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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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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운학문 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국보 제68호[1]
(선)은
가냘핀 푸른 은-
아리따웁게 구을러
菩薩같이 아담하고
날신한 어깨여
(사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중략)
(상공)이요 畵家더라
진흙 속 彫刻家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高麗 靑磁器!
박종화, 《(청자부)》

1. 개요2. 신비로운 비색(色)3. 쇠퇴 이유4. 현대의 재현5. 청자기와6. 기타7. 현대 창작물에서8. 관련 역사기록9. 고려청자 고미술품 목록
9.1. 국가 지정 문화재9.2. 시도 지정 문화재9.3. 일반 동산 문화재9.4. 해외 소재 문화재
10. 외부 링크11. 같이보기12. 둘러보기

1. 개요


고려청자()는 청록색 계열의 빛을 띠는 고려 시대청자를 말한다. 영어로는 Goryeo Celadon이라 한다.

청자의 시작은 대체로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또는 10세기로 보고있다. 장보고로 대표되는 서남해 무역집단이 당나라와 교류하면서 당나라의 도자기를 꾸준히 수입했고, 한동안은 중국 수입품으로 수요를 감당했지만 이에 자극을 받아 전라남도 강진군[2], 전북 부안군 지역 등의 가마터에서 자체제작 청자의 초기 형태인 해무리굽청자 등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3] 여기에 따라 "고려청자를 탄생시킨 인물이 장보고다."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기사1기사2 9세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 한편, 명지대 윤용이(미술사학) 교수 등 고려청자가 10세기 이후에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본격적인 청자의 발전은 고려 시대 초기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중국 오대 월주요 청자의 영향을 받아 제작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2세기 무렵에는 독자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매우 정교하고 화려한 고려 시대 미술품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세계 도자기 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품이다. 당대에도 국제적으로 최고급품 취급을 받았고, 남송의 태평노인이 쓴 수중금(袖中錦)이라는 책에서는 "고려의 비색[4]은 천하제일"이라고 평하였다. <고려도경>에서 고려 전반을 묘사하면서 비판적, 때로는 조롱적으로 고려를 바라본 서긍조차도 고려 청자의 비색은 딱 집어서 칭찬하였다. 기타 사서에는 '중국 대륙 어느 지역 청자와 비슷하다.' 정도로 언급되어 있다. 당시 남송황실을 비롯하여 티벳과 베트남, 필리핀 등지 그리고 일본전역에서 유물이 발굴 되었다. 상감청자, 宋 아닌 거란 공예 힘입어 탄생

특히 고려청자는 은은한 푸른 빛깔-비색(翡色)과 상감(象嵌) 기법으로 유명하다. 보통 비색과 조형을 강조한 순수청자 시기, 상감 기법을 중시한 상감청자 시기, 그리고 몽골 제국의 침입 이후 쇠퇴기로 나눈다. 고려 초는 순청자가 유행했고, 인종대 이후 기법이 발달하면서 상감청자도 나타나 무신정권 시기 절정에 이르렀으며, 몽고 치하에서 점차 쇠퇴하고 조선 초까지 분청사기가 민간에 널리 유행하게 된다. 상감청자의 기법은 칠기나 동기 등의 기술과도 상통하는 고급 기술로 고려 공예의 뛰어난 기술을 잘 보여준다. 상감청자의 장식이 갈수록 화려해진 것에 대해서는 단정한 문신들에 비해서 무신정권기의 무신들은 청자를 보는 눈이 깊지는 못해서 겉으로 금방 보기에 화려한 무늬가 많은 상감청자를 선호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쪽이 수준이 높고 낮고의 문제는 아니고 시대상과 기술력의 발전을 반영했다는 의미이다.

