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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9:40

관우/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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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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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지연의에서의 관우의 행적에 대해 서술한 문서.

연의에서 관우는 무예와 충의를 표현하는 장면이 여럿 추가되어 활약은 더욱 화려해졌지만, 이를 위해 정사에 나왔던 실책은 대부분 변경 내지 삭제되었다. 외모상으론 신장 9척에 수염 길이가 2자였으며 얼굴이 대추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외모로 묘사된다. 보다시피 붉은색을 굉장히 강조하는데, 이는 경극에서 충의를 상징하는 붉은색을 사용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 나관중이 연의를 집필하기 이전부터 당대 삼국지를 다룬 경극에서는 관우를 그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2. 행적

2.1. 도원결의

자신이 살던 해현에서 악덕 지주를 살해하는 바람에 추방당해 탁군으로 왔다가, 격문을 보고 의기투합한 유비장비와 우연히 술집에서 마주쳐[1] 도원결의를 맺고 의형제가 된다.

유비와의 관계에 대해선 162년에 태어나 유비보다 나이가 적어 자연스럽게 둘째가 되었다는 판본이 있는가 하면, 관우가 유비보다 1살이 더 많지만(관후조묘비기) 유비의 혈통과 인덕을 더 중히 여겨 맏형 자리를 양보했다는 판본 등 표현이 갈린다. 일반적으론 후자가 관우와 유비의 캐릭터성을 더 부각해서인지 더 널리 알려진 편. 이후 동네 대장장이를 불러 유비의 쌍고검과 장비의 장팔사모와 함께 본인은 무게 82근의 청룡언월도를 주문해서 전용 무기로 사용한다.[2]

2.2. 황건적의 난

이후 황건적의 난 당시엔 황건적 정원지를 베면서 장수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하고 장각, 장보, 장량 삼형제에 대한 협공이나 맏형 유비의 은사인 노식동탁의 대립, 조조와의 대면, 독우의 갑질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형제간의 우애를 다진다. 이후 동탁이 황건적의 난을 발판삼아 조정을 유린하여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유비 삼형제는 별개 세력으로 참여하려 했으나 인지도가 밀릴지도 모른다는 공손찬의 제안에 따라 그의 부장 격으로 합류한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동탁의 선봉장 화웅에게 포충이 썰리고 손견원술의 속좁은 농간에 휘말려 패퇴하자 관우가 나서는데, 정작 손견을 궁지로 몰아넣은 원술[3]이 '마궁수 주제에 깝치지 말고 꺼져'라며 막았고 원소 또한 마궁수를 내보내면 화웅이 (연합군에 사람이 없어서 일개 마궁수 따위를 내보낸다고) 비웃지 않겠냐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조조가 변호해 준 덕분에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연의를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기억하듯이 술이 식기도 전에 화웅을 베고 돌아온다.[4] 참고로 이 장면 직후 그것 보라며 장비가 어서 계속 쳐들어가자며 신나자 원술이 쩨쩨하게 '너는 또 뭔데 깝치냐'라며 나서기도 한다.

그렇게 연합군을 돕다가 호뢰관에서 연합군의 여러 장수들을 쓰러트린 여포와 맞서는데, 먼저 동생 장비가 나서 어느 정도 싸우는 중에 관우도 도우러 뛰쳐나간다.[5] 이후 유비까지 덩달아 참여한 덕분에 여포는 퇴각했으나 유비 삼형제도 위험하다 느껴 말머리를 돌린다. 흔히 이 장면은 삼영전여포라 불리면서 최초로 세상 사람들에게 유비 삼형제의 명성을 떨치는 계기가 되며, 비록 연의의 창작이라고는 하나 굉장히 임팩트가 큰 장면으로 손꼽힌다. 이후 공융이 황건적 관해에게 성이 포위되자 태사자가 직접 유비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관우와 관해가 90여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를 죽이고 공융을 구출한다.

시간이 흘러 동탁을 죽이고 방랑군이 된 여포를 잡기 위해 조조군과 협동하여 하비성을 공격하는데, 다른 장수들은 몰라도 장료만큼은 덕을 아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여 서로 이해하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덕분에 장료는 목숨을 구걸하다 썰린 여포와 달리 죽음을 택했지만 유비와 관우가 변호해 준 덕분에 목숨을 구해 조조군에 들어가고, 이후 유비군이 독립해 조조군과 적이 된 상황에서도 관우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정사에서는 관우가 진의록의 처 두씨를 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나관중은 이를 윤리적으로나 이미지 형성으로나 좋지 못하다고 판단했는지 삭제한다.[6]

이후 여포가 죽고 잠시 평화가 찾아오자 유비는 황궁으로 복귀한 헌제에게 인정받아 황숙이라 불리게 되고, 이에 조조는 헌제와 유비를 견제하기 위해 헌제에게 반강제로 권유해 사냥 대회를 열고 헌제에게 갈 환호를 대신 받는 무례[7]를 저지른다. 이에 관우는 조조의 의중을 눈치채고 격분해 칼을 뽑아 조조를 베려 했지만, 유비가 말리는 바람에 실패한다. 이게 어지간히도 통탄스러웠는지, 관우는 나중에 조조에게 분노를 표할 때[8]마다 '그 때 조조를 베어버렸으면 이럴 일이 없었다'며 언급한다.

2.3. 조조에게의 투항

유비서주자사 차주를 살해한 후 서주를 장악하고 관우는 하비성을 지켰는데 조조군에 관우의 하비성이 포위되자 조조장료를 보내 관우에게 항복을 권유시킨다. 장료는 관우에게 항복하지 않고 죽기를 고집한다면 이는 세 가지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설득한다.[9] 그러자 관우는 장료에게 세 가지 조건을 걸고 항복을 약속한다.[10] 조조는 관우가 항복하겠다면서 군사를 물리라고 청하자 조조는 그 조건들을 모두 들어주겠다며 정말로 군사를 물렸는데, 이에 조조의 부하들이 이틈을 타 관우가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반발하자, 조조는 "그럴 사람이라면 도망가라고 해라, 붙잡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관우는 두 부인(미부인, 감부인)의 안전을 위해 일시적으로 조조군에 투항하고, 조조는 그간 관우의 명성과 충성 및 무공을 봐왔기에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리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모종강본에 의하면 조조가 투항한 관우와 함께 하비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의형제간의 의리도 깨기 위해 관우와 감부인&미부인을 한 방에서 재우려고 했으나, 관우가 그저 촛불을 들고 문 밖에 나가 서서 한 숨도 자지 않고 아침까지 경계를 섰다는 말을 듣자 감탄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허도로 들어오자 '무장이 말을 타면 금을 하사하고 말에서 내리면 은을 하사한다'는 말처럼 금은보화와 10여명의 미인을 보냈으나 관우는 모두 받지 않는다. 조조가 관우의 해진 전포를 보고 새 전포를 주니 관우가 '형님께 받은 옷이라 버릴 순 없었다'며 새 전포는 안에 입고 해진 건 밖에 입는 장면이나, 적토마를 줬더니 '나중에 형님을 빨리 만나러 갈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는 장면은 관우의 충성을 표현하는 단적인 장면으로 손꼽힌다. 그나마 관우와 친하던 장료를 보내 설득하게 했지만 좋은 건지 슬픈 건지 자신을 향한 장료의 충성심만 확인하고 끝났다.[11]

