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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와 그 이전 왕조들을 비교하는 문서.2. 신라와 비교
신라시대 당시 존재했던 진골을 포함해 8개의 신분제로 있던 골품제가 폐지되고, 신라의 강고한 단계별 신분제가 비교적 느슨하고 간략화되었다.우선 귀족 계급이 진골, 6두품 등 다단계로 나뉘던 귀족 체제를 1귀족체인 세족 즉 귀족으로 축소시키고, 신라의 중류에 해당되는 2단계 계급인 5두품, 4두품 계급을 향리로 만들었다. 평민 또한 3단계이던 체제를 양민과 향·소·부곡민 2단계으로 하고, 천민은 1계급으로 하게 됐다. 물론 고려왕조가 간략화한 신분제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가문간의 격의 차이는 계속 존재했지만 그것이 신라 때처럼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유동적이라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주로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태조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사람들이 세족, 끝까지 도운 병사들의 경우는 중류인 하급 관리 즉 향리층이 됐다. 반면, 중립을 지킨 쪽은 양민이 되고, 반기를 든 쪽은 향, 소, 부곡민 아예 끝까지 저항하다가 포로가 된 사람들은 노비가 됐다. 정리하자면 계급은 귀족 - 향리 - 양민 - 향, 소, 부곡민 - 노비이다.
전왕조에 비해 계급의 숫자가 줄어들어 안정적으로 정리가 된 듯 보이나, 문제는 고려 초만 봐도 구성원들의 신분의 배정이 생각만큼 고르지 못하고, 또한 줄만 잘타면 배정이 이상했기에 신분의 유동이 매우 이상하였다. 그렇기에 본래 성씨도 없고 정체도 불분명한 사람들이 성씨를 받을 때[1] 신분의 배정이 매우 불안정했다.
예를 들면, 전쟁 포로나 반역자 등 노비가 될 사람들이 전답과 노비를 받고 귀족이 된다던지 중립을 지켰다던지 하는 노비가 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전답을 뺏기고 노비가 되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계급의 배정이 매우 엉망이었다. 반면 신라는 꽤 혹독하기 그지없는 골품제긴 해도 대물림되기에 계급의 유동 문제는 없었다. 탈락하면 또 탈락한 계급대로 대물림이다. 이는 신라를 망친 골품제에 근거한 것이다.
신라 때는 화백회의로 대표되는 진골의 경우 권한이 매우 강했다. 그래도 삼한일통의 업적을 자부한 문무왕과 그 뒤를 이어 신라 최고의 철혈 군주였던 신문왕까지는 왕의 권한이 강화되어 진골귀족의 반란에서 안정적이으나 96각간의 난 이후는 왕족들간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왕족들간 반란이 잦아지고 귀족층의 투쟁이 강화됐는데 이런 권력 쟁탈전은 6두품 이하의 하위 귀족이나 지방세력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중앙 권력이 막강하고 그 범위 안에서만 주로 엎치락뒤치락했던 신라 정쟁의 특성상 이후 고려왕조에 비해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은 오히려 적었고 반란이 일어나도 김헌창, 김범문, 장보고와 같이 조기에 진압하는 등, 9세기 중후반 이전까지는 태생이 호족연합체 같은 형태로 시작해 지방세력의 세력이 강하던 고려왕조 초기보다도 중앙의 지방 통제력은 오히려 더 강한 측면도 있었다.
2.1. 신라정통론과 고려정통론
고려왕조는 공식적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를 모두 대등하게 이었다는 역사관을 공식적으로 채택했으며, 그것이 국가의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에서 세 나라를 모두 동시에 천자국의 격으로 설정해 본기(本紀)에 넣었다는 데서 드러난다.[2] 그러나 태조를 비롯한 건국 주도 집단이 고구려계 패서 호족이라는 사실과 고려가 통일신라의 인적 자원과 국토 및 삼한일통 사상을 물려받았다는 현실 속에 고구려와 신라라는 정체성의 두 축은 고려시대에 고구려-고려 정통론과 신라 정통론이 승화되어 서로 엎치락 뒤치락했다.고려 정통론자의 경우는 무신정변을 비판받으면 신라에게 800년대말 종친과 왕족들간 반란이 일어나고 후삼국시대를 연 원흉이라고 질타하고 나당 연합과 이사도의 난 진압 등으로 자주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반대로 신라 정통론자들의 경우는 신라가 만든 황룡사 9층 목탑을 부순 몽골 같은 야만족들의 부마국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원나라보다 송나라가 더 낫다고 한다. 반면 고려 정통론자는 오랑캐라고 이민족들을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싫어 원간섭기를 재평가한다. 본래 신라는 말갈과 왜구 같은 이민족들에 적대적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문무왕의 무덤 이야기가 있다.
