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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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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3. 역대 봉호

1. 개요

관우인기에 대한 문서다.

2. 목록

2.1.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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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베이성 징저우시[1]의 초거대 군신 관우 동상.[2]
2021년 9월 1일부터 해당 동상은 철거가 시작됐다.[3]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관우를 존경하여 관공(關公), 관노야(關老爺)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4][5] 원나라 시대 초기 판본인 삼국지통속연의에서는 아예 도원결의 때부터 유비는 현덕, 관우는 관공, 장비는 그냥 이름으로 불린다. 이런 식의 삼형제의 호칭은 황제로 즉위한 유비의 호칭이 선주로 바뀌는 것만 제외하면 세 명이 죽을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위진남북조 시대 일개 장군으로 묘사되던 관우가 수당 시대를 거치며 무성왕묘 종사를 통해 국가사전에 편입되었고, 다시 송원 시대에는 후에서 공으로, 다시 공에서 왕으로 신분의 급상승을 이루었다. 관우 신격화가 절정에 이른 명청 시대에 이르면 왕을 넘에 제로 등극하면서 삼계를 통섭하는 최고의 권능을 부여받게 된다. 이렇듯 관우의 이미지는 역사에서 생활로, 영웅에서 신으로 변화되었다. 자연신에서 가정으로 들어옴으로써 백성에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생활 신앙과 도덕정신에 영향을 미쳤고, 그는 정신적 수호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역사상 통지자가 관우에게 내린 봉호는 다향했지만, 결국 국가의 재난 해소와 봉건 통치의 유지와 보호라는 정치적 필요성이 깔려 있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본 관우 신격화의 역사적 변모양상 고찰[6]

본래 관우는 조익이 지적했듯이 장비와 함께 남북조 시대에는 관장지용이라고 해서 용맹한 장수의 이름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주로 쓰였고 사후에 지역의 수호신이라 할 수 있는 성황신으로서, 형주에서 지역신으로 숭배되었던 기간이 상당히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남조 양나라 말기 후경의 난(548~552)때 난을 진압하던 육법화가 후경의 부장 임약을 대파한 일이 있었는데 많은 강릉의 신들이 육법화를 도왔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때 관우의 신령도 그를 도왔다고 한다.
촉나라(蜀)의 전장군(前將軍) 관우(關羽)는 형주를 지키다가 돼지가 발을 무는 꿈을 꿨는데, 스스로 상서롭지 못하다 여기며 말하자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도 노쇠하였구나! 만약 오나라를 정벌한다면 나는 필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과연 관우는 오나라 장수 여몽의 휘하에게 처형되고 촉나라는 형주를 잃고 말았다. 천하 사람들이 옥천사(玉泉祠)를 일컫기를 사방이 끊어지는 곳(四絕之境)이라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사당을 일으켜 세운 공은 귀신의 것이라 했는데, 귀신의 이름은 "삼랑신(三郎神)"이다. 삼랑이란 곧 관삼랑(關三郎)이다.[원문]
운계우의(雲溪友議)

당나라 시대 『형남절도사강릉윤배공중수옥천관묘기(荊南節度使江陵尹裴公重修玉泉関廟記)』에 따르면, 수나라 때 지의(智顗) 선사에게 관우가 나타나, 승방의 수호신으로 하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으며, 남송시대에 쓰여진 불조통기(佛祖統紀)에도 지의선사에게 관우가 나타나 불법에 귀의하였고, 관제보살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8] 지의선사는 수나라 시기의 승려로서, 천태종의 개조로 여겨지며, 형주 출신으로서 금릉에서 활동하였고, 말년에는 고향 형주로 돌아가 옥천사를 건립하였다. 당 고종 의봉 원년(676년)에 관우를 옥천사의 가람 수호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9] 관우 혼령이 옥천사 아래에 머물면서 이 지역의 흥망과 농사의 풍작을 좌우했다는 전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10]

이후 북송에 들어서 민간과 관에서 관우에 대한 신앙이 급속도록 퍼진 것으로 보여지는데 우선 관우의 고향이었던 산시는 소금이 많이 나는 지역이다보니, 중국 역사에 2000년이상 유지된 소금 전매제 때문에 이 지역에는 소금상인이 많아 전매상으로 큰 부를 얻었다.[11] 중국의 상인 집단 가운데서도 으뜸인 관우의 출신지인 진상(晉商), 산시 상인들은 가장 비싼 물건인 소금장사를 하다보니 신용을 으뜸으로 여겼고 관우가 가진 신의, 의리와 충실함을 대변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주군에 대한 신의로 평생을 바친 관우를 동향출신의 영웅이자 롤모델,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삼았고 이후 이들이 전 중국에 퍼지면서 관우는 상인들의 재물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한다. 정작 실제 관우의 생애 자체는 부귀영화를 마다하는 등 장사꾼이랑은 별 관련 없어보이는 듯 해서 한국인들은 관우가 중국에서 재물신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는데, 관우를 숭상한 관우의 동향에 많이 있는 상인들이 중국 전국에서 활동하면서 그렇게 퍼진 것이다.[12]

또 송나라 시기 서민 문화의 발전으로 삼국지에 관련된 이야기들도 각지에서 꽃을 피웠고 관우의 이야기 역시 중요 인기 소재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시기 삼국지 이야기엔 파천황적 서민 이미지인 장비의 인기가 높았지만 관우의 이야기도 퍼져나갔고 상인들이 재물신으로 여기는 풍조로 인해 일종의 신성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관에서도 이런 분위기에 맞추어 관우를 국가의 수호신으로 삼기 시작했는데 1096년 송철종은 관우를 현열왕으로 봉하고 뒤를 이은 송휘종은 충혜공으로 봉하였다. 이후 숭녕지도진군, 무안왕 등으로 높여 국가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어느덧 민간에서는 관우의 혼령이 치우를 물리쳤다는 전설, 연극도 나타났다. 이를 '관운장대파치우(關雲長大破蚩尤, 관우가 치우를 박살내다)'라고 한다.

