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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archiv_Bild_101III-Bueschel-090-39,_Russland,_Grenadiere_der_Waffen-SS_beim_Vorgehen.jpg
1942년 12월 22일, 소련 영토에 진입하려는 바펜-SS 기병사단 척탄병들과 3호 전차
날짜
1942년 12월 12일 ~ 23일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스탈린그라드 남서쪽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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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병사 115,000명
전차 329대
대포 1,133문
항공기 220기
병사 124,000명
전차 211대
대포 852문
항공기 500기
피해규모
미확인 3,700명 사망
10,874명 부상
1,086명 실종
결과
소련군의 승리
영향
독일 국방군의 제6군 철수 지원 실패

1. 개요2. 과정
2.1.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군2.2. 돈 집단군의 편성2.3. 구원 작전의 시작2.4. 소련군의 대응 : 소(小) 토성 작전2.5. 폭풍, 사그라들다 : 만슈타인의 퇴각2.6. 남부집단군의 재편
3. 의의

[clearfix]

1. 개요

독소전쟁중 1942년 12월 12일부터 23일까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 지휘 하에 벌어진 작전. 스탈린그라드에 펼쳐진 독일 6군에 대한 포위망의 돌파를 목표로 벌어진 혈전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실패로 끝나고 말면서 동부전선의 향방을 갈라놓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마지막을 알린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2. 과정

2.1.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군

42년도 하계공세, 즉 청색작전을 시작한 독일군의 주력인 남부집단군은 전역 개시와 함께 A집단군과 B집단군으로 양분되었다. A집단군의 임무는 캅카스로의 진격을 통한 소련의 유전 지대 확보 및 산업 장악에 핵심이 있었고, B집단군의 임무는 소련군의 진입을 차단할 수 있는 병목 지점이자 볼가 강 일대의 수로를 통제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여 캅카스로 진격하는 A집단군의 배후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B집단군의 중심이 된 것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독일 6군과 헤르만 호트가 지휘하는 4기갑군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 당도한 독일군은 소련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며 축차투입과 축차소모를 반복했는데, 전황은 11월 말부터 급변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 약체인 루마니아군에 의해 보호되고 있어 상대적으로 취약하기 짝이 없는 독일 6군의 양익을 대대적으로 포위하기 위한 천왕성 작전을 펼쳤고, 이 공세에 루마니아군이 무너지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혈전을 벌이던 독일 6군과 4기갑군의 일부, 그리고 약간의 루마니아군은 소련군의 두터운 포위망 내에 갇히고 말았다.[1]

6군은 스탈린그라드 일대로 진군하는 독일군 B집단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는 정예부대였고, 6군이 붕괴하는 것은 동부전선에서의 균형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는 급박한 사태였다. 이 시점에서 히틀러가 뽑아든 카드는 최고의 전술가이자 명장으로 이름 높은, 프랑스 침공의 기획자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2.2. 돈 집단군의 편성

히틀러는 초기에 항공보급을 통한 구원을 목표에 두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군단급 병력이 포위되었던 데미얀스크와 달리 한 개 야전군 규모 병력을 항공으로 보급한다는 것은 거의 망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히틀러는 전선 남서부의 돌파를 통해 포위망을 돌파, 6군을 구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고 알려져 있다. 허나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히틀러의 의중과는 차이가 있는 결과물이었다. 히틀러가 원한 것은 궁극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스탈린그라드 일대에 갇힌 B집단군의 주력인 6군에게 증원 병력을 파견해 1943년도에 펼쳐질 하계 공세에 있어 스탈린그라드를 공세의 지탱점으로 삼는 것이었다.

하여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이 임무를 위해 돈 집단군(Heeresgruppe Don)을 편성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치른 이후 자신이 지휘하던 11군과 함께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종군하던 만슈타인은 급히 남부전선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쓸 수 있는 가용자원은 척박했다. 애초에 거대한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부족한 독일군이었던지라 남은 전력 대부분을 전선 유지에 투입하기에도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일단 있는 자원을 전부 긁어모아 집단군을 편성, 본격적으로 6군 구출 작전을 설계했다.