고려 정통론자는 고조선 - 고구려(+백제, 신라) - (통일신라) - 고려로 정통성을 형성하고 특히 고조선, 고구려, 고려와 같은 북방 왕조에는 꽤 높은 평을 준다. 고구려와 백제의 남정 정책과 고구려의 북벌, 흔히 남정북벌론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좋아한다. 고려의 삼한일통의 원형이 된 신라의 삼한일통에 대해서는 애매한 자세를 취하는데 최초의 물리적인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 자체는 긍정하나 통일신라의 여러 한계를 비판하며 이 시기를 삼국에서 고려로 정통성이 넘어오는 과도기 정도로 해석하고 고려의 통일을 진정한 민족의 통합으로 설정한다. 반면 신라 정통론자는 고조선 - 위만조선 - (삼국) - 통일신라 - 고려로 정통성을 보는데, 남정북벌에 대해서는 신중한 편이지만, 한족이 아닌 이민족 왕조인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에 대해선 고려 우호론자보다 더 적대적이다. 이런 시각은 대략 삼국사기, 삼국유사로 이어지며 원 간섭기 때 더욱 강해진다.[3]
반면 신라 정통론자들은 고려를 비판할 때 원 간섭기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 상황은 신라 말기 상황보다도 더 최악이고 과거 제도가 붕괴해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또한, 사찰의 대토지화나 귀족들의 대토지화는 지켜져야할 제도인 전시과가 유명무실 할 지경이었다. 이는 녹읍의 부활로 진골들의 토지편입이 심해진 신라보다 더 심각할 정도였다.
왕실의 상황도 다르지 않은데, 왕의 호도 충자 돌림이었고, 제대로 된 묘호나 시호조차도 받기도 어려웠다. 반면 신라의 경우는 말기에 상황이 최악이고 골품제도가 최악이었어도 충의 이름이 아닌 신무, 문성과 같은 독자적 시호를 받을 수가 있었다. 더욱이 공녀의 경우도 본시 고려가 원조이기 때문에 신라의 경우는 서남 해안 일대에 여성까지 당나라에 노비로 팔아넘기는 해적들을 자체적으로 소탕하고 근절했고 관료전이 골품제에 나오는 녹읍을 없애버리고 식읍까지 없애버려 이것과 관련해서 신라 정통론이 불었다. 불교계의 경우도 황룡사 9층 목탑 붕괴를 무능한 고려 왕조가 눈뜨고 지켜봐야했기에 신라 정통론이 상당 부분 불었다. 더욱이 나당전쟁과 달리 여몽전쟁은 그보다 더 심각한 재산 피해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는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를 비롯해 그 당시 삼국이 일원이었던 신라의 전쟁만도 못하였기 때문에 이후 신라 정통론이 불어 닥치게된 계기가 되었다.
조선 왕조는 본시 신라 정통론을 정사에 본격적으로 확립한 국가로 삼국기 이후 바로 신라기로 가서 고려 정통론을 꽤 흔들었다. 실은 조선 왕조도 신라의 장점 못지않게 신라의 여러 문제들을 도저히 지나칠 순 없기에 고려기를 두었다. 조선의 경우는 고려처럼 800년대와 달리 900년대 신라에 집중적인 비판이 모여있다. 심지어는 고구려 정통론을 깨기 위해 조선은 가장 극단적인 신라 정통론을 내세워 신라기 - 조선기라고 해버리고 고려는 생략시켜버린 예도 있다.[4]
예를 들어 현종에 대해 그가 절간에 땅주는 것에 비판했는데 신라의 문무왕도 그걸 하지 않았다고 하며 비판했지만 이내 신라에게도 족내혼과 장보고 모살 사건을 비판한다. 또한 종교의 부패까지도 비판한다. 오히려 고려 성종은 역으로 절간에 땅주길 금했고 무분별한 사찰도 정리했다.