그런가 하면 두 부인의 거처에 비가 새서 지붕을 고쳐달라고 관우가 부탁하러 오자 조조가 술을 권하며 달랬으나, 조조를 면전에 두고도 '형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여 팍팍하다'란 말만 했다. 조조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문뜩 관우의 수염이 눈에 띄어 이를 언급하며 화제를 돌렸는데, 관우도 그건 싫지 않았는지 자신의 수염을 자랑하자 조조가 '마침 겨울이니 수염 주머니를 두고 보존하는 게 좋겠다'면서 수염 주머니를 선물한다. 이후 조조가 헌제에게 보고할 것이 있어 입궐하면서 관우를 데리고 가자, 헌제도 황숙 유비의 의형제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기뻐한다. 이 때 수염 주머니가 뭔지 몰라 그게 뭐냐고 묻자 관우가 주머니를 풀어 수염을 보여주고, 그 아름다운 수염을 보고 감탄하여 미염공(美髥公)이라고 칭한다.[12]

그렇게 조조군에 머무르긴 했지만, 공을 세우면 그것을 빌미삼아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할 것 같다는 이유로 반쯤 가택연금(?)을 당한다. 그러다 관도대전이 벌어지면서 조조군이 원소군의 안량에게 추풍낙엽으로 쓸려나가자 구원투수로 등판하는데, 조조는 예전처럼 떠나갈 구실을 준다며 망설였으나 정욱이 '유비가 의탁할 곳은 원소군밖에 없으니 관우가 안량을 죽이면 화난 원소가 유비를 죽일 것이다'라며 간언하여 받아들인다. 그렇게 안량은 관우에게 단 1합에 죽고,[13] 예상대로 원소는 좌우로부터 '관우가 안량을 베었다'는 소문을 듣고 유비를 배신자로 몰아 죽이려 했으나 유비의 반론[14][15]과 우유부단이 발목을 잡아 어물쩍 넘어간다.

이에 원소 측에서도 구원투수로 문추를 내보내고, 유비는 유비대로 '안량을 벤 자가 관우인지 확인하겠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관우가 우리 편이 될 것이다.'는 핑계로 함께 참전하지만 문추의 반대와 원소의 우유부단 때문에 후방에 배치된다. 그렇게 문추가 나타나자 조조는 다시 관우를 내보내고, 문추도 안량과 달리 제법 버텼지만 얼마 못 가 목이 달아난다. 이 때 유비는 관우의 깃발을 보고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지만 원소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더 이상 관우가 아니라고 발뺌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여 이미 전후사정을 다 들은 원소가 잔뜩 성난 채로 칼을 뽑고 노려보고 있자 태연하게 '확실히 내 아우가 맞으니 공께서 원하시거든 얼마든지 내 목을 베어도 좋습니다.'라며 되려 원소를 당황하게 만들고 '그렇지만 죽기 전에 감히 말하건데, 이는 공께서 날 죽이게 하려는 조조의 계책입니다. 그러니 공께서 날 살려주신다면, 내가 아우에게 편지를 써 원소군으로 오라고 하겠다.'라고 말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당연히 원소는 우유부단과 안량과 문추를 가볍게 썰어버린 관우가 자기 휘하에 온다면 조조군에게도 큰 타격일 거라는 더 큰 이득 때문에 '내 현덕 공의 아우를 수족으로 부릴 수만 있다면 안량과 문추 열 명을 잃어도 좋다.'라며 좌우의 참소를 물리치고 유비를 용서한다. 유비는 편지를 적었지만 진짜로 편지를 보냈다간 관우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염려해 보내진 못했다.

한편 관우가 공을 세우자 조조는 어떻게든 관우의 발을 묶어두기 위해 조정에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에 봉한다. 이 때 원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판본에서는 처음에 수정후(壽亭侯)에 봉한 것을 관우가 '조조의 부하가 될 순 없다'는 생각에 거절했으나, 조조가 꾀를 내어 한(漢)+수정후(壽亭侯)로 명칭을 바꾸자 그제서야 한나라에 충성할 수 있겠다며 받아들이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사실 정사에서 관우가 받은 직위인 한수정후는 한수(漢壽)+정후(亭侯)로, 한수는 그냥 지금의 호남성 상덕현 지방을 가리키는 지명(地名)이고[16] 정후는 관내후 가운데 최하 등급이다.[17] 조선의 선비 이덕무도 삼국연의를 논하면서 '예전에 내가 한수는 지명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한 것으로 보아 이런 얘기는 조선에서도 잘 알려진 이야기였던 듯하다. 하지만 한나라를 위한 충성심이 부각되어서 그런지 대다수의 독자들은 '한+수정후' 쪽을 더더욱 좋아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남에서 일어난 유벽, 공도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당시 유벽에게 의탁하고 있었던 손건을 만나고,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했다는 소문을 듣자 유벽, 공도가 거짓으로 패퇴하기로 약속한다. 원소 쪽에서도 멍하니 있지 않고 진진을 보내 하북에 유비가 있다는 소식을 알리자 관우는 투항할 때의 세 가지 약속대로 조조에게 정식으로 작별을 선언하고 떠나려 하지만,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던 조조가 피객패를 내걸고 손님을 피하는 바람에 번번이 만나지 못하고[18] 장료 역시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관우도 조조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속셈임을 깨닫고 조조에게서 받은 물건과 시녀를 모두 집에 두고는 투항하기 전부터 지니고 있던 물건만 챙겨 두 부인과 함께 하북을 향해 출발한다. 조조는 순라대원의 보고를 받고 뒤늦게 사실을 깨달았고 부하 장수들은 모두들 관우가 배은망덕하다며 쫓아가 죽여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으나[19], 조조는 '약속은 약속이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못내 아쉬웠는지 그를 배웅하러 군사를 이끌고 쫓아간다. 관우가 이를 눈치채고 두 부인의 가마를 먼저 보낸 후 포위당할 일이 없는 다리 위에 혼자 서 있자[20], 조조는 오해라며 군사를 물리고는 혼자 관우에게 나아가 간곡히 투항을 권유하지만 역시 완곡히 거절당한다. 이에 조조는 노자로 쓰라며 황금을 선물했으나 관우는 거절했고, 조조가 다시 정 안 된다면 비단 전포라도 받아달라고 하자 관우는 혹시라도 모를 습격에 대비해 말 위에서 청룡언월도로 전포를 들어 받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에 조조군의 장수들이 은혜로운 전포를 칼 끝으로 받다니 무례하다며 비난하지만 조조는 '우리는 다수이고 저 쪽은 혼자이니 경계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라며 일축하고, "참된 장수로다. 저런 사람과 알고 지낸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하리라."라며 아쉬움이 가득한 평가를 내리곤 자신도 허도로 완전히 발길을 돌린다.[21] 그 와중에 이렇게 발목이 잡힌 관우는 먼저 간 수레가 사라지자 당황했으나 산적인 요화가 엄호해 줬다는 것을 알고 안도하지만, 유비의 명예를 위해 그의 합류를 나중으로 미룬다.

