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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9:54:53

동래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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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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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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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be673>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신라 6성{{{#!wiki style="margin: -1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70><tablebordercolor=#ecd8e9>
파일:동래 정씨 종문.svg
東萊 鄭氏
동래 정씨
}}}
<colbgcolor=#710048> 관향 부산광역시[1]
비조 지백호(智伯虎)
시조 정회문(鄭繪文)
중시조 정지원(鄭之遠)
집성촌 서울특별시 동작구·중랑구
대구광역시 달성군·군위군
울산광역시 울주군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경상북도 예천군·의성군
경상남도 거창군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강원도 이천군
인구 474,506명(2015년)
링크 동래정씨대종중

1. 역사2. 관련 설화3. 집성촌4. 분파5. 항렬6. 주요 인물
6.1. 전근대 인물6.2. 근현대 인물
6.2.1. 28세손6.2.2. 29세손6.2.3. 30세손6.2.4. 31세손6.2.5. 32세손6.2.6. 33세손6.2.7. 계보 불명

[clearfix]

1. 역사

동래 정씨는 본래 신라 6부의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이다. 『경신보』 총록에 따르면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 지백호가 정씨(鄭氏)로 사성(賜姓)되어 경주를 본관으로 하다가 뒤에 동래로 분적(分籍)되었다고 한다.

동래 정씨의 시조 정회문(鄭繪文)은 동래군의 향직 안일호장(安逸戶長)이었으나 문헌이 실전되어 연대와 자세한 사적 및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는 없다. 그래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동래군의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중시조 1세로, 본관을 동래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중시조 3세인 정목(鄭穆)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고, 정목(鄭穆)의 네 아들인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이 모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명족(名族)이 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 상신(相臣)[2] 17명, 대제학(大提學) 2명, 호당(湖堂)[3] 6명, 공신 4명, 판서 20여 명, 문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한 명문 가문이다.

특히 효종조에서 현종조까지 5차례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鄭太和)의 집안이 특히 현달하였다. 그의 4대조가 중종 시절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며, 정광필의 손자이자 그의 증조부인 정유길(鄭惟吉)은 좌의정을 지냈다. 조부 정창연(鄭昌衍)도 광해군과 인조 시절 좌의정을 지냈으며, 아버지 정광성(鄭廣成)은 형조 판서, 숙부 정광경(鄭廣敬)은 이조 참판, 동생 정치화(鄭致和)는 좌의정, 다른 동생 정만화(鄭萬和)는 예조 참판, 숙부 정광경의 아들인 사촌 동생 정지화(鄭知和)는 좌의정을 지냈다. 후손의 관운도 뛰어나 차남 정재숭(鄭載嵩)은 우의정, 5남 정재륜(鄭載崙)은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가서 효종의 딸 숙정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었다. 장남 정재대의 손자 정석오(鄭錫五)는 정재륜의 외아들 정효선(鄭孝先)이 후사없이 일찍 죽자 효선의 양아들로 후사를 이었으며 좌의정까지 올랐다. 더 상세한 사항은 동래 정씨(東萊鄭氏) 18세부터 27세까지의 동래세가(東萊世家) 27인의 간찰첩인 「선세필적(先世筆蹟)」에 수록된 인물 소개에 나와 있다.

2. 관련 설화

동래 정씨 2대조인 정문도의 묘는 현재 부산에 남아있는데 이 묘에는 풍수지리적인 전설이 있다.
고려 초에 풍수에 일가견이 있는 고익공[4]이라는 사람이 동래 지역 호장으로 내려왔다. 그는 화지산 풍수를 볼 때마다 “좋기는 하나……”라면서 뒷말을 잇지 못하였는데 정문도와 아들 정목은 그 이유를 묻지 못 했다. 그 후 고익공은 경상도 안찰사를 거쳐 개경으로 전출되었고 정문도가 세상을 뜨자 아들 정목은 고익공의 말이 생각나서 아버지 묘소를 화지산에 쓰도록 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묘소에 가보니 누군가 묘소를 파헤쳐 목관이 드러나 있었다. 다시 목관을 묻고 감시하는데 밤에 도깨비들이 나타나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목관을 묻느냐. 적어도 금관(金棺)을 묻어야지”라고 하면서 묘를 파헤치고 사라졌다. 이에 정목이 근심하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도깨비 눈에는 보릿짚이 금빛으로 보이니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면 다시는 묘를 파헤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서 날이 새자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서 묻었더니 이번에는 도깨비들이 “금관이야. 이제 됐다”라면서 사라졌다. 그 후로는 다시는 도깨비가 나타나 묘를 파헤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더니 황령산의 괴시암 바위가 산산조각으로 부셔졌다. 아버지의 묘소를 쓰고 난 후 정목은 개경에 있는 고익공을 찾아가 아버지를 화지산에 모셨다고 하자, 고익공이 깜짝 놀라면서 집에서 내쫓으려고 하였다. 이에 정목이 아버지의 묘를 쓰고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 고익공은 그제야 안도하면서 “그 바위는 묘를 지내면 후손에서 역적을 낳을 역적바위인데 이제 그것이 깨졌으니 화근이 사라졌다”[5]면서 정목을 거두어 관직에 출사하게 하고 자기 딸과 혼인시켰다고 한다.
실제로 고려 문종 대에 정목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네 아들 역시 모두 문과에 올랐다. 고려 초 풍수지리가 널리 퍼지고 동래 정씨가 관직에 대거 진출하기 시작해 조선 시대까지도 양반가였음을 나타내는 전설이다.[6]

이 묘는 현재에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1동 화지공원에 남아있다. 정묘사라는 이름으로 작은 야산에 묘지와 함께 사당이 조성되어 있다.