2. 신비로운 비색(色)[5]

파일:external/www.k-heritage.tv/1110_do_img01.jpg
대표적인 고려시대 청자 향로 2점
화려한 듯하지만, 그러나 화려한 그 속에는 여전히 따뜻하고 고요한 맛... 청자는 고려인의 '파란 꽃'이다.
우현 고유섭, 《고려청자》
고려 청자의 푸른 빛은 따로 푸른 색소를 넣은 것이 아니다. 비색 청자는 유약층 안에 수많은 기포가 들어차 있는데, 유리질 속에서 빛이 산란되어 푸르게 보이도록 만든다. 도자기에는 태토와 유약의 수축률 차이로 인해 균열이 발생된다. 근대기 화학의 발달로 수축률, 열팽창계수 등을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전근대시대의 도자기 대부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약에 균열이 존재한다. 이렇게 생긴 상감청자의 균열을 '빙렬무늬'라 한다. 본래 이 빙렬은 결함이지만, 일종의 장식으로써 사용되기도 한다. 빙렬을 만드는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고 재벌구이를 마친 상태에서 도자기를 꺼내면 바깥의 찬 공기와 가마 속 따뜻한 공기가 반응해 유약층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때 가마에서 빙렬이 생기면서 나는 쨍쨍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렇게 보면 별거 없는 그저 결함같아 보이지만 이 빙렬을 장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규칙적이고 일정한 크기로 나도록 일부러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러한 빙렬은 단순 기술 부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종래에는 청자의 품질이 낮아지면서 이를 커버하기 위해 상감 기법을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계속된 발굴 조사로 순청자의 전성시대부터 이미 상감 기법이 시도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면서 부정되었다.

고려청자만의 특유의 색이나 상감기법을 이용한 문양표현 같은 동시대 중국에는 없던 한국 특유의 면이 있는 점과, 송나라때 세계에서 중국의 도자기 기술을 구현하던 나라는 고려뿐이었다는 점은, 고려 도자기 기술의 우수성의 증거다. 당시 한국의 도자기 기술이 중국을 따라잡던 수준을 넘어서 중국시장에서 자체적인 특산품이라 인정받고 세계 상품인 중국 도자기들과 당당하게 경쟁하며 수출하는 수준까지 올라왔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송, 원, 명대 초기까지의 한국의 청자와 백자 도자기는 세계 도자기사에서 중요한 포인트로 자리잡고 있다.

1159년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국보 제115호 청자 상감당초문 완이 있다.

파일:29154.jpg
사진출처 청자상감당초문완 국보 115호

아래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연구에는 앞서 기술된 고려청자의 특성인 비색과 높은 투명도, 그리고 흰색 상감에서의 의도적인 균열을 과학적으로 잘 분석하고 있다.
한국 도자기에 대해 가장 많은 과학적인 연구를 하는 곳중 한 군데는 미국의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이다. 여기서는 한국 도자기에 대해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를 골라 과학적인 연구에 대한 사례로 살펴본다.

* 연구목적
고려청자는 처음에는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발전을 하면서 중국 도자기에 비해 생산되는 동안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청자와 중국 도자기를 비교하면 한국의 독자적인 기술개발과 유지과정을 알 수 있다. 또 중국도자기의 영향 정도를 알 수 있다. 또다른 목적은 청자의 기술변천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 실험방법
전라도 강진에서 출토된 청자조각, 부산과 광주에서 얻은 분청사기 조각, 중국 웨(Yue, 월요(越窯))와 관(Guan, 관요(官窯)) 도자기 조각, 일본의 나베시마(Nabeshima, 鍋島) 도자기 같은 것을 시편으로 삼아 분석하였다. 유약의 미세조직은 저 배율 광학현미경(Bausch and Lomb Stereo-zoom)과 주사전자현미경(scannng electron microscopy)의 2차 또는 후면반사형을 이용해 관찰하였다. 이때 시편은 에폭시 수지에 고화시켜 연마한 다음 탄소를 코팅했다. 그리고 주사전자현미경을 사용하면서 x-ray 분석(energy dispersive x-ray analysis)을 같이 하였다. 유약의 조성과 상을 분석하기 위해 파장분산 기술 (wavelength dispersive x-ray technique)을 이용해 미세탐침분석(quantitative electron beam microprobe analysis)을 하였다. 조사는 유약층의 표면부터 내부로 10-50 μm 씩 들어가면서 분석하였다. 기포나 석영(quartz)이 포함된 것은 광학현미경으로 관찰하였다. 미세탐침분석결과의 신뢰성을 얻기 위해 동일한 시편은 하버드 대학 호프만 연구소에서 다시 분석해서 같은 결과를 얻었다.