2.4. 오관참장

이렇게 뒤늦게나마 조조의 허가를 받고 떠나긴 했지만, 통행증도 못 받고 조조군 전군에 통보하지도 않은지라 가는 길마다 방해를 받게 된다. 대놓고 막기도 하고 계략을 꾸며 함정을 파기도 했지만, 결국 필사적인 관우에게 모두 목이 베이고 만다. 이를 '다섯 관을 지나며 여섯 장수를 베었다' 하여 오관참장(五關斬將)이나 오관돌파(五關突破), 혹은 관우에게만 초점을 맞춰 천리독행(千里獨行) 혹은 천리행(千里行)이라고 한다. 자세한 사정은 다음과 같다.
다만 이 오관참장 장면은 정사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허구이다. 민담 등 연의 이전의 삼국지 문화에서부터 등장한 창작 장면인데 이러저러한 오류로[22] 이동 경로가 필요 이상으로 구불구불하거나 멀리 돌아가는 편이고, 관우에게 죽은 장수들도 모두 가상인물이다. 또한 정사에서는 유비의 처자가 관우와 함께 잡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미부인은 이후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다만 감부인은 형주까지 유비를 따라왔으니 감부인만은 데려왔을 수도 있다. 사실 조조가 서주에서 유비의 처자를 모두 잡아들였는데 감씨가 여인 혼자의 몸으로 유비가 있는 하북으로 갔다고 보긴 어렵다.

그렇게 하북의 경계까지 도착한 관우 일행은 쉴 곳을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인근의 여남 부근에 장비가 성을 뺏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먼저 손건을 보내 소식을 전하지만, 장비는 전후 사실을 몰랐던 탓에 관우가 의리를 저버리고 조조를 섬겼다며 손건과 두 부인의 설명도 무시하고 관우를 죽이려 든다. 더더군다나 장료의 설명을 듣고도 개인적인 불만과 진기의 원수를 갚고자 군사를 몰고 쫓아온 채양 때문에 상황은 더더욱 꼬이고 만다. 이에 관우가 채양을 베서 오해를 풀겠다고 하자 장비는 북을 세 번 치기 전에 그의 목을 베라며 엄포를 놓는다.[23] 그러자 관우는 북을 한 번 칠 때 채양과 맞서고, 두 번 칠 때 목을 베고, 세 번 칠 때 돌아오는 식으로 가볍게 해내고 장비의 오해를 푼다. 그 직후 미축&미방 형제가 소식을 듣고 오면서 유비가 없긴 하지만 그들은 오랜만에 화합을 즐긴다.

마지막으로 유비를 데려오기로 하지만 자신이 안량과 문추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한지라, 하북엔 들어가지 못하고 손건을 보내 모든 소식을 전하고 자신은 유비를 흠모하던 변방 세력인 유벽&공도의 배려를 받아 여남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유비와 손건이 간옹의 도움을 받아[24] 몸을 빼내는 동안 관우는 인근에 있는 관정의 집에 머무르다 그의 차남 관평을 관우의 양자[25]로 삼기로 하고, 황건적의 잔당이지만 자신을 경모하던 주창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하북에서 빠져나온 유비의 마중을 나갔다 돌아온 사이 주창이 누군가에게 패배하자 상황을 파악하러 갔다가, 공손찬 휘하에서 인연을 맺었던 조운과도 재회하게 된다. 감동적인 재회 속에 가볍게 잊혀진 배원소 지못미 이렇게 유비 삼형제와 식솔이 모두 모이고 유벽&공도가 아예 여남을 내주면서 관우는 잠시나마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나중에 사마휘가 지적한 대로 전군을 다스릴 참모가 없었기에 그들은 원소를 가볍게 제압한 조조군에게 쫓겨 여남을 뺏기고 유표가 있는 형주로 피신을 가지만, 그마저도 채모 일당이 형주를 갖다 바치는 바람에 방랑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서서와 사마휘의 귀띔을 받은 유비가 세 번에 걸쳐 제갈량을 만난 덕분에 그들은 처음으로 기반을 다지고 대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관우는 의제 장비와 함께 제갈량을 백면서생이라며 얕보고 맏형 유비의 물 만난 물고기 이야기도 가볍게 무시했지만, 박망파에서 제갈량의 책략을 시큰둥하게 여기며 따랐다가 대승을 거두자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때부터 진심으로 충성한다.

2.5. 적벽대전

적벽대전에서는 동오와 협력하기 위해 유비가 주유를 만나야 하자 성질머리 더러워 대사를 말아먹기 좋은 장비 대신 유비의 경호원으로 대동했고, 덕분에 자기 때문에 암살을 망설이던 주유의 수상한 태도를 먼저 눈치채고 아무것도 모르던 유비에게 자리를 피하자고 권하여 목숨을 건진다. 이후 동오가 조조군을 대대적으로 박살내자 제갈량이 패퇴한 조조군을 습격하기 위해 조운과 장비를 내보내면서도 정작 자기는 과거에 조조와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제외하자, 명령을 어길 시 죽음으로 보상하겠다는 군령장을 써가면서까지 출진한다. 이후 조운과 장비에 이어 조조를 세 번째로 급습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목불인견의 꼴이 되어가며 쫓겨온 조조군의 몰골도 몰골이거니와 조조가 오관육참장 당시 순순히 보내준 것을 언급하며 인정에 호소하자 결국 길게 탄식하며 못 본 척 보내주고 만다.[26] 당연히 돌아오자마자 제갈량의 추궁을 받고 군령장의 내용 그대로 죽음을 선고 받아 죽을 뻔했으나, 놀란 유비와 장비가 무릎을 꿇고 비는데다 제갈량도 애초에 조조를 살려보낼 것이라 예상하고 보냈으므로 크게 꾸짖기만 하고 넘어가는 선에 그친다.