3. 집성촌

4. 분파

동래 정씨의 분파를 살펴보면, 크게는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첨사공파(詹事公派), 호장공파(戶長公派)로 나누어진다. 참고

5. 항렬

각파마다 항렬자가 다르며, 상대적으로 흔히 쓰이는 항렬자는 다음과 같다. 항렬자의 위치(이름자의 앞글자인지 뒷글자인지) 또한 뒤바뀌는 경우가 잦다.
#####
28세손○조(朝)규(圭)○
29세손인(寅)○진(鎭)○
30세손○모(謨)○운(雲)
31세손진(鎭)○○수(秀)
32세손○영(泳)○하(夏)
33세손상(相)○우(愚)○용(用)○
34세손○희(熙)○봉(鳳)○구(九)
35세손재(在)○○회(會)병(炳)○

6. 주요 인물

6.1. 전근대 인물

6.2. 근현대 인물

6.2.1. 28세손

6.2.2. 29세손

6.2.3. 30세손

6.2.4. 31세손

6.2.5. 32세손

6.2.6. 33세손

6.2.7. 계보 불명

요즘은 돌림자를 쓰면 작명에 한계가 생겨서 피하는 경우가 많고, 한글 이름이거나 본명은 따로 두고 족보에만 돌림자로 올리는 경우가 있으므로 불명으로 정리해둔다. 또한 여성의 경우, 대부분이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기 때문에 계보에 따른 돌림자를 신경쓰지 않는 점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1] 여기서 동래는 부산의 옛 지명으로, 현재의 동래구뿐만 아니라 현재의 부산광역시 전역(기장군, 강서구 제외)을 이르는 말이었다.[2]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3정승.[3] 조선 시대 문신 가운데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에게 휴가를 주어 오로지 학업을 닦게 하였던 서재이면서 관서이다. 독서당(讀書堂)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엘리트 양성 제도를 말함.[4] 혹은 고익호[5] 후에 역적으로 몰려 죽은 정여립이 동래 정씨 대호군파라는걸 생각하면...[6] 이 전설의 다른 버전도 있다. 도깨비들이 묘에 깽판친 것까지는 같으나 형편이 어려워 금관을 구하기 어렵던 정목이 동생과 의논하다 동생이 꾀를 내기를 "도깨비는 낮에 다른 물건으로 변하니 있는 곳을 추적해 물건인 상태일 때 없애버리자"라고 하였다. 정목은 도깨비들의 앙갚음이 두려웠지만 아버지의 무덤을 박살낸 도깨비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 여겨 동생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에 아버지를 다른 곳에 잠시 모시고 빈 관을 그 묫자리에 놔두고 동생과 함께 숨어있었다. 밤이 되자 다시 도깨비들이 나타나 깽판을 치기 시작했고, 그 사이 몰래 도깨비들 중 하나의 다리에 실을 묶었다.용케 안 들겼다. 그러곤 날이 밝자 연장을 챙겨 실을 따라갔더니 괴시암이라는 바위에 실이 묶여있었다. 이에 형제는 가져온 곡괭이 등으로 바위를 부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바위에 피가 나오고 천둥번개가 쳤다. 두려움을 느끼고 잠시 멈췄으나 이내 심기일전하여 다시 바위를 열심히 부수었다. 바위를 다 부순 이후 도깨비들은 나타나지 않았다한다. 터가 좋긴 하였는지 정목은 출세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였고, 상경하여 옛 상사인 고익공을 찾아갔다. 그 뒤의 얘기는 위 내용과 같다.[7] 산모양이 범의 모양을 닮아 범골마을로 불리며, 이 마을에서는 유명한 효자할아버지가 계셨다고 한다. 처사 동래 정공 휘(이름)윤현지묘 선망조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그 효심에 탄복해, 산에서 호랑이들이 내려와 등에 태우고 다녔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후손으로 동래정씨 가문을 빛낸 참후손들 중에는 한의사, 법관, 박사, 경제기업인 등 이 있다.[8] 과거 중랑구 양원리 동래 정씨 집성촌으로 알려졌으며, 서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집성촌이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양원보금자리 개발로 철거되면서 사라져버렸다. 참고로 서울 마포구 성산동 풀무골에도 있었으나, 월드컵경기장을 조성하면서 역시 사라졌다. 이곳은 원래 김자점이 살던 곳으로 우물골이라고도 불리웠으나, 반란 이후에 공이 있던 전주이씨와 동래정씨가 들어와서 살았었다.[9] 6.25 이전에는 동래정씨가 지역의 유지로 많이 살았으나 6.25때 인구가 많이 줄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0] 아버지가 31세손 항렬을 사용한다.[11] 아버지가 31세손 항렬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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