* 실험결과로부터 얻은 결론
고려청자의 유약은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일정한 조성을 갖고 있었다. 조성에는 칼슘이 많이 들어가 있고, 중국 것에 비해 망간 산화물이 0.5%로 많이 들어간 것이 눈에 띄며, 이 때문에 색이 보다 회색쪽에 가깝게 보이게 되었다. 고려의 가마는 중국 것보다 상당히 작기 때문에 소성과 냉각과정이 빨리 일어난다. 따라서 유역 층에서 회장석(anorthite)이나 규회석(wollastonite) 같은 것들이 핵 형성-결정 성장할 시간이 없다. 반면 중국 도자기는 이런 것들 때문에 옥색이 난다. 청자에는 용해되지 않는 석영, 검은 색 입자, 기포, 잔금 같은 것들이 투명하게 보이게 한다. 칼슘성분이 많기 때문에 융점이 낮지만, 낮은 온도에서 짧은 시간에 소성하기 때문에 석영이 완전히 용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가마나 그 밖의 소성기술로 보아 청자는 초기에는 중국 북부보다는 남부의 도자기 제조기술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청자가 기술적으로 크게 공헌한 점은 회청색을 강조하기 위해 하얀 색, 검은 색, 또는 회색상감을 넣었다는 것이다. 또 흰색 상감을 넣을 때 의도적으로 균열을 일으키는 조성을 선택하면서 잔금을 만들어 빛이 작은 균열에 의해 산란되면서, 청자를 볼 때 상감에서 상감으로 눈이 움직이게 하면서 위치마다 회색의 정도가 다양하게 나타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디자인은 모서리 부분에서 퍼져 나가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구름이나 새, 꽃들은 방사(radiation)형으로 디자인되었는데, 이것은 균열 패턴을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또 회색이나 검은 색 상감으로 균열을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흰색 상감에만 잔금이 가도록 하였다. 중국과 원료나 가마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중국 도자기 같은 색을 내지 못하던 고려는 1150 년경부터 미적으로 뛰어난 고유의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즉 의도적으로 미리 프릿(frit)을 칠하고, 자철석, 티탄철석(illmenite), 석영 등을 섞은 유약을 써서 회색부터 검은색까지의 상감을 만들기 시작했다. 또 원료를 곱게 연마하여 넓은 표면적을 갖는 고운 퀴츠입자로 높은 투명도를 얻었다. 13세기와 14세기를 거치면서 기술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상감의 섬세함과 원료의 순도는 떨어졌다. 그러나 상감에 쓰는 재료, 소성온도, 유약조성, 유약의 이질성분을 그대로 유지되었다. 15세기 들어 백자가 나타났지만, 청자를 만드는 기술은 없어지지 않고 분뼈 불교의식의 제기를 만드는 기술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빨리 만들기 위해서 소지나 유약, 장식을 위한 원료들은 상대적으로 저급이 사용되었다. 또 고려청자같이 많은 장인의것들이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소성온도나 유약조성을 그대로 남아있었으나, 하얀 색 상감의 조성은 소지에 맞추기 위해 달라졌다. 따라서 고려청자제조 기술은 11세기부터 최소한 15 세기를 통한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다가 16세기 새로운 시장이 성립됨에 따라 변화되었다.
출처: 우리 나라 도자기의 과학적인 연구
요약하면, 고려청자만의 독자적인 유약 기술이 있었으며 투명도가 높고 그 기술 수순은 균열 패턴조차 상감무늬에 맞춰 의도적으로 조절할 정도의 유약 기술이었다.