비록 정사에는 1도 나오지 않는 허구라고는 하지만, 루쉰이 중국소설사략에서 루쉰은 이 부분을 매우 칭찬했고 중국 고전 소설을 철저하게 평가한 학자 왕궈웨이도 "삼국지연의는 순문학이 될 수 없지만 화용도의 구절만은 대문학자가 아니고는 쓸 수 없다"라며 극찬했다. 작중의 조조가 언급했듯이 오관참장 당시의 떡밥을 멋지게 회수하면서도 관우와 조조 사이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잘 풀어낸 명장면이라 하겠다. 자세한 것은 화용도 참고. 또한 정사에서는 남군 공방전이 주유군과 유비군이 연합하여 함께 싸워 남군을 점령한 뒤에 주유가 유비에게 땅을 빌려줬다고 기록됐지만,[27] 연의에서는 주유군이 고생고생해서 조조군을 물리친 틈을 타 유비군이 낼름 먹은 것으로 각색되면서 아예 참전하지 않았다.

이후 형주 남쪽의 4군을 흡수하는 과정은 정사에서는 조운과 제갈량이 주로 담당했으나, 연의에서는 관우가 장사 공략을 자청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 때 제갈량이 앞서 얘기한 화용도 건을 들먹이며 '의도는 알겠지만 황충을 얕보지 마라'라고 충고하자 화가 나서 도부수 5백명만 데리고 장사로 출진하고 양령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잡장이 나서대자 단숨에 베어버린다. 이후 장사의 기둥 황충이 출진하자 일기토를 벌이는데 황충의 말이 무릎이 꺾이면서 틈이 생겼으나, 관우는 '비겁하게 벨 생각은 없으니 말을 바꿔 타고 오라'며 보낸다. 한현이 무슨 일이냐 묻자 황충은 말의 다리가 꺾였다고 말했고 한현은 좋은 말을 황충에게 주면서 활솜씨가 뛰어나니 활을 쏘면 되지 않겠느냐 말한다. 다음 날 황충은 한현의 조언대로 활을 쏴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차마 자신을 살려준 관우에게 속임수를 쓸 순 없었기에 일부러 화살 없이 시위를 당겨 활을 쏘는 시늉만 두어번 했다. 이에 관우가 활시위 소리가 나자 몸을 숙여 피하면서도 화살이 날아오지 않아 이상히 여기면서 황충이 늙어 활을 잘 쏘지 못 한다 판단하고 말을 달려오자 이번엔 진짜로 화살을 날리는데 일부러 관우의 투구 장식 끝에 맞췄기에 관우가 까무러치게 놀라며 감탄하였고 그가 어제의 은혜 때문에 본인이 죽이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장사로 돌아간 황충은 배신자로 몰려 한현에게 죽을 뻔했으나 위연이 한현을 죽이고 투항하면서 목숨을 건지고, 관우도 위연의 뜻에 따라 장사를 접수한 후 유비에게 그 소식을 알린다. 그 뒤에 칩거하던 황충도 반골의 상이라며 죽을 뻔한 위연도 모두 유비의 휘하로 들어오면서 알고 지내게 된다.

2.6. 입촉 이후

다만 정사에서 훗날 입촉 즈음에 오호대장군에 제수될 때 '마초는 몰라도 황충이 나랑 같은 급이라니 이게 뭐냐'라며 항변하던 장면이 그대로 삽입되는 바람에, 남자답게 싸워놓고 나중에 트집잡는 것처럼 보이는 모순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몇몇 판본에서는 마초가 의탁하고 나서 한 게 뭐가 있느냐며 마초를 까는 것으로 바꾸기도 한다.[28] 이 각색은 정사-연의 모두 관우가 위와 같이 불만을 표하자 제갈량이 "아무렴요, 황충이 장비나 마초와 앞을 다투면 다퉜지 감히 염(미염공의 약칭)에게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라며 편지를 보내 달래는 부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입촉 이후로 관우는 형주에 진수하는데, 정사에서는 반준과 불화했으나 연의에선 그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고 나중에 형주 공방전에서 성실한 조루가 아닌 반준에게 군량 관리를 맡겼다가 배신당했다는 식으로 언급된다. 다만 반준 문서를 보다시피 정사의 반준은 관우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안 좋을 뿐 공사의 구분이 명확했고 형주가 함락돼도 칩거하다가 투항했는데, 연의에서는 처음엔 믿음직했으나 나중에 배신자가 되는 등 전후관계가 바뀌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손권의 관솔을 내쫓은것은 동일하지만 익양대치 사건 자체가 아예 등장하질 않는다. 따라서 이 당시 관우가 감녕의 별동대가 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도강을 단념한 일화 역시 연의에서 보이질 않는다. 단도회[29]는 형주를 탈환하고 관우에 이에 응하지 않을시 관우를 죽이려는 노숙의 책략으로 각색된다. 실제 정사에서도 단도회 자체는 일단 노숙쪽이 먼저 제의하고 관우가 이에 응해 참여한게 맞고 나눈 대화 자체도 의외로 연의에서도 비슷하다. 관우가 "오림의 전쟁은 좌장군께서 친히 시석을 무릅쓰시고 협력하여 적병을 깨부수었거늘 어찌 헛수고만 하고 한 척의 땅도 가질 수 없겠소? 이제 족하께서 다시 땅을 찾으러 오신 것이오?"라고 하자 노숙이 그에 대해서 정사와 비슷하게 "우리 주군께서 장판에서 격파된 유황숙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 아닙니까? 어찌 그런식으로 말씀하십니까?"이라는 논리로 반박하자 관우가 화답하지 못하는 사이 주창(정사에선 이름없는 장수)이 정사와 같은 논리로 반박하자 관우가 호통을 쳐 물러나게 하는 것까지는 거의 같다.

다만 여기에서부터 나관중이 관우에서 버프를 거는 각색이 나온다. 사실 노숙은 연회장에 복병을 숨기고 있었고 관평도 이를 우려했으나[30] 관우가 대담하게 혼자서 가겠다고 하자, 주창을 대동하고 만약을 위해 강 건너편에 군사 몇백명을 대기시키는 것으로 간신히 합의를 본다. 이후 주창이 끼어들면서 회담이 결렬되고 분위기가 묘해지자, 관우는 주창을 내쫓는 척하면서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고 주창 역시 곧바로 강가로 가서 깃발을 흔들어 건너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관평에게 신호를 보낸다. 관우도 만취해서 가봐야겠으니 배웅 좀 해달라며 노숙을 인질 삼아 빠져나오는 바람에, 병사들을 데리고 숨어 있던 감녕과 여몽은 노숙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끝끝내 나서지 못했다. 이렇게 농락당하니 노숙과 여몽은 관우를 치기로 결의하고 격노한 손권도 허락했으나 조조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둔다. 이후 조조가 장로를 처 한중을 점령하자 유비측이 이를 두려워해 강하, 장사, 계양을 양도한다는 큰 줄기 자체는 정사와 같다.

