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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타 이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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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 맥케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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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타 이사오
高畑 勲 | たかはた いさお
파일:타카하타 감독.jpg
<colcolor=#fff><colbgcolor=#000> 출생 1935년 10월 29일
일본 제국 미에현 우지야마다시[1]
사망 2018년 4월 5일 (향년 82세)
일본 도쿄도 이타바시구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필명 다케모토 데츠(武元 哲)
학력 도쿄대학 문학부 (불문과 / 학사)
가족 아버지 타카하타 아사지로
3남 1녀 중 막내
소속 토에이 애니메이션
톱 크래프트
스튜디오 지브리 (1985 ~ 2018)
수훈 자수포장 (1998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2등급 오피시에 (2015년)
지지 정당 [2]

1. 개요2. 생애3. 연출 특징4. 관련 인물5. 기타6. 작품 목록7. 외부 링크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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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브리 스튜디오를 설립한 애니메이션 감독 중 한 명.

2. 생애

1935년 10월 29일 일본 미에현 우지야마다시(現 이세시) 에서 타카하타 아사지로(高畑浅次郎)의 자녀로 태어났다. 위로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가 있고 막내였다. 1943년에 부친이 오카야마현에 있는 한 중학교(현재의 고등학교에 해당한다)의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오카야마시로 이사했다.

국민학교 4학년생인 만 9살 때에 1945년 6월 29일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오카야마시미군의 무차별 폭탄 공습을 받았고, 바로 윗누나와 함께 도망치다가 가족과 헤어지고 하필이면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가버려서, 소이탄이 마구 쏟아져서 화재가 일어난 곳으로 들어가서 죽을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누나는 그 화재에서 부상을 당했고 오랫동안 화상의 상처가 남았다고 한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강둑에서 차가운 검은 비를 맞고 정신을 차리는 체험을 했는데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경험이었고 이후 인생에 강렬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날부터 이틀 동안 가족을 찾아서 방황했는데 어느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고 아무 것도 못 먹고 누가 고구마 쪼가리 하나 던져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런 체험을 했으니까 타카하타 이사오는 그런 (시니컬한) 성격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성격파탄자"라고도 말했다. [출처: 꿈과 광기의 왕국]

이후 대학에 진학해서 도쿄상경해 명문 도쿄대학 불문과를 전공하고 졸업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3형제 모두가 도쿄대를 졸업한 집안이었다. 대학 동기로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가 있다.

1955년에 일본에서 극장 개봉한 프랑스의 장편 애니메이션 왕과 새의 원형이 된 "사팔뜨기 폭군"(1952)을 보았는데,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가 각본을 쓴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쟈크 프레베르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엄청난 영향을 받고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사상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 놀랐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고 메모를 적고 영화속의 나오는 밀실의 평면도도 고찰해서 그렸다고 한다. 당시 1950년대의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몇 년 전까지는 귀축영미 적국이었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극장에서 차례차레 개봉해서, 연일 매진사태로 큰 인기였다. 그는 디즈니 와는 다른 노선의 프랑스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감명을 받았다.

그의 대학교 졸업 논문은 쟈크 프레베르의 작품 연구였고, 훗날 2004년에는 자크 프레베르의 명시집 《Paroles》을 처음으로 일본어로 완역했다. 장편으로 개작한 왕과 새(1980년작)의 자막 번역도 맡았다. 지브리의 붉은 돼지의 극중 삽입곡 체리가 익어갈 무렵(원곡은 프랑스의 Le Temps des cerises)의 일본어 가사 さくらんぼの実る頃♪ 번역도 해서 극장용 팜플렛에 실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1959년에 토에이 동화에 입사했다.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는 데도 입사가 가능한 것은 토에이가 연출조수를 공모해서 뽑은 제1기생이었고, 도쿄대 졸업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은 미천한 직업이라는 인식이라 회사에서는 "도쿄대학 졸업자가 애니메이션을 하러 왔다고?" 하고 크게 놀랐었다고 한다.[3] 입사동기로는 하늘을 나는 유령선동물 보물섬을 연출한 이케다 히로시(池田宏)와 프로듀서 출신으로 훗날 톱 크래프트를 설립하고 초창기 스튜디오 지브리의 실질적 CEO 역할을 한 하라 토오루와 애니메이터로는 코타베 요이치가 있다. 평생의 라이벌이자 절친인 미야자키 하야오1963년에 입사해서 4년 늦은 입사 후배였다.

