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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06:02:50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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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줄거리3. 제작 과정4. 한국에서 방영5. 기타

1. 개요


太陽の王子 ホルスの大冒険

일본 타카하타 이사오 연출의 장편 애니메이션. 1968년 개봉작.

아이누족의 전설을 모티브로 해 씌여진 후쿠자와 카즈오의 인형극 "치키사니의 태양"을 각색한 작품이다.

오키쿠루미라는 이름의 아이누의 영웅신과 악마의 대결을 그린 내용이다. 치키사니는 그 악마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오빠의 명령으로 아이누의 마을에 스파이로 침입해서 살게 된다. 그러면서 마을의 생활에서 힐링하면서 오빠의 명령에 갈등하고 고민을 한다. 그러다 악마인 오빠가 오키쿠루미에게 쏜 화살을 대신 맞고 죽는다. 이후, 아이누의 주민과 오키쿠루미는 힘을 합쳐 악마를 물리친다.

2. 줄거리

악마 그룬왈드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북의 세계. 호루스의 아버지는 아들을 그룬왈드로부터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떼어놓는다. 성장한 호루스는 바위거인 모그를 만나고 모그의 등에 박힌 태양의 검을 뽑는다. 모그는 호루스에게 태양의 검을 다시 단련하여 새벽에 그것을 가지게 되면 태양의 왕자가 될 것이며 자신 역시 태양의 왕자에게 경배할 것이라 말한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호루스는 아버지에게 찾아가고, 아버지는 호루스를 다른 인간들에게서 떼어놓은 것을 후회하며 호루스에게 다른 인간들을 찾아가라고 유언하고 숨을 거둔다.[1] 천신만고 끝에 다른 인간들이 사는 땅에 도착한 호루스였지만 그룬왈드의 부하에게 붙잡혀 그룬왈드 앞에 끌려간다. 그룬왈드는 호루스에게 자신의 동생이 될라고 유혹하지만 호루스는 이를 거절하고 벼랑에서 밀쳐진다.

그러나 벼랑에서 밀쳐진 호루스는 태양의 검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고 그룬왈드의 부하가 다스리는 마을에 이르게 된다. 그룬왈드의 부하를 물리친 호루스는 마을 주민들의 영웅이 되지만 촌장과 드라고의 질투를 사게된다. 그룬왈드는 호루스가 자신의 부하를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늑대들을 마을로 보내지만 호루스의 지휘로 일치단결한 마을 주민들의 저항으로 늑대들은 대부분 죽고 도망친다.

호루스는 늑대들을 뒤쫓다가 폐허가 된 마을에서 힐다를 만난다. 힐다는 그룬왈드의 여동생으로 그룬왈드로 인해서 마음속에 갈등을 겪고 있었다. 호루스는 힐다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간다. 그러나 힐다는 그룬왈드의 부하 토토의 꼬드김으로 악마성이 강해져 호루스를 미혹의 숲으로 유혹해 숲으로 밀어버린다. 미혹의 숲에서 호루스는 갖가지 환상으로 고통을 받지만 그룬왈드를 쓰러뜨릴 방법 또한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마을 주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그룬왈드를 물리칠수 있음을 알게 된것이다. 또한 그룬왈드와 인간 사이에서 갈등하는 힐다의 갈등도 알게되어 힐다의 마음속에 있던 악마성을 물리치고 인간성을 되찾게 해준다.

호루스가 돌아와보니 마을은 그룬왈드의 마법으로 눈보라에 위기를 맞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힘을 합쳐 피운 불에 호루스는 태양의 검을 새롭게 단련하고 태양의 왕자가 된다. 바위거인 모그까지 달려와 호루스에게 힘을 보태고 호루스는 태양의 검으로 그룬왈드를 물리치게 된다.

