 코가와 토모노리는 애니 업계에서 자신보다 잘 그리는 건 스다 마사미와 오오츠카 야스오 밖에 없다고 했고 오오하시 마나부도 오오츠카 야스오 씨는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인정했다. 예로 루팡 3세에서 미야자키도 디자인이 복잡해서 못 그린다는 벤츠 SSK를 가지고 놀았다. 루팡 3세 1화가 전설적인 작화로 유명하다. 토에이에서 일하던 초창기 시절에는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수준의 작화를 소화했다. 그 어떤 선 많고 복잡한 디자인의 물체를 움직여도 절대 작붕이 없다. 특히 자동차 작화는 미즈무라 요시오, 무라타 토시하루와 함께 일본 최고급이었다. 이 정도의 천재는 일본 애니메이터 역사에도 보기 드물다.

'애니메이션은 움직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니면 일러스트나 만화를 그리지 왜 애니메이션을 만드냐'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원화와 동화를 매우 많이 쓴다. 예쁘고 공들여 그린 그림을 좋아해서 말년에 체력 부족으로 연출을 하기는 했으나 연출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연출 실력도 매우 뛰어나다. '늑대소년 켄' 같은 여러 작품에서 콘티를 그렸고[8] 루팡 3세 1기 때 콘티 수정을 하기도 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콘티 담당은 크레딧을 안하는 경우가 많아 논 크레딧 처리 된 경우가 많다. 인터뷰나 비화를 보면 연출 실력을 주변에서도 인정해서 감독을 여러 차례 시키려고 했으나 오오츠카 야스오 자신이 연출하기 싫다고 그만뒀다는 사례가 많으며[9] 그래서 제대로된 장편 연출을 볼 수 있는 작품은 루팡 3세 풍마일족의 음모, 리틀 네모 정도이다. 연출할 때는 본인이 성격이 좋은 점도 있고 토에이 방식으로 연출을 배워서 애니메이터들이 그리고 싶다는 장면을 일단 다 넣어주는 식이라 연출력 자체는 뛰어나나 장면 연결이 좀 어색하고 산만한 느낌이 든다는 단점도 있다. 오오츠카의 지인 평론가 카노 세이지 말로는 "오오츠카의 연출은 대부분 롱 테이크. 화면 전환이 별로 없고 한 컷을 길게 잡고 쭉 이어버린다.", "물체는 자유분방하게 움직이지만 카메라는 고정되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가 특징이라고 한다.

반면 작품 활동은 매우 적은데 본인이 한 작품에 엄청난 원화와 작화수정을 해내며 작품 질을 올리는 장인 스타일의 일을 했다. 그리고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안 되는 걸 계속 붙잡아도 어쩔 수 없다."라는 것이 지론으로 일이 잘 안 되면 갑자기 연락을 끊고 여행을 떠나버리는 경우가 있어 미야자키도 난처해했다고 한다. 오오츠카 야스오의 말로는 루팡 3세 1기 때 일본에서는 거의 없는 외체차가 부서지는 장면을 그리기 위해 자료집을 찾아 봐도 그 엔진구조가 없자, 앞 뚜껑을 직접 열고 엔진 구조를 관찰하려고 미국으로 훌쩍 떠난 적이 있다고 한다. 결코 도망 간 것이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 알고보면 미야자키와 같이 일하면 몸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친 것이 맞다.

미래소년 코난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오오츠카 야스오를 작화감독으로 하는 조건으로 감독직을 수락한 작품이었는데, 오오츠카 야스오는 다른 작품을 하고 있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는데, 미야자키가 작화감독으로 같이 일하자고 요청해서 속으로는 싫은데도 승락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너무 부지런해서 아침 9시부터 다음날 밤 3시 넘어서 일하고, 오오츠카 야스오가 새벽 3시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옆에 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 집을 갈려구?"라고 물어보고, 이것을 휴일도 없이 일주일 내내 해야 해서. 몸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작 도중에 몸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듯 훌쩍 여행을 떠난 적도 있다고 한다.

미래소년 코난은 주 1회 방송하는 TVA라서 스케줄적으로 대단히 힘들었고, 일주일에 한 편씩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오츠카는 원화맨이 그려온 원화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사용하자고 마음 먹었고, 대신 못 그린 원화가 들통나지 않도록 화면을 이동하거나 흔들리는 식으로 연출을 했다고 한다.