이 연극은 북송 인종 때에 생겨난 관우 전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연극인데, 이 연극에서 관우는 겨우 조막만한 산의 토지 신 주제에 옥황상제와 7일에 한 번씩 직접 대면할 정도로 위상이 높은 신으로 나온다. 황제 때 치우를 물리쳐 해주 염지에 장사지냈는데 치우 혼령의 행패가 심하니 장천사[13]를 불러 관우의 혼령을 불러 치우를 격파하면 된다 하여 대신 여이간을 옥천산에 보냈고, 관우는 옥황상제에게 신묘한 군사를 통솔하여 해주로 가서 치우를 격파했다는 것이다. 관우가 숭녕진군이 된것은 이 공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연극이다.

치우와 관우가 전쟁을 했다는 전설은 윈청 지역에서 매우 유명한 이야기로 원나라 서적인 <대송선화유사>에 전한다. 저자 미상인 이 책은 송나라 필기소설로 원나라 사람이 편집했다고 한다. 관우와 치우의 전쟁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긴 이는 원나라 사람 호기이다. 그가 편찬한 <관왕사적>의 내용에 따르면 송나라 대중 연간에 염지의 물이 말랐다. 사신을 보내어 알아보니 치우가 염지의 재난을 일으켰다고 했다. 황제는 여이간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 날 저녁에 치우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염지의 주인으로 헌원은 나의 적인데 염지에 헌원사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물을 끊어버렸으니 헌원사를 부순다면 나도 행동을 멈출 것이다."

여이간은 돌아와 이 일을 송나라 황제에게 알렸다. 왕흠이라는 신하가 장천사가 귀신을 잡을 수 있으니 그에게 일을 맡기자고 했다. 궁궐로 들어온 장천사는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것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고대로부터 충성스럽고 절개가 굳은 신하는 죽어 신이 됩니다. 촉한의 장군 관우는 충성스럽고 용감합니다. 폐하께서 그를 불러 치우를 토벌하게 하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장천사는 부적을 이용하여 관우를 불러왔다. 관우는 "신이 어찌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신에게 세상의 신병(神兵)을 모을 수 있게 한다면 황제를 위하여 치우를 제거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홀연히 사라졌다.

어느 날 갑자기 염지 상공에 검은 구름이 일고 큰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고 날이 흐려져 사람들이 두려워했으며 공중의 황금창과 철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구름과 안개가 약해지고 하늘색이 맑아졌으며 염지의 물은 옛날과 같아졌고 둘레가 백 리에 이르렀다. 해주를 관리하는 신하신 왕충은 조정에 이 일을 알렸고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사람을 파견하여 제사를 올렸다. 또 관우의 사당을 수리하고 계절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14] 위에서도 나왔지만 해주는 관우의 고향이며 염지는 소금호수를 뜻한다. 치우 관련으로 언급되는 관우에 대한 이 지역 민간전승도 그렇거니와 이는 관우가 이 지역 소금상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들의 신으로 숭배받았던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관우의 고향 하동군 해현(河東郡 解縣, 현재의 산시성 윈청시) 시내에 있는 소금 호수인 해지(解池)에서는 예부터 소금이 생산되어 이곳의 소금은 당나라 때 장안으로 보내졌다. 산서성 윈청 시 염호 지역에 있는"제저우(解州)의 염지"는 옛날부터 중국의 혼란기에 각 정권이 쟁취하고자 했던 요지로 알려졌다.

원래 중국에서는 궁중에서 군신(軍神)을 제사하는 습관이 있었다. 한나라는 치우를 군신으로 섬겼고 당나라는 강태공을 군신으로 섬겼다. 원나라에서는 마침내 관우가 치우와 강태공을 앞질러 군신의 자리에 올랐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미 송나라 시기부터 민간에 떠돌던 관우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인 주창이 이 시기에 관우를 보필하였다 하여 벼슬을 추숭받았다는 것이다. 이 시기 그려진 관우의 그림[15]에도 주창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하는 등 연의에 나오는 관우의 일화들은 이미 북송 시기에 그 원형이 완성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있다. 이런 민간의 분위기에 맞추고 유교적 충의에도 맞는 관우를 나라의 수호신, 군신으로 모신 듯하다. 중국에서 관우를 재물신, 군사 관련 직종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풍조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생겼다. 이후 명, 청에서도 관우를 황제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높게 추숭해 오늘날의 관우신앙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근세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관우는 나라의 공적인 차원에서 강조한 호국신의 이미지와 민간에서 소금과 관련된 재물신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재물과 복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의미가 컸다. 현대에는 중국에서 군인으로부터 경찰 등 무(武)와 관련된 직종은 물론, 상인,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거의 만능 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민간층에서 폭넓게 사랑받는 신이다.

덤으로 함께 처형된 맏아들 관평도 '알충왕(謁忠王)'이었다가 청나라 시대에는 '영후태자(靈侯太子)'라는 호칭으로 덩달아 신격화가 되었으며, 가공인물인 심복 주창도 항상 관평과 함께 좌우를 시위하는 형태로 '위령우용공(威靈愚勇公)'이라 불린다.

