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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Hot Riding Hood 제작 이후 인터뷰 중의 모습.
1. 개요
Tex avery1908.2.26 ~ 1980.8.26
본명은 Frederick Bean Avery(프레더릭 빈 에이버리), 텍사스 주 출신 미국인 애니메이터 & 성우 & 애니메이션 감독.
2. 생애
에이버리가 애니메이션 경력을 시작한 때는 1928년으로, 처음엔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달간 자동차 페인트칠, 창고 작업, 야간 부두 작업, 과채상 보조 등의 여러 질낮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윙클러 스튜디오에 입사해 오스왈드 단편의 셀 잉크 작업을 맡기 시작했고, 얼마 뒤 유니버설 스튜디오 카툰즈로 이직해 본격적인 애니메이터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잉크 작업 담당으로 일했으나 이듬해(1931년)부터 4년여 간 빌 놀런(Bill Nolan) 휘하에서 원화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며 오스왈드 래빗 단편[1]의 원화를 그렸다. 한창 애니메이터 업무를 하고 있던 1933년 여름, 스튜디오 내부 사무실에서 잠시 장난을 치던 순간 종이 클립 1개가 에이버리의 왼쪽 눈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시력을 잃었지만 다행히도 활동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2] 유니버설에서 일을 하면서 점점 작품에 대한 자신의 더 많은 통제권을 원하기 시작했고, 오스왈드 단편 중 두 편에서 사실상 감독으로 연출을 맡았으나 훗날 인터뷰에서 두 작품에 대해 끔찍했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3]벅스 버니의 공식 데뷔작 A Wild Hare 영상.
급료적인 면에서 점차 불만족스러움을 느끼자 약 6주간 일부러 분량 이하의 작업을 한 뒤에 1935년 4월 해고당해 유니버설 스튜디오 카툰즈를 떠났다. 바로 이틀 뒤에 미리 만나고 있던 여자친구와 결혼해 오리건에서 신혼생활을 즐겼지만, 지니던 자금이 떨어지자 일자리를 구하러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와 당시 워너 브라더스의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였던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 구직을 요청했다.[4] 하먼-아이싱 콤비와 얼 듀발, 톰 팔머가 떠나 감독이 2명뿐이었던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서 프리즈 프레렝, 잭 킹에 이어 3번째 정규 연출가로 배정되었고, 근무하는 직원 규모가 늘어난 관계로 새 스탭이 일할 작업 공간이 협소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스튜디오 주변에 있던 5평 크기의 벙갈로로 밥 크렘펫, 척 존스, 버질 로스(Virgil Ross), 시드 서덜랜드(Sid Sutherland)와 함께 이사하였다.[5]
워너에서의 첫 연출 작품으로 에이버리는 Gold Diggers of `49[6] 편 이후에서부터 포키 피그를 디즈니 풍의 현실적인 묘사에서 밥 크렘펫의 캐릭터 디자인을 수용해 만화풍 캐릭터로 변경하는 것과 에이버리 자신의 독보적인 개그와 액션을 작품들에 덧입히면서 서서히 애니메이션 연출가로써의 역량을 발휘해 나갔고, 1937년 개봉 작품 Porky`s Duck Hunt에서 이름없는 단역 캐릭터로 처음 등장한 대피 덕한테 통제불능적 성격과 마구 웃음을 지르는 묘사를 덧입혀 대피가 관객들의 주목을 얻게끔 유도해줬다. 이후 1940년 개봉 작품 A Wild Hare에서 이름없는 단역 토끼에 불과했던 벅스 버니의 디자인과 엘머 퍼드의 디자인을 변경함과 동시에 What's up, Doc?이란 캐치프레이즈를 추가해 관객들의 호응을 얻은 캐릭터로 자리매김해주기도 했다.
jerky turkey 영상.