원화나 동화 그리는 것을 옆에서 자주 도와줘서 논크레딧으로 참여한 작품이 많다. 대부분 작화집에서 밝혀졌고 그마저도 적어서 위의 작품 활동이 적었던 점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많은 애니메이터가 그를 존경하지만 그의 작화를 따라 그리거나 오오츠카 야스오를 모델로 공부하는 시도는 하지 말라고 공통된 조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 잘 그려서 도저히 따라할 수 없고 절망해서 그만두게 된다고 한다. 다만 그의 저서는 애니메이터로서의 기본 자세에 대한 조언이나 현실 관찰에 대한 조언이 잘 서술되어 있어 추천을 많이 받는다.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어 강사 생활을 하면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 토에이에 재직할 때인 1963년엔 신입 사원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도 담당으로 애니메이션 기술을 가르쳤다. 미야자키는 "그림을 움직이는 재미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라고 평했다. 콘도 요시후미도 그가 부업으로 강사로 일했던 학원생 출신이었고,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서 일할 때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사다모토 요시유키는 그가 인정한 수제자 중 한 명이다. 이후 제자인 사다모토가 소속한 가이낙스가 제작중이던 왕립우주군에는 미야자키와 함께 몇 번이나 찾아가서 격려하고 동화 기술을 지도하기도 했다. 스기이 기사부로도 제자 격이었는데 오히려 그의 재능에 절망하고 연출가로 전향했다. 훗날 오오츠카 야스오는 소식을 듣곤 "그놈 재능있었는데" 하고 아쉬워 했다고 한다.

타카하타 이사오도 인정하기를,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다르게 그는 가르치는 일을 잘한다는 말을 했다. 실력이 없어 못해도 누구처럼 왜 이리 못 그렸냐고 울컥 화를 내는 법도 없고 차분하게 잘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오오츠카와 미야자키를 근거리에서 지켜본 토모나가 카즈히데는 미야자키가 얼굴 표정이 이게 뭐냐, 폼이 이게 뭐냐고 막 따지면서 이거 안되겠네 콘쨩(콘도 요시후미)한테 시켜야지 하면서 투정을 부리면 오오츠카는 화가 날 만도 한데 성격이 워낙 좋아서 느긋하게 미야자키가 요구한 사항을 다 들어주었다고 한다. 훗날 다큐멘터리 영화 인터뷰에서 오오츠카는 말하길, 애니메이터에게 필요한 것은 재능보다 공동작업을 할 수 있는 사회성이 더 중요하다고 말을 하기도 했다. 혼자서 독불장군식으로 튀면 애니메이터는 하기 힘들다고도 말을 했다. 그리고 토모나가가 말하기는 작화감독은 사람을 보고 판단해서 원화를 맡기는데 일의 분배도 잘하고, 신인 원화가의 실력을 키우는 일도 잘했다고 한다.

4. 일화

어릴 적 증기 기관차를 보고 감명을 받고, 스케치하는 것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였다.
소년 시절부터 증기 기차, 자동차, 군용차 등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이런 차들을 그린 스케치들을 모은 어릴 적 화집의 그림들을 <오오츠카 야스오 16세의 차 화첩>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취미는 군용차갑옷 프라모델 수집. 특히 지프차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덕력으로 유명하다. 지프의 프라모델은 직접 프라모델 디자인을 한 적도 있고, 일본에서 만든 것은 거의 다 구비할 정도로 유명하다. 카타부치 스나오가 말하기는 오오츠카 씨가 자신이 타고 다니는 지프 차 뒤에 기관총 모델을 설치하고 싶다고, 미국에 가는 길에 그것을 구입해서 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진짜 총이 아니라 알루미늄으로 된 모델건이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싶어서 못하겠다고 했는데, 그러자 그 모델건을 수입하겠다고 업자에게 전화로 연락을 했다고 한다.

토에이 동화에서 함께 일하던 때에 츠키오카 사다오가 독신 시절의 오오츠카의 집에 놀러갔는데 방에는 온갖 무기, 전차, 자동차 등의 각종 카탈로그가 벽장을 열면 쏟아질 정도로 가득했다고 한다.