명나라의 서책인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에 따르면 관우의 전생은 해량노룡(解梁老龍)[16]이다. 후한 환제(132~168) 시절, 하동(관우의 고향 사례 하동군)은 큰 가뭄에 시달렸다. 노룡은 민중의 간절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 밤마다 황하의 물을 길어다 비를 내려주었다. 옥황상제는 노룡이 천명을 거스른 것을 알게 되자, 물을 멋대로 취한 죄를 물어 천조(벼슬명)로 하여금 법검으로 노룡의 머리를 참수토록 하고, 그 수급을 지상에 던졌다. 해현(하동군 해현)의 스님 보정은 강변에 노룡의 머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주워 항아리 안에 두고 9일간 경전을 읊었다. 그러자 항아리 안에서 소리가 났는데, 열어보자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 하동군 양평촌에 살던 관씨 가족은 절의 연못 안에서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아이의 아명은 수(壽)이고, 학문을 배운 뒤 장생(長生)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후에 스스로 이름을 우(羽)라고 고치니, 자는 운장(雲長)이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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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무덤 관림

중국은 성인의 무덤을 일컬어 림(林)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에서 무덤에 수풀 림(林)을 붙이는 경우는 딱 두 사람에게 한정된다. 하나는 공자의 묘인 공림이고, 또 하나가 바로 관우의 묘인 관림이다.

베이징에 위치한 역대제왕묘에는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공신의 위패가 모셔졌는데, 관우의 경우 신하의 신분이지만 황제의 칭호를 받은지라 지위가 애매했던 모양인지 공신 위패 중에서 관우만 따로 건물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한수정후 관운장은 유장(儒將)이자 의사(義士)다. 일생의 사업이 공명정대하고 굽히는 것이 없어 사책(史冊)에 널리퍼져 만고에 빛난다. 아래로는 부녀자와 어린 아이에게까지 이르러 그 이름은 진동하고 덕을 흠모하니, 오늘날 향을 피워 제사를 지내고 오래토록 사당에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관우극(關公戱)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한 파로서 다른 극과는 매우 다르다. 배우(演者)는 《삼국연의(三國演義)》를 반드시 숙독(熟讀)하고 정신과 예술 양쪽을 평정해야한다. 이른바 정신이란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악착같은 태도는 버려야하며, 극중의 인물을 굳게 믿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잊은채 경건하고 정성스레 그 신이 옛날과 만나기를 구해야 한다. 마음을 바로 잡았다면 곧장 나아가 예술을 연구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첫째로는 분장한 모습이 영민하고 무위(武威)가 있어야 한다. 분장한 모습이 멋있길 원한다면 특히 얼굴 분장이 닮아야 한다. 관공의 모습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르며 눈과 눈썹의 색이 특이한 점이 있기에 스스로 깨달아야지 말로 전하기는 어렵다. 두 번째로 동작과 표정이 경건하고 엄숙해야 한다. 좋아지길 원한다면 특히나 거동이 차분해야 한다. 관공의 무예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것과는 다르며, 유장으로서의 풍모는 태산(泰山)과 같이 무겁고 지용을 겸비하여 그 신이한 위용은 헤아릴 수가 없다. 용력이 너무 사나우면 조야함이 흐르고, 손과 발에 힘이 없으면 원기가 없어 보인다. 이 때문에 검무를 추며 말 달리는 것을 매우 쉽게 할 수 없으니, 이는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익혀야지만 능히 해낼 수 있다.
국부총간(菊部叢刊)

청나라 때 관우를 연기했던 연극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삼국지연의를 정독해야 하고 관우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하며, 분장을 관우처럼 보이게 멋지게 꾸밀 줄 알아야 하고 관우처럼 보이도록 연기 동작에 신경써야 하며, 칼춤에 능숙해야 하고 말을 잘 타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당시 관우 역할 배우들은 집에 관우의 위패나 조그마한 사당을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향도 피워주고 꼬박꼬박 제사도 지내줬다.

당시 관우 역할 배우들이 관우를 존경한다는건 "아, 천하의 의인이신 관공!" 이러면서 마음으로 경건함과 존경심을 표하는 것도 있지만, 집에 위패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향도 피우고 정기적으로 제사도 지내주는 것까지 포함한다. 특이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관우로 분장하면 공연 시작 전까지는 말 한 마디 하지않는 배우도 있었으며, 집에서 제사 지내고 향 피움은 물론이고 관묘에 정기적으로 나가기도 했다고.

요재지이에 등장하는 설화가 하나 있다. 요괴가 매우 날뛰는데 관성제군은 대체 뭐한다고 안 도와주냐고 욕하던 한 서생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검은 얼굴의 무시무시한 신장이 내려와 요괴를 해치우고는 자신이 주창이라는 것을 밝힌 뒤 관성제군은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라며 관성제군을 욕했던 서생을 혼냈다. 그 서생은 이후로 다시는 관성제군을 욕하지 않고 열렬히 제사를 지냈다. 이 외에도 관우의 인기에 힘입어 나온 설화도 무지막지하게 많다. 주판을 관우가 발명했다는 민간 설화도 있다.

박지원열하일기에서 청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마을이 변방이든, 마을이 궁핍하든 지나가는 모든 마을에 관제묘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관우 신앙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작게는 가게 안이나 마을에, 크게는 각 도시별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제묘(關帝廟)가 존재한다. 또한 관우의 무덤도 중국 내에 다섯 개 이상된다. 참수되어 조조에게 보내진 관우의 수급이 묻힌 낙양 관림(關林)과 머리없는 관우의 몸을 묻은 당양의 관릉(關陵)은 물론이고 관우 옷 무덤, 관우 공적 무덤 등등 확장판이 널려 있다.

중국 연합 준비은행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한 10원 짜리 지폐에 관우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게다가 문화대혁명의 물결 속에서도 관우 신앙만큼은 다른 문화 파괴 행위에 비하자면 멀쩡하게 살아남았단 걸로도 그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최근의 관우라는 인물의 캐릭터 해석에 있어서 창작물에서 관우가 이렇게 저렇게 표현되니 그걸 보고 중국에서 관우의 신성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나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군신(軍神)이자, 재물신인 관우의 위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중국드라마 삼국에서 해석된 '오만한 관우'상을 보고 한국인들이 단편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우의 오만에 대해선 이미 300년전 삼국지연의를 재정립한 모종강부터가 관우가 손권 혼인 거부건으로 '호랑이 자식을 개새끼에게 줄 수 있는가?'[18]라는 모욕을 주어 욕한 발언을 가지고 '그럼 니 의형은 개새끼와 결혼한 셈이냐?'라고 협평으로 깠고 나관중본에서 관우가 신으로 승천하는 장면을 참수당하는 장면으로 바꾸어 놓는등 신으로서 표현되던 관우의 위상을 다시 재창작했다. 그러나 모종강본이 삼국지 독서계를 장악한 청나라 시기였음에도 관우 신앙은 오히려 더 성행하였다.