본래 겨울폭풍 작전을 위해 차출될 예정에 있던 것은 48장갑군단, 57기갑군단과 2개 기갑사단, 4개 보병사단, 그리고 소수의 공군 야전사단[2]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서 긴급 이동한 제6전차사단, A집단군에서 배속변경한 제23전차사단이 더해졌으며 6군 우익을 담당하던 루마니아 4군 일부와 포위망 밖에 있던 4기갑군 일부가 추가될 예정이었다.

뒤늦게 오룔에서 넘어온 17기갑사단도 있었는데, 1942년 10월 기준으로 17기갑사단이 가용한 전차는 단 30여대 뿐이었고 보유한 트럭 중 1/3은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을 정도로 17기갑사단은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단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만슈타인에게는 그나마도 아쉬운 병력이었기에 17기갑사단까지도 긁어모아 포위망 돌파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집단군의 선봉으로 티거를 보유한 503중전차대대를 배치했다.

집단군이라지만 이름만인 집단군, 실질적으로는 고작 군단 내지는 준 야전군 규모에 불과한 돈 집단군. 그리고 만슈타인은 그 집단군을 이끌고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시작했다. 물론 만슈타인은 돈 집단군의 공세만으로 6군을 구출해 내는 것이 가능하리라곤 보지 않았을 뿐더러, 히틀러가 내린 임무, 즉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해내 최종적인 하계 공세의 지탱점을 마련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만슈타인은 겨울폭풍이라는 이름의 작전만이 아닌, 천둥이라는 이름의 작전을 별도로 수립했다. 천둥이라는 암호에 맞춘, 6군과 돈 집단군의 양면 공세를 통한 포위망의 돌파를 목표로 삼은 작전이었다.

2.3. 구원 작전의 시작

12월 12일, 마침내 돈 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스탈린그라드까지 최단경로인 베르흐네-쿰스카야 발 가도가 아닌 남부 코텔니코보 방면에서 출발하여 북동진 하는 사이 48기갑군단이 주축인 홀리트 분견군이 측면을 보호하면서 일정지점에 도달하면 파울루스에게 양동작전을 명령할 계획이었다. 3개 전차사단으로 편성된 호트 기갑집단이 선봉을 맡았다. 그 중 최선봉에 나선 제6전차사단이 소련 제2근위군을 돌파하면서 양단해버렸다. 이후 제17, 23 전차사단이 양단된 소련군을 추격섬멸에 나섰다. 이에 스타브카는 근처에 있던 제51군으로 하여금 구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최약체였던 루마니아 제4군이 제51군을 틀어막는 기적을 만들었다! 결국 소련 제5충격군까지 동원되었지만 그마저도 뒤로 밀리고 말았다. 제6전차사단의 전진이 둔화되었으나 제23전차사단이 우측방에서 돌파해 들어갔고 결국 12월 20일 제6전차사단이 스탈린그라드 남부 50km까지 접근하는 전과를 달성했다.

돈 집단군의 선전에 힘입어 제6군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물자와 병력이 현저히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제21군의 압박을 밀어내고 마리노프카를 사수하면서 한 번 더 버텼다. 스탈린그라드에 갇혀 있던 독일 6군은 희망에 불타 외치기 시작했다.
"Der Manstein kommt!(만슈타인이 온다!)"

2.4. 소련군의 대응 : 소(小) 토성 작전

하지만 소련군의 반응은 신속했다. 공세를 확인한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포위망의 돌파가 우려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즉각 깨달았고, 스탈린에게 병력의 신속한 재배치를 제안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와 스탈린은 초기에는 병력 재배치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5충격군을 지휘하던 예레멘코 등 현장에서도 병력의 재배치를 요구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결국 병력의 재배치에 동의하고 신속하게 증원군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12월 15일, 겨울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지 3일만에 병력의 증편이 결정났다. 본래 포위망의 증강에 투입될 예정이던, 로디온 말리놉스키가 지휘하는 2근위군의 투입이 결정되었다. 여기에 기존의 공세 계획이던 토성 작전을 소 토성 작전(Операция «Маленький Сатурн»)으로 개편하여 돈 집단군의 구원 시도 자체를 봉쇄하는 동시에 대대적인 반격을 펼친다는 전략이 확정되었다.