1941년 개봉된 The Heckling Hare에서 결말의 개그 씬이 개봉되기 전에 편집당한 것과[7] 에이버리 본인이 제안한 실사 영상의 동물에 입술의 움직임을 애니메이션으로 그리는 플롯의 시리즈 제작을 반대한 리언 슐레진저(Leon Schlesinger)와 큰 말싸움을 벌였고, 4주 동안 정직 상태에 있다가 워너브라더스를 떠나 잠시 파라마운트에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제리 페어뱅크스에게 본인의 아이디어를 설명해주었고, 페어뱅크스는 전해들은 플롯에 만족하며 그에 기반해 Speaking of Animals 시리즈를 연출 & 제작하게 된다. 에이버리는 이 시리즈의 첫 3편을 작업한 후[8] 같은해 가을 메트로-골드윈-메이어로 이직해 mgm 카툰 스튜디오의 제작자 프레드 큄비와 접촉한 다음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써의 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MGM은 에이버리가 워너브라더스에서 일하던 때보다 많은 예산과 수준 높은 제작 환경을 지원했고, 같은 해 일어난 파업으로 인해 MGM에 이적한 여러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의 숙련된 드로잉이 어우러져 보다 창의성 높은 개그 유머와 애니메이션 연출 역량 활용의 촉매제 역할을 해줬다. 그 결과로 1942년 개봉된 선전 애니메이션 the blitz wolf는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 후보작으로 지명되기도 했었고,[9] 드루피, 나사빠진 청설모(Screwy Squirrel), 고양이 블래키(Blackie the Cat), 조지와 주니어(George and junior) 단편을 포함해 Red Hot Riding Hood 편에서 시작된 빨간 두건을 기반으로 각색한 단편 연작들은 에이버리의 대표격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초창기 MGM 단편에선 다채로운 색상과 사실적인 배경의 작품들이 많았지만, 년도를 거듭하며 좀 더 단색적이고 덜 사실적인 방식을 시도했는데 스타일을 바꾼 것은 높아지던 UPA의 명성과 영향, 제작 예산 증가로 인한 비용 절감의 필요성,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본인의 열망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 에이버리는 미래의 기술을 주제로 다룬 여러 단편들을 만들기도 했다.(The House of Tomorrow, The Car of Tomorrow, The Farm of Tomorrow, TV of Tomorrow)
1950년 애니메이션 작업 중에 누적되던 자신의 피로를 풀기 위해 1년을 휴식했고, 그 사이 월터 란츠 스튜디오에서 이직한 애니메이터 딕 런디(Dick Lundy)가 드루피 & 바니 베어(Barney Bear) 단편의 감독을 맡으면서 복귀 후엔 그와 공동 감독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임했다. 1948년의 파라마운트 판결로 인한 카툰 제작 예산 감소로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 디자인과 배경이 기존의 풀 애니메이션이 아닌 리미티드 애니메이션화되기 시작한 이래, 1950년대 초기 에이버리는 중대한 슬럼프에 빠졌으며[10] 1953년 MGM을 나와 옛 일터인 유니버설 픽쳐스(의 월터 란츠 스튜디오)로 이직했지만 칠리 윌리 등의 단편을 포함해 몇 편만 제작에 참여했고, 1955년 유니버설에서 다시 빚어진 급여 분쟁으로 월터 란츠 스튜디오를 떠난 이후 극장용 애니 제작에선 물러났으며 10여 년 동안 레이드, 프리토-반디토(frito-bandito), 쿨에이드 등의 TV 광고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집중했다.
마이클 배리어 웹페이지 에세이 자료에 의하면, 1970년대 초기 아들이 자살한 것과 이혼을 겪은 것으로 인해 말년 즈음엔 내적으로 우울하고 괴로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11] 1973년엔 잠시 본인의 회사인 텍스 에이버리 카툰스의 광고를 제작하기도 했으나 1978년 애니메이션 부서를 폐쇄하고 다시 외부 기업의 애니메이션 제작에 임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와 업계에서 함께했던 많은 연출가들과 애니메이터들한테 많은 경의를 받으며 교류를 지속하고 있었고, 프리즈 프레렝한테 드패티-프레렝 엔터프라이즈에서 글을 써달란 제안을 받았지만 이에 흥미가 없어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9년부터 MGM에서 톰과 제리로 활약했던 윌리엄 해나 & 조셉 바베라 콤비가 설립한 해나-바베라 프로덕션 작품들의 제작에 참여하면서 말년(1980년)엔 The Kwicky Koala Show[12]의 원작자를 맡았고, 제작 중에 있던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 TVA에 등장할 cave mouse란 캐릭터를 개발 중이던 상황에서 같은 해 한 주차장 안에서 갑자기 쓰러졌으며 8월 26일 악화된 폐암으로 인해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세인트 조셉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13] 시신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포레스트 라운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되었다.