하지만 발해까지 흡수한 첫 나라라서 대광현이 귀순하고, 흥요국도 멸망해 여러 유민들이 또 고려로 가게된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선 발해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온다. 이후 조선 왕조에서도 유득공의 발해고가 나왔다.
사실 조선에서도 신라 정통론에 대해 편협했다는 인식이 있다. 대표적인게 신라 정통론을 주장하던 허조의 주장에 대해 세종이 우문현답으로 답하였다. 또한 한반도의 역대 시조를 모두 모신 팔전을 건립하기도 했다.
다만 위에서 상술한 고구려-고려 정통론과 신라 정통론의 논쟁은 한국사에서 어떤 국가에 더 의미를 두느냐에 대한 논쟁이지 타 국가를 매도하는 주장들은 아니다. 또한 두 개념은 서로 대립하지만 분절적인 성격은 아니기에 삼국사기나 팔전 등과 같이 두 입장을 모두 차용한 경우도 존재하고 사실 고려 조정이나 조선 조정이나 공식적인 입장은 이러하였다. 단지 역사의 무게중심을 신라에 더 둘 것이냐 고구려-고려에 더 둘 것이냐 정도의 차이이다. 애초에 국가 간의 계승 관계나 정통성 등과 관련된 논쟁은 현대인들의 관념처럼 무자르듯 구분할 수 없는 성격이다.[5]
3. 고구려 / 백제 / 발해와 비교
고구려의 경우는 (5부 귀족 - 양민 - 노비)의 계급 체계를 가졌으나 5부 귀족의 경제력은 전답과 노비 등 그 규모가 조상 대대로 세습되면서 고구려 왕권에 버금갔다.[6] 이는 고려 호족들이 하사받은 토지가 식읍밖에 없고 그 경계와 권한이 훨씬 미약해진 것과 대비된다. 고구려의 정치 권력은 5부 귀족의 가문이 독차지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제가회의다. 백제도 비슷한데 백제는 (8성씨 귀족 - 양민 - 천민)의 계급 체계를 가졌으며 백제 귀족들 역시 경제력과 정치 권력이 고려의 호족들보다 더 막대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사암 회의다.[7] 백제의 왕권과 지방 귀족들의 대립은 멸망할 때까지 남아있어서 나당 연합으로 백제 멸망이 가시화되었을 때, 백제 귀족들의 행태를 보면 아주 가관이다. 즉, 고대 사회의 특징상 왕권이 미약하였고 다른 어느 시대보다 귀족들의 권력이 강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96각간의 난과 버금가는 간주리의 난과 해구 연신의 난이 신라보다 일찍 터진다.발해의 경우는 두단위나 되는 우성망족과 49족이라는 귀족제가 생기는데 이 현상은 백제보다 더 심하며 밑은 양민 - 천민이다. 그래서 거란과 전쟁에서 허무하게 각개격파를 당하며 멸망하는데 고려로 귀순하거나 흥요국이 생기거나 양민 혹은 천민에 속한 말갈족이 여진족을 탄생시킨다. 역시 관료전 같은 토지제는 없고 독서삼품과도 보이지 않는다. 인사 발탁도 신라보다 더 세습제 추천제를 택한다.
이것으로 보아선 고려의 상류 귀족층의 구성원은 왕족들과 왕가 종친들이 주도로 하는 신라보단 고구려나 백제, 발해를 본뜬 소위 비왕족 출신들이 주도하는 귀족층과 성씨가 있다는 점. 또한 한 가문이 척신이 된다는 점이 비슷하다. 예를 들어 고구려는 연씨 가문과 백제는 진씨 가문이 척신이 되면 고려는 경원 이씨, 우봉 최씨가 척신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본관제를 처음 입한다. 참고로 본관제는 삼국 왕족들의 전유물이나 비왕족 출신 귀족들에게 본관제가 붙은건 고려가 처음이다. 고려 귀족 즉 호족의 규모는 본시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호족들은 본시 성씨가 없어 한미한 집안에서 크게 출세하였으나 고려 광종의 왕권 강화 이후 매우 축소가 되어 중류층으로 전략하나 이내 문벌 귀족이 형성된다. 왕족의 권한도 왕식렴의 예만 봐도 잠시 신라의 영향이 있으나 이내 고려 광종이 왕족들까지 숙청하며 왕족들의 권한이 축소되나 이후 왕족들도 신라의 영향을 받아 대군과 군이 아닌 공후백 작위를 받게되며 강해지게 된다. 대표적으로 계림공이라고 불리는 고려 숙종의 등장이 예다.