세간에 나도는 '고려비색은 세계최고'라는 말의 유래는 아래와 같다.
고려청자의 비색에 대해서는 북송 대의 『고려도경』과 남송 대의 『수중금(袖中錦)』을 반복 혹은 조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남송 태평노인의 『수중금』에는 “건주·촉 지방의 비단, 정요 백자, 절강의 차, 고려 비색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모방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고 하여 천하의 명품 가운데 고려청자를 포함하였다. 특히 당시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북송의 여관요(汝官窯) 청자의 비색이 절정에 달했을 때라는 점에서 이러한 평가는 매우 의미가 깊다.
출처: 중국인 눈에 비친 고려청자
당대 중국인이 "우리 물건 세 가지와 함깨 세계 최고에 속하는 고려비색"이라고 했다는 것에서 '고려비색 세계최고론'이 퍼졌다. 간혹 '한국 내에서만 세계최고 취급이라더라.' 또는 '고려 청자는 부장품용으로 소수생산된 물건'이라는 주장 역시 최근 당시 난파된 무역선에서 고려청자가 대량 발견되면서 '고려청자 내수용설' 역시 근거가 없어졌다. 2013년 중국에서 개최한 고려청자 국제학술대회에서 빈약한 문헌기록을 뒷받침할 유물이 많이 발굴됐다는 보고가 나와 소수 특정인의 기록에만 의존하던 '고려비색 세계최고'론의 실체가 어느정도 밝혀졌다. 특히 『수중금』의 기록이 태평노인의 개인적 감상이었는가 보편적 인식이었가 하는 문제제기는 '남송황실의 유물'로 대변된다. 기록자 개인취향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은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고려청자의 당시 국제적 인식에 관한 칼럼이다.
청자 종주국이 고려청자 역수입
고려청자 국제학술회의에서 또 하나 주목받은 것은 상감청자의 유통 문제였다.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수도를 항저우로 옮기면서 남송시대(1127~1279)가 시작된다. 상감청자는 남송시대인 12세기 중반 이후 제작되는데, 남송 이후 송과의 교류는 고려사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 학계는 두 나라의 교류가 사실상 단절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를 중심으로 상감청자를 비롯한 상당히 많은 고려청자가 발굴된 사실이 이번 회의에서 보고되었다. 상감청자의 완제품이 현재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티베트 지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주요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에선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생산된 청자가 나라 전역에서 발굴됐고, 상감청자를 포함한 많은 고려청자가 멀리 베트남·필리핀 등지에서도 발굴됐다는 사실도 보고됐다. 어떤 중국인 학자는 "중국은 남송 때 고려의 상감청자를 역수입하는 국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번 회의에 때맞춰 항저우에 있는 '중국 관요(官窯) 박물관'에서 고려청자 특별전이 열렸다. 남송 때 항저우 인근에서 발굴된 고려 상감청자편[6]이 대량으로 전시됐다. 특히 상감청자로 제작된 황실의 제의(祭儀)용 물품과 황제의 비(부인) 및 궁전의 명칭이 표면에 새겨진 상감청자편도 있었다. 상감청자가 송나라 황실에서 수입돼 사용된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2세기 중반부터 제작된 상감청자가 남송은 물론 동아시아 일대에까지 대량으로 유통·소비된 사실은 기록상 나타나지 않은 고려의 활발했던 대외교류 실상을 확인시켜 준다. 고려의 명품 청자는 『고려사』 『고려도경』 등 몇 편에 불과한 빈약한 문헌기록의 공백을 메워주고 고려의 가려진 역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하는 역할을 한 고려 문화의 아이콘인 셈이다.
출처: , 宋 아닌 거란 공예기술 힘입어 탄생
과학적 근거 없는 세계최고 비색이라는 태도도 좋지 않으나 '고려청자는 어디까지나 국내용' 취급을 할 필요는 없다. 고려청자는 그 당시에 국제시장에서 인기있는 수출 품목 중 하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욱이, 남송 시대에는 청자 중 최고의 완성도로 평가받는 용천청자가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고려청자가 남송으로 대량수입되었다는 것은, 송 청자와 다른 고려청자만의 가치와 미술성을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려청자는 송 청자에 비하면 생산량도 적고, 국제교역품이었으므로 가격대도 더 높아졌을 것임에도 인기가 있었다는 것.

고려 청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송나라 청자는 송 유교의 복고주의에도 영향을 받아서 각광받았는데, 송에서 귀하게 여긴 녹옥과 청자, 그리고 청동기는 모두 녹청색을 띠고 있다.