또 중화권의 유명 삼국지 만화 화봉요원에서 관우는 적장과 일기토를 함과 동시에 군대를 자유자재로 지휘하는 궁극의 신인으로 묘사되고 정사에서 관우가 황충에게 했던 노병 발언을 가지고 "이 우는 노졸 따위와는 같은 열에 서고 싶지 않소. 허나 마지막 남은 촛불이,대지를 불태우며(燎原) 태양과 같이 찬란히 빛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소! 지금 우리 눈 앞에는,천년의 기회가 펼쳐져 있으니까! 이 마지막 한 걸음,관 모는 그대를 위해 남겨두겠소!"라고 삼국과는 다른 방향성으로 관우라는 인물을 어레인지 하고 있다. 굳이 하나의 창작물에서 나오는 관우 캐릭터로만 그 사람들이 '관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편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것이다.[19]

한국인인 우리야 중국인이 아니기에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정사 삼국지삼국지연의 정도만 보고 관우를 판단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관우야말로 자신들의 영웅이며 신이자 전설이며 역사이다. 당장 관우가 지켰던 강릉(오늘날의 후베이성 징저우시)을 보자, 오늘날 위에 보이는 거대 관우동상까지 지은 그곳에서는 예전부터 옛 관우의 관저에 관제묘를 지어 그를 기렸으며 연의는 뺨칠 관우에 대한 전설들이 널리 전승되고 있는데 한 예로 당시 관우의 고함소리에 이곳에 있던 바위들이 모두 놀라 북쪽을 향해 솟았고 백성들이 ‘관우의 고함소리에 놀라 산속의 바위들이 하늘을 향해 솟았네, 마치 제갈량의 팔괘진을 보는 것 같으니 이에 놀란 여몽의 병사 수만명이 퇴각했네’라고 민요를 지어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조의 본거지 한단에서조차 관우가 조조와 지혜 대결을 벌여 간교한 조조의 속임수를 바로 통찰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으며 산시성 난중탸오산(南中條山)에선 80m에 달하는 관우 동상을 세우고 이를 제작하는데만 1억위안, 우리돈으로 180억원 가량을 들이고 정부 지원 없이 현지 민영기업이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실제 중국인인 장위안조차 '관우는 중국에서 위인이며 제사를 지낼 정도로 좋아한다.'라고 하는 마당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물론 장위안은 다른 예능인 '영웅 삼국지'에선 관우보다도 악비가 더 영웅적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악비 역시 불멸의 영웅으로서 중국에선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그런 그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특이한 일이 아니다.

관우가 유비와 떨어져 조조 수하로 있을 무렵에 관우가 유비가 원소 휘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나무 그림과 시를 지어 유비에게 보냈다고 전해지는 시죽도(詩竹圖)가 있다. 이를 조조가 알았으나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해당 내용의 출처는 명확하지 않은듯 하나. 청 성조(강희제)조인 1716년에 한재림(韓宰臨)이 해당 그림과 시를 비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서안비림박물관(西安碑林博物館)에 소장 중이라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일:a0306823_54e6e985bac31.png
不謝東君意 동군(東君/조조)의 호의(意)에는 불사(不謝/감사하지 않음)하며,
丹青獨立名 (대나무와 같은) 단청(丹青/진한 청색)으로 홀로 입명(立名/이름을 세움)하겠습니다.
莫嫌孤葉淡 고엽(孤葉/홀로 남은 마지막 잎새)의 담(淡/색이 엷어짐)을 혐(嫌/의심)하지 마시오며,
終久不凋零 종구(終久/끝내 변하지 않음)하여 조령(凋零/말라서 떨어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창에는 '관공사조처'라고 해서 관우가 유비의 소식을 듣고 조조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하러 찾아간 곳도 있다. 하지만 조조는 아프다는 핑계로, 때로는 출타 중이라는 이유로 관우를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관우는 한 통의 서신을 남기고 떠나게 되는데 바로 '관공사조승상서'다. 이곳의 정문을 들어서면 관우와 조조가 이별하는 장면이 담긴 거대한 석상이 나온다. 이 석상 앞에는 관우가 조조에게 보낸 편지 '관공사조승상서'가 적힌 비석 모양의 석상이 있다. 왼쪽 길로 빙 돌아 들어가면 정자가 있고 연못이 파인 작은 정원이 나오는데 바로 '청매정'으로 논영회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관우와 조조가 이별했던 다리의 본래 이름은 허창과 팔리 떨어져 있다고 '팔리교'였다. 하지만 당나라 때 장안의 '파릉교'가 '버들가지를 꺾어서 먼 길을 떠나는 연인이나 벗에게 보내는 이별의 장소'로 유명해지자 <삼국지연의>에서 팔리교를 파릉교로 개명해 가져다 썼다. 팔리교가 있던 장소는 허창시에서 서쪽으로 8리 정도 떨어진 '석양하'라는 마을이었다. 다리는 당시로서는 꽤 컸던 것으로 길이가 90미터에 이르고 다리 위로는 마차 두 대가 서로 교행할 수 있었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하천은 '청니하'라 불렸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간 시점은, 유비가 원소의 명을 받들어 허도의 남쪽 여남군을 공략하고 있을 때였다. 여남군은 허도(허창)로부터 불과 300여 리 정도 떨어진 거리였기에 3일이면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현대에서는 2016년 PC방을 홍보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1:1 동양풍 복장을 한 가렌 피규어를 관우로 착각해서 절을 올린 할머니가 있다. 기사

한편으론 의리의 화신이라는 점 때문인지 삼합회와 얽히기도 한다. 관우상 앞에서 신참들의 가입식을 치르거나, 적대 조직과의 싸움에 나가기 전에 관우상 앞에서 기도하는 식이다. 관우가 과거 소금과 관련해서 의적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내용이 삼합회가 '자칭'하는 의리파 이미지와 비슷해서 써먹는 듯하다.