3. 제작 과정


1965년, 오오츠카는 회사로부터 다음의 장편의 작화감독을 맡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연출에 타카하타 이사오를 추천하고 .
오오츠카 이사오 : 모두가 함께 만든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무언가를 만들 때는 누군가 리더가 필요하고, 그 리더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저는 타카하타상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사람이 아니면 큰일을 못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당시의 토에이는 조합활동이 활발한 시대로, 그 활동을 통해 , 그들은 빈번하게 인생관이나 사회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세상에 대한 생각을 반영하여, 이 영화는 마을을 멸망시키려는 악마에 대해, 소년 호루스와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싸운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오오츠카는 완성작을 보고 분해서 울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생애 처음으로 맡은 작화감독인데, 타카하타의 시나리오의 내용과 사상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가 없어서 중간에 떨어져나가는 모양새로 오오츠카를 대신해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구성에 참가하게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쓰디 쓴 경험이었다고. 그리고 그 미야자키 하야오 조차도 실은 힐다라는 소녀의 심리묘사에 대해 전혀 이해를 못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오오츠카상의 기분을 이해합니다. 즉, (타카하타상은) 우리들이 상상도 못했던 것을 하려고 했고, 거기에 따라간 사람은 모리 야스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카하타 이사오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거죠. 그것을 저는 깨닫지 못한거죠. 오오츠카상도 저도 그런 점에서 타카하타상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 뿐만 아니라, 스탭들 전원이.
힐다라는 인물에 대해서 타카하타상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 애니메이션이 표현하는 영역을 넓혔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처음으로 먼저 작화감독으로 오오츠카 야스오가 정해지고, 그가 타카하타 이사오(당시 27세)를 연출로 추천해서 타카하타가 첫 극장용 영화 연출을 맡게 되었다. 당시의 토에이 동화는 그림을 그릴 줄아는 작화감독의 권한이 훨씬 크고, 연출은 그 아래였다. 작화감독이 전권을 쥐고 연출은 그 보조를 하면서 작업을 돕는 구조였다. 그래서 먼저 작화감독이 정해지고 연출을 작화감독이 정하고는 했다. 막상 타카하타 이사오를 영화 연출로 추천하자 그는 느리다고 주변에서 반대하는 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부터 "나마케모노(나무늘보)"로 유명했다. 그래서 입사 3년차인 신인인 미야자키 하야오를 연출 보조로 끼워넣었더니 미야자키 하야오가 깜짝 놀랄 정도로 일을 많이 하고 잘 해서 아이디어를 팡팡 내고 설정 그림을 마구마구 그려냈다.

작화에는 모리 야스지, 미야자키 하야오, 코타베 요이치, 오쿠야마 레이코 등이 참가했다.

토에이 동화 노조가 격렬한 노조 투쟁을 하는 와중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토에이 직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든 작품이다. 토에이 동화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오리지널 스토리의 장편 만화영화'는 만들지 않고, 인기 만화원작이나 TV용 작품을 위주로 만들 작정이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원들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만드는 작품은 우리 노동조합이 주도해서 많은 예산을 투여해서라도 제대로 된 좋은 작품을 만들자. 그렇다면 관객도 알아보고 흥행에도 성공할 것이라고 만든 일종의 실험작이었다. 흥행에 성공했다면 계속 애니메이터가 주도하는 그들이 만들고 싶은 내용의 오리지널 장편 만화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터이지만, 결과는 흥행에 실패하고 노동조합의 노동쟁의 운동도 좌절되고 직원의 절반이 희망퇴직을 하게 되었다.

아이누를 모티브로 했다지만 작품의 배경은 북유럽적인 분위기로 스태프들마다 작품의 배경이 어디냐에 대한 대답이 다르다. 작화감독 오오츠카 야스오는 "고대의 유럽.아시아라고 해둡시다."라고 했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딘지 모르게 동유럽쪽"이라고 하기도. 후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정확한 배경을 알았다면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해서 스태프들도 이 작품의 배경이 어딘지 정확히는 몰랐던것 같다. 실은 일본 역사에서 차별 당하고 박해 받았던 소수 민족 아이누를 소재로 하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상부의 높으신 윗분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북유럽의 정체불명의 어느 나라라고 했다고 한다. [2] 다만 레프 아마타노프가 감독한 소련 애니메이션 눈의 여왕 영향을 크게 받기도 했다.

토에이 동화의 노조활동을 하던 애니메이터들이 스태프로 참여했기 때문에 작품의 제작과정도 스태프들의 합의를 통해 나온 아이디어들을 그때 그때 작품에 반영하는 식으로 제작되었다.당시 신인급에 불과했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많은 아이디어를 내서 메인 스태프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토에이 동화에서는 애니메이터들이 주도해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동화맨이라도 아이디어를 제출하고 그것이 모두가 좋다고 하면 채택이 되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제작과정에서 설정등이 자주 바뀌었고 각본도 결정판이라고 할만한게 없었다고. 원작자인 후쿠자와 카즈오가 쓴 제5판 각본이 최종적인 각본이 되긴 했지만 이것도 그림 콘티 작업을 거치면서 수정되었다.

하지만 합리적 제작방식을 요구하는 회사측과 해보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시도해보고 싶었던 스태프들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타카하타 이사오의 특성상 늦은 제작속도도 문제여서 이로 인해서 프로듀서가 몇 명이나 교체되는 우여곡절도 일어났다. 결국 생각한 대로 작품상의 표현이 시간의 한계와 제작비 초과 등의 사태로 이뤄지지 못하기도 했다. 후에 스태프들의 인터뷰에선 "시간과 예산이 더 많았더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들이 많이 토로되기도 한다.