3. 평가
"In a cartoon you can do anything."
그가 연출한 단편 screwball squirrel에서 나온 대사. 훗날(1975년) 출간된 Tex Avery: King of Cartoons에도 이 대사가 서술되면서 에이버리와 그의 작품들에 대한 영향력을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연출한 단편 screwball squirrel에서 나온 대사. 훗날(1975년) 출간된 Tex Avery: King of Cartoons에도 이 대사가 서술되면서 에이버리와 그의 작품들에 대한 영향력을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윈저 매케이의 애니메이션 업계 활동을 밑거름으로 제작된 플라이셔 스튜디오, 디즈니 단편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1920년대 후기 무렵 침체의 조짐이 보였던 미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재활성화에 크게 기여했으나, 내적으론 정석적이고 평면적인 연출의 스토리텔링과 뮤지컬에 치중된 경향에서 정체하고 있었다. 에이버리는 활동할 당시의 인기 대중매체인 영화에서 나오던 슬랩스틱 개그를 본인의 스타일로 광폭화시켰고, 기존의 애니메이션에서 두드러진 공식들을 연이어 뒤집고 풍자하는 변혁적인 연출을 발현해냈으며, 터마이트 테라스에서 함께 지냈던 밥 크렘펫, 척 존스 등의 동료 연출가들과 업계에서 일하던 애니메이터, 연출가들의 작품에 선구적으로 무수한 영향을 주었다. 사후 제작된 여러 다큐멘터리 등지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한 많은 사람들이 에이버리의 애니메이션 연출에 대해 언급하며 호평하는 등 전반적인 재조명을 받았다.
에이버리가 첫 번째로 주역에 데뷔시킨 캐릭터이며 옷가지 없이 마구 웃어대는 대피 덕이 등장한 지 얼마 뒤, 월터 란츠 스튜디오에서도 비슷한 민폐형 캐릭터가 활약하는 딱따구리를 데뷔시킨 것과 디즈니 스튜디오, 하먼-아이싱 프로덕션, 컬럼비아 픽처스 등의 다른 회사에서 일하던 애니메이터들한테도 참고 작품이자 모방 작품으로 이목을 얻었으며, 업계에서 돋보인 에이버리의 만화적 표현이 담겨진 코미디 & 개그 연출들은 현대기의 미국 애니메이션 작품들에서도 광범위하게 응용되었다. 톰과 제리가 슬랩스틱 코미디로써의 캐릭터 & 전개 설정의 표본이자 오마주로 자리매김했다면, 텍스 에이버리가 연출한 작품들은 현재 미국 애니메이션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관련된 유머들의) 구조와 공식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에 이바지했으며 톰과 제리의 제작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애니메이션의 캐릭터가 필름의 셀을 벗어났다 들어오는 것과 관객들에게 캐릭터 혹은 나레이터가 농담을 건네는 제4의 벽 연출, 과장된 캐릭터 동작에 어우러진 비현실적인 개그의 보편화와 매케이 & 디즈니 & 플라이셔 형제 등의 프로듀서가 청중의 이명을 얻던 추세를 뒤집고, 창의적인 구조의 연출로 애니메이션 감독이 업계 내외의 이명을 얻는 추세를 만든 것에 크게 공헌한 점으로도 후대의 애니메이션 업계인들과 역사가들한테 칭송을 얻었다. 생전엔 에이버리의 명성이 현재처럼 주목받진 못했지만[14] 60년대 후기부터 애니메이션 역사가들이 그와의 교류를 진행하면서 애니메이션 전문 매거진에 차츰 에이버리의 작품들을 언급하기 시작했고, 사후 80년대 후기(현대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다큐멘터리와, 에이버리가 연출한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카툰네트워크, 부메랑 등지의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영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기 MGM/UA에서 VHS를 발매한 것은 그의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한 기반이 되었으며, 2000년대 중기엔 DVD 발매 등의 작품에 대한 광매체화와 인터넷의 영향으로 에이버리의 작품들에 대한 손쉬운 시청이 가능해졌다. 2005년부턴 밥 크렘펫 인도주의상(1984년)과 프리즈 프레렝 평생 공로상(1994년)에 이은 텍스 에이버리 상이 애니메이션 업계인들한테 수여되기 시작했다. 최초로 이 상을 받은 사람은 브래드 버드이며, 이후 헨리 셀릭, 피트 닥터, 딘 드블루아 & 크리스 샌더스, 존 크릭팔루시, 필 로드 & 크리스토퍼 밀러도 상을 수여받았다.