3. 쇠퇴 이유

고려 후기로 가면서 고려의 상황이 막장으로 치닫고 도자기의 주요 산지이자 청자토가 풍부한 남해안이 왜구들에게 거덜나면서 도자기 기술 자체가 서서히 쇠퇴했고, 특히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남해안의 청자 산지들이 악탈, 방화, 소실을 거듭하며 수많은 장인들과 도공들이 죽어나가고 전승이 어렵게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때에 청자는 점차 유행에 뒤처지면서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에게 자리를 내줬다. 그래도 17세기 말엽까지는 조선청자로 불리면서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가서는 청자 제조의 기술은 거의 실전되고, 대한제국 시대에 가서는 청자의 존재가 거의 잊혀지게 되었다. 이를 찾은 것은 바로 일제인데, 고려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파다가 청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이미 구한말 때부터 고려 무덤에 대한 도굴이 기승을 부렸다고. 이토 히로부미가 청자 수집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로 희한하게도 덕수궁 박물관에도 가져다놓았다고 한다. 고종이 청자를 보고 어디서 나온 거냐고 묻자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도자기라고 대답했고, 고종은 "우리나라에는 이런 거 없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항목의 맨 위에 언급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도 강화도의 왕릉 혹은 귀족 무덤에서 일본인 도굴꾼이 파낸 물건이라고 한다. 실제로 현재도 강화도에서 고려의 30여개의 이궁과 궁궐중 단 4군데밖에 발굴이 안되었으니 앞으로 더 많은 청자가 발굴될 가능성이 있다.

흔히 귀족의 그릇이 청자고 서민의 그릇이 백자라는 오해가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7] 백자가 청자보다 인기 있게 된 이유는 교과서에서 나오듯이 단아한 아름다움, 우아함, 청백의 순수함 등 고고한 취향에 맞는다는 이유가 크다.[8] 청자→백자로의 이행은 중국에서는 원나라 시기를 전후로 이루어졌고 서양, 중동, 중앙아시아에서도 문화적으로 백색을 더 선호했다. 몽골이나 중앙아시아의 경우는 백색태양의 색으로 여겨 신성시하는 풍습이 있었고[9] 이는 백자로 전환된 이유에 대한 온갖 추측 중 하나이다. 지금도 전 세계 레스토랑에서 청자와 백자 어느 것을 더 많이 사용하는지, 본차이나 등 유럽 명품 도자기들이 청자인지 백자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답이 나온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조선시대 초기까지 청자를 만들려고 애쓴 기록들이 있다.

청자에서 백자로 바뀐 것은 단아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고고한 취향에 맞는다기보다는, 수천 년 중국 도자 역사에서 당대 취향이 백자로 전환되었을 뿐이라거나, 원나라 특유의 유목민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등이 있지만 그저 수많은 설 중 하나일 뿐이다. 원나라 이전까지 청자가 백자보다 더 유행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까지 기술 부족으로 백자에서 완전한 백색을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중금에서 고려청자와 함께 천하제일로 거론하는 정요 백자를 보면 알겠지만 완전한 백색을 구현하지 못하고 칙칙해서 백색이라기보다는 회색상아색에 더 가깝다.[10] 이런 백자의 기술 부족이 해결된 시대가 원나라 후기로 백자에서 완전한 백색이 구현되자 청자가 밀려나고 도자기의 대세를 백자가 차지하게 된다.

게다가 기술적으로 보면 청자보다 백자를 만들기가 더 어렵다. 청자는 유약의 혼합으로 전체적으로 청색을 냄으로써 무늬를 넣을 수 있지만, 백자는 바탕이 하얗기 때문에 희귀 원료가 많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백자에 파란 무늬를 넣는 코발트 안료다. 백자에 많이 사용되는 코발트는 이란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고문헌에는 회청(回靑, 혹은 회회청回回靑)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무역으로 확보할 수밖에 없었던 귀한 안료였다. 이를 대체하고자 조선 세조 때부터 국산 청화안료인 토청(土靑)을 개발하고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토청은 회청처럼 선명한 푸른빛이 나오는 게 아니라 검푸른 색이 나온다.(참조) 백자를 만들 수 있는 온도인 섭씨 1,200도[11]이상에서도 온전히 버틸 수 있는 안료가 코발트뿐이기 때문이다. 생물 안료는 수백 도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광물안료들도 고온을 버티지 못해 변색되거나 흐릿해지기 십상이다. 그 문양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대신 조선 후기에는 대체 염료로 인해 청화백자 수가 늘어난다. 토청도 비록 색이 좋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대체재로 활용되었고, 18~19세기 들어 서양산인 값싼 양청(洋靑)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값이 확 떨어진다. 양청은 단청에도 쓰일 정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만드는 것이 더 어렵고 복잡할수록 가격이 높아지고, 가격이 높아지는 것은 사치품으로서는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현대에도 명품 백이나 명품 시계 등은 이 핑계 저 핑계 대서 가격을 일부러 높여 받는 것을 생각하자. 현실적으로 당시 서민들은 목기나 도기를 주로 사용했다 한다.