2.2. 한국

2.2.1. 역사

한국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관제묘가 들어서는 등 명나라 군이 관우 신앙을 전파했다. 이 당시에 관우가 전장에서 나타나 왜군을 베었다는 이야기도 꽤 퍼졌는데, 아무래도 언월도 들고 설친 명군을 보고 설레발을 친 듯하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유격 진운홍이 울산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숭례문 밖에 머물렀는데 후원(後園) 위에 있던 오래된 집을 관왕묘로 바꾸고 소상(小像)을 설치하고자 조선 조정에 장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건물이 남묘가 되었는데 1598년이었다. 1599년에는 조선 조정에서도 공식적으로 관왕묘의 건립이 논의되었고 1601년 8월에 가서야 일단락되었다.

명군이 지은 대표적인 관왕묘가 임란 중 진린전남 완도군 고금면 묘당도에 세운 관왕묘인데, 1666년 현종 때 관왕의 양 옆에 이순신 장군과 진린 장군의 초상을 모셨다. 일제강점기 때 관왕묘는 폐허가 되었고, 이후 사당은 이순신의 사당으로 변해 관왕묘비만 남았다. 이외에도 명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이 함께 싸운 남해안 일대에 이순신의 사당과 관묘 등이 들어섰다.

선조 때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나라 지원군이 조선에 와 있었는데, 명군은 관우 신앙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명나라 장군 양호가 선조에게 '관우의 생일(음력 5월 13일) 관왕묘에 왕께서 직접 오셔서 술 따르고 사배례를 하시라.' 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관우랑 하등 관련도 없는 이 땅에 명나라 군이 와서 이김은 관우가 직접 오셔서 싸우신 덕이니, 조선 왕은 마땅히 관왕께 감사의 예를 표하라.'는 이유였다. 당시 조선에서도 물론 관우의 인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이런 붕 뜬 이유로 일개 장군이 타국의 왕에게 사배를 강요하는 것은 마땅히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허나 거부하자니 명군의 심기를 거슬러 명군이 철군해버릴까 두려워 선조는 결국 울분을 참고 관왕묘에서 삼작[20]에 사배를 올려야 했다. 별 것 아닌 듯 느껴져도 충분히 삼전도의 굴욕에 버금갈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21] 이 일을 계기로 수많은 명군 장수들이 너도나도 선조에게 요구하여 조선 여기저기에 관왕묘가 들어섰다.

임진록에서는 관우 신령이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꿈에 나타나 "만력제는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의 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니,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라"고 말한다. 전란 중 관우의 음덕(陰德)으로 임진왜란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믿음이 명나라 병사들과 같이 싸우던 조선의 병사들에게도 퍼져나가 민간신앙으로 정착한 듯 보인다. 그리고 이런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당시 만력제는 조선에 병력과 물자를 파격적으로 지원하여 심지어 '고려천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기담서로 임방(1640~1724년)이 지은 <천예록>에도 관우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강을 건너던 한 선비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서 "잠시 후면 어떤 나무 상자를 들고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들에게 내가 그대 손에 그려준 문양을 보여주면 알아서 정리될 것이다. 그리고 궤짝을 쌓아두되 절대 열어보지는 말고 신속히 조정에 보고하여 속히 태워 없애 버려야 한다. 이는 나라의 대사이니 결코 처리가 잘못 되어선 안된다"라고 말했는데, 놀라서 깨어난 선비가 자기 손을 보니 과연 관우가 써준 문양이 있었다. 이후 정말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무 상자를 나루터에 내리려 들 때, 선비가 그들에게 문양을 보여주니 놀라서 혼비백산하다가 전부 물에 달려가서 빠져 죽었다. 이후 선비는 주변사람들에게 "상자를 절대 열지 말고, 대기하면서 지키라"고 명한 후 근처 관청에 자기 얘기를 들려주고, 놀라 달려온 병조의 관헌들과 함께 불에 상자를 태워 없앴는데, 타면서 드러난 상자의 안에는 나무로 된 군사와 군마의 모형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모형들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로서 요사한 자들이 환술을 부려 도성을 혼란하게 하려는 수작이 드러났다." 하는 기술로 보아 모종의 사악한 주술을 걸려는 세력이 있었던 모양.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관우 신앙은 더욱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숙종은 본격 관우 빠돌이로 신하들에게 관우 신앙을 강요했다. 관왕묘에 지내는 제사를 정례화하여 국가 차원으로 관우를 섬겼고, 자신의 뜻대로 모든 지방의 관왕묘에 정기적으로 향축을 올리라 명령했다. 당시 좌의정 서종태는 숙종에게 '과도한 관우 신앙을 자제하라.'고 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았다. 숙종은 1692년에 시 2수를 지은 후 어필 목판을 내려 동묘와 남묘에 걸어 두도록 했고, 1701년에는 모든 지방의 관왕묘의 제식을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고 하였으며, 매년 경칩상강일에 향축하도록 하였다. 경칩과 상강은 조선의 공식제례법에서 병조판서를 포함하여 무관들이 둑기(纛旗)에 제사를 드리는 날이다. 관우를 그날에 제사지내도록 함은, 관우를 군신(軍神)으로서 조선의 제례에 집어넣으려는 의도일 공산이 크다.