4. 여담
- 196~70년대 미국에서 한창 제작되던 TV판 애니메이션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많이 참가하진 않았고 1979년에야 제작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1975년 발간된 조 아담슨이 저술한 Tex avery : the king of cartoons의 인터뷰와 드파티-프레렝 엔터프라이즈 & 해나-바베라 프로덕션에서 일했던 스토리 작가 존 던(John Dunn)의 활동을 언급한 기사에서 나왔는데, 이런 성향은 척 존스도 동일했다.
- 게리 모리스(Gary Morris)는 에이버리의 연출 방식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호평하였다. - 무엇보다도 에이버리는 워너 브라더스의 모태 스타일을 디즈니 스타일의 감성에서 멀어지게끔 했고, 에이버리의 속도, 풍자 및 아이러니를 높이 평가한 성인들과 논스톱 액션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동등히 어필하는 만화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지도하에 디즈니의 '귀엽고 깜찍한' 생물은 벅스 버니와 같은 끊이지 않는 지혜, 포키 피그와 같은 사랑스러운 연극 또는 대피 덕과 같은 눈부신 미치광이로 변모했습니다. 디즈니가 이끄는 시장이던 클래식 동화조차도 그에 의해 변형되었으며, 레드 라이딩 후드와 같은 무고한 여주인공을 섹시한 재즈 아가씨로 만들어냈습니다. 에이버리는 또한 끊임없이 만화의 구조물을 깨고 캐릭터가 최종 크레딧에서 도약하거나 주연했던 만화의 플롯에 격렬히 반대하거나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함으로써 인텔리적으로 열중했습니다.[15]
- 1960년대 초(년도 미상)에 프랑스인 영화 평론가 로베르 베나윤[16]이 미국에서 에이버리를 만난(라디오 프랑스 출처) 뒤에 1963년 매거진 포지티프(positif)에 그와 나눈 인터뷰 내용을 기재한 것을 시작으로, 1979년에 판타스마고리에(fantasmagorie)에서 발간한 Tex Avery. La folie du cartoon과, 1984년 tex avery를 발간한 패트릭 브리옹 등의 노력으로 프랑스 문화계와 프랑스 사회에 에이버리의 명성을 올려줬으며, 2008년 텍스 에이버리의 100번째 생일 기념 우표가 프랑스에서 발행된 것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도 톰과 제리 프로그램에서 같이 편성되어 TV로 방영된 경력이 있어 애니메이션 업계인 중에서도 텍스 에이버리의 팬이자 추종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17]
- 1926년 당시 텍사스에서 에이버리 본인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외치고 다닌 what`s up doc?이란 캐치프레이즈가 있었는데 이를 나중에 벅스 버니가 자주 쓰는 명대사로 활용하게 되었다고 생전에 언급했다.
- 에이버리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 중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캐릭터로 불리기도 하는 Screwy Squirrel 단편들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모종의 이유로 좋아하지 않게 되어 다섯편의 작품만 제작하였고, 마지막 편에 나오는 결말도 새드 엔딩으로 끝내버렸다. Tex Avery: The King of Cartoons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에이버리의 지인 마크 카우슬러의 인터뷰에 의하면, 에이버리는 screwy squirrel을 정말로 싫어했었다고 하며 어느 날 캐릭터의 그림이 담긴 팬레터를 받았었는데 얼마 못가 이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모습을 목격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 에이버리가 빨간 두건을 기반으로 하여 디자인한 캐릭터 레드는 톰과 제리 TV 스페셜에서 몇번 조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 DiC 엔터테인먼트의 1990년대 말 작품 중 텍스 에이버리와 동명의 작품이 있다. 정식 제목은 The Wacky World of Tex Avery로, 에이버리 본인과는 사실상 무관한 작품. 텍스 에이버리가 작고한 이후인 1997년에 런칭했다.#[18] 단, 후손으로부터 텍스 에이버리의 이름 사용을 허가받아가면서 만든 것에 비해서 평판은 좋지 못했다. 오히려 그냥 에이버리의 유명세에 편승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도용했을 뿐이라는 혹평이 나올 정도였는데 90년대 애니메이션 특유의 온갖 역겨운 엽기 요소들로 떡칠된 심히 렌과 스팀피스러운 물건인지라, 감상한 시청자들이 고인 모독이다, 명예훼손이다, 역겨운 쓰레기다, 내 어린 시절을 망쳐놨다, TV에서 이게 나올 때마다 채널을 돌려버렸다 등의 온갖 악평을 늘어놓는 괴작으로 낙인찍혔고 특히 에이버리가 태어난 고향인 미국에서는 시청자들한테 더욱 박한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미국 외에서 프로그램을 봤었던 현지 시청자들한테는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인기를 얻기도 했다.