손권이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키자며 사자를 보내오자 관우의 대답은 "호랑이의 새끼를 의 새끼에게 줄 수 있겠느냐."였다. 손권은 술처먹으면 개가 되니까 옳은 말이긴 하다.[31] 이는 관우빠인 모종강조차도 "손권이 개라면 관우와 의형제를 맺은 유비는 손부인과 혼인을 했으니 호랑이 형과 개 누이가 혼인을 맺은 것이고, 호랑이 시동생에 개 형수가 있는 셈이다."라는 식으로 비판했다.[32] 그러나 의외로 이 장면은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정사에선 그저 관우가 손권의 혼인사자를 모욕했다는 것으로만 나올 뿐, 손권이 거짓으로 지원을 해준다고 해놓고 안 왔다면서 담비 새끼라고 욕한 기록은 있으나 이것도 배송지가 '그랬다면 지원명목으로 들어가면 되지 기습을 할 필요가?'라고 의문을 표한 기록이다.

번성 공방전에서는 양성을 공격하다가 방덕이 날린 독화살이 오른쪽 어깨에 맞아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된다. 관평을 비롯한 장수들은 걱정했으나 명의 화타가 스스로 찾아와서 관우를 치료하는데, 관우는 바둑을 두며 담소하는 가운데 화타에게 자신의 팔을 맡긴다. 관우는 살을 절개하며 피가 흐르는 상황에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바둑에만 열중했다. 이 장면은 정사에도 등장하는 사실이긴 하나 양성을 공격하다 화살에 맞은 상처를 치료한 것이 아니라 예전에 맞은 화살 때문에 통증이 가시질 않아 치료를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의원 역시 화타가 아니었으며 관우는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에 부상을 입었다.[33]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는 데는 주로 오른팔을 사용하므로 관우를 부각시키기 위해 변경한 것으로 여겨진다.[34]

결국엔 장마로 인해 불어난 강물을 이용해 우금과 방덕을 사로잡는다. 사실 이 장면은 정사에서는 관우의 수공이 아니라 그냥 수재(水災)였지만, 정사 <방덕전>에 관우가 배를 타고 공격했다는 문구가 있으므로 관우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당장 온회는 수해에 조인이 대비하지 못하는 사이 관우가 이 기세를 타고 조인을 공격할 것을 우려했으며 <방덕전>, <우금전>, <조엄전> 등에는 관우가 수군을 준비해 면수를 장악하고 위군을 공격한 정황이 있다. 그 결과 연의에서는 관우가 홍수가 날 거라 예상하고 배를 만들라고 하자 관평이 기이하게 여겨 물어봤다가 뒤늦게 깨닫고 감탄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조조군에도 바보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성하가 이를 정확히 예측해 지대가 높은 곳으로 진영을 옮기자고 하지만 총사령관 우금은 관우가 비를 뚫고 공격할 정도로 무모할 리가 없다며 씹어버렸고, 그나마 부장인 방덕이 귀담아듣고 둘이서 나름대로 대비하기로 합의했지만[35] 역부족이었다. 결국 우금은 신나게 워터파크(…)를 즐기다가 꼴사납게 관우에게 살려달라며 투항하고, 방덕은 항복을 권유하는 동형동초를 베어버리고 성하와 함께 마지막까지 저항한다. 하지만 성하마저 전사하자 배를 뺏어 조인에게 도망가다가, 어느새 쫓아온 주창이 배를 들이받는 바람에 물에 빠져 그대로 주창에게 잡힌다. 원래 물질에 익숙하여(=수영을 잘 하여) 손쉽게 방덕을 잡았다고 설명이 나온다. 주창이 가공인물이라는 점은 넘어가자.

정사에서는 관우가 손권이 고의로 자신에게 지원을 늦게 보내자 이에 격분하여 손권을 오소리라고 모욕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연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관우가 우금과 포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촉과 오의 상수 경계 영릉에 있던 상관 군량고의 쌀을 마음대로 가져갔다는 기록도 연의에서는 삭제되어 나오지 않는다.

오나라측에서 배신을 때리고 관우도 서황에게 패퇴하자 관우 등은 맥성에 고립된다. 유비의 양아들 유봉에게 요화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지만 맹달의 간언에 넘어가는 바람에 거절당한다. 결국 관우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지고 유비에게 돌아가기 위해 맥성을 빠져나와 조루의 목숨을 바친 도움을 받으며 도주하지만, 여범이 점을 쳐서 복병을 매복시킨 바람에 관평과 함께 사로잡힌다. 이것은 연의에서 살짝 편집한 것으로 정사에서는 <오주전>, <오범전>을 종합하면 이때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도주했다, 당초 손권은 오범에게 그가 정말 항복하려는 것이냐고 질문했는데 오범은 관우가 도주할 기미가 있으며 투항한다는 말은 거짓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이에 손권은 반장을 시켜 관우의 길을 끊도록 했으며 정찰하는 자가 돌아와 관우가 이미 떠났다고 보고했다. 오범이 이에 관우는 사로잡힐것이라는 예측을 했고 과연 그리되었다. <우번전>에 따르면 우번 역시 이때 관우의 운명을 점쳤다고 한다.

2.7. 사망

나관중본에서는 맥성에서 도주하다가 궁지에 몰린 관우와 관평이 이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고 하늘이 부르는 소리에 맞춰 승천한다. 해당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관우는 아들 관평 등과 더불어 맥성 북문으로 탈출한다. 이르는 곳마다 오나라 복병들과 맞닥뜨리면서 결석(決石) 땅에 도달한다. 때는 5경에 가까운 시각인데도 순간 함성소리가 들리면서 다시 복병들이 공격해 왔다. 돌아보니 뒤쪽에는 주연과 반장의 정병이 기습한다. 관우는 반장의 부하인 마충과 맞닥뜨렸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린다.

"운장은 인간 세상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옥황상제의 조칙이 있으니 범부와 승부를 겨루지 말라."