영조는 1746년에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라는 현판을 써서 두 관왕묘에 걸도록 했다. 정조도 관왕묘에 관심을 기울여, 1786년에 친히 관묘악장(關廟樂章)을 지어 처음으로 관왕묘의 행례(行禮)에 쓰게 하였다. 1832년에는 순조가 남관왕묘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이후 고종 황제도 관우 신앙에 마음이 많이 기울었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 관우를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로 추존했다. 고종대에는 북묘와 숭의묘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북묘는 1883년(고종 20)에, 숭의묘는 1903년에 완성되었다.

대한제국기인 1908년에는 칙령 제50호 향사이정에 관한 건(享祀釐正件)이 통과되어 관왕묘는 국가의 관리대상에서 제외된다. '기존의 조선 예절은 너무 번잡하여 근본을 잃게 되었으니, 이른바 유신(維新)을 지향하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제실(帝室)에 관계되지 않는 제사는 궁내부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 칙령의 요지였다. 이 칙령에 따라 숭의묘ㆍ동묘ㆍ남묘ㆍ북묘 및 지방 관왕묘의 제사가 폐지되었고, 숭의묘와 북묘는 국유로, 동묘, 남묘 및 지방 관왕묘는 해당 지방 관청으로 넘겨 백성들의 신앙에 따라 따로 관리하도록 했다. 이 시기 대한제국은 말이 제국이지 사실상 통감부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일제가 조선의 법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같이 폐지된 것 같다. 이후 서묘는 1909년 동묘에 합사(合祀)되었고, 북묘는 1910년에 헐어버려 흥인지문 밖에 위치한 동묘만 남게았다.

관우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무당 진령군명성황후의 앞일을 몇 개 기똥차게 맞추자, 명성황후는 진령군을 거의 숭배자 수준으로 믿게 되어 황실의 돈을 엄청나게 탕진했다. 해방 전후 정치인 여운형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당시 명성황후가 아꼈던 무당 진령군이 여씨 집안을 '관우를 죽인 여몽과 같은 성씨 쓰는 집안'이라고 저주하는 일이 있었는데, 안 그래도 정계에서 멀어진 여씨 집안은 출세길이 아주 막혀버려 정치 문제에 신경이 곤두섰다. 이 때부터 여운형은 본격적으로 구습을 타파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여운형은 어려서부터 미신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성이 여씨인 사람이 관우 사당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미신이 있었는데도 예전부터 관우를 모시는 사당에 들락날락하기도 했다고 한다. 을미사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당 진령군도 죽었다고 한다.

강일순이 독자적으로 작성한 주문 운장주에서는 관우를 정의로운 신으로 인정하여 '요사한 것들을 쫓아주십시오.' 하고 청하는데, 운장주 때문에 증산교 측에서는 관우는 중요한 신으로 취급된다. 관우 신앙이 사그라든 현재 국내에서 전해지는 관우 신앙은 대부분이 증산계나 무속 신앙에서 비롯된다.

사실 본격적으로 관우를 신으로 모신 한국의 신흥종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20년 박기홍, 김용식 등이 창시한 관성교(關聖敎)라는 종교인데 관우를 숭배하던 종래의 숭신단체(崇神團體)와 무당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동묘가 관성교의 본부였다. 이후 동묘가 서울특별시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동묘 안에 세워졌던 관성교의 건물이 철거되자, 현재에는 제도로서의 관성교는 소멸되고, 다만 신봉자들이 개별적으로 동묘에 참배하고 있다. 이 종교는 19세기에 등장한 이른바 명성경이라는 서적을 경전으로 삼았는데 1960년대에는 종로, 동대문, 청량리 등지의 포목상인들이 중심을 이루어 포교활동이 활발했으나 신앙을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조직기구가 미약하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체제는 거의 소멸되었다. 또 해방 직전인 1945년에 계룡산에서 수행하던 김진하가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던 중 '경문'을 받고 관우의 높은 덕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조직했다는 무량천도가 있는데 1990년대부터 자체적인 신격을 모시며 관제에 대한 신앙은 하지 않는다.

사실 한국의 무속계 신흥종교의 경우 이들이 신으로 삼는 주 대상이 부처님, 단군, 관우인 경우가 상당수 있다.

2.2.2. 현황

파일:external/image.edaily.co.kr/PS14051400404.jpg
동관왕묘 정전 내부[22]
지금도 관우를 모시는 관제묘가 다른 곳도 아닌 서울특별시 한복판에 있다. 서울 지하철 역인 동묘앞역 인근에 있는 동묘가 바로 관제묘. 임진왜란을 거친 뒤에 만들었으며 선조 34년(1601) 도성 내 동서남북에 각각 관왕묘가 세워졌는데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가 소요 비용과 친필 현판을 보내줬다고 한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크고 화려한 동관왕묘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한 채 남아 있다. 동묘에는 고종이 추증한 관우의 시호인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가 현판에 적혀 있다. 동관왕묘는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전쟁 이후에 명나라와 조선에서 우호를 다지면서 굉장히 공을 들여서 지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수준 높은 문화재다.

원래 동대문 밖에 동관묘, 남대문 밖 도동에 남관묘, 명륜동에 북관묘, 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관묘, 종로네거리 보신각 뒤에 중관묘의 다섯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동관묘만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고 남관묘는 일제가 목멱산(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헐어버린 것을 지금의 사당동으로 옮겨지어 지금에 이르고, 다른 세 곳은 전하지 않는다.

동관묘는 특히 성균관의 문묘와 나란히 무묘(武廟)라 불릴 만큼 격이 높았는데, 춘추로 치러지는 대제(大祭) 때에는 임금이 손수 무복(武服)을 입고 참례를 할 정도였으며 지방에도 성주, 안동, 남원, 강진의 네 곳에 조선 조정이 공식적으로 세운 관왕묘가 있었다.