- 1975년 제작된 루니 툰을 모티브로 만든 팬 영상 필름을 한 영화제에서 감상하고 무척 칭찬해했다는 비화가 있다. 현장에 있던 척 존스와 함께 그 영화를 봤었는데 자신과 달리 척은 (영화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정반대로 침묵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작품의 이름은 Rabbit Habit Cartoon.
- 에어버리가 유니버설에서 워너 브라더스에서 일할 때까진 fred avery 명의로 타이틀 카드에 표기되었고 현재의 tex avery 명의 표기는 mgm 단편 카툰의 타이틀 카드에서 나왔다. 이는 당시 메트로-골드윈-메이어에서 톰과 제리를 만들던 MGM 카툰 스튜디오의 제작자 프레드 큄비(fred quimby)의 이름과 헷갈리지 않기 위해서 명의를 변경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다.
- 마이클 배리어가 저술한 Hollywood Cartoons: American Animation in Its Golden Age에 의하면, 에이버리는 1970년대에 A Wild Hare를 다시 본 후 사람들에게 왜 인기가 있었는지 또, 관객들이 이 카툰을 재미있다고 여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며 작품의 한 순간도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페이싱이 상당히 느리고 지루하다고 말했었다고 한다.
- 2020년부터 1년간 그가 MGM에서 연출한 작품들을 리마스터링한 총집편 격의 블루레이 Tex avery screw ball classics 세트가 총 3권이 발매되었다. 제리 벡(Jerry Beck)의 언급에 의하면 MGM이 배급한 1951년 이전 개봉 단편 애니메이션 상당수가 1978년 발생한 조지 이스트먼 하우스 화재로 원본 네거티브가 파괴되어 복원하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워너 아카이브에선 최대한 현존하고 있는 가장 잘 보존된 아카이브 요소를 사용하여 블루레이 볼륨 세트에 있는 단편들을 모두 HD로 디지털 복원시켰으며 출시 과정 중간에 코로나19로 인해 제작이 지연되는 등의 문제도 나타났었지만 전편 무삭제 단편이 수록되었다.
- 애니메이터가 되기 이전엔 신문에서 연재되는 코믹 스트립 만화가를 지망하여,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3개월 여름 강좌를 수강했었지만 1달만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 척 존스의 발언에 의하면 (척 자신이나 혹은 다른 애니메이터와 함께) 에이버리가 야구 경기를 볼 때 했었던 마지막 말은 "I don’t know where animators go when they die, but I guess there must be a lot of them. They could probably use a good director though"이었다고 한다.
- 에이버리의 작품들 속에 나오는 연출 기법 중 일부는 누벨바그와 흡사한 형태의 기법들도 존재하는데, 에이버리 본인의 생전 인터뷰들에서 프랑스 영화 같은 유럽 매체에서 영향을 받았단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19] 우연의 일치로 먼저 창작해 냈다는 결론이 타당하다고 보면 된다. 그의 작품들이 서유럽(정확히는 프랑스)에서 미국 본토보다 몇 년 앞서 평론가들에게 명성을 얻은 요인에 대한 구체적인 계기는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 문서들에선 서술이 없으나, 에이버리의 작품들을 분석한 평론가들의 견해와 사회문화적인 여건으로 추측했을 때 작품들이 고전적인 반영웅이 나오는 매체들을(돈 키호테, 레 미제라블 등) 역사적으로 선호해 온 유럽인들의 성향에 의도치 않게 어우러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같은 시기에 유행했던 미국 영화의 프렌치 뉴 웨이브 사조의 원인과 경향 속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요소가 존재한다.
