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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6:49:45

낭만주의

로맨티시즘에서 넘어옴
1. 개요2. 배경3. 미술에서4. 문학에서
4.1. 한국 낭만주의 문학
5. 음악에서6. 체스에서7. 기타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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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Romanticism[1]

개성이 없는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창작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문학 작품·그림·음악·건축·비평·역사편찬의 특징을 이루는 정신적 자세나 지적 동향. 자유로운 공상세계를 동경하기도 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위에서 쓴 바와 같이 고전주의와 대립되는 사상이다.

한편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상이기도 하다. 고전역학이 성공하고 과학이 성장하면서 몇몇 사상가시인들이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들의 주장이 호응을 얻으면서 낭만주의가 크게 일어났다. 이들은 인간을 중시하고 자연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하는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고 주장하며 자연을 분석하지 말고 상상력으로 통찰하라고 주장한다.

낭만주의가 크게 일어난 곳은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과 대륙 철학의 고장이었던 독일이었다. 이 중 영국의 1세대 낭만주의자들은 과학이 자연을 분석하는 것이 자연을 파괴하고 죽은 자연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과학과 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은 인식을 통한 재창조로, 영국 1세대 낭만주의자들은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죽은 자연을 살아있는 자연으로 바꾸고자 하였다.[2] 맥간[3]은 이러한 인식의 재창조를 하나의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당시에 2세대 낭만주의자들은 오히려 다양한 과학 지식을 섭렵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사상, 예술을 형성하게 된다.[4]

2. 배경

18세기까지 유럽의 주류 예술이었던 바로크/로코코 양식은 왕족귀족취향에 맞게 장엄하고 화려한 표현을 추구하였다. 반면에 18세기부터 흔히 부르주아라고 일컫는 상공업으로 부를 쌓은 시민들(제 3계급)이 성장하였고 이들이 예술의 주요 소비층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당시 제 3계급 대중들의 취향에 맞는 예술사조가 주류로 떠올랐는데, 이 때 유럽에서 유행했던 예술과 학문의 경향을 일컬어 낭만주의라고 한다.

낭만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시골의 평화로운 전원이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 19세기의 유럽은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급격한 도시화를 겪었는데, 제 3계급 시민들이 난잡하고 혼란스럽게 공업화가 되어 가는 도시와 반대되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환경을 동경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당시 유럽의 시골 농부들이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사람들의 실제 삶은 척박하고 억압적인 것이었기에, 낭만주의에 담긴 것은 귀족의 아름다운 시골 정원이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영웅과 같이 이상화된 모습이었다.

낭만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전통적이거나 이성적인 것 보다는 즉흥적, 감정적, 공상적인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던 시기에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휩쓸고 간 이후 왕정이 복고되면서, 유럽의 정치는 혁명의 열정을 억누르는 동시에 질서정연한 구체제인 빈 체제로 회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정치 환경에 염증을 느끼던 시민 사회의 정열은 문화로 표출되어 감정적이고 공상적인 표현이 문화의 주류가 되었다.

역사학에서는 소비자 층의 변화에 주목하는 반면에, 음악사미술사에서는 낭만주의 시대 예술가들 스스로의 주도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예술가들이 창작자 자신의 세계가 없이 이전에 있었던 것을 챙기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에 대한 반발로 개개인의 공상 세계를 주장하는 낭만주의가 생기며, 이때부터 창작자 자신의 감정과 철학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3. 미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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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자신의 앞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미술에서 계몽주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조를 탄생시켰다. 하나는 이성적인 측면이 강조된 신고전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감성적인 측면이 강조된 낭만주의였다. 낭만주의라고 하였을 때 '낭만'이라는 단어는 중세 유럽의 통속소설을 의미하는 로망(roman)에서 연원한 것이다. 그 연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낭만주의 사조의 유행은 기본적으로 중세, 더 정확히는 유럽의 고딕 문화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비록 낭만주의에 속한 미술가들이 전적으로 중세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중세 통속 소설에서 보여주는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낭만주의가 미술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820년을 전후로 하는 시기다. 하지만 낭만의 기원에서도 설명했듯이 기본적인 생각 자체는 이미 이전 시대에도 존재했었다. 용어 그 자체만을 따져보면 이미 1798년의 문화, 예술 관련 문건에서도 낭만주의란 용어가 보인다. 따라서 몇몇 학자들은 이 점에 착안하여 낭만주의 이전의 경향들을 묶어 전낭만주의시대로 규정하기도 한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것은 두 사조가 동일하게 자연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 두 사조는 같은 자연을 두고서도 그를 이해하는 방식이 상이하였다. 낭만주의의 경우 자연을 억제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하에서 낭만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성,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며 행동할 수 있다면 이를 억제하는 요소들인 종교나 제도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았다. 실천의 측면에서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기존의 규범적인 표현 형식을 탈피하고 주제도 고전주의적 규범에 의거한 역사, 신화화를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시기 화가들에게 부각된 것은 광기가 휘몰아치는 광경, 이국적인 전설과 자연의 풍경과 같은 것들이었다.