동관왕묘는 크게 5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중심건물은 관우상이 있는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6칸 크기이며 지붕은 조선시대 전통 양식과 달리 정(丁)자와 일(一)자가 합쳐진 공(工)자 모양을 띠고 있다. 한국 양식이 아니라 중국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관우상은 정전 중앙에 있으며 앞쪽 좌우로는 형주에서 관우를 모신 관평, 조루, 주창, 왕보가 관우상을 호위하듯이 서 있다. 특히 동관왕묘에서 모셔지는 금동관우좌상은 구리 4천여 근(약 2.4 t)을 들여 만든 높이 2.5 m 미터짜리 거대한 황금색 금동신상으로, 조선시대 관우상 중 가장 크다. 1601년에 제작되었는데, 영조통기(營造通記)에 따르면 명나라 장수 10명이 풍로 10개에 구리 3800근을 녹이려다가 한 번 실패하고, 감관 한빈(韓斌)이 조선의 구리장인을 모아 300근을 더 넣고 녹여서 제조했다고 한다. 즉, 한중합작으로 만들어진 명작인 셈이다.

금동관우좌상 뒤에 세우는 일월오봉도는 병풍 일고 폭에 490×259 (cm) 크기로 그렸는데 일월오봉도 중 가장 크다. 전례와는 달리 병풍의 폭이 홀수이고 붉은 해가 왼쪽, 흰 달이 오른쪽에 배치된 특이한 작품이다. 일월오룡도 외에 황적청백흑의 다섯 오조룡을 묘사한 구룡도 등의 회화, 석조, 편액 등도 조화롭게 만들어져 있고, 신상에 입히기 위한 면류관, 조복, 옥대 등의 희귀한 의복 유물도 함께 소장했다.

정전 좌우에는 위패가 있는 동무와 서무가 들어서 있는데 이는 문묘의 건물 배치와 같다. 동, 서무에는 삼국지와 관련한 대형 그림인 '삼국지연의도'가 있는데 유관장이 도원결의하는 모습, 장비가 장판교에서 조조의 대군을 막는 장면 등이 묘사돼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삼국지연의도 5점을 2년간의 보존 처리를 통해 복원, 전시한 바 있다. 동묘의 출입문인 외삼문과 안쪽의 내삼문으로 구성된다.

서울 남산에도 관우를 모신 곳이 있다. 남산공원길 북측 순환로를 걷다 보면 와룡묘(臥龍廟)란 시설이 있다. 서울 지방 문화재 5호로 지정된 곳인데 그 이름대로 제갈량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신격을 모신 사당이다. 안에 들어가보면 처음 눈에 띄는 건물 이름 또한 역시 '와룡묘'인데, 와룡묘 안에는 보는 사람 입장에서 제갈공명 소상이 오른쪽, 관우의 소상이 왼쪽에 안치됐다. 일제강점기에 동묘의 지부를 자처하며 관우의 소상을 모셨다 하니,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관우 민간신앙이 꽤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와룡묘를 기도처로 삼아 찾아오는 무당들이 제법 있다.

종교로서의 체제는 이제 한국 일반에는 잘 남아있지 않지만 일종의 풍수지리와 길흉화복을 다스리기 위해 관우나 삼국지 인물들의 동상을 구입하는 경우가 지금도 종종 있다. 물론 주된 판매 대상은 관우. 네이버에 '관우상'이라고 치면 최고 50만원대의 관우상도 판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워낙 흥미롭고 드립으로 써먹기 좋은 설화들이 많다 보니 현대 인터넷 유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굉장히 많다.

엠엘비파크에서는 관우를 아냐 모르냐가 유무식의 척도가 된다고 한다. 다른 커뮤니티나 SNS 등지에선 이걸 비꼬면서 초면에 관우 아냐부터 묻는 놈이 있으면 목을 치고 커피가 식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식으로 놀리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관우의 이미지는 허언증 환자로 웃음을 주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삼좌 일화'나 식은 술 후후 불기로 웃음벨이 되어버렸다.

조조가 관우의 참수된 수급을 받고 비웃으면서 한 대사인 "관공, 어찌하여 목만 오셨소?"가 고인개그로 쓰이고 있다. 사람이 목이 잘린 듯한 착시가 느껴지는 구도로 찍은 사진을 올릴 때, 제품의 머리 부분만 토막났을 때, 만화나 게임에서 참수당한 캐릭터가 있을 때 제목으로 붙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관우가 나오기만 해도 쓰인다. 이 말 자체는 삼국지연의나 정사삼국지에도 나오지 않는 창작된 대사이다. 다만 조조가 관우의 수급을 앞에 두고 호기나 거드럼을 부리는 듯한 장면은 여러 창작물에서 나오고 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운장공, 그간 무량하신가?" 라고 산 사람에게 하듯 인사를 한다. 그리고, 징저우 시에서 불법으로 세워진 관우 동상이 얼굴부터 철거됐을 때도 이 말이 쓰였다. #

2.3. 일본

파일:external/www.britishmuseum.org/AN00036032_001_l.jpg
대영박물관 소장 네쓰케
에도 시대에 삼국지가 인기가 있었는데 각종 전통 예술 작품의 소재로 인기가 많았다.

일본 전국시대의 츠가루번 다이묘 츠가루 타메노부가 관우를 좋아했다. 특히 관우의 길고도 아름다운 수염을 좋아했다고 한다.

가부키의 여러 공연 중에서도 관우극이 있다.

일본에서는 요코하마 중화가의 관제묘와 고베(神戸) 난킨마치(南京町)의 관제묘가 저명하다.