입사 당시 토에이 동화에는 여러 작화반이 있었고, 어쩌다 오오츠카 야스오반에 배속이 되었고, 호기심이 넘쳐났던 때라 여러가지를 물어봤는데 그는 싫어하는 내색이 없이 잘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에서 연출 보조로 데뷔했다. 이때 감독이었던 세리카와 유고에게 영화적인 연출법을 전수 받아 그를 스승으로 언급한다. # 세리카와 말로는 타카하타는 현장 관리나 사람을 다루는 건 신인인데도 자신보다 잘 했다고 한다. 한참 선배인 애니메이터가 고집을 부리거나 뭔가 이상한 걸 내놓으면 논리적인 말로 맞대응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들곤 했다고. 오로치 퇴치는 타카하타가 아니었으면 그 퀄이 안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아침에 늦게 지각 출근해서, 책상에 앉아 아침식사 대용으로 식빵파쿠파쿠(우걱우걱) 씹어 먹는다고 별명이 '파쿠상(パクさん)'이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시이 마모루는 애칭으로 그를 '파쿠상'이라고 불렀다. 타카하타도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몰라도, 본인이 연출한 늑대 소년 켄의 콘티 책의 표지에는 PAC(파크)라고 크게 적어넣었다.

선배였던 오오츠카 야스오의 말로는 타카하타는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일본 최고 명문대 도쿄대학 출신이었고 노년의 사진만 보면 믿기 힘들지만 어릴 때는 꽤 귀염상에 #젊은 시절의 타카하타 이사오의 모습 말도 잘 해서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토에이의 여성 직원들이 도시락을 만들어서 그의 자리에 바쳤지만 그는 항상 지각을 했기 때문에 오오츠카 야스오가 그 도시락을 몰래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왜 인기가 없었냐는 스즈키 토시오의 질문에 오오츠카 야스오는 "얼굴." 이라고 즉답했다.[4]

1963년에 TV 애니메이션 "늑대소년 켄"으로 연출에 데뷔했다. 그림을 썩 잘 그리지 못하는데도 연출로 올라가는 속도가 이례적으로 빨랐는데 다름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신이라 그렇다. 고학력자니까 뭘 시켜도 잘하겠지 하고 토에이에서도 덜컥 큰일을 맡긴 것이다. 능력도 출중했고.

이 때의 작화감독이었던 오오츠카 야스오가 발탁해서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의 처음으로 극장용 영화의 연출을 맡았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은 작품성에선 인정을 받았지만 시간과 돈은 너무 많이 소비하고 흥행에서도 토에이 동화가 한 번 망할 뻔할 정도로 실패하여 회사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TVA 연출 보조로 강등당했다.

이후, 망할 뻔한 토에이 동화의 코스트 다운 경영 정책에 맞서 싸운 노동조합의 노사분규의 진통으로, 회사측은 대규모의 인력정리를 감행했다.