낭만주의 사조의 기본적인 생각 속에서 예술가 본인의 존재는 이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조들보다 중요하다. 결국 감성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주체는 예술가 개인이고 따라서 개인의 표현이 예술의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만큼 예술뿐만 아니라 예술가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고민한 사조는 없었다. 낭만주의 작가들이 고백록적인 성격을 띤 자서전이나 자화상 등을 자주 그렸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몇몇 낭만주의 작가들은 이 시기 자주 그려졌던 풍경화를 자화상의 일종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터너의 경우 자신의 대표작 <눈보라- 항구 어귀에서 표류하는 증기선>을 그린 후 "난 단지 이런 장면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중략)...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이 그림을 좋아할 의무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가 보기에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외양을 표현하는 것이 자기 표현의 수단이었고 따라서 굳이 남들에게 이해 받아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프리드리히도 인체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거대한 자연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예컨대 그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통해서 개인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비단 낭만주의 사조 속에 들어간 생각 뿐만이 아니라 낭만주의 미술가 개개의 삶도 여타 다른 사조와는 두드러지게 미술 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점이 많다. '광인'이라 불렸던 테오도르 제리코는 3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윌리엄 터너는 말년에 은둔 생활로 시종일관 바깥 세계와 격리된 삶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는 검은 방에서 독수공방하였던 프란시스코 고야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의 미술 사조와 삶이 밀접하게 연관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유럽 세계의 변화와 빈체제로 대표되는 반동적인 경향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혁명의 실패에 따른 개인의 충격이 '낭만주의적인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것은 비단 한 개인의 내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넘어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로 대표되는 18세기 ~ 19세기 초의 미술 경향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사실이기도 하다.

풍경화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미술사를 바라보면 낭만주의는 풍경화를 역사화와 동등한 지위로까지 올려놓은 사조라고 볼 수 있다. 미술사의 큰 역사에서 르네상스 이후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역사화가 이제 풍경화의 부각으로 인해 독점적인 우위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후 역사화가 그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아카데미 미술 체제에서 역사화는 중요한 장르였고 평가도 다른 여타 장르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만약 낭만주의자들이 풍경화의 지위를 상승시켜 놓지 않았다면 이후의 ism시대로 상징되는 19세기의 여러 사조들이 풍경화를 통해서 자신의 사조를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발 더 나아가 장르간의 위계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위계 자체가 18세기의 구체제를 답습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낭만주의자들은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풍경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려고 했고 그러한 가치는 '영웅적인 풍경화', '종교적인 풍경화'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 두 용어는 풍경화와 낭만주의 그리고 낭만주의가 존재할 수 있었던 문화적인 배경을 동시에 설명해주는 용어 중 하나다. 영웅적인 풍경화라는 단어에서는 12~13세기 중세의 영웅담에 대한 낭만주의자들의 관심과 이를 풍경화로 은유, 혹은 전이하여 드러내려는 화가들의 생각이 드러나고 종교적인 풍경화라는 점도 중세 고딕의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경화라는 수단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당대 낭만주의 작품들의 양상에 큰 역설을 드러낸다. 즉, 낭만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화가들조차도 신고전주의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화의 내용을 담은 경우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색채라는 것은 역으로 그들이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탈피했던 종교적인 색채를 주관적인 영역에서 다시 적용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것이 낭만주의가 사상적으로 오류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역설. 그 자체도 사실은 낭만주의의 주관성과 역동성이 파생한 한 단면인 것이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자기 탐구는 창조성의 발견이라는 점이 핵심이었다. 양식의 기원에 있어 낭만주의는 결국 18세기에 발생한 일련의 억압적인 체계들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미술의 측면에서 이런 억압은 표현 형식, 주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고 그것은 역사화로 대표되는 정형화된 미술 형식을 낳게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줄곧 염두에 두었던 창조성이라는 점은 18세기 미술이 보여주었던 다소간의 획일적인 시점에서 탈피하고자 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낭만주의 예술을 특징짓는 기본적인 속성은 반항, 소외, 고통, 광기등과 같은 단어로 규정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낭만주의는 개인의 창조성 탐구, 현실 세계에 대한 절망으로 인하여 현실도피적 성격을 띠는 경우도 많았다.