수집광 콜렉터적인 면이 있어서 토미자와 노부오가 말하기를, 미래소년 코난을 만들 때는 전자계산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의 책상 서랍을 여니까, 전자계산기가 열 몇 개가 있었다고 하더라. 워드프로세서도 발매 초기부터 구입해서 사용했고, 새로운 문물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 얼리 어답터 였다.

토에이 동화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애니메이션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은데, 이론서라고 있는 거라고는 미국 영어 원서밖에 없는데 비싸서 사지 못하니까 도서관에서 빌려서 책 한 권을 전체를 복사 수준으로 그림까지 똑같이 그려서 책 한 권을 만들어낼 정도로 학구열이 강했다고 한다.유튜브 그리고 토에이 동화의 연출가가 미국에서 사 온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전문 서적. 아직 일본의 시중에 번역 출판된 적이 없는 것을 혼자서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 책을 모사하고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애니메이터 모두한테 나눠주고 보여줬다고 한다. 야마모토 니조가 말하길 영어를 잘 했다고 한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에서 호루스가 거대 물고기랑 격투하는 장면의 원화를 담당했을 때는 살아있는 메기를 사서 집에 가져와서 그 움직임을 관찰해서 그렸다고 한다.

루팡 3세 시리즈가 자동차를 세밀하게 그리는 것도 그의 취향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프라모델 군용차 시리즈의 디자이너를 하려고 애니메이터라는 직업을 잠시 쉰 적도 있다. 1968년에 토에이 동화에서 A 프로덕션(훗날 신에이 동화)으로 이직을 한 것도, 루팡 3세를 애니화하고 싶다는 도쿄무비의 후지오카 유타카 사장의 스카웃 제의에, 평소 좋아하는 자동차와 총기류를 애니메이션으로 제대로 그려보고 싶어서 직장을 옮겼다고 한다.(작화감독을 맡은 호루스의 대모험이 토에이 애니메이션 역사상 기록적으로 폭망해서 토에이에 계속 일하는 것이 눈치가 보였던 이유도 있지만, 그리고 훗날 그가 밝히기로 작화감독직으로 받기로 한 수당을 토에이 동화가 절반으로 깍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루팡 3세 특유의 과격한 운전 연출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대부분 자신이나 지인의 운전을 통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했다. 루팡 3세가 운전하다 실제로 타이어가 빠지는 연출은 실제로도 운전하다가 타이어가 빠졌던 적이 있어서 그 경험에서 나왔다고 한다. 과장한 연출이 아니고 타이어가 빠지면 진짜로 고무공을 던진 것처럼 통통 튀어다닌다고 한다.

루팡 3세 1기 TV 시리즈의 미야자키 작업분과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 나오는 루팡 일당이 타는 차 피아트 5001기 제작 당시인 1971년에 오오츠카 야스오가 평소에 타던 차이고, 클라리스가 자동차 체이스에서 탈출할 때 탔던 차 시트로엥 2CV(초기모델 AZ)는 미야자키가 타던 애차였다.

루팡 3세 시리즈에 특히 애정이 강한데 최근 작품에 대해선 너무 내가 만든 1기 시리즈를 의식하고 있다.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2000년대 이후의 애니메이션은 움직임 묘사가 너무 떨어진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니시자키 요시노부우주전함 야마토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공들인 인물이기도 하다. 복잡한 디자인의 야마토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실력파였기 때문이다. 몇 번을 찾아왔는데 '전함이 하늘을 나는 건 말이 안된다'라고 딱 잘라 거절하고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니시자키가 손을 잡고 사정사정하면서 얼마면 되냐고 돈으로 금액협상을 했다고 하는데 굉장히 불쾌했으며 그의 손과 눈은 마치 도롱뇽 같았다고 회고했다. 참고로 니시자키 요시노부가 오오츠카 야스오 대신 영입한 인물이 아시다 토요오토모나가 카즈히데이다.

