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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
<colbgcolor=#bf1400> 경희궁 회상전 慶熙宮 會祥殿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 |
건축시기 | 1620년 (창건) / 1928년 (이건) / 1936년 (소실) |
<colbgcolor=#bf1400> 회상전. 대한제국 말에 촬영한 것으로, 잡초가 무성하고 행각의 벽체가 없는 등 주변이 많이 황량하다. |
CG로 재현한 회상전 |
[clearfix]
1. 개요
경희궁의 침전으로, 왕과 왕비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로 회상전 동쪽에 위치한 융복전(隆福殿)이 있었다.전각의 정확한 주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 편이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熙宮志)》에는 ‘융복전이 경희궁의 정침(正寢)이며, 회상전은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라 적혀있고, 《궁궐지(宮闕志)》에는 회상전이 궁궐의 정전(正殿, 여기서는 내전의 정전을 의미한다.)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만 보면 왕의 침전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비와 왕비들이 이 곳에서 승하하거나 자녀를 출산했다는 실록의 기록을 볼 때, 꼭 임금만 이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를 종합적으로 볼 때, 주인을 정확하게 정하지 않고 왕과 왕비가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이름 뜻은 '상서로움(祥)이 모인다(會)'이다.
2. 역사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어졌으며 침전으로 기능을 처음 시작한 것은 1624년(인조 2년)부터이다. 1693년(숙종 19년)에 약간의 수리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침전의 역할을 했다.그러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불 타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다. 순조가 승하한 이후 즉위한 왕들인 헌종과 철종은 경희궁보다는 창덕궁에 오래 머물면서 회상전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할 때 경희궁 건물들의 90%를 헐어다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쓰면서 경희궁은 궁궐로서의 역할이 끝났고 회상전 역시 침전의 기능을 잃었다. 다만 운 좋게도 건물 자체는 숭정전 · 흥정당 · 정심합 · 사현합 · 흥화문 등과 함께 살아남았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일기》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1]가 들어서면서 1915년 4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28년에 남산 기슭에 있던 일본식 사찰 조계사(曹溪寺)[2]에 팔려 옮겨가 주지 집무실이 되었다가 1936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경복궁 중건일기》
<colbgcolor=#bf1400> 회상전, 융복전 자리에 일제가 만든 방공호 |
독립 이후 2000년대에 방공호를 철거하고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비용 문제로 그대로 보존했고, 현재에 이른다.
3. 구조
<colbgcolor=#bf1400>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 내전 영역. 보라색 원이 회상전, 주황색 원이 융복전, 초록색 원이 집경당이다. |
공통적인 부분은, 1층[3]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각 기둥을 세운 뒤, 쇠서[4]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짓고,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또 건물 앞면엔 돌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폭이 좁은 돌판을 얹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고 돌 판 가장자리엔 나무로 만든 난간을 설치했다. 또 전각에 들어갈 때 오르는 계단도 나무로 만들었는데 《의궤》엔 3개로 되어있으나 사진엔 1개만 놓여있다. 내림마루는 양성바름 한 뒤 그 위에 잡상을 올려 격식을 차렸다.
- 〈서궐도안〉 및 《의궤》를 보면 지붕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 바로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형태인데, 회상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드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 왕과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5]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6]
다만 위에 있는 회상전의 사진을 보면 용마루가 있다. 고종 시기 허허벌판이 된 경희궁 터에 얼마 안 남은 건물들을 기존의 용도와는 다르게 사용한 것이 꽤 있었는데[7] 회상전도 침전이 아닌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때 용마루가 생긴 듯 하다.
4. 부속 건물
4.1. 집경당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
<colbgcolor=#bf1400> 경희궁 집경당 慶熙宮 集慶堂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 |
건축시기 | 1620년 (창건) / 1868년 (철훼 추정) |
<colbgcolor=#bf1400> CG로 재현한 집경당 |
집경당은 회상전의 부속 전각이다. 회상전과는 무일합(無逸閤)이란 별실로 이어져 있었으며, 남향한 회상전의 서남쪽에 세워져 동향한 모습이었다. 원래 이름은 예연당(蘂淵堂)이었다.숙종은 회상전에서 태어난 직후, 세자 시절 이 곳에서 머물렀으며, 경종이 세자이던 때 천연두를 앓았을 때도 여기서 거처했다. 경종이 회복하자 숙종은 그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경사(慶)들이 이 곳에 모인다(集)’는 뜻으로 집경당(集慶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조는 신하를 만나거나 경연을 하는 등 편전으로도 사용했고 여기서 승하했다. 1829년(순조 2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년 뒤 재건했으나 1860년대 중반,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경희궁 철거 때 헐려 사라졌다.
〈서궐도안〉에 따르면 정면 4칸, 측면 3칸이었고 《의궤》에 따르면 정면 5칸, 측면 4칸이었다. 1층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에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네모난 기둥을 세운 뒤, 쇠서[8]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짓고,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한 뒤 그 위에 잡상을 올려 격식을 차렸고, 《의궤》의 묘사를 기준으로 정면 5칸 중 양 끝 가장자리는 전면 창호를 달았으나 가장자리 칸과 출입문 사이의 칸들은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고 나머지 부분은 벽으로 막았다. 출입문은 다른 침전과 달리 가운데 3칸이 아니라 1칸만 내었다.
간혹 고종이 1892년 7월에 이 곳에서 외국 공사들을 접견했단 이야기가 있는데 # 당시 고종은 경복궁에 머물고 있었고, 경복궁에도 같은 이름의 전각이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듯 하다. 단, 그 집경당은 ‘輯敬堂’이라 한자가 다르기에 원문의 ‘集慶堂’이 오기인 지, 아니면 따로 건물이 있었는 지 아직까진 정확하게 모른다.
확실한 것은 경희궁의 집경당은 아니다. 우선 위에 적었던 《경복궁 영건일기》의 내용에서 경희궁의 남은 건물 중 집경당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860년대에 헐린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설령 남아있었다 해도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허허벌판이 되어 경작지로 만들고, 뽕나무 숲을 일군 뒤, 창고와 양잠소까지 세운 옛 궁의 건물까지 굳이 가서 외국 공사를 접견할 일이 없다.
5. 여담
- 1626년(인조 4년) 인조의 어머니 계운궁부인 구씨가 이 회상전에서 사망했으며 1661년(현종 2년) 숙종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 1674년(현종 15년) 효종의 왕비(당시엔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가, 1680년(숙종 6년)엔 숙종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이 건물에서 승하했다. 마지막으로 회상전에서 눈을 감은 사람은 순조이다.
- 2017년 1월, 회상전을 촬영한 흑백 사진이 처음 공개되었다. 맨 위의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인데, 대한제국 말기에 활동했던 미국인 선교사 아서 G. 웰본(1866 ~ 1928)과 새디 웰본(1872~1925) 부부의 손녀인 프리실라 웰본 에비가 2016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여 알려졌다.#
[1]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했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2] 지금의 조계사와는 이름만 같은, 전혀 다른 절이다.[3]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4] 소 혀 모양의 부재.[5]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6]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이거 아니다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7] 대표적으로 숭정전을 장대(將臺)로 활용했다.[8] 소 혀 모양의 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