4. 문학에서

문학계 역시 독창적인 걸 추구하는 한편 감성과 이상세계, 이국적인 경향을 추구한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노발리스의 <푸른 꽃> 등의 작품을 비롯해 윌리엄 워즈워스, 위고, 바이런, 하이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등이 여기에 속한다.

4.1. 한국 낭만주의 문학

한국의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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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날개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태평천하, 염상섭삼대가 있다.[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고전문학 · 장르 문학 }}}}}}}}}


한국에서는 1920년대 초에 3.1 운동이 실패로 끝난 암울한 정서를 바탕으로 감상적이면서 퇴폐적인 낭만주의 문학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이상화가, 대표적인 작가로는 김동인이 있다.

5. 음악에서

서양 음악사의 시대 ·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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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에서 낭만의 표출과 심정의 주관적 표현을 중시한 19세기 유럽음악을 칭한다.
음악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 중 하나이다. 1810년대부터 1920년대[5][6][7] 사이로 간주되며, 흔히들 19세기 음악이라고 하면 이 시기를 통칭한다. 이 시기를 수식하는 데는 주관적, 개인적, 극단적, 비현실적, 초자연적과 같은 어휘가 붙으며, 고전주의에서 탈피하는 모습이 보인다.

고전주의 음악을 아폴론적 음악이라고 흔히들 일컫듯이, 낭만주의 음악은 디오니소스적 음악이라고들 한다. 중세를 모델로 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인권과 개인주의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시기에는 다른 분야의 예술과 통섭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데, 문학가나 화가들과 밀접하게 주제의식을 교류하는 면이 있다.

산업사회가 진척된 결과로, 악기가 개발됨으로써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며, 늘어난 음악 수요에 맞춰 공개음악회를 위한 연주홀이 개장되기도 한다. 이것들은 시간이 지나서 그 지역의 좋은 랜드마크가 된다.

비루투오조와 같은 명인기를 갖는 대가가 출현, 이 중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는 '초절기교연습곡' 같은 고난이도 연습 프레이즈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실용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지옥의 메커니컬 트레이닝 시리즈가 이 시기에 나왔던 거나 다름없다.

예술가곡(시+노래)으로서 쇼팽, 프란츠 리스트, 슈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 등이 아성을 떨쳤으며, 당시로서 이국적이라 평가받았던 스페인이나 튀르키예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를 관통하는 유명한 음악으로 슈베르트의 Sonata en A minor Arpeggione D821이 있다.

낭만파와 현대음악 사이에 '후기 낭만파'가 들어가는데, 이때는 화음, 불협화음 모두 최대치로 쓰이게 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트리스탄 코드가 그 예시. 그래도 아직까지는 조성이 살아있지만. 리하르트 바그너, 주세페 베르디, 안톤 브루크너, 자코모 푸치니, 구스타프 말러가 여기에 속한다.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인상주의 음악의 클로드 드뷔시도 있다. 바그너를 가리켜 '새벽으로 위장한 황혼'이라 표현할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모양을 보였다.

자세한 건 클래식 관련 정보로.

6. 체스에서

현대와 같은 규칙이 정립된 르네상스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체스를 낭만주의 시대의 체스라고 한다. 이 시대에는 공격과 희생 위주의 시원시원한 경기가 대세였고 빠른 공격이 미덕으로 취급받아 조금이라도 질질끌면 나쁜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더 빠른 전개와 공격을 할 수 있는 킹즈 폰 오프닝이 주로 플레이되었으며, 퀸즈 폰 오프닝은 인기가 없었다. 킹즈 갬빗, 에반스 갬빗 한 두개를 희생하면서 공격을 진행하는 갬빗의 인기가 높았다.

낭만주의 스타일의 유명한 경기로는 폴 모피오페라 게임, 아돌프 안데르센임모탈 게임, 에버그린 게임 등이 있다. 모두 을 희생해가며 신묘한 체크메이트를 만들었다는 특징이 있다.