뒷담화의 달인 지브리의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지브리의 땀투성이라는 본인이 호스트로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오오츠카 야스오를 초대해서 미야자키 하야오타카하타 이사오를 신입 사원 시절인 20대 초반부터 근접거리에서 지켜 본 경험담을 들려줬는데, 일본어 청취가 가능하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흥미가 있다면 정말 재미있는 방송이다. 오오츠카 야스오가 말솜씨가 좋아서 시종일관 유머를 가미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열정적으로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막 쏟아 내면, 타카하타 이사오는 조용히 다 듣고 나서 "그건 아닌 것 같은데?"라고 한 마디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흥분해서 "그럼 선배가 아이디어 내 보라"고 막 화를 냈다고 한다. 다만 사적으로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타카하타 이사오를 진짜 존경하는 선배로 여겨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10] 후일담 방송을 듣다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라는 개성이 강하고 날카로운 성격의 두 인물을 중간에서 중재역할을 한 사람이 온화하고 태평스런 성격의 오오츠카 야스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래소년 코난 1화에서 히로인인 라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게 불렀기에 오오츠카가 그린 라나는 '부스라나'(못생긴 라나)로 불린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에 있을 때 오쿠야마 레이코가 패션 센스가 매우 좋고 매일 입는 옷 조합이 바뀐다는 걸 깨닫고 패션 센스 연구차 매일 쫓아다니며 옷 스케치를 그렸다고 한다. 오쿠야마는 처음엔 무슨 스토킹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예술가로서의 심정을 이해하고 평소에 잘해주는 분이라 허락했다고. 그러다가 1달 뒤 오쿠야마는 매일 새옷을 사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옷을 조합을 잘해서 입는 것이었단 걸 깨닫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 노트는 지금도 남아있으며 오오츠카 야스오의 저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츠노다 코이치는 이런 짓을 하는 오오츠카 야스오를 보고 "저래야 그림 실력이 늘어나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똑같이 오쿠야마를 따라다니며 [11]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오쿠야마 레이코를 모델로 만든 드라마 나츠조라에도 나오며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 시모야마는 오오츠카 야스오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한다.

토미노 요시유키는 자서전 "그래서 나는..." 에서 "오오츠카 야스오 씨가 토에이에 비밀로 철완 아톰의 작화를 해준 것을 보고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동화를 안 넣고 원화만 넣어놨는데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무시 프로덕션에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난 애니메이션은 재밌다고 느꼈다. 오오츠카 야스오는 천재다. 애니메이션에 반한 사람이다." 라고 했다. # #토미노가 말한 오오츠카 야스오가 그린 장면.

오오츠카 야스오의 제자들은 무시 프로덕션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오츠카는 특별히 무시 프로덕션 출신 애니메이터나 연출가를 차별한 적이 없다. 데자키 오사무요시카와 소지를 칭찬하기도 했고 토에이 애니메이션 소속이면서 몰래 아르바이트로 무시 프로덕션 일을 봐주기도 했다. [12] 다만 "무시 프로덕션 애들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이 적어." 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나다 생각하는 인물로 츠키오카 사다오, 미야자키 하야오, 사다모토 요시유키 3명을 거론했다. #

5. 대표작

오오츠카 야스오 작화 작화보루 제공

6. 제자 및 인맥

6.1. 제자

6.2. 인맥

6.3. 영향을 받은 인물

7. 작화 샘플

작화 모음
W3 OP (0:00 ~ 1:00)
작화 오오츠카 야스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연출 타카하타 이사오 / 작화감독 오오츠카 야스오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연출 미야자키 하야오 / 작화감독 오오츠카 야스오 [24]

8. 기타

일본 팬 페이지 오오츠카 야스오 씨의 세계

참가 작품 리스트

관련 영상 - 大塚康生の動かす喜び(2002年)1시간 43분

작화보루에 업로드된 참가컷들.

2015년에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타이틀은 <ドキュメンタリー『飄々~拝啓、大塚康生様~』/Hyohyo -Dear Mr.Yasuo Otsuka->