조선조도 고려조 향리가 조선조 사대부로 집권하며 이후 문벌을 형성하는데 이는 신라보단 고구려, 백제 그리고 고려를 본뜬다. 대신에 신라의 영향을 본떠서 왕족과 종친들의 권한이 앞전 고려보다 더 커지고 숫자도 많아진다. 무인정사나 계유정난을 주도한 것도 조선의 왕족이다. 전투 방식도 고려처럼 육군 편중보다 수군청을 만들어 육군과 수군을 나름 분배하는 신라를 계승하기도 했다.
문무왕기 절의 대토지화 금지와 신문왕기 식읍의 제한과 관료전 제도 도입 등은 종교 개혁과 토지 개혁을 상당부분 본떠 조선 왕조는 사찰에 전답을 내리는 것에 대해 중죄에 처했으며, 식읍은 신라 신문왕기 매우 제한했으나 조선 왕조는 아예 폐지시켜버렸다. 물론 신라 역시 효성왕 이후 다시 사찰의 대토지화가 시작되고, 경덕왕 이후에는 식읍의 제한이 완화되고 녹읍까지 부활해 종교 개혁과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려의 경우는 성종과 최승로가 사찰의 무분별한 건립을 금지하는 등 사찰의 대토지화를 억제하고 고려 중후기에 전시과가 붕괴되어 전민변정도감을 세우고 식읍을 나름 제한하는 등 종교 개혁과 토지 개혁에 나름 애를 썼으나 신라의 치세기인 문무왕 - 신문왕 시기에 비하면 크게 나아진게 없고 오히려 더 퇴보하였다. 대체적으로 과거 제도가 있고 율령도 전 왕조에 비해 꽤 법이 체계화 되었고, 여러 행정 기구들이 있음에도 신라와 달리 토지나 종교와 관련된 개혁이 생각만큼이나 무산되었는데 이는 본시 고려의 귀족층들이 백제, 고구려, 발해의 귀족층들을 본떠 형성했기에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기에 무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고려에 귀순한 발해 왕족들도 호족으로 편입되었다.
고려의 경우는 신라와 달리 빈민 구제를 위해 흑창과 의창을 설치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을 딴것이다. 조선도 이를 그대로 이어간다.
종교나 나라 사상은 유교 - 불교 - 도교 총 3개로 이는 고구려 하대기를 답습한다. 신라와 백제는 불교가 중심이고 유교와 도교는 다음으로 둔다. 고로 고려가 신라와 닮은 것은 족내혼. 관료전. 9주 5소경 등 몇개 빼놓고 생각보다 크진 않다. 대체로 행정적인 것은 신라를 답습했다. 족내혼조차도 문벌 귀족들의 등장으로 깨지게 된다. 즉 각기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문화를 각각 3분의 1로 공평하게 나누어 계승 했다.. 단 삼한의 문화들이 하나로 뭉치기보단 보단 꽤 흩어져있다는게 특징이다..
고려 왕조에서 만든 삼국사기만 봐도 삼한 정통론을 주장하여 각각을 세가가 아닌 본기로 격상시켰고 삼국기라고 하지 않고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로 분리시켰다. 삼국사기의 경우는 고구려의 경우는 위진으로 보고 고구려를 위나라로 보고 고려를 진나라로 보았고 신라의 경우는 촉나라와 백제의 경우는 오나라로 보았다. 고구려가 위나라면 고려는 진나라라는 뜻이고 이후 여말선초에선 신라 정통론이 동국사략을 통해 자리잡히게 된다.
왕들간 혼인도 본시 고려는 족내혼과 족외혼이 상존하는데 문벌귀족 시대가 도래하며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족외혼이 주류를 이룬다.