관우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깨닫는다. 마침내 싸움을 하지 않고 무기와 말을 버린 채 관우와 관평 부자(父子)가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가정본)

이는 관우 신앙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모종강본부터는 관우 부자가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정상적인 장면으로 변경되었다. 정사에서 관우의 용맹함을 보고 감탄해서 죽이지 않고 본인의 부하로 만들고 싶어 고민중인 손권에게 관우를 절대로 살려줘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데, 연의에서는 좌함이라는 가공인물이 관우 부자의 참수를 권유한다. 한편 관우 사후 적토마마충에게 하사되었으나, 풀이고 물이고 어느 것도 단 하나도 입도 안 대다가 스스로 아사했다. 당연하지만 정사에서 관우는 적토마를 타지 않았으니 그냥 문학적 연출이다.

연의에서는 관우의 유령이 유비의 꿈에 나오는 등 죽고도 유령으로 계속 등장하는데, 당연하지만 모두 허구다. 일단 자신의 죽음에 한을 품고 돌아다니다 예전에 오관참장 때 사수관에서 변희의 음모를 몰래 알려줘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보정 선사와 우연히 만나는데, "그렇게 치면 당신에게 죽은 안량문추와 오관의 장수들은 누구에게 목을 돌려달라고 해야겠소?"라는 인과율에 따른 가르침을 듣고 성불(?)한다. 이 부분은 익주명화록에서 관장군이 옥천사를 세우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는 기록을 보고 창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오나라로 돌아가 형주를 차지하고 관우를 죽인 공으로 즐거운 피로연을 벌이는 과정에서 손권에게 1등공신이라면서 1순위로 축하주를 받은 뒤 마시려던 여몽에게 빙의하더니 술잔을 패대기치고 느닷없이 손권을 마구 꾸짖는다. 이에 손권이 경악해 다른 장수들과 함께 계단 아래로 내려가 절을 올렸으나, 여몽은 칠공분혈로 죽어버린다. 사실 정사에서 여몽은 번성 공방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한데다 이 장면은 잔인하고 폭력적인데다 의리의 화신으로 불리는 관우가 쪼잔하게(…) 복수한다는 식의 부정적 인상을 주는지라 삭제하는 판본도 많다. 그래도 어쨌든 타이밍이 타이밍인데다 관우의 인기가 엄청났으니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입소문이 퍼지는 것도 아주 무리는 아니다.[36]

아무튼 손권도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눈만 감았다 하면 관우의 얼굴이 아른거리자, 좌우의 조언을 받아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내 책임전가를 하기로 한다. 조조는 관우가 죽었다는 말에 기뻐했으나[37] 사마의는 그것이 손권이 책임을 떠넘긴 것임을 깨우쳐 준다. 이에 조조는 관우의 목을 가져와보라 했는데, 살아 있을 때와 변함이 전혀 없자 장난삼아 "그 동안 잘 지냈소? 헌데 어찌하여 목만 오신 것이오?"라고 말을 걸었는데, 갑자기 죽은 관우의 목이 입을 열고 눈을 움직이며 수염과 머리카락을 모두 곤두세우고 자신을 바라보자 기절초풍하며 쓰러진다. 조조는 한참 뒤에야 깨어나서는 식은 땀을 애써 닦으며 "역시 운장은 천신이구나." 라며 읊조리고, 이후 여몽이 저주를 받아 연회에서 손권을 욕보이다 몸의 일곱구멍에서 피를 뿜어내며 죽었다는 소식까지 듣자 또 다시 크게 놀라며 관우를 형왕(荊王)으로 추봉하고 손권이 보내준 목에 침항목을 깎아 직접 몸을 만들어 붙여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38] 물론 이것은 손권이 떠넘긴 책임을 다시 손권에게 되돌리는 계책이기도 했다. 과연 유비는 분노의 칼끝을 손권에게 돌린다.

이후 요절한 정사와 달리 장포와 함께 이릉대전에 참전한 친아들 관흥을 도와준다. 관흥은 아버지의 원수들 중 하나인 반장[39]을 보고 뒤쫓았다가 그만 숲 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한 산장을 발견하자 염치불구하고 잠시 쉬어가기를 청한다. 이에 집주인이 응하자 집 안에 들어가다 아버지의 화상(畵像, 초상화)이 사당에 모셔진 걸 보고 울음을 터트린다. 사정을 알게 된 집주인은 자신은 물론 동네사람들 모두가 관우를 신으로 모신다며 말하고는 관흥을 정중히 모신다. 이 때 우연찮게 반장도 길을 헤매다 그 산장에 도착하자, 관흥은 집주인의 도움을 받아 반장을 급습한다. 반장은 날쌔게 도망가려고 했지만 관우의 혼령이 문간에 떡 서서 노려보자 식겁하고, 그 사이 쫓아온 관흥에게 목이 베여 죽는다. 관흥은 청룡언월도도 되찾아 돌아가고, 집주인은 반장의 목 없는 시신을 소각해버린다(…).

장비와 유비가 죽고 꽤 시간이 흐른 제갈량의 북벌에서도 등장한다. 장포, 마대와 함께 조조의 사주를 받은 북방의 서강군을 상대하다 혼자가 되는데, 이때 대장 월길과 마주쳤으나 월길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철퇴를 피한다는 게 강물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월길도 어느새 강물로 떨어지고 있었고, 저 위에선 누군가가 혼자서 서강군을 박살내고 있었다. 관흥이 감사를 표하기 위해 다가가보니 그 사람은 아버지 관우였고, 관흥이 놀란 사이 관우는 한 방향을 가리키며 '이 길로 어서 도망가라. 내가 계속 지켜주겠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진다. 관흥이 그 길로 도망가다 의제 장포를 만나는데, 장포도 관우의 혼령이 나타나 '너는 이 길로 가서 내 아들을 구해주라'라고 말했다며 놀라워한다. 이후 관우가 연의에서 등장하는 일은 일절 없다.

