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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7:03:02

역대제왕묘

||<tablewidth=400px><table align=right><tablebgcolor=#FFFFFF><tablebordercolor=#CC0000><bgcolor=#CC0000><width=100> 파일: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_4.png ||<-2><bgcolor=#CC0000>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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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bjww.gov.cn/200810151097543.jpg
명칭 한국어 역대제왕묘
간체 历代帝王庙
번체 歷代帝王廟
영어 Temple of Ancient Monarchs
분류 고건축
(古建筑)
시대 ~
일련번호 4-0129-3-051
주소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시청구 푸청먼네이다제131호
北京市西城区阜成门内大街131号
등재 1996년
차수 제4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AA급[1]


1. 개요2. 역사3. 배향된 제왕과 공신의 명단
3.1. 제왕(경덕숭성전)3.2. 공신
3.2.1. 관제묘3.2.2. 동배전3.2.3. 서배전

[clearfix]

1. 개요

중국 베이징시 시청구 부성문내대로 131호에 있는 사당. 주변에 중국지질박물관과 백탑사, 광제사가 있다. 삼황오제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정통 왕조로 인정되는 중국 왕조의 황제 164명과 그 공신 79명을 모신 곳이다. 현재 역대제왕묘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크게 역대 제왕의 위패를 모신 정전인 경덕숭성전(景德崇聖殿)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동, 서배전, 명•청 황제들이 세운 비를 보호하는 비각 4개(어비전)가 있다. 그 밖에 관우를 모시는 관제묘가 따로 있다.

2. 역사

역대제왕묘의 역사는 명태조 주원장이 1373년 난징 지역에 우왕, 탕왕, 주무왕, 한고조, 원세조 등 역대 왕조 창업자 16명의 위패를 모신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명성조 주체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이후인 1530년 가정제가 역대의 제왕과 명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창건하도록 명령했다. 가정제는 수차례 역대제왕묘에 가서 친히 제사를 지내는데, 가정제가 개인적으로 제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이때 원세조 쿠빌라이 칸은 잠깐 위패가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지만 다시 복귀했다.

한족의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자 1660년 순치제는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시조의 위패를 더했다. 1722년 강희제는 삼황오제와 촉한동진남북조나라의 역대 황제들과 공신의 위패를 추가함으로써 총 164위(제왕 143위, 명신 40명)의 위패를 정전에 모시도록 했다. 이후 옹정제, 건륭제, 도광제 대에 수리했는데, 특히 건륭제는 경덕숭성전(景德崇聖殿) 내에 황제 188명(개국자 21명과 그외 167명)의 위패를 모시고, 동•서 양궁에는 유명한 문신과 장군 79명의 위패를 모셨다. 또 관제묘(關帝廟)를 지어 특별히 단독으로 관우에게 제사를 지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왕조가 사라지자 제사는 끊겼다. 역설적이게도 다른 역대 왕조의 왕과 황제들은 역대제왕묘를 통해 위패가 모셔졌으나, 청나라 황제들의 위패는 모셔지지 못했다.[2]

이후 사당으로서 기능을 상실하여 국부군의 병원과 사범학교로 쓰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에는 방치되었다가 문화대혁명 당시 공격을 받았다. 이후 중학교로 사용했고, 1979년 박물관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1995년 이후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은 중국 문화재의 최고 등급인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로 지정되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주변에 백탑사 등 다른 관광지도 있지만 가이드북에 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3. 배향된 제왕과 공신의 명단

3.1. 제왕(경덕숭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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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숭성전(景德崇聖殿 / 景德崇圣殿)

청 왕조가 정통으로 인정한 왕조의 제왕들만 모셨다. 요, 금, 원 등 북방민족이 개국한 왕조뿐만 아니라 남북조에서는 남조와 북조의 황제들도 모두 모셨다. 지속 기간이 짧거나 찬탈로 왕조를 개창한 진나라, 서진, 수나라는 통일왕조라도 제외했다.[3] 다만 동진은 서진 황실의 혈통에 이어서 지속된 사마씨 왕조였음에도 포함되었다.

폐위된 황제들은 빠졌고, 후당의 군주들 중 개국자인 장종 이존욱 대신 제2대 황제인 명종 이사원만 모셨다. 후주 역시 세종만 모셨다. 삼국시대 군주들 중에선 조위동오는 빠지고 촉한소열제 유비만 모셨다. 나름의 기준을 통해 걸렀다는 이야기이다. 걸왕이나 당중종처럼 나라를 위태롭게 한 인물들이나 나쁜 평가를 받은 황제는 제외했다. 그런데 남조 유송의 효무제명제, 당나라의 의종희종, 명나라의 가정제처럼 모실 필요가 있는지 의문인 이상한 황제들도 모셨다.

남북조시대 황제들 중에서 한족의 남조는 유송, 남제, 남진의 황제들, 선비족의 북조는 북위의 황제들을 모셨다.

3.2. 공신

3.2.1. 관제묘

3.2.2. 동배전

3.2.3. 서배전


[1] 원래는 AAA였으나 2021년에 격하되었다.[2]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였던 푸이가 만주국 성립 이후 황제로 즉위한 이후 위만황궁에서 역대 청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만주국이 멸망하면서 다시 끊겼다.[3] 특히 황제라는 지위의 시초인 진시황이 역대제왕묘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다만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진시황이 배향되지 않았다는 것을 역대제왕묘에 방문해서야 알았다는 증언들도 많다(...)[4] 風后. 황제헌원씨의 재상. 역법과 병법, 산수의 창시자라고 전한다.[5] 夔 요임금의 대신으로 음악의 신이다.[6] 傅說 상왕 무정때의 승상이다.[7] 召公 奭 주무왕의 동생으로 형인 주공 단과 함께 주나라의 개국공신이다. 연나라와 소나라의 창시자이며 삼공에 올랐다.[8] 畢公高 주무왕의 동생으로 주나라의 개국공신이다.[9] 吕侯 주목왕의 대신이다.[10] 召穆公 虎 소공 석의 후손으로 주선왕을 즉위시켰으며 공화시기를 이끈 대신이다.[11] 仲山甫 주선왕 시기 중흥을 이끌었던 대신이다.[12] 魏相 한선제 시대의 승상으로 곽광의 세력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13] 力牧. 황제헌원씨의 대신. 축산의 창시자라고 한다.[14] 皋陶. 순임금의 신하로 법을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15] 龍. 순임금의 신하로 간언을 담당했다.[16] 伯益. 우임금을 도와 치수를 행했다.[17] 仲虺. 탕왕의 신하로 하나라의 걸왕을 정벌할 때 백성에게 이르는 글을 지었다.[18] 方叔. 희성이다. 주선왕 시대의 대신으로 중산보와 함께 주선왕 시대의 중흥을 이끌었다.[19] 尹吉甫. 주선왕 시기 중흥을 이끌었던 대신이다. 《시경》을 채집했다고도 전한다.[20] 권신인데도 등재되었다. 명재상답게 국정을 잘 운영한 것이 큰 이유인 것 같다. 한탁주가 쌓아놓은 실책을 혼자서 다 수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