[1] 실제로 오오츠카 본인이나 제자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데즈카 오사무를 두고 그런 것도 애니메이션이라고 만드냐고 욕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2] 당시 이런 식의 강제 징용은 흔했고, 중고등학생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까지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강제 노동은 일본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추리소설가였던 야마무라 미사는 일제 강점기 때 한국의 서울에 살았는데 그녀도 어린 나이에 징용을 당해 노동을 해야했다.[3] 오오츠카 야스오에게 배운 미야자키 하야오도 총기 묘사가 절묘하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무스카가 권총을 쏠때 반동을 표현한 것을 보면 실제로 권총으로 몇 백발은 쏜 사람이 그린 것 같아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4] 이 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이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널리 쓰이지 않았다. 이 용어는 60년대 중후반~70년대나 되어서나 나왔다.[5] 1979년도에 20만 엔이면 당시의 일본 물가를 고려하면 엄청난 고액이다. 참고로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은 이 때 정직원 사원제였다.[6] 실상은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카 체이스씬은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평도 받았다. 그리고 자동차 씬에서 못 그리고 어려울 때는 오오츠카가 여긴 이렇게 그리면 된다고, 포인트 포인트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 콘티가 워낙 세밀하게 잘 되어 있어서 그 콘티를 원화로 그려내는 것이 어려운 지상 과제였다고 한다. 운전하는 장면에서도 오오츠카가 나중에 수정을 하면 자동차의 중력감이 표현되고 전반적으로 리얼리티가 살아나서 역시나 라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7] 원래는 감독 명의로 상을 주려고 했는데, 나는 애니메이터지 영화 감독이 아니라고 상을 거부해서, 다시 애니메이터로 상을 받았다는 에피소드가 있다.[8] 타카하타 이사오가 콘티를 못 그리니 대신 그려달라고 해줘서 해줬다고 한다. 다만 어딘지는 불명이다.[9]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 그런 경우.[10] 명탐정 홈즈의 5화 '푸른 홍옥'편의 마지막 씬도 파쿠상(타카하타 이사오 선배)는 카메라 이동을 이렇게 했을 것이라면서 그런데 미야자키 자신이 그 반대로 이렇게 해도 될까라고 한참을 고민했다는 증언이 있다.[11] 오쿠야마와 츠노다는 원래부터 서로 친했다고 한다.[12] 당시 데즈카 오사무는 회사에 애니메이터가 부족해서 토에이엔 비밀로 해주고 돈을 많이 줄 테니 일을 해달라며 토에이의 애니메이터를 몰래 끌어왔었다.[13] 무시 프로덕션 애니메이터의 차를 운전하다가 폐차를 해서 미안해서 대신 그려줬다고 한다. 자세한 건 우주의 세 용사 항목 참조.[14] 오오츠카는 이 사실을 밝히며 "사람들이 3000장으로 용케 그런 부드러운 작화를 하셨군요 하고 칭찬하던데 그야 그렇겠지 6000장이니까 (웃음)"이라고 하였다.[15] 2화까지는 오오츠카 야스오가 라나도 그렸다. 미야자키 말로는 라나가 정말 예쁘게 나와야 코난이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하는 개연성이 생기는 것인데 오오츠카 야스오와 다른 애니메이터가 그린 라나가 별로 예쁘지 않아서 화가 났고 자신이 직접 그리기로 했다고 한다. 코난 팬 사이에서도 오오츠카 야스오가 그린 라나는 부스라나(못생긴 라나)라고 불린다.[16] 극초반 절에서 일꾼으로 생활하는 제니가타 경부의 작화를 맡긴 했는데 본편에선 편집되어서 예고편에만 나온다.[17] 72화는 원화로 크레딧 되어있으나 작화감독이라고 한다. 신인들에게 작화를 시켜봤는데 생각보다 못 그려서 자신이 밤새워 직접 작화 수정했다고 한다.#[18] 논크레딧[19] 이미 현장을 떠나 교육자에 전념하는 시기였고, 새로 참가했으면 풍마일족이 마지막이라는 오오츠카의 증언과도 맞지 않는다. 토모나가 카즈히데도 오오츠카가 콘티를 한 건 옛날이라고 하였다.[20] 형이 경찰이었으며 마약 수사 시절의 오오츠카 야스오와 지인이었다고 한다.[21] 오오츠카는 그의 애니메이터 재능을 신인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급으로 평가했다.[22] 오오츠카 야스오는 요시카와 소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데자키 오사무와 같은 급의 천재라고 평을 했다.[23] 오오츠카는 평소 성격도 붙임성이 있었고 영어를 못 해도 바디랭귀지와 그림으로도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하고 미국에 갔을 때도 여러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리틀 네모에 참가했던 미국 스태프는 대부분 오오츠카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24] 미야자키가 여자 캐릭터만 자신과 시노하라 마사코가 그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