1971년 6월, 타카하타는 미야자키 하야오, 코타베 요이치와 함께 토에이를 떠나 A 프로덕션으로 이적한다. 흥행 실패로 다시 한번 영화의 감독을 맡을 일도 요원했고, 먼저 이적해 있던 오오츠카 야스오 선배와 도쿄 무비의 사장 후지오카 유타카가 말괄량이 삐삐TVA로 만들거라며 스카웃 제의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타카하타는 혼자서 갈 수는 없었고 유능한 미야자키 하야오와 코타베 요이치는 꼭 필요했다. 유망한 그 둘을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장래를 망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면서도 설득했다. 미야자키는 바로 함께 떠나기로 결단했으며 코타베는 아내 오쿠야마 레이코가 남는 조건으로 주변에 용인울 받은 후에 9월에야 간신히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훗날 밝혀진 비화를 읽어 보면, 이미 토에이 동화를 떠나 1주일 후에는 다른 회사로 이적하기로 한 날에도, 노조 운동을 하면서 동료 직원들 앞에서 열성적으로 연설을 하면서 절대로 회사를 그만둬서는 안되고 끝까지 남아서 투쟁해야 한다고 외쳤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정작 자신들은 회사를 옮길 계획인데 왜 그런 말을 했냐고 타카하타에게 물어 봤을 때, 노조 간부의 입장(타카하타 이사오는 1961년 토에이 동화가 노동조합을 만들었을 때부터 부위원장으로 노조 간부였다)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의 입장과는 다르다고 말해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사람은 대단하다' 라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도쿄 무비의 실제작을 맡았던 A프로덕션에서 말괄량이 삐삐TVA로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원작자가 끝내 애니화를 허락하지 않아서 기획은 엎어지고, 할 일이 없어진 상태에서,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갑자기 감독직을 내팽개치고 떠나버린 루팡 3세(애니메이션 1기)로 투입되어 미야자키 하야오와 연출을 했다. 다만 타카하타는 루팡이라는 캐릭터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미야자키에게 대부분 맡기고 조언이나 다듬어주는 작업 정도만 했다고 한다. 말괄량이 삐삐같은 양질의 문학 작품을 애니화 하겠다고 회사를 옮겼는데[5], 결국 루팡 3세같은 성인만화 원작의 바보같은 시시껄렁한 것을 만들게 된 처지에 놓이자, 토에이 동화에서 남아서 노조 운동을 하면서 고생하는 동료들에게 면목이 없고 미안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출자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1972년, 그 다음 작품으로 당시 일본에서 불었던 팬더 열풍과 엎어진 삐삐 기획을 접목한 단편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과 속편인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 우천 서커스의 편'을 감독했다. 어린이 관객에게 호응이 좋아서 스태프들은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즈음 새로 창립된 즈이요 영상(닛폰 애니메이션의 전신)의 사장이 타카하타를 스카웃했고, 미야자키, 코타베도 그를 따라 A프로덕션을 떠나 함께 옮겼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해외 로케이션 취재를 시도한, 그리고 그 전까지는 일본 애니업계에서는 없던 장면설정(레이아웃) 담당(미야자키 하야오)와 캐릭터 디자인(코타베 요이치)라는 전문 분야직을 새로 만들어서 맡겨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1974)을 만들어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연이어 세계명작극장 시리즈 노선으로 엄마찾아 삼만리빨강머리 앤을 연출하고 이 역시 비평과 시청률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시청률의 사나이'라고 불리며 방송국에 가면 국장이 마중나와 인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처음으로 TVA 26화 시리즈의 연출을 맡은 미래소년 코난(1978)는 8화까지 만들고는, “어떡하지? 다 끝났어” 라고 스토리가 턱 막혀버렸는데, 이때 타카하타 이사오가 대타로 9화와 10화의 그림 콘티와 연출을 해 주었다. 그는 꼼꼼하게 1화부터 전부 본 다음에 미야에게 잇따라 물었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그때 그게 참 싫었지.” 미야자키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는데, 그곳에서 다카하타가 새로 문제를 만들어둔 덕분에 미야자키는 다시 11화 이후부터 이어나갈 수 있었다.

1980년에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으로 옮겨, 야심가 후지오카 유타가 사장이 세계 시장을 겨냥해서 사운을 걸고 만든 대작 리틀 네모의 감독직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제작 연습을 겸해서 1981년에 꼬마숙녀 치에 첫번째 극장판을 감독하여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에는 6년간 공을 들인 미야자와 겐지동화 첼로 켜는 고슈를 공개해서 호평을 받았다. 그