[1] 다만 판본에 따라선 장비와는 이미 면식관계인 것으로도 나온다. 장비가 산적들을 혼내던 걸 관우가 끼어들어서 도왔는데 성격이 맞아 친해졌다는 식. 이희재 만화 삼국지에선 두 사람이 저잣거리에서 일기토를 벌이던 것을 유비가 황급히 끼어들어 화해시킨 것으로 묘사되었다.[2] 다만 역사적으로 중국 삼국시대에는 월도라는 무기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는 것은 연의의 창작이다. 참고로 월도는 당나라 때 등장한 무기이다. 실제로는 창과 도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3] 판본에 따라 다른데 원소라고도 한다.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총대장 원소가 "안량문추라도 데려왔으면 이러지도 않았다!"라며 신나게 폭언을 일삼자 원술이 형님 덕에 나팔 부는 격으로 언성을 높이는 것으로 나온다.[4] 참고로 판본에 따라서는 관우가 화웅의 목을 베었다고는 언급하지만, 정작 장면 묘사는 막사에서 숨을 죽이고 승전보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경우도 있다. 즉각즉각 무대를 바꿀 수 없었던 경극이나 연극의 흔적으로 짐작된다.[5] 가정본 연의에서는 300합의 대결 끝에 장비가 슬슬 밀리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오고, 모종강본에서는 50합의 무승부를 벌이는 와중에 관우가 전의를 불태워 나서는 걸로 나온다.[6] 다만 후술하듯 유비의 두 부인을 위해 잠시 조조군에 의탁할 때 조조가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선물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10명의 미녀를 보내자 싫지는 않은 듯 같이 술을 마시며 즐거워했으나 술이 깬 뒤엔 두 부인의 시중을 들게 했다고 한다. 이 10명의 미녀는 관우가 두 부인을 모시고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만나러 갈 때 이제까지 받았던 선물과 함께 집에 두고 갔다고 한다.[7] 황제가 전용으로 사용하는 금제 궁과 화살이 있는데, 헌제가 몇 번 쏴도 맞지 않자 조조에게 넘겨주니 조조는 단번에 사냥감을 맞췄다. 대신들은 금제 화살만 보고 헌제가 맞췄다고 생각해 환호한 건데, 조조가 금제 궁과 화살을 들고 얼른 헌제 앞에 나서서 인기를 싹쓸이한 것.[8] 주로 조조군의 공격에 의해 유비군이 박살날 때.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역시 장판파 전투 당시 미부인아두를 구하기 위해 자결한 일을 들었을 때이다.[9] 도원결의를 저버리는 것이 첫째, 유비가 자기의 가솔들을 부탁했는데 이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 둘째, 유용한 능력을 버리게 되는 것이 셋째라고 했다.[10] 첫째는 한나라에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둘째는 유비의 두 부인을 잘 보호하여 범하지 않게 함으로서 두 사람의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것, 셋째는 유비의 거처가 알려지면 지체없이 자신과 유비의 식솔들을 풀어줄 것이었다.[11] 관우가 장료를 역으로 회유하진 않았지만, 장료는 조조에게 보고하러 돌아가던 중에 고민 끝에 '공(公=조조)은 군부(君父=주군)지만 관우는 형제로다!'라며 한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관우는 유비를 버리지 않았기에 조조가 악감정을 먹으면 언제나 처리할 수 있는 인질의 입장이었기 때문. 장료는 관우와 면식이 있고 오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관우의 의중을 어떻게든 완곡해서 보고하고자 하지만 결국 아무리 돌려 말해도 그 뜻이 그 뜻이기 때문에 주군의 충성을 져버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관우를 보호하고자 조조가 '그 뜻이 그리 확고한데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 묻자 '공을 세워 보답하면 필시 돌아갈 것이니 공을 세울 기회를 주어선 안 된다.'고 말해서 기회를 준다. 물론 장료의 생각과는 다르게 조조는 관우의 충절을 존경하고 있었기에 그를 죽일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12] 이 수염 주머니 설정은 연의가 진행될수록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지만 딱 한 번 부각되는 적이 있는데, 이후 미부인을 데리고 조조군을 떠나다 배원소 일당을 만나자 누구냐는 물음에 묵묵히 주머니를 풀고 수염을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13] 대장기 옆에서 쉬고 있다가 관우가 나타나자 맞서 싸우려고 했는데, 관우가 더 빨리 다가와서 반응하기도 전에 베어버렸다.[14] 대담하게도 '나는 서주에서 흩어진 이후 관우가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넓고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도 많을텐데 얼굴이 붉고 수염이 길다고 무조건 관우라는 법은 없지 않는가.'라고 주장했는데, 연의를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작중에서 수염이 길고 얼굴이 붉은 장수는 관우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폭소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게다가 생김새가 비슷하고 무기도 같고 무예까지도 높은 사람이 흔하지도 않다. 물론 정보의 유통 속도가 느린 시대인데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은 중국이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원소였다는 게 문제. 연의에서는 관도대전 중에는 물론 그 앞뒤에도 조조와 원소 간의 '결단력의 차이'를 두고두고 비교하며 깐다.[15] 그런데 연의에서 위연이 관우를 어느 정도 닮은 꼴로 나오긴 한다. 가정본에서는 키가 9척이고 얼굴이 대추색이며 눈은 밝은 별과도 같아서 관운장과 흡사하다고 묘사하였으나 모종강본에서는 키를 8척으로 너프하고 관우와 닮았다는 묘사도 삭제하였다. 아무래도 위연이 훗날에 반란을 일으키는 인물이라서 관우와 비슷하게 엮는 게 싫었던 것 같다. 수염이 길다는 묘사는 없지만 얼굴빛이 대추색이라는 묘사는 관우와 동일하기 때문에 가짜 수염을 붙여놓으면 이론상 얼추 비슷하게 되긴 한다. 물론 당시 위연은 유표의 부하로 있었을 것이다.[16] 여기가 고향인 사람이 대표적으로 반준이 있다.[17] 후는 등급에 따라 현후, 향후, 정후가 있었는데 정후가 그 중에서 최하 등급이다. 참고로 나중에 원소가 죽은 후 형제싸움으로 자멸해가던 원담이 여광&여상 형제의 간언을 듣고 잠시 조조에게 의탁했다가, 조조의 애매한 태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테니 내응해 달라며 여광&여상 형제에게 수정후 직인을 보낸다. 하지만 여광&여상은 이미 조조를 진심으로 섬기고 있었기에 사실은 대가가 너무 짜서 오히려 그 직인을 조조에게 바치고 그 사실을 불어버린다.[18] 피객패(避客牌)는 한자 그대로 '손님의 문 두드림을 거절하는 패'로, 의미나 용도가 오늘날 문 앞에 내거는 '방문사절'이나 'Do not disturb(방해하지 마시오)'와 정확히 일치한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손님은 조용히 돌아가는 것이 예의다.