고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독서삼품과를 한 단계 끌어올린 과거제를 시행했고 또한 관료전도 전시과로 바뀌게 되는데 전시과는 뗄감도 주고 토지를 긋는 경계도 더 세밀해진다. 대신 5품 공음전이 함정에 음서가 5품까지 허용되어 과거제나 전시과가 매우 불안정하게 된다. 더욱이 붕당의 시초인 당여를 만든 원흉인 지공거가 도입되는데 고려 왕조에나 있던 유일의 인사 발탁 시스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나라에게 쌍성총관부와 정동행성을 설치당하고 외세의 압제를 받은 첫번째 단일 왕조이자 이는 고조선 멸망 뒤 한사군과 고구려, 백제 멸망 뒤 웅진도독부, 안동도호부와 더불어 세번째 일이다. 고려의 이유는 고려는 오랜 문치주의로 국방이 매우 엉망으로 고려사 병지가 가장 많이 욕을 먹는다. 무인들에 대한 대접도 바닥에 무신정권이 들어서도 무인들이 숙청당하고 유배나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지는데 이는 무과가 없었고 무인 권력자들도 실은 무인들에 대한 대접과는 딴판인 인간들이었다. 옛 삼국 군인들 못지않게 대접이 너무 엉망에 여몽전쟁도 야전보단 공성전으로 바뀌었다. 말기는 전쟁이 늘 일상이었고 무인 숙청은 더 질적으로 떨어졌다.
또한 신라의 독서삼품과를 통한 능력제를 더 확대해 과거제로 전환해 능력제를 도입했던 나라가 고려이고 우리가 아는 과거제는 곧 고려가 맨 처음 도입한다. 더욱이 조선 왕조 노비변정도감의 시초는 노비안검법인데 노비에 대한 판별을 처음했던 것도 고려이다. 또한 과전도 본시 전시과에 영향을 받았고 전시과 또한 관료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행정 기구의 경우도 왕의 비서라고 불리는 신라의 집사부를 본떠 이후 고려는 추밀원으로 고치게 되는데, 이는 조선 왕조의 승정원과 비슷하다. 비리와 부조리를 근절하기 위해 만든 어사대의 경우는 신라와 발해의 사정부 중정대를 이어 만든다. 이는 조선 왕조에 사헌부와 비슷한다.
고려에서도 화백회의, 정사암회의, 제가회의처럼 신하의 의결을 거쳐 왕의 존립과 폐위를 시키는 시스템이 있는데 이 시스템은 대체적으로 도병마사와 이후 중방, 도평의사사 등이 있다. 이후 조선 왕조에선 의정부와 삼사가 승인하여 존립과 폐위를 결정했다. .
그나마 율령 체제고 무엇이고 다 박살나고 해적과 도적들이 창궐하는 무법천지의 극치였던 후삼국시대와 비교하자면 나은게 고려이다(...).
삼국사기도 각각 본기를 두어 삼국의 분극론이 꽤 자리잡아 고려는 어제는 신라 오늘을 고구려 내일은 백제와 이후 삼한 정통론을 중시했고 발해 귀속론을 통해 남북국론의 영향도 자리잡았던 나라이다. 그래서 외기긴해도 말갈과 발해를 삼국유사에 같이 넣었다.
대체로 고려는 후삼국시대, 남북국시대, 삼국시대랑 비교해야 하는데 일단 녹읍을 폐지하여 역분전 체제로 돌리고 노비안검법과 4색공복을 실시한다.
무엇보다 고려의 경우는 이전 후삼국시대와 삼국시대랑 달리 묘호를 쓰게되는데 이것의 시초가 고려다. 보통 광종보단 시호인 대성왕이라고 불러야 하고 성종보단 시호인 문의왕이라고 해야하나 이전에 이런 시호만 쓴 건 과거 후삼국시대나 삼국시대에 쓰던 것으로 외왕내제 틀이 안잡혀 있으니 그런 것이고, 중국과는 차별화된 것으로 고려 때에 가서야 묘호를 붙이게 되고 이는 왕권 강화와 호족 제어에 있다.