하지만, 사공이 많은 배인 리틀 네모는 의견 조율이 안되고 좀처럼 제작이 진행되지 않자 1983년에 텔레콤을 퇴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1981년에 회사에 불만을 품고 먼저 텔레콤을 떠난 상태였다. 그리고 이 무렵 제작 준비를 위해 미국 LA에 머물렀을 때, Frédéric Back[6]작품 crac!을 접하고 감명을 받고 이후 작품 스타일에 큰 영향을 받는다. 훗날 그를 찾아가서 직접 만나기도 했다. Frédéric Back도 1998년에 스튜디오 지브리를 방문하고 타카하타 이사오와 재회하기도 했다.유튜브 영상
이후 프리랜서가 되어, 미야자키 하야오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에서 프로듀서를 맡았고 이를 계기로 하여 1985년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의 창립 멤버가 된다. 그리고, 창작자는 경영에 끼어들면 안된다면서, 사원으로 소속해 있으면서 죽을 때까지 경영에 관여하는 임원직은 맡지 않았다.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 배달부 키키 등의 미야자키 작품에서 프로듀서 혹은 음악 연출을 맡는 한편 자신의 작품도 만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프로듀서를 맡아준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 선배가 만들고 싶어하는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기로 하고 제작비를 지원한 강과 인간의 관계와 썩어가는 하천을 청소해서 되살린 공무원과 마을 사람들을 다룬 문화 다큐멘터리 실사영화 야나가와 호리와리 이야기(1987)는 절반도 못 만들었는데 돈먹는 하마처럼 제작비를 바닥을 내더니, 급기야 미야자키 하야오가 살던 저택을 저당잡히게 만들었다.

이윽고, 1988년 "반딧불의 묘", 1991년 "추억은 방울방울", 1994년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등을 감독했다. 1999년, "이웃집 야마다군"을 개봉했으나 흥행에서는 참패했고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반딧불이의 묘의 경우는 개봉 날짜까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몇 장면에서 색칠을 못하고 선화(線畵)로만 움직이는 미완성인 채로 상영하게 된 것에 책임을 지는 것으로 연출직을 폐업할 것을 결심했지만, 미야자키와 주변의 만류와 권유로 다시 애니메이션 감독직을 맡기로 했다.

추억은 방울방울을 만들기 전에는, 같은 일본공산당을 지지하는 콘도 요시후미(1976년 부터 일본 공산당의 당원)와 함께 아동문학가 시카타 신(しかたしん) 원작의 [국경(国境) 1986-89의 3부작]이라는 소설 작품을 원안으로 만주국과 조선반도의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면서, 일본인의 현지인 차별의 실태를 폭로하려는 기획을 준비했는데 1989년에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고 그 영향으로 기획은 흐지부지 백지화가 되었다. 만일 만들어졌다면 한국인 입장에서는 대단히 흥미로운 소재였다. 일본 블로그 내용 소개 (일본어)

반딧불이의 묘 이후로는 리얼리즘 노선와는 정반대인, 12세기부터 시작한 일본의 전통 에마키에 대해 연구를 했다. 일본 미술과 애니메이션의 원류는 선화(線畵)라고 생각했고, 영향을 받은 Frédéric Back의 작품세계처럼 배경과 인물이 일체화 된 예술성을 추구한 이웃집 야마다군가구야공주 이야기를 만든다. 그러나, 너무나도 달라진 그의 영화는 일반 관객들에게 외면을 받았다.

2013년 가구야공주 이야기를 통해 14년 만에 복귀. 이것이 은퇴작이 된다. 이 작품은 스폰서를 하기로 한 닛폰 테레비의 회장인 우지이에 세이치로가 돈은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죽기 전에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제안으로 시작된 기획인데, 제작비는 역대 최고 51억 엔이 들고, 총 제작 기간은 질질 끌어서 8년이 걸렸는데, 정작 돈을 대준 그 인물은 개봉하기 전에 죽어버려서 완성작을 보지도 못했고, 흥행은 들인 제작비 회수도 못하고 폭망해 버린 웃지 못할 뒷이야기가 있는 작품이다. 더구나 카구야 공주 이야기는 타카하타가 토에이 동화 재직 시절 구상한 기획이었고, 이것을 이제 와서 굳이 만들 생각도 없었는데 스즈키 토시오가 이거를 영화로 만들어라 만들어라 1년 가까이 설득해서, 겨우 승락하고 만들고 싶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만든 거라서 마지막 유작이 이런 식이라 뒷맛이 씁쓸한 작품이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차기작 구상에 의욕적이라서 헤이케모노가타리를 베이스로 한 신작도 구상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제작은 성사되지 않았다. 가구야공주 이야기를 만들 때 프로듀서였던 니시무라 요시아키가 지브리를 퇴사하고 차린 스튜디오 포녹에서 20분 단편 규모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원래는 가구야공주 이야기 보다는 이 작품을 애니화하고 싶어했는데, 타카하타가 의지하는 애니메이터 타나베 오사무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은 그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무산된 기획이었다.