12월 16일, 소련 1근위군과 3근위군, 그리고 6군은 돈 집단군과 홀리트 분견군의 좌측면을 보호하고 있던 이탈리아 8군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고 18일에는 일부 지점에서나마 이탈리아군이 형성한 전선에 구멍을 내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 8군은 약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예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산악군단을 주축으로 한 병력이었고, 특히 산악군단의 경우 기존 작전 지역 등을 산간지역 일대 등으로 상정한 덕분에 소련의 동절기 기후에도 투혼을 잊지 않고 용맹을 발휘했지만, 심각한 동계 장비 부족 및 늘어질대로 늘어진 보급선 덕분에 턱없이 모자랐던 보급품, 예비대로 투입될 수 있는 병력의 부재 등의 악재가 겹치며 결국 전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악사이 강을 건넌 독일군에 대해서는 4기계화군단과 13전차군단이 반격을 감행해 독일군의 공세탄력을 흡수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 호트 기갑집단은 기적의 분투를 펼쳤으나 압도적 수적 열세는 분명했고 때마침 악화된 기후 사정까지 겹치면서 전반적 공세탄력은 심각하게 둔화되었다. 12월 19일에는 독일군의 야전 공항이 있는 타친스카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감행되면서 루프트바페의 활동마저 위축되는 상황에 이르른 판이라[3] 만슈타인은 지속적인 공세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6군에게 신속하게 돌파작전에 조응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에도 불구하고 6기갑사단이 스탈린그라드로부터 고작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한 만큼, 이러한 양면 공세를 통한 돌파 가능성은 결코 희박하지만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만슈타인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파울루스는 지난 몇달간 수십만의 피를 흘리며 점령, 방어한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는 것은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에 반하는 것으로 보았고, 게다가 제6군 참모장 슈미트까지 잔류를 주장하였다. 결국 파울루스는 30km지점까지 진격을 요청하였고, 답을 받은 만슈타인은 직접 히틀러에게 철수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12월 18일 히틀러는 6군의 돌파 작전을 불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파울루스는 결국 만슈타인의 돌파 요구를 거부하고 스탈린그라드에 잔류했다.

이 결정에서 하나의 떡밥이 나오는데, 연료와 탄약 및 병력 부족으로 6군의 돌파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을 들어 만슈타인이 어차피 구출이 어려워진 6군을 버리고 6군 사령관인 파울루스에게 작전 실패의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해석은 자유지만, 예비대가 사실상 전무한 만슈타인의 입장에서도 스탈린그라드까지 50킬로미터 남겨둔 지점까지 진격한 이상의 공세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파울루스의 의지 부족이 작전 실패의 원인이라는 주장에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긴 하겠다고 말할 순 있다.

다만 1달가량 고립되어 제대로된 보급을 받지 못해 차량은 연료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말은 전부 도살한데다가 부대전체가 기아상태인데 최고사령관은 절대사수를 명령하고 직속상관은 도보로 적 부대를 돌파해서 눈보라와 50km의 깊은 눈밭을 이동하라고 조언한다면 누구나 고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생각해야 한다. 6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파울루스가 돌파요구를 받아들여서 돌파 시도했어도 6군은 일부만 살아서 탈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당시 스탈린그라드의 기아상태를 짐직할 수 있는 예시는 아래와 같다.
차이츨러 장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굶고 있는 병사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식사량을 그들수준으로 줄였다. 알베르트 슈페어에 따르면, 그는 몸무게가 2주도 안 되어 22파운드가 줄었다.[4]
2주만에 체중이 10kg이 줄어들[5] 식사량으로 1달이상 생활한 사람에게 50km 이동도 아니라 50km 전선 돌파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이렇게 보면 설사 만슈타인이 돌파를 완료해서 6군에 합류했더라도 과연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걸어나올 능력이 있었는지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5. 폭풍, 사그라들다 : 만슈타인의 퇴각