초대 체스 세계 챔피언 빌헬름 슈타이니츠가 포지셔널 플레이 개념을 창시한 이후에는 사장되었고, 2010년대에 와서 체스엔진이 놀랍도록 강하고 빨라진 후에는 무모한 희생/공격수의 허점이 실시간으로 점수화되면서 더더욱 부침을 겪는다. 현대에는 가끔씩 프로 기사 출신 스트리머들이 인방 컨텐츠로 쓴다. GM 레벨의 프로 기사가 실전에서 쓰는 경우는 망누스 칼센같은 최상위 기사가 한두 단계 낮은 레벨의 GM들을 양학하거나, 상대보다 한수 낮아 무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선수가 본인보다 강한 상대를 대상으로 변수를 창출하기 위해 깜짝수로 들고 나오는 정도다. 물론 60년대까지만 해도 미하일 탈같은 공격에 미친 인간들이 최상위권에서 낭만주의적인 라인을 들고 날뛰는 경우가 있었다

7. 기타

스포츠 분야의 낭만주의는, 한 종목의 기본 전략이 설계, 예측, 수읽기로 자리잡기 전 공격만이 유일한 전략이 되어 난타전이 난무했던 시기를 낭만주의라고 한다. 체스, 스타크래프트 등이 낭만주의가 있었던 스포츠의 예시이다.

무언가 나타내려는 점에서 상징주의와 혼동하기 쉬운데,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처럼 대놓고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은유 등으로 돌려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낭만주의는 직구, 상징주의는 변화구 정도에 가깝다.

낭만주의는 각국에서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고 근대화가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마침내 인간의 실제 삶에 치중하는 리얼리즘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8]

낭만주의는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면서, 19세기 중반,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 사조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는 당시의 지식인 혹은 문학가였던 랄프 왈도 에머슨이나 마가렛 풀러 등에게 영향을 준다.

주로 예술 분야에서 논의되나, 예술을 넘어서 정치,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되기도 한다. 이럴 경우 낭만주의는 보수적 성격, 진보적 성격 모두를 띌 수 있다.

낭만주의의 영단어는 로맨티시즘(romanticism)으로, 이에 대응하는 '낭만주의자'의 뜻을 지닌 영단어는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이다. 그러나 이를 로맨티스트(romantist)라 알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로맨티스트'는 틀린 단어이니 '로맨티시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전쟁에서는 1차 세계 대전에서 지원병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진 것에 대해 벨 에포크 시기의 영웅담이 썩인 낭만주의에 매료된 젊은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수십년간 끔찍한 전쟁이라곤 특별히 없었고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GDP는 올라 영웅담에 대한 소비가 증가됐고 뭘해도 성공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천둥 번개 폭풍이 쳐도 우산을 쓰거나 비옷을 입는 건 겁쟁이나 하는 짓이며 언제나 당당하게 걸어야한다는 마초 문화[9]와 멋있는 흉터가 없는 남자는 남자라고 보지 않는 풍조가 만연했고 사나이간의 결투도 여러번 치를수록 남자답고 결투 한번 치르지 못한 겁쟁이는 pussy라는 이야기[10]와 남자라면 전쟁에 가서 성인식을 치러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상남자 특징 시리즈마냥 가볍게 나돌며 전쟁에 회의적거나 비극적인 이야기는 재미없고 겁쟁이같다는 이유로 묻힌다.

Mrs. GREEN APPLE의 싱글 앨범 ロマンチシズム(로맨티시즘)

8. 같이 보기


[1] '낭만'이란 단어일본에서 나쓰메 소세키가 로맨티시즘을 음차하면서 쓰게 된 표기로, 이 표현은 원래 '제멋대로 하다'라는 뜻이었다. 한국어로는 '낭만'이지만 일본어 발음은 '로망'으로, 한국에서 낭만주의와 로망, 로맨티시즘이 주는 어감이 다르지만 일본에서는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인다.[2] 윤효녕 외, '19세기 자연과학과 자연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p105-106[3] McGann, Jerome J. The romantic ideology: a critical investiga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5, p91[4] 윤효녕 외, '19세기 자연과학과 자연관',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p113-115[5]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후기 낭만파, 민족주의 음악(국민악파) 등으로 나눠진다. 간단하게 슈베르트와 말러의 곡을 비교해보자.[6] 이후 시대도 낭만파 음악(~1960)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세기 전환기 음악이라고 별개로 분류하기도 한다.[7] 또한 베토벤 사후부터 2차 대전까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8] 윤효녕 외,'19세기 자연과학과 자연관',서울대학교 출판부,1997,p160[9] 이건 지금도 하류층들 사이에선 성행하는 문화다.[10] 당시에는 여성참정권은 커녕 법적 남성 보호자가 없어도 재산을 가질 수 있다는 여성 재산권이 겨우 통과된 시기였고 남자에게 여자같다는 건 극심한 모욕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