2018년 4월 5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야자키 하야오, 스즈키 토시오는 평생 담배를 입에 물고 다닌 골초였고, 타카하타 이사오도 골초였지만 [7] 노년에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고 과로도 안 하고 살았는데 셋 중에서 가장 먼저 폐암에 걸린 것이 타카하타인 걸 보면 아이러니컬 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담배를 끊은 뒤로도 늘 같이 다니는 지인인 미야자키와 스즈키가 옆에서 줄담배를 피워댔으니 끊었다고 해도 건강에 별 도움은 안 됐을 것이다.

3. 연출 특징

타카하타 이사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비해서 화려하기보다는 수수하고 차분한 스타일을 즐겨했고, 세계명작동화 시리즈들을 만들었지만 미야자키에 비해서 일찌감치 일본색이 강한 작품들을 연출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대한 치밀한 묘사로 토미노 요시유키는 "감히 말한다면 미야자키와 타카하타의 연출실력은 구로사와 아키라보다 위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했을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 연출 역사상 최초로 레이아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 레이아웃의 신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눈에 쏙쏙 들어오게 만들어진다. 타카하타의 콘티는 정말 대충 그리기로 유명했으며 (최악의 경우 선만 늘어서있는 정도였다고) 나중에는 아예 콘티 그리기 귀찮다고 콘티 담당을 따로 두고 구두로 지시하거나 직접 연기해서 지시를 내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가 지시한 배치대로 만들면 이해하기 쉽고 정돈된 영상이 나왔기 때문에 모두 감탄했다고 한다.

타카하타 이사오 작품의 특징은 별 거 아닌 이야기를 하는데 굉장하다는 것이다. 전개는 엄청나게 느리고 하는 이야기도 소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 정도인데 굉장하다. [8] 캐릭터들의 감정 묘사나 행동에 대한 디테일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보게 만든다. 희노애락 같은 단편적 감정 외에도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묘사한다. 대사 이외의 행동과 눈치로만 표현하는 연출도 굉장히 많다. [9] 그의 스타일을 예로 들자면 일류 배우만 나오는 애니메이션. 그래서 그의 작품은 나이를 먹고 봐야 그 진가를 볼 수 있다고도 한다. 이런 연출의 비결은 집요한 인간 관찰이었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늘 타인을 관찰하며 인간이 어떤 상황에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를 연구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식 일상물 애니메이션의 시조를 타카하타 이사오로 분류하기도 한다.

남성 연출가이지만 여성을 표현하는데 정평이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성을 메인으로 한 작품이 많지만 이해하고 표현하는데는 늘 어려움을 겪었는데 [10] 타카하타는 막힘이 없었고 미야자키가 많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키가 그리는 여성은 동경, 타카하타가 그리는 여성은 존중. 타카하타가 그려내는 여성이 더 리얼하다' 라고 평하기도 했다. # 그래서 타카하타 작품은 여성 팬이 굉장히 많다. 타카하타는 이에 대한 비결로 "계속 행동을 관찰했다." 라고 하기도 했다. 특별히 자신이 여성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이해를 하는 건 아니고 본 대로 그리는 것이라고 한다. 타카하타는 특히 말광량이 소녀, 철 없는 소녀 연출 전문이었다.[11][12] 물론 말괄량이가 아닌 여성 연출도 잘했다. 반면 미야자키는 청초하고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미소녀 연출 전문이었다.