5. 관련 인물
- 기용한 애니메이터, 연출가
- 추종자
6. 참여 작품들
- 워너 브라더스 - 루니 툰 단편 61편 연출(루니 툰/에피소드 참조.)
-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 MGM 관련 연출 작품 목록 (접기 클릭)
- * blitz wolf, the early bird dood it(1942)
- dumb-hounded, Red Hot Riding Hood, who killed who, one ham's family, what's buzzin' buzzard(1943)
- screwball squirrel, batty baseball, happy-go-nutty, big heel-wahta(1944)
- the screwy truant, the shooting of dan mcgoo, jerky turkey, swing shift cinderella, wild and woolfy(1945)
- lonesome lenny, the hick chick, northwest hounded police, henpecked hoboes(1946)
- hound hunters, red hot rangers, uncle tom's cabana, slap happy lion, king-size canary(1947)
- what price fleadom, little 'tinker, half-pint pygmy, lucky ducky, the cat that hated people(1948)
- bad luck blackie, senor droopy, the house of tomorrow, doggone tired, wags to riches, little rural riding hood, out-foxed, the counterfeit cat(1949)
- ventriloquist cat, the cuckoo clock, garden gopher, the chump champ, the peachy cobbler(1950)
- cock-a-doodle dog, daredevil droopy, droopy's good deed, symphony in slang, car of tomorrow, droopy's double trouble(1951)
- Magical Maestro, one cab's family, rock-a-bye bear(1952)
- little johnny jet, t.v. of tomorrow, the three little pups(1953)
- drag-a-long droopy, billy boy, homesteader droopy, the farm of tomorrow, the flea circus, dixieland droopy(1954)
- field and scream, the first bad man, deputy droopy, cellbound(1955)
- millionaire droopy(1956), cat's meow(1957)
- 월터 란츠 스튜디오(유니버설 픽쳐스)
- i'm cold(1954), crazy mixed up pup, the legend of rockabye point, sh-h-h-h-h-h(1955)
- 해나-바베라 프로덕션 - The Kwicky Koala Show : 원작자이자 유작으로, 1981년 방영.
에이버리의 작품에서 나온 연출 기법 & 공식을 탐구해 보려면 https://tvtropes.org/pmwiki/pmwiki.php/Creator/TexAvery를 참조할 것.
7. 다큐멘터리
- Bugs Bunny Superstar(1975) - 에이버리가 인터뷰한 영화이자 몇 안되는 생전 육성을 들을 수 있다.[38]
- The Boys From Termite Terrace(1975)
- Tex Avery : the king of cartoons - 애니메이션 역사가 조 아담슨(joe adamson)이 에이버리와 나눈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는 다큐멘터리 전기 도서. 1975년 출간.