결국 당초 8개월의 제작기간과 7천만엔의 제작비로 예정하고 만들기로 한 것이, 3년의 제작기간에 1억 3천만엔이라는 거액의 제작비가 초과되고 동화매수는 15만 장이나 되는 대작이 완성됐다.

1968년 토에이 만화 퍼레이드(후의 토에이 만화 축제)에 "울트라 세븐", "요술공주 샐리", "게게게의 키타로"와 함께 동시 상영되었다. 그러나 작품의 분위기나 주제가 토에이 만화 퍼레이드의 주 타깃층인 어린이들에게 너무 어려운 탓에 결국 흥행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호루스는 내용적으로 고등학생 이상이나 청년층과 어른이 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었지만, 토에이 동화는 언제나처럼 어린이 관객을 타켓으로만 홍보했다.

타카하타 이사오판타지 안에 현실 세계의 문제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아이들이 보는 판타지는 앞으로 이들이 겪어야 할 현실 세계를 간접 체험하는 이미지 트레이닝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영화는 1960년대 당시의 일본의 안보투쟁, 베트남 전쟁, 토에이 동화의 노조 운동의 메타포로, 집단이 일치단결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라는 화두가 담겨있었다. 함께 영화를 만든 노조원과 미야자키, 오오츠카조차도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영화는 웃음기를 쫘악 빼서 시종일관 유머는 없고 진지해서 어린이 관객들은 지루해하고 반응은 최악이었다.

훗날 오오스미 마사아키는 평하기를, 흥행이 안된 것은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주도해서 "노조 만세, 단결이 최고, 히어로는 필요없다. 집단을 단결시키는 인물이 영웅이다."라는 이야기가 뭐가 재미있겠냐고 신랄하게 깠다.

흥행 실패로 이 작품 제작진 대부분이 강등 처분을 받아야 하거나 아예 토에이 동화를 떠나야 했다. 예산과 시간을 초과한 제작팀에게 토에이 동화는 벌을 내리기라도 하듯 오오츠카 야스오가 훗날 말하길 작화감독직으로 받기로 했던 그의 수당을 반으로 깍아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 해 1968년에 다른 회사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여 A 프로덕션으로 이적했다. 연출을 맡은 타카하타 이사오는 회사에서 찬밥 신세가 되어서 TVA 연출 보조로 강등되었고 이윽고 노조의 노동운동의 여파로 토에이가 대거 인력 조정으로 직원을 내쫓는 시기인 1971년에 코타베 요이치, 미야자키 하야오를 이끌고 토에이 동화를 떠나 선배인 오오츠카 야스오가 먼저 가서 일하고 있던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 작품의 담당 프로듀서 4명 중의 한 명이었고 타카하타 이사오와는 입사동기였던 하라 토오루도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토에이를 퇴사해서 1972년에 애니메이션 제작사 톱크래프트 설립했고, 이 회사는 훗날 스튜디오 지브리로 재창업하게 된다.

이제 와서 보면, 토에이 동화는 훗날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게 되는 인재들을 내쫓은 셈인데, 호루스 제작팀(작화감독이었던 오오츠카 야스오미야자키 하야오)이 회사를 떠나기 전에 참가해서 만든 장화신은 고양이(1969)는 흥행적으로 대성공하고 후속편이 2편이나 만들어졌고, 주인공 캐릭터 고양이 '페로'는 토에이 동화의 마스코트가 된 것만 봐도 이들을 내쫓은 것은 실수였다고 보인다.

4. 한국에서 방영

한국에서는 1975년 TBC에서 토요 특별 만화영화로 더빙 방영했고 이후 명절특선으로 여러번 방영했다. 90년대 초반에 MBC에서 명절특선으로 더빙 방영했으며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 남녀주인공을 맡은 이미자, 박소현 두 성우가 여기서도 주역을 맡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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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금성마그네테크[3]에서 태양의 왕자라는 제목으로 1986년 비디오로 낸 바 있다. 여기서 주인공 호루스는 최수민이 맡았으며 그 밖에 성우진은 탁원제, 장정진 외.

5. 기타



[1] 훗날 미야자키 하야오가 연출한 미래소년 코난에서 할아버지가 죽으면서 사람들을 찾아가서 함께 살아라 라고 유언하고 숨을 거두고,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사람들을 찾아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대목이 유사하다.[2] 미야자키 하야오는 훗날 모노노케 히메에서 다시 한 번 아이누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3] 1987년 금성사로 합병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