화면 구도와 캐릭터의 포즈를 매우 다양하게 쓴다. 이에 대해서 안노 히데아키는 "미야자키 씨는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감독이라 그리기 어려운 구도나 장면이 나오면 "아이씨 그리기 귀찮아." 하고 빼버리고 자신 만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타카하타 씨는 직접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고 남에게 시키는 입장이라 그리기 어렵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그의 구도 잡기는 마치 오즈 야스지로와 같다. [13]" 라고 하기도 했다. #

구도를 잡을 때는 화면에 왜곡을 거의 안 넣고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영상을 만든다. 토미노 요시유키, 오시이 마모루 등 후배들이 애니메이션의 연출에 카메라 렌즈의 개념을 도입해 영화처럼 보이는 영상을 만들었지만 타카하타는 이를 싫어해서 화면에 렌즈에 의한 왜곡을 잘 넣지 않았다고 한다. 광각 효과만 약하게 넣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데 또 리얼한 레이아웃만 하는 건 아니고 상상, 환상의 세계를 표현할 때는 폴 그리모의 왕과 새의 영향을 받은 비현실적인 레이아웃을 쓰기도 한다.

작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성우를 정하고, 그 캐릭터의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목소리 연기를 미리 녹음하는 선녹음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데, 이때 녹음을 하는 배우의 표정이나 연기를 비디오에 담아 그림을 그릴 때 참고했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면 목소리와 그림의 타이밍이 맞을 뿐만 아니라 입 모양이나 얼굴의 움직임까지 재현할 수 있어서,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다카하타의 작품이 보통 애니메이션과 다른 점은 이런 부분에 있다.

부드럽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추구해서 작화 매수 (프레임)을 엄청나게 많이 쓰는 감독이다. 이게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것인데 그는 돈 걱정은 전혀 안 하고 그저 물 쓰듯이 제작비를 마구 끌어 썼다고 한다. 스즈키 토시오에게 제작비 걱정을 감독이 왜 하냐? 그건 프로듀서가 걱정할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상대하던 프로듀서들은 굉장히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다른 작품의 배는 제작비가 들어갔으며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51억 엔이라는 터무니 없는 금액을 썼다. [14] 오늘날 기준 가구야공주 이야기는 일본에서 작화 매수를 가장 많이 쓴 애니메이션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일상을 그려내는 작품이라 티가 안 나서 그렇지 미야자키 하야오보다 돈을 더 많이 쓰는 감독이었다. 스즈키 토시오 말로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가 지브리에서 돈을 벌면 타카하타가 다 쓴다. 나는 타카하타가 작품 만들 돈을 버는 기계다." 라고 투덜댄 적도 있다고 한다.

벚꽃을 상당히 좋아하는지 작품에 벚꽃이 중요한 포인트로 꽤 자주 나온다. 빨강머리 앤 같은 서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도 벚꽃 같은 게 나온다. 유럽에도 벚꽃이 있긴 하니까 고증 오류는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선 나무를 심은 사람을 만든 프레데릭 백을 존경하며 말년 작품인 이웃집 야마다 군과 카구야 공주 이야기는 나무를 심는 사람 특유의 색연필 작화를 의식한 영상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연출과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르게 신 기술 도입에 긍정적이었다. 이웃집 야마다군가구야공주 이야기는 디지털 기술도 적극 사용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장 개인 책상에 LCD 모니터로 보이는 기기가 있었을 정도였다.[15]

음악에 소양이 있고 피아노도 잘 쳤다고 한다. 제자 토미노 요시유키는 그의 집에 피아노가 있어 "저 피아노는 뭐지? 아내 분이 치나?" 라고 생각했는데 타카하타가 "내가 치는 건데."라고 해서 "이 사람 못하는 게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고 일반인은 천재를 따라갈 수 없다는 절망을 느꼈다고 한다. #출처 스즈키 토시오의 지브리의 땀투성이 2022년 1월 9일 방송 가구야공주 이야기의 곡 중 몇 개는 타카하타가 직접 만들었는데 샘플 곡을 뭘로 만들었냐면 하츠네 미쿠로 만들었다. 다만 샘플이었고 본편에 쓴 곡은 제대로 다른 사람들이 연주하고 불러서 사용했다. # 그래서 작품의 음악 선정도 뛰어나다. [16] 타카하타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프로듀서를 할 때는 주로 음악을 많이 담당했다고 한다. 히사이시 조를 발탁한 사람도 타카하타였다.