[19] 특히 채양이 가장 심했는데, 판본에 따라서는 장료서황 등 학식과 덕망이 풍부한 장수들이 관우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고깝게 여겼다고 나온다. 그 때문에 관우가 후술하듯 여섯 장수를 베고 하북 인근에 다다르자 이를 빌미삼아 관우를 추격한다. 그 최후야 당연히...[20] 재미있게도 시간상 한참 뒤인 장판파 전투에서도 의제인 장비가 똑같이 혼자 장판교 위에 서서 쫓아오는 조조군을 맞이한다. 나관중이 이걸 노리고 의도적으로 같은 장면을 연출했는지는 불명이지만.[21] 사대부적 낭만이 돋보이는 장면으로 관우의 충절과 조조의 의리와 안목 모두를 부각시킨 장면이다.[22] 삼국지평화에서는 조조의 본거지가 허창이 아닌 장안으로 나오며 관우의 출발지도 장안의 패교라는 곳이다. 가정본 연의에서는 장안이 허창으로 수정되긴 하였으나 출발지를 수정하지 않아서 패릉교라는 곳으로 나오며, 모종강본에 와서야 패교가 아닌 그냥 다리로 수정되었다. 문제는 관우의 이동 경로까지는 고치지 못해서 전체적으로 꼬여버린 것.[23] 이희재 만화 삼국지에서는 장비가 이 말을 하면서 양 손에 북채를 들고 이미 몇 번을 치고 있는 걸로 나오는 페이크가 있다. 다만 원문은 세 통(한 통은 333번)이므로 총 999번을 쳐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맞는 묘사라는 지적도 있다.[24] 일단 유비는 간옹의 계책대로 '유표에게 원소와의 동맹을 권하러 간다'면서 몸을 빼냈고, 원소가 그새 마음이 변해 관우를 죽이려 하자 이제 와서 말을 바꾸냐며 일축하고는 손건은 '관우를 데리러 간다'며 보냈다. 간옹 본인은 야심을 품은 유표가 도리어 유비를 설득하려 들테니 '유비를 감시하겠다'며 따라간다. 곽도가 뒤늦게 이를 알고 막으러 가지만, 원소는 간옹을 감시역으로 붙인 것에 안심했는지 단번에 무시한다. 물론 유표는 (어디까지나 연의에서만) 야심 따위 없었고 오히려 유비는 유표 휘하에서 서서히 힘을 쌓아나간다.[25] 정사, 즉 실제로는 관우의 친아들이었다.[26] 매체에 따라서는 병사들은 보내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병사들이 살려달라고 빌자 결국 그들도 보내준다는 묘사가 나온다. 이 경우에는 훗날 관우가 우금과 수만 명의 포로를 붙잡고도 음식까지 배급해주며 살려준 것에 대한 복선이라고 할 수도 있다.[27] 몇몇 학자들은 아예 오나라가 형주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형주를 대여했다고 조작했다는 의견도 존재하는 등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유비가 일방적으로 형주를 먹튀한 건 아니다.[28] 일단 후술하듯이 관우는 이후 형주를 맡느라 한중 공방전에는 가지도 못해서, 제갈량은 '관우라도 불러야지 안 그러면 답이 없다'는 식으로 일부러 엄살을 떨어 황충의 의기를 돋운다. 마찬가지로 마초 역시 투항하기 전에도 후에도 북방에만 있다보니 관우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마초를 깐다고 각색을 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다만 마초는 이미 동관에서 조조와 싸우면서 중원을 진동시킨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이 역시도 어색하긴 하다.[29] 혹은 단도부회(單刀赴會). "칼 한 자루만 들고 적군의 위험한 회의에 나가다"라는 뜻으로 오늘날까지 용맹무쌍한 행동을 가리키는 사자성어가 되었다.[30] 정확히는 손권이 노숙에게 "너는 왜 맨날 형주에 다녀오면서 막상 소득은 하나도 없냐, 너 유비 편 아니냐"라고 까대자, 노숙이 욱해서 관우를 급습한다는 위험한 도박수를 둔 것이다. 관평은 이를 두고 "노숙이 아무리 유학자의 풍모가 있다고는 하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염려한 것이다.[31] 여담으로 현대 중국어에서는 '손권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權子와 '개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犬子의 발음이 같다. 두 한자는 단독으로 읽으면 성조가 다르지만 해당 단어에서는 성조의 변화 법칙 때문에 똑같게 발음된다. 하여 일부에서는 반쯤 농담으로 해당 사건이 발음과 억양 차이로 인한 오해였다고 주장한다. 실제 해당 문구에서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글자 셋만 바꾸면 관우가 오히려 이 혼인을 기뻐했다는 의미로 고칠 수도 있다.[32] 이문열은 이걸 보고 관우의 자부심이 너무 지나치다고 비평했으나 관우 역시 할 말은 있다. 이미 동오는 형주 내놓으라면서 온갖 공작을 했고 급기야 본인을 유인해 죽이려고까지 했다. 이런데 과연 좋은 말이 나올수 있을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지만 이미 동오의 계책을 잔뜩 겪어본 관우 입장에선 이 혼담 속에 또 무슨 계략이라도 존재한다면 그거에 속이서는 안될 말이니 일부러 모욕한 것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잇다. 거기에 조조가 공공의 적이 있는 입장에서 분노한다고 해도 함부로 통수를 치긴 힘들 것이라는 생각까지 겹쳐있기에 이랬다고도 할 수 있다.[33] 파일:아 씨발 오른팔이네.jpg 이 이야기를 비틀어서 만든 밈도 있다.[34]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에서 관우가 팔에 부상을 입자 큰 수술을 무사히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고 장담했지만 정사에 버젓이 나와있어서 걸핏하면 정사 타령하던 이문열을 데꿀멍하게 만들기 좋은 부분이다. 애초에 이문열이 많은 책을 써서 그런진 몰라도 이런 검수가 꼼꼼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 내용이나 발언은 어느정도 독자 스스로 검증이 필요하다.[35] 우금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자기 휘하의 부대만이라도 높은 곳으로 옮기기로 하고 늦은 밤까지 성하와 상의한 후 그를 돌려보냈는데, 그 다음 날 새벽 관우가 준비한 수공이 터졌다...[36] 다만 쪼잔하다기보단 관우의 특별함을 부각시키는 장면임과 동시에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관우, 그것도 사람들에게 신으로 추앙 받는 관우가 참수로 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할 것을 고려해 관우가 영험한 힘으로 복수하면서 사필귀정에 따른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37] 하비성에서 투항한 이래 화용도에서 인연을 정리하기까지 이런저런 관계가 깊었음에도 관우가 죽었다며 기뻐하는 묘사를 보고, '역시 조조가 노망이 나긴 났나 보다(…)'라고 해석하는 독자도 있다. 하기야 이전에 순욱, 순유, 최염이 연속으로 비슷한 시기에 줄줄이 죽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렇게 초창기의 조조와 말년의 조조가 급격히 차이를 보이는 원인을 조조 본인의 판단력 감퇴 및 유능한 참모진의 감소(연의에서는 숙청, 정사에서는 자연사)에서 찾기도 한다.[38] 고대 중국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것을 전시(全尸)라고 한다. 조조가 관우의 수급을 받은 뒤 나무 몸을 조각해 붙인 것도, 완전한 상태의 시신을 찾지 못하더라도 의관묘는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당대의 관념에서 행해진 것이다.[39] 게다가 부친의 청룡언월도도 이 자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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