고려청자가 조선백자에 비해서 대체로 무늬와 형상이 정교하고 화려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은 왕도정치를 표방하고 사치를 멀리하는 검약 정신을 강조하였기에 고려의 귀족 문화와 같은 화려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청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문화 영역에서 조선은 고려보다 검소함을 지향한 부분이 많다.

4. 현대의 재현

현대 과학으로도 답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청자가 쇠퇴기에 들어서면서 비색을 온전히 내지 못하게 되고, 결국 현대에까지 유약을 재현하지 못하면서 나온 말이다. 덕분에 잊을 만하면 드디어 비색을 재현했네 어쩌네 설레발치는 소동이 몇 번 있었다. 부단한 연구 끝에, 색 자체를 내기 위해선 철분 함량을 3% 정도로 맞추면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20세기 말까지 와서도 재현하지 못했기에 일본에는 관련된 사기극도 존재했다. 일명 후지무라 신이치의 고려청자 버전. 자칭 고려전승도예연구가 다니 슌제이(谷俊成)라는 인간이 1990년대에 고려 청자를 복원했다고 일본 언론에 발표, 이후 여러 차례 도예전을 열며 고려청자전문가로 이름을 날렸고 결국 일본발 언론기사가 한국에 노출되면서 사기극이 발각됐다. 이 사기방법이 매우 걸작이다. 이 인간은 원래 도자기 무역회사를 차린 뒤 1970년대부터 이천 지역 도자기를 구입해 일본 도자기 애호가들에게 판매하던 도자기 상인이었는데, 1990년대에 한국의 도예가에게 자기 낙관을 찍은 고려청자를 주문해 수입한 뒤 자기가 만들었다고 뻥을 친 것. 결국 기사를 본 한국 도예가들의 항의에 모든 것이 발각됐다. 결국 한국에까지 와서 사죄했다.기사.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경주의 도자기 장인 김해익이 고려청자를 재현했다. 그는 이 기술로 2016년 특허를 받아내었다.#

5. 청자기와

파일:external/www.nsori.com/1118_1020_533.jpg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진 대구면 사당리 발굴 고려 청자기와. 출처 기사를 보면 발견 과정이 상당히 극적이다.

청자로 된 기와는 고려시대에만 쓰였으며, 조선대에서는 이미 잊혀진 기술이었다. 조선시대 청기와는 염초(질산칼륨. 화약만들 때 필요한 그거 맞다.) 유약을 발라 구웠기에 고려 청자기와처럼 밝은 녹청색을 띠는 게 아니라 터키석의 밝은 푸른색이나 짙은 청록색을 띤다. 화약 재료인데다 귀한 염초를 매우 많이 쓰기 때문에 고려 청자기와와 달리 비용이 엄청 많이 들었다. 광해군의 영건사업이 대신들에게서 비판을 많이 받은 이유가 바로 광해군이 당시 어려운 국방 상황에 경복궁보다 거대한 모든 인경궁 전각들을 염초가 매우 많이 드는 청기와를 덮도록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파일:external/www.dapsa.kr/2014_04_15-P4157911.jpg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청자 토수.출처
비슷한 조선식 청기와가 회암사지박물관선암사성보박물관에도 보관되어 있다. 이쪽은 짙은 청록색이다.

발굴된 유물을 토대로 청자 기와를 올린 정자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거울못에 세워져 있다.

파일:attachment/고려청자/P2.jpg
거울못의 고려 청자기와 정자의 모습.