화면 외각 테두리에 꽃, 보석 등으로 이루어진 사각 형의 장식물을 넣어 등장인물의 외모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거나, 그 캐릭터에게 반했다는 것(콩깍지)을 표현하는 연출을 자주 한다. 이 연출을 일본 애니메이션에 퍼뜨린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17] 다만 타카하타도 리얼을 추구한 작품에선 이 연출을 쓰지 않는다.

4. 관련 인물

5. 기타

6. 작품 목록

6.1. 애니메이션 영화

<rowcolor=#fff> 년도 제목 감독 각본 비고
1968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1972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
(판다코판다)
1973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 비온날의 서커스
1981 꼬마숙녀 치에
1982 첼로 켜는 고슈
1987 야나가와 수로 이야기 [29]
1988 반딧불이의 묘
1991 추억은 방울방울
1994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1999 이웃집 야마다군
2010 극장판 빨간머리 앤 그린 게이블로 가는 길 [30]#
2013 가구야공주 이야기 [31]

6.2. TV 애니메이션

<rowcolor=#fff> 년도 제목 감독 각본 비고
1971 루팡 3세(애니메이션 1기)
2쿨
[32]
1974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1976 엄마 찾아 삼만리
1979 빨강머리 앤 [33]
1981 꼬마숙녀 치에 TV판 1기