- Tex Avery, the King of Cartoons(1988)
- King Size Comedy(2012)
[1] 이 시기에 제작된 오스왈드 래빗 단편은 월트 디즈니가 판권을 상실하여 유니버설 내부 스튜디오에서 제작 중이던 상태였다.[2] 이런 사고가 일어난 배경은 에이버리와 인터뷰를 나눈 경력이 있던 마이클 배리어가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였는데, 당시 유니버설 스튜디오 내부 애니메이터들이 종종 고무줄이나 종이 도구로 일하던 동료 아티스트의 머리를 겨누는 장난을 치는 경향이 있었으며 한 애니메이터는 종이 클립을 사용해 장난을 1단계 발전시키기로 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에이버리는 한 아티스트가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뒤로 돌아봤었는데 그 순간 날아온 종이 클립이 에이버리 본인의 왼쪽 눈을 강타했었다고 한다.[3] Tex Avery, King of Cartoons - 1975(저자 조 아담슨), 애니메이션 역사가 마이클 베리어(Michael Barrier)의 언급(2003)) 출처.[4] 에이버리는 면접 과정에서 리언 슐레진저한테 자신이 경험 많은 감독이라고 살짝 거짓말로 설명했으나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고용되었다고 한다.(마이클 배리어의 언급(2003))[5] 여기서 만들어진 사무실은 'termite terrace'(터마이트 테라스, 열악한 사무실의 환경상 흰개미가 들끓었던 작업소라는 의미.)란 별명을 얻었다.[6] 여기서 49는 골드 러쉬가 시작된 1849년을 의미.[7] 영어 위키피디아 문서의 오리지널 결말 문단 참조. 원본(감독판) 필름은 유실된 상태이다.[8] 애니메이터 마사 시걸(martha sigall)의 언급(2005년)[9] 총통각하의 낯짝에 밀려 수상받진 못했다.[10] 1988년 방영된 Tex Avery: The King of Cartoons 다큐멘터리의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내용에 의하면 자신이 아는 지인들한테 사용할 수 있는 개그는 모두 사용했으며 얼마나 신선하게 이를 유지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 반영된 작품은 유니버설에서 다시 활동할 때의 작품 중 sh-h-h-h-h-h-h-h 단편이라고 할 수 있다.[11] 다행히도 딸인 낸시 에이버리 어클리(Nancy Avery Arkley)와 그녀의 자녀들은 생존해 있다.[12] 에이버리가 작고한 뒤, 이듬해(1981년)에 방영했다.[13]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보이는 스튜디오에서 일할 때 흡연하는 모습들로 보면 이 습관이 악영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14] 다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러 차례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으로 후보에 올랐던 것과 당대 미국 애니계의 흐름을 보면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15] Above all,(Avery) steered the Warner Bros. house style away from Disney-esque sentimentality and made cartoons that appealed equally to adults, who appreciated Avery's speed, sarcasm, and irony, and to kids, who liked the nonstop action. Disney's "cute and cuddly" creatures, under Avery's guidance, were transformed into unflappable wits like Bugs Bunny, endearing buffoons like Porky Pig, or dazzling crazies like Daffy Duck. Even the classic fairy tale, a market that Disney had cornered, was appropriated by Avery, who made innocent heroines like Red Riding Hood into sexy jazz babes, more than a match for any Wolf. Avery also endeared himself to intellectuals by constantly breaking through the artifice of the cartoon, having characters leap out of the end credits, loudly object to the plot of the cartoon they were starring in, or speak directly to the audience.[16] 이후 에이버리의 작품들에서 드러난 연출 기법과 공식들을 분석한 도서 Le Mystère Tex Avery를 쟝 두셰, 쟝 피에르 베르토메, 마르셀 고트리브와 협력으로 집필해 1988년에 발간하기도 했다.[17] 안노 히데아키는 1996년 당시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톰과 제리랑 텍스 에이버리의 작품들을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으며, 유아사 마사아키도 영향을 주로 받은 작품으로 인터뷰에서 텍스 에이버리의 작품을 언급하기도 했다.[18] 단, 창작자는 이 작품을 텍스 에이버리 작품에 대한 오마쥬라고 소개했으며, 텍스 에이버리의 딸이었던 낸시 에이버리가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을 부담하고자 작품에 텍스 에이버리의 이름을 쓰는 데 동의했다.#[19] 에이버리의 작품들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1920~30년대의 미국 영화들과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인기 코미디 영화 배우들이었다.