과거제의 경우도 본시 세습이나 추천보단 능력을 통해 뽑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이전부터 귀족들과 호족들은 자기 지역과 기준에 따라 무예에 능한 자와 글 읽는 자들을 선발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강할지 몰라도 전국구에 취약하고 중앙 귀족은 수도에 인재를 뽑기에 지방 인재들을 뽑지 않아 전국구에 취약하다. 이런 건 경쟁력을 매우 떨어트리기 때문에 문무에 능한 사람이 드물게 나온다. 그래서 과거가 시행되었다.
역분전 체제의 경우는 인품과 공로 기타 등등으로 토지를 분배하는 것인데 이후 광종의 호족 숙청으로 경종기에 전시과 체제로 돌아가며 녹읍은 역분전 체제 이후 사실상 의미가 없어진다. 즉 녹읍과 식읍 등을 통한 징발과 대토지화로 땅을 강탈당한다거나 무연고자가 전시대보단 줄어들어들었다
노비안검법이라는 건 본시 전쟁 포로나 빚을 빌려 못갚아 노비가 된 사람들인데 이것을 해버려서 마침내 호족들의 힘을 빼버린다. 대체로 후삼국시대는 내란기라서 고려 초에는 전쟁 포로들이 많은데 전쟁 포로의 경우도 본시 같은 병사들에게 위해를 가하던 적으로 싸운 병사들이었으나 이런 논리로 치면 최종 책임자는 호족들이고 호족들 중에도 내란 중 탈영병이거나 전쟁 포로들 또한 많으나 단지 기회를 잘포착해 호족 자리 먹은 자들도 많다.
고려 왕조의 경우는 과거제의 도입과 국자감의 설치와 전시과의 설치로 유교 사상을 상당 부분 이어받았는데, 특히나 고려에서 발표한 시무 28조의 경우는 신라보다 더 불교 개혁에 앞장섰던 나라이다. 대체로 삼국사기에선 신라의 멸망을 골품보단 오히려 불교와 같은 종교 문제로 봤다.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이차돈의 죽음으로 오히려 종교에 대한 황족들과 귀족들의 배타성을 비판했으나 조선 왕조에선 다시 신라의 멸망을 불교와 같은 종교 문제로 봤다.
이로 인해 전 시대보다 제도적으로 크게 달라진 게 많았다. 즉 내란의 종식과 통일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고려의 주 정통성이었다.
[1] 이를 사성이라고 한다.[2] '경주 김씨 김부식의 역사관'일 뿐이라고 절하하려는 시도도 있지만 이 책은 분명히 관찬사서고 국왕인 인종과 당시 고려 정권이 나라의 역사서로 공식 인증한 책이다.[3] 한편 신라정통론자의 경우에도 두 분류로 나뉘는데 전자는 삼국시대부터 신라를 정통 왕조로서 설정하는 시각이고 후자는 삼국시대에는 특정 국가가 정통성을 가지지 못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야 정통 왕조가 되었다는 시각이다. 전반적으로 후자가 우세했으며 이러한 근거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신라만을 본기에 수록하지 않았고 조선시대의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을 저술하며 이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4] 조선이 고려를 역성혁명으로 무너뜨렸기 때문에 고려를 역사에서 강조하기 거북했고 그러한 이유로 고구려보다도 신라가 더욱 중시되었다. 또한 어찌되었든 한반도의 최초 단일 국가이기도 했고 조선이 숭상하던 유학 또한 신라 하대에 최치원을 비롯한 유교의 성인들이 등장했기에 조선은 신라를 긍정했다.[5] 이러한 연유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냐 신라를 계승했냐는 논쟁이 무의미한데 이는 마치 부모 중 한쪽을 선택하라는 말과 같다. 고려는 두 국가를 모두 계승했고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계승 의식은 백제까지 포괄한다. 단지 상술했듯 자주성, 호전성이 강조될 때에는 고구려정통론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었고 당나라 후당과 송나라 등 중국 과거 왕조와의 관계, 안정성을 추구할 때에는 신라정통론으로 조금 더 기울었을 뿐이다.[6] 실제로 고구려의 왕권은 흔한 이미지보다 약한 적이 많았다. 우리가 아는 그 이미지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재위 시절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7] 단 고려에도 귀족 정치의 특징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 잔존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