류큐 왕국(지금의 오키나와 현)에도 중국의 관우 신앙이 들어와 현지화되어서 류큐 신토의 신으로 섬겨지기도 했다. 현재도 나하의 지성묘[23]에 부속된 천존묘(天尊廟)에서 관우를 모시고 있다. 한편 류큐의 독자적인 관우 전설도 있다. 옛날에 힘이 센 와샤오(돼지치기)가 돼지고기를 솥에 찌며 180킬로짜리 누름돌로 뚜껑을 덮어놓고 자리를 비웠는데, 지나가던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로 그 돌을 스윽 밀쳐내고 돼지고기를 먹으며 적토마에게도 먹였다. 와샤오는 그 위력에 놀라 관우의 부하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돼지치기는 주창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3. 역대 봉호

여러 시대를 거치며 관우는 급이 승격된다.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충성스럽고 의로우며 신과 같이 엄청난 무예에 신령이 돕고 인자하며 용맹스럽고 위엄이 당당하신 관씨 성을 가지신 성스러운 대황제 폐하이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거창한 칭호. 칭호가 너무 길어서 줄여서는 관성대제(關聖大帝), 관제(關帝)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칭호를 올린다는 것이 관우에 대한 옛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저것도 완성본이 아니고 중국에서의 최종 호칭은 광서제 5년(1879년)에 추봉된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이다.

[1]형주 지역.[2] 2016년에 완성했으며 이곳에선 중국 최대의 관우상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이 동상의 디자인을 맡은 사람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마스코트 디자인을 맡은 한메이린(韓美林)이다.[3] 관우 동상이 주변 경관을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건립 비용이 1억 5500만위안(약 284억원)에 이르는 등 과도하게 집행되었으며 동상 높이가 시 문화재 건립 허가 규정을 위반했고, 관우 동상 아래에 지어진 2층짜리 전시시설은 관우 동상의 무게로 인해 벽 곳곳에 금이 가 붕괴 위험에까지 처해 있는 상태였다.#[4] 이러한 숭배 및 인기는 관우 생전때부터 있었다[5] 일부러 공식석상에서만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라 누구든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부른 것이다. 명대에 쓰여진 수호전에서 노지심이 100근짜리 수마선장을 주문할 때 대장장이가 이를 만류하며 "관왕도 82근짜리를 썼지요"라며 극구반대해 결국 62근짜리로 맞춘다.[6]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배규범, 민관동, 2016년[원문] 蜀前將軍關羽守荊州,夢豬齧足,自知不祥,語其子曰:“吾衰暮矣!是若征吳,必不還爾。” 果為吳將呂蒙麾下所殛,蜀遂亡荊州。玉泉祠,天下謂四絕之境。或言此祠鬼興土木之功而樹,祠曰“三郎神”。三郎,即關三郎也。[8] 당나라 시대 설화를 보면 관우가 불교에 귀의해 보살이 되었다는 기록외에도 관우가 나무를 얻지 못하자 대홍수를 불렀다던가, 관우의 귀병이 거리를 지나가니 병을 앓던 사람들이 오한에 시달렸다던가 하는 원한신, 역신의 이미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 실제 불교에서도 관우를 가람보살로 받든다.[10] 연의의 관우 훈령이 옥천사에 나타났다는 얘기도 여기서 기인 한 것으로 보인다.[11] 중국 역사에 황제가 교체되는 징조가 두가지라고 하는데, 하나는 신흥 종교의 등장이고 다른 하나가 염상들의 발흥이다. 전자는 중국 인민들의 집단행동을 뜻하고, 후자는 소금상인 네트워크의 집단행동을 통한 경제 질서 재편을 뜻한다. 경제와 민생이 뒤집히는 상황이니 황제가 날아가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다.[12] 중국 현지의 관우상을 보면 오른손에는 청룡언월도, 왼손에는 을 흔히 들고 있다.[13] 천사도의 조사 장릉의 계승자들을 이르는 말이다.[14] '치우,오래된 역사병'(김인희)[15]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이라고 되어 있으니 북송 무렵 그림이다.[16] 역대신선통감에는 제갈량의 스승이라는 풍구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때 제갈량에게 관우를 해량노룡이라고 언급한다.[17] 원문: 徐道在《歷代神仙通鑑》中說,關公的前生本是「解梁老龍」,漢桓帝時,河東連年大旱,老龍憫民心切,是夜汲黃河水興雲施雨。玉帝見老龍公然違反天命,擅取封水,令天曹以法劍斬之,擲頭於地。解縣僧普靜,在溪邊發現龍首,即提到廬中置合缸內,為誦經咒九日,聞缸中有聲,啟視空無一物,而溪東解梁平村寶池裡關毅家已有嬰兒落地,乳名壽,幼從師學,取名長生,後自名羽,字雲長。[18] 그나마도 이건 순수 연의 창작 발언이다.[19] 애당초 2010년판 삼국은 조조, 유비, 제갈량, 사마의 이 네 사람이 주인공인 삼국지 드라마라 이들에게 중요하게 포커스가 가는 바람에 대부분의 주변 인물들이 너프된 감이 없잖아 있는 드라마이다. 저들에게 중요 포커스가 가다보니 오나라는 손견, 손책 비중 다 죽었고 그나마 노숙을 정사에 가깝게 재해석했지만 그게 끝일 정도로 비중을 안줬다.[20] 술을 세 잔 따르는 의례.[21] 숙종처럼 본인이 엄청난 관우빠여서 신하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관우 제사를 무려 국가 주관의 행사로 격상시킨 왕도 있을 만큼 관우의 인기는 조선에서도 상당하긴 했다. 그러나 당연히 왕 본인이 원해서 하는 것과,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신다곤 하나 엄연한 주권국가의 왕이 타국의 장수의 압박에 의해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22]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은 다른 묘에서 가져온 관우상이다. 사실 관우상 앞의 관평, 조루, 주창, 왕보의 상도 다른 묘에서 가져온 것들이다.[23] 至聖廟. 공자와 제자들을 모시는 사당이다. 류큐의 문묘라고 할 수 있다.[24] 송진종의 연호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년[25] 이후 이들은 각각 왕으로 추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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