12월 19일 최종적으로 6군이 돈 집단군과의 연결 작전에 임하지 않으면서(혹은 못하면서) 구출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고, 독일군 기갑부대의 측면을 놀라운 투혼으로 방어해 낸 루마니아 4군도 거의 붕괴 상태에 도달했다. 게다가 제6전차사단과 17전차사단 사이로 소련의 제5충격군이 밀고 들어왔다. 더욱이 궤멸 직전이었던 제2근위군이 전열을 정비해 호트 기갑집단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이 상황에서 작전을 계속한다면 돈 집단군은 물론 코카서스까지 진격한 A집단군까지 전부 몰살 당할 것이 자명했기에 만슈타인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12월 22일 호트의 기갑집단은 또 한번 투혼을 발휘하면서 기어코 스탈린그라드 남부 35km지점까지 진격했지만 그 이상의 분전은 불가능했다. 결국 12월 23일 만슈타인은 돈 집단군에게 최종적인 후퇴 및 치르 강 남단에의 집결을 지시했고, 최종적으로 12월 24일을 기준으로 돈 집단군 산하 병력들은 겨울폭풍 작전 기간 동안 돌파한 100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그대로 돌아가 출발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소련은 퇴각하는 돈 집단군을 끈질기게 쫓아갔다. 독일 4기갑군을 소련 51군이 추격했고, 3일 간의 공세를 통해 루마니아군의 방어선을 분쇄하면서 독일군은 서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했다. 홀리트 분견군의 경우 그럭저럭 치르 강 일대에서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탈리아 8군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생긴 로스토프 일대의 돌출부를 방어하기 위해 급히 물러서야 했다. 결국 소련군은 호트 기갑집단을 악사이 강 너머까지 밀어냈고, 치르 강 일대의 독일군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2.6. 남부집단군의 재편

만슈타인의 구원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스타브카는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에 다시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42년도 동계 공세안을 가다듬을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울 폭풍 작전의 의미는 다른 곳에 있었다. 소련군은 본래 토성작전을 통해 로스토프에 먼저 도달하여 17군, 1기갑군, 4기갑군을 전부 코카서스에 가둬 버리려던 계획이 있었는데 독일군의 공세로 틀어져버린 것이다. 워낙 거대한 규모의 군대가 포위망 안에 있었기에 이를 감시하며 A 집단군을 전부 포위하는 것은 소련군의 능력 밖이었고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는 적을 분쇄하는 소토성 작전으로 계획을 변경하게 된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구원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503 중전차 대대를 증원받은 4기갑군과 6기갑사단을 증원받은 홀리트 분견군의 눈물겨운 방어전으로 1기갑군과 4기갑군의 잔여병력을 코카서스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다만 17군은 히틀러의 강력한 주장으로 쿠반 반도 교두보에 남게 된다.

연이은 분투에도 불구하고 홀리트 분견군과 4기갑군이 계속 밀려나자 독일군은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보로네시에 자리잡은 B 집단군 휘하 2군과 프레터-피코 분견군을 추가해 남부 집단군을 새로 편성하여 하르코프에는 란츠 분견군, 우익에는 4기갑군, 도네츠 강에 1기갑군 [6], 미우스 강에 6군[7]을 재배치하여 적의 선봉을 어느정도 꺾는데 성공했고 곧바로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3. 의의

최종적으로 소련군은 결국 독일군의 야전급 단위부대이자 남부전선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던 6군을 소멸시키며 남부전선에서의 균형추를 소련군 쪽으로 크게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겨울폭풍 작전에 나선 돈 집단군의 분전을 통해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질 전력의 공백은 잠시나마 늦춰질 수 있었고, 이 늦춰진 공백의 틈을 타 코카서스 일대로 진격하던 A집단군이 철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남부전선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1] 여기에 크로아티아군 1개 연대 규모가 함께 갇혔다.[2] 헤르만 괴링이 공군 인력의 차출을 피하기 위해 공군 산하 병력들로 편성한 지상 사단.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과는 달리 형편없는 장비와 낮은 훈련 수준으로 인해 실질적인 전력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3] 단지 기세 문제만도 아닌게, 이 공세 와중에 독일군은 가용했던 수송기 전력의 10% 가까이를 상실해야 했다.[4]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2012년, 470페이지[5] 게다가 병사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전투 및 생활을 해야 했기에 상태가 더 안좋았을 것이다.[6] 코카서스에서 탈출한 병력과 프레터-피코 분견군을 합쳐 재편[7] 홀리트 분견군을 재편