개별적으로 파는 곳도 있다. 링크

6. 기타

7. 현대 창작물에서

8. 관련 역사기록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술병의 모양은 참외와 같은데, 위에는 연꽃 위에 오리가 엎드린 모양의 작은 뚜껑이 있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 생략하는데 다른 그릇과 다르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한다.[14]
고려도경[15]
조인규가 일찍이 금칠을 한 자기(磁器)를 그려 바치자 세조(世祖)가 묻기를, “금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그릇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이냐?”라고 하자, 〈조인규가〉 대답하기를, “단지 채색을 입히려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그 금은 다시 쓸 수 있느냐?”라고 하였고 대답하기를, “자기는 깨지기 쉽고 금도 그에 따라 파손되니, 어찌 다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세조가 그의 대답을 칭찬하며 명하기를, “이제부터는 자기에 금으로 그림을 그리지 말고 진헌하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仁規嘗獻畵金磁器, 世祖問曰, “畵金欲其固耶?” 對曰, “但施彩耳.” 曰, “其金可復用耶?” 對曰, “磁器易破, 金亦隨毁, 寧可復用?” 世祖善其對, 命 “自今, 磁器毋畵金, 勿進獻.”]
고려사』권105, 「열전」18 [제신] 조인규 (출처 #1, 출처 #2)
백자는 중국의 정요백자가 천하제일이지만 청자는 고려청자가 제일이다. 다른 곳에서도 만들려 했지만 만들 수가 없었다.
수중금[16]

9. 고려청자 고미술품 목록

9.1. 국가 지정 문화재

9.1.1. 국보

9.1.2. 보물

9.2. 시도 지정 문화재

9.3. 일반 동산 문화재

9.4. 해외 소재 문화재

10. 외부 링크

11. 같이보기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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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송미술관 소장. 현존하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간송미술관의 창립자인 전형필이 이 청자를 구입한 금액은 2만 원으로 당시 서울 시내의 기와집 20채 가격이었다고 한다. 일본인 수집가 무라카미가 그 2배의 가격을 제시하며 팔 것을 권유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이 청자보다 더 훌륭한 자기를 가져오시면 바꿔 드리겠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2] 강진 도요지가 1990년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고 최근 등재 시도중.[3] 백자와 흑유자도 소량이지만 이 시기에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제작된다.[4] 청자 특유의 푸른 빛깔을 말한다.[5] 色이 아니다. 緋를 사용하는 비색은 붉은색 계통으로, 翡色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의 색이다.[6] 상감청자의 파편[7] 서민들도 '녹청자'라는 보급형 청자를 즐겨 썼다.[8] 미적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다. 관상용 자기는 금박에 검은색을 입힌 것부터 형형색색의 성운을 표현한 느낌까지 장르나 종류도 대단히 다양하다.흰색에 매료됐다기보다는 음식물을 보관하는 본질적 연관성과 식욕과 색상학과의 연관에서 사용자의 선택과 도태의 문제로 봐야한다. ex)식욕을 떨어뜨리는 색=파란계열색/편의점의 도시락통이나 라면 용기는 검정이나 흰색이나 채도가 낮은색계열이다. 주황색에서 붉은색까지는 식욕을 돋구는 색으로 정의하고 있다.[9] 한민족도 이와 비슷하게 오랜 옛날부터 백의민족 사례와 같이 흰색을 숭상해온 이유가 이것이다. 순우리말로 '해(日)'와 '흰(白)'은 어원이 같다고 한다.[10] 이는 정요백자가 산화번조로 구워졌기 때문에 흙과 유약 속의 미세한 철분이 산화되어 생기는 현상이다. 원대 경덕진요의 초기백자역시 원료의 미세철분 조정이 (비교적)미숙하여 새하얀 백자가 아니라 청백자가 생산되었다.[11] 백자는 태토와 유약의 조합에 따라 구워지는 온도가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백자라 하면 1200~1300도 사이에서 구워졌다.[12] 조선의 백자는 중국 경덕진이나 일본 아리타보다 상대적으로 Al2O3 함량이 낮고 SiO2 함량이 높기 때문에 1300도가 넘는 온도라면 흙이 녹아 내렸을 것이다.[13] 오전 9시 30분[14] 이때 서긍이 본 것은 초기 청자시기에 해당하는 순수 청자였다.[15] 서긍의 저서[16] 송나라 태평노인의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