6.3. 그 외

7. 외부 링크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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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톱 크래프트 · 스튜디오 지브리(연표)
관련 인물
미야자키 하야오스즈키 토시오콘도 요시후미
타카하타 이사오미야자키 고로요네바야시 히로마사히사이시 조그외 관련 인물
관련 시설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지브리 파크
작품
극장 장편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 천공의 성 라퓨타 반딧불이의 묘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추억은 방울방울 붉은 돼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귀를 기울이면 모노노케 히메 이웃집 야마다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고양이의 보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 벼랑 위의 포뇨
마루 밑 아리에티 코쿠리코 언덕에서 바람이 분다 가구야공주 이야기
추억의 마니 붉은 거북 아야와 마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지브리 신작 애니메이션
(1)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경우 톱 크래프트에서 제작했으나 미야자키가 저작권을 가지기로 하고 제작한 작품이고 미야자키가 지브리에 저작권 관리를 위탁해 스튜디오 홈페이지 작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TV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 기브리즈 아야와 마녀
단편 애니메이션
On Your Mark 빙글빙글 고래 잡기 고로의 산보
메이와 아기고양이버스 상상속의 비행 기계들 상상의 기계들 중 파괴의 발명 기브리즈 에피소드 2
Portable Airport Space Station No.9 비행 도시 계획 물거미 끙끙
별을 산 날 집찾기 쥐스모 빵반죽과 계란 공주
보물 찾기 털벌레 보로 젠 - 그로구와 더스트 버니
극장 실사 장편
식일 사토라레
실사 단편
거신병 도쿄에 나타나다 거신병 도쿄에 나타나다 극장판
게임(2)
니노쿠니 하얀 성회의 여왕 니노쿠니 칠흑의 마도사
(2) 니노쿠니 시리즈 중 1편을 한정으로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을 검수하는 방식으로 참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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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에현 이세시[2] 말년의 인터뷰에서 일본공산당을 지지하지만 당원은 아니라고 밝힌 적이 있다.[3] 도쿄대학 출신 감독 나카무라 료스케도 "내가 아는 선에선 도쿄대학 출신 애니메이션 감독은 타카하타 이사오 밖에 모른다." 라고 했다.[4] 출처 '스즈키 토시오의 지브리의 땀투성이 3'[5] 스즈키 토시오의 말에 의하면,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도 애니화하고 싶어했다고 한다[6]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이라 인명 표기가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여러가지가 있다. (대표작은 나무를 심은 사람)[7] 그래서 타카하타가 금연하기 전에는 세 사람이 모여서 회의를 하면 연기로 가득해서 화재현장 같았다고 한다.[8]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을 하면 상당히 빠르고 비일상적인 묘사의 작품이 많이 나온다.[9] 이런 연출 경향은 토미노 요시유키에게 이어졌다.[10] 그래서 리얼하다기보단 이상적인 존재로 그려질 때가 많다.[11] 하이디, 앤, 치에 등.[12] 타카하타의 스승인 세리카와 유고도 이런 캐릭터 연출이 전문이었다.[13] 그만큼 깐깐하다는 소리다. 오즈 야스지로는 소품을 밀리미터 단위로 배치하는 감독이다.[14] 10억 엔만 써도 돈을 많이 쓴 것인데 51억 엔이면 엄청난 금액이다. 이 제작비로 적자가 안 나면 100억 엔 이상 흥행해야 하는데 2020년대에는 100억 엔 흥행 애니가 종종 나오고 있지만 이 당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니면 100억 엔 흥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시기였다. 즉 개봉 전부터 이미 적자가 확정된 작품이다.[15] 미야자키 하야오도 결국 신티크 액정타블렛을 도입하기에 이르렀으나 오차범위에 대한 불만 때문에 다시 포기한다.[16]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음악에 관심이 없어 음악은 전부 히사이시 조에게 맡겼다.[17] 그가 보던 유럽 영화나 유럽 애니메이션에서 먼저 나온 연출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걸 쓴 건 타카하타 이사오이다.[18] 타카하타가 천재라고 생각해서 타카하타가 신인일 때 논크레딧으로 종종 콘티를 그려줬다고 한다. 크레딧이 없어서 잘 알려져있지 않다.[19] 토미노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연출을 배웠지만 자신의 스승이라 단언할 사람은 타카하타 이사오라고 했다.[20] 자신은 영화 팬이지만, 애니메이션의 방법론은 타카하타의 하이디를 보고 배웠다고 한다. 어머니가 타카하타 팬이라 하이디만 봐서 우주전함 야마토를 못 봤다고 한다. 업계에 들어오고 스즈키 토시오와 미야자키의 주선으로 타카하타를 알게 되었는데 굉장히 좋은 분이었다고 한다. 다만 같이 작품을 할 사람은 도저히 아니었다고 한다. '앵커'라는 작품을 만들 때 타카하타와 싸워서 그만뒀다.[21] 포스트 타카하타 이사오로 거론되는 인물로 실제로 타카하타 이사오는 생전에도 하라 케이이치를 눈여겨보고 고평가했다고 한다.[22] 이토 토모히코는 호소다 마모루 애니메이션 역대 부감독 대담 인터뷰에서 호소다가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소리를 듣고 "아닙니다. 호소다 씨는 타카하타 이사오입니다." 라고 하기도 했다.[23] 엄마찾아 삼만리를 최고의 작품이라 극찬했으며 자신의 연출은 타카하타 이사오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그래서 타카하타에게 작품을 같이 하고 싶다고 러브콜도 해봤는데 왠지 안 부르더라고 한다.[24] 그가 일본 비자를 신청할 때 타카하타가 직접 보증을 섰다고 한다.[25] 카타가나로 ナマケモノ로 쓰면 나무늘보라는 뜻이고 히라가나 なまけもの는 게으름뱅이라는 뜻이다.[26] 이를 알려주는 일화로 바람이 분다축음기가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타카하타가 보더니 "미야자키. 진짜 비싼 축음기는 금속 바늘이 아니고 대나무 바늘을 써. 그게 더 비싸고 소리가 좋아." 라고 지적해서 고쳤다. 미야자키는 "고마워요. 그런 거 관찰하고 기억하다 지적하는 사람은 파쿠상 밖에 없어." 라면서 고마워했다. 싸운 건 아니고 미야자키는 오히려 타카하타가 자기 실수를 지적하자 굉장히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27] 작중 설정은 책을 너무 읽어서 머리가 이상해진 괴짜 천재이다.[28] 물론 그런 내용이기도 하고 그것도 인정했다. 그것보다 타카하타가 우선이었다는 것.[29] 미야자키 하야오가 프로듀서 겸 제작한 실사 다큐멘터리 영화[30] TV판 1화부터 6화 분량의 재편집판. 예전에 편집해놓고 창고에 박혀있던 걸 꺼내서 극장 개봉했다.[31] 공동 각본 - 사카구치 리코[32] 1기 감독이 도망간 상태에서 이어받은 거라 2쿨 분량부터는 미야자키와 공동 감독이었다. 실질적으론 미야자키가 중심이었고 타카하타가 조언을 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33] 50화 중 36개 화 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