[20] 서로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의 '터마이트 테라스'라 불린 작업실에 같이 일했던 절친, 거의 말년(1975년)에 서로 밥 크렘펫에 대한 견해가 담긴 편지#를 보낸 일도 있었으며, 서로간의 말년까지 교류를 활발히 이어갔다. 척은 에이버리의 부고를 접하고 며칠 뒤 로스엔젤레스 트리뷰 지에 추모사를 기고했으며, 동시에 그한테 받은 6가지 영향점을 서술하기도 하였다. 기사 이미지 자서전 Chuck Amuck에서도 에이버리를 천재로 평가하며 그의 명석함에 대해 무지했었던 마이너 시절의 본인에게 애니메이션은 타이밍의 예술이며, 모든 코미디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실을 일깨워준 멘토이자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 해리 랭던, 로렐과 하디와 같은 타이밍의 대가라고 서술하기도 했다.[21] 발언 원문: Avery was a genius. As one of his animators in the later 1930s (at Warner Bros.), I was as ignorant of his genius as I supposed Michelangelo Buonarroti's apprentices were oblivious to the fact that they, too, were working with a genius. But Avery's brilliance penetrated the husk of my self-assured ignorance, the ignorance that encases most twenty-year-olds. In spite of myself, I learned from him the most important truth about animation: animation is the art of timing, a truth applicable as well to all comedy. And the brilliant masters of timing were Keaton, Chaplin, Laurel and Hardy, (Harry) Langdon—and Fred (Tex) Avery.[22] 워너 브라더스에서 활동할 당시, 루니 툰 제작 과정에서 서로 교류했던 동료 애니메이션 연출가.[23] 원동화 애니메이터로써 실력이 드높은 애니메이터였으며, 당시 에이버리 본인이 연출한 작품들에서 주요 애니메이터로 기용했지만 프리즈나 척과 마찬가지로 허물없는 친구나 다름없이 지냈다.[24] 터마이트 테라스 내부의 애니메이터와 감독들과도 큰 탈 없이 원만한 사이였지만 크렘펫에 대해선 (위의 편지에서 나온 이야기로 인하여) 말년쯤엔 애매하게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도 척 존스처럼 절연 관계까지 가진 않았으며, 이 사태는 크렘펫과 척 둘 중 어느 1명만 잘못이 있다고 판정지을 순 없다. 2년 후(1977년) 편지를 읽고 척에게 답변한 점들에 대해 같이 만난 밥의 지인 밀트 그레이(milt gray)한테 유감을 표하고 사과하기도 했다.[25] 194~50년대에 같은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안면을 쌓았으며, 훗날 에이버리를 해나-바베라 프로덕션의 작품 제작에 참여시켜주기도 했다.[26] 에이버리가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 연출가에서 은퇴한 이후 서로 교류하였던 애니메이터이자 친구.[27] 유니버설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던 시기, 에이버리가 그의 휘하에서 원화 애니메이터로 일했었다.[28] 단편 카툰엔 별다른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에이버리의 카툰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다고 예상하여 MGM 카툰 스튜디오에서 그의 작품들을 제작하는 제작자로 활동했다. 에이버리와 Blitz Wolf 단편 제작과 symphony in slang 단편 제작 전후에 불협화음을 빚은 적도 있었다고.(전자는 제작 완료 후에 아직 전쟁의 승패가 확실히 결정되지 않았는데 히틀러를 너무 거칠게 묘사했단 지적을 들었다고 하며, 후자는 작품의 플롯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해 제작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29] 개인적으로 소심스러운 면이 공통적이었던 서로의 성격상 대놓고 경쟁하던 관계는 아니었지만 194~50년대에 디즈니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이 제작에 참여한 디즈니 단편들에서 에이버리의 기법들이 오마쥬된 작품들이 많았고, 1970년대에 에이버리 또한 한 인터뷰에서 우리(터마이트 테라스)는 디즈니가 하지 못했던 것을 시도하러 노력했다고 언급한 장면이 있었다.[30] 루니 툰 & 메리 멜로디즈 단편의 193~50년대 음악 뮤지션.[31] MGM의 193~50년대 단편 카툰 음악 뮤지션.[32] 루니 툰 제작에서 활동한 몇 안되는 여성 직원이자 잉크 & 페인트 담당 직원으로, 그녀의 증언에 의하면 에이버리는 잉크 및 페인트 부서를 방문한 몇 안되는 연출가였으며, 질문에 대해 답변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몇몇 아티스트가 에이버리의 연출 작품에서 나온 거친 액션을 비판할 때, 에이버리는 시간을 내어 그들한테 이론적 근거를 설명해주기도 했었다고 언급했다.[33] 에이버리가 작품을 만들 때 주로 기용한 스토리 작가1.[34] 에이버리가 작품을 만들 때 주로 기용한 스토리 작가2.[35] MGM에서 드루피를 담당한 전담 성우이자 영화 배우.[36] 애니메이션 역사가이자 웹사이트 CartoonResearch의 설립자.[37] 1966년 미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전문 매거진을 발간한 애니메이션 역사가.[38] 원래는 로버트 매킴슨, 멜 블랭크, 척 존스도 인터뷰할 예정이었지만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